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와배추
분류없음 2016/02/11 16:05
고향에 있을 적엔 감자는 그냥 감자였다. 종류도 맛도 향도 그렇게 다양한지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일 때에는 해마다 강원도로 농촌활동을 간 탓에 정말 감자를 물처럼 먹었던 때도 있었다. 감자국, 감자밥, 감자조림, 감자전, 옹심이... 여름농활할 적에 수확한 감자가 남으면, 혹은 감자에 상처가 나면 땅에 묻었다가 가을이나 겨울농활할 적에 꺼내어서 이렇게저렇게 떡을 만들거나 사료로 만들어 사람도 먹고 소도 먹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하루 종일 감자밭에 쪼그리고 앉아 호미질을 해도 끝없이 나오는 감자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간혹 고속도로 휴게소를 지날 때마다 먹었던 작은 알감자도 생각난다. 언젠가 자줏빛이 감도는 감자를 먹었던 기억도 있는데 그렇게 인상적인 맛은 아니었다.
서유럽 문화가 지배적인 식문화에서 감자는 우리의 밥 (쌀밥) 에 대응하는 격을 갖는다. 로스트비프나 스테이크나 혹은 폭챱 같은 것을 메인디시로 먹으면 반드시 감자를 먹는다. 매시드포테이포나 통채로 구운 감자 따위에 치즈를 곁들여 먹기도 하고 다양한 드레싱을 섞어서 풍미를 더한다. 심지어 햄버거에도 감자가 꼭 따라나온다. 바로 프렌치프라이. 영국인들이나 북해 연안 국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피시앤칩스도 생선요리와 감자튀김이다. 아니면 포테이토칩처럼 군것질거리로 소비하기도 한다. 부활절 (Easter) 이나 추수감사절 (Thanksgiving), 크리스마스 같은 명절을 앞두고 큰 푸대자루에 담긴 감자를 사가는 사람들의 풍경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감자는 서양인들에게 머스트해브아이템오브머스트해프아이템스온더테이블이다.
감자는 유럽인들의 역사를 바뀌어놓기도 했다. 1840년대에 시작한 대기근이 끝났을 때 아일랜드의 인구는 무려 절반으로 줄었다. 감자흉년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고향을 떠난 아일랜드 사람 가운데 많은 이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등 신대륙에 정착했다. 꽃개가 사는 도시 한가운데에 양배추마을(Cabbagetown) 로 불리우는 곳이 있다. 19세기 중후반, 감자 대기근으로 고향을 등진 아일랜드 사람들이 대거 정착한 곳이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들은 양배추를 심기 시작했고 양배추가 조석으로 밥상에 올랐다. 재개발 (Gentrification) 이 한창 중인 그 곳에 아직 쫓겨나지 않은 이민자들이 여전히 많이 살고 있지만 오늘날 이민자들의 얼굴 색깔은 19세기 그들의 얼굴 색과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아프리카, 혹은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다. 19세기에 고향을 등진 그들의 후손은 이미 그 곳에 살지 않거나 살더라도 재개발이 끝난 고급주택이나 콘도에 산다. 그리고 양배추밭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감자나 양배추 (배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게 또 있다. 바로 김동인 (金東仁) 의 "감자 (1925)". 복녀는 감자와 배추를 훔치다가 왕서방에게 걸리지 않았나. 또 하나,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의 "감자먹는 사람들 (1885)" 이란 그림도 있다. 이 그림은 뒤에 케테 콜비츠 (Käthe Kollwitz) 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난과 삶의 치열함에 대한 영감을 줬지만 정작 당대에는 외면당했다고 전한다.
종종 감자를 삶아 먹는다. 며칠 전 먹었던 감자가 제법 맛이 좋아 오늘도 감자를 너댓 개 삶았다. 맛이 딴 판이다. 퍽퍽하고 잘 부서진다. 껍질도 딱딱하다. 아마도 매시드포테이토에 걸맞는 그런 품종인 것 같다. 가격을 따져보니 지난 번에 먹었던 노란 감자가 아마도 서너배가량 비싸지 않았나 싶다. 그렇구나. 역시 비싼 게 맛있구나. 싼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그 옛날 아일랜드 민중들과 복녀는 어떤 감자를 먹었을까. 오늘 내가 먹었던 그 퍽퍽한 흰 감자였을라나. 아이고 오늘 산 저 감자를 어찌 다 해치울꼬. 고향에서 먹었던 그 찰지고 달콤한 감자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