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역과 도시의 간략사⑧
-시베리아 여행을 기억하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탐사단은 오전에 첫 코스로 우스리스크에서 이상설 유허비를 거쳐 라즈돌노예 역에 들렸다. 다음으로 한인문화센터를 찾고 이어 최재형 선생 생가 방문을 마쳤다. 중요한 일 끝에 기대하는 것은 맛있는 식사일 터, 고려인 식당을 찾았다.

연해주에서의 마지막 식사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번 여행에는 3대 목표가 있다. 첫째 고려인 유적지 탐사다. 다음은 흔히 연해주라 부르는 프리모르스키 주(州)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의 루키스 섬 안에 있는 러시아 극동연방대학에서의 세미나 개최, 그런 후 바이칼호수 들르기다. 예정대로 “한반도의 평화체재와 신북방경제 세미나를 마친 후의 일정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이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차질 없이 오르는 것이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고나 할까. 35명의 인원이 열차 한 칸을 몽땅 예약한 상태다. 만약에 이 인원 전부가 열차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난감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먼저 들려야 할 곳은 민생고 해결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전용버스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조선인 식당이었다. 그냥 편하게 북한식당이라고 부르자. 원래는 다른 식당을 예약했다가 교포식당에서 밥 한 끼 먹어보자는 뜻에서 찾아간 곳이다. 러시아에서 해결한 21끼니의 식사에서 느낀 점은 뒤에 가서 좀 더 소개할 예정이다. 그렇더라도 북한식당에서 잘 먹은 한 끼에 대한 추억은 미리 강조해둔 달들 지나친 일은 아닐 것 같다. 밥이라서 좋았고, 나물과 채소재료가 익숙한 것들이라 괜찮았다. 모두 대체로 만족한 모습에 환한 얼굴로 일어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라는 것이 재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라고 한다. 이중의 으뜸은 식욕이 아닐까? 나머지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식욕을 채우고 난 뒤에라야 추구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배를 채웠으니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60만이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런데 오늘 날의 도시 사정은 교통체증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인구증가도 있으려니와 늘어난 방문객들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가이드의 재촉 소리가 왠지 자주 듣던 소리처럼 들려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국에서 빼앗은 땅

딴은 그렇다. 100여년 기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처럼 혼잡한 곳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쪽 최 변방 국경지대에 있는 ‘블라디’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역할이 점점 증대된 케이스다. 빼앗은 영토였기에 자기네 땅으로 굳히기 위한 필요 조치를 때맞춰 진행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는 헤이룽 강(흑룡강,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과 청나라가 2차 아편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서 하바롭스크를 건설하고 이어 아무르 강의 이북 지역을 차지한 케이스다. 더해서 1860년에는 영국과 청나라를 중재한다는 구실로 끼어들어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다. 연해주는 이때 러시아 땅이 되었다.

그들은 재빨리 95개나 되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우스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건설도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볼세비키들이 계획에 따라 도시 발전과 군사 항(港)으로서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9년 스탈린 시대에 와서는 고려인들에게 악명 높기로 유명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책을 자행하고 말이다.

스탈린의 일국가 일민족주의, 고려인 강제이주도 일 국가 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실시한 정책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고려인들은 첫 해에 7천, 이듬에 4천이 희생되어 주검이 산을 이루다시피 한다. 황인종들을 소개시키려면 그들과 연고가 더 많은 중국 쪽으로 월경(越境)하도록 했어야지 말과는 전혀 딴 판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것은 왜인가. 노동력은 필요하고 인권은 무시하고. 사람을 짐짝 부리듯이 부려놓고, 불모지를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다. 내심 넓으나 넓은 연해주 땅의 연고권을 주장할까봐 일찌감치 영토반환의 싹수를 잘라버리려는 가혹한 탄압 아니었던가 싶다. 지들과 피부빛깔이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착취와 탄압의 대상일 뿐, 달리 무슨 해석이 필요할까 싶다.

고려인들에게는 슬픈 역사였다. 억울하고 분한 과거였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 고려인들이 살게 된 나라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크라이나, 타자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다. 이들은 대충 잡아 총 50만이다. 13가구로 시작한 연해주 농업 이주가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말이긴 하나 이 또한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에 해당되는 경우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TSR 간략 사(史)

러시아의 철도 역사는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브르와 황제의 별장 구간의 24km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1857년에는 알렉산더 2세 차르가 철도 건설 법령을 반포하는 등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의 철도는 급격히 늘어난다. 지금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본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첼랴빈스(Chelyabinsk) 구간도 이 시기 건설되었다. 이때도 유럽에 속한 러시아 땅에 국한 되는 것일 뿐, 시베리아 너머의 지역은 여전히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었다이러던 것이 점차 정치 경제적 필요성에 더해 부동항 건설이라는 군사적인 필요성까지 대두됐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놓은 러시아 도로교통부가 ‘위대한 시베리아철도’라는 보고서를 보더라도 철도건설 계획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제는 앞서 캐나다 태평양 횡단열차가 완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중국의 혼란을 틈타 빼앗은 땅을 좀 더 확실하게 먹어치우기 위한 제국주의 본연의 야심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91년 당시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에 따라서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 열차가 착공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驛舍) 완공이 1912년이고 러시아 국내 전 구간을 횡단하는 열차 개통은 착공 25년 만인 1916년 일이다. 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가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는다. 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 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건설됐고 대학·도서관·극장 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TSR, 올 들어 개통 102년째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주변은 이제 도시의 중심지가 되어 교통체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곳이 됐다. 블라디는 그러니까 세 얼굴의 사나이다. 군사도시, 국경도시, 극동정책의 전초기지로서의 모습이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오늘 날엔 도심 한복판에 역사가 위치하게 된 때문에 함대배치에는 보안문제가 걸린다. 이를 의식한 러시아 정부는 군사적 기능을 인근 나홋카와 볼쇼이카멘으로 분산시켰다. 앞서 말한 대로 동북아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곳이 됐다. 오랜 기간 동안 외국인 금지구역이었던 곳을 해금조치를 한 것을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미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는 다면성을 보이고 있다. ⑨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4/14 12:37 2019/04/14 12:37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517

‘일당백’하는 윤지오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윤지오
-10년 전 무명배우...오늘은 ‘용기, 끈기, 결기’의 화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년 전 일이 고개를 들어 외치고 있다. 한 신인여배우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싸고 풀어야할 숙제가 만만찮아서인가. 고 장자연 씨 사건은 그동안 묻히고 가라앉길 되풀이하다가 이제 다시 진실규명의 길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국민의 힘이다. 한편으로는 고 장자연 씨와 동료관계였던 윤지오 씨가 일당백을 하고 있는 덕분이다. 지금 그녀는 힘없는 사람의 죽음을 가볍게 무시해버리려는 한국사회의 고질병과 거대권력에 야합하는 습관에 맞서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해나가고 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행이도 검찰 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가 검토 대상 사건에 ‘장자연 사건’ 등을 추가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작년 2월부터 국민청원이 있었다. 청원의 제목은 ‘고 장자연의 한 맺힌 죽음의 진실을 밝혀주세요!’, 이일에 동참한 사람은 총 인원 23먼5천명이 넘어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와 검찰 진상조사단에서는 “여러 각도로 고심하고, 관련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대답을 내놓기에 이른다.

 

윤지오 씨의 귀국과 장자연의 주변 인물

이를 보며 윤씨는 용기를 갖게 됐다고 한다. 그녀는 올 초 <13번 째 증언>이라는 에세이집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캐나다에서 거주하며 시민권을 딸 수 있었지만 한국에 와 언론매체에 출연하며 각종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대검찰청에 참고인으로 출두하여 증언을 하고, 신변보호 요청과 ‘故장자연씨의 수사 기간 연장 및 재수사’를 직접 청원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 일은 현재 73만 명이 넘어 조사기간을 5월말까지 연장하는 결정을 이끌어냈다. ‘장자연 사건’의 전후 관계와 윤지오를 통해서 드러난 점 그리고 그녀가 밀리지 않고 이 싸움을 하게 된 동인에 대해 살펴본다.

그동안 누가 장자연의 죽음을 왜곡하며 덮으려고 했을까?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계약관계에서 갑의 입장이었던 기획사 사장과 매니저 둘째는, 국내 굴지의 언론과 정.재계 인사들 셋째는, 장자연 씨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이용한 정황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선후배 연예인과 장자연 사건에 대해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한쪽은 성상납 강요 및 폭력과 압력을 행사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쪽은 술시중과 성 접대를 받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다. 이에 더해 자신의 꼬인 행보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장자연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취하고자한 이기적인 연예계의 선후배들이 나머지 한 축을 이룬다.

돈 있고, 빽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인적 네트워크가 강고하다 할 수 있다. 이익과 권력을 향유할 수 있는 일에 정보를 공유하거나 담합을 할 수 있는 개연성이 농후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때로는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자신들의 세계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벽을 쌓고 몇 겹씩 가시울타리로 방어벽을 치기도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시간을 끌다보면 모든 것은 ‘덮이게 돼 있다’는 계산이 농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배우의 죽음과 부실수사
 
장자연의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살날이 창창한 젊은 처자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수의 사회 지도층들과 얽힌 죽음이라서 그리 단순하게 취급될 문제는 아니었다. 주연은 아니더라도 당시 ‘꽃보다 남자’라는 인기드라마에 출연한 여배우가 억울한 심정을 밝히며 갑자기 죽었다. 보통사람들의 눈으로 봐도 ‘장자연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을 곱게 볼 리 없다. 그녀로부터 취한 것과 취하려 한 것들이 무엇이었던가를 추측하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식의 수사 종결에 “그건 니들 생각이야!”라는 반발심이 증폭했다. 민초들은 공정한 수사를 요구하길 멈추지 않았다. 유명 인사들이 연루된 수사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검.경은 압수수색에서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애써 외면하고 대충 넘긴 정황이 드러났다. 당사자의 수첩과 휴대전화를 수집하지 않았던 것이다.

주검에 대한 부검도 없었다. 부검은 사망 원인을 상당 부분 밝힐 수 있는 과학수사의 중요한 방법인데도 말이다. 더구나 서둘러 화장을 해버린다. 차후라도 부검을 시도할 수 있는 여지마저 없애버렸던 것이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되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들을 위해 복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다면 이럴 순 없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민초들의 항의와 외침은 마침내 그들의 방어벽을 뚫는 쇠망치가 되기 시작했다. ‘재조사와 기간 연장을 요구하는 청원’에 73만 명이 넘는 사람들과 윤지오 씨가 나섰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국민과 증언자

우리 곁에 찾아온 윤지오는 혼자서 ‘일당백’하는 유지오였다. 10년 전엔 나약하던 윤지오는 ‘용기, 끈기, 결기’를 갖추고 ‘밀리지 않는 싸움‘을 할 줄 아는 당찬 의식의 소유자였다. 숨어 지내던 입장에서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사람이 됐고, 진상을 밝히는 핵심 증언자가 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녀가 방송에서 밝힌 점들이다. “한 언론사에 동일한 성을 가진 세 명이 (문건에) 거론된 것이 기억에 남는다”며 조선일보와 방씨 일가에 대해 증언했다. 이어 장자연을 향한 성폭행과 강간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제시했다. “술을 유리컵 한 잔 정도로 그렇게 많은 양을 마시지 않은 상태인데 의식이 아예 없었던 상태를 여러 번 목격했다”던 점이다. 또한 윤지오는 장자연의 행동은 “술에 취한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술에 탄 무언가가, 타의에 의해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었다”며 장자연 씨가 “성상납을 할 인물이 아니다”라는 점을 확신했다.

만약 “그런 정황이 포착이 됐다면 성상납이라고 표기할 것이 아니라 성폭행으로 표기되는 것이 맞다”며 “재수사가 진행되어 특수강간죄가 인정되면 이 경우 공소시효는 15년으로 늘어난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윤지오 씨는 자신이 바라는 것은 ‘장자연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고인에 대한 명예훼복이라는 점, “늦었지만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은 반드시 바로 잡았으면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죽음의 성격과 공소시효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편, 장자연 씨의 죽음이 단순자살이 아니라면 공소시효가 25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장자연과 같은 회사 소속의 여배우들이 “셋이나 자살을 했는데 누구도 유서가 없었다”며 “언니가 쓴 문건은 유서가 아니라고 본다”는 논지를 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상식적인 추론을 해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유서를 썼는데 ‘남에게 자신의 유서를 돌려달라’고 하는 게 상식에 맞는가 하는 점이다. “언니는 유서라는 문건조차도 쓰고 나서 다시 돌려받기를 원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그렇다면 왜 이문건을 적게 됐는지의 정황과 왜 그쪽(이미숙 매니저 유장호)에서 남의 유서를 보관을 했는지 그리고 왜 돌려주지 않았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좀 명확하게 답변을 해 주셔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밖에도 이상한 점은 또 있다. 장자연씨 및 가족의 계좌에 백만 원 권의 고액 수표가 수십 장 입금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장자연의 유서’라고 하는 문건 역시 그렇다. 그녀의 가족조차도 장자연의 필체가 아니라고 한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문건에 손을 댔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메니저 유장호의 필적 감식이 다른 사람의 필적이라는 주장이다. 하나 같이 의미 있는 관전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3월 초부터 시작한 증언은 점이되고 선이 되고 있다. 선은 연속성을 의미하고 현재 진행형으로서 세인들의 관심과 조명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일전에 윤지오 씨는 종로구의 한 복합문화공간 에무시네마에서 책 108권 찍어 관객들에게 기부 이벤트를 펼쳤다. 며칠 전엔 신변보호를 요청하며 관심을 집중시켰고, 과거 경찰관으로부터 들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도 했다. 신장이 큰 여성은 납치된 전례가 없다는 얘기다. 참고로 윤지오 씨는 자신의 키가 173cm라고 밝혔다.

하나 더, 윤지오 씨의 어머니의 암투병 소식이다. 또 하나의 스토리 추가다. 이런저런 것들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그녀는 용기와 결기와 끈기의 화신으로 거듭해서 진화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들이 총체적으로 작용하여 고(故) 장자연의 억울한 죽음을 가볍게 무시해버리려는 한국사회의 고질병과 거대권력에 경종을 울리면서 ‘결코 밀리지 않는 싸움’을 수행해나가고 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4/10 16:08 2019/04/10 16:08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516

맛과 멋 음식 그리고 비판능력

- 맛과 멋은 경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이 글을 모르면 문맹이라 부른다, 그런데 맹(盲)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색 구분을 못하면 색맹(色盲)이요 맛을 구분 못하면 미맹(味盲)이라고 한다.


흔히 관광지로서 이름을 떨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하는데 풍광이 뛰어나거나 볼거리가 있어야 하고, 식도락을 즐길 수 있도록 먹거리가 풍부하고 음식 수준이 뒷받침 돼야 하고, 한편으로는 몸소 참여할 수 있는 체험거리나 즐길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차별화된 경치나 풍광 또는 유물과 유적이나 역사적인 요소를 통칭하는 것이 ‘볼거리’요. ‘먹을거리’란 맛있는 음식과 특산품을 말하고, 체험이니 즐길 거리라 함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휴양과 숙박시설에 건전한 여흥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말하리라.


오래전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로 구미를 공업단지로 지정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었다.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와서까지 구미에 마구 쏟아 부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장이나 기업이 많아 일자리가 넉넉한 곳이면 돈이 도는 지역이다. 요즘도 경제가 어렵다는 소식이라도 들릴라 치면 여전히 천문학적인 자본과 구제 금융을 퍼부어 살려내는 곳이 경상도 쪽이다.


여하튼 필자는 이런 차이와 차별과 불평등을 보면서 생각한 바가 있었다. 전라도는 ‘기존에 갖고 있는 것만이라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호남이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땅덩어리다. 타 지역에 비해서 풍광이 빼어난 곳이 얼마나 많은지 적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내 고장의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후일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새만금이 시작된 지 34년이지만 개발과 발전은 지지부진하고 그 사이 잃은 것만 많다. 6급수로 전락한 물과 어자원 고갈이 대표적인 손실이다. 하여 주민들의 소득은 새만금 시작 전 보다 1/2로 줄었다고 한다. ‘육식의 저주’인가? 익산의 축산단지에서는 축산물 폐기물로 인해 토양이 오염되고 물에서는 악취가 진동하는 폐수가 됐다. 익산시는 그래서 불법폐기물 155만t 처리에 '3천억 원'이 들어갈 판이라고 한다.


한 번 훼손된 자연을 되돌리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든다. 먹지도 입지도 못하면서 쓰레기 치우는 값으로 수천억이라니! 고비용이다. 자연을 살릴 뾰족한 방법도 있지 않다. 회복의 시간도 기약할 수 없이 긴 세월을 요한다. 자연훼손과 온갖 폐기물과는 불가분의 관계다. 저주가 따로 없다. 이거 누가 시킨 거 아니다. 인간이 자초한 일이다.


호남이 가진 게 또 하나 있다. 음식이다. 음식문화가 어디 하루아침에 조성된 건가. 우리나라의 고인돌 60%이상이 고창과 화순지방에 분포돼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저 멀리 선사시대부터 강과 바다와 드넓은 곡창지대를 끼고 발달된 훌륭한 음식문화는 그 자체가 무형의 역사요 보배라는 것을, 그래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관광지에 가보면 형편없는 음식점들이 눈에 띈다. “미맹이 아니야?” 할 정도로 음식 맛이 형편없는 곳이 있다. 이런 음식점은 경쟁력이 있을 리 없다. 식품위생이며 맛과 멋과 질 관리가 돼있지 않은 거다. 지금은 무한경쟁시대다. 식재료도 구하기 쉽고 내 노라 하는 쉐프도 쌔고 쌨다. 요리법도 공개되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전수받을 수 있는 길이 널려 있다. 그래서 여차 하면 다 도사다. 전문가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이 지점에서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부단한 노력과 향상심이 없으면 머지않아 전라도 맛집은 씨가 마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음식 자랑에서도 명함을 내밀 수 없이 돼버린단 말이다. ‘마태복음효과’라는 말이 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던 것마저도 빼앗기게 된다.’는 말, 부익부 빈익빈의 다른 말이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자연 경관은 형편없이 훼손되고, 칭송이 자자하던 음식문화마저도 별 볼일 없이 된다면 어쩔거나 전라도.


이런 의미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정신 차리고 기존에 형성된 음식문화를 훌륭하게 지키며 관리해야 할 의지가 필요하다. 전라도 사람들은 자각해야 한다. 고장의 음식 수준과 질을 지킬 사람은 전라도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맛없으면 없다고 말하고, 돈 값어치에 비해서 질이 떨어지면 질이 떨어진다고 솔직하게 조언해줘야 한다. 맛과 멋 음식의 질을 잘 지켜서 전라도지방으로 발걸음을 한 사람들의 입에서 “음식 한 번 끝내준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도록 해야 한다. 절대미각을 가진 찬모를 만나거든 “맛있게 잘 먹어 참 고맙다”고 덕담을 건네고,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줄 필요가 있다.


또한 식품위생부에서든 시민단체든 암행 음식 감별사들을 파견하여 맛과 질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자체관리와 자체품평회도 활성화해야 한다. 맛과 멋을 지닌 곳은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다. 관리능력 그래서 필요하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4/04 07:09 2019/04/04 07:09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8434pjr/trackback/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