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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걸린 묵직한 역사의 공소장, '반헌법행위자열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현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저서에 [함석헌 평전], [고문과 학살의 현대사], [해외입양 그 이후],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퀘이커교도. 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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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제헌절 시작, 치열한 작업 첫 결실 4권

540회 회의 3000→450→312명, 1차로 81명

행위 당시의 헌법 기준으로…이의신청 기회도

대통령 5, 대법원장 3, 판사 24, 검사 49명 수록

36명은 생존, 역사의 법정에 "지연된 정의 없다"

헌법 개정 무산,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돌아온다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실린 반헌법행위자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1~4권을 받았다. 책을 펼치기 전에 잠시 표지를 들여다 본다. 수십 개의 얼굴이 펜화로 새겨져 있다. 이승만(1875~1965), 박정희(1917~1979), 전두환(1931~2021), 노태우(1932~2021), 최규하(1919~2006). 민복기(1913~2007), 양승태(1948~ ), 김기춘(1939~ ).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념관이 아니라 역사의 피고석에 앉아 있다.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이 사람들 이름은 이미 다 아는데, 새삼스럽게?"

맞다. 우리는 안다. 그런데 알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두환은 "29만 원밖에 없다"면서도 골프를 쳤고, 양승태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며, 김기춘은 야구장 귀빈석에서 한국시리즈를 관람했다. 우리가 '안다'는 것과 역사가 '기록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 책은 그 차이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졌다.

10년, 540회 회의, 그리고 81명의 이름

이 책의 시작은 2015년 제헌절인 7월 17일이다. 한홍구·임경석·박노자 등 역사학자와 시민 33명이 모여 손을 잡았다. 상임공동대표 이만열, 책임편집인 한홍구가 이끈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10여 년 동안 540여차 회의를 거쳤다. 계산해보면 거의 일주일에 한 번꼴이다. 그 회의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했는가. 싸웠다. 이 사람을 넣느냐 마느냐, 이 행위가 반헌법인가 아닌가, 이 표현이 지나치지 않은가. 3000명에서 450명으로, 다시 312명으로 추려냈다. 그 첫 번째 결실이 1~4권에 담긴 81명이다.

원칙은 단 하나였다.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헌법 위반 여부. 그리고 지금의 헌법이 아니라 행위 당시의 헌법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 구조다. 그 시대에도 헌법은 존재했으니까. 이 원칙 하나가 이 책을 정치적 공격 문건이 아닌 역사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편찬위는 수록 대상자나 유족에게 이의신청 기회까지 줬다. 단 한 명도 억울하게 수록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극히 공정한 태도다.

 

반헌법형위자열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1권: 대통령들, '제사상의 대추·밤'을 올려놓은 사람들

1권은 대통령 5명을 다룬다.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헌법을 사랑했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독특했다. 이승만(1875~1965)은 헌법을 두 번 갈아엎으며 "내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고 했고, 박정희(1917~1979)는 스스로 헌법을 정지시키며 유신을 "가장 좋은 제도"라 불렀다. 전두환(1931~2021)은 계엄을 확대해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하고도 훗날 "기억이 없다"고 했다. 최규하(1919~2006)는 모든 반헌법 행위 앞에서 서명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그의 반헌법 행위였다. 노태우(1932~2021)는 "나는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이 돼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쌓았다. 참으로 보통이 아닌 보통사람이었다.

민복기(1913~2007)가 퇴임 후 스스로 털어놓은 말이 1권 어딘가에서 메아리친다. 박정희가 사법부를 "제사상의 대추·밤처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올려놓는 것으로 여겼다고. 10년간 대추·밤 노릇을 한 민복기의 솔직함에 박수를 쳐야 할지, 아니면 그 솔직함에 담긴 뻔뻔함에 혀를 차야 할지 모르겠다.

2권: 법원, 사법부가 스스로를 팔았다

2권은 대법원장 3인과 정치판사 27명을 다룬다. 민복기, 유태흥(1919~2005), 양승태. 이 세 사람은 각각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1952~ ) 정권의 사법부 수장이었다. 한국 현대사 3대 독재 및 권위주의 정권의 사법부 수장 세 명이 나란히 올라오는 셈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치고는 너무 촘촘하다.

양승태는 상고법원이라는 조직의 이기적인 목표를 위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재판 결과와 노동조합의 운명을 정권과 거래했다. 법원행정처 하드디스크에서 발견된 문건에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의 기대효과로 보수세력을 확실한 우군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내용이 버젓이 담겨 있었다.

최고 사법기관이 스스로 정치 브로커임을 고백한 문건이었다. 항소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상고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전직 대법원장이 법원에 상고하는 장면, 그 아이러니를 뭐라 불러야 할까.

2권에 수록된 27명의 정치판사들이 내린 판결들은 훗날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혔다. 그러나 그 판결들 사이에서 수십 년을 살아낸 사람들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재심 무죄와 억울한 세월을 맞바꾸는 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3·4권: 검찰, '법비(法匪) 49인전'

3권과 4권은 정치검사 49명을 다룬다. 김기춘(1939~ ), 고영주(1949~ ), 최병국(1942~ ), 안강민(1941~ ) 등. 이들의 공통직업은 검사이고, 공통특기는 법의 언어로 국가폭력을 포장하는 것이었다. 고문을 직접 가하진 않았지만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공소장으로 번역했다. 간첩을 직접 만들지 않았지만 조작된 간첩을 법정에 세웠다.

이 가운데 최병국은 부림사건 피의자가 "전두환 정권은 군사파쇼다"라고 말하자 "나는 파쇼가 좋은데"라고 대꾸한 인물이다. 이 솔직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고영주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공언했고 법원은 이를 "공적 인물에 대한 의견 표명"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법원에서도 인정한 공산주의자 감별사"라 불렀다. 유머 감각만큼은 발군이다. 다만 그 유머의 피해자들은 웃지 않고 있을 뿐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49명 중 상당수가 민주화 이후에도 의원직을 얻고 법사위원장이 되고 스타 검사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독재에 부역한 법비들이 민주화의 과실을 함께 나눠 먹은 것이다. 3·4권이 독자에게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과거의 반헌법 행위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민주화의 열매를 누렸다면, 과연 민주화는 완성된 것인가.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실린 반헌법행위자들

친일인명사전의 약점을 넘어서다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2009년 『친일인명사전』이 가졌던 약점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친일인명사전』이 나왔을 때 수록자 대부분은 이미 고인이었다. 역사적 단죄의 의미는 있었지만 살아있는 자를 향한 경고로서의 힘은 약했다. 편찬위는 이 지점을 겨냥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1~4권에 수록된 81명 중 36명은 현재 생존해 있다. 이 책이 서점에 깔리는 순간부터, 그들은 역사의 피고석에 살아서 앉게 된 것이다. 이것이 열전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다.

또한 '사전'이 아닌 '열전(列傳)'의 형식을 택했다. 사전은 압축한다. 열전은 펼친다. 반헌법 행위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 어떤 권력을 만나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생애사의 흐름 속에서 추적한다. 민복기의 아버지 민병석(1858~1940)이 경술8적이었다는 사실, 박정희(1917~1979)가 만주군관학교에 혈서를 써서 지원했다는 사실이 그냥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로 살아 숨 쉬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이 책을 읽으며 한 가지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2026년 5월, 민주당이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치려던 헌법 개정안이 국민의힘의 표결 불참과 필리버스터 위협에 끝내 무산됐다. 계엄 선포 때 국회 승인을 의무화하고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자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이 막힌 날, 나는 이 책의 총론을 다시 펼쳤다. 반인도적 범죄에 공소시효를 없애고 소급처벌의 길을 열자는 편찬위의 주장이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계엄군이 국회로 향하던 그 밤, 이 책에 수록된 81명의 행적이 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어젯밤의 뉴스처럼 겹쳐 보였다. 박정희가 만든 유신의 문법, 전두환이 쓴 계엄의 언어, 김기춘이 설계한 공안통치의 구조. 그것들이 다른 옷을 입고 2024년 12월 3일 밤에 귀환했다.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드시 돌아온다. 이것이 이 책이 지금 이 시점에 출간된 이유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 법정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방청석은 우리의 자리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닻이다.

참고자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권,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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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화장실도 아니고···언론에는 대체 왜 ‘재래식’ 딱지가 붙었을까

  • 분류
    아하~
  • 등록일
    2026/05/24 10:41
  • 수정일
    2026/05/24 10:41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수정 2026.05.24 10:02

레거시 미디어 기자 16인이 말하는 ‘언론의 현실’

“깊이 있고 좋은 기사 쓸 수 있는 환경 부족”

범람하는 가짜뉴스 속 ‘사실 보도’ 여전히 필요

권력에 독립된 수익 구조 등 대책 마련돼야

레거시 미디어(기성 언론) 신문이 쌓여 있다. 이준헌 기자

그야말로 레거시 미디어(기성 언론)의 수난 시대다. 사람들은 종이신문·방송과 같이 전통적인 언론 매체가 제공하는 뉴스를 점차 찾지 않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은 레거시 미디어를 ‘재래식 언론’으로 규정하고 비판과 비난을 쏟아낸다. 이재명 대통령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신 또는 정부 정책과 관련한 기사 링크를 올리면서 직접 저격도 했다. 인공지능(AI) 활용이 확산하면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가짜뉴스는 늘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는 사회악, 뉴 미디어는 희망’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정작 시민에게 필요한 뉴스는 무엇인지, 좋은 뉴스를 생산하기 위한 구조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2025년 9월 주간경향은 ‘공장장 가라사대-팬덤 권력’ 보도를 통해 유튜브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논쟁을 다뤘다. 시민들이 왜 레거시 미디어가 아닌 김어준 방송을 듣는지, 김어준 방송이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했다. 이번엔 레거시 미디어의 현실이 정말 어떤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살펴봤다. 레거시 미디어에 종사하는 기자 16명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취재에 응한 기자들은 각자가 속한 언론사의 성향, 분위기에 따라 경험과 시각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현재 레거시 미디어에 비판받을 점이 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했다. 기사의 조회수를 중요시하는 언론사 시스템, 경제·정치권력의 직·간접적 압박이 기자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활동을 위축시킨다는 점도 공감했다. 이런 상황이 불거진 것에 대해 독자와 시청자 탓을 한 기자는 없었다. 오히려 언론이 스스로 관성을 깨부수고 전면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짜뉴스의 홍수 속에서 ‘진짜뉴스’를 만드는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은 더욱 필요하고, 그게 바로 레거시 미디어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6월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카페에서 기자들과 약식 간담회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조회수의 노예가 된 언론

기자들은 보람을 느낀 취재와 보도로 세월호·이태원 등의 사회적 참사, 취약계층의 복지·환경문제, 권력자의 비리 등을 꼽았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고, 소외된 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깊이 있게 분석한 기사를 좋은 보도라고 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선 좋은 보도를 하기에 쉽지 않다고 했다. 조회수가 잘 나오는 기사를 빨리, 많이 써야 하는 게 언론이 처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쓰고 싶지 않은 기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자들은 ‘정치 기사’를 언급했다. 이를테면 매일 아침 각 정당의 최고위원회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는 ‘따옴표 기사’다. 일단 받아쓰는 방식이라 회의가 끝나면 거의 똑같은 내용의 기사가 모든 언론에서 보도된다. A씨는 “그 안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도 있고 (일방적인) 주장도 있다”며 “그걸 그대로 옮겨쓰는 것에 대해 부채감과 죄책감이 들지만 (회사에서) 빨리 써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고, 다들 쓰니까 우리만 안 쓰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A씨는 또 “당대표와 원내대표 발언을 사람들이 그나마 보니까, 팔리니까 쓴다. 정치 기사는 ‘제목 장사’가 된다”고 했다. B씨도 “정치인 등 유명인들의 페이스북 글을 5분 만에 복사해서 붙여넣기로 내보내면 조회수가 금방 나온다”며 “가십성 기사를 중시하는 유통·소비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기자로서 써야 한다고 느꼈던 사안에 대해선 정작 못 쓰는 경우가 생겨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다.

기자들에게 조회수가 가장 많이 나온 기사 목록을 공유하거나, 상반기에 기획기사를 최소 몇편은 써야 한다는 식의 ‘숫자 압박’도 이뤄진다. 양적 확보에만 골몰하는 언론 분위기 속에서 남들과 다른 기사를 고민하고 차별화된 기사를 생산해낼 여유는 부족하다. C씨는 “좋은 기사에는 필연적으로 기자의 치열한 고민과 정성이 담겨야 하는데 지금의 언론 생태계는 기자가 기사에 온전한 정성을 쏟기 어렵게 만든다”며 “현장 기자들 스스로 ‘조회수의 노예’라고 자조하는 현실이 씁쓸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런 현실에 대해 D씨는 “바쁜 척하고 뭔가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아무런 가치나 성과도 창출하지 못하는 가짜 노동”이라며 “100개 매체에서 똑같은 기사 100개가 나오는데 그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했다.

지난해 8월 5일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이 있는 서울 KT광화문빌딩 West 앞에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회수 기사’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언론사의 수익구조 때문이다. 한국은 언론사가 생산하는 뉴스를 포털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보는 체계다. 신문 구독률과 방송 시청률이 하락하면서 언론사 입장에선 온라인 기사 조회수를 통한 수익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요즘 언론사들은 조회수 기사를 쓰거나 유튜브용 토막영상만 생산하는 전담팀을 운영하기도 한다.

E씨는 “네이버가 언론사별로 조회수를 매겨서 그걸 토대로 전재료를 책정하는데 전재료 금액이 조회수에 따라 달에 1억원이 차이나기도 한다”며 “(조회수 기사는 언론사 수익에) 엄청난 영향이고, 누군가가 좋은 기사를 쓰려면 누군가는 더러운 일을 책임져야 하는 게 암울하지만 현실”이라고 했다. C씨도 “속보와 가십 중심의 기형적인 기사 생산 구조에는 포털사이트, 특히 네이버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며 “네이버 메인 화면에 노출돼야만 조회수를 담보할 수 있다 보니 매체들이 내용의 질을 따지기보다 무분별한 기사 양산에 혈안이 돼 있다”고 했다.

네이버 관계자는 “2020년 전재료를 폐지하고 광고 수익을 제공하는 모델을 도입했다”며 “조회수만이 아닌 순방문자수, 누적·순증 구독자수 등 다양한 팩터가 있다. 과도한 속보, 가십성 기사는 수익에 불리한 구조로 설계돼있다”고 밝혔다.

언론도 네 편 내 편 가르는 정치

비판과 감시를 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딜레마’도 존재한다. 언론이 광고 수익에 크게 의존하다 보니 광고주의 힘이 기사에까지 미치는 경우가 발생한다. 기업이 자신들에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 직접 개입하기도 하지만, 광고주라는 관계를 이용해 간접적으로도 영향력을 끼치기도 한다. 당장 지난해 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아들의 음주운전 사고를 보도한 기사들이 돌연 삭제되거나 수정되면서 언론계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현대차 측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매체도 있었지만, 상당수 매체는 수용해 실제 조치까지 이뤄졌다.

F씨는 “기업의 돈, 자본권력이 언론에 미치는 영향력은 압도적”이라며 “몇년 전부터 굳어진 흐름이다. 경제 이슈나 기업 매출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사가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으니 바람이 불기 전에 풀이 먼저 눕는 식”이라고 했다. G씨는 “광고에서 자유로운 언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며 “광고비가 이미 집행됐고 나 하나로 인해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 수 없어 (쓰기 싫은 기사도) 썼다”고 했다. 광고 표시 없이 광고 기사를 쓰거나 특집기사를 만들어 광고 단가를 올리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E씨는 “대기업 관련 기사를 쓰면 항의전화가 온다. 항의로 안 되면 읍소한다. 회사에서는 관계를 위해서 기사를 수정하거나 삭제하자고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C씨는 소위 ‘유가 기사(돈을 내고 쓰는 기사)’도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C씨는 “의뢰 업체의 입맛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노골적으로 담아내야 할 때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이러려고 기자가 됐나’ 하는 씁쓸한 자괴감과 마주해야 했다”고 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기관도 언론의 중요한 광고주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가 지난해 10월 20일 국회에서 열린 언론개혁특별위원회 허위조작정보 근절안 발표 기자회견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한수빈 기자

유튜브 시대가 열리면서 강화된 ‘팬덤 정치’는 기자들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됐다. 입맛에 맞는 유튜브 채널에 언제든 출연해 발언할 수 있는 정치인들은 이제 레거시 미디어의 감시와 비판을 무서워하지 않게 됐다. 현장에선 비판 기사를 썼을 때 정치인들이 수용하기보다는 항의를 하고, 취재를 거부하는 일이 발생한다. 민주당 측으로부터 기사에 대해 항의를 받은 적이 있는 E씨는 “취재를 하면서 정치인들의 논리가 허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해도 정치인들은 자기에 대한 비판을 왜곡으로 받아들이고, 기자들에게 정파적이 되기를 원한다”며 “5 대 5로 쓴 것도 항의한다. 결국은 자기 입장대로 쓰라는 것”이라고 했다. H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H씨는 “민주당의 모 의원 관련 기사를 썼는데 의원이 기사를 내리라고 했다. 기사를 안 내리면 재래식 언론이 되는 것인데 이게 뭔가 싶었다. 재래식 언론이 악당이 돼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I씨는 2019년 있었던 이른바 ‘조국 사태’가 기자들에게 ‘너는 우리 편이야, 아니야’를 묻게 된 기점이었다고 짚었다. I씨는 “그 이후 강도가 점점 심해지면서 ‘우리 편이 아니면 쓰레기’라고 한다. 거기에서 진이 빠지는 게 크다”고 했다. I씨는 “냉정하게 봤을 때 진보진영의 인물이 수사대상이 되면 검찰발 보도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이 커진다. 반면 보수진영의 인물이 수사대상일 때 비판이 그만큼 커지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J씨도 조국 사태 이후 심화한 ‘팬덤 정치’를 기자로서의 역할 수행을 가장 크게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았다. J씨는 “우리 진영에 해로우면 기사나 기자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이걸 정치인들이 부추긴다”며 “기자에게 좌표를 찍고 몰려와서 비판하는데, 진보·보수 양쪽이 모두 그렇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12·3 불법 계엄 이후 ‘서울서부지법 사태’ 때는 가담자들이 윤석열 전 대통령 구속에 반발하며 취재진을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언론의 과도한 정파성, 부실한 취재 등이 초래한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D씨는 “진영이 갈린 대로 판단하는 세계”라며 “누가 요즘 신문을 보면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하느냐”고 했다. I씨도 “(매체의) 성향을 떠나서 적어도 잣대는 똑같아야 한다. 진보 매체는 민주당에, 보수 매체는 국민의힘이 얽힌 문제에 있어서 지향성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각자의 진영을 수호하기 위해 본인의 잘못은 작게 만들고 상대방 잘못은 키우는 건 문제”라고 했다. C씨는 “무조건 억울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조회수에 쫓겨 사실 확인이라는 기본을 놓치는 등 스스로 신뢰를 깎아먹은 측면이 분명히 있다”고 했다.

유튜브를 보는 사람들을 표현한 이미지. 로이터연합뉴스

재미없어도 역사는 기록돼야 한다

언론의 미래에 대해 대부분의 기자는 부정적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결론은 “쇠락할지언정 사라지진 않는다”(I씨)는 말로 요약된다. 정보 수집과 가치 판단에 대한 전문성, 공정성과 객관성이라는 직업윤리의 준수, 기자를 육성하고 훈련시키는 시스템을 보유한 언론사는 여전히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튜브와 AI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의 필요성이 더 크다는 시각이 많았다. 다만 그 전제는 “세계관이 달라질 정도”(I씨)의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엄격한 팩트체크와 외압·정파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신뢰’를 줄 때 레거시 미디어는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K씨는 “유튜브는 온갖 설과 가감 없는 말이 나와 재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레거시 미디어는 한쪽 편만 들 수 없고 중립을 취해야 하며, 잘못했다간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되고 소송을 당한다”며 “재미가 없어도 역사는 기록돼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K씨는 “시스템, 체계, 훈련 등을 거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기관으로서의 레거시 미디어는 사라져선 안 된다”며 “독자와 시청자가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구미에 맞춰주지 않고 사실관계를 지키려 한다는 면에서 레거시 미디어가 비교적 더 건강하다”고 했다. C씨도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은 아직 남았다. 최소한의 검증 시스템과 책임의 무게 때문”이라며 “당장 조회수가 나오지 않는 이슈라도 반드시 기록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펜을 든다. 레거시 미디어가 없을 때 가장 끔찍한 문제는 자극적이지 않은, 소외된 약자들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어주지 않는 사회가 될 것 같다는 점”이라고 했다.

깊이 있는 취재가 보상으로 돌아오고, 경제·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된 체제를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F씨는 언론개혁의 핵심은 언론사가 광고 외에 자체적인 수익모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 있다고 했다. F씨는 “자본권력이든 정치권력이든 외압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는 토대, 즉 자체 수익 모델이 필요하다. 그것이 전제돼야 바람직한 역할에 대한 다른 논의도 가능하다”고 했다. I씨는 “퀄리티(질적인) 저널리즘으로 가려면 개인의 ‘노오력’만으로는 안 되고 경제적인 것을 포함한 물적 토대가 마련돼야 한다”며 “저널리즘이 수익이 최고 목표가 되면 안 되겠지만 최소한 공공성을 추구하는 언론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했다.

물론 열악한 언론환경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자들이 있다. G씨는 “(기사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조회수와 무관하게 공력을 엄청 투입한다. 기사로서 반드시 써야 한다고 확신이 들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냥 열심히 한다. 그러려고 기자가 됐다”고 했다. 12·3 불법 계엄 이후 중국 혐오 관련 괴담에 대해 팩트체크하는 기사를 쓴 L씨는 “이때 유튜버와 내가 차이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짜뉴스를 바로잡고 검증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게 레거시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했다. 부당한 지시를 하는 데스크와 싸우고,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살리는 기사를 쓰려고 헌신하는 기자도 많이 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했다간 정말 레거시 미디어가 유튜브에 잡아먹히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좋은 보도를 위한 레거시 미디어를 만드는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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눔 일본 소년 H와 한국 BTS

 

황대권 문명전환

bau1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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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은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연장인가?

일본 소년 H⋯일본사회 엄습한 미국문화 상징

패전 뒤 미국 그늘에서 복구하고 번성한 일본

한국 BTS⋯글로벌 한국 위상 상징하는 일반명사

‘강남 스타일’ 이후 세계 팝시장 판도 바꾼 K-Pop

아날로그 방식 발전으로 최대치를 보여준 일본

디지털 시대 쇠퇴하는 미국 팝 대안이 된 한국 팝

K-Pop에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없다

5월 6일 멕시코시티의 팔라시오 나시오날에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을 만난 한국의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 2026.5.6. AFP 연합뉴스

지난 20년 간 일본 영화계는 세계적인 감독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그 이전에는 세계 영화계를 호령할 정도로 좋은 감독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이 있다. 그는 <철도원>, <호타루> 등으로 한국 관객에게도 꽤 친숙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 중에 태평양 전쟁 시기를 견뎌낸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소년 H>라는 영화가 있다.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영화는 보기에 편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편안한 흐름의 영화 끝에는 무언가 가슴 깊이 남는 게 있다. 전작인 <철도원>의 대성공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으나 한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에 휘말린 한 가족의 수난사 정도로 이해하고 지나간 듯하다. 그런 점에서는 만주 관동군에 강제 징집되어 쓸쓸히 죽어간 한 일본인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인간의 조건>과 같은 계열의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전쟁의 참상이나 가족의 수난이 아니라 감독이 왜 영화 제목을 <소년 H>로 붙였는지에 대해 좀 얘기해 볼까 한다.

일본 소년 H⋯일본사회 엄습한 미국문화 상징

H는 소년의 이름 ’하지메‘의 영문 이니셜이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소년의 어머니가 H자가 크게 박힌 붉은색 스웨터를 만들어 소년에게 입혀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컷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엄마가 직접 만든 옷을 입힌다는 것은 소년이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음을 의미한다. 스웨터의 붉은색은 저항, 또는 도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소년의 성격을 암시한다.

영문 이니셜 H는 향후 일본 사회를 엄습할 미국 문화를 상징한다. 소년은 늘 이 옷을 입고 다니면서 영문 H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 태평양 전쟁이 본격화되자 일본 정부는 일본 사회에 만연한 모든 미국적 요소를 지우려 애쓰는데 소년의 H도 화제가 된다. 아이들이 미국 문화의 잔재라고 말하자 소년은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에서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를 하는데 이것도 H자로 시작한다고 맞선다. 둘러대는 장면이기는 하나 어찌 되었든 H는 서구 문화를 상징하는 문자로 읽힌다. 소년은 일본 사회의 낙후된(?) 모습을 비판하면서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은근히 미국 또는 미국 문화를 동경한다. 가령, 뉴욕의 마천루 사진을 보고 일본이 자기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영화 '소년 H' 포스터

소년의 아버지는 양복쟁이로 주로 지역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옷을 만들어 줌으로써 생계를 꾸린다. 그를 찾는 서양인 고객들은 아주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는 전쟁의 엄중한 시기에 나치를 피해 일본까지 온 유대인 난민들의 옷을 수선해주기도 한다. 이로 인해 한때 서양인과 내통하는 간첩으로 몰려 고초를 받기도 한다. 그는 대단히 균형 잡힌 합리주의자로 매사에 신중하면서도 꽤 포용적이다. 예컨대 부인이 기독교 신의 절대성과 배타성을 얘기하자 다른 종교의 신도 존중해야 한다고 항변한다. 전통사회와 군국주의의 야만성을 잘 아는 그는 마음 한켠으로 공산주의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기도 하나 확신은 없다. 소년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기독교 신자로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박애주의적 실천으로 소년에게 무언의 교훈을 준다. 미국 문화에 매우 우호적인 이런 집안 구조는 종전 후 소년의 행로와 일본 사회의 건설 방향을 가늠케 해준다.

패전 뒤 미국 그늘에서 복구하고 번성한 일본

전쟁이 끝난 혼돈의 한 가운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중을 선동하는 집회에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흥미롭다. 아버지는 대안이 없는 현실 속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갔으나 소년의 태도는 단호하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왜 이런 허접한 집회에 나오냐고 꾸짖으며 저기 모인 사람들은 전쟁 때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인데 하루아침에 태도를 바꿔 공산주의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저들은 바닷속의 해초처럼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라고 한다. 15살 된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똑똑해진 것이다. 결국 그 길로 아들은 독립하기로 결심하고, 아버지는 다 잊고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재봉틀을 잡는다.

이후의 일본 사회의 발전 과정은 이 가족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 문화가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버지의 장인 정신과 합리주의, 어머니의 기독교적 박애주의와 가족주의, 그리고 소년의 도전 정신과 서구 지향성이 그것이다. 일본이 한창 잘 나갈 때에 붙여진 ‘경제 동물’이라는 칭호는 사실 에도 시대 이래로 일본 사회를 관통하는 장사꾼 기질이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 활짝 꽃 피운 것이라 볼 수 있다. 영문 H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일본은 미국의 그늘에서 전후 복구를 아주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해냄으로써 급기야 전쟁 당시 적이었던 미국의 코 밑까지 따라붙는다. 그러나 2인자의 부상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미국의 견제로 인해 일본은 이후 30년이 넘는 불황의 시기를 거치지만, 일본의 경제력과 국제적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지난 5월 6일 멕시코시티의 대통령궁(Palacio Nacional) 앞에 모여든 한국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팬들. 방탄소년단은 5월 7일, 9일, 10일 멕시코시티의 에스타디오 GNP 세구로스(Estadio GNP Seguros)에서 전석 매진된 3회의 콘서트를 열었다. 2026.5.6. AFP 연합뉴스

한국 BTS⋯글로벌 한국 위상 상징하는 일반명사

한편 한국의 팝그룹 ‘방탄소년단’의 영문 이니셜 BTS는 오늘날 글로벌 한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일본 이름 ‘하지메’를 H로 부른 것이나 ‘방탄소년단’을 BTS로 부르는 데에는 똑같은 역사문화적 맥락이 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자국의 상품을 팔아먹으려면 어쩔 수 없이 세계인이 가장 많이 아는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 당연히 영어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단순히 상품을 팔기 위해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사상이 외래화되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을 영역하면 Bulletproof Boys Group이다. 그룹의 이름을 BBG로 하지 않고 한글 발음을 영어화해서 BTS라고 한 것은 한국 음악의 세계화를 염두에 둔 작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전후에 태어난 한국인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서양 음악,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서양 클래식 음악과 미국 팝송을 들으면서 자랐다. 따라서 현대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서양 음악의 문법이 깊이 새겨져 있다. 미국 문화가 한국 사회를 장악하기 전에는 당연히 일본 엔카 계열의 ‘트로트’가 일반적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 대중음악의 2대 뿌리는 팝송과 트로트이다. 해방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한국 가요계의 주류는 트로트였다. 문화 전달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어도 그 관성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국가경제의 세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트로트는 사라지고 단연 팝송이 가요계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음악 역시 하나의 상품인지라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물류 시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초반부터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일본은 ‘피부색이 노란 백인’으로서 미친 듯이 팝송을 불러대며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간 J-Pop 전성기를 누린다. 한국은 이 무렵 세계 1위 국가인 미국과 세계 2위 국가 일본을 열심히 벤치마킹하며 꾸준히 실력을 쌓아간다. 그러다가 IMF라는 혹독한 시험을 통과한 뒤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국제적 영향력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강남 스타일’ 이후 세계 팝시장 판도 바꾼 K-Pop

2012년에 발표된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기폭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K-Pop은 세계 팝 시장의 판도를 좌지우지하는 메이저급 음악 장르가 되었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BTS이다. 얼마 전 멕시코 시티와 미국 베이 에리어에서 있었던 BTS의 월드 투어 공연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K-Pop의 위상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현상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이었던 일본의 J-Pop도 누려보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보다 몇 배나 큰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이 왜소하게 보일 지경이다.

 

지난 5월 6일,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의 국립궁전 발코니에서 한국 K팝 그룹 방탄소년단(BTS) 멤버들을 기다리는 팬들의 모습. BTS는 5월 7일, 9일, 10일 멕시코시티의 에스타디오 GNP 세구로스에서 매진된 3회의 공연을 펼쳤다. 2026.5.6. AFP 연합뉴스

아날로그 방식 발전으로 최대치를 보여준 일본

소년 H로 상징되는 일본의 전후 발전은 미국이 깔아놓은 세계자본주의 시장에서 일본식 장인 정신과 미국식 합리주의를 결합해 이룩한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일본의 경우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발전으로서는 최대치를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상징적 기계가 소니의 ‘워크맨 시리즈’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 번도 팝의 본고장 미국을 지배해 본 적도 넘어 본 적도 없다. 철저히 미국에 종속된 상태에서 2인자 자리까지 올라섰을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쇠퇴하는 미국 팝 대안이 된 한국 팝

한국은 달랐다. 한국의 문화 예술이 해외로 뻗어나가는 시점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였다. 그 시장 역시 미국이 깔아주었고 한국은 쇠퇴하는 미국의 영향력을 대신해 강력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디지털 문화의 전파력과 중독성은 아날로그 문화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신속정확함과 창의력, 그리고 미친 듯이 일하는 근면함이 디지털 문화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 것이다. 사실 지구상에 한국인만큼의 속도와 정확성, 성실성을 가지고 있는 민족은 별로 없다. 한류가 쉽게 꺾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팝이 아닌 다른 음악 장르를 들고 나왔으면 지금같은 영향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 우리로서는 팝 말고 들고 나갈 것이 없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장르를 가지고 거기에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자 미국 팝송에 지친 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결코 나쁜 선택이 아니었다. 세계 물류 시장을 꽉 잡고 있었지만 미국의 콘텐츠는 점점 매력을 잃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자기네가 깔아놓은 인프라에 아프리카나 다른 대륙의 전통문화를 싣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보라. 한국은 자기네가 키운 자식이고 장르 자체가 팝이다. 전격적으로 밀어주어 시장의 지배력이 유지된다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었다. 미국으로서는 팝이라는 장르와 시장의 지배력을 모두 지킬 수 있으니 K-Pop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자기네가 밀어준 K-Pop의 위력이 상상 초월이라는 데에 있다. 지금 K-Pop의 위력은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압도할 지경이다. 그 옛날 아메리칸 팝송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을 방불케 한다.

 

지난 5월 16, 17, 19일 세 차례 열린 BTS의 미국 스탠퍼드대 스타디움 공연 장면. 빅히트 뮤직

K-Pop,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연장인가?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해외로 진출한 K-Pop 가수들의 노래 대부분이 영어 가사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결국 미국 문화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 아닌가? 사실 이 질문을 두고 인터넷 상에서도 많은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가장 부정적인 견해는 서구 문화제국주의의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다. 장사꾼의 관점에서 대리고 뭐고 간에 영향력을 이용해 돈만 벌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처음에는 문화제국주의 측면에서 이 현상을 이해했었다. 그러나 K-Pop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대리인의 역할보다는 새로운 문화 창조와 세계 인민을 평화적으로 엮어주는 역할이 점점 도드라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어차피 문화라는 것이 외래의 것과 내부의 것이 뒤섞여 새로운 형태로 공진화하는 것이므로 단지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할 일은 아니다. 영어가 아니었으면 해외 진출 자체가 불가능했다. K-Pop 덕에 외국인들이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한국말 공부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K-Pop에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없다

또 하나, K-Pop에는 미국 팝송에서 보이는 제국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다. 비서구 사회에서 K-Pop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 지점에 있다. 하도 들어서 익숙하기는 한데 백인이 본토 발음으로 부르는 노래는 왠지 느끼하고 주눅 들게 만들지만, 한국 아이돌이 부르는 노래에서는 친근함이 묻어난다. 게다가 노래 속의 메시지도 정복자의 시선이 아니라 희망과 위로, 연대 의식을 느끼게 한다. 제국주의 침략을 겪은 백성들의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BTS 월드투어의 공식 이름이 <아리랑>인 점은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리랑은 힘들었던 시절 겪어야 했던 한과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노래이다. 세계 인민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위로의 노래는 없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이 짐승의 시기에 한과 고통에 주눅들지 말고 나를 짓밟는 원수를 증오하지도 않으면서 신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나를 변화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아리랑의 이런 역사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면 지금 진행되고 있는 BTS의 월드투어가 K-Pop을 새로운 단계로 올려놓을 것으로 본다. 수만 명의 멕시코 팬들이 악을 쓰면서 아리랑을 한국말로 불러제끼는 광경은 그야말로 소름 그 자체였다. 물론 팬들은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좋아하는 스타가 하는 것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획자의 의도는 팬들의 무의식 속에 알게 모르게 작동하게 되어 있다.

황대권 '야생초 편지' 작가

일본 영화 <소년 H>의 H는 미국이라는 지구적 인프라를 이용해 일본이 세계 일류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징한다면, 방탄소년단의 BTS는 한국을 일류 국가로 만드는 것을 넘어 세계 인민을 새로운 문화 창조의 공간으로 끌어내어 우리는 결국 ‘하나’라는 의식을 갖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단군 할아버지가 말한 ‘홍익인간’ 이념의 실현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은 패권주의에 찌들어 있는 대국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황대권 문명전환 bau1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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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만 '특별 석방'한 이스라엘, 우리가 마주해야 할 불편한 청구서

[원동욱의 외교광장] 가자 구호선단, 두 청년, 그리고 한국의 불편한 공모

원동욱 동아대학교 교수 | 기사입력 2026.05.23. 20:01:06

2026년 5월 21일, 청와대 브리핑은 이렇게 끝났다. "이스라엘 측이 우리 국민을 즉시 석방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이를 환영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전날 국무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이스라엘을 비판한 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언론은 대통령의 '초강수'가 통했다고 보도했고, 그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두 개의 질문이 빠져 있다. 왜 그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그 배에 올랐는가? 그리고 이스라엘은 왜 그토록 신속하게, 그것도 한국인만을 '특별 대우'해서 돌려보냈는가? 이 두 질문을 함께 붙들지 않으면, 우리는 결과만 소비하고 구조는 계속 방치하게 된다.

첫 번째 질문: 그들은 왜 배에 올랐는가?

39개 나라, 426명의 활동가들이 항해에 나섰다. 식량과 의약품을 실은 선박 50여 척이 지중해를 건너 가자로 향했다.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나포를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출항에 나섰다. 한국인 평화활동가 김아현(활동명 해초, 28세)과 김동현(34세)도 그 배들 위에 있었다.

해초는 출항 직전 이렇게 말했다. "가자지구가 고립됐고, 그 위험한 곳에 사람이 있다는 건 여전히 변함없는 사실이다. 몸으로 존재하며 저항하는 일이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김동현 군은 "이스라엘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긴급구호 인력과 언론인, 여성·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항해에 나설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들은 보도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나포된 한국인'은 외교 이슈가 되지만, '국제법 위반에 맞서 행동하는 시민'은 처리하기 불편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더 불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외교부는 해초가 다시 가자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그의 여권을 무효화했다. 자국민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 했다. 그러나 논리를 뒤집으면 다른 말이 된다. 국가가 여권을 빼앗아야 할 만큼, 이스라엘의 봉쇄는 폭력적이고 그곳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가는 시민의 양심 행동을 막았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이유로 그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들이 탑승한 선박의 이름은 '리나 알 나불시(Lina Al-Nabulsi)'. 이는 과거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사망한 17세 여학생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이름을 달고 항해한 한국인 청년의 이야기는 단순한 구조 작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진술'에 가깝다. 언론이 이 맥락을 삭제했을 때, 우리는 사건의 껍데기만 보게 된다.

일각에서는 "국가 망신", "무모한 돌출 행동"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정부가 여권까지 무효화하며 만류한 위험 지대로 걸어 들어간 행보가 행정적·사회적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항해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장 숭고한 정신과 닿아 있다. 대한민국 헌법전문은 우리 국민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엄숙히 선언하고 있다.

즉, 대한민국 국민에게 '평화'와 '자유'란 단순히 한반도라는 물리적 국경 내에서만 누리는 이기적 가치가 아니다. 인류공영과 항구적 세계평화에 기여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안전과 행복도 영원히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헌법의 확고한 철학이다.

가자지구의 고립과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인도적 현실 앞에서, 평화활동가 김아현(해초)과 김동현이 사선(死線)으로 향한 것은 바로 이 헌법적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한 '양심적 시민 불복종'이었다.

두 번째 질문: 이스라엘은 왜 한국인만 즉시 석방했는가?

나포 직후 벌어진 일은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극우 성향의 이타마르 벤그비르 이스라엘 국가안보장관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버젓히 영상을 공개했다. 아스돗 항구 구금시설에서 국제 활동가 약 430명이 양손이 묶인 채 대원들에게 끌려다니고 바닥에 엎드려 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었다. 벤그비르 장관이란 작자는 억류자들 앞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펄럭이며 "이스라엘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는 즉각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했다. 이탈리아 총리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이스라엘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완전히 경악했다"고 밝혔고, 프랑스 외무장관은 이스라엘 대사를 소환했다. UN 사무총장 대변인도 즉각 석방과 적절한 대우를 촉구했다.

이 국제적 압박 속에서 이스라엘 측은 한국인을 석방하면서 "이번 사안이 한·이스라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이것은 외교적 언어지만, 그 함의는 뚜렷하다. 이스라엘에게 한국은 잃고 싶지 않은 나라라는 것이다. 왜인가?

한국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귀한' 나라인지 숫자를 먼저 보자. UN 무역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2013~2022년) 동안 한국은 이스라엘에 약 4,700만 달러어치의 탄약·포탄 등 무기를 수출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로부터는 약 1억 5,300만 달러어치의 무기를 수입했다. 공개 집계만 이 정도다.

문제는 이 거래의 시기와 맥락이다.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가자 전쟁이 발발한 2023년 10월 7일 이후에도, 방위사업청은 이스라엘 방산업체 라파엘과 4건, 엘빗 시스템즈와 2건, 엘타 시스템즈와 1건의 계약을 완료했다. 대부분 수의계약으로 이루어졌다. 이 사실이 국회에서 언급되자 당시 외교부 장관은 "제가 아는 한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거짓말이거나 직무유기이거나, 어느 쪽이든 정상적인 외교 행정이 아니다.

기업 차원의 협력은 더 깊다. KAI(한국항공우주산업)는 2021년 이스라엘의 엘빗시스템스와 차세대 무인항공기 업무협약을 맺었다. 정찰·표적식별·감시 기술을 공동 개발하는 내용이다. 한화는 이스라엘의 3대 군수기업 IAI·엘빗·라파엘과 모두 거래하고 있다. 한화디펜스는 엘빗과 협력해 전차 AS-21 레드백을 개발했고, 이를 호주와 동유럽에 수출했다.

이 협력의 핵심을 이해하려면 이스라엘 무기 산업의 특수성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 방산업체들의 최대 강점은 '전장에서 검증된 기술'이다. 그 전장이 어디인가? 바로 점령된 팔레스타인이다. 이스라엘의 드론 기술, AI 표적 산출 시스템, 스마트 장벽 기술은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상대로 실전 테스트를 거쳐왔다. 한국은 그 '검증된' 결과물을 수입하고, 공동 개발하고, 제3국에 재수출했다. 팔레스타인은 이 구조에서 기술 실험의 끔찍한 무대였고, 그 실험 비용을 치른 것은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차원이 있다. 2024년 9월, 유엔 총회는 국제사법재판소(ICJ)의 결정을 근거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12개월 내 종식」 결의안을 투표에 부쳤다. 181개국 중 124개국이 찬성했다. 반대는 이스라엘·미국 등 14개국뿐이었다. 당시 윤석열 정부는 43개 기권국 중 하나였다. 불법 점령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데 한국은 침묵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한국은 포탄을 공급하고, 기술을 사가고, 국제 무대에서 편의적 침묵을 지켜주는 드문 나라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 이후 남은 과제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비인도적"이라 하고, ICC가 발부한 네타냐후 총리의 체포영장을 언급하며 "유럽은 자국 입국 시 체포하겠다고 밝혔다. 우리도 판단해 보자"고 한 것은 분명 이전과 다른 진일보한 태도였다. 이스라엘도 그 무게를 읽었을 것이다. 신속한 석방에는 그 압박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날, 청와대는 "이스라엘 측이 우리 국민을 즉시 석방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통령이 "비인도적"이라 비판하는데 동시에 청외대가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공존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행동 자체가 비인도적이었다면, 그 비인도적 행동을 거둔 것을 칭찬할 이유는 없다. 이 양면적 발언은 한국이 이스라엘을 향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의 실질적 한계를 정부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그 한계는 구조적이다. 단순히 청와대 참모들의 정무적 미숙함이 아니다. 이는 철저히 관료 사회의 구조적 사대성과 현실 정치의 장벽에서 기인한다. "복잡하다”, "따로 검토하겠다”며 책임을 미루고 쩔쩔매는 풍경. 주권 국가의 외교안보라인이 자국민의 안위나 보편적 인권 규범보다 미국과 동맹국의 눈치, 그리고 침략국의 해명을 먼저 대변하려 하는 오랜 관료주의적 관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러한 비겁함 너머에는 견고한 군사·경제적 공모 구조가 버티고 있다. 말로는 인권과 규범을 외치지만, 이스라엘 정권과 맺은 무기 거래 계약서는 단 한 줄도 수정되지 않았다. 국내 방산 대기업들이 맺은 차세대 드론 및 AI 표적 시스템 공동 개발 MOU는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불법 점령 종식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결의안 앞에서도 한국은 기권과 침묵의 스탠스를 요지부동으로 유지하고 있다. 국민주권정부로의 전환이 이루어진지 1년이 넘어가는 현재에도 말이다.

결국 외교적 언사가 견고한 군사·경제적 이권 구조를 균열 내지 못할 때, 정부의 그 어떤 강경 기류나 수사 역시 국내 정치용 ‘메아리’에 머물 뿐이다. 관료들의 관성적·사대주의적 방관을 혁파하고 실질적인 무기 거래의 공모 구조를 끊어내는 인적·구조적 쇄신이 따르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외교는 이해관계에 따라 원칙을 선택적으로 소비하는 껍데기 외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진짜 질문

이 사건의 핵심은 석방이 아니다. 두 가지 질문이다.

하나는, 왜 한국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여권이 무효화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스라엘 해군에 나포될 것을 알면서도 그 배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국가가 여권을 빼앗고, 외교부가 '안전'을 이유로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때, 그들은 오히려 국가가 지키지 못하는 무언가를 지키러 간 것이다. 그 무언가는 인간의 존엄이고, 국제법이고, 한국이 스스로 말해온 헌법적 가치들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한국인을 즉시 석방한 것이 순수한 외교 성과인가, 아니면 한국이 이스라엘에게 그만큼 '잃기 싫은 나라'이기 때문인가? 만약 후자라면, 우리는 이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 탄약을 납품하고, 드론 기술을 수입하고, 국제 결의에서 침묵하는 나라가, 그 모든 공모의 대가로 얻어낸 '신속 석방'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한국계 미국인 활동가인 조나단 승준 리(Jonathan Seungjun Lee, 또는 조나단 빅토르 리)는 출항 전 이렇게 말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억압이 결국 우리 모두의 삶으로 밀려올 것임을 깨닫게 될 순간이 올 것입니다."

외교안보 관료들에 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질책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구조를 바꾸는 것이 되려면, 청와대의 "높이 평가"라는 말 대신 다음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 즉, 무기 거래의 전면 재검토, 국제 결의에서의 분명한 입장 표명, 그리고 팔레스타인 봉쇄를 뚫으러 간 시민을 범죄자 취급한 여권 무효화 조치에 대한 해명이다. 그리고 이를 위한 전면적 외교안보라인의 쇄신이다.

▲ 이타마르 벤 그비르 이스라엘 국가안보부장관이 사회관계망서비스(X)의 본인 계정에 "이스라엘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올린 영상의 일부. 활동가들은 손이 케이블 타이에 묶이고 머리를 바닥쪽을 향한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벤 그비르 장관 X 갈무리

원동욱 동아대학교 교수

원동욱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중국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이자 공공 지식인으로, 현재 사단법인 외교광장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동아대학교 국제대학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연구를 병행해왔다. 한국교통연구원 책임연구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제23대 한국현대중국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중국 정치와 외교, 미중 전략경쟁, 동아시아 질서를 연구하며, 주요 매체 기고와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활동을 통해 공공 지식인으로서 사회참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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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동, 미셸 스틸 거부 투쟁 선포…192차 촛불대행진

이영석 기자 | 기사입력 2026/05/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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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행동이 주최한 ‘내란청산 국민주권실현 192차 촛불대행진’이 23일 오후 5시 주한 미국 대사관 인근 광화문역 3번 출구 앞에서 열렸다.

 

  © 문경환 기자

 

‘내란배후 주권모독 미국을 반대한다!’는 부제로 열린 이날 촛불대행진에 연인원 2,100여 명(주최 측 추산)의 촛불시민들이 참가했다.

 

김지선 촛불행동 공동대표가 구호를 선창하며 집회를 시작했다.

 

“내란배후 주권모독 미국을 반대한다!”

“전작권 내놓고 브런슨은 나가라!”

“윤어게인 주한미대사 미셸스틸 오지마라!”

 

  © 문경환 기자

 

김은진 촛불행동 공동대표가 ‘미셸 스틸 거부 투쟁 선포문’을 발표했다.

 

김 공동대표는 “미셸 스틸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가 최근 미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노골적으로 대한민국 주권을 모독했다”라며 “이번 청문회를 통해 미셸 스틸은 주한 미국 대사로 외교관의 역할이 아닌, 식민지 총독 노릇을 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안보와 경제 모든 면에서 이재명 정부를 압박하며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미국의 검은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다”라고 했다.

 

이어 “애초 미셸 스틸은 외교관의 자격이 없는 자”라며 “미셸 스틸은 주한 미국 대사가 아니라 주한 극우 대사로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며 국내 극우세력을 지휘하러 오는 자”라고 주장했다. 

 

김 공동대표는 “촛불행동은 오늘부터 미셸 스틸 거부 투쟁을 선포한다”라며 “미 대사관 앞 릴레이 기자회견과 행동전, 미셸 스틸 거부 국내외 선언 운동과 서명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미셸 스틸 거부 투쟁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길재 강원촛불행동 공동대표는 기조 발언에서 “정용진은 미국의 밴스 부통령이 설립한 록브리지 네트워크의 아시아 총괄 회장”으로 “한미극우연대의 핵심에 서 있는 자”라며 “이번 (스타벅스의) 5.18 폄훼와 모독도 미국과 관련이 없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5.18학살의 배후 미국이 내란 극우세력들을 규합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쓰고 있”다며 “이번 탱크 데이 마케팅은 치밀하게 계획된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을 제압해야 내란세력도 완전히 소탕할 수 있다”라며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미 대사관 바로 코 앞까지 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주권을 모독하며 이재명 정부를 흔들어대고 전쟁을 강요하는 미국의 기도를 박살 낼 것”이라고 밝혔다.

 

▲ 김은진 공동대표(왼쪽)와 이길재 공동대표.  © 문경환 기자

 

김상우 강동촛불행동 상임대표는 스타벅스의 5.18 폄훼 사건을 언급하며 “숭고한 역사를 조롱하고 국민을 모독한 기업의 행위에 대해서는 불매운동이나 기업 퇴출 등으로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라면서 “이러한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직도 내란세력을 철저히 단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힘당은 “5.18에 대한 망언, 망동을 이어가고 있다”라며 “6.3지방선거는 단순한 선거가 아니다”, “내란 청산, 내란당 해체 선거로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상전 덕성여대 전 총장은 “5월 18일 한미연합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한국 군부의 공수특전단 광주 투입 요청에 동의, 서명하였다”라는 등의 근거를 들며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광주 대학살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두환 일당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한국에서 새 군사독재정권이 탄생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국 민주주의를 지키고 한국인의 생명을 보호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국 민주주의를 짓밟고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는 일에 동참하고 협조하였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아직도 한국에 대한 내정간접과 경제적 압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라며 “미국이 한국을 동등한 동맹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마음대로 대해도 되는 속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면서 미국의 간섭과 압력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김상우 상임대표(왼쪽)와 신상전 전 총장.  © 문경환 기자

 

황중현 청년촛불행동 회원은 “광주 학살의 배후였던 미국이 우리 군의 작전통제권을 틀어쥔 채 이 땅의 청년들을 자신들의 식민지 노예로 취급하고 용병으로 소모하는 현실에 분노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는 1986년 4월 전방 입소 교육 반대를 외치며 분신 항거했다”라며 “열사들의 투쟁으로 전방 입소 교육은 결국 폐지되었지만 한미연합훈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은 최근 킬웹 구상과 권역 지속지원 거점 계획 등을 통해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핵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라며 미국을 규탄했다.

 

강수혜 마포은평서대문촛불행동 회원은 “미군은 어떤 범죄를 저질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사드 반대 피켓을 들고 미군 차량을 겨우 1~2분 막았다고 9명이 기소되고 징역 1~2년 또는 벌금 3백만 원을 구형받았다. 이게 정상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분단으로 피 흘리는 우리 민족 허리에 빨대를 꽂고 있다. 1991년 1천억 원대였던 방위비 분담금은 이제 1년에 1조 3천억 원이 넘는다”라며 “우리 혈세를 강탈하는 미국에 분통 터지지 않는가?”, “미국에 바치는 조공 이제 제발 그만 끝장내자”라고 말했다.

 

또 “한미연합 구성군 사령부를 해체하지 않는 한 전작권 껍데기만 가져오게 된다”라며 “제대로 된 전작권을 환수하려면 한미연합 구성군 사령부를 해체해야 한다”라고 했다.

 

본대회를 마친 참가자들이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 왼쪽부터 황중현 회원, 강수혜 회원, 배서영 집행위원장.  © 문경환 기자

 

행진을 마치고 진행한 정리집회에서 배서영 자민통위 집행위원장은 “브런슨이 제출했다는 2029년 초 전작권 전환 로드맵 자료는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국방부가 폭로했다. 다시 말해 브런슨 이놈이 주둥이로만 지껄인 소리에 불과했다”라며 “이런 주권 모독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규탄했다.

 

또 “미셸 스틸은 한·미·일의 강력한 삼각동맹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라며 “수백만 명의 우리 민족을 죽이고 강탈한 전범국 일본과 군사동맹이라니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한반도를 거점으로 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주한미군기지를 병참기지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미셸 스틸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라며 “전쟁 준비를 감시, 감독하러 오겠다는 미셸 스틸은 외교관이 아니라 전쟁 사신”이라고 주장했다.

 

▲ 배우 현서영 씨가 격문 「주한미군기지 철수하고 평화통일 이룩하자!」를 낭독했다.  © 문경환 기자

 

▲ 가수 백자 씨가 「개뼈다귀 쏭」, 「주권자의 노래」, 「니들이 뭔데」, 「골목깡패 트럼프」를 불렀다.  © 문경환 기자

 

▲ “5.18 광주에 갔다 왔는데 열사들의 정신을 이어서 탈미에 더 앞장서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청년촛불행동 회원  © 문경환 기자

 

▲ “대한민국의 4대 악인 검찰, 사법부를 개혁하고 국힘당을 해산해야 한다. 또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 -고양파주촛불행동 회원  © 문경환 기자

 

▲ “(스타벅스 5.18 폄훼는) 정용진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생각을 가진 내란세력들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회원  © 문경환 기자

 

▲ “(미셸 스틸의 내정간섭 발언은) 트럼프가 우리 이재명 정권을 너무 우습게 보는 처사다. 주권을 모독하는 미국을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 문경환 기자

 

▲ “추경호 같은 작자가 대구시장 후보라고 나오고, 내란세력들이 지방선거에 나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 문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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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환 기자

 

아래는 투쟁 선포문 전문이다.

 

[미셸 스틸 거부 투쟁 선포문]

전쟁강요 주권모독 주한극우대사 미셸 스틸 거부한다! 

 

미셸 스틸 주한 미국 대사 지명자가 최근 미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노골적으로 대한민국 주권을 모독했다. 미셸 스틸은 청문회에서 한·미·일 간의 강력한 동맹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는 인도·태평양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한·미·일 동맹은 금기어나 다름없다. 일본과 과거사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한 미국 대사가 부임도 하기 전에 대놓고 한·미·일 협력도 아니고, 한·미·일 동맹을 언급한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한·미·일 동맹의 성격을 군사동맹으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동원하겠다는 속내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낸 점이다. 이는 최근 미국이 추진 중인 한국, 일본, 필리핀을 하나의 군사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킬웹’ 구상, 인도·태평양 전구 전체를 포괄하는 ‘다영역 태스크포스(MDTF)’ 개념 등의 방향과 일치한다. 한마디로 한국을 대중국 전초기지로 삼아 대놓고 대만전쟁과 한반도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미셸 스틸은 청문회에서 쿠팡 문제에 관한 질문에 ‘미국 기업은 한국 기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라고 했다. 범죄기업 쿠팡을 건들지 말라고 이재명 정부를 협박하며, 내정간섭을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미셸 스틸은 한국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계획에 대해서도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확인하고 싶다’라며 투자 재원과 이행 계획까지 따져보겠다는 고압적 태도까지 보였다.

 

이번 청문회를 통해 미셸 스틸은 주한 미국 대사로 외교관의 역할이 아닌, 식민지 총독 노릇을 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셸 스틸은 안보와 경제 모든 면에서 이재명 정부를 압박하며 미국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검은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애초 미셸 스틸은 외교관의 자격이 없는 자다. 윤석열을 지지하고 부정선거론을 설파하며 국내 극우세력과 연계한 반북 반중 성향의 편향된 정치 이념을 갖고 있는 미국판 윤 어게인일 뿐이다. 미셸 스틸은 주한 미국 대사가 아니라 주한 극우 대사로 이재명 정부를 공격하며 국내 극우세력을 지휘하러 오는 자다. 

 

이에 촛불행동은 오늘부터 미셸 스틸 거부 투쟁을 선포한다. 촛불행동은 미 대사관 앞 릴레이 기자회견과 행동전, 미셸 스틸 거부 국내외 선언 운동과 서명 운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미셸 스틸 거부 투쟁을 펼쳐나갈 것이다. 국내외 동포들 모두 힘을 합쳐 전쟁을 부르고 주권을 모독하는 미셸 스틸을 거부하자! 

 

전쟁강요 주권모독 미셸 스틸 오지 마라! 

주한극우대사 미셸 스틸 거부한다! 

 

2026년 5월 23일 

촛불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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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장관, 논란의 ‘두 국가’ 표현 왜 고수할까?

입력 2026.05.23 08:00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12일 서울 광진구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이용훈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을 예방하고 이 의장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통일부는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 관계’ 주장에 대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관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 통일부, <2026 통일백서 : 2025 한반도 평화공존의 기록들> 22p

이 한 문장이 이번주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정확히는 ‘두 국가’ 세 글자 때문입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헌법과 충돌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이 표현은 무엇을 뜻하길래 논쟁의 중심에 선 것일까요?

위 문장은 통일부가 지난 18일 발간한 이재명 정부의 첫 통일백서, <2026 통일백서>의 한 대목입니다.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 관계’라는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통일백서는 정부의 통일정책 추진 실적을 1년 단위로 정리해 발간하는 정부 보고서입니다. 영문판으로도 제작돼 정부의 통일정책 기조를 대내외에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통일백서에 남북관계의 지향점과 관련해 두 국가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런 문장도 있었습니다.

남북이 사실상의 두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여,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관계로 만들어나가고자 한다.

- 통일부, <2026 통일백서 : 2025 한반도 평화공존의 기록들> 25p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 대응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내세우고 있는 이른바 ‘평화적 두 국가론’입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평화적 두 국가론에 ‘위헌’ ‘역대 정부 입장과 배치’ 주장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의 양측 수석대표가 1991년 12월 11일 하오 국립극장에서 서울예술단의 영혼의 노래를 관람하면서 프래그램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어령 당시 문화부 장관, 정원식 당시 국무총리, 연형묵 당시 북한 총리. 경향신문 자료사진

첫째, 북한에 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헌법에 배치된다는 주장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 지역 역시 대한민국 영토이며, 북한은 통일의 대상인 만큼 헌법상 별개의 국가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헌법 해석을 바탕으로 진보·보수를 막론한 역대 정부가 대북 정책의 대전제로 삼아온 ‘남북한 특수관계론’과도 충돌한다는 주장입니다. 특수관계론은 남북이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는 것으로, 1991년 12월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전문

남한과 북한의 기본적인 관계를 규정한 남북관계발전법도 3조에서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통일부는 어떻게 반박했을까요? 통일부가 백서 발간 다음 날인 지난 19일 언론에 배포한 입장문의 일부분입니다.

‘평화적 두 국가’는 북한을 법적인 국가로 승인하는 것이 아님. 사실상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북한의 체제와 주권을 존중한다는 의미임. 이는 앞서 밝힌 대로, 남북이 유엔 동시가입 등 사실상 두 국가로 존재하는 현실과 ‘남북기본합의서’의 특수관계를 존중하는 전제 위에 있음.

- 통일부, 지난 19일 언론 배포 입장문

평화적 두 국가론의 ‘국가’는 북한을 일본, 미국과 같은 별개 국가로 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는 역대 정부의 공식 입장은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헌적이지도 않고, 역대 정부의 입장과도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북한 국가로 인정 안 한다면서 ‘두 국가’ 고수하는 이유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전군의 사·여단 지휘관들의 회합을 소집하고 남부국경을 지키는 제1선부대를 강화해 국경선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기 위한 군사조직구조 개편 구상을 밝혔다고 조선중앙TV가 18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적 두 국가 관계’라는 표현에 포함된 ‘국가’라는 단어 때문에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통일부는 ‘북한을 진짜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는 취지의 논리로 대응했습니다. 이런 설명이 당장의 쟁점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남습니다.

그렇다면 정 장관은 왜 굳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두 국가’ 표현을 고수하는 걸까요? 국가라는 단어 없이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면서 평화 공존하는 관계로 만들고자 한다’는 표현만으로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됩니다.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걸며 대남 단절 노선을 고수하는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옵니다.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에는 한국이 체제 붕괴와 흡수 통일을 추구하고 있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인식이 깔려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처음 선언한 2023년 12월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 연설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김 위원장의 당시 연설 일부분입니다.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남조선 것들과의 관계를 보다 명백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주적’으로 선포하고 외세와 야합하여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는 족속들을 화해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는 것은 더이상 우리가 범하지 말아야 할 착오라고 생각합니다. (…) 북남관계는 더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습니다.”

-조선중앙통신 2023년 12월 31일 보도

이에 통일부 당국자는 “평화적 두 국가는 북한에 흡수 통일을 추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강조하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반도 평화공존을 실현하기 위한 상대방으로서 북한의 체제를 존중한다는 의지를 극대화해서 전달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적대적 두 국가라는 유례없는 상황에 맞서 남북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내놓은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통일부 당국자들은 이를 “평화공존의 말 걸기” “바늘구멍 뚫기”라는 표현으로도 설명합니다.

통일부는 19일 입장문에서 평화적 두 국가론에 대해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이행하기 위한 현실적·실용적 이행전략”이라며 “평화통일은 상대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냉전적 적대만 반복한다고 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이 역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남북관계 개선 여부에 성패 달린 정동영의 두 국가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로 출근하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평화적 두 국가론의 성패는 남북관계가 개선되느냐에 달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는 현재로선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를 개선해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는 데다, 외부 정보 유입 등으로 인해 체제 내부의 불안정 요인이 오히려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과거에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나 대북 지원 등 남북관계에서 경제적 효과를 얻었지만, 지금은 중국·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는 남한에 미국과의 가교 역할을 요구했지만, 이제는 북·미 간 직접 소통이 가능합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명예교수는 “북·미 관계가 획기적으로 진전이 되면 거기에 연동돼 남북관계가 풀릴 가능성은 있어도 현재 우리 자체 동력만으로는 어렵다”며 “남북관계에서 크게 얻을 것도 없는데 (외래) 문화 침투 가능성 등 체제를 걸고 도박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평화적 두 국가론에도 북한이 별다른 반응 없이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고수한다면 정 장관은 논쟁적인 표현으로 내부 갈등만 일으켰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통일부의 존재 이유와 충돌할 수 있는 ‘두 국가’ 표현을 통해 오히려 존립 기반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도 제기될 수 있습니다.

이에 통일부가 사회적 논의를 보다 충분히 거친 후 평화적 두 국가론에 입각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석좌교수의 제언입니다.

“정부의 정책과 전략이 효과가 있으려면 국민의 지지와 국제사회의 지지가 있어야 하는데 통일부는 국민보다 반 발짝 앞서나가고 있다. 통일부는 전문가나 시민단체, 정치권과의 토론 등을 거쳐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북한도 (남한 내에서) 국내 지지가 있어야 평화적 두 국가론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장관의 평화적 두 국가론은 최장기간 단절된 남북관계를 풀기 위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구상이라고 보십니까? 성과 없이 내부 갈등만 키울 수 있는 설익은 시도라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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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이 정신병원에서 죽어 나가지 않으려면

고경태기자

  • 수정 2026-05-23 08:03

오늘, 정신병원의 현장⑥ 김제 신세계·신세계효병원 ‘전용병동’을 가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한 신세계병원 집중병동 1층 휴게실에 지적장애인들이 모여있다. 파란색 옷을 입은 이는 보호사.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 오이시디(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20년 넘게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률을 언급했다. “이렇게 많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망신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5년 내내 자살사망 주원인 1위를 차지한 정신건강 문제(보건복지부의 2016~2020 전국 자살사망 분석 결과보고서)의 치료 기관인 정신병원에서 학대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된다는 이야기, 대부분은 아직 수면 아래 있다.

한겨레는 2024년 7월 춘천예현병원을 시작으로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한 울산 반구대병원까지 전국 각지의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사망사건 등을 집중보도해왔다. 환자가 252시간이나 격리·강박 되었다가 사망하거나 5년간 중증 지적장애인 4명을 포함한 5명이 사망한 두 병원 사건은 정신병원의 현주소를 다시 돌아보는 단초가 되었으나, 사회적 관심은 미미하기만 하다. 정신병원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들을 되짚는다.

“어어어.”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 말 대신 소리를 내며 의료진을 맞는다. 눈을 맞추고 상대방 얼굴을 살핀다.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손을 잡기도 한다.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여기는 또 분위기가 다르다. 또렷한 인사말이 이어진다. 의료진이 밖으로 나가자 “가요?”라고 묻기도 한다.

이곳은 발달장애인들이 입원한 정신병원 폐쇄병동이다. 같은 음절만 반복하는 이들은 ‘심각한 행동장애를 동반한 최중증 지적장애’ 진단을 받았다. 한두 마디라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이들은 ‘최중증’보다 한 단계 아래 ‘중증’ 판정을 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입원 병상을 갖춘 전국 388개 정신의료기관(2024년 12월31일 기준 국립정신건강센터 보고서) 가운데 언론 취재에 응할 수 있는 곳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정신병원은 병동을 외부에 공개하기 꺼린다. 환자들의 바깥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폐쇄병동은 더욱 그렇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병원이라면 언론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병원을 직접 방문했다간 원무과 직원이나 보안요원에게 끌려 나오기 십상이다. 이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의 이미지를 비밀의 요새, 인권침해 의혹의 현장으로 고착시킬 뿐이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한 신세계병원 집중병동 1층 복도에 발달장애인 환자들이 모여있고, 일부는 지나가고 있다.

한겨레가 정신병원 폐쇄병동을 찾았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한 신세계병원과 신세계효병원이다. 각각 개인병원 또는 의료법인지석의료재단 소속인 두 기관은 협력관계인 ‘형제병원’이다. 정신의료계에서는 심한 행동장애로 인해 장애인거주시설이나 일반 정신병원에 머물지 못하는 중증 발달장애인들을 받아준다 하여 이른바 ‘끝병원’으로 불리는 곳이다. 또 다른 대표적 ‘끝병원’으로 현재 울산경찰청 수사를 받는 울산 반구대병원이 꼽힌다. 반구대병원은 최근 5년간 4명의 지적장애인을 비롯해 환자 5명이 다른 환자의 폭행 등으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신세계병원과 신세계효병원은 과연 반구대병원과 다른가? 이곳에 입원한 중증 지적장애인들은 위험에 노출돼 있지 않을까? 궁금증을 안고 취재를 요청했다. 일찌감치 취재거부 입장을 표명한 반구대병원과 달리 신세계병원은 흔쾌히 문을 열었다. 19일 오후 김제평야를 굽어보며 김제 구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이 병원 폐쇄병동을 방문해 의료진과 이야기를 나눴다.

신세계병원과 신세계효병원은 각각 2005년과 2010년 개원했다. 노인·요양병동과 정신병동 등을 포함해 도합 669병상(정신병동만 513병상)을 운영해온 두 병원이 지적장애·자폐장애 등 발달장애인들만을 위한 병동을 세운 건 2022년이다. ‘국내 최초 맞춤형 중증발달장애인 전문 병동’을 표방한 신세계효병원 산하 나누리발달센터다. 이곳에서 200여명의 발달장애인(지적장애와 자폐장애 비율 7대3)을 따로 관리해왔다. 이후 4년간의 전용병동 운영 경험은 올해 2월 또 다른 ‘병동 업그레이드’로 이어졌다. 나누리발달센터의 발달장애인 중 상대적으로 행동장애가 더 심한 81명을 신세계병원 산하 ‘집중병동’으로 옮겨 관리하게 된 것이다.

신세계병원 집중병동 1층의 간호사실. 80여개 시시티브이가 병실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다.

발달장애인법상 지적장애인이란 “지적 능력의 발달이 불충분하거나 불완전하여 일 처리와 사회생활 적응이 상당히 곤란한 사람”이다. 통상 지능지수 70 이하를 기준으로 삼는데, 70 이하 50 이상을 경증 지적 장애로 본다. 나누리발달센터에 입원한 이들은 대부분 50 이하의 중증 지적장애인이다. 그중에서도 지능지수 30 이하인 이들을 집중병동으로 옮겼다. 이 병원에선 이들을 ‘최중증 지적장애인’이라고 부른다. 자타해 사고 발생 우려가 큰 자폐장애인도 함께 집중병동으로 왔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약 1만명으로 추산되는 이른바 ‘고위험군 발달장애인’에 포함된다.

환자 보호자들 입장에선 ‘발달장애인 전문병동’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을 느낄 만하다. 지능이 낮아 방어능력이 취약한 이들이 최소한 힘의 우위에 밀려 비발달장애인 환자에게 해코지를 당할 걱정은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울산 반구대병원의 경우엔 발달장애인과 조현병, 양극성 정동장애 환자 등이 뒤섞여 생활했다. 2022년 1월과 2024년 7월 반구대병원에선 지적장애인이 조현병 등 진단을 받은 다른 환자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 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신세계·신세계효병원에서 이런 식으로 사망한 환자는 없다.

신세계효병원 산하 나누리발달센터 중앙정원에서 포즈를 취한 병원 의료진들. 왼쪽부터 박진숙 간호과장, 박문희 의무원장, 이경현 사회사업과장, 강남주 책임간호사.

발달장애인들은 끊임없이 행동한다. ‘행동장애’ 또는 ‘도전적 행동’으로 불린다. 장판과 침대 매트리스를 뜯고, 변기를 부수고, 이불을 찢기도 한다.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투척하거나 화재발신기와 콘센트, 비상구 안내판, 병동 의자 등 시설물을 파손하는 경우도 있다. 일부 정신병원은 문제 행동을 한 이들을 격리·강박한다. 징벌을 가한다며 병실 창틀에 환자의 두 손을 묶어놓은 충북의 한 병원도 있었다.

신세계 병원은 좀 다른 질문을 했다고 한다. 환자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이 무엇인가. 신세계병원에서 대외협력과 소통을 총괄하는 이경현 사회사업과장은 “처음 나누리발달센터를 조성할 당시에는 최중증 발달장애 환자분들의 특성과 치료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시설을 마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운영해보니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쾌적하고 좋은 시설이 아니라, 행동 특성과 안전, 감각과 자극, 치료 지속성을 세심하게 반영하는 좀 더 전문적인 치료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집중병동이 그 결과다.

직접 들어가 본 집중병동에선 미세한 지린내가 풍겼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환자가 많은 탓이다. 다행히 소독약 냄새 덕분에 참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환자들은 집중병동 1·2·3층에 각각 25명 안팎씩 생활하고 있었다. 나누리발달센터에 있을 때는 80여명이 한 층에서 생활했다. 이경현 과장은 “80여명을 3개 층으로 분산해 혼잡도를 줄이고 인격권을 더 보장해 집중 케어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 과장은 병원이 어떻게 환자의 안전과 위생을 살피고 배려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각층 12개, 총 36개 방은 1인실이고, 나머지는 4인실이다. 자·타해 위험성이 큰 최중증 지적·자폐 장애 환자들은 1인실에서 생활한다. 타인과 관계에서 자극을 줄이고 사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1인실은 개방형이지만 ‘액팅아웃’(문제 행동)이 있을 경우 전문의 지시 아래 보호실로 사용된다. 모든 방 창문의 안전 방충망은 6~7명이 달려들어도 뜯어낼 수 없는 특수재질로 했다. 장판도 마찬가지다.

벽면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나무합판을 댔다. 낙상 위험 환자들이 있는 방에는 침대 대신 소변이 스며들지 않는 나일론 재질 자충 매트를 깔았다. 화장실 바닥은 경사를 지게 해 물이 안 넘치고 쉽게 청소가 가능하도록 했다. 대소변을 바닥이나 벽면에 묻힐 경우 바로 씻어낼 수 있도록 복도 중간중간 천장 매립형 고압 세척기를 설치했다.

신세계병원 집중병동의 한 보호사가 오물 등으로 내부 환경이 훼손됐을 때 바로 물세척을 할 수 있는 천장 매립형 고압세척기를 빼내어 시범을 보이고 있다.

병원 곳곳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행복이! 여기에!” 등의 큰 글씨가 적혀 있다. 누리집엔 “가장 아픈 손가락을 가장 잘 돌보는 병원”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신세계병원과 신세계효병원이 지난 4월17일 인권위 주최로 열린 ‘2026 정신의료기관 시설·환경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에서 모범 시설 우수사례로 자주 언급된 점을 떠올리면, 마냥 과장된 수사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해 10월 이 병원을 방문한 인권위 실태조사팀에게 큰 인상을 준 시설 중 하나는 나누리발달센터의 660㎡(200여평) 남짓한 중앙정원이었다. 지하 1층 지상 2층의 삼각형 형태로 지어진 건물 한가운데 병동 환자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맨발로 산책과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바닥은 안전하고 단단하며 물이 잘 빠지는 폴리프로필렌 소재로 해놨다. 신세계병원 김한주 원장(65)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반 고흐가 입원한 병원에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실제 고흐가 생전 입원했던 생 레미 정신병원은 정원으로 유명하다. 집중병동 환자들은 신세계병원 본관 뒤 산책로를 이용하고 있다. 다만 이동에 어려움이 있어 오는 6월에 집중병동 앞 330㎡(100여평)에 따로 잔디를 깔 예정이라고 했다. 발달장애인들의 회복을 위해서는 땅을 밟는 게 중요하다는 게 김 원장의 지론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과거 ‘빚진 마음’ 이야기를 꺼냈다.

신세계효병원 산하 나누리발달센터 창문으로 본 중앙정원. 환자들이 거닐고 있다.

김 원장은 1990년대 초반 원광대의대부속제2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과정을 수련했다. 원광대 의대에서 독립채산제로 운영한 230병상 규모의 정신병원이었다. 당시 그곳엔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병동 환자들이 산책하러 가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좁은 방안에만 갇혀있게 하는 것 같아 늘 마음에 걸렸다. 언젠가 정신병동 환자들에게 꼭 땅을 원 없이 밟게 해주고 싶었다. 병원을 개원한 뒤 그 꿈을 이룬 셈이다.

집중병동 환자들은 외부 방문객을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어수선하게 복도들 돌아다녔고, 휴게실 바닥에 엎드려 있기도 했다. 환자복은 깨끗해 보였다.

옷을 자꾸만 벗고 알몸으로 돌아다니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주로 1인실에 들어가 있었다. 집중병동 81명의 평균 나이는 30.2세다. 보호사들은 한 층에 3.5명씩 상주한다. 김 원장은 “전국에서 알음알음 환경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신다. 환우 가족분들이 많이 홍보해준다”고 말했다. 약물조절과 행동치료, 재활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증세가 호전돼도 다시 입원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은 이들을 집에 데려가 돌보기 곤혹스러워한다.

김 원장은 “인격적 케어를 하려면 인력이 ‘곱하기 2’여야 한다”고 했다. 환자가 81명인 집중병동에는 간호사가 16명, 보호사·간병사가 17명이다. 정신과 전문의는 다른 병동까지 포함해 5명이다. 그만큼의 인력이 신세계효병원에도 별도로 있다. 간호사의 경우 의료법상 환자 13명당 1명인 점을 감안하면 두 배가 넘는다. 김 원장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덤빈다. 피눈물 나게 경영해서 수익 올리고 투자한다”고 했다. “목욕과 식사 도와줘야 하고 똥오줌도 받아낸다. 환자분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려면 돌볼 사람이 하나라도 더 필요하다. 투자 없이는 안 된다.” 가령 의료재단 산하 신세계효병원의 발달장애인 환자들을 개인병원인 신세계병원 산하 집중병동으로 옮긴 것도 비용 지출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위치한 신세계·신세계효병원. 대지는 대략 132,000㎡(4만평)이고 건물은 6600㎡(2000)평이다. 뒤편에 구성산이 있다. 신세계병원 제공

김 원장의 아버지도 의사였다. 신세계효병원을 운영하는 의료법인지석의료재단의 ‘지석’은 아버지 김기영(1926~2020)의 호다. 김 원장에겐 의료사업이 선대를 잇는 ‘소명’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 이는 원광대 의대 재학 시절부터 은사였던 박민철(76) 교수다. 박민철 교수는 현재 신세계효병원 학술·윤리원장과 나누리학교장을 맡아 김 원장을 곁에서 돕고 있다. 매일 환자도 본다. 학술·윤리원장은 병원 내에서 진료환경 향상을 위해 교육과 자문을 하는 자리다. 나누리학교는 발달장애인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 중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30명 규모 특수교육 모델이다.

신세계병원 본관 홀에서 만난 박민철 원장은 “1980년대 중반엔 요양원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중증 발달장애인들을 정신병원에 데려와 돌보기도 했다. 가족들은 함께 데리고 살기 너무 힘들어한다. 발달장애인들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정부도 모르고 있지 않다. 지난해 9월 정부가 발표한 123대 국정과제엔 최중증 발달장애인 대상 통합돌봄 지원 확대 등의 내용이 담긴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가 들어가 있다. 지역사회에 있는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다. 정신병원에 있는 발달장애인은 고려되지 않았다. 박민철 원장은 “보건복지부에서 정신장애는 2차관 소속이고, 발달장애는 1차관이 맡고 있다”며 이러한 모순점부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책임제’와 관련해선 중증 발달장애인 환자가 내야 하는 건강보험 진료비를 대폭 깎아주는 산정특례제도 도입, 환경 개선과 외부 인력 지원, 국가 지정 거점병원 확충, 정신병원 수가 개선 등의 대안도 제시된다. 김 원장은 이들 대안에 대해 ‘국격에 맞는 솔루션’이라면서도 “수가 문제가 장땡은 아니다. 정신병원들이 기준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보건복지부 정신병원 의료인증기관 획득을 의무사항으로 두고, 그 기준을 못 맞추는 병원은 퇴출시켜야 한다고 했다. “한 예로 간호사가 스테이션(간호사실)만 들어가고 병실엔 보호사만 들어가는 병원이 있다. 의사도 한번 회진하고 끝이다. 빡세게 해야 한다. 우리도 대접을 잘 받으려면 환자들을 먼저 잘 대접해야 한다.”

신세계병원 김한주 원장이 병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한주 신세계병원장의 대학 은사이자 멘토인 박민철 신세계효병원 학술·윤리원장 겸 나누리학교장.

물론 아무리 환경이 좋다고 해도 정신질환자가 아닌 장애인을 병원에 오래도록 있게 하는 게 타당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신세계병원은 지난 3월 응급환자의 기저귀 착용과 관련해 인권위로부터 직원 대상 재발방지 직무교육을 권고받은 뼈아픈 경험도 있다. 김 원장은 이 부분을 언급할 땐 다소 서운하고 억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만 지역사회에 정착하기 어렵고 시설에서 안 받아주는 발달장애인의 선택지가 병원인 현실에서, 이들이 치료환경 변화를 위해 분투하는 모습만은 분명해 보였다. 김 원장이 말했다. “보호자들이 가족을 입원시키고 돌아갈 때 많이 우신다. 그러면서도 ‘죽지는 않겠구나’라고 마음을 놓고 간다. 그분들에게 자주 와서 데리고 가 함께 자고, 밥도 먹고 가라고 권한다. 그래야 우리도 힘을 낸다.”

취재를 마친 다음 날인 20일 김성완 전남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정신병원의 물리적 환경 관련 인권위 용역조사차 이 병원을 방문한 실태조사팀의 책임자였다. 병원의 노력을 인정하면서도 근본 문제를 짚는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환자에 대한 신세계병원 의료진의 애정과 존중이 좋은 환경으로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처럼 좋은 치료 환경이 지속 가능하고 더 많은 의료기관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 인권과 안전이 보장되는 정신의료기관의 치료 환경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책무이자 공공 투자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글·사진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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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23 07:49:06
 

대통령 관저 이전 공사 특혜 의혹을 받는 김대기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윤재순 전 총무비서관이 구속됐다.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다. 3대 특검 잔여 사건을 맡은 2차 종합특검팀이 받아낸 첫 구속영장이다. 함께 청구한 김오진 전 국토교통부 1차관의 영장은 기각됐다. 4년 전 더탐사가 의심으로 제기했던 사실이 수사기관의 손에서 확인됐다.

 

행안부 예산 28억, 관저로 빼돌렸다

 

특검이 파악한 내용은 이렇다. 관저 이전 예산은 처음 예비비 14억여원으로 잡혔다. 그런데 실제 공사비가 41억여원으로 세 배가량 불었다. 대통령실은 늘어난 비용을 행안부가 떠안도록 압박했다. 특검은 "관련 부처의 반발이 있었는데도 김 전 실장 등의 지시에 따라 대통령 관저와 무관한 행안부 정부청사관리본부의 예산이 불법 전용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전용된 돈은 28억원이다.

 

4년 전, 바로 그 정부청사관리본부였다

 

전용 출처가 정부청사관리본부라는 점은 4년 전 이미 보도됐다. 더탐사는 2022년 8월 관저와 본관 공사가 사실상 전부 수의계약으로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책정된 예비비가 바닥나자 정부청사관리본부가 다른 청사의 일반 수선비를 끌어다 관저 리모델링에 돌려썼다는 내용이었다. 행안부 예산과장은 통화에서 "목적에 맞으면 전용은 가능하다"며 기재부와 "협의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특검이 이번에 전용 출처로 지목한 곳이 바로 그 정부청사관리본부다.

 

무자격 업체 21그램이 김건희 씨 코바나콘텐츠와의 친분으로 공사를 따냈다는 특검 판단도 그때 보도와 겹친다. 21그램은 코바나콘텐츠 사무실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던 업체다. 더탐사는 이 회사가 코바나콘텐츠 전시회 후원·협찬 명단과 VVIP 초대권 명단에 올라 있던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다.

 

입찰은 공고에서 개찰까지 세 시간, 마감까지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응찰 업체는 추정 금액의 99%를 써냈다. 관저 공사가 나라장터에 세종시 소재 "○○주택"으로 위장돼 올라 있던 정황도 그때 드러났다.

 

당시 정부청사관리본부는 취재진을 피했다. 본부장은 퇴근길 차문을 닫으며 답을 거부했다. 그때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았던 의혹이 이번 구속으로 이어졌다.

▲강진구 기자가 세종시에 있는 정부청사관리본부장을 만나 인터뷰하는 모습(2022.8.3 방송 영상 캡쳐)

 

영장 발부와 기각, 무엇이 갈랐나

 

서울중앙지법 부동식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어제 "증거 인멸 우려가 있다"며 김 전 실장과 윤 전 비서관의 영장을 발부했다. 반면 김오진 전 차관에 대해서는 "주거가 일정하고 도망 및 증거인멸 염려가 없다"며 기각했다. 세 사람 모두 윤석열 정부의 관저 이전 업무를 맡은 핵심 인물이다. 영장실질심사는 특검 출범 이후 두 번째다.

 

특검이 풀어야 할 매듭

 

구속은 출발선이다. 가장 큰 과제는 김건희 씨의 관여 여부다. 특검은 21그램이 김건희 씨와의 친분으로 공사를 땄다고 본다. 그러나 그 친분이 어떻게 수의계약으로 바뀌었는지, 김건희 씨가 업체를 직접 지정했는지는 아직 영장에 담기지 않았다. 이번 구속 혐의는 예산 전용과 직권남용이다. 김건희 씨 본인의 형사책임은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다.

 

전용된 돈의 행방도 남은 과제다. 특검 스스로 빼돌린 돈의 귀결점을 끝까지 확인하겠다고 했다. 전용된 28억원과 세 배로 불어난 공사비가 어디로 흘렀는지가 핵심이다. 4년 전 더탐사는 21그램과 같은 건물을 쓰던 지하 업체의 대표가 21그램의 감사를 겸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 두 회사가 사실상 한 몸이라는 의심은 당시 규명되지 않았다.

 

윗선과 책임 라인도 그대로 남는다. 김대기·윤재순 위로 지시가 더 올라가는지, 대통령실의 압박이 어디서 시작됐는지가 규명 대상이다. 4년 전 정부청사관리본부는 이 수의계약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결재로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전용을 승인한 행안부와 기재부의 책임 범위, 영장이 기각된 김 전 차관의 역할과 재청구 여부도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 무자격 업체가 어떻게 검증을 건너뛰고 대통령 관저 공사를 맡았는지, 위장 표기와 초고속 입찰을 지시한 주체가 누구인지도 특검의 몫으로 넘어왔다.

 

특검은 "국민적 의혹 해소를 위해 적법 절차를 준수하면서도 끝까지 관저 이전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으로 인한 이익의 귀결점 확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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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푸틴 회담장에 걸린 그림이 ‘태산’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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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길 기자 
  •  
  •  입력 2026.05.22 15:07
  •  
  •  수정 2026.05.22 20:42
  •  
  •  댓글 0
 
지난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공동성명'에 서명한 중.러 정상. [사진-중 외교부]
지난 2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공동성명'에 서명한 중.러 정상. [사진-중 외교부]

20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러 정상회담은 지구촌의 주목을 받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4~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오랫동안 염원하던 ‘신형 대국관계’를 구축한 데 기초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향후 국제관계 구상을 밝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1일 밤 “시진핑 주석과 푸틴 대통령 대통령 회담 뒷얘기”라는 기사를 통해 전날(20일) 두 정상이 「포괄적 전략협조 강화와 선린우호협력 심화에 관한 중·러 공동성명」(아래 “공동성명”)에 서명한 직후 “참석자들이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다”고 전했다. 

이 통신은 “사람들은 뒤편에 거대한 중국 전통그림 ‘태산’이 걸려 있음을 알아차렸다”면서 “오악 중 가장 신성시되는 웅장한 태산은 우뚝 솟은 소나무와 편백나무, 그리고 휘몰아치는 구름과 함께 문명화된 강대국의 위험을 온전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산’처럼 급변하는 세상에서 “강대국의 책임”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30주년 및 선린우호협력조약 체결 25주년’을 맞아 두 정상은 “양국 인민이 염원하는 영원한 우정을 법제화함으로써 중·러 관계의 비약적 발전을 촉진하고, 시대 흐름에 맞게 공고·심화하며, 상호존중, 공평정의, 상생협력에 기반한 ‘신형 대국관계 패러다임’을 구축했다”고 자평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방중 전날 영상메시지를 통해 “나는 시진핑 주석이 러시아와 장기적 협력을 추진하고자 하는 뜻을 충심으로 소중하게 여긴다”고 밝혔다. 20일 시 주석을 만나서는 “오랜 친구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밝혔다. 

러시아 측이 이번 회담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했는지는 대표단 면면을 통해 드러난다. 부총리 5명, 장관 8명 등 연방정부 수장과 주요 대기업 임원과 언론사 대표, 대학 총장들이 대거 수행했다. 

[신화통신]은 “화기애애하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시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각가 소인수 회담과 확대회담까지 3시간 동안 깊이 있는 의견을 주고받았으며, 솔직하고 실용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회담에서, 시 주석은 “중·러 관계가 이처럼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은 양측이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티는’ 인내심으로 정치적 상호신뢰와 전략 협력 심화하고 (...) ‘격동의 시대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용기로 국제적 정의를 수호하고 인류운명공동체 건설을 추진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대통령실(크렘린궁)에 따르면, 이날 푸틴 대통령은 “러·중 관계가 전례없는 수준에 도달했으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양국관계는 자립적이고 현재 국제정세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당대 국가 관계의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정상회담 계기에, 양국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을 망라한 40여건의 합의문서를 채택했다. 

특히, 두 정상이 직접 서명한 “공동성명”은 “중·러 선린우호협력조약에 명시된 양국 협력 기본원칙은 오랜 세월을 거쳐 검증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현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며 “양측은 선린우호협력조약 제25조에 따라 이 조약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고 명시했다.

이어 “양측은 정상외교를 지침으로 삼아 양국 정상 간에 합의된 중요사항을 전면 관철하고 고위층 왕래를 계속 긴밀히 유지하며, 정부와 입법기구, 정당 간 교류 메커니즘이 효율적이고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성명”은 또한 “양측 군대 간 전통우호 관계를 공고히 하고 군사 분야에서 상호신뢰를 증진하며, 협력 메커니즘을 개선하고 연합훈련과 해상·공중 연합순찰을 확대하며, 양자와 다자 틀 내에서 조율과 협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위험과 도전에 손잡고 대응함으로써 세계와 지역 안전과 안정을 공동 수호할 것”이라고 명시했다.  

중국 [글로벌타임스]는 21일자 사설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중·러의 긴밀한 전략적 협력은 격동하는 세계에서 중요한 안정의 동력으로서 역할을 계속 수행하면서, 주요 국가로서 국제공정과 정의를 수호하고 보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국제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는 데서 대체불가능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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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노조원들의 무절제한 탐욕과 이기주의” 삼전 노조 비난

[아침신문 솎아보기] 삼성전자 노사 잠정합의 후 남은 과제

초과이익 ‘사회적 배분’ 공론화 주목한 경향신문·한겨레

보수 언론 산업계 우려 집중 “성과 못 내도 성과급 시대”

중앙일보 “무리한 요구할 수 있게 판 깔아준 노란봉투법”

기자명윤유경 기자

  • 입력 2026.05.22 07:48

▲2026년 5월20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경기고용노동청에서 열린 삼성전자 임금협상을 마친 후 여명구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반도체 사업 담당) 피플팀장과 최승호 삼성그룹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이 잠정 합의안에 서명한 후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연합뉴스

삼성전자 노사가 임금협상에 잠정 합의하면서 갈등은 일단 봉합됐지만 반도체 기업의 초과이윤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22일 주요 진보 언론은 초과이윤의 사회적 배분을 위한 공론장 마련을 촉구한 반면, 보수 언론은 ‘성과 있는 곳에 보상한다’는 원칙이 무너졌다며 이번 합의안이 다른 기업으로 확산돼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삼성 노조는 노조라고 할 수 없다”면서 삼성전자 노조를 강하게 비난했고, 중앙일보는 이번 사태를 근거로 노란봉투법 비판에 집중했다.

초과이익 ‘사회적 배분’ 주목한 경향신문·한겨레

경향신문은 1면 기사 <모면한 파업 손실 유예된 분배 갈등>에서 삼성전자 내 비반도체 부문과의 갈등, 협력업체 생태계까지 온기가 미치지 못한 점 등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짚었다. 삼성전자 내부에서 반도체와 비반도체 부문의 성과급 차이가 막대해지면서 회사의 결속력을 약화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특별성과급까지 포함하면 DS 부문 메모리사업부 직원은 1인당 약 6억 원(세전, 연봉 1억 원 기준), 적자인 시스템LSI·파운드리 사업부 직원도 약 2억 원을 받게 되지만, OPI만 적용되는 가전, 모바일 등 완제품(세트·DS) 부문 직원은 흑자 사업부 소속인 경우에도 최대 5000만 원을 받는 데 그친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 일원인 협력업체나 하청노동자는 물론 대다수 국민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 22일 경향신문 1면.

기업이 거둔 초과이익의 배분 방식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경향신문은 2면 기사 <노조·하청·주주 분배 막는 재벌체제…초기업·산별 교섭 필요>에서 협상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 ‘사회적 배분’에 주목했다. 경향신문은 이번 사태가 재벌이 이익을 독식하고 분배 체계를 결정해온 한국 기업 구조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개별 기업 단위 교섭 대신 반도체 산업 전체를 아우르는 초기업·산업별 교섭 구조를 만들어야 원·하청 노동자와 협력업체까지 포함할 수 있다는 노동계 주장도 전했다.

▲ 22일 경향신문 사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기업의 역대급 이익을 개별 기업 내 배분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위해 활용하자는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며 “대기업의 성과가 사회 전체의 복리 증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정부와 산업계, 노동계, 학계의 건강한 지혜를 모으는 공론장이 조속히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한겨레 역시 1면 기사 <기업 넘어선 이익 배분 ‘뉴 노멀’ 시험대>에서 “삼성과 에스케이하이닉스 사례를 시작으로 각 기업 노사 관계에서도 영업이익 규모에 기반을 둔 성과급 요구가 다방면으로 분출되고 있는 양상이어서 삼성전자의 향후 숙의 과정은 이들 기업에도 시금석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주주를 비롯한 기업 울타리 밖에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배분 몫과도 균형을 맞춰야 하는 과제도 점차 가시화될 것”이라고 했다.

▲ 22일 한겨레 3면.

3면 기사 <삼성은 하청·지역사회 상생, 정부는 초과세수 활용 고민 필요>에서도 한겨레는 대규모 세수에 대한 활용 방안, 반도체 생태계와 지역사회 등을 아우르는 상생 방안을 다루는 사회적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지난 3월 정부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반도체 경기 호황과 증시 호조 등으로 올해 세수가 애초 목표보다 25조2000억 원이 더 걷힐 것으로 전망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1분기 역대급 실적을 기록하면서 초과세수 규모가 훨씬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 노사는 지난 20일 밤 맺은 잡정 합의안에서 협력업체와 지역사회 등과의 상생 협력 방안을 약속했다. 한겨레는 “이번 노사 협상에선 같은 반도체 공장에서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사내 하청노동자 등과의 상생 방안은 배제됐다”며 “급한 불을 끈 회사 쪽이 이익 분배의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문도 적지 않다”고 했다.

사설에서도 한겨레는 “노동자의 기여에 대한 보상과 주주 이익, 미래 투자를 위한 재원 축적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합리적이고 지속가능한 배분 기준을 고민해야 한다”며 “반도체 산업의 이례적 호황은 국가 경제를 키우겠지만, 동시에 소외된 부문과의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초과 이익의 사회적 공유 방안에 대해 공론장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보수 언론 산업계 우려 집중… 중앙일보 “성과 못 내도 성과급 시대”

주요 보수 언론은 삼성전자 노사 합의에 따른 산업계의 우려에 주목했다. 조선일보는 1면 기사 <삼성전자 성과급,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에서 “사태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삼성이 반세기 동안 고수해 온 ‘성과 있는 곳에 보상한다’는 원칙이 무너졌다”며 “과도한 요구라도 노조가 파업을 무기로 끝까지 버티면 관철된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SK하이닉스에 이어 삼성전자까지 ‘영업이익의 N%’를 성과급으로 못 박는 모델을 수용하면서 유사한 요구가 조선·통신 등 각 분야 기업으로 확산할 기세”라며 “노란봉투법 시행으로 원청 상대 교섭권을 쥐게 된 하청 노조들도 가세할 조짐”이라고 했다.

▲ 22일 조선일보 1면.

3면 기사 <“원칙 없는 보상은 투자 위축·도전 기피 불러…한국 경쟁력 꺾일 것”>에서는 한국 경제의 근원적 경쟁력을 갉아먹는 부작용이 속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일보는 “전문가들은 노동시장 경직성을 해소하면서도 한국 경제 체급에 걸맞은 합리적인 보상 체계를 이끌어낼 사회적 합의가 시급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기사 <성과급은 쟁의 대상 아닌데…노조들은 파업 명분으로 삼아>에서는 “성과급 규모 등에 대한 의견 차이가 파업(쟁의) 대상이 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며 “법적으로 엄격하게 따져봐야 할 주제인데 노조가 성과급 협상에서 파업 카드를 내미는 것이 뉴 노멀(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고 했다.

중앙일보 역시 1면 기사 제목을 <성과 못 내도 성과급 시대>로 정하고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삼성식 성과주의 원칙이 흔들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앙일보는 “재계가 가장 우려하는 건 ‘삼성발 선례 효과’”라며 “삼성에서 영업이익 연동형 성과급 구조가 제도화될 경우 다른 기업 노조들도 유사한 요구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한 “반도체·배터리·자동차처럼 대규모 선행 투자가 필요한 산업일수록 우려가 크다”며 “미래 사업은 초기 수년간 적자를 감수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업부별 성과 책임보다 집단 재분배 성격이 강한 보상 구조가 확산할 경우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22일 동아일보 1면.

동아일보는 1면 기사 <1인당 6억… ‘N% 성과급’ 위험한 도미노>에서 전례 없는 인공지능(AI)발 호황 속에서 합리적인 성과 보상 체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문제는 영업이익 연동 보상 체계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이라며 “높은 보상을 자랑하는 글로벌 빅테크들은 이익만이 아니라 매출과 개인 성과, 조직 평가 등을 종합 고려해 성과급을 지급한다. AI 초호황으로 수혜를 입은 기업과 나머지 기업 간 격차가 커지며 대기업 안에서도 임금 차이가 커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고 했다. 3면 기사 <“삼전닉스 같은 성과급 요구하면 감당 못해” 기업들 벌써 긴장>에선 삼성전자 내부 보상 격차와 반도체 기업-다른 대기업들 사이의 성과급 격차에 주목했다.

조선일보 “노조원들의 무절제한 탐욕과 이기주의” 삼성전자 노조 비난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삼성전자 노조를 강하게 비난했다. “성과 있는 곳에 보상’이란 원칙은 훼손됐고 조직은 이기주의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세계 반도체 기업에서 볼 수 없는 노조의 존재, 그 노조원들의 무절제한 탐욕과 이기주의, 회사 측의 무원칙한 대처가 그대로인 상황에서 치열한 글로벌 전쟁터에서 삼성이 지금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기고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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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일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이번 사태는 노조가 파업을 무기로 기업 이익의 배분을 강제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며 “이로 인해 삼성이 사활을 걸어야 할 천문학적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 재원이 잠식당하게 됐다. 이 영향이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선제적 대규모 투자를 놓치면 금방 도태되는 것이 반도체 산업”이라고 했다. 조선일보는 “6억원 돈을 받는 사람들이 노조를 결성해 파업을 위협하고, 그로 인한 국가 경제의 풍파를 국민이 걱정해야 하는 어이없는 일은 삼성 내부 상황을 볼 때 이번으로 끝이 아닐 것”이라며 “먼저 정부가 친노조 일변도 정책을 바꿔야 한다. 삼성 노조는 노조라고 할 수 없다. 이들이 우리 경제의 버팀목을 흔드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 22일 중앙일보 사설.

중앙일보는 이번 사태를 근거로 들며 노란봉투법을 비판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사설에서 “대기업 노조들이 이처럼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게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이다. 파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교섭 대상을 ‘경영상 결정’으로 넓힌 데다, 불법 파업에 따른 노조의 법적·경제적 리스크도 크게 줄여주면서”라며 “사회적 약자를 위한다는 법이 고임금 대기업 노동자의 억대 성과급 확보의 지렛대로 활용된 셈”이라고 했다. 중앙일보는 “지금 한국 산업은 눈앞의 이익 나눠먹기에 열중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며 “무분별한 요구를 자제하고 입법 취지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노란봉투법 보완에 속히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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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로 바뀐 가자 병원…피난처 아닌 죽음의 덫으로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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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 남부 라파의 알-나자르 병원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숨진 이들을 슬퍼하는 가족들(2023년 11월7일) ⒸAbed Rahim Khatib/Flash9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는 지구촌의 변두리처럼 모든 물품이 귀한 곳이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탓이다. 정신적 스트레스를 크게 느끼는 탓일까,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들이 많다. 가자지구로 취재를 갈 때마다 그곳 통역자는 “미스터 킴, 빨간 말보로 담배를 가방에 넣을 수 있을 만큼 많이 사오라”고 이메일로 거듭 부탁했다. 담배야 건강에 좋지 않으니 그렇다 치고, 가자지구엔 치약이나 칫솔 같은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늘 부족하다. 의약품은 더 구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이스라엘의 봉쇄 탓이다.

가자지구의 의료 인프라는 2023년 10월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매우 열악했다. 지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을 통해 합법적으로 세워진 하마스 정권을 이스라엘은 미국과 손잡고 1년 뒤 무너뜨렸다. 그로부터 빚어진 크고 작은 무력충돌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20년 동안 봉쇄정책을 펴왔다. 의료 서비스를 포함한 사람과 물자의 가자 출입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에 따라 가자 주민들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그런 판에 또 전쟁이 터졌다.

“의사로서 우리는 눈먼 장님이 됐다”

가자지구 병원들은 지난 2년 반 동안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스라엘군은 폭격기 공습, 대포와 탱크 포격, 보병의 지상작전 등으로 병원들을 두들겼다. 갓 태어난 신생아들이 제대로 보호를 받질 못해 숨지고, 임신한 여인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조산을 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졌다. 미숙아를 살리는 인큐베이터, MRI 등 고가의 의료장비를 비롯해 거의 모든 시설물이 망가졌다. 저격수들은 병원 안에서 일하는 의료진이 하마스에 연루된 ‘불법 전투원‘이라며 붙잡아갔다. 환자를 나르는 구급차도 공격 목표가 됐다. 이렇듯 전쟁범죄 논란을 부르는 마구잡이 살상과 파괴 행위가 잇따랐다.

국제형사재판소(ICC) 로마 규정 제8조에는 ‘병원 및 병자와 부상자를 수용하는 장소가 군사 목표가 아닌 한, 이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공격을 하는 행위’(제2항)를 전쟁범죄로 못 박고 있다. ‘병원, 의료수송수단, 의료 포장을 한 건물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은 (굳이 법조문을 외울 것 없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치군사 지도부는 이를 아예 무시하는 모습이다.

[가자지구의 보건 시스템은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체계적으로 악화되었다. 36개의 모든 병원과 대부분의 1차 보건센터가 파괴되었다. 2023년 10월 이후 의료 시설에 대한 공격이 930건 이상 기록되었다. 현재 모든 병원의 절반만이 부분적으로 운영되며, 많은 병원이 수용 능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https://www.un.org/unispal/document/occupied-palestinian-territory-who-health-emergency-appeal-2026/)

위에 옮긴 글은 지난 3월 세계보건기구(WHO)가 팔레스타인(특히 가자지구)의 보건 상황이 위기에 처했음을 세계에 알리면서 긴급 지원을 호소하는 대목이다. 현재 많은 부상자와 만성 질환자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분쟁으로 인한 정신건강 피해 또한 매우 심각하다. 어린이들을 포함해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심리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의료 인력의 부족, 필수 의약품과 장비 부족 등도 큰 문제다.

지난 2년 반 동안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36개 병원 가운데 특히 알-시파(Al-Shifa), 나세르(Nasser), 카말 아드완(Kamal Adwan) 병원 등 이른바 거점 병원들을 거듭 공격해 망가뜨렸다. 2026년 5월 현재 암, 뇌졸중, 간질 등 수백 가지 질병을 진단하는 데 필수적인 MRI 장비가 가자지구에서는 한 대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에 딱 하나 있는 암 전문 병원인 ’터키-팔레스타인 우정병원‘의 소아신경과 전문의 모하메드 아부 나다의 한탄을 들어보자.

“MRI 장비의 손실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치명적인 장벽이다. 의사로서 우리는 사실상 눈이 먼 장님과 마찬가지다. 난치성 간질, 뇌염, 또는 소아종양 초기 단계를 정확하게 진단할 수 없다. 우리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도구가 (망가진 채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방에 쓸모없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https://www.972mag.com/doctors-blinded-gaza-mri-crisis/)

 

가자지구에서 가장 큰 병원인 알-시파는 2023년 11월과 2024년 3월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촬영작가 미상

병원은 더 이상 안전지대 아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슨 이유로 병원과 의료진을 공격하는 것일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평화적 생존권과 건강권을 앗아가 말살시키려는 속셈 말고 다른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공격 근거는 “하마스가 병원을 보호막 삼아 군사기지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병원 밑에 지하 터널을 파놓고 엄청난 양의 무기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주장도 편다. 의료진들 가운데 일부는 하마스와 밀착돼 있다고도 했다. 따라서 가자 병원들은 보호받아야 할 자격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이스라엘은 병원과 하마스의 밀착 관계를 증명하는 빼도 박도 못할 구체적인 물증을 내놓지 못했다. 휴먼라이츠워치(HRW)와 같은 인권단체들은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 병원 시설물들의 보호 조치를 거둘만한 어떠한 결정적 증거도 내놓지 않았다.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라고 거듭 지적해왔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병원뿐 아니라 이슬람 사원(모스크)과 학교를 하마스가 군사 목적의 시설물로 바꾸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이들 공공 시설물을 공격하곤 했다. 그에 따라 병원이나 학교, 모스크를 ’안전지대‘로 여기고 피난해 온 민간인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

병원에는 환자만 많은 게 아니었다. 전쟁 초기 이스라엘군의 공습을 피해 주민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설마 병원을 포격하겠느냐”며 병원마다 주차장이나 복도에 난민들이 꽉 들어찼다. 이를테면, 가자지구에서 가장 큰 병원인 알-시파 병원에는 한때 5~6만 명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하지만 병원은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병원이 공격을 받게 되자, 난민들은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진료 자체가 쉽지 않다. 중상을 입고 의식마저 없는 어린이를 비롯한 부상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의료진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린 그저 울면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답니다.”

1000명 가까이 의료인 희생

병원들에 대한 공격은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목숨뿐 아니라 그곳에 입원한 환자와 보호자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그뿐 아니다. 언젠가 그곳에서 치료받으면 목숨을 건질 이들의 생명줄마저 미리 끊어버리는 ‘예비 살인’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3년 10월 이후 2026년 3월까지 2년 반 동안 가자지구에서 의료시설에 대한 공격이 930건을 넘어섰다고 지적한다. 국제법상 보건의료 인력은 분쟁 중에도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야 하는 ‘의료 중립성(medical neutrality)’의 대상으로 꼽힌다. 가자지구에서는 병원 자체가 군사작전의 주요 공격 목표물 목록에 오르면서 의료 전문인력과 환자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WHO 집계에 따르면, 의료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의사, 간호사, 구급대원 등 보건 의료 인력의 누적 사망자 숫자는 993명에 이른다(2023년 10월7일~2026년 1월31일). 여기에는 가자지구의 거점 병원(대형 병원)을 지키던 이름난 전문의(정형외과 과장, 의대 학장 등)뿐만 아니라, 의료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실어 나르던 구급대원, 간호사, 조산사 등이 포함돼 있다(https://www.emro.who.int/images/stories/palestine/Sitrep_68.pdf).

위의 같은 자료에서 부상자 수는 1654명으로 기록된다. 이들은 이스라엘군의 병원 공습, 구급차 포격으로 심각한 외상을 입거나, 병원 주변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하마스대원 사이의 전투에서 날아든 유탄에 다친 의료진까지 포함한 숫자다. 이들은 총상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대체 인력이 없어 현장에서 붕대를 감고 진료를 이어가는 등 민간인들의 목숨을 구하려 애썼다.

병원 점령 자체가 전쟁범죄이지만, 이스라엘군은 점령 뒤에도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휴먼라이츠워치(HRW)는 가자지구의 주요병원 3개(가자시티의 알-시파 병원, 베이트 라히아의 카말 아드완 병원, 칸 유니스의 나세르 병원)가 점령됐을 때 현장에 있던 의료진과 환자들을 인터뷰해 이스라엘군의 전쟁범죄를 낱낱이 드러냈다(2025년 3월 20일). 그 한 대목을 보자.

[이스라엘군이 병원을 점령한 뒤 부상자와 아픈 환자들의 치료에 심각하게 간섭했다. 의사들의 약품 전달 요청을 거부하고 병원과 구급차 접근을 막았다. 그 때문에 부상자와 만성 환자, 투석 중인 어린이들이 죽었다. 이스라엘군 공습으로 다리를 잃고 목발을 써야 했던 안삼 알샤리프는 "우리는 (이스라엘군 점령) 나흘 동안 음식, 물, 약도 없이 지냈다"고 말했다. 알샤리프는 그 시기에 4명의 노년 환자가 숨을 거두는 것을 봤다.]

(https://www.hrw.org/news/2025/03/20/gaza-israeli-military-war-crimes-while-occupying-hospitals).

가자지구에서 가장 큰 병원인 알-시파는 2023년 11월과 2024년 3월 두 번에 걸쳐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은 뒤 폐허처럼 바뀌었다. 이스라엘군이 물러난 뒤 병원 마당에서 처형된 것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포함된 집단 매장지가 발견되어 충격을 안겼다. 일부 희생자들은 양손이 묶인 채 숨져 있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이스라엘 쪽의 조사나 처벌은 아직 없다. 다만 이스라엘 정치군사 지도자들의 전쟁범죄를 조사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들이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파괴된 알-시파 병원 부지에서 의료진들이 이스라엘 감옥에 갇힌 의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페르 감옥에서 고문 받아 2024년 4월에 숨진 아드난 알-부르시의 사진도 보인다(왼쪽 두 번째). ⒸYousef Zaanoun/Activestills

감옥행 의료진 520명, 고문받고 숨지기도

이스라엘군은 ‘하마스와 내통했다’ 또는 ‘하마스 협조자’란 구실을 붙여 가자지구의 의료인들을 붙잡아갔다. 이스라엘군이 병원을 습격·점령하는 과정에서 붙잡아 강제로 끌고간 이들이다. 현재 이스라엘의 여러 구금시설에 갇힌 숫자는 적어도 520명에 이른다. 대부분이 이렇다 할 기소 절차도 없이 장기 구금되어 있다. 더구나 일부 의료진은 실종상태다. 죽었는지 살아 있는지 알 수 없어 가족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감옥으로 끌려간 의사들은 그 안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가자지구에서 가장 큰 의료 시설인 알-시파 병원 정형외과 과장 아드난 알-부르시가 그러했다. 2023년 10월 전쟁이 터진 뒤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알-시파 병원의 기능이 마비되자, 그는 북부 가자의 알-아우다 병원으로 옮겨 가 환자들을 치료했다. 그해 12월 말, 이스라엘군이 알-아우다 병원을 습격했을 때 수십 명의 의료진과 함께 붙들려갔다. 구체적인 체포 사유도 듣지 못하고 ‘불법 전투원(unlawful combatant)’으로 분류된 그는 여러 수용소를 거쳐 오페르 감옥에 갇혔다(팔레스타인 저항을 옥죄기 위해 지난 20002년 만들어진 ‘불법전투원 구금법’은 이스라엘 인권침해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문제의 악법이다).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오페르 감옥은 팔레스타인 저항운동가들에게는 인권 침해로 악명 높은 수용시설이다. 그곳에 갇혔다가 풀려난 동료 의료진들의 증언에 따르면, 알-부르시는 수감 직후부터 심한 구타와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가 끝내 숨졌다. 그의 사망일은 2024년 4월19일.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부상을 입었음에도 숨지기 직전까지도 감옥 안의 다른 수감자들을 돌보려 애썼다고 한다.

알-부르시의 체포와 사망 과정은 의료진에 대한 조직적 폭력의 상징적 사건으로 꼽힌다. 이스라엘 교정국은 쉬쉬하며 숨기다가 2주가 지나서야 사망 사실을 알렸다.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국가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밝히지 않았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은 “알-부르시 박사의 사망은 이스라엘 교도소 내 고문의 증거”라며 독립적인 부검과 조사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엔 인권위 최고대표사무소(OHCHR)도 알-부르시의 사망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의료진을 겨냥한 초법적 고문 및 처형 가능성을 꼽았다. 알-부르시 의문사를 둘러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전쟁 뒤 국제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스라엘군의 마구잡이 공격이 빚은 가자 의료체계의 붕괴와 그곳 의료진이 겪는 가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한둘이 아니다. 가자지구 북부 카말 아드완 병원의 원장인 후삼 아부 사피야와 그의 아들이 겪은 비극적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2024년 10월 25일 이스라엘군이 병원을 급습했다. 그때 병원 입구에 있던 사피야 원장의 15살 아들 이브라힘은 이스라엘군이 띄운 드론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병원 마당에 아들을 묻은 사피야 원장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수술실로 돌아가 그의 손길이 필요한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다.

2024년 12월 27일 이스라엘군이 카말 아드완 병원을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엔 의료시설을 파괴하고 화재를 일으켜 병원 기능을 아예 마비시켰다. 그런 다음 사피야 원장을 비롯한 의료진 350여 명을 붙잡아 갔다. 앞의 알-부르시와 마찬가지로 '불법 전투원’이란 혐의를 걸어서였다.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감옥에 갇힌 사피야는 갈비뼈 4개가 골절되는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 밥도 제대로 주질 않아 몸무게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건강이 아주 나빠졌다고 알려진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인권침해의 중범죄를 사피야에게 저지르고 있다고 여긴다. 이탈리아 출신의 UN 팔레스타인 인권상황 특별보고관 프란체스카 알바네세는 2026년 3월 ‘명백히 자의적이며 국제법 위반’이라 비판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샤피아 석방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알-부르시와 샤피아, 이 두 사람의 경우는 드러난 사례일 뿐, 이스라엘의 인권침해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는 중이다(이스라엘 감옥 상황에 대해선 따로 곧 살펴볼 참이다).

 

2023년 10월19일 요아브 갈란트 당시 국방장관이 가자지구 장벽 인근 집결지에서 이스라엘 군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24년 11월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갈란트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나온 전범 수배자 신분이다. ⒸChaim Goldberg/Flash90

‘치유와 회복’의 장소가 ‘죽음과 학대’로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병원에서 ‘점령군이자 지배자’로서 행동했다. 군인들은 의료진들에게 거칠게 굴고 환자들에게 물과 전기 공급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막판엔 총구를 앞세워 ‘대피’라는 구실 아래 환자와 의료진을 강제로 내몰고, 병원을 파괴했다. 하마스 연루자로 몰아 의료진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해 숨지게 만들기도 했다. 가자지구 병원의 피해를 조사했던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아동권리 부국장 빌 반 에스벨트는 “이스라엘 군대가 병원을 점령하면서, 치유와 회복의 장소들이 죽음과 학대의 중심지로 바뀌었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전쟁범죄 관련자들은 모두 언젠가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가자지구의 끊임없는 폭격과 심각한 인도주의적 상황만으로도 매우 고통스러운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느껴야 할 유일한 피난처가 오히려 죽음의 덫이 되었다. 전쟁 중 병원 보호는 최우선 과제이며, 모든 당사자가 언제나 이를 존중해야 한다.”(https://www.un.org/unispal/document/pattern-of-israeli-attacks-on-gaza-31dec24/)

위에 옮긴 글은 유엔 인권위 최고대표사무소(OHCHR)가 보고서(「가자지구 병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 패턴은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2024년 12월31일)를 내면서 볼커 튀르크 유엔 인권최고대표(UN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가 했던 말이다. 보고서는 국제 인도법 및 인권법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공격으로 의료인들과 환자들이 큰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비판했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정치학 박사)

돌이켜 보면, 지난 2년 반 동안 “이스라엘이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국제기구와 인권단체의 공식 발표와 보고서는 한둘이 아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가자지구의 상황이 ‘대재앙(catastrophe)’이며 “이스라엘의 공격 목적이 인종청소(ethnic cleansing)일 수 있다”고 나무라는 등 비판적 담화를 여러 번 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초강대국 미국의 뒷심을 믿고 그런 비판들에 귀를 막고 있다는 점이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발만 동동 구를 것이 아니고, 국제평화유지군 파병이라는 물리력으로, 또는 전쟁범죄 관련 국제법으로 이스라엘을 제대로 응징하는 날은 언제쯤 올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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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 줄리 재판 증인 출석… 첫 결혼엔 진술거부

검사 신문선 "모두 거짓"… 반대신문서 양재택·조남욱과 밀접 관계 잇단 진술

김건희 '쥴리 아닌 제니' 부인, 첫 결혼 의혹엔 진술거부

양재택 사무실 개업 돕고 제자 소개, 대선 캠프 방문까지 본인이 진술

조남욱이 윤석열 결혼 주선 인정, 교생 사진엔 '국정원 제자' 거론

2026-05-21 08:36:02
 

김건희씨가 자신을 둘러싼 '쥴리' 의혹 보도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직접 나왔다. 검사 신문에서는 모든 보도를 "거짓"이라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나 피고인 측 변호인의 반대신문에서는 양재택 전 검사, 조남욱 전 삼부토건 회장과의 밀접한 관계가 김씨 진술로 잇따라 드러났다.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과 결혼하기 전 산부인과 의사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의혹을 묻자, 김씨는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답했다.

 

검사 신문에선 "모두 거짓"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재판장 한성진)는 20일 안해욱 전 대한초등학교태권도협회장과 정천수 전 열린공감TV 대표 등의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공표) 등 혐의 공판을 열었다. 이들은 2022년 대선을 앞두고 김씨가 과거 '쥴리'라는 예명으로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취지의 허위사실을 퍼뜨린 혐의로 기소됐다. 김씨는 그동안 증인 소환에 응하지 않아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받았으나, 이날 출석으로 과태료는 취소됐다. 재판부는 방청석과 피고인석에서 김씨를 볼 수 없도록 가림막을 설치했다. 신문은 재판장에 이어 검사, 변호인 순으로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검사 신문에서 김씨는 쥴리 의혹과 양재택 동거설, 결혼·이혼설, 결혼 전 불임설, 건진법사와의 관계설을 하나씩 부인했다. "쥴리라는 예명을 사용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단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라마다르네상스 호텔 나이트클럽 출입 여부에도 "전혀 없다"고 했다. 6층 연회장에는 가본 적이 없다면서도, 조남욱 회장실에는 한 번 가봤다고 인정했다. 안해욱 전 회장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면식 자체를 부인했다. 검사가 제시한 사진 여덟 장에 대해서는 모두 자신의 실제 사진이 맞다고 인정했다. 김씨는 "쥴리라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6년째 정신과 약을 먹고 있다"며 피고인들의 처벌을 원한다고 밝혔다.

 

"쥴리 아닌 제니"… 외국 이름 호칭은 인정

 

반대신문에서 김씨는 "쥴리의 줄자도 쓴 적이 없다"고 거듭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채팅방이나 미니홈피에서 쓴 별명은 제니였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나를 제니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쥴리'는 부인했지만, 외국식 이름으로 불렸다는 사실은 김씨 본인이 확인했다. 변호인이 김씨의 작은외할머니의 딸인 이씨의 녹취록을 제시하자 김씨는 그 목소리가 이씨가 맞다고 했다. 해당 녹취에는 김씨가 모임에서 본명 대신 외국 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씨의 증언이 담겨 있다.

 

첫 결혼·개명 이유엔 입 닫아

 

첫 결혼 의혹을 다룬 대목에서 김씨는 입을 닫았다. 변호인이 "윤석열과 결혼하기 전 산부인과 의사와 결혼식을 올린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답했다. 같은 취지의 질문에 두 차례 모두 같은 답이었다. 의혹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36세이던 2008년 김명신에서 김건희로 이름을 바꾼 이유를 묻는 질문에도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만 한 뒤 끝내 답하지 않았다.

 

양재택·조남욱과의 관계, 본인 진술로 확인

 

반대신문이 길어지면서 김씨가 그동안 거리를 둬 온 인물들과의 관계가 김씨 진술로 드러났다. 김씨는 양재택 전 검사가 변호사 사무실을 열 때 물품을 사다 주고 도자기를 선물했으며, 자신의 제자 한 명을 그 사무실 직원으로 소개했다고 인정했다. 양재택은 앞선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김씨가 소개한 직원이 자기 사무실에 근무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두 사람의 진술이 정면으로 어긋난다. 서로의 증언을 사실상 위증으로 모는 모양새가 됐다.

 

김씨는 자신의 어머니 최은순씨, 양재택의 모친과 함께 경남 사천의 한 단식원에서 열흘을 보냈다고도 밝혔다. 양재택과 그 부인이 2022년 대선 당시 자신의 선거 사무실을 여러 차례 찾아왔다는 진술도 나왔다. 동거설의 상대로 지목돼 온 인물이 남편 윤석열의 대선 국면까지 김씨 곁에 가까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가락동 대련 아파트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살았다고 했다. 양재택과의 동거설이 제기된 시기와 겹친다. 김씨는 2004년 아크로비스타에 입주했다고 했다. 이 집은 당시 다른 사람 명의로 보존등기가 돼 있었고, 김씨 명의로는 2006년에야 넘어왔다.

 

조남욱 전 삼부토건 회장과의 관계도 드러났다. 김씨는 "조남욱 회장이 윤석열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성사시키도록 노력해 주신 분"이라고 말했다. 윤석열과 결혼시키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가 있었다는 표현도 썼다. 호텔 식당 토스카나에 양재택, 최은순씨와 자주 드나들었고 조 회장이 세 사람을 단골로 대했다는 직원 증언에는 "찾아왔다"며 출입 사실을 인정했다. 김씨는 일부 질문에는 "약을 많이 먹어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며 답을 피했다.

 

교생 사진엔 '국정원 제자' 거론

 

김씨는 검사가 제시한 사진 가운데 1997년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교생 실습 시절 사진을 꼽았다. 이 사진은 2023년 언론에 보도됐다. 김씨는 "내가 배포한 게 아니라 내게 배운 학생이 낸 것"이라며 "그 학생이 국정원에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사진이 퍼진 경위를 설명하면서 김씨가 스스로 국가정보원을 끌어들였다. 정보기관 출신 인물이 사진 유포에 관여했다는 취지의 주장이지만, 김씨는 그 학생이 누구인지, 어떤 경위로 사진을 입수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부친 얘기를 꺼내며 "내가 뭐가 아쉬워 술 파는 곳에서 손님을 접대하겠느냐"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다만 앞선 신문에서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고 진술해, 두 진술이 맞물리지 않았다. 부친의 양평군청 근무 이력과 건설 사업 의혹을 묻는 질문에는 "태어나기 전 일이라 잘 모른다"며 비켜갔다.

 

이 사건은 윤석열 정권 출범 직후 시작된 언론 압박과 맞닿아 있다. 경찰은 2023년 쥴리 의혹 보도 관계자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넘겼고, 2024년 1월에는 안 전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됐다. 김씨는 이날 법정에서 "내가 쥴리였다면 이 자리에서 죽을 용기도 있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공표 재판의 핵심 쟁점은 보도 내용이 허위인지 여부다. 검찰은 김씨를 증인으로 세워 의혹이 허위임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김씨가 반대신문에서 양재택·조남욱과의 관계를 스스로 인정하면서, 보도의 핵심 정황이 오히려 확인되는 장면이 반복됐다. 국내 언론 상당수는 이날 '제니' 발언만 단신으로 다뤘을 뿐, 이 대목은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다음 재판은 오는 6월 23일 열린다. 증인으로는 '쥴리' 호칭을 처음 증언한 김씨의 작은외할머니의 딸 이씨가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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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넘어 한미동맹의 ‘굴레’에 대한 분노로

  • 기자명 이경렬 전 대사
  •  
  •  승인 2026.05.22 06:30
  •  
  •  댓글 0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겸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답변을 듣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겸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답변을 듣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6년 5월 20일 국무회의에서 이스라엘의 가자 구호선단 나포와 한국인 활동가 억류를 비난하면서 네타냐후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체포영장 집행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한국인 김동현과 김아현 씨가 탑승한 구호선은 각각 5월 18일과 20일 새벽 이스라엘군에 억류됐다. 이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행위를 두고 “최소한의 국제 규범이라는 게 있는데 다 어기고 있다”면서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이 대통령은 이어 네타냐후에 대한 ICC 체포 문제에 대해 “우리도 판단을 해 보자”고 말했다.

 

ICC는 2024년 11월 네타냐후와 국방장관 요아브 갈란트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혐의는 가자 전쟁과 관련한 전쟁범죄, 특히 “전쟁 수단으로서의 기아 사용”, 그리고 반인도 범죄인 살인·박해·기타 비인도적 행위 등이다. 물론 유죄 판결이 아니라 체포영장 단계다. ICC가 “합리적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재판 출석을 확보하기 위해 영장을 낸 것이다. 여러 나라들이 네타냐후가 자국에 들어오면 체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ICC를 설립한 로마규정은 ICC가 체포·인도 요청을 보낼 경우 당사국이 국내 절차에 따라 이에 응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한국을 포함한 125개국이 당사국이다. ICC 자체 경찰력이 없으므로 실제 집행은 각국 사법·경찰 당국이 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총리가 명시적으로 체포 의사를 밝힌 나라는 네덜란드, 캐나다, 아일랜드, 슬로베니아, 말레이시아, 콜롬비아, 헝가리 등이다. 행정수반이 직접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과 리투아니아도 체포영장 집행 의사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반대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유보적이다.

5월 21일 조선일보는 “대통령이 외국 수반 체포 언급, 외교 언사로 부적절”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이 대통령의 언사를 비판했다. 신문은 “국가 정상이 상대국 정상에게 체포 영장 집행을 거론한 것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신문은 이어 미국이 ICC의 네타냐후 체포 결정에 “터무니없다”고 반발했다면서 “미국과 동맹국인 한국이 이스라엘과 단교라도 불사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언어가 동맹 미국에 대한 도전이라는 뜻이렷다.

국가원수가 공개 석상에서 타국 현직 총리의 체포 가능성을 거론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거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는 현직 총리라 해서 전쟁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자를 예우할 가치는 없다는 점이다. 여러 서방 국가 정상들도 네타냐후와 이스라엘의 반인류적 범죄 행위를 거칠게 다루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 문제를 “미국이 반대하는데 한국 대통령이 왜 나서느냐”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은 국제형사사법의 보편성보다 한미동맹 질서를 우선시하는 숭미의 프레임일 뿐이다. 동맹이니까 범죄도 감싸야한다고 말할 셈인가.

이스라엘은 ‘악의 축’이다. 자위와 국가의 생존에는 한계가 있고 최소한의 절제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것은 방어가 아니라 응징의 중독이며, 생존이 아니라 타인의 생존권까지 짓밟아도 된다는 위험한 특권의식이다. 박해의 기억을 가진 국가가 그 기억을 절제의 윤리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지배와 파괴의 면허로 바꾸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재의 가해자로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침묵이나 예우가 아니라 가장 단호한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지난 4월 이 대통령의 첫 이스라엘 비판 발언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 규모로 보나 민주주의로 보나 세계 일류의 수준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국제정치의 중대한 갈림길에 서면 우리는 늘 미국의 어법을 번역하거나 모호한 중간지대로 숨어버리기 일쑤였다. 자주적인 외교는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불편한 상대에게도 보편적 기준을 들이밀며, 동맹국이라 해서 모든 사안에 무조건 입을 닫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네타냐후의 체포 검토 역시 당연한 일이다. 로마규정의 당사국으로서 우리는 응당 ICC의 요청에 협력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이스라엘의 악행을 “너무 많이 인내했다”고 직격했다. 사실 더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에서 그치지 않는 용기다.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침략전쟁은 트럼프와 네타냐후의 공동보조 아래 진행되는 만행이다. 그러니 전쟁범죄와 반인도범죄 나아가 침략전쟁의 책임은 둘 다에게 지워져야 하고, ICC의 체포영장 역시 네타냐후와 함께 트럼프를 겨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훨씬 더 오래 인내해 왔고 훨씬 더 크게 분개해야할 일이 따로 있다. 한마디로 한미동맹의 ‘굴레’가 그것이다. 지난 70년 넘게 뒤집어쓰고 있는 굴레다. 군사 작전권도 갖지 못하고, 우리 땅인 DMZ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하며, 서해상에서 우리도 모르게 무단으로 훈련하면서 우리의 안위를 위태롭게 하는 미군을 통제하지도 못하는 상황을 우리는 언제까지 인내할 것이며 언제까지 분개해하지 않을 것인가.

5월 17일 이 대통령은 트럼프와 전화 통화를 갖고 한미 공동 팩트시트를 가리켜 “한미동맹을 새로운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한 역사적 합의”라고 평가했다. 고충이 서린 외교적 언사임을 감안한다 해도 주변 참모들의 숭미적 언사를 대통령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음은 아쉬운 대목이 다. 숭미 참모들은 한국인 억류의 부당함을 강조하는 이 대통령의 지적에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해 상황의 불가피성을 호소한다. 또 그들은 베트남전 당시 주한미군의 동원 사례를 들어 지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옹호하고 있다. 굴레를 국익으로 포장하는 숭미의식이다.

팩트시트에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안에는 “대만 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와 “일방적인 현상 변경 반대”라고 표현되어 있다. 물론 이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실제로 발휘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시나리오, 즉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전력 전개를 염두에 둔 것이다. 주한미군은 미국이 추진하는 ‘반중국 연합’의 역내 핵심 축이 되는 것이고, 이에 따라 한국은 중국의 타격 목표가 되는 것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이 대통령은 작년 8월 말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으로 향하는 특별기 안에서 미군의 유연화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래놓고 팩트시트를 향해 한미동맹의 업그레이드라고 평가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다. 우리가 지난 70년 이상을 인내해 온 한미동맹의 굴레에 대한 분노를 잊는 일이기도 하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허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전작권을 당장 회수해야 하는 이유와 똑 같다. 그것이 우리가 비로소 독립주권국이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는 한미동맹의 굴레에 대한 분노가 더욱 시급하다. 자국민 보호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힘차게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진짜 대한민국과 진짜 주권국으로 우뚝 서는 길로 나아가기 위한 위대한 분노를 조용히 표출하는 것은 더욱 절실한 일이다. 러시아 시인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1877년에 발표한 <정직한 이들의 죽음에 붙여>라는 시에 이렇게 읊었다. “슬픔도 없고 분노도 없이 사는 자, 그는 자기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끝.

직업 외교관으로 일했다. 1985년에 외무부에 처음 들어간 이후 약 15년 이상을 해외에서 지냈다.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워싱턴,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 바르샤바, 루안다(앙골라)가 그의 활동 공간이었다. 1962년에 태어난 저자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곧바로 외무부에 입부했다. 자연히 외무부 내에서의 경력도 경제외교 분야에 집중되었다.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의 과정에 관여했다. 아울러 한미 원자력협정을 협상했고,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 업무를 총괄했으며, 2014년부터 2년간 앙골라에서 대사로 일했다. 이후 2018년 6월 외무부를 퇴직하고 국제기구인 세계스마트시티기구(WeGO)의 사무총장으로 행복도시를 창조하는 도시외교를 추진했다. 2021년 6월 말로 지난 36년간의 공직을 모두 마친 저자는 마침내 자유인이 되어 지금은 시, 소설, 에세이, 칼럼, 인류문명 비평서 등을 쓰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판타스틱 폴란드: 아흔아홉 개 이야기 더하기 하나』(2023. 12, 지만지)의 저자이고, 이창천이라는 필명으로 『명품외교의 길: 좌파 외교관이 보는 한국외교』(2025. 3, 진인진), 『브라보 한미동맹: 숭미동맹의 그늘 벗어나기』(2025. 8, 진인진), 『하늘과 사람과 촛불과 시네마: 청춘 너머의 독서와 영화 읽기』(2026. 1, 진인진)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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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호황이 만든 초과세수, 이렇게 쓰자... 4가지 원칙

[소셜 코리아] 새로운 재정 원칙으로 미래투자와 재분배 위한 제도적 통로를 만들자

26.05.21 16:53최종 업데이트 26.05.21 16:53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당대의 지성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김용범 정책실장이 13일 호텔현대 바이 라한 울산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 주재 K-조선 미래비전 간담회에 참석해 있다.연합뉴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최근 페이스북에 '차원이 다른 나라: AI 시대 한국의 장기 전략'이라는 글을 올렸다. AI 인프라 공급망에서 한국이 차지한 전략적 위치, 반도체 호황이 가져올 구조적 초과세수, 그리고 그 재원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 제기였다.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지만, 단순한 해프닝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한국 경제가 곧 마주하게 될 중요한 질문을 앞당겨 드러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외신과 국내 언론은 이를 기업의 초과이윤을 정부가 국민에게 나눠주려는 구상으로 해석했고, "김용범 발언 때문에 코스피가 급락했다"는 인과관계를 덧씌웠다. 그러나 이는 오비이락에 가깝다. 5월 11일 한국 증시가 장중 크게 흔들린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동아시아 주요 증시 역시 중동 불확실성 확대, 차익실현 압력, 단기 과열 경계감이 겹치며 유사한 변동성을 보였다. 이후 대통령실은 블룸버그가 '초과세수'를 '초과이익'으로 해석했다며 공식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더욱 중대한 문제는, 이러한 혼선으로 인해 정작 다루어져야 할 핵심 쟁점이 충분히 부각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기업의 사적 이윤을 정부가 환수하자는 논의와, 법에 따라 거둬들인 추가세수를 국가가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시장경제의 원칙과 기업지배구조의 문제이고, 후자는 재정제도와 사회계약의 문제다. 두 문제를 섞으면 시장에는 불필요한 공포를 주고, 공론장에는 이념 논쟁만 남는다.

2026년 5월 11일 KOSPI·니케이·가권·STI 오전 9~11시 추이. 현지 시각을 한국 시각으로 전환·비교한 뒤 Yahoo Finance를 이용해서 그렸다. ⓒ우석진 제공

반도체 사이클 한복판 속 역대급 초과세수가 온다

한국경제는 지금 반도체 사이클의 한복판에 있다. 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하면서 고대역폭메모리, D램, 낸드 수요가 동시에 살아나고 있다. 그 결과 SK하이닉스는 2025년 연결 기준 영업이익 47조 2063억원의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고, 삼성전자의 2025년 영업이익도 43조 5300억원 수준이었다. 두 회사의 합산 영업이익만 약 90조 7000억 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향후 전망이다. 노무라증권 전망을 인용한 일부 보도에서는 양사의 합산 영업이익이 2026년 432조 원, 2027년 589조 원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전했다. 확정치는 아니다. 실제 세수는 세액공제, 이월결손금, 연결납세, 과세표준 조정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감세 조치로 법인세 부담이 줄어든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시나리오별로 보면, 2026년 합산 영업이익을 370조 원으로 가정하고 한계세율 25%를 적용하면 추가 법인세만 약 70조 원이다. 500조원 시나리오라면 추가세수는 약 102조 원에 달한다. 성과급 증가에 따른 소득세, 소비 증가에 따른 부가가치세까지 고려하면 추가세수는 역대급 규모가 될 가능성이 크다.

당기순이익 대비 총부담세액(2017년~2024년). 국세통계연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관측치로 회귀선을 추정한 후, 2024년 실적치와 비교했다.우석진 제공

'초과이윤'과 '초과세수'는 다른 문제다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는 기업의 초과이윤을 주주, 노동자, 협력업체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다른 하나는 그 결과 국가에 들어오는 추가세수를 정부가 어떻게 쓸 것인가의 문제다. 두 문제는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문제는 아니다.

기업의 초과이윤은 기업 내부와 시장질서의 문제다. 주주는 배당과 기업가치 상승을, 노동자는 임금·성과급·고용 안정을, 협력업체는 공정한 거래 조건을 요구할 수 있다. 반도체 산업은 소재·부품·장비·설계·물류·전력·연구인력이 결합된 생태계 산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부가 기업 이윤을 임의로 가져다 나눠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정부의 역할은 초과이윤을 직접 몰수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질서, 하도급 거래의 투명성, 노동자의 협상력, 장기 투자 유인을 제도적으로 설계하는 데 있다.

반면, 법에 따라 정당하게 걷힌 세금은 더 이상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재원이다. 그때부터 질문은 달라진다. "기업의 돈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뜻밖에 확보한 재정 여력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된다.

소극적 대응은 역사적 기회를 잃는다... 1997년 교훈을 보라

바로 여기에서 현행 재정제도의 한계가 드러난다. 국가재정법에 따르면 세계잉여금은 교부세와 교부금 정산 후, 30% 이상을 공적자금상환기금에 출연하고, 남은 금액의 30% 이상은 채무상환에 써야 한다. 이 과정을 거친 뒤에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에 사용할 수 있다. 추경 편성 요건도 전쟁·대규모 재해·경기침체 등으로 한정한다.

이 제도는 평상시에는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장치이긴 하다. 고령화, 연금지출, 건강보험 비용이 빠르게 늘어날 한국에서 채무상환 원칙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도체 슈퍼사이클처럼 막대한 초과세수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달라진다. 결국 거대한 초과세수가 생겨도 정부의 선택지는 좁다. 빚을 갚거나, 다음 해로 넘기거나, 추경을 통해 임시 사업을 편성하는 방식이 반복된다. AI와 반도체가 만들어낸 초과세수를 단순히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만 쓰고 끝낸다면, 한국은 역사적 기회를 회계 처리로 소진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미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빠르게 회복했지만, 그 과실은 고르게 배분되지 않았다. 구조조정·비정규직 확대·부동산 가격 상승은 소득과 자산의 격차를 크게 벌렸고, 우리가 직면한 불평등 문제의 상당 부분은 그때 시작됐다.

지금 우리는 그때와 정반대 방향의 국면에 서 있다. 외환위기가 '결핍의 충격'이었다면,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초과의 충격'이다. 그러나 분배의 통로가 없다는 점에서는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이 일부 기업·주주·고숙련 노동자에게만 집중되고, 초과세수마저 채무상환으로만 사라진다면 10년, 20년 뒤에 우리는 "그때 잘했어야 했다" 등의 말을 반복할지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부채상환이 아니라 '미래투자'와 '소득재분배'를 위한 제도적 채널을 미리 확보하는 일이다.

네 가지 재정 원칙 제안... 미래성장과 재분배가 핵심

코스피가 8000 포인트를 돌파한 지난 15일 서울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딜러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연합뉴스

초과세수가 생길 때마다 부채를 상환할지, 추경을 편성할지, 임시로 나눠줄지를 두고 정치적 논쟁을 반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정 규모 이상의 초과세수가 발생하면 그 일부가 자동적으로 미래세대와 취약계층, 산업 전환의 피해자, 청년과 고령층 등을 위한 계정으로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이제 국가재정법 개정을 논의해야 한다. 채무상환 원칙은 유지해야 한다. 다만 특정 산업 호황으로 대규모 초과세수가 발생할 때 그 일부를 중장기 국가전략 투자와 소득재분배에 배분할 수 있는 법적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초과세수의 일정 부분은 기존처럼 채무상환에 쓴다. 재정건전성은 포기할 수 없는 원칙이다. 둘째, 일정 규모를 넘는 경기순환적·산업순환적 초과세수는 별도의 중장기 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그 재원은 잠재성장률을 높이고 소득·자산 격차를 완화하는 분야에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넷째, 모든 지출은 성과평가, 일몰제, 국회 통제, 사후 공개를 전제로 한다.

'미래성장 및 사회전환 계정'과 같은 별도 장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AI 인프라, 반도체 전력망, 연구개발 인력, 직업전환 훈련, 청년 자산형성, 고령화 대응 기술, 돌봄 생산성 향상 같은 분야가 후보다. 잘 설계하면 미래의 세입 기반을 키우고, 산업구조 전환 비용을 줄이며, 청년과 고령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높이는 투자가 될 수 있다.

'초과세수 배당'이라는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현금을 나눠주는 방식은 정치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최선의 재정정책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눠주느냐, 안 나눠주느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으로, 어떤 제도 안에서, 어떤 성과를 목표로 사용할 것인가다.

반도체 사이클은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계할 기회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중동 사태 대응 등을 위한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공동취재사진

이번 논란은 오보에 가까운 시장 소동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 소동이 던진 질문은 유효하다. 초과이윤은 기업 생태계 안에서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초과세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 사용처 안에는 분명한 재분배의 통로가 포함되어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면, 성장의 과실이 제때 나눠지지 않으면 그 비용은 한 세대 뒤 사회 전체가 치르게 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든 재정 여력은 일회성 행운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계약을 설계할 기회다. 초과세수를 채무상환과 추경 재원으로만 처리하는 관성을 넘어, 미래성장과 재분배를 위한 제도적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AI와 반도체 시대의 국가재정이 해야 할 일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교수본인

필자 소개 : 우석진은 현재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로 있습니다. 명지대 빅데이터연구소 소장, 한국경제학회 이사, 한국재정학회 이사,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방문교수, 한국조세연구원 전문연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초과세수 #초과이윤 #반도체사이클 #김용범 #국가재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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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는 어떻게 '광주' 지우고 민주주의 무너뜨리는가

정승호 시민기자

jeong.seungho@hoasen.edu.vn

베트남 호아센대학교 언어심리학부 전임강사,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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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 이데올로기가 노리는 교활한 승리

국가 폭력의 공포, 제도와 언어에 새겨야

우원식 국회의장이 8일 국회에서 열린 5월 임시국회 제2차 본회의 산회를 선포한 뒤 의장석에서 내려가고 있다. 앞서 국민의힘은 대한민국헌법 개정안과 다른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우 의장은 이날 본회의에 대한민국헌법 개정안 등을 상정하지 않았다. 2026.5.8 연합뉴스

5월 7일,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새기고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는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올랐다. 원내 6개 정당 의원 181명과 무소속 의원 6명, 총 187명이 서명한 안건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한 명도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함은 열어보지도 못한 채 불성립 처리됐다. 이튿날 우원식 국회의장은 재표결을 시도하려 했으나,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신청 앞에서 개헌안 상정을 포기하고 절차 중단을 선언했다. 산회를 선포한 그는 의장석을 내려오며 눈물을 훔쳤다. 6·3 지방선거와 동시에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었던 39년 만의 개헌은 그렇게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46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각, 스타벅스코리아는 ‘탱크데이’ 이벤트를 시작했다. ‘5/18’이라는 날짜와 함께 ‘탱크데이’라는 문구가 홍보물에 올랐고, ‘책상에 탁!’이라는 카피가 붙었다. 전두환 신군부의 탱크가 광주를 짓밟던 기억과, 박종철 열사를 고문하고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둘러댄 그 언어가 텀블러 광고에 부활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뉴스처럼 보인다. 하나는 국회의 정치적 교착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의 마케팅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건의 밑바닥에는 같은 감각이 흐른다. 광주의 공포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태도. 그 공포를 가벼운 장난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에 제도적 제동을 거는 일마저 피하는 정치다.

스타벅스 사태를 두고 ‘실수냐 의도냐’라는 논쟁이 오갔다. 물론 고의가 있었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러나 고의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5·18 기념일에 ‘탱크’와 ‘5/18’과 ‘책상에 탁’이 한 홍보물 안에서 만났는데도 왜 아무도 멈추지 않았는가. 왜 그 조합이 위험하다는 감각이 작동하지 않았는가. 이 사건은 한 사람의 악의보다 넓은 무감각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몰라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안다. 알고도 한다. ‘전땅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탁’이라는 소리가 어떤 죽음을 건드리는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 앎이 웃음의 재료가 된다. 금기인 줄 알기 때문에 더 웃기다고 여긴다. 슬로베니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말한 냉소적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 척하면서 즐기고, 즐기면서 책임을 피한다.

“그냥 드립인데 왜 진지해?”라는 말은 이 냉소의 방패다. 농담이라는 형식은 발화자에게 두 개의 출구를 준다. 하나는 “진지하게 말한 게 아니다”라는 부인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과민반응하는 것”이라는 책임 전가다. 그러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조롱한 사람은 가벼워지고, 기억하자는 사람은 무거워진다. 피해자의 고통을 말하는 쪽이 오히려 “유머를 모르는 사람”으로 밀려난다.

 

문제는 이 냉소가 더 이상 변방의 게시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베식 5·18 밈이 폐쇄적 하위문화 안에서만 돌고 돈다면 파급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 언어가 전국 매장을 가진 대기업의 공식 프로모션을 통과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하위문화의 은어가 자본의 공적 언어로 세탁된다. 탱크는 텀블러의 이름이 되고, 고문의 언어는 광고 카피가 된다. 죽음의 잔해가 마케팅의 장식으로 옮겨진다.

이번 사태가 실무자의 돌발 행동인지, 조직문화 안에서 ‘말해도 되는 것’의 경계가 이미 무너진 결과인지는 조사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나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왜 이 문구는 기획되고, 승인되고, 공개될 때까지 아무 제동도 받지 않았는가. 어떤 조직에서는 탱크와 고문의 언어가 위험신호가 아니라 마케팅 소재로 보이는가. 말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끝난 뒤에도 살아남는다. 피해자의 기억은 시장의 진열대 위에 다시 눕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냉소적 감각은 기업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타벅스 사과문이 나온 직후, 국민의힘 충북도당은 SNS에 “내일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출근해야지”라는 글을 올렸다. 김선민 국민의힘 거제시장 후보 측 계정은 “가서 샌드위치를 먹겠다”는 댓글을 달았다.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일부러 스타벅스 방문을 과시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의도한 게 아니다”, “담당자가 한 것이다”, “5·18이나 박종철 열사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는 해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 해명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공당의 책임은 의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정치에서 말은 행위다. 특히 공식 계정의 말은 정당이 시민에게 보내는 공적 행위다. 문제는 누가 정말 스타벅스에 갔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왜 그 순간, 그 문장을 공당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다고 여겼는가이다.

 

국민의힘 충북도당 스레드 갈무리

“내일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출근해야지”라는 문장은 짧다. 그러나 정당의 언어에서 짧음은 결코 무죄가 아니다. 이 문장은 커피 취향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5·18 기념일의 ‘탱크데이’가 왜 문제인지 묻는 시민들 앞에서, 공당의 계정이 내놓은 정치적 눈짓이다. 그것은 논증하지 않는다. 반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신호를 보낸다. 우리는 그 분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고.

정치는 말로 한다. 그래서 정치인의 말, 정당의 말은 가볍게 흘릴 수 없다. 아렌트가 두려워한 것도 거대한 악의 음모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어떤 세계를 부수는지 생각하지 않는 무능, 공적 현실을 사적 농담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생각 없음이었다. 5·18을 직접 부정하지 않아도, 5·18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의 고통을 조롱의 배경으로 삼는 순간 정치는 공통 세계를 갉아먹는다.

공당의 SNS는 낙서장이 아니다. 그것은 정당이 시민에게 내미는 가장 가벼운 얼굴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에서 가장 가벼운 얼굴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공식 논평보다 더 솔직하게, 그 정당이 무엇을 우습게 여기고 무엇 앞에서 멈추지 않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진보당 김재연 대표,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 사회민주당 한창민 대표가 18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열린 제46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있다. 2026.5.18 청와대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국민의힘 지도부가 5·18 기념식에서 보인 태도도 이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장동혁 대표는 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참석을 앞두고 이미 SNS에 민주당이 5·18을 권력 확장의 도구로 삼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올려두었다. 기념식 직후에도 대통령의 기념사를 겨냥한 비판을 이어갔다. 몸은 기념식장에 있었지만, 언어는 광주를 다시 정쟁의 무대로 되돌리고 있었다. 송언석 원내대표는 기념식 불참과 관련해 “더러워서 안 간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보도로 논란에 휩싸였고, 국민의힘은 “서러워서”였다고 반박했다. 표현을 둘러싼 공방은 남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핵심은 분명하다.

광주는 그들에게 함께 감당해야 할 헌정의 기억이 아니라, 불편하거나 억울한 정치 현장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기념식 참석은 면죄부가 아니다. 광주에 몸을 두었다고 해서 광주를 존중한 것이 자동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5·18을 기리는 자리에 서면서도 곧장 그 기억을 “상대 당의 도구”로 환원한다면, 추모는 의례가 아니라 알리바이가 된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식에는 참석하고, 광주의 항의를 들으면서도 그것을 민주주의의 고통이 아니라 진영의 소음으로 여기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정당이 불과 며칠 전 5·18 정신의 헌법 수록을 표결 불참으로 무산시킨 바로 그 정당이라는 사실이다. 제도적 차원에서 5·18의 기억을 헌법에 새기는 일을 거부한 정치세력이, 문화적 차원에서 5·18을 조롱하는 밈에 동조하는 듯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기념식의 공간에서도 그 기억을 정쟁의 언어로 되돌렸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로만 보기 어렵다. 커뮤니티에서 기업으로, 기업에서 정당으로, 정당에서 국회 본회의장으로, 다시 기념식장으로 이어지는 냉소의 경로가 보인다.

보수정당은 원래 국가를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헌법을 존중한다고 말한다. 법질서를 지키자고 말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시민에게 총을 겨눈 사건 앞에서는 누구보다 먼저 멈춰 서야 한다. 5·18은 보수가 회피할 기억이 아니라, 국가권력이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헌정의 교과서여야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헌법 전문에 5·18을 새기는 일에는 불참했고, 소속 도당과 후보 측 계정은 스타벅스 논란 직후 조롱으로 읽힐 수 있는 말을 남겼으며, 지도부는 기념식의 자리에서도 광주를 정쟁의 언어로 밀어 넣었다. 이것은 호남 민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헌정 보수의 자기배반이다. 국가와 헌법을 말하는 정당이 국가폭력의 기억 앞에서 멈추지 못한다면, 그 보수는 무엇을 보존하겠다는 것인가.

미국의 정치이론가 주디스 슈클라는 자유주의의 출발점을 자유, 평등, 정의 같은 높은 이상에서 찾지 않았다. 슈클라는 “잔혹함을 최고의 악으로 놓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하며 ‘공포의 자유주의’를 언급했는데, 국가가 시민에게 가할 수 있는 물리적·정신적 공포를 제도적으로 차단하는 데 자유주의 정치의 가장 낮고 단단한 토대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렌즈로 보면, 5·18의 본질은 “누가 이념적으로 옳았는가”가 아니다. “국가가 시민을 탱크로 짓밟을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자유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질문이다.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미완이다. 현행 헌법은 5·18을 지나 6월항쟁으로 이어진 민주주의의 피 묻은 경로를 전문에 온전히 적지 못했다. 이번 개헌안은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였다.

5·18 정신을 헌법에 명시적으로 수록하려 한 개헌안은 국가폭력의 기억을 헌정 질서 안에 묶어두는 작업이다.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강화하려 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12·3 내란의 기억이 채 마르지 않은 시점에서, 이 개헌안은 군부독재의 불법 계엄과 헌정 유린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방어벽이었다.

국민의힘은 이 방어벽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5·18 기념식에 참석해 “5·18 정신”을 말했다. 이것은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넘어선다. 잔혹함의 기억을 제도화하는 것은 거부하면서, 그 기억을 수사적으로 전유하는 일이다. 광주를 헌법에는 새기지 않으면서 기념사에는 호명하는 정치. 광주에 참석하면서도 광주를 정쟁의 도구로 되돌리는 정치. 바로 그 틈에서 냉소는 자란다.

냉소적 이데올로기는 가해의 방법이고, 공포의 삭제는 그 가해가 도달하는 목적지다. “알면서 즐기는” 사람들은 국가폭력의 공포를 유희로 전환한다. 그렇게 해서 그 공포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민주주의적 합의의 토대를 깎아낸다. 탱크와 고문을 밈으로 소비하는 감각은 피해자가 느낀 공포를 공적 기억에서 용해시키고, 가해의 언어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잔혹함의 기억이 사라지면,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도 함께 사라진다. 슈클라가 두려워한 것은 바로 그 감각의 마비였다.

스타벅스의 ‘탱크데이’는 공포의 기억을 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고, 개헌 무산은 공포의 기억을 헌법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의 기념식 태도는 그 배제와 용해가 의례의 공간에서도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법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은 같다. 잔혹함을 경계하는 감각이 제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시에 해체되는 곳이다.

 

스타벅스 텀블러와 머그컵을 망치로 망가뜨린 모습 소셜미디어 갈무리 연합뉴스

민주주의는 아름다운 이상으로만 세워지지 않는다. 잔혹함에 대한 공포를 잊지 않는 것으로 유지된다. 텀블러를 부수는 분노는 정당하다. 불매운동도 의미 있다. 그러나 분노와 불매를 넘어, 이 냉소의 구조 자체를 해부하고 이름 붙이는 작업이 필요하다.

“진지충”이라는 낙인, “선거용 개헌”이라는 프레임, “그냥 실수”라는 해명, “권력 확장의 도구”라는 역공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잔혹함의 기억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것. 냉소적 이데올로기의 가장 교활한 승리는, 바로 이 사소화를 통해 비판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냥 드립인데 왜 진지해?”라는 말에 웃어넘기는 순간, 우리는 그 냉소에 가장 값싼 승리를 헌납한다.

5월의 광주가 묻는 질문은 46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국가는 시민을 짓밟을 권리를 가지는가. 그 질문을 헌법에 새기는 일을 거부하고, 그 질문의 무게를 텀블러 광고와 SNS 농담과 기념식장의 정쟁 언어로 희석시키는 일이 같은 시기에 벌어지는 나라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분명하다. 냉소에 맞서는 것은 비장한 표정을 짓는 일이 아니다. 공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제도와 언어와 문화 안에 단단히 박아 넣는 것이다.

슈클라가 옳다면, 민주주의는 잔혹함을 이긴 체제가 아니라 잔혹함을 잊지 않으려는 체제다. 그러므로 5·18을 농담으로 만드는 냉소 앞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광주의 명예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가 다시 시민을 적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감각, 그 감각을 헌법과 제도와 언어 속에 묶어두는 일이다. 그 기억이 사소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먼저 웃음 속에서 무너진다.

정승호 시민기자 jeong.seungho@hoasen.edu.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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