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여름비
더위. 더위. 더위. 이건 뭐 돌브레인의 <여름>이 아니어도... 지쳐, 지쳐, 지친다.
이번 주엔 주변 소음에 하루, 열 받아서 하루, 더워서 하루.... 수면 시간 절대부족.
오늘은 그나마 중간에 외근 있어서 낮잠도 못 챙겨 자고...
다섯시 넘어서 헐레벌떡 낑낑낑... 불어 숙제하고
바쁘고 입맛 없다만 냉장고에 쟁여둔 방울토마토 예닐곱 개, 두유 한 잔,
오후 간식으로 챙겨 간 견과류 한 줌 챙겨먹고...
시청역까지 지하철, 시청역에서 회현동까지 도보로 20분...
지하철에서 벌써 눈은 파르르 떨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기본이지, 기본" "기본도 몰라" "날도 더운데 자꾸 열받게 할래"라고
그냥 들으면 '너네 바보지' 하고 무시하는 고등학교 선생님의 폭언 같지만...
나름 전형화된 유머로 자리 잡은 독퇴르 조의 집중력 강화용 추임새에...
잠은 깨고, 수업은 정신 없이.... 아... 그러나 꼬르륵~ 배가 고프다.
수업 끝나니 비는 내리고, 우산은 없고, 그나마 누가 지하철역까지 우산을 씌워 준다.
그냥 잠자코 4호선에, 6호선 갈아타고 올 것을... 피곤하고 배고파서 집에 빨랑 오고 싶다고...
택시 탄다고 기어코 반대편으로 건너갔다가... 마침 꺼낸 전화기에서
아바마마가 초저녁에 세 번이나 전화하신 것 발견... 전화 거는 사이...
집앞으로 오는 버스 눈앞에서 놓치고.... 그냥 택시 타려는데... 택시는 안 오고
홍대 역으로 가는 버스가 막 당도한다. 그래 무슨 택시는 택시야,
택시비 있으면 아꼈다 맛있는 거 사먹자.... 하고 버스 탔더니만...
이 버스 생각 외로 많이 돈다. 흑... 배고픈데...
눈꺼풀에 자꾸 힘들어가는데... 배고파서 잠도 못 자는데...
중간에 내려서 택시 탈까... 하다가... 아니다 이미 꼬인 날...
또 조급해하다가 더 고생할라... 우산도 없는데...
그런데 배고프다고 딴 생각하다가... 적당히 내릴 만한 정류장 지나치고....
그예 신촌까지 가서 결국 처음 놓친 집앞에 오는 노선으로 갈아탔다.
갈아탈 버스 기다리며 보니... 날은 따뜻하고... 비는 내리고... 몇 해 전 이런 날.
이런 날엔... 산뜻한 영화관에서 영화 보고 나와....
맥주 한잔 상큼히 마셔 주고... 따끈한 비에 뭔가 감각적인 생각들.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비닐봉지 구해 집어넣고 일부러 놀이터 가서 비 맞던 기억.
그 밤에 차마 서로 입밖에 내지 못한 말. 나중에 또 어디엔가 그가 써 둔 글에서 발견하고
어쩜, 당신도 나랑 똑같은 생각했구나 싶어 헛헛이 짓던 쓴 웃음까지 파노라마.
[낮에 날아온 잡지에 그의 글이 실린 걸 얼핏 봐서일까—오늘 불어 교재가 "향수"에 관한 파트였는데... 향수 얘기하다가... 요즘 페로몬 향수가 어떻네, 조향사로도 유명한 겔랑 회장이 그렇게 애인이 많았네.... 뭐 그런 이야기할 때... 잠깐 생각했었다. 막 담배를 피운 뒤에도 늘 구분할 수 있었던 그 체취 생각도 좀 나고]
그렇게 또 혼자 피식.
그렇게 갈아탄 버스도... 마침 홍대 미술학원가 귀가 시간에 딱 걸려...
홍대 앞길은 그야말로 주차장....
졸린데 배 고파서 못 자고, 거기 그리 갇혀 있으니 문득 서러움에...
H양에게 전화를 건다... "어디야?"
지난 주 M군이 나의 "어디야?"가 추궁성 있다며 반발했는데...
이번 주 종강(?)한 사내강의에 따르면, "데리다의 환대"에선
"누구냐?"(주체)나 "뭐하냐?"(대상)보다 "어디야?"(공간)가 존재에 대한 훨~ 중요한 물음이란다.
그래서 전화해서 "어디야?"하고 묻는 게 상당 의미심장하다고....
근데 왜 의미심장한지는 배가 고파서 역시 생각이 안 난다. 노트엔 분명 써 놨을 텐데.
여하튼 역시 버스 타고 집에 가는 길인 친구에게 약간 징징거리니 짜증은 가라앉고...
드디어 집에 도착.
잠깐 새 신발에 패션쇼 해보다가... 샤워하고...
말린 살구 두 알, 말린 자두 세 알, 물 반 잔... 이걸로는 속쓰림이 가라앉질 않는다.
오늘은 배고파서 깊이 못 자겠군
(그렇다고 제대로 먹으면 속 더부룩해서 못 자긴 매한가지. 이게 더 기분 나쁘다)
얼른 요가하고... 자다가...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맛있는 밥 해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