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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연루자들의 공통점은..." 이탄희의 확신

 

소중한(extremes88)[서초산성 ⑦] 에필로그 - 판사 이탄희, 변호사 이탄희
등록 2019.08.30 07:48 수정 2019.08.30 08:20
 
사법농단이란 초유의 사태 이후 사법개혁 목소리가 높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독일 현지에서 약 1700km를 누비며 그 해법을 고민했습니다. 이 연속보도를 통해 '서초산성'이 되어버린 한국 법원이 나아갈 방향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 사법농단 사태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변호사. ⓒ 남소연


취재차 독일로 떠나기 전, 많은 이들로부터 "그 사람들에게 사법농단을 잘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 섞인 조언을 많이 들었다. "외국인들은 전관예우란 단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는 각자의 경험담과 함께.
 
실제로 그랬다. '사법농단'이란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재판거래'나 '법관 블랙리스트'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애를 먹었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일의 법조인들을 만나, 주어진 인터뷰 시간 중 절반을 사안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 써야 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들의 얼굴이 비로소 어두워져야, '이제 조금 설명이 됐구나'라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사법개혁의 힌트를 얻기 위해 독일에 다녀온 뒤인 지난 7일, 서울 광화문역 인근에서 이탄희 변호사(전 판사)를 만났다. 그도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판사 시절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던 그는 "사법선진국뿐만 아니라 민주주의가 확립된 근대 국가 대부분은 법원을 재판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우리처럼) 법원을 피라미드 구조, 위계조직으로 생각하는 곳은 거의 없다"라며 "보편적 시각에서 볼 때 사법농단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잘못된 일인지 제대로 음미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2017년 2월 법관 블랙리스트 관련 지시를 거부하고 사표를 낸 뒤, 이 변호사는 많은 해외 법조인들과 그 내용을 공유했다고 한다. 그는 "다들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대법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을 공관에 가서 만나고, 대법원장이 피고의 법률대리인을 집무실에서 세 번이나 만난 것 자체에 경악한다"라며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들(사법농단 연루자)이 재판을 한다는 것에 또 한 번 경악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법조계에 일본에서 들여온 문화가 많다, 지난 70년 동안 변화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직역보다 더 심할 수 있다"라며 "법원을 하나의 위계조직으로 생각하는 것이 특히 그렇다, 다른 나라는 다 안 그러는데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다면 일단 의심해보는 게 좋다"라고 쓴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 변호사는 인터뷰 동안 "법조계에 일본과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면 그건 잘못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반복해 강조했다.
 
요원과 법관
 
이 변호사는 사법농단에 연루된 이들을 법관이 아닌 '요원'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설명하는 요원의 특징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심리적으로 노예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뭐든지 은폐하고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법관이 지녀야 할 덕목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 변호사는 "법관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 본인의 법정에서 주장과 증거를 통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또 은폐가 아닌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사람이다"라며 "근데 (사법농단에 연루된) 법원행정처 법관들은 진상조사 과정에서 사안을 은폐하려고 했으며 '다 시키는 대로 했다', '수족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더 무서운 건 한 번 요원의 덕목을 내면화한 사람은 완벽히 법관의 상태로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는 그걸 확신한다"라며 "국민들은 사법행정 잘하고 제도설계 잘하는 법관을 존경하는 게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법관이 잘 할 수 있는 건 재판이다, 법관은 재판만 잘하면 된다"라며 "사법개혁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법관은 재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법관은 재판만 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법원을 떠난 이유와도 비슷했다. 2017년 2월 이 변호사의 첫 사표는 반려됐으나 이후 사법농단의 실체가 속속 드러났고, 그는 2019년 1월 다시 사표를 낸 뒤 결국 법원을 떠났다. 이 변호사는 "(사법농단이 알려지고) 막상 일이 진행되는 걸 겪어보니 진실이 드러나는 걸 막고 싶은 사람들이 있더라, 거기에 맞서 싸우는 게 투쟁 아니겠나"라며 "그 과정에서 제가 운동하는 사람에 가까워졌다는 걸 느꼈다, 그러한 점이 제가 생각해 온 법관의 모습과 달랐기 때문에 법원을 떠났다"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그런 기준이면 진짜 법원을 떠나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래서 끊임없이 빨리 나오라고 외치고 있다"라고 답했다.
 
"난 안 변했다" 
     

▲ 사법농단 사태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변호사. ⓒ 남소연


독일에서 마주한 사법 시스템의 원리는 '견제와 균형'이었다. 이 원리에 입각해 아주 촘촘한 장치들이 행정부·입법부·법원 곳곳에 마련돼 있었다. 큰 틀에서 행정부가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독일의 제도 자체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긴 어렵겠지만, 견제와 균형이란 원리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 변호사가 강조한 "법관은 재판만 잘하면 된다"는 원칙과도 연결돼 있다. 사법농단 사태에서 볼 수 있듯, 독점과 독선의 체제는 법관이 재판 외 다른 것의 눈치를 보게 만든다. 그는 "대법원장이 평판사부터 대법관까지 모든 법관의 임명 과정에 관여하고, 주기적으로 진행되는 전보·승진 및 법원장 보직 권한까지 갖고 있다"라며 "국회가 법관을 탄핵하는 건 삼권분립 차원에서 견제와 균형에 충실한 행동인데도 이에 역행하는 행동인양 한쪽에서 몰아세운다, 제도적으로 문화적으로 모두 독점과 독선에 가까운 사법 시스템이다"라고 비판했다.
 
사법농단 사태 후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현 대법원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넘겼다. 지난해 12월 제출된 이 개정안의 주된 내용은 ▲ 사법행정회의 및 법관인사운영위원회 신설 ▲ 법원행정처 폐지 및 법원사무처 설치 등이다. 현재 이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변호사는 "개정안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잘 투영돼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최소한 내부에서 자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공감대를 만들 정도로 지속적인 자정운동이 필요한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현재 대법원의 리더십이 그런 의지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은 사법발전위원회 및 '사법발전위원회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 후속 추진단(아래 후속 추진단)'의 제안보다 후퇴한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사법농단 연루 법관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묻지 않고 대거 면죄부를 줬다(대법원은 검찰이 넘긴 비위 명단 66명 중 10명만 징계했으며 현재까지 징계 법관이 누군지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 - 기자 주)."
 
이 변호사는 그 동안 인터뷰에서 현 대법원과 관련해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여왔다. 그는 이전 인터뷰에서 "아직은 말을 아끼고 싶다"(2월 11일 <한겨레>),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많지만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5월 14일 KBS <김경래의 최강시사>), "리더십이 좀 약한 면이 있다"(6월 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경각심을 갖고 지켜봐야 겠다"(6월 10일 <시사in>)라고 이야기해왔다. 이번에 만난 이 변호사의 비판 수위가 훨씬 높아진 셈이다.

그는 "시기마다 현 대법원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질문에 "내가 변한 건 아닌 듯하다"라며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법관의 덕목
 
앞서 말한 대법원 개정안에 담긴 사법행정회의는 사법행정사무에 관한 '심의·의사결정기구'로 규정돼 있다. 의장을 맡는 대법원장을 포함해 위원 11명으로 구성되며, 여기에는 법원행정처를 대신해 신설되는 법원사무처의 처장(비법관 정무직)도 들어간다. 나머지는 전국법원장회의 추천 법관 2명, 전국법관대표회의 추천 3명, 외부위원 4명으로 채워진다. 한편 인사운영 부분은 법관인사운영위원회를 설치해 맡기기로 했는데, 이곳은 전원 법관으로 구성된다.

사법행정회의는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독점을 막기 위한 신설하려는 기구다. 당초 후속 추진단에선 사법발전위원회를 총괄기구로 규정해 대법원장의 힘을 '1/N'로 제한하는 안을 내놨다. 하지만 대법원 개정안에 담긴 내용은 총괄기구가 아닌 심의·의사결정기구였다. 이는 사법행정의 총괄 권한을 여전히 대법원장이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후퇴안'이란 비판이 나왔다. 뿐만 아니라 사법행정회의 위원의 다수, 법관인사운영위원회 위원의 전원이 법관으로 채워지는 것도 논란의 대상이다.
 

▲ 사법농단 사태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변호사. ⓒ 남소연


이 변호사는 위원 구성 및 운영에 좀 더 방점을 뒀다. 그는 "사법행정회의가 실질적으로 힘 있는 기구로 출발하면, (심의·의사결정기구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결국 총괄기구로 만들어질 수 있다"라며 "중요한 것은 외부위원이 실질적 권한을 갖도록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법관징계위원회, 법원감사위원회 등 지금까지 외부위원이 참여하는 위원회가 여럿 꾸려졌다. 근데 이게 다 유명무실해서 사법농단을 막는 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위원들 거의 모두가 거수기 역할만 했기 때문이다. 외부위원이 권한을 가지려면 상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또 외부위원 숫자를 최소환 법관 위원과 동수로 구성해야 한다. 한쪽 집단이 무리하게 의결하려고 할 때, 다른 집단이 이를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또 사법행정회의 안에 법원사무처장이 위원으로 들어가게 설계돼 있다. 비법관이라고 하더라도 법원사무처장은 일상적으로 사법행정을 집행·총괄하는 사람이다. 법원사무처장과 일반 위원들의 정보는 엄청난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3일 전에 회의 자료 보내주고 겨우 1~2시간 회의를 진행한 뒤 법원사무처장이 쭉 설명하면서 '이거 통과시켜 달라'라고 하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위원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 그냥 법원사무처장이 원하는 대로 통과만 시켜주는 기구가 되고 말 것이다."

 
이 변호사는 법관인사운영위원회가 전원 법관으로 채워지는 개정안 내용도 "견제 받고 싶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게 두려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법원행정처를 없애고 법원사무처를 만드는 것과 관련해선 "이름을 어떻게 바꾸든 법관은 그 안에서 모두 빠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 법원 내부에선 인사권만큼은 법원이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 것 같다.
"법관은 재판하는 사람이다. 헌법 어디에도 법관이 꼭 법관을 뽑아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관이 되고 나면 통제가 쉽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누가 법관이 되느냐'는 법원 외에서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다양한 사람이 법관이 될 수 있다."
 
- 법원행정처를 법원사무처로 바꾼다는 계획은 어떻게 생각하나.
"어떻든 법관이 모두 빠져야 한다. 만약 법관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사직 후 가면 된다. 더 이상 행정관료로 일하던 법관에게 재판을 받고 싶지 않다는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형성돼 있다. 김경수 경남지사 1심 판결과 관련해 논란이 있지 않았나. 비서(김 지사 1심 재판장이었던 성창호 부장판사는 양승태 대법원장 비서실 소속이었다 - 기자 주)의 덕목이 법관의 덕목과 다르다는 걸 국민들이 아는 것이다."
 
양승태
 

▲ 보석으로 풀려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개입 등 '사법농단'으로 구속되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7월 22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재판부 직권보석 결정으로 석방되고 있다. ⓒ 권우성


구속 상태에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 7월 22일 구속 기한 만료를 앞두고 재판부의 직권보석 결정으로 구치소를 나왔다. 구속된 지 179일 만이었다. 이 과정에서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증인 대거 신청, 과도한 증거검증 요구 등 일반 재판에선 일어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며 시간만 속절없이 지나갔다.
 
이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을 "공사 구분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본인이 공직에 있을 때 한 행동에 대해 조사를 받는데 마치 집안일에 대해 조사받는 것처럼 말해왔다"라며 "직무상 사용한 컴퓨터를 일기장으로 표현하고, 직무행위에 대해 조사받는 걸 사찰이라고 표현하는 등 공사 구분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변호사는 "이는 사법농단을 주도한 사람들이 가진 공통의 생각 같다"라며 "공직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행사하는 역할에 불과한데 자기가 입신양명해서 획득한 신분이자 소유물로 생각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직이나 권력그룹의 일부에서 소속감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법관과 어울리지 않다"라며 "대법원장이 주도하는 인사 시스템 때문에 '내가 법관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외국 법관들과 교류해보면 우리 법원은 굉장히 봉건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걸 느낀다. 대법원장이란 가부장을 중심으로 직무가 아닌 평판 및 관습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그러면 법정 안팎의 경계가, 재판과 행정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그러니 대법원 재판연구관 같은 보직을 받으면 회식 때 대법원장에게 큰절하는 법관들이 나왔던 거다. 과거 체육대회 때 대법원장이 입장하면 법원별로 지역 특산물을 입에 떠먹여주는 장면이 연출되는 거다. 어떤 법원에선 상자에 비둘기를 담아 와서 날리고, 목마를 태우고, 카드섹션을 준비하고, 코스프레를 선보이고...
 
2018년 1월에 2차 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 대법관 전원의 이름으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 관련) 재판개입은 없었다'라는 입장을 냈다. 하지만 그 재판 당시 대법관 13명 중 6명은 대법관이 아니었다. 법관은 본인이 모르는 걸 대외적으로 사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대법관 전원이 입장문을 냈을까.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법관이라는 공직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도 하는 거다."

 
사법농단 관련 재판이 지연되는 것과 관련해 이 변호사는 "증인으로 채택된 현직 법관들이 출석하지 않아 재판이 미뤄지는 모습에 화가 많이 났다"라고 떠올렸다. 그는 "당직이라고, 체육대회 있다고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법관들이 있던데, 평소 자기 재판에서 그런 증인이 있다면 과태료를 부과했을 것이다"라며 "이는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는 건데 그럼에도 버젓이 재판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대법원이 사법농단 연루자들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선 법관들에게 이 사건이 별 것 아니라는 신호를 준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날의 낮잠  
 

▲ 사법농단 사태를 세상에 알린 이탄희 변호사. ⓒ 남소연


이 변호사는 국회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제도 개혁은 국회의 역할이잖나. 근데 국회에서 법원의 의견에 너무 휘둘리는 것 같다"라며 "다른 분야 중 그런 데가 있나. 검찰 개혁이나 국정원 개혁을 두고 이렇게 휘둘리진 않잖나, 국회도 열심히 공부해 두 눈 부릅뜨고 법원을 봐야 한다"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국회가 자꾸 법원에 의존하면 그때부터는 국회의 잘못이 된다"라며 "국회 스스로 독립적으로 사고해 자신 있게 입법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지난달 고 노회찬 의원 1주기를 맞아 '제1회 노회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도 공동수상자였다. 이 변호사는 "시상식이 있던 날 아침 모란공원에 들러 고인의 깊은 뜻을 많이 생각해봤다"라며 "고인이 노동과 사법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개선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저와 김용균씨의 어머님이 선정된 것으로 안다, 앞으로 사법 시스템 전반을 개선하는 데에 그 역할을 피하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인터뷰 말미, 이 변호사에게 "첫 사표를 냈던 2017년 1월부터 지금까지 가장 또렷하게 생각나는 장면"을 물었다. 그는 "낮잠"을 떠올렸다.
 
"떠오르는 장면이 너무 많아 꼽긴 어렵지만... 첫 사표를 내기 전까지 거의 잠을 못자고 고민했다. 사표를 내고 나서 오전 재판을 소화한 뒤 오후부터 휴가를 내고 일찍 집에 갔다. 그때 일순간이나마 푹 잤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이미 10년 가까이 법관 생활을 했고, 정년까지 법원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좋은 재판을 하고 싶다는 꿈을 여전히 간직했던 때다. 때문에 사표를 내는 건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다. 사안의 특성상 많은 사람과 상의할 수도 없었다. 사표를 내고 나니 여기저기서 압박과 회유도 있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잘한 선택, 올바른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날 오후만큼은 맘 편하게 잤던 것 같다. 꽤 잤던 것 같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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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는 왜 모계사회를 이뤘나

조홍섭 2019. 08. 29
조회수 1169 추천수 1
 
암컷이 임신∼양육 도맡아…암컷 연대와 지식전파가 생존의 핵심
 
w1.jpg» 두뇌가 크고 고도의 사회생활을 하는 고래는 강력한 모계사회를 이룬다. 최고의 사회성 고래인 범고래 어미와 새끼가 뛰어오르고 있다. 로버트 피트먼, 미 해양대기국(NOAA),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영장류와 함께 두뇌가 크고 사회생활을 하는 고래는 대표적으로 모계사회를 이루는 동물이다. 암컷 중심으로 무리가 움직이고, 자식에게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전파한다. 심지어 딸만 우대하는 ‘성차별’이 나타나기도 한다. 고래는 왜 암컷이 사회의 중심에 서게 됐을까.
 
루크 렌델 영국 세인트 앤드루스대 생물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과학저널 ‘영국 왕립학회 철학회보 비(B)’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고래의 행동생태학에 관한 연구결과를 종합해 이 문제를 검토했다. 연구자들은 모계사회의 기원을 육지에서 바다로 간 고래의 조상에서 찾았다.
 
4900만∼4000만년 전 바다로 간 육지 포유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적응해야 했다. 딱딱한 땅 위에 살다 3차원 공간으로 갔다. 바다에서는 이동이 훨씬 쉽고, 먹이 자원을 빼앗기지 않으려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다. 먹이가 풍부한 데다, 바다에는 먹이를 숨기거나 저장할 곳도, 방법도 없다. 연구자들은 “큰돌고래를 32년 동안 지켜보아도 남의 먹이를 훔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는 한 연구자의 관찰 결과를 소개했다.
 
그러나 바다환경은 더운피 동물인 고래에게 체온 유지라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14종의 수염고래는 몸집을 불려 여름 동안은 플랑크톤이 번성하는 온대와 극지방 바다에서 다량의 먹이를 섭취해 지방으로 비축하고, 나머지 6개월은 사실상 단식하는 방식으로 적응했다. 이빨고래 76종은 초음파를 내쏘아 먹이의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 방식으로 다양한 먹이를 효율적으로 사냥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문제는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일이다. 연구자들은 “다른 모든 포유류처럼 고래도 암컷이 임신, 수유, 젖떼기, 양육 등 번식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며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어떤 고래 수컷도 교미를 하면 그걸로 끝이지 양육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일부다처 또는 다부다처의 생식 방법과 관련이 있다.
 
w2.jpg»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동물인 대왕고래는 새끼의 빠른 성장을 위해 새끼에게 지방이 풍부한 모유를 하루 220㎏ 먹인다. 미 해양대기국(NOAA),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새끼가 바다에서 체온을 잃지 않으려면 빨리 자라 단열 기능이 있는 지방층을 쌓아야 한다. 어미는 새끼의 빠른 성장을 위해 지방이 풍부한 모유를 다량 분비한다. 몸길이가 30m인 대왕고래가 새끼에게 먹이는 모유의 양은 매일 220㎏에 이른다. 어미에겐 엄청난 에너지 부담이다. 
 
어미에 바짝 들러붙어 헤엄치는 새끼는 물결을 거스르는 일종의 저항으로 작용한다. 몇 달 자란 새끼는 안전과 수유, 쉬운 유영을 위해 어미의 배와 꼬리 사이에서 헤엄치는 ‘유아 자세’를 취한다. 당연히 어미는 헤엄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새끼는 생후 4개월 때부터 젖 뗄 때까지 기간의 39%를 이런 자세로 지낸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수유 기간에 어미는 평소보다 먹이를 40% 더 먹어야 한다. 그러나 새끼 때문에 큰돌고래와 흰고래는 잠수시간을 줄인다. 깊이 잠수해 오징어 등을 사냥하는 향고래는 보모가 새끼를 대신 봐준다.
 
젖을 뗀 새끼 고래를 돌보는 일도 오로지 어미의 몫이다. 수염고래 새끼는 태어난 첫해 어미를 따라 열대바다에서 극지방 먹이터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는데, 어미가 가르쳐 준 경로를 익혀 되풀이한다. ‘전통 지식’을 전수하는 셈이다. 이동지식뿐 아니라 새로운 사냥지식도 어미를 통해 전수된다. 혹등고래가 바다 표면에 꼬리를 내리쳐 물고기를 사냥하는 신기술은 모계로 전해진다.
 
w3.jpg» 노르웨이의 한 피오르 해안에서 범고래가 꼬리치기 기술로 물고기를 사냥하고 있다. 야틴 크리슈나파,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새끼를 기르는 힘겨운 과정에서 책임을 온전히 떠맡는 어미와 새끼 사이의 유대는 고래 사회의 주춧돌”이라며 “엄혹한 환경에서 암컷끼리의 혈연과 연대가 협동 사냥과 공동 방어, 정보 공유 등을 통해 무리의 생존능력을 높여준다”고 밝혔다.
 
암컷이 지배하는 사회는 대형 이빨고래 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향고래 수컷은 10대 초반 무리를 떠나고 다양한 모계의 암컷끼리 수십 년 유지되는 안정된 중층 사회구조를 이뤄 공동육아 등을 해 나간다. 범고래도 모계 혈연관계가 사회를 지탱한다. 연어를 잡아먹는 범고래 집단에서는 먹이가 부족할 때 늙은 암컷의 생태 지식이 모계 집단의 생존을 좌우한다. 범고래 등 일부 고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포유류에서 유일하게 아직 생식능력이 있는 암컷이 폐경 한다. 나이 든 암컷은 생식을 젊은 암컷에게 넘기고 자신은 돌봄에 치중함으로써 무리에 기여하는 쪽으로 진화한 것이다(▶관련 기사사람과 범고래는 왜 중년에 폐경 하나).
 
w.jpg» 새끼와 헤엄치는 향고래. 깊은 바다에 장시간 잠수할 때는 다른 암컷이 새끼를 돌봐준다. 가브리엘 바라티유,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대형 이빨고래가 아닌 큰돌고래에서도 암컷이 지배하는 사회구조의 모습이 발견된다. 큰돌고래는 수컷이 작은 동맹을 이뤄 떠나고 암컷이 새끼들과 무리를 이룬다. 그런데 오스트레일리아 샤크만 큰돌고래에서 어미가 새끼 가운데 암컷과 유독 강한 유대를 맺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돌고래 어미는 바로 옆에서 헤엄치는 새끼 돌고래를 배려해 자신의 잠수시간을 줄이는데, 그런 배려는 새끼가 암컷일 때만 나타났다. 또 사냥기술을 전수할 때도 아들보다 딸에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 집단에서 수컷보다 암컷 새끼가 나중에 어미의 사회 네트워크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w5.jpg» 새끼와 헤엄치는 큰돌고래. 아들보다 딸을 ‘편애’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고래 암컷의 사회적 역할을 비교 분석하는 것은 사람이 포함된 영장류 사회에서 암컷의 사회적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예컨대 현대 인간사회에서 여성이 왜 지도적 위치에 과소 대표되고 있는지, 또 그 해결책은 뭔지를 생각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Rendell L, Cantor M, Gero S, Whitehead H, Mann J. 2019 Causes and consequences of female centrality in cetacean societies. Phil. Trans. R. Soc. B 374: 20180066. http://dx.doi.org/10.1098/rstb.2018.0066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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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심종두는 감옥으로, 톨게이트 노동자는 정규직으로!”

[8월29일] 노동동향브리핑
▲ 대법원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근로자 지위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린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승소한 톨게이트 노조들이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요금수납원은 이미 도로공사의 직원이거나 도로공사가 직접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 29일 대법원 판결 후 당사자인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입장문을 냈다.
민주노총 민주일반연맹과 한국노총 한국도로공사톨게이트노동조합은 입장문에서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면서 정부와 도로공사에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해고된 1500명 요금수납원 모두를 직접고용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오늘 판결은 요금수납원 304명에 해당하는 판결이지만 304명에게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은 법률가들의 해석일 뿐, 이 판결의 효력은 해고된 1500명 모든 요금수납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며 “원고의 이름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은 요금수납원들에게 이 판결의 효력이 적용돼야 하는 것이 법 이전에 상식”이라고 강조하곤 “대법원 판결을 앞둔 요금수납 노동자들에게 가짜 정규직인 자회사를 강요하고 강행하면서 벌어진 사태의 잘못을 인정하고 법대로 직접고용하라”고 주장했다.

○ 민주노총도 성명을 내고 “두 번 말할 필요 없는 당연한 판결”이라며 “청와대는 자회사 전환 정책 중단과 직접고용 원칙을 결단하라”고 촉구했다.
민주노총은 “(그동안)정부는 1500명 집단해고 사태에도 오로지 자회사 전환을 강요했을 따름이며, 노동부는 법에 따라 불법파견 시정명령과 근로감독을 실시하라는 노동조합 요구를 묵살했고,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김앤장에 거액을 써가며 노동자를 이간질하고 문제해결을 회피했다”고 지적하곤 “(이제)해고자 전원 직접고용을 회피할 핑계란 없다”면서 “만약 정부와 도로공사가 오늘 판결 효력을 재판 참가 노동자로만 축소할 발상을 하고 있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은 “정부는 임시방편 고통전가에 불과한 자회사 전환 꼼수 철회하고 1500명 해고자 전원을 직접고용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요금수납노동자들은 불법파견 된 노동자다. 도로공사가 직접고용 하라’
- 대법원 판결 관련 1500명 해고 요금수납노동자 입장 -

불법파견 인정과 직접고용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요금수납원은 이미 도로공사의 직원이거나 도로공사가 직접고용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한 문장을 확인받기 위해 우리는 해고를 당하면서까지 자회사가 아닌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최초 소송을 제기한 때로부터 7년 가까이 되어 나온 판결이다. 두 달째 길바닥 생활을 해온 1500명 모든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판결의 효력은 1500명 해고 요금수납원 모두에게 일괄 적용되어야 한다.
오늘 대법원 판결은 해고된 1500명 요금수납원 중 304명에 해당하는 판결이다. 그러나 이것을 304명에게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은 법률가들의 해석일 뿐이다. 이 판결의 효력은 해고된 1500명 모든 요금수납 노동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원고의 이름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은 요금수납원들에게 이 판결의 효력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법 이전에 상식이다.

정부도, 도로공사도, 김앤장도 모두 틀렸다. 지금은 책임을 져야할 때다.
도로공사의 소송결과에 대한 기대는 헛된 망상으로 끝났다. 도로공사를 부추겨 수십억을 빼간 날강도 법률집단 김앤장도 틀렸다. 마지막까지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은 소수에 불과할거란 이강래 사장과 도피아들의 예상도 틀렸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갈라치기 하고, 대법원 판결이 지연되면 거리투쟁도 정리될 거라고 한 판단도 완전히 틀렸다.

정부와 도로공사는 술수가 아니라 직접고용으로 책임져야 한다.
대법원 판결이 났음에도 정부와 도로공사가 또 다시 300명과 1200명을 갈라치기 위한 술수를 짜고 있다면 당장 중단하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을 앞둔 요금수납노동자들에게 가짜 정규직인 자회사를 강요하고 강행하면서 벌어진 사태다. 잘못을 인정하고 법대로 직접고용하면 된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더 큰 투쟁을 부르고 더 큰 사태로 확대될 뿐이다.

모두를 직접고용하지 않을 경우 해고기간 임금만 년 간 600억원, 누가 책임질 것인가?
도로공사는 벌써부터 원고별로 케이스가 다르다는 등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불법파견이 분명한 1200명 불법파견 요금수납노동자를 직접고용 하지 않는다면 도로공사가 지급해야 할 해고기간 임금만 년 간 600억 원이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발생될 이 엄청난 손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도로공사는 자기 발목을 잡는 외통수 입장이 아닌 직접고용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1500명 모두의 직접고용 쟁취를 위해 오늘부터 모든 걸 걸고 투쟁할 것이다.
이번 대법판결이 1500명 모두의 직접고용으로 정리되지 않는 한 끝이 아니다. 한국도로공사톨게이트노조와 민주노총 요금수납노동자들은 하나의 요구로 싸우기로 결의했다. 1500명 직접고용의 해법은 청와대에 있다. 우리는 오늘부터 모든 걸 걸고 1500명 모두의 직접고용 쟁취를 위해 총력투쟁에 나설 것이다. 대법원도 판결했다. 1500명 직접고용 청와대가 책임져라!

2019년 8월29일
요금수납노동자 불법파견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날
민주노총 민주일반연맹 / 한국노총 한국도로공사톨게이트노동조합

▲ 창조컨설팅 노조파괴 피해자, 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 조합원들의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및 해고자 복직 촉구’ 8월 상경투쟁 모습. [사진 : 뉴시스]

○ 대법원이 29일 오전, 유성기업 등에 개입해 노조파괴 범죄를 저지른 창조컨설팅 심종두 대표와 김주목 전무에게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판결했다.
유죄판결이 확정되자 민주노총은 즉각 성명을 내고 “(창조컨설팅은)산별노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자본과 모의해 산별노조 사업장 조직을 파괴했다. 노사 분쟁을 일으킨 뒤 직장폐쇄를 하고 용역깡패를 풀어 겁박하며 조직을 와해시키거나 노조에서 탈퇴시키는 수법을 사용했다”고 꼬집곤 “오늘 판결에 만족하지 않는다”면서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창조컨설팅과 같은 유해단체와 이를 운영했던 인물들이 다시는 번성할 수 없도록 사회를 바꾸고, 제2의 심종두와 김주목을 꿈꾸지 못하도록 끝까지 추적하고 감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선고일인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대법원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판결을 환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29일 ‘국정농단’ 상고심에서 삼성 측이 최순실 측에 제공한 말 세마리 구입액,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액을 모두 ‘뇌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하며 2심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구속 가능성이 커졌다는 전망이 나온다.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은 즉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 상식, 정의와 공정의 관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우리는 대법원의 판결을 환영한다”고 밝히곤 “정부와 삼성은 적절한 절차를 통해 이재용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며, 그 전에 이재용은 스스로 경영권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또 별도 논평을 내 “서민 유죄, 재벌 무죄 관행을 깨뜨린 판결”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재벌총수에게 1심에서 실형을 선고한 뒤 2심에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낮춰 선고하는 악습인 이른바 ‘3‧5법칙’을 깨뜨렸다”면서 “재벌총수가 법 위에 군림하며 대를 이어 우리 사회 부의 대부분을 빨아들이는데도 헌법 어디에도 없는 ‘경영권’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리를 들이대며 자본권력을 물신화하던 법원 판결 풍조에 이번 대법원판결이 경종을 울린 셈”이라고 평했다.
이어 “사법부는 적극적인 법리 적용과 해석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국내 재벌들이 국정농단 세력과 공모해 저지른 부정한 범죄를 강력히 처벌하고, 고질적인 정경유착 고리를 끊을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드디어 서민유죄 재벌무죄 관행 깨뜨린 대법원
-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정경유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논평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은 무도한 정권의 겁박에 굴복해 정치자금을 헌납하는 수동적 ‘돈줄’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재벌은 보수언론을 움켜쥐고 정치‧경제‧사회 곳곳에 해악을 끼치며 총수 일가만의 소왕국을 쌓아 올리고 있다.

노동자‧시민이 일어나 국정농단 세력을 내쫓으며 재벌개혁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는데도 사법부는 1심 최저형 선고에 이어 2심 집행유예 선고로 이 부회장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경영승계 작업’ 자체가 없었다는 삼성의 주장을 고스란히 수용한 판결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번 판결로 재벌총수에게 1심에서 실형을 선고한 뒤 2심에서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으로 낮춰 선고하는 악습인 이른바 ‘3‧5법칙’을 깨뜨렸다. 이재용 부회장의 2심 판결 중 무죄로 봤던 부분을 추가로 뇌물로 인정하고, 삼성에 경영 승계작업이 있었음을 분명히 해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재벌총수가 법 위에 군림하며 대를 이어 우리 사회 부의 대부분을 빨아들이는데도 헌법 어디에도 없는 ‘경영권’이라는 정체불명의 권리를 들이대며 자본권력을 물신화하던 법원 판결 풍조에 이번 대법원판결이 경종을 울린 셈이다.

1심 재판부가 내렸던 5년형은 삼성이 저지른 정경유착 범죄의 핵심 혐의를 외면하고 내린 법정 최저형에 불과했다. 그 바닥에 도사린 ‘기업인을 잡아 가두면 경제가 망한다’는 주장은 재벌과 공생하는 보수언론과 재벌 자신의 공포소설에 불과하다.

금수저‧흙수저론이 웅변하는 재벌의 세습 특권과 무소불위 행태는 헌법에 명시된 ‘시장지배와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 민주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 등의 자정능력과 의지를 잃은 병든 사회의 대표 징후일 뿐이다.

사법부는 이제 마지못해 내리는 최소한의 양형이 아닌, 적극적인 법리 적용과 해석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국내 재벌들이 국정농단 세력과 공모해 저지른 부정한 범죄를 강력히 처벌하고 고질적인 정경유착 고리를 끊을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법원이 이번 판결을 계기로 경영세습을 위해 회계조작과 뇌물수수를 저지르고, 기업 이익을 위해 노동자 생명과 건강을 해쳐도 묵인하고 넘어가던 관행을 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9년 8월29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편집국  news@minplus.or.kr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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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김정은 오나?

 문 대통령, “교량국가의 시작은 한반도 평화정착”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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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30  06: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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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10개국 정상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 김정은 위원장이 함께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매우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달 아세안 3개국 방문을 앞두고 30일 태국 <방콕 포스트>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인도네시아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 초청할 것을 제의해주셨고, 여러 정상들이 지지해주셨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10월말께 ‘방콕 동아시아 정상회의(EAS)’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북한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협력할 수 있을지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문 대통령은 “물론, 김정은 위원장의 초청 문제는 북미 간 대화를 포함하여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진전 상황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며, 아세안 국가들과도 관련 협의를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북미-남북대화가 모두 교착된 현 상황을 의식한 것이다.   

“핵 대신 경제발전을 택함으로써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김정은 위원장 스스로 밝힌 의지”라며 “북한이 비핵화를 실질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아세안은 북한과 국제사회 사이의 중요한 소통창구가 되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2000년 태국의 적극적 지원 하에 북한이 아세안 지역안보포럼(ARF)에 가입했고,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지역 안보협의체다. 두 차례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개최됐다.

“한국이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는 교량국가”가 되겠다는 구상도 소상하게 설명했다. 

“한국은 교량국가의 시작이 한반도 평화정착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이 협력하여 평화경제를 구축하면 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중앙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나아가 유럽과도 긴밀히 협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신북방정책’입니다. 남으로는 인도를 포함한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하여 포용적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남방정책’입니다.”

문 대통령은 9월 1일부터 태국을 공식 방문한다. 이어 6일까지 미얀마와 라오스를 국빈방문할 예정이다. 11월말 부산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한-메콩 정상회의를 앞두고 아세안 10개국을 모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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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대법원,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불법파견 인정 “직접 고용하라”

이소희 기자 lsh04@vop.co.kr
발행 2019-08-29 10:42:28
수정 2019-08-29 10:4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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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한국노총 톨게이트 노조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367명에 대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성 대법원 선고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불법파견 인정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8.28.
민주노총·한국노총 톨게이트 노조가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367명에 대한 근로자 지위확인 소성 대법원 선고를 하루 앞둔 28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불법파견 인정 판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8.28.ⓒ뉴시스

대법원이 한국도로공사에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을 "직접 고용하라"는 취지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노정희 대법관)는 29일 오전 10시 대법원 1호 법정에서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 368명이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2013년 한국도로공사 외주용역업체 소속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이하, 공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2013년 한국도로공사 외주용역업체 소속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이하, 공사)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도로공사와 외주 용역 업체 사이에 체결된 용역계약은 사실상의 근로자 파견계약이며 '불법 파견'으로, 파견법에 따라 2년의 파견 기간이 만료된 날로부터 공사 측이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대해 한국도로공사 측은 "외주용역업체가 독자적으로 노동자를 채용하고 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역시 독자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으므로 근로자파견계약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반박해왔다. 

요금수납노동자들은 앞선 1,2심에서 모두 승소했다. 1,2심 법원은 한국도로공사가 수납원들을 '불법파견'해 직접 고용의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1,2심 재판부와 같이 한국도로공사와 외주용역업체 사이의 계약을 "근로자 파견계약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소송을 제기한 요금수납노동자 2명에 대해서는 근로자 지위 인정 여부를 다시 판단해야 한다면서 파기환송해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2017년 항소심 판결이 있은 후로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한국도로공사는 요금수납노동자들의 자회사(한국도로공사서비스) 소속 전환을 추진해왔다. 전체 6,500여명의 노동자들 중 5,000여명은 자회사로 갔지만, 나머지 1,500여명은 자회사 소속 전환을 반대해왔다. 이들은 지난 달 1일 용역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사실상의 해고상태에 빠졌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해고된 요금수납노동자들이 한국도로공사 소속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현재 해고된 노동자들은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케노피 위와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하며 한국도로공사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고 있다.  

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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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종업원 기획탈북 의혹 조사 끝내고도 입 다문 인권위

[단독]북한 여종업원 기획탈북 의혹 조사 끝내고도 입 다문 인권위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보고서 발표 비정상적 지연
남북관계 우려, 정치적 이유”

지난 2016년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이 탈북해 입국하는 모습. 통일부 제공

지난 2016년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들이 탈북해 입국하는 모습. 통일부 제공

 

국가인권위원회가 박근혜 정부 시절 발생한 북한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하고 최종보고서까지 작성하고도 발표를 미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가 국제사회의 비판, 남북관계 등 정치적 이유로 보고서 공개를 미루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법률가들로 구성된 ‘북 해외식당 종업원 기획탈북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제진상조사단’ 소속 니루퍼 바그왓 변호사(인도)는 28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권위가 이 사안에 대해 조사를 다 마치고도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며 “보고서 공개가 비정상적으로 지연되고 있는데, 인권위도 지난 26일 진상조사단과의 면담에서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준 사사모토 변호사(일본)도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년 이상 지났고 여러 단체에서 인권위에 조사결과를 빨리 공개하라고 촉구해왔음에도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계속 지연되는 건 남북관계 등을 고려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1972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이뤄진) ‘김대중 납치 사건’ 때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았다”며 “이번에도 한국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을 것을 우려해 공표를 지연시키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25일 방한한 진상조사단은 통일부, 경찰청, 국가정보원에 면담을 요청했으나 해당 기관들은 모두 “인권위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했다. 경찰청은 공문을 통해 “탈북 종업원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진상조사단의 탈북 종업원 면담 주선 요청도 거부했다.

북한 종업원 탈북은 총선을 닷새 앞둔 2016년 4월8일 통일부가 13명의 탈북 사실을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신변 문제 등으로 탈북자 관련 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관례를 깬 것으로, 통일부는 이들의 사진까지 공개했다.

당시 북한은 “국정원이 조작한 집단적 유인 납치행위”라고 반발했고, 식당 지배인이던 ㄱ씨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국정원 직원의 협박과 회유에 따라 집단입국을 했다”고 주장했다.

진상조사단은 오는 31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평양에서 탈북 종업원 가족, 당시 식당에서 탈북하지 않고 북으로 돌아갔던 종업원 등을 만날 계획이다. 이들은 방북 조사활동 등을 토대로 진상조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유엔인권이사회에 보고할 예정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290600025&code=910303#csidxda6a6fac8317d7ab33f2c4681fa0a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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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민 김복동

[창비 주간 논평] 평화와 상생의 촛불정신
 
2019.08.29 07:56:39
 
 

이번 여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송원근 연출)은 일본군 '위안부'(성노예제) 피해자인 김복동(1926~2019)의 생애를 다룬다. 이 영화는 위안부 피해의 증언자에서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로 확장되는 한 인물의 여정을 차분하고 서늘하게 보여준다. 군복공장에 일하러 간다는 말에 속아 만 14세에 강제로 위안부가 된 김복동은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으로 끌려다니다가 8년이 지난 1948년에야 고향으로 돌아왔다. 1991년 김학순이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이듬해 김복동은 62세의 나이로 본격적 증언 활동에 나섰다. 아시아 연대회의, 유엔 인권위원회에 참석하면서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남긴 그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분쟁지역 아동과 전쟁 피해 여성을 돕는 활동에 앞장섰다. 국내외를 순회하는 김복동의 인권평화운동은 27년간 지속되었다. 
 

▲ 다큐멘터리 <김복동> 스틸컷.


올해 초 김복동은 소원하던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받지 못하고 영면하였다. 영화를 보면 "우리가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과하라!"는 그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온다. 더불어 관객들의 깊은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2015년 12월 박근혜-아베 정부가 공식적 사죄를 원하는 피해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한 직후의 모습이다. 당사자 없는 졸속 합의와 위로금 지급, 화해치유재단의 설립을 두고 거센 비판이 일었음에도 일본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말로 문제제기를 묵살하고 박근혜 정부 역시 이에 호응하였다. 영화의 후반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규탄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촉구하는 김복동과 그의 활동에 연대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을 숨 가쁘게 쫓아간다. 다큐에서는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위안부 피해 문제와 강제징용 배상이라는 역사적 쟁점은 이후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 촛불 혁명의 중요한 불씨가 되었다. 

아베 정부가 퇴행적 군국 논리의 부활로 역사를 거스르는 행보를 시작한 가운데, 이 영화는 우리가 대면해야 할 중요한 현실로서 식민지 역사를 환기한다. 올해 7월, 아베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표명한 후, '백색국가' 제외 조처를 발표하였다. 강제징용배상 판결을 경제적 문제로 바꾸는 일본 정부의 대응 방식은 전쟁범죄의 책임을 부정하고 은폐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고 그로 인해 조선이 근대화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도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가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 다큐멘터리 <김복동> 스틸컷.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동시에, 자국에도 이로울 리 없는 경제전쟁을 시작한 아베 정권의 의도는 명확하다.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적대 상태에 빠져드는 것이야말로 아베 극우정권과 기득권 집단이 기도하는 정치적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의 경제력과 국력의 부상을 경계하는 극우정권의 '신정한론(新征韓論)' 이면에는 남북관계 변화에 따른 일본의 영향력 감소에 대한 불안과, 중국이 부상하면서 달라진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촛불혁명의 동력을 바탕으로 평화체제로 나아가려는 한반도의 움직임을 견제하고 무력화하려는 국내외 우익 기득권 세력이 이러한 일본의 정치 논리와 연결되는 맥락도 뚜렷하다. 그런 점에서 아베 정권이 일으킨 경제전쟁은 촛불혁명이 주축이 된 한반도 평화체제의 세계적 영향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3.1운동 이후 우리 시민들이 오랜 기간 실천하고 심화해온 민주·평화 혁명의 정신이 남기는 메시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평화를 수호하며 새 시대를 열어온 촛불의 정신은 남북화해와 한반도 통일 및 세계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실제로 한일 갈등과 무역 보복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은 그동안 단련되어온 촛불시민혁명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시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소비실천과 역사교육을 통해 창의적 발상의 시민 참여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인들의 시민운동 편승을 배격하며 아베 정부가 아닌 일본 자체를 적대시하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이러한 실천적 행동은 일본 내에 존재할 다수의 시민들과 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불어 촛불정신이 현재의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진정한 동력이 되려면 불평등과 적폐를 개선하려는 사회정치 개혁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경제전쟁에서 실질적 타격을 받는 다수 시민들을 위해서 민생을 압박하는 사회 제반의 불평등 현실에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정부의 체계적 정책 제안과 노력이 필요하다.
 

▲ 다큐멘터리 <김복동> 스틸컷.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그동안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던 역사 인식과 교육의 문제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과 평화통일이 세계평화에서도 왜 중요한 쟁점인지를 알려준다. 영화가 포착한 김복동의 삶 역시 가혹한 식민지 현실을 거쳐 오랜 기간 투쟁해온 한반도 민중이자 세계시민의 생애와 겹쳐 보인다. 그의 증언과 평화운동은 전쟁폭력의 참상을 고발하고 치유를 도모하는 세계적 차원의 여성 연대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기습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에 맞서 시민들이 거리와 광장에 선 그 시점은 각계각층의 적폐와 불법에 항거하는 촛불혁명의 시발점과 얽혀 있다. 국내외 기득권 세력에 맞서는 촛불의 힘은 남북의 상생과 평화를 기도하며, 지역적·세계적 냉전 세력에 대한 저항과 타격이 되었다.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거리와 광장에 선 김복동과 정의기억연대, 평화나비네트워크 및 여러 시민들이 간곡하게 호소했던 것 역시 이러한 평화적 저항운동의 전통을 기반으로 한 집단지성의 메시지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평화와 상생을 기도하는 촛불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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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재용 '운명의 날', 제대로 잠을 잤을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9/08/29 09:38
  • 수정일
    2019/08/29 09:38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오후 2시 대법원 '국정농단' 선고] 엇갈렸던 박근혜 2심-이재용 2심... 최종 결론은?

19.08.29 07:33l최종 업데이트 19.08.29 07:33l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전경
▲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전경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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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국정농단' 사건의 최종 결론이 드디어 나온다.

오늘(29일) 오후 2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상고심 판결을 선고한다. 국정농단이 불거진 지 약 3년 만이다.

2016년 12월 꾸려진 국정농단 특별검사팀(특검 박영수)은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대통령의 직무권한을 남용, 기업들로부터 미르·K스포츠재단과 한국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을 받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공무원이나 문화예술단체에 불이익을 준 사실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그룹이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승마훈련을 지원하는 등 뇌물을 건넨 혐의도 밝혀졌다.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박근혜-이재용 뇌물사건의 디테일을 두고 재판부마다 조금씩 다른 결론을 내놨다.

재판부마다 달랐던 디테일
 
 박근혜·이재용 재판 주요 쟁점
   
 
특검은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작업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 '유령회사' 코어스포츠와 용역계약을 맺는 형태로 정유라씨의 승마훈련을 지원했고(계약금 약 213억 원, 실지급 36억 3484억 원) ▲ 정씨에게 말 세 마리와 차량 등을 제공했으며(41억 6251만 원) ▲ 박 전 대통령과 최씨가 세운 미르(125억 원)·K스포츠재단(79억 원)과 영재센터(16억 2800만 원)에 돈을 줬다고 봤다. 그리고 승마 쪽엔 단순뇌물죄(77억 9735만 원), 재단과 영재센터 지원부분에는 제3자뇌물죄를 적용했다.

최초 판단은 2017년 8월 25일에 나왔다. 당시 이재용 부회장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7부, 재판장 김진동 부장판사)는 개별 현안은 없었으나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이 존재했다며 이 부회장이 대가를 바라고 박 전 대통령 쪽에 뇌물을 건넨 게 맞다고 봤다. 다만 말 수송 차량 구입대금과 미르·K스포츠재단 지원금을 제외한 89억 2227만 원만 뇌물로 인정했다. 결론적으로 이미 구속 중이던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실형을 선고했다.
  
박 전 대통령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 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가 지난해 4월 6일 내린 결론은 약간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경영권 승계작업은 없었다'는 대목이었다. 재판부는 따라서 제3자 뇌물죄 성립조건인 '부정한 청탁'도 없으니 이 혐의는 전부 무죄라고 판단했다. 다만 승마지원금 중 72억 9427만 원은 단순뇌물죄에 해당한다고 봤다. 박 전 대통령은 다른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문화계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한 혐의 등도 있었기 때문에 징역 24년, 벌금 180억 원 선고를 받았다.

항소심에서 두 사건의 온도차는 더욱 커졌다. 2018년 2월 5일 이재용 부회장 2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 재판장 정형식 부장판사)는 경영권 승계작업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심이 일부 유죄로 판단한 제3자 뇌물죄도 전부 무죄로 결론내렸다. 뇌물죄가 성립한다고 본 승마 지원금 중에서도 정유라씨가 사용한 말 세 마리의 소유권은 삼성에게 있다며 제외, 총 36억 3484만 원만 인정했다. 이날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선고가 난 이 부회장은 1년 간의 구치소 생활을 끝냈다.

하지만 박근혜 항소심(서울고법 형사4부, 재판장 김문석 부장판사)은 폭넓은 범위에서 뇌물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8월 24일 재판부는 '경영권 승계작업은 포괄적 현안이었다'는 이재용 1심 판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 외국자본으로부터 삼성의 경영권 방어 ▲ 이 부회장이 적극 추진한 삼성바이오로직스 사업 지원 등을 개별 현안으로 인정했다. 또 삼성이 정유라씨를 계속 지원할 의사가 있었다며 '액수 미상의 뇌물 약속'까지 유죄로 봤다. 그러나 단순뇌물죄는 말 보험료 등을 제외, 70억 5281억 원만 인정했다.

대법원이 박근혜 항소심 결론 받아들이면 이재용은 재수감 가능성

대법원은 뇌물을 준 액수와 뇌물을 받은 액수, 제3자 뇌물죄의 법리뿐 아니라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업무수첩의 증거능력도 정리할 전망이다. 이 수첩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가 그대로 담겨 있어 국정농단 사건에서 중요한 증거로 쓰였다. 그런데 이재용 항소심 재판부만 유일하게 이 수첩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어떤 '거래'가 오갔는지를 엿볼 수 있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날아간 덕분에 이 부회장은 사실상 강요로 뇌물을 건넨 피해자가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박근혜 항소심 결론을 받아들이면 이 부회장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심리돼야 한다. 2심에서 뇌물 인정범위가 좁아지면서 횡령액까지 줄어 실형을 피했던 이 부회장에게는 부담스러운 결론이다. 또 대법원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을 경영권 승계작업으로 인정하면, 삼성 뇌물사건은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이어진다. 어쩌면 이 부회장은 다시 한 번 검찰 포토라인에 서야 할 수도 있다.

이 부회장은 악재에 악재가 겹치는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대법원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29일 오후 2시, 그 결론이 대법정 현장은 물론 대법원 페이스북와 유튜브 채널, 네이버TV 생중계로 공개된다.
 
 14차 범국민행동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리는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박근혜퇴진 이재용구속 집중집회 참석자들이 삼성본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2017년 2월 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열린 박근혜퇴진 이재용구속 집중집회 참석자들이 삼성본사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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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 계속 방사포를 쏘는 이유

북이 쏜 발사체, 방사포일까 미사일일까

한미합동군사훈련은 끝났으나 북한(조선)의 방사포 발사는 멈추지 않는다. 그 까닭을 알아보기에 앞서 북이 쏜 발사체가 미사일인지 방사포인지를 둘러싼 논란부터 해명해 본다.

방사포를 미사일로 오해한 이유는 북이 유도제어가 가능한 발사체를 쏘았기 때문이다.

발사체의 사거리가 400Km에 달하고 탄두 지름이 400mm가 넘는 것 때문에 미사일이 아니냐 하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는 방사포(MRLS)와 미사일의 차이를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방사포와 미사일을 구분하는 기준은 런칭(발사)장비와 유도제어다.

미사일의 런칭장비는 직선형 레일로 발사대라고 부르고, 방사포의 런칭장비는 나선 모양의 레일로 포신이라고 부른다.

직선 레일을 통과한 미사일은 자체 회전하지 않지만 나선 레일을 통과한 방사포는 회전하며 날아간다.

최근 북이 쏜 발사체에서 자체 회전이 확인됨에 따라 방사포로 분류되었지만, 유도 기능이 있다는 북한(조선)의 발표로 인해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일반적으로 방사포탄은 미사일과 달리 유도제어가 불가능하다.

나선형 홈이 있는 포신을 통과한 방사포탄은 회전 비행하므로 자이로스코프(축 회전)의 균형이 외부제어에 의해 변경되지 않아 유도가 불가능하다.

만약 방사포탄이 유도 제어가 되면 고도의 명중률을 가질 수 있으며, 비행고도가 낮은 데다 여러 발이 동시에 날아오기 때문에 요격이 불가능해진다.

“세상에 없는 또 하나의 주체 무기”라고 자랑하는 북한(조선)의 방사포에 과연 유도 기능이 탑재되었을까.

발사체의 유도제어는 추진엔진이 동작하는 능동구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방사포탄의 경우 능동구간에 외부제어가 불가능하므로 피동 구간(관성과 중력에 의해 탄도를 따라 비행하는 구간)인 종말 단계에 보조 엔진이 작동해서 궤적을 변경해야 한다.

무기 선진국의 경우 포탄 비행시간이 2분 이상인 대구경 장거리포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보조 엔진을 장착, 비행 과정에 공기저항으로 회전량과 속도가 감소하는 종말 단계에 엔진과 날개를 활용해 탄도를 수정하는 유도기능을 도입한다.

북한(조선)이 주장하는 “국방력 강화에서 전례 없는 기적 창조”란 이처럼 유도기능을 갖춘 방사포 개발을 두고 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조선)은 유도 기능까지 갖춘 최신형 방사포를 왜 자꾸 쏘는 걸까?

그 이유는 지난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시정연설을 통해 이미 밝힌 바 있다.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에 자주정신을 흐리게 하는 사대적 근성과 민족공동의 이익을 침해하는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남북관계 개선에 복종시킬 것을 요구했다.

특히 북미 관계 중재에 쓸데없는 힘을 쓸 대신 남북관계 개선에 미국 눈치 보지 말고 당사자로 나설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9월평양공동선언’에서 채택한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한미 합동군사훈련 실시로 파탄 내고, 한미 워킹그룹의 압력에 밀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마저 재개하지 못함으로써 ‘평화 번영’의 길에 난관을 조성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 ‘통일 전성기’를 열겠다는 결심을 한 북한(조선)으로선 남측 당국에 경종을 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조선)이 방사포를 쏜 또 다른 이유는 미국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각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실제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하여 북한(조선)은 지난 2016년 발표된 ‘공화국정부성명’에서 미국이 한반도 주변에 전개한 핵 타격 수단의 제거와 한국에서 핵 사용권을 쥐고 있는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그 때문에 이번에 쏜 방사포는 한미 합동군사연습 재개에 대한 대응이면서도 미국이 적대시 정책에 계속 고집한다면 자립적 국방산업의 기술 향상 계획이 계속 추진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특히 지금은 주한미군 기지를 사거리로 한 유도제어 방사포를 발사했지만, 연말까지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들고나오지 않으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고성능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다시 개발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했다.

미국이 북한(조선)의 방사포에 담긴 정치적 메시지를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방사포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강호석 기자  sonkang114@gmail.com

<저작권자 © 현장언론 민플러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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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자택 앞 “이재용 구속하라”

29일 대법원 판결앞두고 민주노총·민중공동행동 ‘기자회견’

프레스아리랑 | 기사입력 2019/08/2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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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민중공동행동은 27일 오전 10시 이태원에 있는 이재용 자택 앞에서 ‘이재용 재구속 촉구’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농단 범죄자 이재용이 가야할 곳은 이 집이 아니라 감옥”이라면서 이재용 재구속을 촉구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삼성장학생 재판부가 2심에서 이재용을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집행유예로 풀어줬는데 박근혜, 최순실과 함께 29일 대법판결이 열린다니 다행이지만 더 늦기 전에 범죄자 이재용은 감옥에 가야 한다”면서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 6천억 손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몸통, 6천여 건의 노조파괴 문건 발견 등 범죄자 이재용의 구속은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반드시 경영권 박탈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진두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사무처장은 “이재용 재판이 29일 대법 전원합의체로 선고가 예정돼 있는데 국민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면서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서 이재용, 박근혜, 최순실에 대한 판결이 나올 때까지 농성장에 결합하고 실천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재용 자택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긴지 오래된 집처럼 철문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 부회장이 소유한 자택은 2006년 기준 42억 9천만 원으로 평가돼 당시 국내에서 가장 비싼 단독주택(연면적 578.42㎥·대지 면적 988.1㎡)으로 알려졌다.

참가자들은 이재용 자택 철문에 ‘경영세습 위한 뇌물’, ‘노조파괴 뇌물증여 분식회계’, 말 세 마리가 뇌물이 아니면 뭔가?‘ 등의 내용이 적힌 피켓을 철문에 붙이면서 “이재용을 구속하라”라고 외쳤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말 모양의 분장을 한 퍼포먼스 참가자들이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재용이 박근혜를 통해 정유라에게 준 ‘말 세 마리’가 뇌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여부가 이번 대법 판결에 쟁점으로 떠오른 탓이다.

세 마리 중 1번 말 분장을 한 참가자는 “2심에서 말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해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자그마치 38억이나 되는 말의 주인이 누구인지 상고심에서 명확히 가려지길 바라면서 서울을 돌아다니겠다”고 말했다.

2번 말 분장을 한 참가자는 “정유라에게 가서 잘 보여 주인 기 좀 살려주려고 열심히 고생해서 갔는데 뇌물이 아니라고 해서 속상하고 억울해서 나왔다”라고 빗대 말했다.

참가자들은 12시 광화문 세월호 광장, 14시 이재용이 박근혜, 최순실과 만난 곳 청와대 앞. 16시 이재용 집무실이 있는 삼성본관에서 기자회견, 선전전 등을 통해 ‘이재용 구속’을 알려나간다. 말 세 마리 분장 퍼포먼스도 함께 대동한다.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기자회견 후 삼성 리움갤러리 앞으로 이동하여 발언과 선전전을 이어가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주최하는 기자회견에서 참여자들이 상징의식으로 피켓을 붙이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주최하는 기자회견에서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이재용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삼성 리움갤러리 앞에서 말인형을 입고 정유라와 최순실 가면을 쓴 참여자들이 갤러리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민주노총과 민중공동행동이 27일 오전 삼성 리움갤러리 앞에서 발언과 선전전을 이어가는 말머리 탈을 쓴 참여자들이 리움갤러리 입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노동과세계 정종배

<출처: 노동과세계 강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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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전' 한가운데로... 검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분석] '조국 죽이기'와 '조국 구하기' 사이에서

19.08.28 07:07l최종 업데이트 19.08.28 11:08l

 

 

  27일 오후 경남 양산시 부산대병원 의학전문대학원 간호대학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이 상자를 옮기고 있다. 2019.8.27
▲   27일 오후 경남 양산시 부산대병원 의학전문대학원 간호대학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이 상자를 옮기고 있다. 2019.8.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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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전'의 한가운데로, 검찰이 성큼 뛰어들었다.

27일 오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2부(부장검사 고형곤)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및 가족 의혹과 관련해 압수수색에 들어갔다. 장소만 따져봐도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사모펀드 운용사 코링크PE, 학교법인 웅동학원 등 전방위다. 수사대상은 딸의 장학금과 입시 특혜 의혹, 조 후보자 가족 소유 사학 문제, 사모펀드 논란 등 광범위하다. 검찰은 수사 주체도 형사1부에서 하루 만에 특수2부로 바꿔 화력을 집중했다.

조 후보자 쪽은 친인척 관계자로부터 압수수색 소식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강제수사 상황에 법무부 인사청문회 준비단도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전 9시 15분경 한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오늘 후보자는 출근하지 않는다"고 말한 뒤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어 오전 9시 30분쯤 사무실 앞에 도착한 또 다른 관계자는 "이제 막 출근해서 정확한 상황은 파악해봐야 한다"며 말을 아꼈다.

상황이 달라지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승강기를 탑승하고 있다.
▲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이 마련된 사무실 로비에서 입장을 발표를 마치고 승강기를 탑승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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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후 늦은 출근길에 나선 조 후보자는 "검찰의 판단에 대해선 제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검찰 수사를 통해서 모든 의혹이 밝혀지길 희망한다"고 했다.

 

그는 또 '법무부 장관이 되면 검찰을 지휘하는데, 수사가 공정하겠냐'는 질문에 "법무부 장관은 검찰 수사에 대해 구체적 지휘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즉 '나도 몰랐다'이고, 앞으로도 '모르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민정수석으로 임명될 때부터 "(검찰이) 수사를 알아서 하되, 잘못됐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수사 불간섭 원칙'을 밝혀왔다.

이 모든 상황의 긴장감은 조 후보자가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과 대표적인 검찰개혁론자라는 점에서 나온다. 그는 법대 교수 시절부터 줄곧 정치검찰의 청산을 말해왔고,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으로서 중점을 둔 정책 역시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는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였다. 때문에 검찰의 움직임에 의도가 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시점이 미묘하다. 하루 전 조 후보자가 검찰개혁안을 발표했고, 여야가 9월 2~3일 청문회 개최에 합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검찰의 숨은 의도를 경계하는 관점은 전혀 다른 두 시각이 공존한다. '조국 죽이기'와 '조국 구하기'. "이번 압수수색이 검찰개혁을 방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니길 바란다"(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는 발언이 전자를 대변하고, "검찰이 수사하는 시늉만 보일 수도 있고, 진정한 수사 의지가 있을 수 없다고도 본다"(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발언이 후자를 대표한다.

검찰 "신속한 증거보전 차원... 다른 사정 고려 없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 검찰은 억울해한다. 압수수색 시점에 대해서도 청문회 직후나 임명 직전, 또는 임명 이후 언제 하든 말이 나올테니, 원칙적으로 신속히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정치적 고려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국민적 관심이 큰 공적 사안이고, 여러 건의 고발이 제기돼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한 사실관계 규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신속한 증거보전 차원의 압수수색이 필요했고, 다른 사정은 고려한 바 없다"고 했다. 또한 "검찰개혁 이슈와 전혀 상관 없다"며 "(윤석열) 검찰총장은 이미 검찰개혁 관련 국회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검찰의 강력한 명분은 '살아있는 권력 수사'다. 역대 총장과 마찬가지로 윤석열 총장도 국회 인사청문회 등에서 어떻게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나갈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또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임명장을 주며 "그동안 보여왔던 정치검찰의 행태를 청산하라"고 당부했다.

27일 검찰의 조 후보자 관련 움직임은 이러한 흐름에서 볼 수 있다. 조 후보자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이다. 그런 그를 검찰이 정조준했다는 것은 '우리는 더는 정치검찰이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수사를 두고 '검찰이 제 역할을 한다'는 평가도 있다.

꽃놀이패

반격이든 방어든 검찰이 유리한 상황이다. 끝까지 판다는 특수부, 그것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들이 맡았으니 어떤 결론이든 한쪽은 승복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조 후보자 관련 의혹이 '혐의 없음'으로 나온다면 후보자는 후보자대로 결백을, 검찰은 검찰대로 정치적 중립성을 얻는다.

검찰의 전리품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의 신상, 재산내역 등이 탈탈 털린 법무부 장관이다. 수사는 몰라도 검찰개혁을 지휘해야 하는 인물이 본인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검찰에게 얼마나 수술용 메스를 들 수 있을까. 한 법조계 인사는 이번 수사를 "조 후보자에게 '검찰을 안고 가야 한다'고 각인시키는 것 아니겠냐"고 해석했다.

수사 결과가 반대라면 조 후보자는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검찰은? '살아 있는 권력을 제대로 수사했다'는 성취가 남는다. 개혁의 대상으로 몰린 검찰에게는 진정한 반격의 기회가 찾아오는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국민은 검찰개혁을 원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검찰개혁을 부르짖고 추진하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검찰이 수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 누가 웃을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2019.8.27
▲   윤석열 검찰총장이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청사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집무실로 돌아가고 있다. 2019.8.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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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제국주의의 모습

[지구화시대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제4장 현대제국주의 ①
  • 김정호 북경대 박사
  • 승인 2019.08.27 20:31
  • 댓글 0

한국 변혁진영 내 이론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저자 김정호씨의 양해 아래 그 동안 레디앙에 연재해 오던 [지구화시대 자본주의―‘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앞으로 민플러스에서도 공동 연재하기로 하였다. 저자는 이 연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우리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당시의 자본주의에 대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 같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간 이 문제를 별반 고려하지 않은 채 행동해 왔다. 하지만 변혁운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단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리라고 본다. 본 글의 연구주제는 간단하다. 즉,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인가,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새로운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였는가? 이 궁금증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된 본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신자유주의의 본질 ; 제2장 국제독점자본의 형성과 발전 ; 제3장 지구화시대 금융업자본 ; 제4장 현대제국주의 ; 제5장 다극화와 신국제질서.

현재 제3장까지 (총 7회) 연재가 끝난 상태이며, 민플러스는 앞으로 연재되는 ‘제4장 현대제국주의’부터 게재할 예정이다. 그전 내용이 궁금한 독자께서는 기존 레디앙에 연재된 저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아래 링크 참조)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전후 미국중심 현대제국주의체제를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 등에서 독자들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논의자체를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또한 독자들의 공론화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현대제국주의와 한국사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대한다. [편집자]

[새 장을 시작하며] ‘제국주의’란 말이 요즘 들어 다소 낯설게 들린다.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개념은 유효할까? 그런데 한편에선 세계 모든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 미국이란 존재는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단순히 ‘패권주의’라는 규정만으로 그 복잡한 동기와 행동논리를 다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패권주의’란 무엇인가? 지구화시대에 있어 더욱 많은 문제들이 국제정세와 연계되며, 과거보다도 훨씬 대외적 요소의 내적 규정성은 강해졌다. 이 같은 외부적 힘을 올바르게 이론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오늘날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된다.

제4장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는 과거 식민지지배로 상징되었던 구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제국주의이며,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이래 오늘날 지구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고 있는 제국주의를 일컫는다. 우리는 앞서의 논의를 통해 지구화시대인 오늘날 현대제국주의의 성립과 관련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인식에 접근할 수 있는 일정한 기초를 확보하였다고 판단된다. 즉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일국적성(민족성)' 간의 모순으로 집약되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국제 분업의 더 한 층의 발전에 대한 객관적 요구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라는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 등으로 구체화되어 표현된다.1)

그러나 이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여 정치적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2)가 곧 바로 성립하거나 현실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국가가 모두 제국주의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듯이, 제국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객관적 필연성과 주관적 능력간의 관계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국부적이고 지역적인 영향력만 가지고서도 출현할 수 있었던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반드시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슈퍼 제국주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국주의는 아무 국가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전 지구적인 거대한 슈퍼 제국주의가 애초에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현대제국주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우선 부딪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기원과 관련한 문제이다.

독점자본의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는 한편에선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경제관계의 궁극적인 규정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 자신 상대적 독자성을 갖고 나름의 역사적 진화를 겪는다. 때문에 얼마간 역사적 시기가 근접한 제국주의 간에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연계와 계승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현대제국주의를 직접적인 발판으로 삼고 있으며 그 계승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현대제국주의의 출발점은 2차 대전의 종식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구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큰 획을 긋지만, 그러나 종전 이후 출현한 현대제국주의에 있어서도 다시 그것의 내부적 발전에 따라 서로 다른 두 형태의 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은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관건적이다. 비록 과거에나 지금이나 현대제국주의에 있어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변화가 없지만, 그러나 이 같은 '미국'이라는 동일성 때문에(즉 그것의 현대제국주의 내의 연속적인 지배적 지위 때문에) 그가 대표하는 현대제국주의가 중간에 질적 변화가 발생한 점을 놓치는 것은 이론연구에 있어 실패를 자초하기 쉽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종전 후 냉전체제 하에 존속했던 제국주의는 냉전종식 후의 제국주의와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데, 사실상 현대제국주의의 이 같은 내부변화는 일찍이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제국주의는 그 성격 변화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기는 대체로 ‘냉전체제’에 상응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식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해당되며, 후기는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지금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그것을 말한다.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시기구분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대체로 그 경제적 하부토대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내부적 성격변화에 또한 조응된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국독자 역시도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대제국주의 내에 있어 후기 형식은 당연히 전기의 현대제국주의를 모태로 한다. 때문에 그 전기 형식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제국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담고 있다. 필자는 전기의 그것을 '동맹적 제국주의'로 그리고 후기의 그것을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1. 냉전체제하의 '동맹적 제국주의'

1)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의 초기 형태가 그 성격에 있어 '동맹적'3)이었으며 또 그것이 왜 그 같은 형태로 밖에 출범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성격상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제국주의가 갖추어야 할 주체조건 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의 직접적인 점령여부는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식이 된다. 구제국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강점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정복과 군사력 그리고 행정적 통치에 의존해서 그것을 유지하였다. 이에 비해 현대제국주의가 의지하는 것은 주요하게는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는 일종의 '규범' 혹은 '규칙'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광범한 식민지 민중들의 자각과 전쟁 당사국인 구식민제국들의 쇠락 그리고 세계사회주의체제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직접적 점령과 같은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새롭게 나타난 것이 '규범'과 '규칙'에 의한 통치방식인데, 이는 현대제국주의에 강압적인 인상 대신 일정 합법적 외투를 걸칠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제국주의는 이렇듯 일종의 특정한 규범적 국제 질서이자 기제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이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세계적 규모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양자는 상호 의존적이다. 세계적 범위에서 통용되지 않으면 감히 국제 질서라 부를 수 없으며, 또 범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기 위해서는 형식상으로나마 보편적 규범에 입각한 국제 질서이어야만 한다. 이에 비하면 전통적 제국주의는 일종의 국부적이며 지역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영제국이 강점한 식민지가 비록 아시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세 개 대륙에 걸쳐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렸지만, 그러나 그러한 영국도 모든 식민지들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며 더더구나 지구적 통치를 구축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구제국주의국가와 현대 제국주의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제국주의국가의 경우 침략당하는 국가에 비해 경제와 기술 그리고 군사 방면의 실력이 일정한 우위를 갖추기만 하여도 식민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칼이나 스페인과 같은 오래된 식민주의국가들은 당시 대면했던 상대가 대부분 아직 노예제나 씨족사회의 단계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단지 신식 항해기술을 장악하고 조총이나 대포로 무장한 얼마 되지 않는 모험가들 대오만을 거느리고서도 자신들보다 인구나 면적 면에서 수배 내지 수십 배에 달하는 식민지를 점령통치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현대제국주의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미 독립을 획득하여 주권을 지닌 국가들이며, 또한 일부 지역의 소수 몇 개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다. 때문에 현대제국주의가 하나의 세계질서와 세계패권을 건립하고 유지하려면 강력한 군사‧경제‧과학기술 방면의 하드파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당한 정치‧문화‧사상‧이데올로기 방면의 소프트파워 또한 필요하다. 이 같은 실력과 영향력을 갖출 때만이 각종 국제법과 국제규칙을 제정하고 또 그것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 형상적 비유를 빌자면 현대 제국주의자는 '지구 사령관임'에 비해, 전통적 제국주의자는 '지방 성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4)

그런데 2차 대전이 막 종식 되었을 무렵만 하더라도 기존의 오래된 제국주의국가들을 포함해서 이 같은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국가의 자격을 갖춘 나라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국조차도 당시에는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미달하였다. 종전 직후의 미국은 비록 경제와 군사 면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였지만,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적'인 것이기 보다는 '국부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미국은 독립 후 줄곧 국내 문제에 치우쳐 왔으며 해외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는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는데, 그 같은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국진영에 참여하여 그 지도적 국가로서의 위신을 크게 넓혔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볼 때 종전 직후 미국의 경제‧정치‧군사 면에서의 영향력은 자신이 대전기간 중 직접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점령한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국가와 지역의 범위를 크게 상회한 것은 아니었다.5) 이 같은 조건을 감안 할 경우 종전 직 후 전 세계적 범위에서의 규칙 제정권을 요하는 현대제국주의의의 성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몇 개 유력한 국가들의 협력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초기형태는 '동맹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신흥 강대국인 미국은 오직 서유럽의 전통적인 구제국주의국가들 (그중 특히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만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종전 후 미국과 몇몇 서유럽국가들이 결합한 '동맹적 제국주의'는 우선 국제연합(UN)의 설립과 'IMF-GATT 체제'의 구축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들 기구 출범이 갖는 의의는 초기 참여국의 규모가 가졌던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이들에 의해 제정된 규칙들은 종전 후 정치와 경제면에서 국제질서를 규정하였으며, 이후 회원국들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이들 기구는 명실상부한 전 지구적인 질서와 규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제 정치조직으로서의 국제연합은 연합국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천명한 '반파시스트 투쟁정신'의 계승을 자신의 표면상의 설립취지로 삼았다. 이 때문에 국제연합의 이념에는 전 세계의 항구적 평화에 대한 옹호, 회원국 간의 상호평등과 존중 및 공존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에 비해 국제 경제조직인 IMF와 GATT가 설립목표로 삼았던 것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의 수립이다. 비록 위의 국제조직들은 정치면에서 거부권을 갖는 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경제면에서 일국화폐인 미국달러를 세계기축통화로 삼는 등의 일정한 형식상의 불평등을 포함하였지만, 그러나 우리가 너무 이상에만 치우쳐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내용만 가지고서 '패권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세계 각국이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논란이 많은 'IMF 통화체제'라 할지라도, 당시 달러 자신은 국제협약에 의하여 '1온스=35달러'의 가치로 황금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또 이를 지키기 위한 미국 국내법의 구속을 받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국내 화폐(즉 유통 중인 미연방준비이사회의 지폐) 가치의 25%는 법률 상 황금에 의해 지지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같은 국제통화제도는 '준 금본위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규정이 끝까지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 제도의 형식상의 '공정성'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형식상으로나마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현대제국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의 일부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사실상 형식상의 '공정경쟁'을 위한 규칙을 제공한 것일 뿐 아직 '제국주의체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같은 규범과 규칙이 실제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기능하게 되었는지, 또 국제적으로 이러한 질서구축을 위해 일부 서유럽 유력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이 어떻게 그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여기서 일국 내 법률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규칙'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더 관건적일 때가 많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결국 경제력과 군사력에 의존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여야 한다. 그중 경제력은 궁극적으로는 한 국가의 패권실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지만, 단기적으로만 보자면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치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미국은 당시 경제력과 군사력 이 두 가지 측면의 우세를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 같은 우세는 모두 전쟁 종식 직후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결코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전후 복구과정을 통해 서유럽의 동맹국들이 경제부흥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들은 경제방면에 있어 얼마든지 다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또 만약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지속될 수 없게 된다면, 그 군사적 우위 또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종전 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해에 맞게끔 방향 지워야 할 동기를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한 새롭게 출현한 사회주의권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이를 위한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미국이 이를 위해 채택한 전략이 동서 간 '냉전체제'의 의도적인 구축이었는데, 이 같은 냉전체제를 빌려 미국은 종전 후 경제와 군사방면에 있어 자신의 일시적 우위를 보다 항구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6) 그리고 이 과정은 종전 후 자본주의 국제질서가 초기 다소 모호하고 때론 '이상주의적'이기까지 했던 색채를 벗어 던지고 점차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다.7) 여기서 현대 제국주의의 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냉전체제의 성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하에서 그것의 의의·성격·형성과정 등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2) 냉전체제와 '동맹적 제국주의'의 수립

미국에 있어 냉전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도하는 국제질서 구축에 있어 필수적인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종전 직후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아직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 창출이라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라야만 현대제국주의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권이 배제된 자본주의진영만의 단독적 시장을 성립시키는데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 나중에 명백해지듯 미국의 달러패권의 유지의 측면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이는 순수한 경제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정치·군사력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또 이 같은 달러패권의 유지는 미국이 경제패권을 지속할 수 있는 관건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냉전체제는 어떻게 미국의 이 같은 군사력 창출이 가능토록 도왔을까?

냉전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있다. 그런데 당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국제문제의 가장 주요한 이슈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전 후 전쟁으로 파괴된 기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서유럽 각국 내의 계급투쟁이 격화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본래 일국적 상황으로 전개되는 계급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다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확대 발전하는 데에는 많은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예컨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국 국가독점자본주의 간 국제적 대단결의 성공, 당시 서유럽의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후 국제정세에 대한 전략적 판단 오류와 타협주의노선, 소련의 경직된 '양대 진영' 이론과 패권적 야심 등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동서 양대 진영의 분화와 대립은, 서유럽 각국의 노동계급이 전쟁이 가져온 폐허와 생활고 속에서 기존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계급투쟁의 수위가 임계점에 접근함에 따라, 그리고 미국과 같은 패권적 야심을 가진 국가의 전략적 의도가 첨가됨에 따라, 어렵지 않게 한 단계 수위를 높인 전면적인 군사 대결적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과 서유럽 각국의 통치계급은 국내의 불만을 국제적인 긴장조성을 통해 상대적으로 완화시키고 대중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처음 양대 진영이 성립하는데 있어 원인을 제공하였던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대립은, 점차 본격적으로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에 대해 다시 그 존재에 대한 나름의 명분과 합법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리하여 냉전체제는 먼저 각국의 일국 내 계급투쟁을 국제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수렴시킨 후, 다시 이를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통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냉전체제의 형성은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적 제국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동맹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면서 군사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냉전체제의 구축을 통해 미국은 현대제국주의의 성립에 필수적인 지구적 범위에서의 군사력 배치를 완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국제관계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세계적 범위로 냉전체제가 확산되어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냉전은 처음 1945~49년 기간에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소가 유럽대륙에서 각자 비교적 안정적인 전략적 구조를 건립한 후인 1950~60년대에 점차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및 세계 각지로 확대되었다.8)이러한 냉전체제의 세계적 확장에 수반하여 미국은 유럽과 지중해 그리고 아시아와 근동지역에서 필요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또 자신이 주도하는 각종 지역안보동맹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미국과 영국 간의 동맹관계이다. 미국은 당시 정치상으로 영국의 지지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영국의 지지가 있어야만 유럽에서의 군사적 주둔을 계속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유럽을 '발판'으로 하여야만 자신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9) 이 때문에 종전 직후 미국이 현대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절차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국제정치 무대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과 상호이익의 기초위에서 세계분할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 점에 있어 영국은 당시 국민당 장개석 정권의 통치하에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영국의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의 정책과 행동을 지지하는 식의 타협이 이루어졌다.10)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지중해의 세력범위를 분할하는데 있어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지중해는 전통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열강의 세력범위에 속하였는데, 미국의 독점자본은 근동지역(터키를 중심으로 한 중동지역 일대)에 진입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 경우 특히 영국자본은 가장 크고 완강한 경쟁 상대가 되었으며, 만약 미국 해군이 지중해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대영제국의 이익과 장차 크게 충돌하게 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배경과 관련하여 당시 독일 자본의 근동지역 진출을 둘러싸고 이 지역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영국 자본과 대립이 발생했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이러한 곤란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는데, 이하에서 소개하는 1947년2월에 발생한 그리스사태가 바로 그것이다.11)

그리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앞서 일찍이 1944년10월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나치 점령 치하에서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공산당이 거의 전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옛 종주국인 영국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자신의 대리정권을 내세웠으며, 이에 따라 내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격화하면서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민중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듬해 봄 영국은 4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또 전쟁 피해로 여의치 않은 자국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선 거액인 4.6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였지만 여전히 사태의 발전을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영국정부는 이로써 국내적으로 커다란 재정과 정치 양면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1947년2월21일 영국정부는 마침내 정식으로 미국정부에 각서를 보내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3월31일 이후 그리스에 경제와 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이 중임을 맡아줄 것을 희망한다는 공식 의사를 표명하였다. 당연히 미국이 이 같은 요청을 거부할 리가 없다. 미국정부는 이것은 영국이 '세계의 영도력'을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간주하였으며, 기꺼이 이 역사적 임무를 감수하겠다고 선뜻 회답하였다.12) 미국정부는 장차 이 사태에 대한 개입으로 부터 얻게 될 다음 세 가지 전략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첫째, 대영제국의 기반을 접수하여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대하고 그 세력을 중동과 지중해까지 넓힐 수 있다. 이는 미국이 꿈에도 그리워하던 숙원이었다. 둘째, 자신의 세력을 소련의 변경지대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유럽의 허약한 복부(腹部)인 중근동지역에 있어 소련에 대한 '억제정책'을 펼 수 있는 전초기지를 세울 수 있다. 셋째, 원조의 제공자요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공산주의 확장에 대항하는 중임을 떠맡을 수 있는 자유세계 지도자로서의 형상을 수립할 수 있다.

1947년은 잘 알려지다시피 '마셜플랜'이 발표되는 등 유럽에서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중요한 한 해이다. 우리는 이 같은 해의 년 초에 발생한 그리스사태의 새로운 진전과 그 이후 동서 간 냉전적 대립을 촉진시키는 일련의 사태발전이 긴밀한 인과 관계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을 동아시아에까지 확대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군사력이 비교적 일찍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진출하였던데 반해 중동지역에의 진출은 약간 늦어졌다. 이 역시도 주요하게는 영국이 여전히 2차 대전 이후에도 자신의 식민지였던 중동 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실력의 지속적인 상승에 따라 영국은 점차 중동지역에서도 철수하게 되는데,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이후 영국은 완전히 이 지역을 포기하고 대신 미국은 영국군이 사용하던 일련의 군사시설을 포함하여 영국의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접수하게 된다.13) 1968년이 되면 미국은 월남전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대한 간섭이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 월남전에 참여한 54만 명의 미군을 포함하여 100여만 명의 미군이 유럽과 아시아 대륙 및 인근 도서에 주둔하였으며, 30만 명의 미군은 본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군함에서 생활하였다. 미국은 이 무렵 전 세계에 2000여 개의 군사기지를 설치하였으며, 40여개 국가와 지역에 대한 정식 보호 의무를 떠맡았다.14)

이상의 종전 후 미국이 주도하는 현대제국주의가 건설되는 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전후에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은 서유럽제국과 소련 등 다른 경쟁국들에 대해 상당한 우세를 점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대제국주의가 필요로 하는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패권구축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할 때 서유럽이 지니고 있던 경제‧정치‧정신상의 영향력과 군사상의 잠재력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지구적 전략을 실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였다. 미국의 독점자본과 지배집단은 종전 후 서유럽경제의 침체와 사회동란 그리고 서유럽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냉전 구도를 설계하고 추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제국과의 정치와 경제 및 군사방면을 포괄하는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이에 기초한 새로운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성립되고 존속한 현대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동맹적 제국주의'는 이후 미국이 지역차원의 강대국에서 진정한 세계적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덧붙이자면, 이렇게 성립된 '동맹적 제국주의'는 내부관계에 있어서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냉전시기 내내 그 구성주체 간의 관계에 있어 '동맹'적 성격의 틀을 끝까지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동맹' 성격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비록 이들 간의 관계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적인 복종관계 보다는 횡적인 평등관계에 가깝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형식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등한 '파트너 관계'임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으며,15) 내용적으로도 비록 미국이 간혹 패권적 행동을 보일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원래의 파트너 관계로 복귀함으로써 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전 직후의 제국주의가 그 내부관계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체제 자체의 성격과 구속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여 진다. 미국은 종전 후 자신이 패권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으로 '냉전체제'의 구축을 구상하고 적극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냉전적 국제질서는 이후 반대로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이 상호 장기간 '동맹'적 성격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였다.

첫째, 냉전체제는 동서진영 간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대립'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 경우 유럽은 근대문명의 출발지로서,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도나 역사의 유구함 그리고 학문적 전통과 이론적 깊이에 있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다른 한편,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강고한 독일파시즘을 패망시키는데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한 소련과 그 제도인 사회주의가 세계 인민으로부터 높은 위신과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사정도 고려하여야만 하였다. 때문에 미국은 냉전체제 하에서 계속해서 이념적 우세를 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유럽의 정신적·도덕적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째, 냉전체제가 요구하는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의 측면에서 볼 때도 그러하였다. 종전 후 미국이 아무리 초군사강국이고 막강한 공업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병력을 보유한 소련과 그 사회주의 동맹국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1949년 소련이 원자탄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무너졌으며, 1960년대 중 후반에 이르러선 미소양국의 핵전력은 비슷한 수준으로 전반적인 균형에 이르게 되었다. 또 1957년과 1959년에 소련이 미국보다 한발 앞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을 각각 지구궤도에 쏘아 올린 데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면에 있어서도 소련은 첨단 강국에 속했으며, 그 경제력 역시도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던 데서 볼 수 있듯이 만만치 않았다. 냉전 후기인 1980년대 초에는 소련 경제는 한때 미국 GDP의 2/3에 이를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렇듯 소련 하나만 가지고서도 미국은 상대하기가 벅찼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권 전체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냉전적 대결구도를 전 지구적 범위에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반드시 서유럽과 일본의 힘을 빌려야만 하였다. 아래 표4-1은 미국이 1970년대 중반 들어 군사비지출 면에서 소련에 오히려 뒤처진 상황을 보여주며, 표4-2는 나토의 집단적 힘을 빌려 비로소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자신과 동등한 동맹국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요인 때문에 냉전기간 현대제국주의의 내부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러한 동맹적 관계가 순탄하게 저절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사적영역의 독점형태인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현대제국주의 내부 주체 간의 동맹 역시도 상호 역관계의 변화, 미소관계, 제3세계권과의 관계 등 주변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동요와 갈등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현대제국주의 내부에서 '동맹관계'라는 기본적 성격의 규정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일종의 종합적 '균형'의 결과이자 표현이라 할 수 있다.18) 이리하여 이상 열거한 요인 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자연적으로 소실되거나 인위적으로 해결 짓게 된 것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성격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본문주석>

1) 만약 어떤 역사적 시기에 있어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 나름의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분명 생산의 국제화와 관련된 지구화의 추진과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예컨대 오늘날 '지구적 공급사슬'과 같은 국제 분업의 발전추세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와 같은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은 결코 경제적 범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현대 제국주의'라는 현실 정치역량이 객관적 요구로 떠오르게 되는 필연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기본모순(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사적점유 간의 모순)은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선 주요하게는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민족성' 간의 모순형태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상부구조로서의 현대제국주의와 관련한 문제는 이 같은 자본의 '국적성' 내지 '민족성'과 관련된 모순이 가장 고도하고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본 글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이처럼 주요하게는 정치적 상부구조 측면에서 파악된다. 이 같은 규정은 엄밀한 것은 아니며 편의상의 고려에서이다. 그것은 레닌이 말한 “금융자본의 기초위에서 성장한 비(非)경제적 상부구조, 즉 금융자본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라는 규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레닌전집>(제27권),1990년,인민출판사, p397. 레닌은 원래 '제국주의'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의 경제와 정치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점은 레닌의 제국주의에 관한 '5가지 지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즉 ➀독점 형성➁금융자본의 형성➂자본수출➃경제적 세계분할➄영토분할이 그것이다. 그중 앞의 네 가지는 경제와 관련되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정치와 관련된다.

3) 여기서 '동맹적'이라는 개념은 현대제국주의를 형성하는 주체(서구 선진 자본주의국가들) 내부에 있어서의 상호관계를 주로 지칭하며, 그것의 외부적 표현으로서의 객관적 국제질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이상 현대 제국주의에 대한 성격규정 및 관련 내용은 [中]王金存,2008년,《帝国主义历史的终结―当代帝国主义的形成和发展趋势》,pp.101-104참조.

5)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저자 폴 카네기는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미국 군사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나중의 분석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미국의 군사역량은 실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강대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은 단지 몇 개의 원자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또한 원자탄 사용이 일으킬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고려하여야만 했다), 미국은 또한 그 군사력을 이용해서 소련과 같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의심으로 가득 차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가 어려웠다." [英]保罗·肯尼迪,《大国的兴衰》(下卷),p92. 1945년에 미국은 유럽에 69개 사단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26개 사단을 주둔하고 있었으며, 미국 본토에는 한개 사단도 없었다. 위의 책,p93.

6) 카터 정부 하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서, 오늘날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인 소위 '미국체계'에 대해 이 같은 "미국체계의 대다수 내용은 냉전 기간에 출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美]兹比格纽·布热津斯基,《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p24-25.

7) 미국 권력층 내에서도 종전 후 수립될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상당한 노선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 중 수립한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일명 '비둘기파'가 존재하였으며, 소련을 배제하고 서유럽만으로 소위 자유진영을 구축하고 소련에 대해선 더 이상 공산주의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봉쇄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매파' 진영이 존재하였다. 비둘기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3기 집권 시 부통령을 역임한 당시 상무부장관이었던 헨리 월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는데 대체로 민주당내 좌파세력이 집결하였다. 매파는 당시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의 후임이 된 트루만과 국무부장관인 벨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으며, 민주당내 우파와 공화당 연합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두 노선의 대립은 1946년에 들어서면서 대충 우세가 판가름 났다. 결국 후자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1947년부터 이후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 플랜' 등으로 이어지는 대 소련 봉쇄와 대결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中]刘金质,2003년, 《冷战史》(上卷),pp98-99 참조

8) 냉전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발생과 확대 그리고 종식의 역사 과정을 밟았다. 필자가 참고한 [中]刘金质,2003년,《冷战史》(上·中·下卷) ,世界知识出版社는 46년에 이르는 냉전사를 이하 5 단계로 나누었는데 참고할 만하다. 즉 냉전의 개시(1945-1949), 냉전의 확대(1950-1962), 냉전의 완화(1963-1979), 냉전의 재현(1980-1984), 냉전의 종식(1985-1991)이 그것이다.

9) 미국의 전략가 브레진스키는 유럽이 미국 패권전략에 있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미국의 서부 파트너 (서유럽을 지칭함-주)가 미국을 그 주변지역의 근거지로부터 쫓아낸다면, 미국은 자연스럽게 유라시아 대륙의 체스 판에서의 경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럽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정치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교두보이다. ……미일 관계와는 다르게, 대서양 동맹은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확립시켰다. ……유럽의 어떠한 확대도 모두 자연스럽게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범위의 확대로 된다. 반대로, 만약 범 대서양 간의 긴밀한 관계가 없으면,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주도적 지위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30; pp47-49.

10) 미영 양국 간의 타협 내용은 위 《冷战史》上卷, pp98-99의 내용 참조.

11) 이하 그리스사태와 관련한 내용은 위의 책, pp107-110 참조.

12) 《冷战史》上卷, pp109-110. 그 당시 트루먼정부의 고위관리였던 에치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사의 전환점이 이미 이르렀으며, 미국은 필히 용감히 나서서 몰락 중인 영국을 대신해서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세계창조의 현장기―나의 국무부에서의 세월>,뉴욕1969년,p220. 위의 책,p110.

13) 그러나 미국이 진정으로 중동에 군사기지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되는 것은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한 후의 일이다.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 판>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냉전의 최후 단계에 세 번째 방위 '전선' 즉 남부전선이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상에 출현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의 두 측면에서의 반응을 일으켰다. 첫째는 미국이 직접 아프간 민족항쟁을 원조해서 소련을 곤궁에 빠지게 하였다. 둘째는, 페르시아 만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해서 위협역량으로 삼은 것이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6. 미국과 중동 각국의 군사관계 및 군사기지는 이후 냉전이 종식된 직후 비교적 큰 변화를 겪었다. 이때부터 미국 군사시설과 군대가 더 많은 중동국가에 진입하였으며, 이후의 10년간 미국은 중동의 군사기지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유지하였다. 이 밖에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은 나토의 '동쪽 확대'를 추진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미 동유럽 몇 개 국가에 군사기지의 효능을 갖춘 시설들을 계속해서 설립하였다. '9.11'테러습격 이후 미국은 반테러전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여 반테러전쟁의 필요라는 명의를 빌려 군사기지를 설립하였다. [中]樊吉社 张帆 共著,《美国军事―冷战后的战略调整》,p70.

14) [中]刘绪贻 杨生茂 总主编,2008년, 《美国通史》(第6卷),p388.

15)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소위 '웅대한 계획'이라 이름붙인 유럽정책에 관한 중요한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을 동반자(파트너)로 간주하며, 그들과 완전히 평등한 기초위에서 함께 자유국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모든 중대하고 지난한 임무에 종사할 수 있다. " 《美国通史》(第6卷), p274.

16)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0에서 재인용.

17)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1에서 재인용.

18) 이 같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은, 미국과 서유럽과의 관계를 실례로 들 경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종전 직후에서 1940년대 말까지는 서유럽이 미국에 대해 경제와 군사상에 있어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49년4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정식 출범하였는데, 미국은 그 지휘권의 장악을 통해 서유럽을 정치와 군사상으로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서유럽 국가들의 전쟁피해 복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경제부흥이 시작되면서 양자 관계는 조정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이 1953년2월 서유럽 6개국의 '유럽석탄강철공동체'의 설립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서독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국가들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기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은 이후 1958년1월 6개국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건설에 대한 조약 (로마조약)이 성사됨으로써 더욱 진전되게 된다. 이 같은 단합을 바탕으로1950년대 중반부터 서유럽은 미국에 대해 자신들의 실력 향상에 걸 맞는 정치·경제·군사상의 합당한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들면서 이 같은 양자관계의 조정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힘의 균형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그간 계속된 군비지출 특히 월남전의 확전으로 막대한 국지수지 적자가 발생함으로써 날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다른 한편,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프랑스의 드골이 1958년 정권을 잡은 이후 그 독자노선을 노골적으로 천명하면서, 미국의 주도권에 정면 도전하였다. 그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에 있어 미국과 나란히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요구하였으며,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영국수상에게 비망록을 보내 미·영·불 3국으로 구성되는 '안전조직'을 결성하여 지구적인 정치와 전략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드골은 심지어는 미국을 현대문명의 어머니인 유럽의 '자식'이라고까지 불렀으며, 유럽이 마땅히 인류 진보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유럽이 미국의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토록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드골의 이러한 독립적인 자주정책의 영향 하에서, 그간 미국 혼자서 조종해오던 나토조직은 크게 쇠약해졌다. 미국의 이러한 곤궁은 1970년대 초 닉슨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미국은 우선 서유럽과 일본을 압박하여 달러의 금 불태환과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관철시켰는데, 이러한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는 날로 누적되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한 때 상당히 악화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1973년 중동전쟁 이후 OPEC의 석유가격 인상을 계기로 화해의 실마리가 찾아졌다. 즉 제3세계권의 새로운 도전에 맞선 공동대처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이후 카터 대통령시기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 간의 일정한 관계개선이 이루어 졌으며,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1980년대에 양자관계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진전이 나타났다. 미국은 이 시기 소련과의 신 냉전을 획책하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동맹국들과의 공동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이전의 약화된 주도권을 상당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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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본질, 이론·역사와 그 현대적 기원 http://www.redian.org/archive/133718
신자유주의와 후기 국독자 http://www.redian.org/archive/133878
국제독점자본과 국제분업, 지구적 경제일체화의 기초 http://www.redian.org/archive/13423
1990년 이후의 국제독점자본 http://www.redian.org/archive/134498
금융업자본의 인수합병 http://www.redian.org/archive/135010
국제 외환·채권·주식시장의 형성 배경 http://www.redian.org/archive/135325

링크모음 : 후기국독자론1-3장 https://drive.google.com/file/d/1NfXFHO2n1e-gzUy_AUTZgdrGFOQXMnXa/view?usp=sharing

 

김정호 북경대 박사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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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지소미아' 종료, 위기 아닌 기회다

[좌담회] 지소미아 종료 평가와 이후 한반도 정세 전망
2019.08.28 08:37:39

 

 
지난 22일 정부는 일본의 수출 통제 및 한국에 대한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배제에 대한 대응조치로 한일 군사 정보 보호 협정(지소미아, GSOMIA) 종료 카드를 꺼내들었다.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에 대해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까지 나서서 당혹감과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은 지난 7월 25일 이후 연일 미사일 시험을 발사하며 한국을 압박하고 나섰다. 북미 대화 재개의 모멘텀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동력도 차츰 약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이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지소미아 종료의 의미와 이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해보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김동엽 교수는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간 정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면서 "이번 지소미아 종결이 지소미아가 가지고 있는 '한미일 3각' 틀에 얽매이는 고리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고 평가했다.  

정욱식 대표는 "지소미아 종료의 타이밍은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종료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지난해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다. 이는 지소미아가 체결됐던 사유가 개선된 상황으로, 지소미아를 종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상황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향후 지소미아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김 교수는 협정이 기본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관련돼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에 있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이 사안을 최대한 한일 문제로 좁혀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북미 대화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향후 남한이 북미 간 대화에 중재자나 촉진자로 참여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지금 나타나고 있는 북한과 미국의 반응을 보면 한국의 역할에 대해 북한은 남쪽을 미국의 대변자로, 미국은 반대로 남한이 자신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북한과 손발을 맞춰서 자신을 코너로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런 상황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가 자국의 안보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 미국 입장에서 안보 사안인 북미 간 대화에 우리를 다시 불러들일 가능성이 낮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북미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다른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주문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역시 지소미아 종료가 북미 회담과는 크게 관련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지금 우리가 북미 양측을 중재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남북 간 대화는 단절돼있기 때문에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국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미 간 협상에서 핵심은 결국 '빅 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양측이 대타협의 안을 만들어서 밀어붙여야 한다"며 "연내 합의가 가능하다면 북한도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인 내년에 맞출 수 있고 미국도 재선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연내 빅 딜을 타결하고 내년에 이를 본격 이행하는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좌담회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사회로 26일 진행됐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이 22일 오후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평화적 분위기가 깨지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미중 무역전쟁에 한일 무역갈등뿐만 아니라 지소미아 종료 문제까지 불거졌다.  

지소미아 종료가 향후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는데, 우선 이번 조치에 대해 평가해본다면?  

김동엽 : 개인적으로는 지소미아가 처음에 맺어졌던 2016년부터 반대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종료돼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점이 지금이냐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시점에 어떤 파장이 있을지 고려해야 할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가 지소미아 종료에 대비해 여러 시나리오들이 점검됐다면, 그리고 그에 맞춰 나름의 복안이 있었다면 괜찮았다고 본다.  

그런데 지소미아의 본질은 한일 간 정보 문제가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시작된 측면이 있다. 따라서 그 시작점이 그랬듯 한일 양측의 갈등보다는 미국과 관련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는데, 오히려 이번 지소미아 종결이 지소미아가 가지고 있는 '한미일 3각' 틀에 얽매이는 고리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런 측면에서 왜 종료했냐도 중요하지만 향후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욱식 : 지소미아 종료의 타이밍은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종료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지난해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중단했다. 이는 지소미아가 체결됐던 사유가 개선된 상황으로 종료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던 상황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현 상황에서 정부가 복안을 가지고 있어야 할 부분은 일본과 계속 이런 형태로 갈등을 지속할 것이냐, 아니면 일본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지금까지 분위기로 봐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는데 정부는 북일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편으로 정부는 미국 반응을 잘 살피고 대응해야 한다. 미국 주류가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단 지켜보자는 반응을 내놨다. 그렇다면 한미 간 갈등은 정상 간 전화통화를 하든 메시지를 보내든 해서 톱 다운 방식으로 가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지소미아는 오바마 대통령 집권 당시에 했던 일이라는 점을 잘 주입시켜서 갈등 국면을 최소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동엽 : 그런데 미국 행정부가 트럼프 정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전략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 정부 때 이야기했던 '재균형', '아시아로의 회귀' 등과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전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트럼프의 전략은 오바마 때보다 확정되고 있기도 하다.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의 핵심은 태평양 축이었다. 즉 태평양으로 확장하는 중국에 맞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반도, 대만, 필리핀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이를 확대해서 인도, 호주까지 연결한 것이다.  

물론 미국이 이러한 전략을 세운 것은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태평양이 아닌 서쪽으로 진출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에너지원 물동량의 70%가 인도양을 통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는 중국 내부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름'을 빼는 파이프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 내부에 축적되고 있는 과잉 건설, 자본, 인력 등을 밖으로 빼는 과정을 통해 예전 일본이 겪었던 '버블 경제'를 겪지 않겠다는 의도다.  

문제는 이걸 미국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을 중국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묶어버리면 안에서 이 고름이 터질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 일본과 한국 등도 활용하는 것이고.  

앞서 말했지만 이번 지소미아 종료를 통해 우리가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 정부의 움직임이 미국의 중국 봉쇄 하위 구조에서 이탈하겠다는 식으로 이어지면 위험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일단 현 상황에서는 지소미아 문제를 한일 간의 문제로 완전히 좁혀서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욱식 : 물론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이 트럼프 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이름이 바뀐 것 이상의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 때 미국의 기본적 전략은 동맹과 우방국들의 군사 능력을 높이고 군사 네트워크를 강화하면서 미국의 패권 전략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과 관련해 이러한 전략보다는 '금전'을 중시한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자체적인 힘으로 중국을 상대할 수 있다면서 굳이 동맹에 미국의 돈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미국이 가지고 있는 군사 기술과 경제력, 여러 전략 무기의 우수성 등을 감안할 때 미국이 독자적으로 하면 되지 굳이 과거처럼 동맹국을 결집시켜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이렇다보니 미국 주류의 연속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대통령이 바뀌는 과정에서 미국 내부의 응집력은 줄어들고 있다. 만약 오바마 정부 때 지소미아 종료가 일어났다면 우리한테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복안을 가지고 현 상황을 잘 풀게 되면 전화위복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지소미아 종료와 관련해 동맹의 업그레이드 언급했는데,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동맹이 강화하는 일변도로 빠지면 안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군사적 부분은 유연화 시키면서 평화 구축을 도모할 수 있는 동맹 관계로 끌어가는 것을 구상해서 하나 둘씩 조치를 취해야 한다. 

현 상황은 한미일 군사동맹으로 향해 가던 분위기에 브레이크가 걸린 건 맞다. 이후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냐가 중요한데, 지소미아 종료와 맞물리면서 9월 북미 회담의 성사 여부와 그 결과가 미칠 여파가 커질 것 같다.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지소미아 종료 이후 미국 정부가 강력한 불쾌감을 표시하면서, 이번 사건이 한미 동맹을 약화시켰고 우리가 북한에 대해 더 취약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동엽 : 미국이 강하게 불쾌감을 표시한 것은 우리에 대한 불만도 있겠지만, 그만큼 미국이 모양 빠지게 된 상황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시아로의 회귀든, 인도-태평양 전략이든 미국은 이를 미중 대결 구도 속에서 구상하고 있다. 그런 미국에게 이번 사건은 타격이 될 수 있다. 러시아가 최근에 독도 영공을 침공했을 때 여기에 같이 대응해줘야 할 한국과 일본은 독도 문제를 가지고 대립했다. 이를 보고 중국과 러시아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국 너희 뜻대로 될 것 같아? 밑에서 저렇게 싸우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중국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을 볼 때 미국 입장에서 가장 견고하게 중국을 막을 수 있는 지역이 그나마 동쪽, 즉 한반도와 일본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오랜 기간 동안 미국-일본-한국의 구도를 가져왔는데 최근 이것마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니까 미국은 모양 빠지는 것이다. 그런데 지소미아 종료까지 나오니 미국은 기분이 많이 나빴을 것이다. 

프레시안 : 한편으로 한국군이 이번에 독도 방위 훈련을 실시했는데 상대적으로 예전보다 규모가 커졌다. 이 훈련을 두고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있던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동엽 : 대내, 대외적인 목적이 다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안 할 수는 없다. 현재 한일 양국 정부는 상대방과 관계에서는 잘못되고 있는 측면이 있지만 자신들의 정권을 수호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양국 간 접점이 생기려면 상대에게 압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과 일본 국민이 자기들 정부를 상대 쪽으로 틀게 해야 하는데 양측 정부 모두 여기서 굽히고 들어가면 대외, 대내적으로 헤어나기가 힘드니까 이렇게 방향을 틀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독도 방어 훈련의 명칭을 '동해 영토 수호 훈련'이라고 바꿨던데 이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훈련의 규모는 두 배나 커졌지만 동해라는 용어를 쓰면서 어떤 특정국가가 아니라 불특정 국가와 세력에 대비해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는 차원의 훈련이 됐기 때문이다. 

실제 훈련도 독도에 일본의 극우단체가 상륙하는 상황과 함께 불특정 국가의 침범 상황, 주변 국가 함정의 영해 침범 상황 등을 가정해서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이번 훈련이 단순한 독도 방위의 훈련이 아니라 포괄적인 여러 상황을 감안해 진행했고, 이를 통해 일본과 적대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욱식 : 문재인 정권과 아베 정권이 국내 정치적으로 '적대적 의존관계'에 들어간 상황이 가장 우려된다. 실제 양측의 갈등이 국내에서 각자 정부의 지지율을 받쳐주는 효과가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 않나? 그런 상황이라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이 갈등 국면을 타개하려는 동기가 위축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국가 간 관계가 나빠지면 결국 국가 구성원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우리야 일본이 숙이고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현재 그런 징후는 없고 앞으로도 별로 그럴거 같지 않다. 이런 상황이 장기화되면 경제적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부분에 대해 냉정하게 짚어봐야 한다.  

미국, 한일 갈등 중재할 이유 없다 

프레시안 : 미국이 보기에 한국과 일본의 대립이 자신들의 동아시아 전략에 있어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중재를 할법도 한데, 왜 미국은 가만히 있었을까? 

정욱식 : 7월 초 일본이 수출규제 조치를 취하고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시키는 경제 보복 조치가 가시화될 때 국내에서는 '미국이 개입할거다. 타이밍의 문제다'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팔짱 끼고 있었다.  

군사 및 안보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한일 간 관계 악화가 미국에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경제 전쟁에 준하는 상황의 발생은 미국, 특히 트럼프 행정부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별로 없다. 

트럼프 정부는 자유무역보다는 보호무역을 선호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향후 RECP(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한중일 FTA 등 자유무역과 관련한 조치가 가시화되고 있었다. 그러다 이번에 한일 갈등으로 이같은 조치가 다 물 건너가게 생겼다. 즉 동아시아의 자유무역질서를 억누르겠다는 미국의 전략이 일본의 수출규제와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애초부터 트럼프 정부가 개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또 이번 조치에서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장기적 목표는 남북경협의 본격화를 예방한다는 측면도 있다. 전략물자 통제를 엄격히 하면서 북한에 이러한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다. 이 부분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 이미 이야기가 됐을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이 조치는 미국의 '최대 압박' 전략과도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 25일(현지 시각) 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가졌다. ⓒAFP=연합뉴스


한편으로는 전면적인 개입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트럼프가 한일 간 개입을 꺼리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나 주요 국가 문서에 과거 같았으면 한국, 일본, 호주 등과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중요하게 언급됐을텐데 지금 트럼프는 이보다는 '공정함'을 중요시하고 있다. 또 지난해 북한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북한 위협론의 필요성도 굉장히 떨어졌고, 중국과는 경제전쟁을 하다 보니 여기서 한일 문제에 개입해봐야 득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일 간 갈등에서 미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한일 간 경쟁이 붙을 수 있는데, 그럴 경우 트럼프는 꽃놀이패를 쥐게 되는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이나 무기 판매에 있어 경쟁이 붙은 양쪽에 청구서를 들이 밀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 부분이 우려되는 지점이다.  

김동엽 : 미국 개입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한미일 구도를 옭아매고자 미국이 노력했던 것이 한일 양국의 역사적 갈등 해결이었다. 위안부 합의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뤄진 셈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한일 간 문제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면 미국이 중국을 포위하는 군사적 차원에서 동북아 문제들을 바라보고,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즉 한일 간 다양한 역사적 문제에 개입하는 순간 대중국 전략의 의도가 겉으로 드러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차원에서 미국이 쉽게 개입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또 미일 간 이 문제와 관련해 일정한 공감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여기에 괜히 개입하기보다는 암묵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자신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미일 동맹 자체를 더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을 수 있다. 

지소미아 종료와 북미 대화  

프레시안 :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나 불확실성은 결국 북핵 위협이 없어지고 남북관계가 풀리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텐데, 그런 측면에서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 거라고 전망하나?  

김동엽 : 지소미아 시작점 자체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관련돼있다. 따라서 미국이 생각하는 구도 등을 생각했을 때 분명히 지소미아 종료가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래서 이 사안을 한일 문제로 좁혀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관건인 북미 대화가 지소미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반도의 전체 안보 환경이나 동아시아 차원에서 보자면 지소미아가 큰 변수이긴 한데, 북미 관계라는 양자적 차원에서만 보면 지소미아의 유무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다만 우리가 북미 간 대화에 개입하려고 했을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남한은 지난 1년 동안 북미 사이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잘 해왔다. 평창 올림픽부터 시작해서 9월 평양 정상회담까지의 과정은 좋았고, 올해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4월에는 워싱턴에 가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면서 중재자든, 촉진자든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6월 30일 판문점에서의 남북미 정상 회동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할 부분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나타나는 북한과 미국의 반응을 보면 한국의 역할에 대해 북한은 남쪽을 미국의 대변자로, 미국은 반대로 남한이 자신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북한과 손발을 맞춰서 자신을 코너로 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양측 모두 우리를 균형된 중재자가 아니라 일방적 메신저 또는 중재자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지소미아가 종료된 현 시점에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가 북미 간 협상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다. 즉 미국이 우리에게 북미 간 비핵화 협상 과정에 동참할 기회를 줄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미국은 지소미아 종료가 자국의 안보 영역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북미 간 테이블에 우리를 다시 불러 들일 가능성이 낮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가 북미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게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등의 다른 길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김동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정욱식 : 지소미아 종료는 북미 회담과 별로 관계가 없을 거라고 본다. 한미 관계는 좀 불편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의 반응을 종합해보면 우려했던 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지소미아 연장을 선택했다면 남북관계에 악재가 됐을 수 있다. 그래서 추가적인 악재를 차단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부분도 있다고 본다. 

또 북한이 최근에 정부에 막말을 하고 한국만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는 미사일 시험을 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려를 표명한다든지, 경고를 한다든지 등등 발언이 나와야 하는데 지금 일체 그런 것이 없다. 오히려 북한에서 오케이하면 실무회담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역시 분명 과거와 달라진 미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해 북미 양측이 처음 만났을 때는 남한 정부가 중재 또는 촉진의 역할을 했지만 지금은 그게 필요 없어졌다. 여기에 북한은 한국의 중재 역할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미국은 북한과 바로 소통이 가능한데 남한이 끼어들 필요가 있냐고 보는 것 같다. 이는 지소미아 종료 이전부터 있었던 생각으로 보인다.  

물론 지소미아 종료에 따른 한미 간에 일시적인 불편함이 생기긴 했으나, 오히려 이제는 한미 동맹 문제에 관해 우리가 어젠다를 가지고 치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이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이 싫다고 하고 북한도 이걸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한미 정상 간 합의를 통해 적어도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미 훈련은 중단하겠다는 정도의 조치를 이끌어내는 등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지소미아, 위안부에 이어 사드 배치까지?  

프레시안 : 지소미아 종료를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 2017년 사드 배치 등 미국의 관여로 만들어진 사안들이라고 한다면, 위안부 합의와 지소미아는 정리됐고 이제 남은 것은 사드 배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 예상하나? 

정욱식 : 현재 사드 배치는 일반 환경영향평가에 들어갔고 내년 초에 끝난다. 약식평가에서는 상관 없는데 일반 평가에서는 주민 공청회를 해야 한다. 이게 변수인데, 정부에서는 최대한 공청회를 미뤄서 주민들의 반발을 근거로 정식 배치를 늦추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지소미아 종료 이후 사드 철수 문제도 한미 간에 논의를 해야 할 사안이다. 당연히 미국 주류는 반발하겠지만 트럼프는 한국에 사드 갖다놓은 것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한미 간 합의로 사드를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자신의 성과로 포장할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국이 정식 배치를 의제화할 경우 우리는 철수를 의제화하는 맞대응이 필요하다. 양국 정상이 합의를 통해 철수를 위한 출구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프레시안 : 이미 사드 포대를 비롯해 시설은 다 들어온 것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철수할 수 있을까?  

정욱식 : 현 상태로 유지한다고 하면 우리 정부가 2017년에 공언했던 이른바 '3불'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식 배치가 공론화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발전기를 가져다 놓고 레이더를 돌리고 있지만 정식 배치되면 송전선을 깔아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미국이 레이더를 업그레이드하면 2017년의 3불 정책이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그 상황이 가기 전에 우리 측에서 먼저 철수를 의제화하면서 의제 선점 효과를 노리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김동엽 : 시설적 측면만 놓고 본다면 다를 수도 있지만 임시배치에서 실제배치로 넘어간다고 해서 이것이 '3불'을 완벽하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3불은 추가적인 포대가 늘어나느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드가 정식 배치 단계로 접어들면 어떤 경우든 중국의 반발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공론화시킬 필요가 있다. 즉 사드를 가지고 들어온 가장 큰 명분 상 이유인 북한의 위협을 가지고 우리가 이야기해야 한다. 이와 연결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사드 임시배치를 정식배치로 넘겨야 할 정도로 안보적 상황이 급변되거나 악화된 건 아니지 않나? 지금 안보 상황이 사드를 배치했던 2017년보다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 사드를 배치했던 때와 비교했을 때 임시배치를 정식배치로 빠르게 전환할 만한 명분이 부족하다면, 이를 이용해 우리가 시간적인 여유를 갖는게 중요하다.

정욱식 : 사드 문제 관련해서 하나 더 짚고 싶은 부분은, 만약 정식배치에 돌입하면 한국에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미국의 필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중국이 군사적 대응을 공론화할 것이고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면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동시에 불러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중거리 미사일 배치 명분을 쌓을 수 있다.  

따라서 북미 회담이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이른바 '게임체인저'가 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사드 정식배치가 현실화되면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도 현실화될 수 있고 그러면 동북아 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  
 

▲ 지난 2017년 4월 26일 새벽 사드 장비를 실은 트레일러가 성주골프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김동엽 :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는 사드와 다르다. 사드는 나름 배치 명분이 있었지만 중거리 미사일은 한국에 배치되는 순간 신냉전의 시작이다. 

중거리 미사일은 사거리 500km 이상의 미사일을 의미한다. 이건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다. 사드는 고각이든 뭐든 구실을 만들어내서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말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거리 미사일은 그런 명분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따라서 상황이 뒤바뀌지 않는 이상, 즉 북중러의 '북방 3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중국이 주한미국을 위협할 수 있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나오면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은 이상 중거리 미사일 배치 문제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또 사드 정식배치 문제가 중국이나 북한의 반발을 불러올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해도 이걸 명분으로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수는 없다. 또 실제 미국의 반발과 실제 물리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긴장 상황의 고조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중국이 말로는 긴장 고조를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지리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추가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라도 괜찮은 상황이다. 오히려 사드 정식배치 됐다고 해서 단순한 말을 넘어선 추가적인 행동을 하면 그걸로 인해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중국이 현명한 전략가라면 이러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에 가지고 올 정도의 실질적인 긴장 고조까지 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북한의 '막말'은 간절함의 표시?  

프레시안 : 최근 북한의 동향도 좀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북한이 저렇게 막말을 하고 연이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북한의 본심은 대체 무엇인가?  

정욱식 : 우선 대내적인 측면에서 이같은 메시지를 발신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이달 29일 최고인민회의를 앞두고 있고 아마 그 이후에 북한은 나름의 '빅 딜'안을 준비해서 북미회담에 임하려고 할텐데, 북미회담이 잘된다는 건 곧 북한의 핵 포기를 의미한다. 즉 회담이 잘된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결단을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구도인만큼, 북한은 자신들이 핵을 포기하더라도 '초대형 방사포'로 자위력 지킬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군사 분야에서 계속 현지지도를 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남한에 보내는 메시지도 있다.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 훈련 문제뿐만 아니라 남한이 전면적 군비 증강으로 나가고 있는 부분과 관련해 이를 중지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기도 하다. 

또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도 있다. 미국이 지금 하는 단거리 미사일 시험 정도는 넘어가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건 자신들의 자위권 문제이며, 막말로 미국까지 날아가는 것도 아니지 않냐면서. 어쨌든 미국은 눈감아주고 있는 분위기로 가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북한이 이렇게 연이어 미사일 시험을 감행하는 것은 역으로 비핵화 담판을 준비하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래서 9월부터 상황변화가 있을 수 있고, 이런 부분들을 우리 국방 예산에도 적절히 반영해야 한다.  
 

▲ 25일 북한 매체들은 지난 24일 북한이 '새로 연구 개발한 초대형 방사포'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도 하에 성공적으로 시험발사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가 25일 오후 공개한 사진에서 김 위원장이 방사포를 뒤로 하고 활짝 웃고 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사실 남북, 북미 관계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 중에 하나가 남한이 내년 국방예산을 어느 정도 규모로 책정할 것이냐는 문제다. 북한이 과거에 이야기했던 병진노선과 지난해 채택한 새로운 전략노선은 상당한 모순관계에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지난해 새로운 노선을 이야기하며 군비 조절을 통해 경제발전에 필요한 내적자원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한이 군비 경쟁 드라이브를 걸어 버리니까 골치아픈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한반도 문제가 북미 간 적대관계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북미 회담을 중심으로 진행된 것은 맞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지금 남북관계가 상당히 악화됐다는 점을 살펴보고, 여기에는 북한의 언행이 유감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우리가 원인을 제공한 측면은 없는지 따져보기도 해야 한다.  

김동엽 :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발언들, 특히 지난 4월 12일 김 위원장의 시정연설을 포함해 지금까지 보도를 통해 나온 북한의 언사를 오독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북한의 발언은 대내적 메시지로 귀결된다.  

북한은 지난 7월 25일 이후 지금까지 미사일 발사 시험을 7번 했는데 처음에는 F-35 전투기와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을 언급했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 부분은 발표 내용에서 사라진다. 이를 통해 북한이 남한의 군사적 행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것이 최근 메시지의 본질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거나 동‧하계 군사 훈련 등을 김정은의 현지지도라며 공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는 어떻게 보면 김정은이 지난해 정상적인 통치 활동을 제대로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은이 이렇게 했던 이유는 남한, 미국과 관계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대의 중심에 문재인 대통령이 있었다. 

김정은은 지난해 중국에 비행기를 빌리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싱가포르로 갔고 60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면서 베트남으로 향했다. 미국과 협의를 통해 인민들에게 선물을 안겨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물을 없었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그동안 훈련다운 훈련도 제대로 못했고. 이런 과정에서 북한 내부에서는 우리 안보는 어떻게 하냐는 의구심도 나왔을 것이다.  

하노이 결렬의 충격을 받은 김정은은 이로 인해 두 달 동안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4월 12일 시정연설을 하면서 입장을 밝혀고 이후 처음으로 했던 공개활동이 군 부대 방문이었다. 이는 김정은이 지난해처럼 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고, 훈련이든 군비 확충이든 할 건 다하면서 연말까지 미국에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다. 즉 대화의 문은 열어 두되 내가 할 것은 다하겠다는 뜻이다. 

북한은 결국 미국에 양보하는게 아니라 '니가 만들어 놓은 틀 속에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고 본다. 또 트럼프가 트위터로 6월 30일 판문점 만남을 구상했지만 이걸 기회로 잡아 1시간 대화로 만든 것은 김정은이다. 이후 김정은은 7~8월 내부 통치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미국의 말도 오독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트럼프가 한미 연합 훈련은 필요 없다, 북한 미사일 발사 별거 아니다 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미국 너희들은 미사일 안맞으니까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냐, 우리만 맞아 죽으라는 거냐'라고 해석하는데 사실 트럼프 발언 역시 대내 정치적인 메시지로 봐야 한다. 1년 뒤 대선을 앞두고 있는 대통령선거 후보 입장에서 발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남한을 신경쓰기보다는 대선에 임하는 자신의 업적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이 북한과 협상을 해서 북한이 미사일을 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지난 6월 30일 판문점 회동 이후에도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하고 있다.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을 이해한다고 넘기면서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은 쓸데없고 돈 낭비라고 일갈하는 이유도 북한과 협상에서 자신의 역할을 부각하면서 실무진에서는 어떻게 하든간에 지도자 간에는, 즉 김정은과 자신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회담에서의 북한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해석된다. 

한국, '중재자' 또는 '촉진자'만이 능사 아냐 

프레시안 : 최근 북한이 WFP(세계식량계획)를 통해 전달하려던 우리 쌀은 받지 않고 중국이 지원하는 쌀은 받으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중 간 경협이 다시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는데, 반면 남북관계는 상당 부분 막혀있다. 남북관계 복원, 그리고 나아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정부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정욱식 : 북한에게는 미국과 담판을 짓겠다는 것이 번지점프를 하는 것과 같다. 살아서 돌아오려면 뒤에 묶인 줄이 튼튼해야 한다. 북한 인민들의 지지는 물론이고 중국 혹은 러시아와 전통적인 우방관계를 공고히하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 전에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중국가서 중국 수뇌부 만나서 군사협력 강화하겠다는 것도 미국과 본격 담판에 돌입하기 전에 안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중국과 러시아가 단단히 잡아주겠다는 메시지가 있어야 북한도 나름대로의 빅딜을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정은이 지난 4월 시정연설을 통해 북미 간 협상 시한을 올해 말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내부적으로도 그렇게 시한을 잡아놓은 것이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에게 '너희들이 양보해라'라는 메시지만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협상안을 준비하자는 일관된 메시지를 밝히고 있다. 

물론 미국이 이걸 받아들일 것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만약 미국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을 초래했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면 협상판은 100% 깨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내년부터 '새로운 길'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된다면 트럼프도 더 이상 지금과 같이 나올 수는 없다.  

그래서 북미 회담이 중요한데, 우리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가 문제다. 지금 우리가 양측을 중재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이 상당히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남북 간 대화는 단절돼있기 때문에 한미 공조를 통해 미국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영변 핵 실험장 폐기 카드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이 방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우리 나름의 안을 준비해서 미국에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북미 간 협상에서 핵심은 결국 '빅 딜'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이냐에 달려있다. 양측이 대타협의 안을 만들어서 밀어붙여야 한다. 연내 합의가 가능하다면 북한도 5개년 경제발전 계획인 내년에 맞출 수 있고 미국도 재선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 맞춰서 준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일단 연내 빅 딜을 타결하고 내년에 이를 본격 이행하는 국면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AFP=연합뉴스

 
김동엽 : 남한에 대한 북한의 수위 높은 이야기를 보면 절절함이랄까,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막말 자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다른 길을 가지 않게 붙잡아 달라는 신호로 보인다. 또 여기에는 남한에 대한 실망감과 섭섭함, 아쉬움 등도 묻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이후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비핵화 문제에서, 또 북미 간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문제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려고 했었는지에 대한 부분을 역지사지의 자세에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반성을 시작점으로해서 우리가 향후에 어떻게 현 상황을 풀어갈지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 남한이 했던 중재자 또는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다 버리라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다시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역할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을 인정하고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 현재 중요한 것은 남북관계다. 

이번 정부는 처음에 출범했을 때는 남북관계를 통해 뭔가를 극복해 보겠다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었다. 남북관계를 통해 생길 수 있는 한미관계에서의 약간의 소원함 등을 감수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정말 하고 싶었던 것과 하려는 것의 차이가 커졌고 여기에 용기도 없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어떠한 역할을 하려고 해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은 오히려 남북관계에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치고 나가야 한다. 

북한이 통미봉남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사실 남북관계는 통미봉남으로 갈 수 없다. 이건 구시대적인 발상이고 북한도 이렇게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선후관계는 있을 수 있으나 누구하고는 이야기하고 누구하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식의 방법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다.  

물론 북한이 플랜 A와 B를 모두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플랜 A는 당연히 미국과 담판을 짓는 것이다.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올해 11월부터 내년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오고 새 정부가 짜여질 시기까지, 즉 앞으로 1년 6개월 정도는 북미 간 새로운 합의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면 그 1년 6개월을 버틸 수 있도록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는 것 외에 또 다른 합의 사항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트럼프 입장에서도 자신의 대선 선거 유세 기간 동안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시험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올해 11월 전까지 되돌릴 수 없는 북미관계를 일정 부분 만들어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걸 북미 관계로만은 할 수 없다. 남북관계도 함께 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 번의 남북 정상회담을 가진 만큼, 이를 동력으로 삼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서로 상호 보완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의 모멘텀을 구축해야 한다.  

북한이 만약 플랜 B로 간다면 미국을 젖히고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국제사회로 나가겠다는 건데, 이게 가능하려면 북한은 핵과 미사일 시험을 유예하고 있어야 한다. 또 그 상황에서 남북 간 평화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  

결국 북한 입장에서 플랜 A를 택하든, 플랜 B를 택하든 간에 남북관계가 일정 부분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있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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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연방연합제 1단계에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다”

  •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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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
    2019/08/28 11:52
  • 수정일
    2019/08/28 11:52
  • 글쓴이
    이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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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뉴스 기획강좌②>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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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27  14: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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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북 연방연합제 통일방안’, 2007년께 개념화 2014년 공식화

   
▲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8일 오후 광화문 조영래홀에서 열린 '2019 통일뉴스 기획강좌'에서 '공존단계를 거친 통일 -북측 연방연합제를 중심으로'를 제목으로 강연했다. [사진 - 조천현]

“북한의 남북연방연합제 개념은 2000년도부터 북측 내부에서 논의되기 시작해서 2007년도에 개념화가 됐다. 그리고 20014년 7월에 공화국 성명으로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연방연합제라고 하는 단어가 나온다.”

‘2019 통일뉴스 기획강좌’ 제2강을 맡은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은 ‘공존단계를 거친 통일 -북측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북측의 공식 통일방안인 남북연방연합제가 2007년께 개념화 돼 2014년 발표됐다고 밝혔다. 나아가 판문점선언으로 남북은 사실상 연합제 1단계에 진입했다고 평가해 주목된다.

정창현 소장은 21세기민족주의포럼과 통일뉴스가 지난 8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개최한 ‘통일방안을 논하다’ 기획강좌에서 북한의 통일방안 변천사와 연방연합제로의 정립, 연방연합제의 단계와 내용 등에 대해 분석했다.

먼저, 잘 알려진 대로 북측의 연방연합제는 직접적으로는 2000년 6.15공동선언 2항에서부터 출발했다고 짚었다.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한 대목이다.

정창현 소장은 "북측은 6.15공동선언 2항이 나오고 나서, 외무성, 대남사업부문, 선전선동부문, 이 부분들이 다 모여서 TF팀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며 ”여기서 남측의 연합제와 연방제의 공통점이 도대체 뭐냐? 그제서야 굉장히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했다고 본다“고 관측했다.

이어 “그 결과 2007년 10.4선언이 나올 때는 북에서는 내부적으로 연방연합제라는 말을 벌써 쓰기 시작했다”며 “2007년부터 2014년까지 7년 동안 그것을 수면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굉장히 많은 토론을 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2014년 7월 7일자 공화국 정부 성명은 6.15공동선언 2항을 언급한 뒤 “북과 남은 련방련합제방식의 통일방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공존, 공영, 공리를 적극 도모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북 연방연합제 방식 통일방안’을 공식 천명한 셈이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도 “우리는 북남관계문제, 나라의 통일문제를 민족의 지향과 념원에 맞게 풀어나가려는 립장에 선다면 남조선당국을 포함한 그 누구와도 손잡고 나갈 것이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2016년에 36년만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는 통일방안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김정은 위원장이 “북과 남은 상대방에 존재하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우에서 온 민족의 지향과 요구에 맞게 련방국가를 창립하는 길”을 언급했을 뿐이다.

정 소장은 “연방연합제라는 말을 쓰지 않고 1단계는 통일의 동반자로서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는 단계, 이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남북화해협력 단계”이며 “서로의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고 용납하는 단계, 이게 연방으로 넘어가는 두 번째 단계. 그리고 그 단계에서 전 민족적인 높은 단계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 식의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자는 게 2016년도 7차 당대회 북측 기본입장”이라고 해설했다.

북의 완성된 통일방안, [사진 - 조천현]

   
▲ 정창현 소장은 북측은 2014년 남북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천명했지만 1980년 발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지금까지도 기조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사진 - 조천현]

이같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은 어느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되었다는 것이 정 소장의 고찰이다.

그는 “남북이 분단된 이후에 상당히 오랜 기간 남과 북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방안도 기본적으로는 흡수통일 방안이었다”며 “과도적인 대책으로 잠시 남북간의 연방제를 실시할 수도 있다는, 과도적 형태의 연방제를 1960년 8월 14일, 광복절 하루전날 기념대회에서 김일성 수상이 당시 제기했다”고 되짚었다.

남쪽에서 예기치 못한 4.19혁명이 발발했고, 북측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북측이 ‘자신감’ 속에서 당장 남북총선거가 어렵다면 과도기적 대책으로 연방제를 제안했다는 평가다. 당시 북측은 연방제 영문표기를 ‘confederation(연합)’으로 했고, 그는 당시 동독의 ‘국가연합제’안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미-중 간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1972년 7.4남북공성명이 채택됐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고 하는 북측이 생각하는 통일의 3대 원칙을 남측과 같이 합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게 됐다”고 평가했다.

7.4공동성명이 무산된 이후 북측은 1973년 고려연방제를 제안했고, “고려연방제의 가장 큰 특징은 남쪽 정부를 배제하고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각계각층의 인민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를 소집해서 그것에 기초해서 고려연방제를 건설하자고 하는 안으로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병행해 북측은 1974년 유엔에서 남쪽을 배제하고 북측과 미국 양자 간에 평화협정을 맺자는 수정제안을 내놓았다.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남북에서 북미로 바뀐 것이다.

   
▲ 북한이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도표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 채택됐다. 그는 “39년이 지났지만 북한의 공식 통일방안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이라며 “지금도 북쪽 사람들을 만나면 기본 골격은 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이 동수로 참여하는 대표에 해외대표단이 들어와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고 일상적으로 그 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연방상설위원회를 만들고 그 밑에 남측 정부와 북측 정부가 지역자치정부로서 기능을 하고 그리고 주요한 정치‧경제‧국방‧외교 문제는 최고민족연방회의, 최고연방상설위원회에서 논의한다. 그리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단일 국호로 유엔에 다시 가입하자고 하는 안이 기본적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구성안이다”라고 설명했다.

북측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의 4대 선결조건으로 △반공법·국가보안법 폐지, △모든 정당, 단체 합법화, △군사파쇼정권의 교체 등 군사파쇼정치 청산과 사회민주화 실현,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등을 내세웠다.

그는 “1983년 이후 전두환 정권과 정상회담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스스로 선결조건을 무력화시켰다”며 “4대 선결조건은 당시로서는 남측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이었지만 39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보면 어쨌든 80년대 선결조건을 우리가 상당히 많이 충족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북측 내부에 두 가지 기류가 있었던 것 같다”며 하나는, 과도적 연방제, 고려연방제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방안으로 이어지는 기본 흐름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니, 어떻게 전두환 정권하고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을 만들 수 있느냐.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흐름이 있어 결국 4대 선결조건이 따라 붙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또한 4대 선결조건 다음에 10대 시정방침을 발표했지만 이 역시 1993년 ‘민족대단결 10대 강령’으로 교체됐고, “민족대단결 10대강령이 훨씬 온건하고 훨씬 계급포용적”이라고 평가했다.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1993년 4월 6일)
 

근 반세기에 걸치는 분단과 대결의 력사를 끝장내고 조국을 통일하는 것은 온 민족의 한결같은 요구이며 의지이다.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전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민족의 운명을 우려는 사람이라면 북에 있건 남에 있건 해외에 있건, 공산주의자이건 민족주의자이건, 무산자이건 유산자이건, 무신론자이건 유신론자이건 모든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하여야 하며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열어나가야 한다.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모두다 나라의 통일과 통일 된 조국의 륭성 번영을 위하여 특색 있는 기여를 함으로써 민족 분렬을 끝장내고 통일된 7천만 겨레의 존엄과 영예를 세계에 떨쳐야 한다.

1. 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현존하는 두 제도, 두 정부를 그대로 두고 각 당, 각파,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원들을 대표할 수 있는 범민족통일국가를 창립하여야 한다. 범민족통일국가는 북과 남의 두 지역정부가 동등하게 참가하는 련방국가로 되여야 하며 어느 대국에도 기울지 않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쁠릭불가담적인 중립국가로 되어야 한다.

2. 민족애와 민족자주정신에 기초하여 단결하여야 한다.

전민족은 각자의 운명을 민족의 운명과 하나로 련결시켜 민족을 열렬히 사랑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생명으로 지키려는 하나의 뜻으로 단결하여야 한다. 우리 민족의 존엄과 긍지를 가지고 민족의 주체의식을 좀먹는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배격하여야 한다.

3.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다른 사상과 리념,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 침해하지 말고 함께 진보와 번영을 누려가야 한다. 지역적, 계급적 리익에 앞서 전민족 리익을 도모하여야 하며 모든 노력을 조국통일위업을 이룩하는데 기울여야 한다.

4. 동족사이에 분렬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여야 한다.

남과 남은 대결을 추구하거나 조장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형태의 정쟁을 중지하고 비방중상을 그만두어야 한다. 동족끼리 적대시하지 말고 민족의 힘을 합쳐 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5.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신뢰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북과 남은 서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말아야 하며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상대방에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6.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고 조국통일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통일 론의와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하며 정치적 반대파라고 하여 탄압, 보복, 박해, 처벌하지 말아야 한다. 친북, 친남을 시비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정치범을 석방, 복권시켜 조국통일위업에 함께 이바지하게 하여야 한다.

7.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를 보호하여야 하며 그것을 민족대단결을 도모하는데 리롭게 리용하는 것을 장려하여야 한다.

통일되기 전에는 물론 통일된 후에도 국가적 소유, 협동적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하고 개인 또는 단체의 자본과 재산, 외국자본과의 공동리권을 보호하여야 한다. 과학, 교육, 문학, 예술, 언론, 출판, 보건, 체육을 비롯한 모든 부문에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명예와 자격을 인정하며 공로자가 받고 있는 혜택을 계속 보장하여야 한다.

8. 접촉, 래왕, 대화를 통하여 전민족이 서로 리해하고 신뢰하며 단합하여야 한다.

접촉과 래왕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래왕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각당, 각파, 각계각층에게 동등한 대화의 기회를 주어야 하며 쌍무적, 다무적 대화를 발전시켜야한다.

9. 조국통일을 위한 길에서 북과 납, 해외의 전민족이 서로 련대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북과 남, 해외에서 조국통일에 유익한 것은 편견 없이 지지성원하고 해로운 것은 함께 배격하여야 하며 각자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서로 보조를 같이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사업에서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와 각계각층의 동포들이 조직적으로 련합하여야 한다.

10.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위업에 공헌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 애국 렬사들과 그 후대들에게 특혜를 베풀어야 한다. 지난날 민족을 배반하였던 사람들도 과거를 뉘우치고 애국의 길에 나서면 관용으로 대하며 조국통일에 이바지 한 공로에 따라 공정하게 평가하여야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 제출한 김일성 주석의 로작)

문익환‧임동원, ‘낮은 단계 연방제’로의 진화에 기여

   
▲ 정창현 소장의 강연 후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진 - 조천현]

실제로 그 사이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고, 무엇보다도 그는 “객관적으로 보면 90년을 전후해서 남북간의 힘의 역관계가 변화된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고 진단했다.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남북 간에 경제적인 추세에서 남쪽이 상당히 변화되고. 특히 전두환시절 1983년도부터 3저호황에 기초해서 굉장히 한국 경제가 양적 성장을 하지 않았느냐”는 것.

그 과정에서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가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허담 비서와 ‘4.2공동성명’을 채택함으로써 “쌍방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누가 누구에게 먹히지 않고 일방이 타방을 압도하거나 타방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 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는 합의가 나왔다.

그는 “연방제 통일을 하는데 실현 경로에 대해서 사실은 89년도에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의 대화가 굉장히 중요한 결정이 된다”며 “거기에 기초해서 1991년 1월 신년사에 김일성 주석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게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 북측의 통일방안 변화 과정을 도표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김주석은 91년 신년사에서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립 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련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련방제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여야 한다”라며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를 제시했다.

이에 근거해 1991년 남북 총리회담에 기초한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고, 기본합의서 협상 당시 남북의 두 주역 임동원-림동욱 라인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다시 만나 6.15공동선언 2항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

그는 “북쪽에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기본적으로 북측이 생각하는 조국통일 3대헌장에 넣지 않고 있다”며 “남북기본합의서를 북측에서는 연방제 문서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연합제 문서지 연방제 문서가 아니라는 거다”라고 짚었다. 조국통일 3대헌장은 △조국통일 3대원칙,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이다.

아울러 “남북회담에 나가는 대표단에게 김일성 주석이 어떻게든지 합의를 타결하고 오라는 훈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훈령을 우리가 알았다”며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세게 밀어붙였던 거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연합제 방식에서 봤을 때 굉장히 잘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다”고 뒷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4단계 연방연합제와 DMZ 평화지대화‧철도도로 연결

   
▲ 북측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연합제와 연방제를 각각 두 단계로 나누어 모형화 했다. [자료제공 - 정창현]

결국 2000년 6.15공동선언 2항을 거쳐 2007년 10.4선언과 지난해 4.27판문점선언, 9.19공동선언 및 군사분야합의서 등 남북 정상간 합의들이 이어졌고, 북측은 연방연합제 통일방안을 공식 입장으로 굳히게 됐다.

먼저, 그는 연방제와 연합제의 공통점에 대해 △통일의 형태가 아니라 통일의 준비과정을 규정하고 있고, △평화공존하는 과도적 단계와 느슨한 결합을 상정하고 있고, △남북 정부 간에 상설 협의체를 상정하고 있는 점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는 “공통점이 사실 평화공존 단계를 거친다는 것 외에 없다”며 “차이점은 굉장히 크다”고 평가했다. 특히 △연방기구의 유무 △연방기구의 권한(외교권, 군사권), △상설합의체의 권한 유무를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는 남북 연합단계와 연방단계를 각각 2단계로 나누어 ① 남북연합 1단계 ② 남북연합 2단계 ③ 낮은 단계 연방제 ④ 높은 단계 연방제로 4단계에 걸친 남북연방연합제 모형을 제시했다.

남북연합 1단계는 ‘남북연합기구 추진’ 단계로 △남북정상회담 정례화 △분야별 장관급회담 △남북 의회 교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꼽았다. 남북연합 2단계는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실행위원회) △남북평의회 △서울,평양 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들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판문점선언에 대해 “단어상으로 보면, ‘평화’라고 하는 개념을 북쪽에서 다 수용을 해서 판문점선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 안에 조항들을 보면 사실은 남북연합제에 해당되는 통일로 가는, 북측이 생각하는 연방연합제의 1단계에 해당되는 제도적인 장치들이 대부분 들어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평화와 번영이라는 형태로 강조가 돼 있지만 곳곳에 통일이라고 하는 아이콘이 숨어있는 게 판문점선언”이며 “판문점선언을 통해서 남북관계는 이제 남북연합단계에 진입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기적인 정상회담, 직통전화 연결, △고위급회담, 국방장관회담 등 개최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 등이 남측 표현으로 ‘남북관계의 제도화’에 해당되지만 사실상 남북연합 1단계의 제도적 장치들에 해당된다는 해석이다.

그는 “우리는 연합제 1단계에 이미 들어와 있다”며 “안 된 게 남북 의회교류”라고 짚었다. 아울러 서울‧평양 연락사무소 대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설치를 현실적 대안으로 평가했다.

그는 “연합기구 구성은 생각보다는 빨리 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남북연합 단계가 시기적으로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연합에서 연방으로 넘어가려면 우리가 이제 연방제로 넘어갈 때가 됐다는 것을 국민들한테 보여줘야 한다”며 “나는 연합단계의 가장 상징적인 사업이 DMZ 평화지대화 하는 문제와 철도‧도로 연결이라고 생각한다”고 제시했다.

이어 “지금 공동경비구역에 실질적인 비무장화는 진행됐고, 남북 간을 연결하는 통로가 개성 가는 길과 금강산 가는 길 두 개에서 철원 쪽에 하나 더 열렸다”며 “거기에다 철도‧도로를 연결해서 사람이 오고가고 물자가 오고가는 이게 사실은 제도적인 형태들 보다는 가장 핵심적인,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업”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는 연합제 1단계에 이미 들어와 있다”

   
▲ 정창현 소장은 북한의 연방연합제 통일방안 역시 가변적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 조천현]

나아가 “연합제 2단계로 넘어가는 징표를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으로 본다”는 점과 “연합에서 연방제로 넘어갈 때는 평화협정과 비핵화가 전체 단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공정이 마무리되는 단계까지 진전이 될 때”라고 점쳤다.

그는 “노래에도 나오는 ‘사회주의 조선’과 ‘자본주의 한국’이 그냥 평화공존하면서 그럭저럭 잘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간격을 좁히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면서 평화공존이 ‘과정’이 아닌 ‘목표’로 될 수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통일지향적 평화공존’ 의미를 되새겼다.

그러면서 “우리세대는 힘들겠지만 IT와 스마트폰으로 또는 4차혁명과 인공지능 이런 세대에 적응이 된 남과 북의 젊은 세대들, 20대 30대들이 남과 북의 주역이 됐을 때는 사회문화적인 게 아니라 그야말로 IT나 정보기술로 자연스럽게 통합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내놓았다.

그는 “우리가 그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이 더 드라마틱하게 돌아가고 있다”며 “지금 북이 이야기하는 연방연합제라고 하는 것도 과정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변화는 안 되겠지만 언제든지 가변적이라고 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남북연합의 2단계의 기간을 얼마큼 볼 것이냐가 사실 쟁점이 될 것 같다. 나는 굉장이 오래될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는 참석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과거‧현재‧미래 핵은 통일과 병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며 “과거‧현재‧미래의 핵도 다 협상 대상, ‘완전한 비핵화’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 배경으로 “북의 미래 청사진을 각 분야에서 만들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40대인 것 같다”며 “지금 현재 북을 움직이고 있는 신‧구세대가 있다면, 신세대들은 완전한 비핵화 부분에서 과거‧현재‧미래 핵에 대해서 미국과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게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 중에 'I', 불가역적이라는 부분은 북에서 받지 않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종적 전 통일부 장관의 ‘과정으로서의 통일 -남측 통일방안을 중심으로’ 강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날 강좌에서 정해랑 21세기민족주의포럼 대표가 여는 말을 했으며, 세 번째 강좌는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이 ‘한반도 평화체제 로드맵과 통일방안’을 주제로 9월 5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 조영래홀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2019 통일방안 기획강좌’는 평화3000과 6.15남측위원회가 후원하고 있으며, 무료 공개강좌로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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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혁명의 전적지를 가다

빨치산 혁명의 전적지를 가다

 

김영승 기자 | 기사입력 2019/08/2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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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주일보

  

 

 

백운산의 역사성과 그 의미를 되 새겨본다

 

1. 서언

 

역사기행은 현장 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학습장이 돼야 한다.

 

동시에 왜곡 되고 잊혀진 현대사를 바로잡고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현장답사에서 단순히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당시 펼쳐진 사건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 원인을 똑바로 규명하고 그 속에서 체득해야 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이 무엇인가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현장답사의 물줄기를 과거로부터 현재현재에서 미래에로 지향해 가는 목적의식적인 현대 정치사로 연결시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옳게 확립하는데도 기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행문도 전개되는 사건들의 가감 없는 진실을 밝히고 오늘의 조국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접목시켜 저마다 주어진 여건에서 당면한 과업 완수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기본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하나 미흡한 점 많으리라 생각한다.

 

2. 피로 물든 섬진강을 가다

 

우리 일행에는 유복남박유배동지(백운산 빨찌산 출신들과 필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노투사 (이성근안학섭양희철안희숙김영승나승하정관호전덕례정귀남윤혜자신평식손영심)들 그리고 몇몇 젊은 일꾼(박지수김해령노진민 등)들이 함께 했다.

 

남원에서 구례를 통과하는 길에 밤재가 있다.

 

지금은 밤재에 산 터널을 뚫어서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직선으로 통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밤재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51년 가을 이현상 부대가 백아산까지 와서 인원을 보충하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당시 곡성과 구례 해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밤재 능선을 장악해야만 했다.

 

 

밤재 능선이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유일한 작전지대였기 때문이다.

구례작전은 밤재와 곡성에서 구래로 들어오는 통로하동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빨치산 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전투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까지 사수하지 못하고

 

피아간의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피어린 밤재 능선을 잊을 수 없다.

 

 

일행이 구례 산동면을 지날 때는 산동면 해방작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면은 지리산 자락에 골짜기 하나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상동하동중동이라 불렀다.

이 세 골짝 마을의 끝에 산동면 지서가 위치해 있다.

 

산동면을 해방시키는데 마지막 지서 함락 작전이 전개됐다.

이 작전에서 지서안의 적들은 실탄이 다 떨어져서 손을 들고 나오려고 했었는데 아군부대는 이 정보를 모르고 날이 새 불리하다고 생각한 결과 후퇴했었다.

 

이 함락 작전에서 총사 연대 중 7연대 연대장 등 지휘 간부들과 대원 동지들의 희생이 있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한편의 역사 현장이었음을 되새겨 보면서 섬진강에 이르렀다.

 

구례 토지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읍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     © 자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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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 우측은 우리의 기행 목적지인 백운산이그리고 좌측은 지리산이 자리 잡고 있다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토지면에서 강건 너 백운산 쪽 간전면과 하동군 학예면을 가기 전

한순애 골을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달리게 된다.

 

한순애 골 가기 바로 전에는 강변 모래사장이 있다이곳도 잊을 수 없다.

백운산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 내린 능선을 중바위 등 능선이라 부른다.

 

1953년 9월 15일 김선우 도당위원장을 보위한 우리 일행은 5명이었다.

 

권영용(체포후 총살 집행중대장과 연락지도원 윤석두(체포후 총살 집행동지가 후방을 감시하고

 

필자와 이선근 연락지도원이 적구 정찰 책임을 맡고 위원장과 조 보위병은 중간에 두고 섬진강을 건너는 과정이었다.

 

우리 적구 정찰조가 강을 무사히 건너 모래사장을 지나 도로 언덕에 다달았을 때였다.

시계는 바로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캄캄하게 깔린 상태였다.

그런데 일몰 전 건너편 중바위능선 중턱을 돌아내려 지리산 자락 도로변을 정찰하는데

섬진강 건너편에서 우리 일행을 발견한 적의 잠복부대가 막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 순간에

일행 중 강을 먼저 건 낸 우리 정찰조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뒤의 일행은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강을 한참 건너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캄캄해서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적의 말소리가 들렸다바로 앞에서 "이곳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일단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면 대응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뒤쪽으로는 물살을 가르며 건너오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우리 정찰조가 M1 8발을 쏘며 돌격 소리로 전진했다.

적은 당황한 나머지 한발도 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왕실봉 중터리를 단숨에 오르며 무사히 노고단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사연이 얽힌 강변 모래사장을 회상하면서 한순애골 강변을 달리게 됐다.

 

이 한순애골은 백운산에서 지리산지리산에서 백운산으로 오는 연락통로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던가.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동지들강을 건너다 건너편 매복에 걸려 강물에서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특히 엄동설한에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속에 강을 건너야만 했고

건너다 싸움이 벌어지면 물살에 전사하고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맞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적의 매복지를 뚫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투쟁했던 섬진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피어린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한순애골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하나만 소개한다면 1953년 85지구당 조직위 결정으로 지구당을 해체하게 됐다.

그때 5지구당 결정서 문건을 지참하고 한순애골을 내려오던 도중 박영발 위원장 주치의였던 이행년 동지가 매복에 걸려 부상 생포 당함으로써 문건을 빼앗겼던 아픔이 있는 곳이다.

 

부상당한 이 동지는 응급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파상풍에 걸려 죽고 말았다.

지금 그의 유골은 영광군 군서면 이 동지 선산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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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입구를 지나면서는 피아골 입구 전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피아골 입구는 1950년 9·28 후퇴 후 소위 유엔군 부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적지였다.

 

구례에서 하동읍으로 이동하던 적들에 매복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계장터를 지나면서 화계골의 빗점골에서 이현상 동지가 매복에 걸려 희생됐던 1953년 9월 18일을 되새기면서 악양면을 바라보며 하동읍을 달리게 됐다.

 

악양면은 지리산 세석평지로 이어지는 한 골짜기가 한 개 면인데 1951년 동기 공세 전 이현상 부대가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던 곳이다.

 

여기에서 보급한 식량을 동기 공세로 인하여 다 소모하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빼앗겼던 기억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하동읍을 통과할 때 지나는 강변 낭떠러지 입구는 1953년 7월 하동읍 파출소를

전남부대 소조가 습격해 괴멸시킨 곳이었다그러나 그때의 파출소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속에 하동읍에서 광양군 진월면으로 통하는 섬진강 다리(새로 건설됨)를 건너

진월면 옥곡면을 거쳐 옥룡면 옥룡골 백운식당에 이르렀다.

 

이곳 민박에서 일박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각자 소개와 하고 싶은 말 한 마디씩을 남기고 1박했다.

 

 

3. 한재를 오르다

 

한재는 해발 868고지이다.

 

한재 너머 구례군 간전면(지리산 문수골로 통함좌측을 오르면 따리봉,

 

우측으로 오르면 상봉을 향하는 원능선이다옥룡골은 도로와 민박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 7시에 출발한 일행은 연병장을 통과하게 됐다.

이곳은 9·28 후퇴 후 해방구를 갖고 있을 때 빨치산 부대들이 훈련 등 각종 행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되어 도로가 나고 새로 심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연병장은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골짜기에서 연병장을 통해

도슬봉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동기 공세 때부터 이곳을 지나다 적의 매복에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생포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 근처에서 생포됐던 한 여성 동지는 지금 살아 생존하고 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한재를 향해 올랐다.

원래 88능선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사정상 변경하여 한재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노 투사들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일부만 한재까지 오르고 나머지는 중도에 처지는 상태였다그래서 한재골의 소골짜기인 용지선 골과 한재로 가는 갈림길 골짝 물가에서

상봉을 바라보며 동지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준비해 간 과일과 술을 따르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먼저 산화하여 간 동지들을 기리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묵념을 했다일행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먼저 간 동지들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나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한재는 동기 공세 전 백운산 부대가 거점으로 쓰던 곳으로 여기에서 각종 문화행사도 했다.

동기 공세 때는 적아 간의 전투장이 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던 한재 전적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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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한재는 잣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당시 속된 말로 한재 잣이 이승만의 진상에 오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만큼 한재 잣이 유명했다는 것이다.

 

참고****지금 한재에는 우리 선생들 3분의 유분이 뿌려져 있다

 

4. 용지선골 확독터를 가다

 

백운산은 큰 산이라 눈도 제법 많이 와서 눈을 밟으며 확독터를 찾아 오른다.

옛날에 밟았던 길이고 고리수를 받기 위해 비닐 파이프를 설치하느라 민간인들이 다녔던 길이기는 하나 눈에 덮여 제 길을 찾아가기 쉽지 않아 숲과 너덜강 바위를 넘나들며 한참 헤맨 끝에 드디어 확독터를 찾아냈다용지선골에는 도당 연락부가 터를 쓰고 있었다.

 

이 확독은 넓은 바위 한복판에 징으로 쪼아 만든 것이다이 작업은 당시 연락부원 형(이름 미상)이 목수였기에 며칠간의 작업 끝에 파서 디딜방아를 만들어 양쪽에서 발로 디디며 한 사람은 확독에 넣은 곡식을 밀어 넣고 찧었던 곳으로 1951년에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 살아 있는 생존자로서 당시 방아를 찧었던 정관우 선생과 정덕례 여성 동지가 살아 있다현장을 답사한 감회와 추억이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확독에서 벼나 겉보리 등을 찧었는데 이 확독을 거쳐 간 동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유일하게 이 두 동지만 남아 있는 상태다.

 

토벌대는 방앗고는 없앴어도 확독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말없는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운산에서 유일한 전적지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일행은 여기에서 간단한 추모의 뜻을 표하고 사진촬영도 했다.

 

여기에서 원능선에 오를 선생들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옆 능선 너머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터를 답사하고 하산하여 집결지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른 경사우거진 숲과 바위를 넘나들며 나무와 풀잎을 잡고 미끄러지고 또 오르면서 드디어 원능선에 도달했다.

 

오르는 과정에 지난 폭우 때 산사태가 나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이를 치유할 손길은 미처 뻗치지 못하고 있음도 실감했다일행 중에 젊은 한 친구 때문에 오르는 속도가 느리기도 했다.

"노장 선생들은 잘 오르는데 왜 젊은 친구가 그렇게 더디냐"고 가벼운 재촉도 했다.

 

그런데 뒤늦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역사기행을 취재하겠다는 일념으로 아픔을 참고 함께 올랐던 것임을 알고서

젊은 친구의 불편함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다시금 지면을 통해 죄송함과 이해를 구한다추운 눈얼음 속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원능선을 올랐을 때 그동안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반세기 전 빨치산 동지들이 생사를 걸고 단숨에 오르고 내리던 길을 단시간이나마 체험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값있는 경험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고 김선우 위원장 유골이 묻혔던 능선고지에 다다랐다.

 

이 가묘에서 상봉을 향해 간단히 추모의 뜻을 표하고 백운산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며 동서남북 방면 지형지세를 관찰했다.

 

선우 동지가 이곳에 묻히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선우 동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고매한 성품을 가진 지도자로서 매사에 다정다감하고 하부 일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절대로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았던 지도자였다.

 

그래서 하부 일꾼들이 항상 그를 우러러 받들었다.

 

선우 동지의 최후

 

진월면 폐장 금굴에 잠복해 있다가 적들에게 발각돼 함께 있던 유상기 책임지도원 동지와 보위병 동지는 위원장 동지 구출 작전에서 희생되고 선우 동지만 다리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단신으로 백운산에 들어왔다가 적들의 포위망에 걸려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적들은 선우 동지의 인품과 인격그리고 지도자상을 받들어 시신을 이곳 능선에 묻게 했던 것이다.

 

그 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늦게나마 살아있는 노장들이 기억을 더듬어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몇 차례의 지형 답사 탐사 작업을 통해

지형지세 탐색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류락진 선생(암으로 작고했다과 이복순동지가 유골지를 발견 했다.(복순 여사는 당시 선우위원장 기요원인 동시에 비서로 사업했다.)

 

골격과 옷그리고 묻힌 지점을 종합해서 선우 동지임을 여러 노장들과 함께 확인하고

선산인 보성군 웅치면에 안치했다그후 매년 참배를 하고 있다.

 

5. 한눈으로 바라보는 백운산의 지형지세와 역사적 의미

 

백운산은 역사적으로 임진 조국전쟁갑오농민전쟁일제 강점 하 의병투쟁항일투쟁해방공간시의 유격투쟁조국전쟁 시기의 치열한 전투장이었다이 모두가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주와 조국해방투쟁의 산 전적지 중의 하나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백운산은 1227고지로 상봉따리봉도슬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대 봉우리로 둘러싸인 안쪽을 내각이라 하고 그 반대 바깥쪽을 외각이라 불렀다.

내각은 제일 큰 옥룡골이라 부르고 상봉 너머는 진상골다합골서골독새바위골이라 부르고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은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도슬봉에서 옥룡골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봉강능선이라 부르고 그 골짝을 봉강골이라 한다.

 

그리고 도슬봉에서 순천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용개산이 있고 용기동골이 있다.

 

섬진강 쪽으로는 문척골과 간전골이 있다상봉에서 하봉-삼각고지-기관포고지-800고지-박우리봉으로 이어지고 한 갈래는 옥룡면과 옥곡면 경계를 이루는 큰 능선이 길게 늘어져 있다.

그 외에 이름 모를 능선들과 골짜기들이 수없이 펼쳐진다.

 

6.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의 새로운 명칭 부여 했다재산시 잘 싸우다 희생된 간부들이나

 

전투원들의 이름을 따서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을 새로 명명했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열거한다면백운산은 전남 도인민위원장 김백동 동지 이름을 따서 백동산상봉은 도당위원장 김선우 동지 이름을 따서 선우봉따리봉은 도당부위원장 인철 동지 이름을 따서 인철봉도슬봉은 백운산지구 사령관 유몽룡 동지 이름을 따서 몽룡봉옥룡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염형기 동지 이름을 따서 염기동골상봉 너머 진상골은 당시 도당 책임지도원이었던 유상기 동지 이름을 따서 유상기골박우리 봉은 광양 군당위원장 박정기 동지 이름을 따서 박정기봉진상골 잣나무터는 부대장인 이봉상 동지 이름을 따서 이봉상터라 불렀으며 다합골은 당시 전남 부대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 이름을 따서 이정태골간전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정귀석 동지 이름을 따서 정귀석골용개산은 당시 정공대장 조동만 동지 이름을 따서 동만산이라 불렀다.

용기동골은 당시 백운산지구 사령관인 남태준 동지 이름을 따서 남태준골옥룡골 쪽 88터 능선 너머 백암골은 동기 공세 때 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조갑수 동지 이름을 따서 조갑수골이라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참으로 다 기억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7. 옥룡골에서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

 

옥룡골은 우선 필자가 1954년 초봄에 총 세발을 맞고 체포된 곳이며 전남 부대가 최후를 마쳤던 곳이다.

 

옥룡골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똥섬이 있다이 똥섬은 1953년 8월 14일 저녁 기습작전에 들어가다가 지뢰를 밟아 50여 군데 파편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곳이며 특히 소년전사 구춘길 동지가 장렬하게 죽어간 곳이다.

 

따리봉 밑에서는 토벌대들의 포위공격에 인철 부위원장 동지가 희생됐다.

토벌대가 그의 목을 잘라 배낭에 넣어 한재에서 상봉으로 가는 첫 봉우리인 민세등에 놓아둔 것을

유봉남 동지가 발견해서 정귀석 부위원장과 전영선 여성동지가 머리를 시신 몸통에 붙여 매장했다.

 

하지만 지금도 매장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54년 봄 염형기 부위원장 동지가 비트에 있다가 수색에 발견돼 전사했다토벌대는 그의 목을 잘라 담요로 싸서 광양읍까지 가져왔다.

 

염형기 동지는 당시 순천군당위원장이었던 남상훈을 소환하여 오는 과정에서

 

도슬봉 밑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는데 칼빈으로 저격하여 염동지와 보위병을 쏘아죽이고 자수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88능선 너머 백암골에는 민청학원이 있었고 이 골짝에 도당 정공대 3대대 부부대장 심 동지(여수 출신으로 기관총을 소총 다루듯 한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가 단신으로 토벌대 12명을 사살하고 마지막에 희생된 곳이다.

 

시신은 공세가 끝나고 묻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8. 두 소년 전사

한 소년 전사(이름 미상)는 1951년 동기 공세 때 백운산 지구 사령부 부정치원 연락병이고

또 한 소년 전사 구춘길은 전남 부대원이었다이 소년 전사는 부정치원과 함께 한재 골에서 기술 잠복하고 있었다.

 

토벌대는 수색작전을 펴며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오고 있었다그런데 당시 토벌대 중대장이 부정치원 대학동창이었다.

부정치원은 이를 알고 위기의 순간 손을 들고 투항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연락병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했다.

 

그러나 소년병은 완강히 거부했다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아 자기만 투항했다.

그래서 그는 살았다그러나 소년 전사는 발각돼 생포됐다그 순간 소년 전사는 끝까지 저항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투항할 수 없다미제의 앞잡이들아쏠 테면 쏴라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자

결국 토벌대는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참으로 악질이라면서 저항하는 소년 전사에 8발의 총탄을 퍼부어댔다그리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구춘길 소년 전사는 우리 전남부대 전투원으로서 1954년 초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다리 부상으로 걸을 수 없게 됐다.

 

동무들은 할 수 없이 그를 바위 밑에 은신시켜 두고 전투가 끝나면 데리러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적과 전진 후퇴를 거듭하는 투쟁 속에 구춘길 동무는 발각됐다적은 그를 생포해서 데리고 가려 했다그러나 구춘길 동무는 완강히 거부했다.

"미제의 앞잡이개새끼들아쏠테면 쏴라죽어도 너희들에게 투항하지 않겠다"고 성토했다.

적들은 수차례에 걸쳐 위협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빨갱이 악질이라며 3명이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소년 전사는 몸이 벌집이 돼 붉은 피를 쏟으며 최후의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됐다.

 

이 소식을 듣고 포로된 동무들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구춘길 동지는 구례 간전면 출신으로 노래도 잘 부르고 활달한 성격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야무지게 하며 돌격전에도 항상 선두에 서서 진격하며 생활에서 적극성과 자발성을 갖고 다른 전사들의 모범이 돼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모습이 선하게 남아있다이제는 한줌의 흙이 되었지만

항상 머리 위에서 지금 동무들은 어떻게 살며 무얼 하고 있는가 말하는 것 같다.

백운산을 그리며 동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9. 진상골에 얽힌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진상골 발치에서 상봉까지 폭 50m로 웅장하게 심어진 나무를 벌목해서 상봉에서 골짝을 내려다보면 개미 기어가는 것도 다 보일 정도로 민둥하게 만들었었는데 전쟁 기간 내내 그 형태 그 모습이 남아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애국병사 봉기 후 백운산 빨치산의 거점과 부대 이동을 한눈으로 감시하기 위해서 벌목했던 해방공간시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잣나무터(전남부대 터)는 1953년 8·15 경축행사를 하던 중 그날 밤 적들이 들어와 포위하고 날 새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우리의 새벽정찰이 적들을 발견해 부대가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했던 일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적들과 대치하며 아군의 사상자까지 내면서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능선을 넘으면 소령터가 있다. 1951년 적의 군용차를 습격하여 소령을 생포했다가

다시 내려 보냈던 곳을 소령터라 명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또한 전남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가 적의 매복에 희생돼 박영발 동지의 애정어린 동기애의 눈물을 자아냈던 아픈 사연도 있다.

 

그 외에 많은 역사적 사연들이 있으나 한정된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하봉에서 800고지로 가는 삼각고지는 1952년 1월 중순 도당 정공부대가 토벌작전에 동원된

 

육군 수도사단이 막 삼각고지에 짐을 푸는 순간 대낮 기습전을 감행해 많은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노획했던 고지이다.

 

이때 노획한 M1 탄 1만여 발을 한재골 바위 밑에 비장했으나 비장한 동지가 모두 희생돼 지금껏 찾을 길 없다.

 

아마도 무언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영원히 빛을 발하지 못하는 흙진주가 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서골에는 환자터가 있었다.

 

이곳 환자터는 공세 때 부실하기 짝이 없는 흙땅굴 비트에 들어가 있었다. 1953년 늦가을적들의 대대적 수색작전에 모조리 발견돼 끝까지 저항하는 환자 동지들은 사살하고 나머지는 생포해 갔던 피의 투쟁이 서린 골짜기이다.

 

이때 모자가 입산해 어머니는 저항하다 사살되고 아들은 생포되는 비극도 있었다.

 

아들은 지금도 살아 있을 텐데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800고지는 1953년 초가을 미 전투기 5대가 한 편대를 지어 타원을 그리며 맹폭격과 기관총을 난사하고 소이탄을 터뜨려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 고지에서 살아나온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다.

 

10. 용기동골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

 

1951년 야산지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 백여명이 용개산에 들어갔을 때는 적들의 일차 공세 중이었다.

그래서 백운산 내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차 공세가 끝나면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독자적으로 연락원 2명의 인솔 하에 공세를 막고 있었다보급로가 차단돼 몇칠을 굶으면서 비무장 동지들은 매일 계속되는 포위 공격 수색작전에 걸려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죽어 갔다이 와중에 공세 전 방앗간 터에 쌓인 멧재를 눈과 얼음을 깨고 손으로 한줌씩 불어서 싸래기 한 주먹을 알루미늄 솥에 넣어 물을 붓고 끓여서 한 모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공세를 극복해야 하는 처절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투쟁의식이 약화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니 날이 새도 산상 잠복 나가지 않고 그대로 터에 남아 있다가

 

토벌대들의 총탄에 맞아 소각당해 검게 타버린 앙상한 시신을 수없이 보게 되었다.

 

그 역경 속에서도 투쟁의 의지를 불살랐던 동지들은 살아남았고 완전히 자포자기한 동지들은 수없이 죽어갔던 피어린 역사의 현장용기동골을 잊을 수 없다.

 

필자 역시 살아남은 유일한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그때의 현실을 회상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하산길에 들어섰다.

 

11. 88능선과 88터 답사

 

일행은 내려올 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88 보초선 능선에 도달했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빠꾸바위가 있다빠꾸 바위라는 이름은 동기 공세 때 도당 지도부 산하 각 기관 단체성원 약 백여명이 88터에서 중허리를 돌아 큰 바위 밑에 왔으나 토벌대의 공격으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후퇴하게 된 데서 붙여진 것이다.

 

부대 이동 때 이 빠꾸바위 밑은 이따금 하루쯤 묵다가 이동하는 이른바 정거장거점으로도 이용됐다. 88 능선에 도달한 일행은 새삼 88 보초선 위치가 그 얼마나 전략적인 위치인가를 실감하게 됐다여기서는 백운산 내각 원능선을 한눈으로 살펴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적들의 진격에 따라 사면팔방으로 후퇴할 수 있는 요충 지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실 위령비를 세우려고 다 준비했다가 비문의 사전 발각으로 일단 계획 실천을 접게 된 일도 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오던 일행은 중간쯤에서 도당위원장 바위밑 터와 구들장도 발견하게 됐다.

그때 바위 밑에서 불을 지폈던 검은 그을음이 반세기가 지났어도 아직 남아 있었다.

 

88이란 도당 암호이다.

 

이 골짝에는 위원장 터를 비롯해서 도당 각 부서와 인민위원회 터들이 있었다동기 공세 전에 구들장을 만들고 잣나무로 귀틀집을 사각형직사각형으로 짜서 틈새를 진흙으로 발라 바깥 공기를 차단시키고 지붕은 서까래를 얹어 흙을 바르고 쐐를 둘렀다.

 

공세 때 토벌대가 수차에 걸쳐 불을 질렀으나 지붕은 타고 통나무는 타지 않고 그을린 채로

1954년 봄까지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귀틀집은 흔적조차 없고 나무와 숲만 우거져 있었다.

 

 

88터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1952년 1월 27일 정공대장이 88 보초능선에서 전투하다 다리 관통상을 입었다그래서 도당 위원장 비서 정태 동지주치의 행년 동지그리고 필자와 같이 조동만 대장을 보위하고

 

임시 땅 밑 환자터에 들어가다가 발각돼 적들을 물리치고 3명은 살아났으나 동만 대장은 희생되고 마는 아픔을 겪은 곳이다.

 

시신은 살얼음판 속에 낙엽으로 묻어주고 공세 끝나고 해동되면 다시 매장하려 했으나

 

이후 그곳을 가지 못했다.

 

그 후 반세기 후 찾았으나 흔적조차 없었다(지금도 위치는 알고 있지만).

당시 정공부대는 8명으로 출발해서 공세 때 잘 싸워 100여 명의 무장대오로 발전했다.

이 정공대는 도당 산하 기관 동지들을 보위하고 보급을 해결하는 강력한 무장부대였다(부대원은 모두 도당 학생들군관학생민청학원생들이었다).

 

이렇게 무적을 자랑하던 부대였으나 대장이 부상으로 비트에 들어감에 따라 부부대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적의 집중 공세를 예견하고 밤에 외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음에도 이를 어기고 날이 새자 88 능선 너머 백암골에 분산 잠복시킴으로써 1월 27일 하루 사이에 종막을 고하는 아픔도 겪었던 곳이다.

 

지도자나 지휘관의 역할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원칙을 저버리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와 같은 생각을 되새겨 보면서 집결지에 시간 맞춰 도착해서 먼저 하산한 동지들과 합류했다.

우리 일행은 양지 바른 잔디에 앉아 마무리 인사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후 상경 길에 오르게 됐다.

 

우리 몇 사람은 따로 남아 다른 곳 기행답사도 진행했다.

 

12. 결어

 

이번 백운산 역사기행은 원래 9·28 후퇴 후 도당부와 빨치산 총 사령부 산하 부대들이 활동하며 싸웠던 백아산을 돌아가기로 했었지만

 

시간 관계상 부득이 취소하고 섬진강변을 돌아가게 되었다또한 상경길에 노장들이라 피로했겠지만 역사기행의 소감들을 각자 한마디씩 남기는 시간을 갖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다그러나 오랜만에 찾는 기행에서 노장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사고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도 잊을 수 없다.

 

또한 기행을 통해 과거 빨치산들의 어려운 역경을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현장 답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신적 육체적 단련을 했음은 물론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모든 일정을 마침으로써 단결되고 단합된 강철의 대오를 실천으로써 증명했다.

 

우리는 이번 기행이 이 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할 문을 활짝 열어 준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 관철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남은 생을 값있게 바쳐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맹세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오늘의 현실을 단순히 조국분단에서 오는 비극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분단의 원인제공자가 누구이며 왜 확고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는가 하는 냉철한 반성과 함께

누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리고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그 처절한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간섭을 배제하지 않는 한 비극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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