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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②

 

말걸기님의 [결투 ①] 에 이어서.

 

 

 

등을 맞대고 섰다. 그의 등이 따뜻한 것은 내 등이 식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순간에는 냉정해야 하는 법이니까 좋은 징조임에 틀림없었다. 저쪽에 듬성한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 있었다. 돈을 받지도 않았는데 배심원을 노릇을 하고 있었다. 구경거리를 준 내가 그들에게 돈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영감은 약속한 시간이 다 왔음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포기할 기회를 준다고 했다.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음을 통보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보석 세공업자는 시작을 알렸다.

“하나!”

나는 오른발을 옮겼다. 다섯에 오른발이 걸리도록.

지난 금요일이었던가. 아내는 오른쪽 발가락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리며 창가에 몸을 기댄 채 희미한 미소를 띠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진 표정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의도했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였다. 그 소리에 아내의 그 표정은 흔적도 없어졌다. 나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즘 와서 쓸데없는 외출이 잦아졌다느니 내 앞에서는 통 웃지도 않고 특히 내 눈을 피하고 있다느니 등등. 아내도 지지 않았다. 부엌에 빵이 떨어지지 않은 날이 있느냐고 했다.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했고 아내가 그를 만나러 외출을 한다는 걸 알고 있다고 했다. 그 그림이며 방금 전 그 미소며 전부 그가 준 걸 안다고 했다. 아내는 딸의 새 구두를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알고 있느냐고 했다. 언성이 높아졌다. 둘 다 흥분했고 결국 그녀는 있었던 일들을 잔인하리만큼 당당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녀의 상세한 묘사는 나의 상상력 이상이었다. 그와 관계를 맺는 모습은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미용실에서 파마하는 모양, 머리에 기계를 씌운 모양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는 내 몸에 손 한 번 대지 않는다구요!”

어이가 없었지만 사실인 것 같았다. 지난주에 르몽드지에 실렸던 기사가 생각났다. 해외 토픽 기사였다. 동쪽 나라에 어떤 화쟁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림을 팔지 못해 가난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돈을 벌었다. 그의 아내는 대낮에도 남자들을 데리고 왔다. 그 화쟁이는 옆방에서 아내와 낯선 남자를 엿보기도 했다. 아내가 남자를 데리고 오기 전에 돈을 쥐어 주며 그를 내보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화쟁이는 종일 술을 마시며 둘도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둘”

나는 사뿐히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오른손은 총을 가볍게 쥐고 어깨 높이까지 올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아내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게 보이려 했다. 많은 관중을 상상했다. 모두가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손에 쥔 총에 눈을 고정시켰다. 한쪽 편에서 움직이는 건 경대 위의 표적에 불과했다.

나는 검은 턱시도와 중절모 차림이었다. 구두도 광을 내어 신고 있었다. 이런 날씨에 어울리는 망토도 잊지 않았다. 누구의 최후든 그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표정도 근엄하게 지었다. 나의 옷차림은 중후하면서도 깔끔했다. 최후를 위한 싸움이 쓰레기를 치우는 일과 같을 수는 없었다.

나의 아내를 설득하는 게 식은 죽 먹기와 같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요일 아내는 외출을 했다. 그를 만날 거면서 아이는 왜 데리고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맨정신으로 아내와 딸을 기다릴 수 없어 술을 마셨다. 잠이 들었었는데 아내와 딸이 들어오는 소리에 깼다. 딸은 피곤해 보였지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를 보자 웃으면서 달려와 가슴에 안고 있는 인형을 보였다. 내가 선물했던 장난감들과는 달랐다. 과장된 눈과 다리를 가진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고양이 다와야 하는데 사실 그 인형은 고양이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그 모양이 너무 우스꽝스러웠지만 딸에게는 티를 내지 않았다. 딸은 자랑하면서 그 인형의 이름이 ‘가필드’라고 했다. 나는 그 이름이 낯설었다. 딸에게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느냐고 물었다. 딸은 그 인형 이름이 원래 ‘가필드’라고 했다. 이름을 짓는데 원래부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인형의 이름은 주인이 지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딸은 얼굴이 조금 일그러지면서 또 다시 그 인형의 이름은 ‘가필드’라고 했다. 나는 야단치듯 인형의 이름을 다시 지어 주라고 했다. 남이 지어 준 이름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빤 아무것도 몰라! 얘는 ‘가필드’예요, ‘가필드’!”

딸은 엄마가 그랬듯이 소리를 질렀고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언젠가 딸에게 읽어 주었던 동양의 옛날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홀아비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돈 때문에 딸을 바다 밑 괴물에게 팔았다. 그런데 그 딸은 원망하기는커녕 키워 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 바닷속을 빠져나와 돈 많은 남편을 얻었고 아버지를 찾아가 평생 모시며 셋이서 풍요롭게 살았다.

“셋”

그의 차림은 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푸른색 바지에 엷은 미색 셔츠, 그 위에 긴 코트를 걸쳐 입고 있었다. 코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얇은 그 겉옷은 반질거리면서 붉은 빛을 냈다. 바람이 스쳤을 때 안감에 붙은 글씨를 읽을 수 있었다. ‘버버리’라고 씌어져 있었다. 그 사람 이름은 ‘버버리’가 아니었다. 빌려 입고 온 게 분명했다. 내가 상대를 잘못 짚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제 나의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가 자주 들른다는 클럽에 갔다. 그는 사람들을 둘러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학의 교수도 아닌 게 강의하는 투로 말을 했다. 그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말을 하고 있었는데 지구의 생명은 지구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화성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먼 옛날 화성에서는 생명체들이 번성했었는데 화성에 혜성이 떨어졌다. 그 때 화성의 땅덩이 일부가 운석이 되어 지구에 튀었다. 혜성이 떨어진 화성은 그 충격으로 기상 변동이 심해 남아 있던 모든 생명체가 멸종했다. 화성에서 운석을 타고 생명체가 지구로 옮겨왔을 때 지구가 이제 막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물과 산소로 덮인 건 다행이었다. 그는 그의 주장의 근거를 복잡한 운동법칙과 열역학, 화학식과 DNA 구조식, 그리고 최근 우주선에서 보낸 화성에 대한 자료에서 찾았다. 알아듣기 힘든 설명이었고 그는 그걸 노리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가 대단한 발견을 한 양 존경스런 반응을 보였다. 그중 하나가 대학 강단에 서야 할 사람은 그라고 칭송했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했더라면 이런 이론은 세울 수 없었을 겁니다.”

나는 대학 문턱에는 가보지도 못한 놈이 건방진 소리나 한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중얼거렸지만 모두가 들은 모양이었다. 그에게 고정되었던 시선들이 내게 쏠렸다. 그는 앉아 있는 내 앞까지 다가와 섰다. 모두들 나와 그 사이에 벌어질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와 그는 생명체 따위 얘기는 할 것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당신에게 경고를 하러 왔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 했다. 한참이나 서로 떠들었지만 결론은 없었다. 나는 장갑을 오른손에 쥐었다. 어제 같은 빙판길을 걸을 때는 장갑을 끼는 게 좋았다. 클럽에서 집까지 길은 대부분 응달이었기 때문에 꽁꽁 얼어붙은 빙판 뿐이었다.

“요즘 자네집은 추워서 잠자리도 설칠 판이라며?”

그에게 한 마디 하려고 일어서며 홱 돌아설 때 장갑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어깨를 넘어 날아갔다. 지켜보던 모두가 그에게 장갑을 던졌다고 받아들였다. 이왕 던질 거라면 더 멋지게 그의 뺨을 명중할 수 있었는데 안타까왔다. 그 때 옆에서 눈치 보던 보석상 주인이 나섰다. 곧바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 네 시였다.

“넷”

주위가 침묵했다. 내 발자국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도 멎어 있는 듯했다.

아내의 심장은 격하게 뛰고 있었다. 아내는 말리지 않았다. 아내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래저래 설명할 필요도 못 느꼈다. 엄마의 어두운 표정 때문인지 딸은 겁을 먹고 있었다.

나는 얼마 안되는 전 재산을 털어 결투 비용으로 보석상 영감에게 주었고 벽에 걸려 있던 총을 꺼내 손질을 했다. 총들은 오랜 잠을 잤으면서도 따뜻했고 화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의 심장을 뚫었었고, 또 하나는 허공을 가르기 위해 총알을 뱉었었다. 하지만 난 어느 게 어느 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오늘 확실히 알 수 있었는데 야만인이나 사냥하는 그의 총 때문에 틀려 버렸다.

“다섯”

나는 날렵하게 몸을 틀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났다.

2.

- 그는 내 몸에 손 한 번……

- 이건 포토예요……

- 아빤 아무것도 몰라……

- 어이 짤순이, 자네에게도……

- 요즘 자네집은……

총성은 가시고 나는 하늘을 보고 있다. 아까와는 다르게 파란 하늘이다. 배심원들이 저 멀리 날아가고 있다. 여기서는 더 이상 볼거리가 없어서인가 보다. 베고 누운 것은 차갑고 단단하다. 귀 옆은 따뜻하고 질퍽하다. 손가락은 아직도 방아쇠를 힘껏 당기고 있다. 기억이 떠오른다. 방아쇠를 당겼을 때, 내 손에 있던 총은 진동하지 않았다. 그는 예상보다 가까이 있었는데 양손에 총을 들고 있었다. 총성도 한 번이 아니었다. 저편엔 내팽겨진 크고 무거운 총들이 보인다. 이젠 가져갈 아이도 없는 총들. 지금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날 우리 아버지 얼굴에 닮아 있을까?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