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깼다
분류없음 2015/12/23 22:57
두 명의 클라이언트끼리 언쟁이 붙는 사고가 있었다. 서로 욕을 하고 싸우다가 그 중 한 명 (A)이 사무실로 와서 "저 인간은 미쳤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라며 자신을 변호했다. 당연히 나머지 한 명 (B)도 사무실로 와서 "나는 당장 경찰을 부를거야" 라고 소리를 지른다. 졸지에 성난 둘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둘은 나를 사이에 두고 또 싸우기 시작. "너네 당장 니들 방으로 가. 안 그러면 둘 다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거야. 경찰 부르는 거는 니네들 권리니까 니들이 알아서 해"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계속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둘. 그러다가 B가 A를 팔꿈치로 살짝 밀쳤다. 상당히 은연 중에 발생한 일이고 '한국적' 가치관으로 보자면 '폭력' 축에도 못 미치는 일이지만 먼저 상대에게 손을 댄 사람은 B다. 상황이며 이유 불문하고 이럴 땐 당연히 B가 문제로 된다. A가 부른 경찰이 왔고 경찰은 그들, 그리고 나를 따로따로 인터뷰 했다. 나는 내가 본대로 진술했다. 어찌저찌하여 상황 종료. 말싸움이야 그렇다치고 무조건 먼저 상대방의 몸에 손을 대면 '지는 거다'. 간혹 한국인을 비롯해 이민온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떠나온 나라에서 하던 습관대로 상대를 때리거나 밀치거나 을르다가 철창행 신세를 지는 사람들 (대다수는 남성이다) 을 본다. 얄짤없다. 아무리 억울해도 먼저 때리거나 밀치거나 '죽여버린다' 따위의 말을 하면 경찰은 그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다 (uttering threats charge; death threats charge; assault charge). 혹시라도 캐나다 이민이나 단기체류를 고려하는 남성분들은 명심하시길 바란다. 특히 부부나 사실혼 (common-law) 사이에 발생하는 폭력은 가정폭력 (domestic assault charge) 이 되고 가정폭력은 나중에 판결을 받아도 가중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가령 집행유예 (Probation) 를 받아도 보통 폭력이 1년이라면 가정폭력은 2년, 3년을 받는다. 보석 (Bail) 으로 나와도 줄줄줄 서류 한 장 가득 조건을 달고 나올 수 있다.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자기 나라에서 하던 식으로 여자를 때리거나 상대를 협박하면 '진다'. 이 나라 경찰, 검찰은 술 마셨다고, 나중에 의사가 될 거라고 봐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나라에 오실 남성분들, 이것만 명심하고 살아도 경찰신세질 일이 거의 없다. 억울할 일도 없다. 싸우실 땐 양손을 팔짱 끼고 싸우면 된다. '죽여버린다'는 말 대신에 '폭풍방귀를 뀌어버리겠어' 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어찌되었든 "먼저 손대거나 협박하면 진다." 이게 이 나라의, 이 나라 사람들의 메뉴얼이다.
언젠가 이 나라에 이민오신 지 십여 년 된 한 분께서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충 "한국사람들은 개개인은 참 똑똑하고 뛰어난데 모아놓으면 엉망진창이고 캐나다 사람은 개개인은 참 별로고 느려터진 데다가 해결능력도 떨어지는데 시스템으로 따지면 한국이 절대 따라갈 수 없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지난 번에 강아지가 지하철 선로에서 구출된 사례를 봐도 그렇고 이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안다. 지하철 선로에 강아지가 드러누워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가령 한국이었다면 의로운 개인 (용감한 시민)이 나서서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거나 역무원을 다그쳐 강아지를 구출하라고 할 가능성이 더 높다. 지하철 안와서 나 늦으면 니네가 책임질거야?! 시민들의 호통과 성화가 들불처럼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역무원들도 지하철 운행 중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119와 수의사를 부르고 역장은 운행 중단 결정을 내려 종합사령실에 보고를 하여 시민들의 협조를 안내하는 그런 상황을 기대하기가 참으로 요원하다. 메뉴얼이 없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비상 메뉴얼이 있어도, 분기에 한 번씩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훈련 (예. 예비군 훈련)을 해도 그 비상 메뉴얼이 비상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세월호 사건만 봐도 그렇다. 십오 분 안에 충분히 탈출할 수 있는 비상메뉴얼이 있었다. 있었을 것이다. 버스, 기차, 선박 등 여객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장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상 징후가 발생하면 당장 그 이상징후를 해결할 '판단'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 내리라고 했는데 아무 이상 없으면 네가 책임질거야? 손해를 네가 책임질 거냐고!" 책임은 그렇게 소리치는 그 사람이, 혹은 그 관리자가 져야 한다. 역할 분담과, 책임 분장이 치밀하지 않으면 일반 시민, 개개인은 스스로 나서서 자기를 지키려고 애쓴다. 혼란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무너진 시스템은 바로 그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무너진다. 확인사살이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은 과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무너진 시스템, 작동하지 않는 메뉴얼, 용감한 시민 (예. 의인 김동수 씨) 이 나서거나 개인이 나서서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답이 없는 그런 엉망진창인 나라가 되어버렸을까. 슬프다. 세월호는 다만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무섭고 또 무섭다.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비명횡사하기 전까지는. 급사하기 전까지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그 삶을 "잘 사는 것" 이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불안감마저 벗어던지고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죽기 전까지는 어쨌든 살아있는 거니까. 그래서 안전불감증이 사라지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 아침 일찍, 자다가 깼다. 꿈을 꿨는데 꿈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포스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