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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개강한 지 벌써 2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언제 개갱했고,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1. 정신이 별로 없다. 무척이나 산만하다...
무엇인가 생각이 나서 메모라도 할라치면,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잘 모르겠다.
물건을 여기에 분명히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찾아 보면 없는 거다.
도대체 건망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정신 없이 지내는 것이 더욱 건망증을 부채질하는 것 같다.
2. 무엇 하나 한 번에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무엇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일을 하는 순간에 예기치 못한 것들이 태클을 걸어온다.
도대체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지 감이 잡히지 않으면 성질이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면서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나 자신에게 퍼붓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자전거를 학교까지 잘 타고 왔는데,
학교에서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진 것 같아서
바람을 넣었는데...
아... 글쎄...!
바람을 넣는 족족 정말로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람이 빠지고
자전거 바퀴 타이어는 노골노골 오징어 구이가 돼 버리는 거다.
날은 무지하게 춥고, 바람 엄청 불고, 그래서 자전거는 자꾸 넘어지려 하고
손은 또 왜 그렇게 시려운지...
또 혼자 퍽퍽 했다..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지, 이거 원...
하긴 이달 운세가 별로 안 좋더라...
그래도 그렇지...
정신 좀 그만 출장 보내! 곰탱이!!!
[님이 쓰신 글 중에 제가 우선 풀고 싶은 부분은, 로스쿨이 그렇게 진보적이라면, 왜 미국 법조 아니 변호사사회는 저모양인가 하는 그런 부분입니다.
저는 로스쿨 그 자체가 진보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로스쿨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에 따라, (법률가 자격을 부여하거나 법률가를 키우는 방식도 변화시킬 수 있는 동시에 -- 이는 진보적이냐와 상관없는 부분입니다), ①변호사 사회라는 권력을 가진 집단에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들어가는 현재 우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님이 쓰신 글의 댓글에서 제가 로스쿨을 왜 하는지의 첫 출발은, 법률가 양성제도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는 진보적인가 아닌가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겠고, 저또한 그런 진보성을 생각치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 ②즉 법률가 양성제도의 개혁의 방식으로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법률가가 될 사람을 교육하고 그들의 최소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가자는게 정해진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러한 전문대학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경제적,또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기회가 봉쇄되는 것을 막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님은, 대체 국가가 왜 로스쿨을 지원해야 하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현재 사법연수원생들에게 공무원 급여를 지급하는 것이 문제라는 점도 지적했습니다. 저도 현재 사법연수원생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공무원이 아니니까요. ③그들중 대다수는 곧바로 나와서 개업 변호사라고 할까요. 전문자영업자가 되니깐요.
연수원생에게 공무원신분의 월급을 국가가 대주는 것과 로스쿨을 지원하자는 것은 다른 것이죠.
제가 국가의 로스쿨 지원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공익적 변호사 활동'을 전제로 한 장학지원, 사회경제적 부담계층에 대한 장학지원을 말하는 것인데, 전 그건 당근 필요하다고 봅니다. 학비가 싼 이상적인 경우라면, 그러한 국가의 지원은 별로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이를 방치하면 앞서 제가 말한 부분의 지원이 없으면 로스쿨은 말 그대로 돈이 있는 사람만 변호사 기회, 따라서 권력을 쥘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전락할테니 말이죠.
④이건 개인에 대한 지원입니다.
이런 개인에 대한 지원은 타겟을 정해서 사회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는 사람, 집단에 대한 지원인데, 저는 이런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국가의 로스쿨 지원은 이런 개인,집단에 대한 지원이 아닌, 로스쿨 그 자체에 대한 지원도 고려해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⑤변호사라는 직업은 개인자영업자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공공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공공재를 양성하는데, 사회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기우일런지 모르겠지만, ④이거는 물론 로스쿨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을 의미하지, 그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의 맥락에서 잠깐 벗어날지 모르겠지만, 사실, ⑥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가지 감시해야겠지요.
다시 님의 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님은 로스쿨을 도입하자는 교수들은 그동안 법대에서 교육하던 사람들 아니냐, 그들은 뭐냐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법대, 그러니까 법학부에서 잘 가르치고, 사법시험이 아닌 변호사자격시험을 치르게 바꾸면 '교육을 통한 법률가 양성'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점은, ⑦학부 교육이 아니라 왜 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까지 받게하느냐가 쟁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건 변호사에 대한 교육을 어떤 수준으로 생각하느냐, 그게 학부가 아니라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법학부 교육을 통한 사람들에게도 자격을 엄격한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주는 나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학부교육 수준이 아니라 학부교육 수준을 거친후 전문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을 받게 한 후 기초자격을 테스트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외에도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속 구성원들도 그런 선택을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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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인 글에 트랙백을 걸어 이 글을 쓰는 것은 참여연대 사법감시 센터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박근용 씨라는 분의 덧글 내용이 납득이 잘 안 가고 너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행인이 그토록 답답해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박근용 씨의 글이 로스쿨에 대한 모든 것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근용 씨의 덧글을 통해 보자면, 도대체 어떤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이 로스쿨 제도를 추진하게 되었는지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박근용 씨 글 전체 내용의 전제는 ‘로스쿨이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정당한가에 대한 이야기는 한 군데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로스쿨 제도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로스쿨이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다’는 자신의 글의 전제를 스스로 뒤집고 있다. 사태가 이 정도면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아니 로스쿨 자체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세세하게 이 글을 따져 보도록 하겠다.
①“변호사 사회라는 권력을 가진 집단에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들어가는 현재 우리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진보적일 수 있다고 봅니다.”
--> 먼저 로스쿨이 되면 무한경쟁, 개인들의 경쟁을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로스쿨 입학할 때부터 처절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변호사 시험을 통해 당락을 결정하는 것 또한 무한경쟁이 아닌가? 로스쿨 입학자들의 대부분은 이른바 ‘스카이’ 대학 출신들이다. 나머지 타 대학 출신들이 로스쿨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이건 로스쿨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다 아는 비밀이다. 현재 로스쿨을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뭘 믿고 현재 무한경쟁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우리 상황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②“즉 법률가 양성제도의 개혁의 방식으로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법률가가 될 사람을 교육하고 그들의 최소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가자는 게 정해진다면, 그 다음 단계에서 그러한 전문대학원에 들어가는 사람이 경제적, 또는 사회적 여건에 따라 기회가 봉쇄되는 것을 막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그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말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 결국엔 중산층과 서민층이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제도적으로 좀더 열어 놓았기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만인이 평등한 사회이다. 누구나가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주어진 사회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전문 대학원에 들어가는 자체가 서민들에겐 엄청난 경쟁률을 뚫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교육비가 들어갈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 뻔한 것을 ‘진보적’이라 부르는 것은 온당하다고 할 수 없다.
③그들중 대다수는 곧바로 나와서 개업 변호사라고 할까요. 전문자영업자가 되니깐요.
연수원생에게 공무원신분의 월급을 국가가 대주는 것과 로스쿨을 지원하자는 것은 다른 것이죠.
제가 국가의 로스쿨 지원을 말하는 것은, 다른 것은 몰라도 '공익적 변호사 활동'을 전제로 한 장학지원, 사회경제적 부담계층에 대한 장학지원을 말하는 것인데, 전 그건 당근 필요하다고 봅니다.
-->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익적 활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공익’이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추상적이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변호사가 된다는 것은 박근용 씨 말 그대로 돈 잘 버는 전문 자영업자가 된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기존 사법시험을 거치던 아니면 로스쿨을 거치던 간에, 돈 잘 버는 전문 자영업자라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 변호사가 되어서 할 수 있는 ‘공익적 활동’이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이 장학 혜택이 되었건 공무원 신분의 월급을 주건 간에, 경제적 지원을 하는 것은 그 결과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박근용 씨는 ‘공익적 활동’을 전제로 해서 다르다고 계속해서 말을 하겠지만 그 공익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다르다는 말은 공허해질 뿐이다.
④이건 개인에 대한 지원입니다.
④이거는 물론 로스쿨이라는 교육기관에 대한 지원을 의미하지, 그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 개개인에 대한 직접 지원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 개개인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로스쿨 자체에 대한 지원은 어떻게 이루어지길래 서로 다르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자는 국가가 개개인의 통장에 직접 경제적 지원금을 입금시킨다는 것이고, 후자는 로스쿨을 통해서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여간 이것을 볼 때 경제적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상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스쿨을 추진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⑤변호사라는 직업은 개인자영업자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공공재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공공재를 양성하는데, 사회가 공동의 관심을 가지고, 필요한 지원이 있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을 ‘사회적 공공재’라고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만일 사회적 공공재를 사회 전체에 아주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재원이라고 정의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공공재이다. 요즘처럼 국가 경제의 위기가 코앞에 닥쳐 있을 때, 사회적으로 가장 필요한 공공재는 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주체인 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사회적으로 지원해야 할 사회적 공공재는 바로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동자들을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⑥이제는 로스쿨을 감시할 때인데, 로스쿨이 기대했던 대로 제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또는 국가지원이 아니더라도 학교 자체적으로 사회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지원을 지속할 여건을 마련했는지 등, 그외에도 여러가지 감시해야겠지요.
--> 이 대목에 와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도대체 시행 첫걸음마부터 감시해야 할 제도를 뭐 하러 만들었는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제도였다면 애초부터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감시하는 비용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결과적으로 보자면 박근용 씨가 말하고 있듯이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할 계층이 그 비용을 감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박근용 씨와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단체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한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⑦학부 교육이 아니라 왜 대학원 수준에서의 교육까지 받게하느냐가 쟁점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이건 변호사에 대한 교육을 어떤 수준으로 생각하느냐, 그게 학부가 아니라 전문대학원 수준에서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법학부 교육을 통한 사람들에게도 자격을 엄격한 과정을 거치게 한 후 주는 나라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뭐랄까요?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아닌가 싶습니다.
--> 여기서는 박근용 씨가 로스쿨 문제는 선택의 문제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선택의 문제라는 것은 ‘절대적’이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로스쿨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기존의 보수주의자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면서 자신들만이 개혁주의자이며 로스쿨만이 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로스쿨이 문제가 많다면(이는 일정 정도 박근용 씨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로스쿨 시행을 감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도를 찬성하고 입법 추진한 사람들은 이에 대한 사과를 일단 먼저 해야 하고, 확실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야 하는데도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오늘이 개강 첫날이다.
이 날이 오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럽고 긴장되었다.
어찌 맞이할 것인가...
학생들이 수강신청할 때 보니,
8~90%가 신입생이라서 걱정은 더욱 커졌더랬다.
재학생이 좀 있으면 재학생이 새내기들을 좀 돌볼 수 있을 텐데,
재학생이 없으니 새내기들을 어찌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참으로 웃긴 생각이었다는 것이
오늘 처음 수업 들어갔을 때 증명되었다!
새내기들...
참으로 똑똑하고 당차 보였다.
걱정할 일이 아니었는데...
신입생들을 너무 '애'들로 보았던 내 편견이 참...
이번 학기 수업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해 본다.
학생들이 취업이라는 것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앞으로의 삶을 기획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번 학기도 몸은 꽤 고달퍼지겠지만 마음은 꽤 뿌듯해졌으면 좋겠다.
건녀편 야외무대에서는 학생들 자체적으로 입학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시끌벅적하다^^...
간만에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온다.
이 느낌이 정겹게 다가온다^^...
이번 방학 때 변변치 않은 글을 하나 썼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거칠게 정리해 보았다.
글의 들어가는 부분만을 싣는다.
관심 있는 블로거께서는 덧글에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메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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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클라우제비츠에 주목하는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단적인 폭력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막을 방도도, 그리고 막을 주체도 아직 없어 보인다. 역사 발전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도 이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어찌 해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세계화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상황이 이러한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클라우제비츠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게 전쟁이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는 것이 근대적 주체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해체됨을 의미하며, 민족국가 내에서 국가와 인민(그람시에 따르자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동의’ 체계가 무너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 민족국가 자본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값싼 노동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 확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가 있을 때에는 그들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통제하고 제도화하지 못했을 경우 국가의 정치권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상당히 우려하였다. 즉 그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통하여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로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의 해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론 체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자신의 『전쟁론』을 출판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곧바로, 필연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20세기 초에 근대적 주체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노동자 계급이(그들이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간에) 이 전쟁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가지고 있는 아포리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바로 밑에 있는 최용준의 갈채라는 노래에 이어,
똑같은 가수의 <아마도 그건>이라는 곡도 한번 들어보세요^^.
참, 이 노래는 박보영, 차태현의 <과속 스캔들>이라는 영화의
오에스티에 실렸더군요.
그렇지만 가수는 다릅니다.
홍민정이라는 가수입니다.
노래 취향이 많이 다르네요.
한번 비교해서 들어보시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침에 학교 생활도서관에 나와서 책을 보고 있으려니까,
관장을 맡고 있는 학생이 투덜투덜거리면서 오더라...
- 무슨 일 있니?
- 자율전공 학부생들 오늘 입학식이고 오티(OT)하는 날인데요...
저희가 생활도서관 소개하는 기관지를 신입생들한테 나누어 주었는데요.
학교 측(자율전공 학부장)이 학생들로부터 이 기관지를 모두 수거해 갔대요...
- 뭐, 이런 개떡 같은 일이 있냐!
그래서 항의하지 그랬냐!
- 아침에 가서 뭐라 한바탕 난리치고 왔는데...
정말로 뭐 이런 거시기 박정희 같은 일이 있냐!
완전히 이제 거꾸로 가는구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본즉은...
운동권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는 취지였대나 뭐래나...
이 빌어먹을 대학이 타임머신을 타고 백 투 더 퓨처가 아니라
백 투 더 패스트하고 있구나...
아우...
우리 학생들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이런 박정희 같은 일이 있나...
하여간 쥐박이가 백 투 더 패스트하려고 쥐랄이니,
대학도 같이 쥐랄이다...
지금 총학생회장이랑 전년도 법대 학생회장이랑 생활도서관장이
학교측에 항의하러 갔는데...
옆에 계시던 행인께서는 반드시 사과 받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는데...
그 쥐박스러운 학교가 사과는커녕 눈이나 깜빡하려나...
그냥 육두문자가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른다...
이 쥐박스러운 곳에서 밥을 빌어 먹고 있는 나안...
에이... 담배 생각 간절하다...
(마리신 님의 글에 트랙백을 걸려다가 그냥 혼자 궁시렁대는 글이 될 것 같아서 관두었다.)
이번 민주노총 사건은 사실상 예견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단순한 성폭력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가부장적인
문제점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본다.
그래서 인간성 나쁘고 도덕적으로 질 낮은 인간이 저지른 단순하고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재수 없이 미친 개에게 물린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사실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폭력을 포함한 성적 억압과 착취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며, 그래서 모든 남성들은 자신이 그런 억압과 착취를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고, 또한 인지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남성들이 그런 성적 억압과 착취의 이데올로기 교육 환경 속에서 자라왔고,
또한 세뇌 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손을 직접적으로 대지도 않고, 즉 아무런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물론 가족 임금제라는
것이 있지만 흔한 말로 '껌값'도 되지 못한다) 산노동의 피를 한방울도 남김 없이 빨아먹고자 하는데,
이의 토대는 바로 성 차별적이고 성 억압적인 성 분업에 기초한 여성 노동이다.
이를 통해 여성 노동 --> 남성 노동 --> 자본이라는 먹이사슬 구조가 형성된다.
이것이 여성 노동이 남성 노동과 비교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하여 여성(또는 여성 노동)은 부차적이고 하찮은 것이 되며, 남성(또는 남성 노동)의 지배 대상이 된다.
이때 자본은 이 둘 사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단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치부된다.
왜냐하면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자본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항상 개별적으로만 자본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인 상품인 노동력을 자본이 노동자엑 주는 임금과 교환할 수 있을 뿐이다.
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 노동자는 자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신의 생존과 주체성을
자본에게 종속시킬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종속시킨다.
이제 노동자는 자본과 한몸이 된다.
자본이 망하면 자신도 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자본이 노동자 자신을 집에서 기르는 가축(자본은 늘 노동자에게 우리는 한식구라고 말하는데,
이때 한식구라고 말하는 것은 가축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못한기계처럼
대한다고 생각이 들 때, 그는 자기를 대리할 노조를 찾게 된다.
이제 노동조합은 자본처럼 모든 개별 노동자들의 대리인이 되며,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임 받는다.
이렇게 됨으로써 노조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권력체가 된다.
노조는 최전선에서 자본과 대적한다는 이유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된다.
이는 상급단체로 갈수록 심각해진다.
자본과 싸우려면 자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과 동일한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사분란함을 깨는 행위는 모든 반동적 행위로 간주된다.
(이것이 민주노총이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개별적인 개인으로서 노동자는 이중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이 망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노동조합도 망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현재 노동자 계급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속성이며,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는 자기 생산의 토대를 억압적인 성별 분업에 기초한 가부장적인 양식에 두고 있다.
자본이 망하거나 노동조합이 망하거나 또는 이런 토대가 사라지는 것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본다.
이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또한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자본과의 투쟁은 개별 노동자에게 양적인 수준에, 즉 임금을 얼마나 더 받는가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게 된다.
노동자의 모순적인 자기 생산 양식으로서의 가부장제의 철폐 없이는
이런 성폭력과 같은 범죄적 사건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이 사건은 예견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민주노총의 재발 방지 다짐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그 가해자는 강승규처럼 또 돌아올 것이고,
여전히 노동조합은 절대적 궡력을 휘두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떻게 해야
노동자의 모순적인 자기 생산 양식으로서의 억압적 가부장제를 해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노동자 대중은 '계급'으로서 자유로이 연합할 수 있는 개인이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는 여성의 문제제기와 그 문제제기에 대한 지혜가 너무나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프로통산 1승만을 올리고 프로 무대에서 사라졌던 감사용 선수.
뒤늦게 영화<슈퍼스타 감사용>로 빛을 보았지만 정작 그는
그 빛을 뒤로 하고 야구를 통해 아웃사이더들과 삶을 같이 하고 있단다.
누가 뭐라 하든 자기 길을 묵묵히 가는 감사용 그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자기 갈 길이 아닌 갈에, 자기의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지 말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게다!
언제나 변함 없이!!!
그저께 엄니의 호출을 받고 어저께 밤 늦게 엄니의 집으로 갔다.
밤 11시 뉴스를 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면 늘 새어 나오는 말이 있다.
- 쥐랄 옆차기들 하고 있네...
뉴스를 보기만 해도 성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우리 엄니 옆에서 하시는 말씀...
- 야야! 니 그 시염 쫌 까까라!(수염 좀 깎아라)
몬 생긴기 더 몬 생길라카나! (못 생긴 게 더 못생기려고 하느냐)
열 받아 죽겠는데,
내 수염을 보고 뭐라 하신다...
(수염을 기르고자 해서 기른 건 아니고, 귀찮아서 내버려두다 보니...
수염 안 깍은 지 한 달이 넘어간다^^)
- 니가 산적이가!
- 와요! 내 방학 끝날 때까정 기랄낀데예...
(사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함 길러보자는 참 쓰잘데 없는 욕구가 꿈틀거린다...
수염을 기르게 되면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 니가 미친나! 니 머 잘몬 무근나!(잘못 먹었냐)
이런 식의 말이 오고가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 엄마, 와 내를 이래 몬 생기게 만들었노!
잘 생기스믄 멀 해도 해쓸꺼 아이가!^^
엄니에게 갑자기 따지듯 물었다.
- 그걸 와 내 보고카노! 내가 몬 생기구로 맹글고시퍼 맹그런나!
- 그라모, 이기 내 잘못이가!
그러면서 따지듯 또 물었다.
얼마 있지 않다가...
울 엄니와 나, 킬킬대고 웃었다.
생각해 봐도 하도 어처구니 없는 대화였던지라^^...
그런데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얘기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냐!!!
도대체 쥐박이를 저렇게 못 생기게 만든 건 누구의 죄냐!!!
아우! 열 받어!!
좀 있다... 뛰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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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부분은 박근용 씨가 행인의 글에 대하여 덧글로 남긴 내용이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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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것은 이분들이 자신들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죠. 일반적으로 '진보'계열로 분류되는 사법감시센터의 교수님들께서 나름 진보라는 레떼르를 붙이면 그것이 그냥 진보가 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시는 듯 해서 안타까워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진보여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법조인 양성에 관해서만큼은 오히려 김영삼보다 못한 방식을 채택했음에도 말이죠. ㅡ.ㅡ;;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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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박근용 씨 글을 읽다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덧글 달았다가 지우고서 기어이 글을 썼네요. 도대체 로스쿨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죠. 문제 생기면 감시하면 된다는 발상 자체가 어디서 나왔는지... 하여간 책임감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 이사 간 연구실에서는 재미 있으신가요?^^ 점심 같이 했으면 좋겠네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