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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719144928
김원 선생님의 서평이다. 제목은 '지식인은 들을 수 있는가'. 나는 이 쪽 관련한 책들을 제법 많이 가지고 있지만, 정독한 책은 몇 권되지 않는다. 차르테지 선생도 몇 번 강연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렇게 깊이 매료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암튼 김원 선생님의 서평을 읽고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선생님의 책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에서 살짝 엿보았던 '긴장'이 다시 생각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엔 내가 지지하는 측면과 비판하는 측면이 긴장을 이루고 있는데, 이건 별도의 지면이 필요하다.
이 서평은 흥미롭게도 내가 관심을 갖는 '번역', '지식', '윤리'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잘 모르지만 몇 마디 메모를 남긴다. 주로 마지막 소 주제와 관련해서...
암튼 이 서평을 읽고 난 후의 내 느낌은 단적으로 '난해하다'이다. 나름 맥락 속에서 충실한 소개를 하고, 선도적 문제 제기를 하려는 지점에서 좋은 글이라 보지만, '서발턴'을 이해하고 소개하는 방식은 여전히 '반-서발턴'적인 것 같다. 이는 어떤 '반지성주의'의 표현은 아니다. 나는 '난해함'과 '낯섬'을 구별하는데, 대체적으로 '이론주의-엘리트주의-포퓰리즘'적인 '번역되지 않은' 담론이 나에게는 '난해'하다. 대체적으로 다수의 1차원적인 것들이 난삽하게 얽혀 있는 것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난해하지만, 또한 보편성의 힘이라 할 수 있는 그런 1차원성 때문에 수십개의 언어로 쉽게 '번역'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이 서평이 다루는 내용도 한국어로 쓰여졌지만 보편적 맥락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리 없이 쉽게 '번역'될 것이다.
내게 '낯선' 것은 제대로 번역된 것들인데, 그럴 경우 그런 담론은 번역자를 통해 나와 번역자가 일정하게 공유하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동요하는 결여된 개방적 '주체성'과 타자의 '이질성'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사회 속의 비판적 담론으로 제시된다. 내가 보기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이제 '이러 저러하게 서발턴 연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서평자의 모종의 제안 자체가 서발턴 연구를 모종의 '기원 또는 본질'을 갖고, 그로부터 어떤 '보편/특수성'을 획득하는 담론으로 제시하는 어떤 '익숙'한 수용 모델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물론 이는 내용적 측면 보다는, 주로 '형식'적 측면에서 학문적 주체성의 결여가 낳은 필연적인 수용 모델일 수도 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이 문제는 바로 '서발턴'이라는 번역어를 통해서 풀어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기존에 블로그에서 여러번 반복해서 지적한 것처럼, 현실 속의 우리의 언어문화는 '음역'(즉 '무 의미'한 번역, 이것은 '번역'일까?)을 하지 않고는 개념들의 '번역'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신의 역사적 언어문화 자원을 상실해 왔다. 이는 역사적 '현대화'('보편/특수주의화')의 과정의 일정한 표현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는 '한글전용'이라는 보편/특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일환이었던 '탈한자화'의 효과, 즉 '언어의 현대적 국민화'의 효과이다. 한자를 한글이라는 기호 뒤로 감추기를 지속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연동성은 약화되고, 언어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한자어를 대체한 외국어 '음역어'들이 충만해졌다. 이러한 '음역어'는 100% 가상에 기초한 '원음'이라는 근거에 따라 '외국어'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기호화'하기는 했지만, 별도의 주석 없이는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번역'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번역'으로 가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는, 즉 그 외국어를 아는 '지식인' 엘리트들의 승인이 있고 이를 추종하는 포퓰리즘적 '속물 지식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이택광 교수의 '인문병신체'에 대한 변호는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전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벤야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그의 발언은 더욱 그의 몰인식을 반영한다. 벤야민적 맥락과의 거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언사이다.(관련 블로그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orderland&logNo=130082357319 이 교수는 이에 대해 트위터에서 “발터 벤야민은 철학의 개념어를 창문에 비유하면서 원어에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사유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지금 한국에 살아있다면 정말 몹쓸 인문학자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문제는 다시 '역사의 부재'로 돌아온다. 역사 속에서 '세계 속의 민족적 개별성'을 파악하여, 주체성의 반성적 자원으로 삼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 속의 개체성' 또한 보편주의적 담론에 의해 지배되고, 개체 또한 '보편화된 주체'로 소외되어 사회적 주체로 형성되지 못하게 된다. 지금 할 일은 우선적으로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렇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역사에게 물어보는 일이다. 계속해서 '역사 없는' 허공 속의 붕 뜬 주체로 살고 싶지 않다면.. '보편성'에 기대어 지식인의 삶, 나아가 민중의 삶의 희생을 방관하려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서발턴 연구'가 혹여나 이름만 바뀐 채 다른 모종의 '보편화'된 외부 담론에 우리의 개별적 역사와 현실을 꿰맞추는 착오를 범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참고로 중국어에서 subaltern은 보통 '庶民'으로 번역된다. 우리말로 읽으면 '서민'인데, 그 의미가 중국어과 크게 다를까? '타자'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우리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번역이 불가능하고 음역어를 쓸 수 밖에 없다는 말은 사실 매우 특이한 모종의 '현대주의적' 논리이다. 모든 민족적 언어는 본래 타자를 전제로 하여 그 관계 속에서 '번역'을 거쳐 형성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하나 더 들면, 우리말에 번역되어 있지 않은 "레 미제라블"은 중국어로 <悲慘世界> 즉 '비참한 세계'로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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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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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altern은 하위주체로 옮기다가 요즘은 그냥 서발턴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서민'도 좋아 보이는데, 그냥 '민중'의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피플'아니 '파퓰러'가 있으니...좀 애매하긴 하네요. 어쨌든, 전체적으로 매우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제 생각과 유사해서 놀랐습니다. ㅋㅋ.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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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걸 문제 삼고 싶으신가 보군요."최근 서발턴 연구와 서발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문헌이나 번역서에서 서발턴은 '하층민', '하위 주체', '하위 집단'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저 사전적인 뜻대로 '하층민'이나 '하위 집단'으로 번역하는 것은 서발턴 연구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라도 담아 내지 못한다.
'하위 주체'라는 번역어도 서발턴 연구가 서발턴의 '주체성' 자체를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서발턴의 속성인 '서발터니티(subalternity)'를 번역하기가 더욱 곤란하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본문에서는 이 같은 곤경을 해결할 수 없어 원음대로 '서발턴'이라고 표기한다.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김택현 저, 박종철출판사, 2003에서 베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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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몇 마디 하자면 서발턴 연구집단은 그람시가 쓰던 데로 서발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사전적 의미로 쓰고 있지도 않구요.
사전적 의미에 가깝게 "아랫 것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서민이나 민중과도 거리가 멀고 그 중에서 "하위 주체"는 최악의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발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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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민족이나 민중 또는 서민이라는 "주체"로 그들을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리얼리티에 대한 상상)라는 겁니다.
들뢰즈, 푸코 심지어 라나지트 구하 같은 지식인들이 그들을 주체로 구성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하고
藝術人生研究室 님이나 동네형 님 및 김원 등의 지식인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그들을 "주체"로 구성한다는 겁니다.
민족이나 민중, 서민, 하위주체 등등의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고 얘기하든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로 그 목소리가 얘기된다는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발턴 연구는 오히려 지배엘리트나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연구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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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 연구는 기존의 "민중"을 주체로 구성하는 이른바 한국의 민중사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 민중사 자체가 자본주의적 근대 유럽의 식민주의의 효과)"민족"을 주체로 구성하는 민족주의나 민족주의적 역사학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민족주의 자체가 식민주의적 지배 효과의 결과물)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서발턴"에 관련된 책을 읽으셨다면서 어째서 "서발턴"을 "주체"라고 이해하시는지요?
"민족이나 국민"이라는 주체 개념, 바로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인데
그 개념이 바로 "서발턴이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보편주의적인 식민 담론이자 유럽중심주의인 것인데
"庶民"을 들먹거리는 것은 저로서는 이상합니다.
강연까지 듣고 관련 책들을 읽으셨다는 분이 이렇게 얘기하는 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김택현 교수가 쓴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과 <트리컨티넨탈리즘과 역사>라는 두 책을 혹시 읽으셨으면
그 책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 비판해 주셨으면 합니다.
둘 다 얇은 논문모음집으로 "서발턴 연구"를 소개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 글들이 서발턴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藝術人生研究室 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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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術人生研究室 님의 고견을 받아들이면 이렇게 되는 군요.서민과 역사학 비판
서민 연구
서민성
서민은 말할 수 없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저는 오히려
下人이나 下女 라고 번역하거나 "아랫 것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봅니다.
잘못하면 下人性이라는 번역어도 가능하겠군요.
저는 그런 번역어가 엉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지배 엘리트의 "엘리트"는 정예나 우수로 번역하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는 이념이나 사상체계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컴퓨터나 인터넷 뿐만 아니라 "발터 벤야민"도 번역하셔야지요.
아돌프 히틀러는 용감한 늑대로 타이거 우즈는 숲의 호랑이라는 식으로요.
제가 하고 싶은 주장은 번역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말로 번역하지 말자는 겁니다.
서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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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체.. 음.. 서발단이 그런 뜻이었군요..그러면 우리 나라에 '서민'도 비주체로 대접 받는 것 같은데.. 둘이 친척뻘 개념인게 분명하죠 같은 서짜돌림이니까요!
서발단 연구집단과 서민 연구집단이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여! 아차 그런거 업나
역사가 잘못했네
동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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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o님의 말을 그 취지는 이해하고 공감하는데요. 마지막에는 너무 흥분하신듯^^물론 서발턴의 번역어를 놓고 벌어진 논의를 저도 모르진 않습니다. 서발턴 논자들의 취지에도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네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겠고, 또한 저는 뭔가 적확한 한국어를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그네들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굳이 개념어가 아니라도 '번역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 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번역은 문화와 문화 간, 지식인(?)과 대표되지 않는 자들(비주체) 간 등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는 것인데, 개념 자체가 그 과정에서 마구 꼬이고 그 의미나 용법이 변화하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하는 서벌턴 집단의 논의는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발턴'이란 역어 자체가 어찌되었던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엘리트'적 용법이라고 봅니다. '서발턴'은 그냥 매우 추상적인 용어일 뿐이지 않나요? 마치, 이데올로기처럼...그나마 이데올로기는 통상적인 관념이라도 있지만, 서발턴은 공중에 떠 있습니다. 이걸 한국사회에 재맥락화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번역불가능' 요소가 있고, 특히 '서발턴' 집단은 자신들의 논의를 다른 주장들과 세밀히 구분짓고 있지만, 굳이 이들의 주장에만 따라서 '서발턴'을 '서발턴'이라고 옮겨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가 즐겨 사용하는 '퍼포머티'를 국내에서는 '수행성'이라고 옮기는데, '수행성'만 듣고 원래 버틀러의 원래 용법이 뭔지 딱 머리에 떠오르나요? 영어 단어 자체는 '수행평가'할 때와 같은 건데요...말씀하신대로, 반대의 경우도 많죠. 프로이트의 '에로스'를 뭘로 옮겨야 할까요? 아무튼, 번역이란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해내려고 하는거죠.
게다가...제가 불편한 것은 '서발턴'이란 '번역불가능한' 용어로 그냥 옮기는 요즘 추세는,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지식을 일부 유식자 집단이 독점하려는 경향을 반영하지 않나...혹은 정말 '서발턴'과 '지식인'들(그런 게 있다면) 사이에 상호작용이 점점 더 사라지는 상황을 반영하지 않나...그런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논의는 우리끼리만 알면 되지 않나?' 이런 식이라는 거죠. 제가 좀 낡은 관념을 지녔는지 몰라도,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게 요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가 아닐까합니다.
덧붙이면, '하위주체'의 '주체'라는 용어(즉, subject)도, 아시겠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독립된 자유로운 개인이란 '긍정적' 뜻이 있지만, 원래 '종놈', '노예', '신민' 등등의 뜻도 있습니다. 그냥 '아랫 것들'인 겁니다. 우리로 치면 '백성'이겠지요. '주체'라는 용어에서 '종놈'이라는 의미가 사라져서 그렇긴하지만, '하위주체'가 최악의 선택은 아니라는 거죠.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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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the subaltern'이란 표현 자체를 비판하고 싶네요. 이런 ‘학문적인 표현’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유럽의 주류언어들은 관사를 사용해서 형용사를 쉽게 명사화하는데, 여기에 이미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특히, [고대]희랍어와 유사한 독어에서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심지어는 전치사까지 명사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때 사람 환장하게 하죠.
최근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독어를 비교적 못하는/배울 필요가 없는 한국음대생들이 지네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네가 ‘gegen’하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 표현은 그저 ‘네가 반대하니까’보다 의미의 폭이 좀 넓은데, 재밌는 건 제가 보기에 독어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네들 의사소통에 독어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gegen하니까’는 전치사를 명사해서 사용한 거죠.
“the subaltern”이란 표현이 영어의 ‘정신’이 스며있는 표현일까? 영어 잘 못하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의 정신은 동사화/분석화에 있지 독어처럼 명사화/합성화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럽 리스본 조약의 영문과 독문을 비교하고 읽어 내려가면서 얻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those who are subaltern”의 명사화는,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서는 안 될 일 또는 할 수 없는 일(‘those ... subaltern’의 기체화에 따르는 주체화)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정의 수행모순입니다.
이런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하려면 여기서도 ‘정치경제학’이 필요한 것 같네요.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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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비판이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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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토를 다네....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해서 첨언하자면 주지하다시피 저런 용법이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안쪽 사람' '바깥쪽 사람' 의 구별을 전제하고 또 그렇게 분리하는데 사용되고요.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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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형님이 공감해주시니 반갑네요. 저도 동네형님의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전부터 그랬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지만, 얼핏 "수유너머..."가 기억나네요.ㅇ님의 댓글은 기본적으로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런 경우 제가 좀 더 친절해져야 하는데, 제 블로그는 그런 용도는 아닌지라... 그래도 제 글은 몇 가지 주제를 둘러싸고 반복되니 언젠가 접점이 있겠지요.
ou topia님의 독일어와 영어의 대별은 매우 흥미롭네요. 제가 거의 모르는 분야라 잘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만... 저는 독일어와 영어가 같은 계통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분화의 과정이 '현대성'과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해지구요. 독일어의 '명사화/합성화'와 지적 위계와의 관련성은 그것이 희랍어까지 소급된다면, 그건 또 어떤 함의일까 궁금하구요.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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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독어의 구별은 느낌차원이고....현대화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일 현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1648년에 종결된 30년 전쟁인데, 사실 '외세'가 독일에서 지랄했던 전쟁이죠. (독일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건 어쩜 근 500년이 지난 1990년 이 아닐까 하고요.) 암튼, 30년 전쟁은 독일로 하여금 '말'을 상실하게 했구요 (독일 영문학자 Dietrich Schwanitz의 견해, 그래서 '말' 대신에 음악이 발달). 독일이 '말'을 다시 찿게 되는 과정을 Peter Szondi가 재구성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리스를 '찾아간' Johann Joachim Winkelmann(1717-1768)을 시조로 해서 그 과정을 설명하죠. 독일 특유의 '현대화 아닌 현대화'(당시의 선진국을 참조하지 않은 현대화)라 할까.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고요.
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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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산수를 못하네. 근 500년이 아니라 근 400년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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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altern”의 어원적 의미도 중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alter”하면 둘 중에 한 사람이란 뜻이고 “alternus”하면 ‘번갈아서’에서 ‘갈아치우다’란 의미까지 있는 것 같은데, 'subaltern'하면 ‘아랫것’보다 ‘[누가 들어와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아래[자리에] 번갈아 가면서 들어오는 것’이란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함수의 변수와 같은 것. 독자/독립성이 전혀 없는 것. 명사화가 불가능한 것.
그리고 독일의 경우 ‘the subaltern’ 이론이 거의 수용되지 않는 것 같은데, 독어에서 ‘subaltern’이 갖는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나치체제에서 작동했던 [바꿔치기] 기능인들이 ‘subaltern'했다는 완전 부정적인 이미지.
“Subaltern”은 아도르노의 “das Nicht-Identische”와 비교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개념 아닌 개념’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런 개념의 서술과 관련해서 ‘대상’을 명사화하여 찍어 올리거나 또는 역으로 ‘그’의 구심력에 의해서 ‘대상’에 빠져 들어가지도 않고 ‘그’를 돌고 또 도는 그런 서술을 아도르노는 이야기했는데 철학/과학보다는 예술/문학에 더 가까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자가당착적인 수행모순을 보지 못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다 헤겔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헤겔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이유인 것 같고요.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에 걸려요. 지식이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자기투명성을 확보해야 비로소 완성되고 비판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는 게 정신현상학의 요점 하난데, 모순이 은폐되면 비판이 그저 잠재력으로 배어있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고요.
한글의 정신은 아도르노가 요구한 걸 잘 하는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래어(한문?, 영어 등등)를 쓰지 않으면 명사화가 정말 어려워요. 이걸 전 꼭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태를 돌고 돌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결과의 표현들이 풍부한 말이고요.
동네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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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그렇다치고, 영어(독일어)가 명사를 중심으로 하는 건 일정부문 맞는 것 같습니다. 전치사와 관계사를 엄청 즐겨쓰는 이유겠지요. 사실 이것도 현대 영어에서 더 강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대신에 한국어는 확실히 동사 중심성이 강하고요. 제가 번역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경험상 명사를 동사로 풀면 확실히 자연스럽더군요. 혹자는 '구술' 문화가 강해서 그렇다고 그러더군요. 갑자기 잡생각이 나서 한자 더 보태어 둡니다.ou_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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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번역하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사회.비판"과 관련해서 '번역의 관점'을 확립하지 못하고 헤매는 가운데 자꾸 댓글을 다네요. "the subaltern"의 명사화가 "the subaltern"의 반동적인 면을 혹시 보지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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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선 한자는 '외래어'라 할 수 없는 내재화된 언어자원이라고 보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의 개념어가 한자의 사용 없이는 조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상황은 '한글'이 갖는 근원적인 한계를 반영한다고 봅니다. 한글은 그 태생부터 보조적인 수단이었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 등이 하는 작업이 참 부질없는 그런 상황으로 가는 것이구요.한자가 그렇고, 그 측면은 중국어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데, '명사'와 '동사'의 구별 자체가 본래 우리의 언어 안에서는 맥락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구별 자체가 일정하게 '영어 중심적 사고'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구요.
제가 궁금한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미미하게 남아 있지만, 역사적으로 한자와 한글의 결합이 사실은 이중적 차원에서 일상적 번역실천이 아니었나 하는 점인데요. 그것은 민족간의 번역 실천의 측면(주로 '중국'과 '조선' 사이)이 있고, 민족 내부(조선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서 민중적 번역 실천의 측면이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번역, 지식, 윤리와 관련한 우리 나름의 역사적 개별성의 한 측면을 구성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런 측면에서 '현대성'과 '현대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적 언어/지식/문화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 하는 가설적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게 궁극적으로 변혁적 운동과 주체의 문제와 밀접하다고 보고 있구요...
많이 무지하고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긴 한데, 의문점을 던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