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9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8/05/18
    [수업] 자유, 평등, 공평함...
    곰탱이
  2. 2008/05/17
    이거 맞는지 안 맞는지 잘 모르겠군...
    곰탱이
  3. 2008/05/12
    차마고도의 순례자들...
    곰탱이
  4. 2008/05/09
    치킨과의 3연패의 원인... (2)
    곰탱이
  5. 2008/05/09
    음모론...
    곰탱이
  6. 2008/05/09
    아 놔~~, 우짜란 말이고! (3)
    곰탱이
  7. 2008/05/06
    2mb! 니가 나쁜 어른이여, 알어?! (4)
    곰탱이
  8. 2008/05/05
    어린이날... (6)
    곰탱이
  9. 2008/05/02
    갈매기야, 갈매기야... (2)
    곰탱이
  10. 2008/05/01
    오늘 노동절인데... (5)
    곰탱이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1.

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해석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의 상관관계를 공부하는 중인데, 이러한 상관관계를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밝혀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잘 될라나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정리한 글을 이 해가 가기 전에 써 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욕심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

 

#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

 

 

- Zillah R. Eisenstein -

 

 

@ 1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

 

 

** 들어가며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남자 좌파들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혼동하면서 여성으로 됨과 페미니스트로 됨 사이의 정치적 구별을 잘 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차이 또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자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부터 나타난 권력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성적 구조 사이의 관계가 서로 강제하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말을 선택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의존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분석의 본질에 해당한다. (남성 지배권으로서의)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 관계는 억압 구조가 바뀌려고 할 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단일적인 맑스주의 분석이나 고립된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넘어서게 된다.

 

권력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취급된다. 권력은 경제적 계급 지위 또는 성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적 남성/여성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대부분 가부장제에 초점을 맞춘다.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사회적 재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사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임금 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사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공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족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경제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데올로기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물질적 조건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성적인 노동 분업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의 상황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측면에 다 속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된다. 여성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분법이 현실을 이기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변증법적 사고로 접근하고자 한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분석을 종합하는 것은 일관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을 정식화하는 첫 단계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이론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이 두 가지 이론을 서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이론이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이러한 문제의 근원으로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답이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테제로 사용하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가부장제적 분석을 안티테제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이 둘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종합으로 이끌어낼 것이다.

 

 

테제 : 계급으로서의 여성

 

 

1. 맑스 : 혁명적 존재론과 여성 해방

 

 

여성 억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계급 분석을 내놓는다. 둘째, 맑스주의 분석은 역사적이며 변증법적인 분석 방법을 제공한다. (방법으로서) 변증법은 거의 대체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연구하는 맑스주의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현존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나타나는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맑스주의 분석이 모든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은 계급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분석을 사용할 것이지만, 또한 그의 분석 방법을 끌어내서 그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몇몇 권력관계 차원에 적용시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맑스의 방법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이해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물질적 관계들로 확장시켜 사용하고자 한다.

 

이런 관계들은 맑스의 착취와 소외 이론을 통해 해명된다. 여성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착취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기 때문에, 나는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나는 맑스의 소외 이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변증법적이고 혁명적인 존재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소외에 관한 그의 논의가 노동력을 가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전혀 다르게 가정주부와 같은 비임금 가사노동자에게도 적용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그의 분석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착취 이론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계급과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외 이론 속에 나타난 변증법적 방법을 여성의 특별한 혁명적 잠재 능력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소외 이론이 착취 이론에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착취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유적 삶”으로 넘기는 일은 인간 존재의 혁명적 능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유적 존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간 잠재성을 창조적 노동, 사회적 의식,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의 과정에 도달시키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들을 공산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내면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조는 그 존재의 본질과 현존을 규정한다. 맑스에게서 현실은 따라서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존재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질을 향한 운동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인간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본질이다. “유적 존재”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본질로서만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자본주의 관계들 속에서 착취 당하는 자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잠재적인 혁명적 능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외 이론에서 착취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착취 당하는 사람으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의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 때문에, 바로 착취 당하는 노동자는 잠재적인 혁명적 존재가 된다.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적 능력은 계급 구조 또는 착취 관계 내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러한 잠재적 능력의 실현은, 그러나 계급 별로 차이가 난다.

 

자신의 소외 이론에 따라 맑스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규명해 간다. 자본주의에 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상품생산의 전 과정을 언급하였다. 이 과정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고찰하면서, 맑스는 자신의 권력 이론을 발전시켰다. 권력 또는 권력 없음은 한 개인의 계급 위치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억압은 자본주의 조직의 결과물이며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생산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윤 속에 내재해 있는 잉여 노동은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과 필요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로부터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생산적 노동은 가변 자본 부분(임금의 형태로 소비되는 자본 부분)과 교환되는 임금노동인데, 이러한 가변 자본 부분(또는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서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 그러한 임금노동만이 자본을 생산하는 생산일 뿐이다.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 구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양분된다. 이 둘 사이의 분리와 갈등의 기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잉여가치가 자신의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뽑히면서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하는 억압이다.

 

자본주의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러한 비난은 사회적인 인간 현존재의 혁명적 존재론으로 포괄된다. 혁명적 존재론은 사회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변증법이 각 개인들 내에 있음을 단정한다. 소외 당하고 착취 당하는 계급 현존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런 계급 현존재에 관한 이론 내의 혁명적 존재론 둘 다 맑스주의 분석으로 하여금 계급의식 이론을 추가하면서도 그 이론을 넘어서 나아가는 페미니즘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데 비판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여성으로 확장되었을 때, 이 혁명적 존재론은 자유의 가능성이 착취와 억압과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이 현재의 그녀 모습보다 더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오늘날 그녀의 모습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고, 이는 내일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능력 또는 잠재성의 객관적 한계를 결정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소외된 노동자에 대해서는 참이다. 어떤 노동자가 그의/그녀의(자신의-옮긴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그는 여전히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본질과 현존 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혁명적 여성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저변에 깔려 있다. 맑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계급적 위치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 존재론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것(계급적 위치-옮긴이)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여성이 그녀의 성과 관련하여 규정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가부장적 관계들은 그녀의 의식을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혁명적 잠재력을 함축하게 된다. 사람들의 현실적 조건들(현존)과 가능성들(본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혁명적 잠재력을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가부장제적 관계들이 어떻게 인간 본질의 발전을 막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적 삶이라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지시하고 있다. 여성의 혁명적 의식의 잠재력을 규정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맑스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맑스는 결코 성적인 사회 위계 질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훨씬 더 복잡해진 일련의 관계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유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유적 삶의 현실화가 계급 체계 하나만을 해체시킨다고 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성에 관한 그의 저작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유적 삶과 남녀 모두의 사회적 경험의 자본주의적 소외 형태들 사이의 긴장들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에는 가족과 여성의 착취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들이 있다. 맑스는 가족 관계를 단순한 화폐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가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도구로 여기고 있다. 현대 가족, 즉 부르주아 가족의 기초는 무엇인가? 자본, 즉 사적 이익이다. ……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르주아의 허풍, 부모와 자식 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부르주의 허풍은 모두 근대 산업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정나미 떨어지는 것으로 변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가족 관계는 산산이 부서져서 아이들은 단순한 상업 물품으로 그리고 노동도구로 변하게 된다.

 

 

사적 소유의 관계는 교환양식이 된다. 이러한 부르주아 우위의 확장은 사회적 관계를 가족 내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아주 진정한 사회적 관계로만 보이는 가족은 부차적인 욕구가 된다. 사유재산과 사적 소유라는 이해관계는 여성-남성 관계에 침투해 들어간다.

 

「유대인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적 관계 자체, 즉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 등은 상업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구매되기도 하고 판매되기도 한다.” “가진다”라는 성향은 유적 관계를 소유와 지배의 관계로 탈바꿈시키고, 결혼을 매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래서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끝으로,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확실히 배타적인 사적 소유 형태의 하나인) 결혼을 여성이 공동체의 공동 소유가 되는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립시키는 동물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 여성이 (11쪽)결혼으로부터 보편적인 매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부의 전체 세계(즉, 남성이 지배하는 자산의 전체 세계)는 사적 소유주와의 배타적 결혼 관계로부터 공동체와의 보편적 매춘 상태로 나아간다.

 

 

맑스는 여성의 문제를 단순한 재생산 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녀들의 지위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선언』에서 그는 “현재 생산 체계의 폐지는 이 체계로부터 나타난 여성들의 공동체, 즉 공적이고 사적인 매춘 모두를 포함하는 매춘의 공동체 폐지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 맑스의 저작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 자체 특별한 의미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도구로서 나타난다. 여성의 억압은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급 사회에서의 억압이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반과 구별되지 않는 희생자, 즉 유해한 계급(프롤레타리아트-옮긴이)의 노동 분업의 단순한 또 다른 희생자로 인지된다. 성별 역할, 목적, 활동 등등과 마찬가지로 성별 노동 분업은 맑스에게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는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또는 가족 내에서 노동 분업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모성 역할에 거의 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맑스는 여성과 남성의 착취를 똑같은 근원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의 억압이 동일한 구조적 용어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였다. 혁명적 의식은 착취에 대한 계급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유적 삶을 살아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삶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 성별 노동 분업에 의해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역할은 끊임없이 소외와 고립을 피할 길 없는 일을 여성에게 미리 부과할 것이다. 본질과 현존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에서의 성별 노동 분업이 비창조적이고 고립되는 노동을 특히 여성들이 담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착취의 해체는 그 자체 현실적인 유적 삶, 즉 여성의 창조적 노동, 사회 공동체, 그리고 비판적 의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내일은?

1. 개강이구나...

근데 아무 생각이 없구나...

불교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이거나 무념무상(無念無想)이랑은

쫌 거리가 먼 것 같고...

대체 뭘까...

이 마음의 상태는...

도대체 넌 누구냐!

 

2. 그리고 한 달 이상 입었던 반바지며, 샌들과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구나...

반바지야 안녕!

샌들아 안녕!

무엇인가를 보내고 무엇인가를 맞이한다는 건

아주 소소한 일상인데도,

뭔가 짠한 느낌이 드는구나...

 

3. 어제로 여름방학 과학사 스터디가 끝났다...

마지막까지 참여한 사람은 나까지 3명...

마지막 기념이라고 소주 한잔 하렸더니,

다들 바쁘다고 밥만 먹고 갔다...

밥 안 먹고 간다는 걸 억지로 우겨서

밥 같이 먹고 보냈다...

뭔가 허전한 느낌...

 

4. 아...

그러고 보니 생활도서관도 오늘 내일 부로 못 나오겠구나...

그리고 중앙 도서관으로 옮겨가야 하는구나.

 

5. 오늘 울 엄니께서 시집오실 때 십자수를 놓았던 작품(?!)을

핸펀으로 찍어와서 소개하려고 했는데,

핸펀과 컴을 연결해 주는 선이 없어서 올리지 못하고 있다.

울 엄니 솜씨 하나는 정말 끝내주더라...

너무 예쁘더라...

고건 내 보물로 아무도 못 가져가게 해야지^^...

울 엄니의 시집올 당시의 솜씨를 오늘 처음 보았다...

시집 오시기 전에는 온 동네 제문(고등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조침문 같은)을 다 쓰셨다더라...

제일 큰 외숙모께서 마음이 헛헛하시면 그 제문을 꺼내 읽으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더라...

그 제문도 찾아와서 내 보물로 만들어야 하는데...

울 엄니께서 요즘 태어나셨더라면 아마도 작가가 되셨으리라... 

나를 낳고서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고 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당신이 못 이루신 꿈을 나를 통해 이루려고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근데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울 엄니의 꿈은 물 건너 간 것이리라... 

참으로 불효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재주가 없는 걸 어쩌랴...^^... 

어무이! 용서하시소! ^^ 

 

6. 내 정신아! 

너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을 용서할(?) 터이니, 

그리고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터이니 

제발 돌아오거라... 

 

** 누구든지 나의 정신을 봤다고 제보하거나, 

찾아 주는 분께 후사하겠습니다!!! 

 

휴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2...

곰탱이님의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 에 관련된 글.

 

 

3.

 

우리가 생산해야 할 진지의 거점은 현실적으로 일단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겠다.

첫째, 생산 장소로서의 지역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초까지 대학은 모든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였으며, 모든 운동 인자들을 생산하던 생산기지 역할을 하였다. 현재도 미약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활동가들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도 그러한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있고 또한 살려야 한다. 총연맹이나 산별 연맹 등의 노조 중심적인 체계는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노동계급 생산 기지 역할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체계는 자본과 직접적으로 격돌하여 싸우는 전장이기 때문이다.

노조 중심의 노동운동이 행정 단위 구역으로 거의 조직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설령 조직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장소, 즉 예를 들면 노동회관 같은 자치의 장소가 확보되어 있지 못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은 대체로 행정 구역 단위로 분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행정구역상 가까운 지역의 대학으로 아이들을 보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대학에서 같은 지역에 사는 아이들이 서로 모여서 대학생 언니, 형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의 자치조직을 꾸려 가면서 생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를 들어 쌍용차 아이들이 우울증을 겪거나 학교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하는 것 등에 의해서 고통과 아픔을 잘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계급으로서의 부모님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또한 이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단사의 노조를 통해서 조직되기도 하지만 지역을 통해 서로 다른 노동현장의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노동자들과, 대학생들 사이의 협의와 연대를 통해 모든 문제를 개인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풀어가는 지혜를 배우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부모들도 새로운 노동력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고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역운동을 지역의 노조 중심으로 풀어나가려는 움직임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둘째,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대학 학생 운동 방향은 대체로 노동운동과 직접 결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있을 때 노동자 계급투쟁에 대한 소양을 넓히고, 노동자 집회에 참가하며, 노동자들의 투쟁 일정에 따라 학생운동의 사업 방향을 정하고 집행한다. 그런 과정을 다 거치고 난 후 졸업하게 되면 노조의 상근자, 또는 활동가로 진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학생 운동 활동가들의 기본적인 진로 경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생운동을 하겠다는 학생도 소수이지만, 졸업이 다가오면 대다수는 이 운동과정에서 이탈하여 개인의 생존을 위해 취업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현상은 학생운동을 고립화시키는 것이며, 대학생 대중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대학생 대중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도록 한다.

대학을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생산력의 생산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대학생 도우미(대학학생운동 활동가)들을 일단 봉사 동아리 형태로 활동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과 대학생 도우미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동아리 형태로 확보한다. 그 공간 속에서 아이들의 교육과 학습, 취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 펼쳐 나간다. 이후에 각 단과대 학생회와 총학생회 안에 대회 협력부를 만들고 그 대외 협력부가 총괄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아울러 아이들과 관련된 여러 층위의 계급운동, 그리고 진보 운동과 연관한 사업을 공공연맹의 각 지부 또는 각 노조와 연대하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좀더 힘 있는 활동을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에 종속된 하위 운동이 아니라 지역의 코뮌 건설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대학은 대학생들과 새로운 세대의 연대와 소통, 그리고 이러한 연대와 소통을 바탕으로 하는 각 코뮌 단위들의 연대와 소통의 광장 역할을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코뮌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나이별, 학습별, 취미별의 여러 자치 활동 등으로 코뮌을 형성할 수 있으며, 어느 한 코뮌에만 속하지 않고 여러 코뮌에 속하게 된다. 이 코뮌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간섭받거나 억압 받을 수 없다. 대학생 언니, 형 들의 코뮌은 노동계급 아이들 코뮌에 대한 대화 상대자이자 도우미 역할을 한다. 서로가 각자의 코뮌을 구성하고 운영해 나가되, 각각의 코뮌이 어떤 방식으로 자유로이 결합하고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각자의 의견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단지 대학생과 아이들의 코뮌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해야 하는 아이들의 부모와 지역 노조 등이 모인 대회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렇게 모이고 가르는 광장의 관계를 통해서 노동계급 아이들은 분업적인 인간이 아니라 총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차이를 이해하는 비판적 인간으로 자신을 매순간 새롭게 생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대학은 일상적으로 대학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강사와 교수들 그리고 노동계급 활동가들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하여 교육 프로그램의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에 대해서 서로 논의하고 협의해 나갈 수 있는 연대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연대의 장을 통해 노동계급 아이들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통일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존 노동계급(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자신의 생산력을 새롭게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을 새롭게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4. 

 

새로운 생산력의 증대는 노동자 계급인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 개인으로서 각 노동자의 단순한 임금 인상으로는 절대로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 증대시킬 수 없다. 그러한 임금 인상분은 자본에 적합한 인간을 재생산하는 비용으로 소비되어서 결국은 자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계급의 임금투쟁은 새로운 생산력 생산을 위한 진지 건설을 위한 것이어야 하겠다. 그럴 때 노동자는 고립적으로 투쟁하다 패배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이 아프지 않을 것이며, ‘노동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앙겔부처님의 [쌍용 자동차 아이들이 아프다] 에 관련된 글.

얼마 전에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이들이 많이 아프단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이번 파업 때뿐이겠는가!

이전에 많은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한 노동자의 아이들이 비슷하게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에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직 많이 아픈 아이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며, 파업을 하였던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또는 이미 당했던 아이들은 노동자인 부모의 파업을 기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력의 증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고 아주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갈등과 모순이 눈에 띄게 드러날 때,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택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파업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하더라도 자본계급은 거의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업투쟁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불안해 하는 것은 자본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옥쇄투쟁을 벌이고는 그 투쟁의 보람과 성과도 없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형태로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자신의 도구인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그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싸움을 결말짓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인 우리는 늘 패배한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자본계급을 비난해 보지만 대체로 허탈해 한다. 이것이 우리가 늘 보아온 싸움의 과정과 결말이다.

우리의 노동계급 투쟁은 늘 패배한다. 물론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이것도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도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에서는 늘 밀리면서 패배를 하게 된다. 어떤 우리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우리는 늘 패배할 것이다, 아니 패배한다. 우리 노동계급은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현실적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먼저 도대체 무엇이 패배이고 승리의 의미인지를 따져봄으로써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순수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아주 드물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막는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유지를 하는 경우를 승리라고 대부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도 아주 쉽지 않은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전술적 의미에서 승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계급투쟁 전선에서 보자면 정규직 쟁취 투쟁은 하나의 회전(전투)에 불과하다.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체할 수 있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최종 목적이 현실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 노동계급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종 목적의 현실화라는 승리와 연관되지 않는, 연관될 수 없는, 또는 연관시키지 못하는 전술적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은 바로 전술적 승리를 유지하여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투쟁력)을 끊임없이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진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노동조합, 즉 개별자본과 대항하는 노동조합 또는 그 연맹은 진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수행하는 돌격대 또는 선봉대이기 때문이다. 이 돌격대 또는 선봉대가 계급투쟁 전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전방위적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고 보급 조달하며 교체할 수 있는 진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지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외부를 건설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진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함으로써 자본을 전방위적으로 뒤흔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기존의 생산력은 자본에 그 수를 이미 읽히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투수가 타자들에게 볼 배합을 읽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에게 그 수를 쉽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새로운 투수가 타자를 요리할 수 있듯이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새로운 생산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생산력은 곧 인간 자신”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새로운 인간 생산을 통한 생산력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계급이다. 맑스가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 것이 있다. 맑스가 ‘잃어버릴 것’을 착취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듯이, 현재의 노동자, 특히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재를 소비하는 ‘타인’, 즉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와 관계가 ‘잃어버릴’ 것으로 남는다.

새로운 인간은 바로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여성주의적 노동자 계급이다.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착취 관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착취구조와 관계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착취구조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 물질적 토대는 한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한 개별 가족이 고립적으로 생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생활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데, 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형태에 의하여 대체로 여성들에게 강요된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들어가는 재생산 생산노동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매 비용이지, 그 소비재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노동 비용은 그 임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던 여성들은 임금노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이제 여성은 이중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강요된 임금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재생산과 자식들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거의 투입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착취의 구조와 관계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차출해 낼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생활 방식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인간만이 재생산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를 파탄시키는 행위이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가족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돼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며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개별적 생활 방식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와 억압 구조와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 전반의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내부에 자본의 외부인 노동자 계급의 코뮌을 건설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착취의 관계와 구조를 깨뜨려 나가기 위해서, 이 새로운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 비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과학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판’은 끊임없는 상호소통과 협력‧연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각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인 ‘코뮌’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 있는 자본의 외부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소통, 협력과 연대 과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물적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형성을 위해 대자본 투쟁의 기초인 임금‧단체협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인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은 그들 스스로가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그 생산을 도와야 한다. 이 생산은 ‘자기 비판’ 능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 스스로가 상호소통하며 협력과 연대를 할 수 있는 코뮌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러한 비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이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대중화와 교육 목표는 ‘자본의 공교육’ 체제 아래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 체계’(이는 자본의 공교육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이른바 ‘사교육’을 지양하고 해체하는 체계이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중화와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의 싹에 관한 예로 영화 <우리학교>와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를 들겠다. 우리학교는 조총련계 조선인 학교의 아이들과 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는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고아원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칙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특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이 학교는 일본 공교육 체계 밖에 있는 조선인 공교육 체계로서의 학교이다)라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코뮌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그 학교를 통해 지역 조선인들의 코뮌과 그 코뮌과의 연대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은 기성세대 노동자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세대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맑스가 “교육하는 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토대가 노동자 계급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난 별로 느낌 없다...

그가 오늘 가셨단다...

근데 별로 감흥이 없다...

사람이, 그것도 전직 대통령씩이나 한 사람이 죽었다는데

별 감흥이 없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잘 가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후배들이 조직 사건으로 엮여 달려갔고,

그가 재임하고 있을 때에

천하의 악법 중 하나인 비정규직 법이 통과되었다.

그 때문에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가 짐작이라도 했을까...

돌아가실 때 노동자의 삶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을까...

 

뭐 돌아가신 양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하고 싶지 않다.

다만 잘 가시라는 말밖엔...

 

민주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말자...

그러면서 추모를 해야 한다느니 하는 말도 하지 말자...

 

그저 편히 가시라는 말밖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공황상태...

계절학기 끝난 다음부터 거의 머리가 공황상태에 이르고 있다.

정말 시쳇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냥 멍한 상태...

맨날 술이나 생각나는...

이러다가 정말 뭔일 내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하여간 정신이 돌아와야 책을 읽던, 글을 쓰던 뭔가 비전을 가지고

뭘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혹시 이런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

지금은 머리가 백지 상태라,

예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 같다...ㅠ...

 

제발 정신이 빨리 돌아오라고 광고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근데 어떻게 광고를 내지?!

 

ㅠ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10

@ 11장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

- 시간 논쟁 -

 

 

“이 장의 논지는, 고용주와 노동자 간의 시간을 둘러싼 다툼은 시간을 둘러싼 다른 사회적 분쟁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그 관계는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또 그래서 이 문제는 단지 노동생활의 질만이 아니라 피고용인이냐 여부를 떠나 모든 시민의 일반적 삶의 질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271쪽)

 

“이 책 전반에 걸쳐 주장한 것을 다시 한번 반복하겠다. 경제사는 점차적인 상품화의 역사로 볼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화폐경제 밖에서 단순한 사용이나 교환을 위해 하던 활동들이 돈벌이를 위해 하는 활동으로 천천히 변화했다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무보수 가내 활동(예컨대 빨래)으로 시작한 어떤 활동은 서비스 활동(세탁업)의 기반이 되고 이는 다시 기술 진보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제조업(세탁기와 건조기, 가루비누 또는 섬유유연제 제조업)의 기반이 된다.” (271쪽)

 

 

“점점 더 많은 ‘상품’을 창출하려는 불굴의 추진력은 그래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소비 노동’ 창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비스 노동’의 성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272쪽)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일들을 하려면 시간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 이 ‘시간’은 무보수 시간에서 보상을 받는 시간으로 바뀌거나 그 반대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는 이 시간의 성격이 바뀌지 않지만, 필요한 기술과 작업 과정의 변화가 이 시간에 얽혀 있는 개인의 자율성 정도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온다. 그 개인의 지위가 임금 노동자이건 무보수 소비 노동자건 마찬가지다.” (272쪽)

 

“상품화 과정은 가게나 전시 판매장에서 살 수 있는 물건들의 생산에 한정되는 게 아니다. 이런 물건들이 계속 새롭게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과정은 서비스 업계에까지 확대되고 전통적으로 ‘공공재’라고 여기던 분야를 포함한 다른 경제 영역으로도 확산된다. 서로 연관된 몇 가지 과정이 지금 이런 현상을 촉발하고 있다.” (272쪽)

 

“이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기술 덕분에 가능해진 시스템이 그 전에는 표준화와 단순 노동화를 거부했던 관료 영역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의사결정을 할 때 개인의 전문적 판단을 활용하는 관행이, 몇 가지 표준적인 규칙 곧 예컨대 은행 대출 적합성, 병원 초지의 우선순위, 대학교 직원 선발 같은 판단을 위한 규칙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인텔리전트’ 시스템에 밀리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런 결정에 관여하는 노동이 규격화되는 순간, 결과를 수량화하고 기능을 별도 기관으로 이양하고 외부 기관에 넘기거나 경쟁 입찰에 부치는 게 가능해진다.” (272~273쪽)

 

“두 번째 관련 요소는 기술의 확연한 융합 현상 때문에 많은 직무의 성격이 점점 일반적인 게 되고 작업과정도 따라서 일반화하며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몇몇 표준 공급업자가 전 세계시장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꼭 지적해야 할 것은, ‘기성’ 소프트웨어의 구성 방식이 점점 더 업무 절차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고 예컨대 소규모 기업들에게는 사업 관리, 회계 또는 데이터베이스의 구조에 표준방식을 적용하도록 강제하는 현상이다. …… 조직들이 서로 맞바꿔도 될 정도로 유사한 업무 처리 절차를 갖추게 되면, 이런 처리 절차는 과거처럼 내부의 ‘고정 비용’이나 ‘본사 업무’로 보지 않고 외부에 용역을 주거나 ‘내부 용역을 주거나’ 또는 아예 수익 사업으로 외부 기관에 판매할 수 있는 별도의 기능으로 보는 게 훨씬 쉬워진다.” (273쪽)

 

“세 번째 요소는 서비스의 제공이 날로 통신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현상은 몇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결과인데, 통신 및 컴퓨터 기술의 가격 하락과 빠른 확산, 시자으이 세계화, 24시간 문화의 확산이 이런 요소들이다. 24시간 문화의 확산은 자기 확신적 형태를 특징으로 한다. 이것으로 인해, 서비스업 노동자는 소비자 처지가 되는 순간엔 ‘정상적인’ 시간이 아닌 때에 다른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잦아지고, 이는 다시 이런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노동자가 더 늘어야 할 필요성을 야기하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미 전통적인 시간의 경계는 상당 부분 허물어졌다. 통신을 매개로 한 서비스 제공의 확산은 콜 센터 유행을 불러왔고, 공공부분을 포함한 전체 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서비스에 콜 센터 모델을 적용하는 일이 늘게 했다.” (273~274쪽)

 

“네 번째 요소는 사유화, 자유화 또는 병원 청소부터 가정 관리까지, 우편배달부터 세무까지를 망라하는 공공 서비스 영역의 경쟁 도입이다.

서비스 자체는 공영이라 하더라도 민간 서비스와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종종 ‘목표’ 달성 요구사항과 연관되는) 절차, 비용의 엄밀한 감시와 ‘비효율’ 방지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274쪽)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을 외부화하는 건 새로운 전략이 아니다. 1950년대에 셀프서비스 개념이 상점에 도입됐고 이는 슈퍼마켓의 등장을 촉발했다. 1960년대에는 이 개념이 금융 분야에 도입됐는데 처음에는 고객들에게 출금전표를 직접 쓰도록 유도하는 편리한 방식으로 시작해 마지막에는 현금 자동 입출금기의 개발과 함께 은행 창구 직원의 임금노동을 거의 대부분 은행 고객의 무보수 노동으로 대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때 이후, 종종 대기 시간을 줄임으로써 이용자의 불편을 없애준다는 명분과 함께 셀프서비스 원칙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도입됐다.” (275~276쪽)

 

“첫 단계에는 이런 외부화가 권한을 부여 받았다고 느끼는 소비자들에게 종종 환영 받았다. 기차표를 사고 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오래 줄서서 기다리고 자동차에 휘발유를 넣는 것과 채소 무게를 달고 가격표를 붙이는 걸 오래 기다려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직접 일을 처리하려면 익숙지 않은 장치들과 씨름해야 함에도 직접 하는 걸 선호한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발생한다. 사람이 도와주는 게 아예 없어지고 각 개인이 홀로 서서 휘발유를 넣어야 할 때 말이다. 그런데 기계가 어떤 식으로든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어떤 사람이 기계를 처리할 능력이 없을 때 (예컨대 사람이 앞을 잘 못 보거나 외국에 갔을 때) 또는 어떤 이가 필요한 것이 표준화된 메뉴를 선택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때 고객은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소비자의 필요만 충족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 (대가도 받지 못하는) 몇 시간이 허비된다.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없어지면 공급자는 눈앞에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 기계가 제대로 공급되도록 확실히 처리할 동기가 없게 된다. 그럼 고객들은 다시 한 번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이번에는 사람의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계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다르다.” (276~277쪽)

 

“진화와 인터넷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느 서비스가 날로 늘어나고 사람을 직접 대면해 처리하는 건 제한되거나 추가 비용을 내야 하거나 아예 완전히 없어져가는 이 세상에서 소외 문제는 더 없이 분명하게 대두된다. 이 소외는, 기반시설, 하드웨어 또는 소프트웨어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것이고, 언어 능력이 떨어지거나 글을 못 읽거나 언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사회적 기술이 결여된 이들에게 닥쳐 로는 것이며, 시력이나 청력, 지력이나 손재주가 심각하게 훼손된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소외이다.” (278~279쪽)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좀더 일반적인 수준의 문제도 있다. 서비스 제공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거래 시간 최소화 압력은 생산라인식 대처를 낳고 양적 목표를 강조한다. 서비스 제공 기관의 이익은, 모든 직원이 언제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도록 만드는 데 달려 있다. 이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는 직원 가운데 일부는 상황이 느슨한 때는 놀고 있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쁜 시간에는 줄서서 기다리는 걸 피할 수 없게 되고, 이럴 때 기다리는 과정에서 허비되는 시간은 노동자의 시간이 아니라 고객의 시간이다. 이 과정은 노동자에겐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것이고 고객에게는 짜증이 밀려오는 것이다.” (279쪽)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양적 차원과 질적 차원에서의 시간이다. 양적인 면에는 노동자가 ‘소비한’ 시간의 양, 고객이 기다리고 질문에 답하느라 ‘소비한’ 시간과 비교해 자신의 말에 상대가 귀기울여주는 형태로 ‘돌려받은’ 시간 등이 포함된다. 질적인 면에서는, 노동자나 고객이 발휘할 수 있는 자율성의 정도에 주목해야 한다. 또 서비스 노동의 테일러주의화(컨베이어벨트 작업화)가 노동의 외부화와 결합되면서 소비 과정조차 같은 작업으로 바뀌어 가는 정도에도 주목해야 한다.” (281쪽)

 

“이에 대한 경험적 연구는 지금까지 거의 수행되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의 시민이 자신들의 ‘여가’ 시간 가운데 상품화한 서비스의 소비에 들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이 소비 과정이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 가운데 전가된 부분을 떠안는 것과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지, 테일러주의화가 무보수 소비 노동과정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또는 이 모든 게 어떤 비율로 늘어나고 있는지 등등은 여전히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추정대로 이것이 실제적인 것이라면, 원격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서비스의 범위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거리를 확대시켜 주는, 표면적으로는 해방의 기능을 하는 전보통신기술이 실제로는 일상생활의 질 하락을 초래할 위험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281쪽)

 

“이런 진전 상황은 몇 가지 주요 질문을 유발한다. 이 질문들은 한편으로는 미래의 경험적 연구 조사의 틀 개발을 위한 것인 동시에 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다. 날로 상품화하는 경제에서 인간의 작용을 이해해는 데 적용할 ‘개인적 자율과 선택’의 모델은 무엇인가? ‘노동’과 ‘여가’의 경계, ‘생산’과 ‘소비’의 경계, 그리고 ‘서비스 공급’과 ‘서비스 이용’의 경계가 날로 유동적이 되는 걸 어떻게 개념화해야 하는가? 시민들이 한편으로는 노동자 처지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자 처지에서 자신에 대한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앞 다투는 상황에서, 어떤 형태의 사회조직을 갖추면 그들이 집단적 이익을 표현하는 게 가능해지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힘을 얻을 수도 있게 될까? 고용과 소비 관계가 날로 지리적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이뤄지고, 가끔식은 국경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어떤 대의구조, 협상구조, 규제구조가 가능할까?” (281~282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9

@ 9장 물질세계 @

- 무게 없는 경제의 신화 -

 

 

 

@ 10장 싸이버타리아트의 형성 @

- 진짜 세상의 가상 노동 -

 

 

“이 글은, 자본주의가 상품화와 축적의 상호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잉여가치를 빼낼 새로운 상품을 탐욕스럽게 계속 찾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왕성한 확장의 연료가 될 새로운 시장을 찾는다. 새 상품은 그전에는 교환을 위해서나 선의로 돈 받지 않고 하던 활동들을 화폐경제 속으로 끌어들이거나 기존 상품들을 정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간의 활동과 필요 곧 생산과 소비는 이 과정의 양 끝에 있다.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동력은, 전 세계를 완전히 산업화하는 것이다. 곧 한편으로 모든 사람이 상품의 생산이나 유통 그리고 자본 축적과정에 일정하게 기여하도록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런 상품의 구매에 날로 더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다.” (230쪽)

 

 

“이 자리가 계급에 관한 논쟁을 더 자세히 개관할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갈 것은, 사무직 노동자를 어디에 위치 지을지에 관한 혼란 정도는 계급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논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과연 계급을 직업에 따라 규정할지 (마셜 등이 지적했듯이 이는 생산의 기술적 관계에 따른 범주와 상응하는 것이다) 아니면 생산의 사회 관계를 따를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 또는 사회적 분업 또는 상대적 소득 또는 신분제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베버가 말하는 ‘신분 집단’)에 따를지, 그것도 아니면 대부분의 공식통계에서 분류하는 것처럼 일관된 개념적 기반이 결여된 경험적으로 형성된 계층에 따를지에 대한 논의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234~235쪽)

-->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을 <자본을 전제로 하는 임노동자>로 그 테두리를 만든다면, 노동자 계급의 개념 범주는 자본에 의해 정의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항상 즉자적 수준, 곧 그때그때마다의 자본의 악행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분노 표출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될 위험이 아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로서는 이 시대 좌파 남성 지식인들이 이후 보여 준 정치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것이 이런 식의 설명이다.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노동계급의 특징을 낭만화하고 하나의 특정한 전형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태도, 몇몇 남성 육체 노동자(광부, 자동차 제조 노동자, 트럭 운전자, 부두 노동자)에 대한 거의 물신숭배적 집착, 자신들의 노동계급 출신 선조를 경쟁적이면서도 집착적으로 내세우는 것, 여성주의는 중산계급적이며 ‘진짜’ 노동계급 남성을 소외시킨다는 주장 등 그들의 태도를 다른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240쪽)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고 전투적인 행동을 벌이는 데 분명히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에 가장 부합할 것 같은 내용일 것이다. 사용자 쪽에 설 경우 저급 사무 노동은 승진의 계단을 성공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일자리라고 그들이 인식한다면, 열심히 일하고 젊잖게 굴고 아부를 하는 게 승진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느낄 것이다. 반면 예컨대 경영진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거나, 남성만 또는 백인만 또는 특정 국가 시민만 또는 특정 신분만 승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느낀다면, 임금을 높일 최선의 방법은 동료 노동자들과 공통의 명분을 만드는 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남녀 성별과 인종이 계급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한다는 것을 확인한다.

새로운 싸이버라이트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스스로를 그런 계층으로 인식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266~26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경기도 지방견찰청장의 어이없는 말

행인님의 [경기지방경찰청장의 법 질서] 에 관련된 글.

 

과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말을 잃게 만들어 버렸다...

육두문자가 입밖으로까지 나왔다...

이런 XXX!!!

 

http://tvnews.media.daum.net/cp/YTN/popup/view.html?cateid=100000&newsid=20090807151505574&p=ytni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싸이버타리아트 8

@ 8장 집단적 꿈의 쇠락 @

- 여성과 기술에 관한 연구 20년 -

 

 

“여성주의가 무언가를 이뤘다면 그건 분명 연구 의제의 핵심에 주체적 자아를 위치 지은 것이다. 한편으로 여성주의는 사회학적 연구의 전통적인 대상 곧 빈민층‧여성‧어린이‧노인 등등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며 연구자는 그들의 세계관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또 다른 한편으로 여성주의는, 제3자적 객관성이라는 실증주의적 이상이 실현 가능하다는 생각에 맞서 연구자의 주체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동시에 연구자의 성병‧인종‧계급이 그의 연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154~155쪽)

 

 

“당시 내가 알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여성 해방의 전제조건으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가 경제적 독립과 가사노동의 사회화였다. 경제적 독립은 초점을 임금노동에 두게 만들었고, 가사노동 사회화는 초점을 무보수 노동에 두게 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많은 맑스주의적 여성주의 문건의 도움을 받아서 (그 가운데서도 진 가드너가 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사적인 무보수 가사노동과 화폐경제의 관계를 놓고 많은 시간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162쪽)

 

 

“내가 브레이버먼의 비숙련화 개념을 이용해 가내노동의 숙련기술 개념 변화를 분석하려고 시도한 논문을 썼을 때,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의 미세공학 워킹그룹 내 남성들의 반응은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관심 범위 안에서 가사업무의 자동화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좋은 일’이었으며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 없었다. 그것은 생산의 영역이 아니라 ‘소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논의에는 그 어떤 관련성도 없었다.” (167쪽)

 

 

“당시 우리가 만들었던 문건들은 보통 이런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주된 내용은 ‘이중의 업무’ 곧 임금노동과 무보수 가사노동의 결합이라는 부담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업무 곧 노도 업무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별로 거론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 업무가 훨씬 힘들면서도 다른 두 가지 업무에 비해 보상도 적었다. 최아의 상황은, (어디고 참석할 집회가 없어서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이가 대부분인) 입 사납고 말만 많은 남성들 무리 속에서 환풍도 잘 안 되는 담배연기 자욱한 회의실에서 녹초가 될 때까지 일하고는 지저분한 집으로 돌아가 보면 냉장고는 텅 비어 있고 가게는 이미 모두 문을 닫은 상화이며, 우파들로부터는 투사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좌파들한테는 반동적이라는 소리나 들으며 결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비난만 당하는 그런 상황이다. 그 와중에 눈앞에서 많은 관계가 깨어지는 걸 봐야 한다. 1970년대가 그렇게 흘러가면서 행복감에 젖는 승리의 순간은 점점 더 드물어졌다.” (169쪽)

 

 

“우리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우리가 익힌 것이 암시라는 바를 세밀히 따져 다른 데 적용하려고 폭넓은 이론적 및 정치적 문제와 씨름했다. 예컨대, 나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관계가 주부와 재생산수단(가정 그 자체와 살림살이용 기술)의 관계와 유사한 점을 찾아냄으로써 맑스의 소외 이론을 가사노동에 적용하려 시도한 글을 쓰던 때를 기억한다. 노동자는 날로 재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할 것을 요구 받기 때문에, 이런 수단의 구입비 마련을 위해 화폐경제의 노예가 되어가는 게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재생산수단에 대한 분노를 표시하고 공장노동자들이 하듯이 반대 투쟁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나는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자학증상과 노이로제가 어떤 것인지 따져보는 것으로 이 주장을 발전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부족했다. 나는 그동안 학계의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잘못된 추상화 단계’에서 주장을 펼친다는 이유로 종종 저지당해왔는데, 또 다시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가장 먼저 내가 청탁받았던 주제인 첨단기술을 이용한 재택근무 문제로 돌아갔다.” (180쪽)

 

 

“내 생각에, 사회주의 사회의 전 단계로 여겨지는 그 어떤 대안 노동의 전망에서든 미심쩍은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상품생산에 대한 강조(와 오직 상품생산에 참여하는 이들만을 ‘진짜 노동자’로 보는 생각)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서비스 분야 일자리를 싫어하는 건 단지 이 분야가 대체로 여성의 노동으로 인식되기 때문인가, 아니면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나? 나는 무보수 가사노동, 서비스 업종, 상품생산의 관계는 역동적인 것이어서 그 경계가 계속 바뀌며 이런 변화는 부분적으로 신기술의 도입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았다. 자본주의 역사는, 과거 집에서 부수 없이 이뤄지던 활동들을 점진적으로 화폐경제 속에 흡수하는 역사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상품화 과정이며, 새로운 기술의 물결은 꼭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냈다. 이런 상품의 도입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와 Tm는 노동자 모두의 노동과정(과 그와 관련된 숙련기술)에 변화를 불러왔다. 특정 숙련기술과 노동과정을 고정시켜 놓고 거기에 ‘대안’ 상품의 개발을 적요시키려는 건 실패할 운명인 것으로 보였다. 성공하더라도, 그것의 영향은 반여성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고정된 그 시기의 특정 노동 분업 형태(와 그에 따른 사회적 관계)를 고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은 점점 더 반행을 일으키기 어려워 보인다.” (181~182쪽)

 

 

“날로 우리가 스트레스 더해지는 삶을 살면서 스트레스 관련 질환의 위험성에 대해 글을 쓴다. 우리는 스스로 비참하리만치 적은 사례를 받거나 거저 일해주면서 저임금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 우리 가운데 몇몇은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고정수입이 없는 재택근무 노동자들의 소외와 그들에 대한 착취에 대해 쓴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가장 희생하는 처지가 되면서도 다른 여성들에게 이기심에서 탈피해 집단적으로 행동하라고 권하고 자기희생에 빠지지 말라고 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표현하지 못한 욕구의 반영일 뿐인가? 이런 질문을 놓고 고민하면서 나는 자꾸 내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돌아가는 걸 깨닫는다. 되돌아보면 지난 20년 동안 나타난 모든 변화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집단적 행동의 힘에 대한 믿음이 시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 해주지 않는다는 우울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다.” (187쪽)

 

“내가 보기에 이런 변화는, 일하는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만 유발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 대중 개인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덜 공포스런 시절이었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것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그 선택은 고용의 성격과 노동자로서의 삶의 모습 여러 가지를 바꾸어 놓았다. 공공 탁아시설에서 아이들이 제대로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잃음으로써, 그들은 집에서 일하면서 직접 아이들을 돌보는 걸 선택했다. 노조가 지신의 미래를 보장해 줄 가능성을 믿지 못해, 개인연금에 돈을 넣기로 선택했다. 이 모든 개인적인 선택이 합쳐지면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질 기반인 공공 기반시설이 거의 붕괴됐다. 동유럽에서 들여오는 소식은 영국과 유사한 양상이 거기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암시하지만, 영국이 그동안 겪은 것들이 세상 그 어디에 반영되고 있는지 난 알지 못한다.” (187~188쪽)

“나에게 분명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제시하고 싶은 그 어떤 해법도, 우리가 제시하고픈 그 어떤 미래를 위한 요구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다시 서로 신뢰할 수 있게 할 어떤 원대하고 집단적인 희망의 행동을 창출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이걸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아(그리고 개인적 안위)와 타인(그리고 손해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험한 상황을 강요하지 않는 조건을 찾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이타주의를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람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최선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보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188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