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건국 이전부터 국가의 이름보다 국가의 원리를 먼저 세웠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발전시켜 온 민주공화주의를 대한민국의 헌정원리로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 앞에 놓인 과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29년 세계대공황은 자유시장에 대한 낙관을 근본부터 흔들었습니다. 대량실업과 빈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고, 사회적 절망은 파시즘과 나치즘, 군국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성장하는 토양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국가를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국가는 시장을 방관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국민의 삶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인가. 이 질문에 가장 큰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한 사람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였습니다.
그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을 통해 시장의 자율성만으로는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으며, 국가는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고용정책을 통해 국민의 삶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케인스의 주장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는 시대적 질문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국가는 단지 질서를 유지하는 기관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비극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산업혁명과 대공황이 던졌던 질문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민주공화주의 앞에 남겼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산업문명이 만들어 낸 과학기술이 인간을 얼마나 대규모로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국가가 국민을 억압할 수 있었고, 합법적인 국가권력이 인간을 조직적으로 말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류는 목격했습니다. 아우슈비츠는 단지 하나의 강제수용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근대 문명 전 체가 스스로에게 던진 가장 처절한 질문이었습니다. 국민주권만으로 인간의 존엄은 끝까지 지켜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전의 어떤 질문보다도 근본적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의 역사는 민주공화주의를 부정한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국민주권이라는 첫 번째 역사적 확장만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시대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가 하나씩 확인해 간 역사였습니다.
산업혁명은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노동운동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제국주의는 국민주권의 보편성을 시험했습니다. 세계대공황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다시 묻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민주공화주의를 향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결국 시대가 던진 수많은 질문은 하나의 질문으로 모였습니다.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민주공화주의는 이미 이 질문에 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이제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민주공화주의는 두 번째 역사적 확장을 맞이합니다. 첫 번째 확장이 국가의 주인을 국민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확장은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존엄으로 확장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존엄은 민주공화주의 밖에서 새롭게 덧붙여진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식민지배, 세계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경험 속에서 국민주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시대적 성찰이 축적되면서 민주공화주의가 스스로를 더욱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받아들인 새로운 시대의 원리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성찰 위에서 전후 세계는 인간의 존엄을 현대 헌정질서와 국제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리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이제 국가의 주인을 국민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의 존재 이유를 인간의 존엄에서 찾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 인간존엄은 어떻게 민주공화주의의 원리가 되었는가
―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진 격동의 역사는 민주공화주의에 수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산업혁명은 국가의 역할을 다시 물었습니다. 제국주의는 국민주권의 보편성을 다시 물었습니다. 세계대공황은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다시 물었습니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습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국민주권은 근대 민주공화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까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는 국민의 이름으로도 폭정을 저지를 수 있었고, 민주적 절차를 거쳐 탄생한 권력 역시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민주공화주의가 직면한 두 번째 과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주권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문제를 어떻게 민주공화주의 안에서 해결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이 질문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산업은 전례 없는 생산력을 만들어 냈습니다. 국가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정교한 행정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문명은 아우슈비츠도 만들어 냈습니다. 인류는 처음으로 근대 문명 자체를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민주공화주의 역시 이러한 역사적 성찰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주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리까지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존엄은 민주공화주의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시대의 원리로 떠오르게 됩니다. 시민의 책임이 민주공화정을 지킨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죄의 문제』(1946)에서 나치즘을 히틀러 개인의 범죄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주공화정이 무너지는 이유는 독재자의 등장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전체가 책임의식을 잃을 때라고 보았습니다. 민주공화정은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 것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권력을 감시하고 공공선을 지키려는 시민의 책임과 윤리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민주공화정은 살아 있는 정치질서가 됩니다. 인간은 결코 권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1903~1969)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는 『계몽의 변증법』(1947)에서 근대 문명의 역설을 분석했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은 문명을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인간을 효율과 생산성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도구적 합리성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가 성장과 효율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순간, 인간은 다시 권력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바로 이러한 위험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는 정치질서입니다. 인간은 권리를 가질 권리를 가진 존재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전체주의의 기원』(1951)에서 전체주의를 단순한 독재체제가 아니라 인간을 정치공동체 밖으로 추방하는 체제로 분석했습니다. 아렌트가 말한 '권리를 가질 권리(the right to have rights)'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등장합니다. 국가가 인정하기 때문에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국민은 정치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국민 이전에 인간이 존재합니다. 국가의 목적은 국민을 조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존엄은 국제질서의 원리가 되다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1959)은 『점령된 유럽에서의 추축국 지배』(1944)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했습니다.
특정 집단을 계획적으로 말살하는 행위는 어느 한 국가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가 책임져야 할 범죄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1948년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으로 이어졌습니다. 철학과 국제법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국민주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했으며, 인간의 존엄은 어느 국가도 침해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가 되어야 했습니다.
민주공화주의는 인간존엄을 받아들이다
이러한 성찰은 전후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1945년 국제연합이 창설되었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존엄을 국제질서의 가장 높은 원리로 선언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이 한 문장은 민주공화주의의 두 번째 역사적 확장을 상징합니다. 1776년 미국 독립혁명이 국민주권을 선언했다면, 1789년 프랑스혁명은 그것을 보편적 정치원리로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존엄을 인류 공동체의 보편원리로 선언했습니다. 민주공화주의 역시 이러한 역사적 전환을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더욱 성숙시켰습니다. 국민이 권력의 주인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국가는 국민의 의사를 실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새로운 원리가 민주공화주의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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