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이후.
무한한 연습의 스필버그의 [뮌헨] 감상기에 존 버거의 그림을 엮어 놓는다.
존 버거, <게르니카(1937) 이후-베이루트, 카나, 티르>(2006)
이스라엘의 레바논 폭격과 침공이 있었던 2006년 여름에 그림.
그리고 존 버거의 『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김우룡 옮김, 열화당, 2008)를 빌어 그림 설명.
오늘날의 가장 시급한 질문은, 테러리스트는 과연 왜 생겨나며 그 극단적 형태인 자살 순교자는 도대체 왜 만들어지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테러리스트는 절망 때문에 만들어진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테러는 어떤 초월의 길이자,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절망을 온전히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순교자는 그런 초월을 통해 커다란 승리감을 맛본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단어는 어느 면에서는 적절치 않다. 무엇에 대한 승리일까. (……) 절망의 어떤 켜에서 비롯된 수동성과 비통함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 제1세계의 사람들이 그런 절망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 여기서 내가 언급하는 절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외곬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고통의 조건들과 닿아 있다. 이를테면 수십년간 난민캠프에 수용되어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한다. 이런 절망은 무엇으로 이루어질까.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삶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느낌, 여러 다양한 켜들에서 이런 것이 느껴지다가, 이윽고 그 느낌은 삶 전체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면 전체주의에서처럼 의문이 용납되지 않는다._「절망의 일곱 켜」에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지금의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은 어느 면에서 보면 전대미문의 것이다. (……) 내가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죄책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지금 이해하는 중이지만, 이 부끄러움은 하나의 집단적 감정으로, 마침내 희망의 능력을 갉아먹고 우리로 하여금 먼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감정이다. 다만 바로 다음에 이어질 몇몇 발걸음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발치를 내려다보고만 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은―제각기 아주 다른 경우에 놓여 있는―스스로 이렇게 묻는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지리적인 질문이 아니다. 역사적인 질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재난을 통과하면서 살아남았는가. 어느 지점에서 붙잡혀 있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한 타당성 있는 예측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이 삶이 끝난 뒤 무엇이 올 것인가에 대해 어떠한 견해도 없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 실제로 일어나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으로 분리시켜 놓은 여러 '영역'들을 한데 묶어서 볼 수 있는, 영역제휴적 시각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반드시 정치적(political, 이 말의 원래의 뜻으로)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정치적 사고를 지구적 단위로 하기 위해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종합적으로 보는 일이 그 전제 조건이 된다._「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에서.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능력.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능력. 석가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했을 때의 그 진리란 이것 이상이나 이하를 말하지 않았을 듯싶다. 그러니 밤에도 볼 줄 아는 자는 불면을 얻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