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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뎡야핑님의 [때려도 될까?]에 관련된 글일까 싶긴 하다. 덧글에서 덩야핑님이 "소소한 불의는 조용히 참고 지나가는데"라고 했는데 그걸 보고 아래의 시가 생각났다. 좀 길지만 우선 시 한 편 읽자. 이 시의 정서는 여전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있다 絶頂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는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위 시는 김수영이 1965년에 쓴 시이다. 김수영은 참으로 훌륭한 시인이다. 그의 시전집을 찬찬히 읽다보면 예술이 예술가의 인생에서 어떻게 다듬어지고 완성되는지를 알 것도 같다. 요절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더 멋진 시를 많이 썼을 것이다. 그나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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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시사저널> 사건을 보면 언론의 자유는 개뿔만큼 있고, 월남 대신 이라크에 파병한 걸 보면 40여년 전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은 아니다. 그래도 방방 떠들고 다닐 수 있는 점에 있어서는 꽤 큰 차이가 있다. 그런 점에서 40여년 전 세상에 살고 있던 김수영은 요새 사람들보다 자유를 더 갈망하고 있었을 것 같다. 더구나 불의에 대해 마구 떠들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와 파병 반대를 위하는 것과 '돼지같은 주인년'이나 '야경꾼'에게만 큰 소리치는 걸 비교하는 태도는 맘에 들지 않는다. 비계덩어리 갈비를 비싸게 파는 식당 주인에게 성을 내고, 삥뜯으러 오는 야경꾼에게 지랄하는 것은 정당하다.
말걸기는 오래전에는 택시 기사와 싸우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을 좀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00원 때문이라도 싸워야겠다고 맘을 먹게 되었다. 일부러 길을 돌아가거나 난폭(거의 폭력)운전을 하거나 무리하게 합승을 하거나 하면 지랄을 좀 했다.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승객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부당한 행위를 용인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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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택시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항의하는 것은 자신의 이해와 관련이 있는 경우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쉽다. 하지만 다른 이, 특히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개입하는 것은 어렵다. 덩야핑님의 글은 그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예전에 파란꼬리랑 늦은 밤에 혜화동 동성고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술취한 남녀 커플과 술취한 남자 네다섯이 시비가 걸렸다. 한 놈이 남녀의 멱살을 쥐고 코너로 모는데 가만 두면 안될 것 같아서 말린 적이 있었다. 경찰이 와서 그들을 싹 데리고 가려 할 때 출취한 여자가 경찰한테 말걸기를 지목하며 자기를 때렸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난감했었다.
또 언젠가는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 몸을 더듬고 있길래 제지한 적이 있었는데, 그치의 어깨를 잡아 끄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된 적이 있었다. 어깨가 엄청 커서 말걸기 손에 잡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걸기가 잡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치의 몸이 움직인 게 아니라 말걸기의 몸이 그치 쪽으로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치가 말 없이 다른 차량으로 도망갔길 망정이지 "넌 뭐냐?"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디질 뻔했다.
이렇게 누군가 헤코지를 당할 것 같은 상황에 개입하는 건 겁이 난다. 자기 일도 아닌데 참견한다고 면박 받는 것도 싫다. 그래서 이런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용기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멱살잡이 사건은 파란꼬리가 없었으며 지나쳤을 것이고, 어깨잡이 사건은 가만히 있기가 민망한 상황이었다. 말걸기가 무슨 '열혈청년'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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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권리 침해 사건들은 중요하다. 결코 하찮지 않다. 이런 사건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와 기업, 전쟁을 옹호하고 사람을 죽이러 군대를 보내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처럼 역사에 남지는 않을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그만한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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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비민주적이고 굴림하는 국가와 공무원에게는 해야 할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힘없는 사람한테만 화풀이하듯 분개하는 자신을 탓하고 있다. 힘의 서열에 따라 언제나 강자에게는 깨갱, 약자에게는 버럭.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이 '자연스러운' 태도에 젖어 있는 자신에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를 시에 담았다는 건 그렇게 살고 있는 다른 이들도 스스로의 태도를 돌아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점은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자연스러운 이치'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윤리 덕목이다.
김수영은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그는 시와 글로 세상에 독설을 퍼부었다. 그는 시인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훌륭하게 실천했다.
그러나,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기"를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에 비유한 것은, 다른 일이 잘 되도록 지원하고 돌보는 노동을 비하하는 것이다. 김수영은 '싸나이'로서 '대장부의 기개'나 '의사의 기상'을 펼치고 싶어 한다. 김수영의 작품에서는 시 이상으로 훌륭한 게 수필인데 그의 수필전집을 읽으면 더욱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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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도 '대장부의 기개'를 펼치고자 하는 양반들 많다. 김수영만큼이나 '옛날' 분위기는 아니더라도 앞에 나서서 '큰 얘기' 하는 것은 자랑스러워 하고, 뒤에서 '자잘한 일'을 하는 것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서 일상 생활에서의 노동은 빠뜨린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지닌 자는 자신을 돌보는 노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돌보는 노동을 하찮게 여기거나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누구든지간에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권력에 눈이 먼 것이다. 그게 어떤 권력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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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택시를 타도 싸우지 않는다. 별로 싸울 일도 없는 게 택시 공급 과잉으로 대부분의 기사들이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참... 안타깝긴 하다.
다툼이 있을 때 말리기도 싫다. 몸 사려야겠다는 마음 때문인지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여전히 설거지, 빨래는 작정해야 할 수 있다. 그냥 쉽게 쉽게 하게 되는 날이 올란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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