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유산
분류없음 2015/04/02 05:45한국에서 다나 포파 (Dana Popa)의 사진전이 열린다. 언뜻 보면,
소년인 듯, 소녀인 듯 -- 어른에게 이런 표현은 좀 그런가.
아저씨인 듯, 아줌마인 듯 -- 어른에게 이런 표현도 좀 그런가.
바이너리 전형으로 딱 떨어지지 않아 더 좋은 다나 포파.
그의 사진도 그렇다. 뭐라고 딱 설명하기 어렵다. 컨템포러리.
동구의 몰락은 -- 공산주의의 몰락은 어릴 적 기억 한 켠에 "봐라, 민주주의가 이겼다" 는 주변 어른들의 말씀으로 남아있다. 경악스러울만치 충격적이었던 것은 두 개의 이미지인데 하나는 차우세스쿠 (Ceausescu)의 죽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시 동독의 대빵이었던 호네커 (Honecker)와 소련의 오야였던 브레즈네프 (Brezhnev)의 키스 장면이다.
첫째는 차우세스쿠 처형 직후 그 사진이 서구 미디어로 흘러나간 것을 한국에서도 그대로 내보내면서 나같은 꼬마도 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처형"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시무시함과 더불어 어제까지 국부였던 이가 오늘 아홉시 뉴스에 시체로 나오는 장면은 드라큘라를 보는 것처럼 어쩐지 감당하기 힘들면서도 쫄깃한 짜릿함을 줬다. 둘째 이미지는 아마도 독일 통일 과정에서 홍수처럼 쏟아져나오던 미디어의 자료화면 가운데 하나였지 않았나 싶다. 코카시언 두 남정네 노인들이 부여잡고 강렬하게 키스하는 그 모습은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추하지도 않았다. 그저 신기했다. 아, 서양인들은 다 저렇게 키스를 하는구나. 좋네. 우리도 저렇게 하면 좋겠다. 김영삼이랑 김일성이랑.
차우세스쿠는 나에게 거리의 인민들이 모두 체조를 할 것만 같았던 루마니아에 체조요정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려줬다면 좀 그런가. 그 루마니아를 다나 포파 (Dana Popa)가 기록했고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사진전 제목도 역시 "아워 파더 차우세스쿠 (Our Father Ceausescu)"이다.
나는 사람들이 전체주의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그 때에는 모두가 불안했었을 것이다. 혁명 이후의 루마니아는 자본주의의 단점도 받아들여야했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민주주의가 왔지만 독재정권 시절에 권좌에 앉았던 사람들이 민주주의 시대에도 그 권좌를 유지했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은 이전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극심히 가난했고, 물가는 매년 급격히 상승했다. 미래에 대한 안전판과 희망이 없었기에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길 원했다.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한국에서 사시든지, 외국으로 이민하여 사시든지 한국에서 태어나시고 박정희 시대를 경유하신 많은 어르신들 가운데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많다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언젠가 아버지도 박정희가 유신을 단행한 그 해부터 인생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의 유신과는 하등 상관이 없지만 우연히 시절이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아버지의 넋두리를 듣던 당시엔 아버지의 머릿속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물론 지금도 그 사정을 이해하기란 요령부득이다.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기구 (WTO, Warsaw Pact) 가 대립하던 시절의 동구권 나라나 여전히 정치가 흉흉한 남미 몇몇 국가에서 이민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당시 자기들 나라의 정치인들을, 독재자들을 썩을 놈, 후레자식이라고 욕하는 경우가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줄 수 있니,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면 묘한 겹울림이 담긴 말들을 한다. "그래도 그 때는 다같이 가난했어" "빈부격차는 없었지, 모두 다 가난했으니까" "모두 다 가난했지만 집걱정은 안 했어" "마약은 꿈도 못 꿨어. 걸리면 사형이니까" "엄마들의 요리솜씨가 더 나았던 것 같아. 제한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야 하니까"
짝꿍과 대화를 나누며 박정희 시대를 회상하는 이들의 이면엔 모두다 가난했던, 모두다 빌어먹었던 그 시절에 대한 퇴행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나눴다. 그리고 그 때엔 공부를 하면 개천에서 용까지는 아니어도 토룡탕 정도까지는 거듭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가면 그래도 제 식구 뉘일 전세집 하나 마련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일자리 정도는 건사할 수 있었다. 오늘 정부미를 먹어도 내일은 뽀얀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꿈 정도는 꿀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날에는 결단코 어렵거나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린 것이다. 백미에 고깃국을 매일매일 먹어도 불안하고 막연한 희망없는 내일. 이게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인 셈이다. (퇴행은 나만 겪는 게 아니었다.)
나는 박정희를 그리워한다는 어르신들이 중정을 앞세워 언론을 탄압하고 한국적 민주주의란 미명 아래 정당정치와 민주주의를 싹다 밀어버린 그 '전체주의'를 그리워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엊그제 막걸리 마시며 신세한탄하던 옆집 아제가 국가보안법으로 형무소에 갔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모두 다 가난했고 모두 다 빌어먹었지만 쌀톨같을지언정 삶의 희망이 있던 그 시절의 "좋았던 점"을 무한반복하는 것 뿐이라고 여길 뿐이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인생이 잘 풀렸다는 것도 그저 그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나 포파 (Dana Popa)는 그의 작품에서 혁명을 온몸으로 겪어낸 어른신 세대가 아닌 젊은 세대에 초점을 맞췄다. the bittersweet changes 라 말할 수 있는 혁명의 유산.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의 부모 세대는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다나 포파 (Dana Popa) 홈페이지 http://www.danapopa.com/projects.php
*사진 가져온 데 http://blogs.discovermagazine.com/intersection/files/2009/09/14-sovietleaderleonidbrezhnevandeas.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