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감독

분류없음 2017/04/06 02:26

김성근 감독. 생각할 때마다 좀 짠하다. 아니, 많이 짠하다. 사실 "야구 감독"으로서 김성근 감독만한 사람이 없긴 없다. 세밀하고 치밀한 그의 계산야구. 패넌트레이스 대장정의 한 게임에 불과한 그 날의 게임에서조차 박빙승부에서 모든 전력을 투여하는 그의 전술운용을 보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한다" 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멋있고 울컥하게 만든다. 마치 아이엠에프 (IMF) 를 가까스로 이겨내고 살아남은 가장 (家長, breadwinner) 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명 (resonating)하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수많은 혹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 혹사 논란의 당사자들은 그를 여전히 존경하고 따른다 (물론 내막은 자세히 알 도리가 없다). 김성근 감독이 지닌 장점 가운데 하나인 정서적 올바름 (emotional correctness)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뭐라하든 당사자들은 깊은 감동과 동기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나를 알아준다" 는 가장 기본적인 인정욕구를 김감독을 통해 충족했다면 그 개인에게 그보다 더한 자기만족감 (self-actualization) 은 없으리라.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간혹 울컥 화를 내고 맥락도 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적이 없진 않았어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도 있었다. 철도청과 국책은행에서 24시간 맞교대 노동을 하실 적에는 그 하루를 쉬는 날에도 다음 날에 출근해야 하는데도 최선을 다해 곤충채집에 함께 나서주시곤 했다. 어느 겨울날엔 큰 방패연을 만들어주셨고 바람이 강하게 불던 날 그 연이 멀리멀리 날아가버리자 울먹이는 당신의 딸에게 원래 연을 저렇게 멀리 날아가야 인생이 편안하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그 땐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기도 하다. 교대근무를 해보니 24시간 맞교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노동인지 깨닫게 됐다. 아버지는 "원래"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던 것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임노동자로 살아가는 면에선 적합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건강보험이 보편적복지로 자리잡기 한참 전이던 1980년대에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대단한 특권 (privilege) 이었다. 어머니는 늘 노심초사하시며 아버지의 심기를 살피셨는데 결국 아버지는 철도청은 1년만에, 국책은행은 2년만에 때려치셨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는 다시 날품팔이 장사에 나가셨다. 먹고살아야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아버지는 월급을 받는 직장을 다시 얻지 못했고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 으로 변해갔다. 마침 묵혀둔 땅이 팔려 집에 돈이 넘쳤어도 역시 아버지는 나에겐 이상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기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주변 사람들 모두 아버지를 "좋은 사람"으로 말한다는 것이었고 평판이 대단히 좋았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시절까지, 부모님 집에서 나와 따로 살기 전까지 나에겐 이것이 견딜 수 없는 지독한 모순이었다. 아버지의 평판을 추켜세우는 그들에게 아버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 이었을는지는 몰라도 나에겐 정서적으로 결코 그렇지 아니한 "이상한" 사람이었다.

 

 

다시 김성근 감독 이야기. 이글스 구단은 작년 김감독의 계약 기간을 지켜주기로 결정했다. 다만 선수 출신인 박종훈 단장을 영입해 팜시스템을 맡겼다. 뭔가 이상했지만 이글스 구단이 이제서야 정신을 차렸구나 싶어 반가웠다. 한편, 김감독이 많이 고생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감독 스타일에, 만기친람 (萬機親覽, micro-management) 하는 그의 성정상 잡음이 많이 일겠구나 싶었다. 역시 불필요한 잡음이 일고 있다. 이글스 구단의 감독으로 취임한 뒤로 자신의 뜻대로 전권을 행사해온 김감독 처지에선 당혹스럽다 못해 자존심이 극도로 상하는 일이다. 2군에서 선수를 올려 직접 보겠다는데 왜 안된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1970년대, 80년대엔 아니, 김감독이 야구를 시작한 이래 그는 늘 그렇게 야구를 해왔다. 그런데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김감독이 바뀐 사정에 적응할지 아니면 고집을 부려 "이상한 사람" 모드를 지속할지 지켜봐야겠다. 그날그날 장사해 먹고사는 보부상과 십년지대계로 멀리 보고 장사하는 대상인의 접전같다. 누가 이길지 자본력만 놓고 보다면 뻔한 게임이지만 그 와중에 어떤 변화를 보일지 과연 김감독은 변할 수 있을지 자못 기대된다. 만약 김감독이 이 국면에서 대전환을 보여준다면 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김감독의 광팬-추종자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모르겠다. 박근혜가 자기 죄를 시인하면 김감독도 바뀔지도 모를 일.

 

 

다시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는 연세를 잡수시면서 더욱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가셨다.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느날부터인지 조갑제 씨가 집필한 책을 사시고 구독하던 신문도 한국일보에서 조선일보로 바꾸셨다. 한국일보가 빨갱이 신문이라는 이유였다. 딸이 셋이나 있는 양반이 갑자기 남아선호사상의 신봉자로 돌변하셨다. 어느 날엔 당신 자식들이 밥을 먹으며 영화 "화려한 휴가"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갑자기 끼어들어 "광주 것들을 모두 잡아들여 몰살시켜야 한다"는 끔찍한 말을 하시어 당신 자식들을 질색하게 하셨다. ... 간혹 친박부대의 박근혜엄호 집회 기사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저 자리에 계신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고 지낸 지 어언 십년 차에 접어든다. 이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는 걸까 아예 아무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아버지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보수화 (conservative swing)" 라는 당신의 진로를 잡으셨고 그게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변화" 다. 연락 없이 지낸 그간의 십 년의 세월동안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 되셨을까. 손주손녀도 보셨으니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계실까, 아니면 당신이 마감하실 말년까지 당신의 옳음을 입증하려 애쓰시는 분이실까.

2017/04/06 02:26 2017/04/06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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