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과 대종교

‘홍암 나철과 대종교’-①
-대통령에게 초대받은 민족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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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대종교, 혹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제일로 위대한 일을 많이 해놓고도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을 꼽으라면 대종교의 중광자인 홍암 나철을 꼽겠다.’ 말합니다. 대종교는 구한말과 해방 직전까지 항일운동과 항일무장투쟁, 우리말 지키기와 한글사전편찬, 역사바로세우기 등을 통하여 우리민족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교단입니다.

지난 2월18일 문재인 대통령은 천주교·불교·개신교·유교·원불교·천도교·민족종교 등 7대 종단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오찬을 나눴습니다. 취임 이후 두 번째인 이날 오찬은 3·1 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종교계 지도자들을 통해 국민적인 지지를 모으기 위해 마련됐는데요. 종교의 힘을 빌려서 민심에 더욱 다가가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민족종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교세로 보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순서대로 거론하자면 앞서 소개한 천도교와 원불교에 이어 증산교 계통의 종교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음이 대종교라 할 수 있는데 대종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무관심과 망각 속에 묻혀있는 종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종교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혁혁한 발자취는 섣부른 말로는 이루 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크고 높은 찬탄과 경외의 대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에 비해서 항일무장투쟁에 따른 10만 순교와 임오교변 등의 박해와 참살로 인해 교단이 풍비박산 난 사정과 무관치 않은 때문인지 모릅니다. 

홍암 나철과 대종교 중광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홍암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당시는 순천시 낙안면) 금곡부락에서 태어납니다. 한학을 배우며  29세에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벼슬을 청산하고 1904년 구국운동을 위해 비밀결사조직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합니다. 험난한 겨레의 운명을 내다본 자발적이고도 선도적인 행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이 체결 됐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을사오적들을 처단하려는 암살 계획을 세우고 거사하였으나 총기를 다루는 기술이 미흡하여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매국대신(賣國大臣)을 저격하였다는 죄로 10년의 유배형에 처해집니다. 하지만 고종의 배려로 귀양이 끝나자 이후 4차례에 걸친 일본 방문을 통해 일왕에게 항의서한을 보내며 조선침략의 부당함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가 하면 일본 왕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합니다.

홍암의 이런 행적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 순국한 우국지사인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이 남긴 47년간의 기록물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홍암 나철의 을사오적 처단투쟁 상황이나 <일황에게 보내는 상서> 등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는 거죠. 이를 통하여 우리는 나철의 선구적인 항일운동의 일단을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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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대종교 중광에 관해서입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민족의식의 집결을 위해 국조(國祖) 단군숭배 사상을 고양하며 국통맥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이들의 웅혼한 기상은 용광로 속에서 제련된 100%의 순금처럼 지고지순했으며 다이내믹하고도 웅혼한 기상으로 형극의 길을 마다하기는커녕 오히려 항일운동을 재촉하게 됩니다.

나철과 대종교 제자들이 택한 길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도 거침없는 직진이었으며 타협하지 않고 내딛는 투쟁의 거대한 산맥이었기에 뜨겁고 처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닥쳐오는 고난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정면 돌파하였기에 대종교의 여정은 흥미진진하고도 숙연할 수밖에 없었고 희생과 죽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종교 탄생 또한 그야말로 극적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으로만 보면 선뜻 이해하기 힘든, 그에게 닥친 신비스런 이적들이 개입돼 있었습니다. 나철이 대종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필연과 숙명 그 자체가 됐다고 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철이 대종교를 중광하게 된 계기는, 한 노인으로부터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건네받은 일로 시작합니다.

1906년 1월 24일 오후 11시였습니다. 당시 구국운동으로 동분서주하던 나철(羅喆)은 일본에서 막 귀국하던 길이었습니다. 부산을 떠나 서대문역에 도착하여 세종로 방향으로 걸어갈 때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한 노인이 급히 다가와서, “그대가 나철이 아닌가?” 하고 묻고는 “나의 보명은 백전(伯佺)이요 호는 두암(頭巖)이며 나이는 90이다.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고 공(公)에게 이것을 전하러 왔노라.” 하면서 백지에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총총히 사라지게 됩니다.

나철이 집에 가서 풀어보니 『삼일신고』와 『신사기』라 적힌 책이었던 게지요. 그런데 이 책의 본문 앞에는 발해국 고왕(高王)이 지은 ‘어제삼일신고찬문이 있었고, 그 앞에는 왕의 동생인 대야발이 삼일실고에 부치는 서문, 고구려개국공신인 마의극재사가 삼일신고를 정독하는 법, 발해의 문왕이 작성한 삼일신고가 전해진 경위와 유실(遺失)되지 않도록 각별히 보존하려는 각오와 노력을 다짐한 경위서가 실려 있었습니다.

즉 발해 고왕의 삼일신고예찬문(御製三一神誥贊文), 고왕의 동생 대야발의 삼일신고서(三一神誥序), 고구려개국공신 마의극재사의 삼일신고독법(三一神誥讀法), 발해 문왕의 삼일신고보존기((三一神誥奉藏記)가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대로부터 발해국 문왕까지 삼일신고가 전해진 경위가 밝혀져 있고, 그 뒤에 대종교까지 전하여진 경위는 백두산의 백봉과 백전 등 32인이 1904년 10월 3일에 발표했다는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에 있습니다. 나철은 이것으로 인해 단군교를 중광하게 됐습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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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1 14:01 2019/03/01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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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님!


①아래 글은 대통령님이 영국으로 가시기전부터 퇴임 전까지 대통령님을 모신 사저 비서였던신재중 씨가 쓴 글입니다.

상당히 긴 글을 ‘국민뉴스’에 기고했는데요, 글이 전하는 메시를 간추려 보았습니다. 여유가 되시는 분들은 본문 일독까지를 권합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부터 어느 한 지역에 편중됨 없는 온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다.

DJ는 국민의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고, 그중 눈에 띄는 업적은 아래와 같다. 

△수평적 정권교체 △IMF로 텅텅 빈 나라곳간을 채우기 △인터넷, IT 강국, 반도체 세계 1위 △문화강국-한류 초석다지기 △최초 남북정상회담 성공 △목숨을 건 단식투쟁으로 풀뿌리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 실시


박지원과 목포신안에 대한 안타까움

②이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죄송함과 목포 신안 주민들과 후배정치인들의 행태에 대한 안타까운 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목포와 신안 주민들은 기억하기 바란다. DJ의 대통령 당선으로 목포가 어떤 대접을 받았었는지를.

목포는, 민주주의를 향한 기나긴 여정에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 있었기에 전 세계 외신기자들의 취재열풍과 관심을 받던 지역이었다.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다. DJ의 대통령 당선으로 예산 쉽게 받을 수 있어 배불리 밥 지어 먹으라고 식량을 가마니로 마련해주었으면, 밥을 짓는 역할은 누가 해야 할 것인가.

박지원과 목포시장

③박지원을 비롯한 후배 정치인들이다. 박지원이 3선의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독심술과 고단수 눈치가 있다고 믿고 전직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메시지를 국회나 정치권에 대신 전달해 줄 심부름꾼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은 중앙정치의 스펙 쌓기, 자기 계급장 추가에만 매달리기, 평양특사와 전남지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탈당과 입당 등 정치게임에만 매달려 왔다.

역대 목포 시장들도 마찬가지다. 능력 부족과 철학 없음에 자신들의 재선을 위해 선심성 예산낭비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 조사로 인한 시정 공백 등 셀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지 않았는가.

결국, 박지원과 역대 목포시장 들에 대한 평가와 원망은 목포를 상징했던 김대중 대통령님께로 향하게 돼버렸다.

제 역할들을 못한 박지원의원과 무책임한 시장들 때문에 고 김대중 대통령님은 이들이 밉고 야속하고 서운하고 괴로울 것이다. 하늘에서도 편하게 못 지내실 것 같다.

편안한 시간에 커피 한 잔 하시며 꼭 읽어보시고 공감하시면 지인분들과 공유해주세요^^
대통령님 사진 위의 + 를 클릭하여 글씨를 크게 하세요.


우리는 김대중대통령님에 대한 평가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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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1 18:02 2019/02/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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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의 식사

전주에서의 식사

25일 전주 가서 식사를 했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을 거다.

점심엔 서울역사에 있는 빵집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 한 층 올라가서는 거피 숍에 들려 차담을 나눴다.

커피를 위시한 각종 차와 간단한 빵 종류를 파는 커피숍은 그야말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지방과 서울을 이어주는 열차를 이용 승객들과 지하철을 이용객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서 그런가 보았다.

바람 자락이 상당히 드세어 품안이 시릴 정도이드만 서울역사에 들어서자 이곳은 바깥세상과는 영 딴판이다.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이런데 있다가 1시 경이나 돼서 전주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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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는 4시 반 경에 도착하였다. 가는 동안 정안 휴게소에서 한 번 들리고서 이내 내달린 결과다. 지인과 마주한 시간은 5시경, 지역 이야기며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어 현안문제로 들어가 의견을 나눴다. 방문목적에 맞는 성과를 이뤘다고나 할까.

시간이 한참 지나니 배가 고팠다. “전주에 왔으니 저녁은 여기서 먹자!” 교감을 이루고 나서 음식점을 찾았다. 사실 지인들을 통하여 소개받은 곳은 여러 군데 알고 있었다.

올 때마다 콩나물 국밥집도 들리고, 며칠 전 신정에는 한옥마을 근처의 음식에 서 한상 잘 먹었다. 그런데 우린 당장이 문제였다. “어디로 가냐?” 어디 가서 먹어야 잘 먹었다는 소리를 할 수 있지?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맛집을 검색했다. 단풍미인한우 전주점이 낙점됐다. 내비게이션을 찍었다. 단풍미인한우 전주점은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2, 주소를 찾아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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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신발을 벗고 들어섰다. 그러나 모두 입식 테이블로 꾸며진 식당이었다. 입구 오른 쪽에는 한우저장고가 왼편으로는 전라북도의 여러 시군의 이름을  붙인 독립된 별실들이 각각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장수’군에 자릴 잡았다. 메뉴는 갈비탕, 결론은 대만족이다. 12000원 하는 한우갈비탕에 즉석겉절이, 시금치나물, 녹두나물, 오징어채무침, 깍두기, 샐러드, 부침개, 단무지의 일종인 나나스케, 반찬이 모두 8가지나 나왔다.

입에 슬슬 녹는 한우와 개운한 갈비탕의 국물이 일품이었다. 반찬 솜씨에 대해서는 구구한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대만족이었다. 먹고 또 먹고 더 달라고 해서 먹은 빈 접시가 테이블에 가득 쌓여있다. 얼마나 만족스럽게 먹은 저녁 한 끼였는지 두말하면 잔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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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미인한우 전주 점(店) 주인장은 이경희 사장이다. 훤칠한 키에 상냥하고도 붙임성 있는 용모와 매너의 소유자, 수십 년간 봉사로 잔뼈가 굵은 여장부라 한다. 이번 겨울철에 직접 담근 김치 100여 박스를 들고 어르신들을 찾았다고 한다. 여사장의 말 "내 입에 놓지 못하는 먹거리라면 남의 입에도 넣어서는 안 된다. 정직한 먹거리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먹거리가 생명이다. 내 생명도 남의 생명도 지켜가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입장에서 더 반가운 것은 무엇보다 절대 미각을 가진 이경희 여사의 음식솜씨로 만든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더해서 단풍미인한우 전주점을 들리는 나그네들이 돈 아깝다는 소리 안하고 “모처럼 밥 한 번 잘 먹었다”는 소리를 할 수 있겠다는 점이다. 입맛 까다로운 필자는 더 그렇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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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14:36 2019/01/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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