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노무현 추모제라는 이름의 괴상하고 야비한 축제’
-5.18을 능욕하는 친노세력들은 일베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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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5월 17일 5.18전야제에 참석했습니다. 광주 금남로에서였지요. 이튿날인 5월 18일에는 서울광장에서 거행된 5.18기념식에 얼굴을 보였고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끔찍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수년 전부터 염려했던 일들이 굳히기를 하는 것을 목도하는 하루였습니다.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이하 경칭 생략)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고 외치는 태극기부대들의 행진에는 꿈쩍할 필요가 없습니다. 서울광장 바로 건너 대한문 앞에 텐트를 치고 고성방가 하는 사람들 또한 무시해버리면 될 일입니다. 문제는 친노.친문입니다. 조원진과 태극기 부대를 보면서는 민주진영과 확연이 구분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진짜 문제는 아군으로 행세하면서 아군을 향해 아군에게 총을 쏘고 아군의 역사와 혼을 말살하는 자들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완용 같은 을사오적처럼 드러난 친일파는 일제 측에서 볼 때 어느 시점부터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이용가치(일제에 부역)가 있을까요? 평소 신망이 두텁고 반일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인사라고 합니다. 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이광수,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등등이 되겠지요. 이 같은 원리로 자유한국당을 위시하여 조원진과 태극기부대처럼 드러난 세력들에 대해서는 판단과 예측이 가능하고 전선이 분명한 대상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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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짜 문제는?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학자 신채호 선생의 말입니다. 이를 좀 비틀어 말하자면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빼앗기는 거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국가와 민족이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국민의 뜻을 한데 모을 수 있는 표상이 절실합니다. 구한말에 이를 몸소 실천한 사람은 매천 황현이고 대종교를 중광하여 단군의 자손임을 일깨워 조선인들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사람은 나철 같은 분이었죠.
  
독일의 피히테는 1807년,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듬해 겨울 그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고유의 상징자산을 형성하려면 역사적인 사건과 시대상황이 맞아떨어져야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해당 집단과 결사체를 넘어서 국가와 민족의 혼이 담긴 상징자산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피 값으로 얻은 5.18의. 자산을 무력화시키고 가로채려고 하는 친노.문들은 파렴치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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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권정치에 익숙한 극단주의자들
 
친노.문들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 필생의 사업인 민주주의 투쟁업적을 빼앗고 5.18의 혼을 도려내어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김대중 선생의 50년 민주투쟁과 사형선고를 비롯하여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수형생활과 55번의 가택연금과 10년의 망명생활로 점철된 자유민주주의 브랜드를 노무현의 것으로 등치시키는 일을 서슴없이 낚아채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명 수천수만의 피 값과 수십만에 이르는 광주시민들의 눈물 값으로 이룩해낸 5.18이라는 상징자산을 모조리 탈취하여 노무현 세력의 것으로 둔갑시켜려는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사실 노무현의 업적과 사상적 배경은 빈약하고 일천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기저에서 그들은 김대중과 5.18에 스며있는 민주정신과 혼을 도려내고 끊임없이 탈취 편취 네다바이하여 약화시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피자와 통닭을 시켜먹던 일베만 부도덕할까요? 5.18에 조의는 표하지 못할망정 광화문광장을 온통 독점하고서 ‘추모라는 이름의 괴상한 축제’를 질펀하게 벌이는 친노.친문들이 일베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자한당과 친노.문들은 다같이 패권정치에 익숙한 극단주의자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조그만 구멍이 거대한 둑을 무너뜨립니다. 살금살금 야금야금 조금 씩 기어들어와 5.18을 송두리째 뽑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친노.친문들은 5.18에 우호세력이라는 탈을 쓴 권력을 향한 극단주의자들일 뿐입니다.
  
5.18에 벌인 ‘노무현 추모제라는 이름의 야비한 축제
 
친노.문들에게 5.18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5.18은 없습니다. 몇 년 전에 5.18국립묘지 정문 앞 ‘민주의 문’ 앞에 5월은 노무현의 달이라는 펼침 막을 걸더군요. 왜 하필이면 5.18기념식장 앞에 그런 파렴치한 현수막을 내거는 걸까요? 5.18 관계자들의 태도를 시험해보려는 겁니다. 광주시민들과 호남사람들의 정신자세를 가늠해보려는 것이었습니다. ‘5월은 노무현의 달’이라는 현수막을 ‘민주의 문’ 앞에 거는 일이 뭘 의미하는지, 그 문제점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해보는 리트머스시험용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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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내부정비부터 하십시오
 
이번 39주년 5.18 서울기념식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이곳은 엄밀히 말해서 초상집 아닌가요? 제삿날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남의 초상집, 남의 제삿날에 아군이라고 생색내던 친노.문들은 마땅한 예를 표하기는커녕 일베보다 더 패륜적인 희한한 축제를 벌였습니다. 하고많은 날 다 놔두고 5월 18일에 말입니다. 우호적인 체하다가 ‘등치고 간을 내는 행위’를 한 겁니다.
  
문제가 될까봐서인지 ‘5.18’을 기념하며 노무현 추모제‘라는 글귀를 한 귀퉁이에 끼워 놓긴 했지만 행사내용은 대대적인 노무현우상화작업이었고 내년 선거를 겨냥한 선거운동이었습니다. 광화문광장은 온통 노랑풍선과 노랑우산으로 뒤덮이고, 대형무대에서는 노래패들이 마이크를 휘어잡고서 노무현 찬미가를 불렀고, 감성이 충만한, 노무현 찬양 영상 또한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호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구호며 사진이며 세상에서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다 노무현과 엮어 붙이며 우상화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5.18기념사업회에 요구합니다. 5.18 당일만이라도 지켜주십시오. 5.18에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했기에 5.18 하루 열리는 기념식마저 친노.문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까? 어떤 연유로 엉망이 됐단 말입니까. 제 것도 지킬 줄 모르는 5.18을 그 누가 보호해주고 그 누가 5.18법을 만들어주고 막말 4인방에게 징계를 내려준단 말입니까? 보수들의 악다구니를 용납해선 안 됩니다. 친노.문들의 ‘등치고 간 내는’식의 ‘뒤에서 총을 쏘는’식의 이중 작태를 용인해서는 안 됩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속담에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5.18 관계자들은 이왕에 헌신하는 마당에 조금만 더 힘내시고 심기일전 하시어 “하고 많은 날 다 놔두고 5.18에 ‘그 무슨 노무현 추모행사냐?’ 꾸짖으십시오. 5.18에 벌이는 노무현 추모제는 추모제가 아니라 5.18을 유린하는 행위다. 5.18 기념일에 그따위 행사를 벌이지 말라고 정식으로 항의를 하고 당당히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적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 근착하여 5.18의 심장을 향해 정조준 하는 총부리가 무서운 겁니다. 그러한 작태를 벌이는 핵심세력이 누구인가부터 밝혀 전선을 명확하게 형성하시길 바랍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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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2 22:34 2019/05/22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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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전의원
죽음엔 순서가 없다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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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님이 충격을 받을까봐 김홍일 전 의원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발 빠르게 박지원 의원이 나서서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권리,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르겠고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이 잘 모르겠습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는데 아들이나 딸이 먼저 갈 수도 있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뒤이어 세상을 뜰 수도 있습니다.

‘김홍일 전 의원’은 10여 년 전에도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병중에 있었고, 부친이신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장례식장에 나온 모습은 전 국민들이 충격을 먹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 때 감옥에 끌려가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 등 여러 이유에서 갖게 된 병으로 인해서입니다.

그 분의 신체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언어력조차 퇴화된 상태를 보며 “고문의 후유증이 저렇게 무섭구나!” 하며 충격에 빠진 일이 엊그제입니다.

이희호 여사께서는 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늘 자신보다 먼저 갈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김홍일 전 의원이 어제 4시경에 별세함으로서 아드님이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나이 지금 97세라 하는데, 지금 선에서 아드님인 김홍일 전 의원이 먼저 가신 일을 알려드리면 충격을 받을까봐서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신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 생활과 10년의 연금생활 등 온갖 일을 몸소 겪으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감옥살이도 하지 않고, 죽을 고비에 닥쳐보지 않은 사람들이 의원이야 장관이야 당 대표야 온갖 호의호식을 다 한 사람들이 더 난리입니다.

여사님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인륜과 천륜을 자기들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님은 누구 보다 담대하셨던 분 아니었습니까? 그런 여사님의 건강에 누가 될까봐서 알리지 않는다 하는 군요.

과연 이것이 옳은 결정일까요? 알리는 게 마땅하다고 보는 저의 생각이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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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17:10 2019/04/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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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⑨
-시베리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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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긴장했다. 그렇지만 우린 길을 잘못 들거나 헤맬 일은 없는 팀이다. 길을 잘 아는 러시아인 운전사와 현지에 사는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하는 단체여행이기 때문이다. 얼마 있으면 장시간 동안 타게 될 기차역에 도착할 것이다.

뜻밖의 짐꾼들

온갖 생각으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가 보다. 차창 밖 풍경에 눈길을 준 사이도 없었는데 멈추고 보니 역 광장이었다. 3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캐리어가 바닥에 부려졌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사십시오.”라며 가이드가 광장 한쪽에 있는 마트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여행사 직원과 함께 부리나케 달려가더니 5리터짜리 물통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아홉 개의 객실에 한통씩 들여 줄 생수다. 아차, 싶었다. 잠깐의 게으름 때문에 뭇 나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발역의 생활용품장 구경을 놓쳤다 싶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열차가 특이한 것은 개찰이나 집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열차표나 입장권이 없어도 아무나 승강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역사를 거쳐 가지 않고 좌측으로 돌아 역 광장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다. 플렛폼으로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 육교 앞에 차를 세웠다. 대형 캐리어와 등에 맨 가방에 보조가방 셋을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힘에 겨운 상황에 처했다. “어떻게 육교에 오르나?” 그런데 순식간에 러시아인 몇이 한국인 가이드 곁으로 다가왔다. 짐꾼들이다. 돈은 좀 들었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계단과 울퉁불퉁한 육교 위로 캐리어를 수월하게 운반하고서 플랫폼을 밟았다. 

현지가이드는 소박한 인상의 재러 한국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갸름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가이드는 선량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IMF당시 러시아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부인은 회사 동료로 만난 처지라 했다. 당시 한국인은 러시아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두 자녀를 뒀다”면서 “연료비가 저렴해서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잘 살고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재미나게 얘기했다. 가이드 이 선생은 이르쿠츠크 역까지 우리 팀과 동행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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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한국인들의 특징

한때는 해외여행지에서 맞닥뜨린 한국인들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던 모습이 있었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조끼패션을 입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영락없는 한국 사람들이라는 거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고 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야 낯선 곳에 맞닥뜨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공통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보고 많이 살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요는 복합적인 거다. 비약해서 생각해보자면 한국사람의 경우 쇄국이라는 이름과 무관할 수도 없고 말이다. 구한말의 대원군만 쇄국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최근까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늘 쇄국 상태였다고 본다. 환경적으로도 그랬다. 언감생심 일반인들이 해외로 나가거나 유학길에 오르는 일은 꿈도 못 꾸며 살았잖은가. 최근에야 해외여행에 관한 각종 규제가 풀리고, 외국유학 역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고 보니까.

조선 조 500백 년 동안 나라 밖으로 나가 본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니 됐을까 싶다. 중국으로 가는 국책사절단 약간 명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사신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양반관료들과 일부 통역관 같은 특정인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내내 그랬다. 근현대에 와서는 가난한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전쟁과 냉전시대를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정자들에 의한 쇄국정책과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족쇄는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유학 차 해외로 나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폐가망신에 이른 엄혹한 시대를 살기도 했다. 국민소득마저 시원치 않은 터였기에 거금을 들여서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땅을 밟아보기란 도무지 용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다 외국 한 번 나갔다 온 사람들은 벼슬이나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티를 내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필자가 어렸을 적까지만 해도 외국 한 번 나갔다 오면 그 중에는 대책 없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허다했다. 듣는 사람 쪽에서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미쿡 가 슬 때 저어말 저어말 차도 마코 빌딩도 노파서 놀라서어요.”하는 식으로. 예컨대 사고의 폭도 외연의 폭도 견문도 협소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흔하게 유통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건 펙트다. 아무튼 지금은 해외여행정도는 더없이 자유로운 세상이 됐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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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객 폭증

해외여행 2천만 시대라고 한다.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2017년도 기준으로 지난해 우리나라는 2650만 명의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전년보다 약 420만 명(18.4%)이 많은 숫자인데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사용한 카드 금액은 20조원에 육박했으며 비율로 따져도 19.7% 증가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출처 천지일보 2018.2.22.일) 폐 일언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참 해외여행을 많이 간다. 인구수는 5100만 정도인데 국민의 절반이 넘는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한 걸 보니 가히 국제화 시대를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 <대륙으로 가는 길>에서도 해마다 시베리아 바이칼 탐사 여행을 떠난다. 일종의 특화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시작은 6년 전에 했다. 현재까지 5회 째 이어가는 여행이다. 그렇게 됐다. 맞춤형 여행이 활발해지고, 모집 주체도 다양한 현실 말이다. 시민단체와 언론사들도 회원들 모집에 나선다. 여행형태와 모집주체도 다양하고 복장이나 떠나는 모습도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스치는 생각들!

이야기가 길어졌다. 모든 것이 순간이다. 시간과 세월의 측면에서 보면 영겁과 찰나가 한 순간에 피고 지고 교차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것들도 사라질 땐 순식간이다. 기억도 이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하고 많은 것들이 제아무리 많을지라도 내 것으로 주워 담지 않으면 기억의 창고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눈을 치켜뜨고 대상을 탐색하는 행위는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광야를 헤매는 짐승처럼 어디엔가 잠복해 있던 유랑의 본색을 끄집어내어 바람처럼 부유하는 시간을 희구해본다는 것은 순간일망정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하지만 생각은 혼자 달리다가도 멈추고, 멈췄다가도 다시 떠오른다. 그래 잊지 말자꾸나. 좁쌀처럼 작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홀로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 고독하고 싶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고도 싶다. 그래서 갈래갈래 흩어 진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작별인사

눈앞에는 1940년대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검정과 빨강색이 주조를 이룬 기차가 멋진 인상을 줬다. 러시아인들은 의외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육교를 건너고, 짐을 들어올리고, 플랫폼에서 서성이던 기억 모두를 비비고 섞으면서. 서둘러 005기차 12차량 칸에 올랐다.

좁은 복도를 지나 몸체만한 캐리어를 밀면서 나아갔다. 8호실 침대칸 4인실을 찾아 들었다. 길다란 좌석이 있었다. 잠잘 때는 침대가 될 자리다. 밖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다리가 아팠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금 지체하다가 룸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짐 가방을 열었다. 벌러덩 나자빠진 사람처럼 활짝 열린 가방에서 조그만 양푼과 세면도구를 꺼냈다. 실내화, 핸드폰 배터리, 세면도구 등등 3일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심사를 하는 기분으로 소지품을 점검했다.

기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출발이 가까웠다는 신호다. 실(室) 안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정동영 의원이다. 작별인사를 하려는 가보다. 이 지점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갈릴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중심인물인 정동영 의원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당의 당대표 선거를 한 달 앞둔 시기라서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긴 것임에 틀림없다. 부득이하게 귀국을 결정한 측면이 농후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극동연방대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정 의원 혼자서 목적지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다니, 서운한 마음을 가득안고 손을 흔들어 배웅을 했다.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되풀이하는 모습에서 정 의원과 우리 남는 자들의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⑩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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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19:12 2019/04/1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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