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력발동
분류없음 2016/01/22 06:14
1.
정치란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이다. 결과가 아니다. "막상 만나서 얘기해보니까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서로 한 발 양보하는 선에서 얘길 마쳤어요." 이것은 정치의 결과, 그러니까 "갈등을 조정한 과정의 결과" 다.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이 서로 그 문제(갈등) 를 1) 적정 수준에서 2) 함께 풀어냈다면, 이 과정은, 정치는 잘 한 셈이다. 절반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따라서 정치는 자연히 관계의 문제로 된다. 정치라는 행위는 인간이 둘 이상 모여 살아가는 곳이면 노상 발생한다. 커플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일터에서, 동네에서, 버스에서, 식당에서, 꼬마들 놀이터에서도. 그런데 그 개인(들, individuals)-사람들이 처한 처지, 그들 각각의 요구 (니즈, needs)와 각자 지닌 자원 (리소스, resources) 은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 각각의 처지, 요구, 자원에 따라 두 사람의 혹은 각 관계의 힘의 크기 (power balances)도 달라진다. 따라서 누군가 말한 "정치는 자원의 효과적인 배분" 이라는 것도 그 말 자체로는 일리가 있어 보인다.
2.
약관의 나이에 처음 들었던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노동자 계급 정치" 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분명한 선언으로 다가왔다.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갈등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주체로 서겠다는 어찌보면 발칙하기까지 한 이 말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어렸고, 기운이 넘쳤고, 지금보다 더 심각하게 좌정관천 ( 坐井觀千) 하는 경향이 컸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분명하고 매력적인 이 말이 닿기 어려운 유니콘의 세계에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미래가 어두워졌고 시쳇말로 "전망을 수립할 수 없는" 그런 당혹감이 커졌다.
아마도 "개인 대 개인" 이라는 주제에서 거대담론으로 급작스럽게 이동한 탓이 아니었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노동자 정치라는 것도 노동자 개인들이 하는 일인데 노동자 개인들이 지닌 각자의 요구와 처지, 그들이 삶에서 겪는 질곡들을 들여다보고 관찰할 여유와 속내를 지니지 못한 채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상현실을 그려낸 셈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니가 [노동]현장 경험이 없어서 그래. 먹고사느라 박터지게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봐라" 며 현장행을 권하기도 했고 실제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나도 "먹고사느라 박터지게" 살고 있었다. 그들이 들여다봤을 때는 설렁설렁 얼렁뚱땅해보였을 나의 삶이 사실은 나도 나름대로 "박터졌는데" 그것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설명했다한들 그들을 설득하여 차이를 좁힐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정치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3.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를 참 잘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의 공공자원을 잘 배치하는 정치를 하기보다는 갈등을 증폭하고-혹은 없던 갈등도 만들어내고 사회의 공공자원을 한 쪽으로 몰빵하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정치" 라는 화두로 돌아와 냉정히 생각해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그녀가 속한 계급 사회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최고의 계급정치를 하고 있다. 그녀가 지향하는 계급이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주체로 서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근혜 대통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갈등과 대립이 필요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갈등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많은 자원의 몰빵이 일어날 것이다. 솔직히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원하는 갈등과 몰빵에서 손해보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를 참 잘 못하는 것 같다" 고 말하는 것 뿐이다.
"노동자 계급 정치" 라는 말을 하면 뭔가 구태의연하고 스탈린 담배 피는 시절 소리 같은 그런 늬앙스를 줄 수도 있겠지만 - 따라서 별로 애써 목구멍 밖으로 꺼내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 "계급정치"를 애써 말하지 않고도 훌륭히 (!) "계급정치"를 구사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자니 내가 원하는 "계급 정치"는 대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계속 갈등의 희생양 (scapegoat) 이 되어 손해만 보고 살자니 뭔가 대단히 억울하다.
* 이 와중에 심금을 울리는 정희진 여사의 칼럼. 오늘 읽은 아티클 가운데 가장 찝찝하지만 정확한. 그래서 더 억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