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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우연하게도 영화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거기서 늘 뇌리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앤디가 교도소 도서관 문을 잠그고, 교도소 전체 스피커를 통해 틀어주던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이다.
모든 죄수가 이 음악이 흘러 나오는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모습이 참 뭐랄까...
너무 좋다고밖에는 말을 못하겠다.
이렇게 우리말이 짧다니...ㅠ...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영화 중의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이 음악은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음악이다.
Bartoli & Fleming - Le Nozze di Figaro - Sull'aria
어제 밤 1시 넘어서 후배한테 전화가 왔다.
밤 늦게 집에서 혼자 술 먹다가 생각나서 전화했단다.
아마도 또 사는 것이 심드렁해졌거나, 외로워서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친구는 우울증 기가 좀 있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그래서 술을 너무 많이 먹는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술을 먹지 말고 운동을 해 보라고 여러 번 권했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땐 태권도 선수였다는데...
사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거나,
사는 것이 늘 심드렁하거나,
삶의 의문이 너무 강해서 너무 그러할 때...
이럴 땐 운동이 적절한 치료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 경험에 비춰 보자면 그렇다.)
그 중에서도 뛰는 것이 최고이지 싶다.
산책을 하거나 걷거나 하면 오만 가지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 나온다.
일단 생각을 끊는 것이 치료의 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생각을 끊으려면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그 한 가지에 집중하게끔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이 뛰기이다.
뛰다 보면 숨이 턱에까지 차오른다.
그러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다.
여기서 뛰는 것을 관둘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뛰어볼 것인가...
체력이 어느 정도 바닥이 날 때까지 뛰어보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뛰어서 한 5분 정도 지나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땡기기 시작한다.
이건 체력이 바닥이 난 것이 아니다.
그건 잠자고 있던 세포가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5분을 넘어 10분쯤 되면 숨통이 팍 터지게 된다.
잠자고 있던 허파의 세포들이 어느 정도 정상적 궤도에 들어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다가 25분쯤 되면 다시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된다.
이것도 30분을 넘어서게 되면 다시 숨통이 트이게 된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생각을 끊을 수 있게 된다.
뛰는 동안에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다.
오로지 뛰는 것에만 몰두하게 된다.
(다른 생각하게 되면 사고 난다!)
다른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의 속력으로 뛰면 된다.
이렇게 뛰고 나면 일정 시간 동안 세상을 세상 밖에서 구경하듯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끔씩 나와봐야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정처없이 이리저리 흘러 다닐 수만은 없지 않은가...
마음이 어지러울 땐...,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명절 하면 늘 데면데면하게 넘겼는데...
이번 설은 그나마 좀 덜 데면데면하였다.
설 전날에 울 엄니와 같이 일을 하는 것도 즐겁고 재미났다.
동생네 식구들은 멀리 나가 있어서
온전하게 나와 울 엄니랑 딸랑 둘이서 차례 음식을 만들었다.
뭐, 물론 내가 제사 음식을 만든 건 아니고^^....
옆에서 시다 역할만 했다.
엄니 음식하는 거 어깨 넘어로 보는 것도 잼 있었다.
전에 튀김가루며, 밀가루 입히는 것도 좋았고,
설거지하는 것도 좋았다.
음식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리고 내가 집에 가기 전에
울 엄니께서 미리 다 준비를 하셨기 때문에
오후 2시 좀 넘어서 일이 다 끝났다.
노친네랑 주거니 받거니 이바구하면서 하는 일의 재미란 찬 쏠쏠한 것이었다.
울엄니 하시는 말씀...
- 지금 요거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옛날엔 우째 했는강 모르지...
그때는 참...
이전에는 옛날 얘기하면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 옛날 얘기가 삼탕, 사탕해도 잼났다^^...
테레비 재탕, 삼탕하는 건 아에 보지도 않았다!
울 엄니 시집 산 얘기며, 살아온 얘기를 듣자면 참 기가 막힐 지경이다...
예를 들자면...
울 엄니 서울 올라오시기 전에,
그러니까 울 엄니께서 맏며느리이셨는데...
그리고 딸랑 며느리 혼자셨는데...
온갖 제사 음식을 몇 날 며칠을 혼자 만드셨고,
온간 빨래는 혼자 다 하시고,
온 식구의 명절 빔도 다 챙기셨고...
(이러고 보니까 울 할머니 욕하는 거 같네... 그래두 뭐 어쩔 수 없다)
뭐... 국민학교 다닐 적엔
아예 애보기로 정해져서 허구헌날 애만 봤단다, 조카들...
요즘 그 조카들이 울 고모 하며 챙기지만,
그 당시엔 애 보는 거 때문에 학교 시험공부도 못 하였고,
나가 놀지도 못해보셨단다...
그 시대에 어떤 어머니라도 안 그랬겠냐마는...
듣는 나로서는 참 열 받는 얘기이다.
그래서 <이런, 우째 그런 일이...!> 하면서 열을 내며 맞장구를 친다.
허긴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 있었을까...
이제 나를 붙들고서 그런 얘기를 하시는 걸 보면...
맘이 짠해지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저녁엔 울 엄니...
주말 드라마 삼매경에 빠지시고,
난 드라마 별루 관심 없어서...
목이 뻐근하게 아프도록...
아마도 다섯 시간 넘게, 그러니까 한 밤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뭐 하고 있었냐 하며는...
ㅋㅋㅋ...
컴퓨터 게임인 <프리셀>과 <지뢰잡기> 삼매경에 빠졌더랬다^^.
(요 게임은 조만간 지워야 한다!!! 아주 중독성이 강한 게임이다...ㅠ...)
설날 당일...
아침 차례상 올리고 차례 지내고,
떡국 먹고...
그런데 아주 빌어먹을!!!
십년 넘도록 발도 안 대던 친척들이 몰려 온다고 했단다.
(나~안! 친척 하고 아주 안 친하다!!! 울 아버지 하고도 안 친한데... 그 형제들이야...)
잽싸게 짐을 싸서 학교 가려고 옷 갈아입고 있는데~~~~에!
벌써들 오고 XX들이다.
아예 가방 들고 나와 버렸다, 본 체 만 체하고....
학교 와서 점심 쫄쫄이 굶고...
(오다가 보급 투쟁을 했어야 헸는데, 깜빡 잊어 버리는 바람에...)
저녁엔 연구회 친구를 만났다.
몇 년 동안 소식을 몰라 궁금하고 점 애가 탔던 친구인데...
연구회에서는 아예 천사표라고 이름난 친구였다.
연구회 모임 있을 땐,
하여간 선배들이 그를 찾느라고 난리인 친구다.
왜 찾냐하면...
다 자기들 하소연에,
자기들이 하고 싶은 얘기들을 군말 없이 다 들어주며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몇 년간 사라졌다가 이번 연구회 신년회 할 때 처음 보았다.
그 친구는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다^^. 아마 나도 은연 중에 위로 받고 싶었는지도...
난 절대로 하소연 같은 거 안 하고 잼난 얘기하려고 갔는데...^^)
밥 먹고 차 마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했다.
그 친구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이 그런 걸 너무 잘 안다.
아이들을 만나면 너무나 행복하다는 사람이다.
그 친구는 아이들의 교육에 너무나 많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아이들과 같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도시보다는 시골에 가서 그런 일을 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이주 여성 노동자들, 한국으로 시집온 이주 여성들의 삶에 관심도 많은 사람이다.
그런 일을 해 보고 싶어서 폐교를 사서 아이들 도서관을 만들고 어머니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어 보고 싶어서 한 일 년간 폐교를 보러 다녔단다.
그런데 시골에 아이들이 없어서,
그리고 폐교를 사기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서
변산에 있는 윤구병 선생님이 만드신 대안 학교에 한 7개월 가량 있다가
서울로 올라 왔단다...
자신의 꿈을 다시 펼쳐 보기 위해서...
하여간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 건 너무 즐거운 일이었다.
둘이서 수다를 막 떨다보니 밤 11시...
6시에 만났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를 떨었더랬다^^...
12시에 울 엄니한테 가서 자고,
오늘 학교를 나와서 이 이야기를 쓴다...
울 엄니와 그 친구에게 고맙다^^...
올만에 즐거운 명절이었다.
덧글> 여전히 자본과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경찰에 의해 살해 당한 용산 철거민과 그 유가족들,
그리고 맘 편히 명절을 보내지 못하는 모든 분들께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즐거운 명절을 보낸 내가 가족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고 있다는 쥐박이랑 뭐가 다른가 싶어서...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살인 진압으로 희생된 철거민들의 명복을 빕니다.
최소한의 살 방도를 마련해 달라던 철거민들의 요청을 폭력으로 짓밟은
mb정권의 주거 정책에 분노를 느낄 뿐입니다.
주거권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이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살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김광석의 <타는 목마름으로>입니다...
김지하 씨가 이제 맛이 갔지만,
요즘 같은 시절에 더욱 생각나는 노래입니다.
** 타는 목마름으로 **
# 겨울 숲에서 #
- 안 도 현 -
참나무 자작나무 마른 잎사귀를 밟으며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왠지 그대가 올 것 같아
나는 겨울 숲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그대를 기다립니다
그대를 알고부터
나는 기다리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이 계절에서 저 계절을 기다리는
헐벗은 나무도 모두
사랑에 빠진 것이겠지요
눈이 쌓일수록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송두리째 버리는 숲을 보며
그대를 사랑하는 동안
내 마음 속 헛된 욕심이며
보잘것없는 지식들을
내 삶의 골짜기에 퍼붓기 시작하는
저 숫눈발 속에다
하나 남김없이 묻어야 함을 압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따뜻한 아궁이가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가 돌아가야 할
길도 지워지고
기다림으로 부르르 몸 떠는
빈 겨울 나무들의 숲으로
그대 올 때는
천지사방 가슴 벅찬
폭설로 오십시오
그때까지 내 할 일은
머리 끝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눈사람되어 서 있는 일입니다
- 안도현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 중에서 -
작년 연말부터 올 초에 이르기까지 아주 좋은 친구를 잃어버렸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었다.
그 친구를 조금만 만나고 있으면 정신을 놓아 버리고,
그 친구와 나를 아주 못살게 구는 것 같다...ㅠ...
내가 아직 철이 덜 들고 인격수양이 덜 돼서 좋은 친구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구나.
언제 그 친구를 다시 보게 될지 기약을 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 웃으며 그 친구와 옛날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그 친구를 사랑하기에 그 친구를 떠나보내는 심정...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싶다...
올해부터 입산수도하여 인격을 수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산신령님이 이제 인격을 다 쌓았으니,
그 친구를 만나러 하산해도 좋다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꿈은 이루어진다!
친구여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잘 지내시게!
자네를 볼 면목이 없네...
잘 가게, 내 친구 주(酒)여...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벨 훅스의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와 관련해서는
이미 염둥님께서 자세하게 내용을 잘 소개하셔서 쓸 말이 별로 없기는 하다.
그래서 아주 간략하게 독후감 정도의 글로 대신할까 한다.
벨 훅스는 노동 계급과의 연대를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특히 흑인 인권 운동가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노동 계급과의 연대가 아주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흑인사회에 만연한 물신숭배가 이전의 흑인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으며,
이런 파괴에 의해 흑인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절망에 빠져 마약에 물들어가고 있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건 우리나라의 젊은이들과 비교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최고 관심사가 연봉이 많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노동 계급과 연대할 수 있으며, 또한 단순히 노동 계급과 연대한다고 해서
새로운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가 거론되는 시점에서?!
이 두 개의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결국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대안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과 직접적으로 대적하고 있는 노동 계급은 어떤 시스템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며,
또한 새롭게 생산하는 것인가?
이는 성별 분업화되어 있는 가부장제 시스템을 노동 계급 자기 생산의 기초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간과하고서 단순히 노동 계급과 연대한다는 것은 착취와 관련한 상당한 문제를 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 계급인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착취 시스템을 해체하는 노력을 집단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집단적 노력은 착취 시스템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체'인
코뮌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벨 훅스는 이런 코뮌을 이전의 흑인공동체에서 보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갔던 흑인 공동체,
경제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서로의 인격을 존중했던 공동체...
과연 이러한 흑인 공동체의 상이 오늘날 가능한 상일 수 있을까?
만일 가능하다면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 세대의 노동 계급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세대의 노동 계급은 자본의 무한한 적대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도권 공교육과
더불어 사교육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여기서 자신의 착취 시스템을 해체하는 노동 계급 공동체 자체 내에서의 대안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각 대학을 노동 계급의 자녀들의 대안 교육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여기에서 대학생들을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 자치 조직의
도우미의 역할을 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또한 어렸을 때 각자 자기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놀았던 것처럼 각 자치 조직은
자기보다 한 단계 어린 자치 조직들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대학의 학생운동은 이제 새롭게 다음 노동 계급 생산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각 지역의 코뮌을 서서히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중언부언 말이 많아졌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대안과 관련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뱀다리 : 왜 책 제목을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뽑았을까?
원제목은 [Where we stand : Class matters](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 문제는 계급이다)인데 말이다.
'계급'이라는 용어가 진부하다고 여겨서 그랬을까?^^
4. 성별 분업 - 여성 억압의 물적 기초.
1) 성별 분업은 가부장제와 가부장적 관계의 물적 기반으로 인식.
① 성별 분업은 모든 사회를 특징짓는 남성과 여성 간의 불평등한 관계의 중요한 표현으로 인식. 모든 사회 속에서 성별 분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에서 남성 지배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 남성 지배와 여성 종속의 본질적 속성.
② “성별 분업은 한편으로는, 남성은 생산관계에 대해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연관을 갖게 되는 데 비해 여성은 반대로 생산과정에의 적극적인 참여로부터 배제되어 가정과 가내 영역으로 축출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화는 여성의 생산 자원 또는 임금에 대한 접근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만들며,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에 의해 설명되는 또 하나의 현상은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남성이 차별적으로 위치지워진다는 것이다. 생산적 노동력은 성에 따라 분화되어 여성은 낮은 임금과 낮은 지위의 직업에 위치하도록 제한된다. 자본주의 내에서 성별 분업은 여성들이 경제적인 생존을 위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형태를 기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고서도 자본가 계급에게 고도의 착취가 가능한 노동력을 제공한다.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노동은 가사종사자로서 그리고 자녀양육자로서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의 성별 분업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종속을 경제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성에 따른 노동분업은 인간 역사를 통해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성별 분업은 남성이 꼭대기에, 여성이 밑바닥에 자리하는 위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과 역사학이 보여 주는 바에 의하면, 이러한 성별 분리는 언제나 위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내 주장은 현재와 같은 여성의 사회적 뿌리는 성 위계적인 노동분업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남녀가 평등한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한다면, 그리고 남녀 모두의 인간 잠재력이 완전하게 발달하려면, 양성간의 위계적 성격을 갖는 노동분업이 철폐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양성간의 분업 그 자체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론적으로 성별 분업 그 자체가 양성간의 불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성별 분업이란 여성의 노동에 낮은 지위를 부여하는 분업이다. 성별 분업은 또한 남녀의 살므이 경험을 서로 다르게 하는 성별 하위문화의 기초가 된다. 더구나 그것은 가사노동으로부터의 면제아 더 나은 취업 기회의 보장이란 면에서뿐만 아니라 시리학적 측면에서도 행사되는 남성권력의 물적 기초이다.”
2) 성별 분업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남성의 일’, ‘여성의 일’이라는 표현이 우리의 일상적인 어휘와 경험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성별 분업의 물적 기초인가?’ 성별 분업 자체는 어떻게 발생하며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는가?
① 성별 분업은 남성에 의한 여성의 노동 혹은 노동력의 통제에 기반.
남성들은 여성들로부터 계속적으로 가정에서의 요리, 세탁과 같은 개인적 서비스를 제공 받기 위해 연대한다. (노동력의 통제) 여성이 가정에 묶여서 새존을 위해 남성에게 의존할 것을 전제로 한다. 여성의 활동적인 노동력으로부터 재베됨으로써 확고해진다. 가족은 여성의 종속을 뒷받침해 온 중요한 사회제도이며, 가족 내에서 남성이 여성 노동력에 대해 행하는 통제는 사회적 수준에서의 성별 분업과 가부장적 관계의 재생산에 대한 배후의 추동력이다. (하트만)
② 재생산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생물학적 역할에 대한 통제.
여성이 출산자로서 갖는 기능에 대한 교묘한 통제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성별 분업의 전형. ‘어머니’라는 사회적 역할은 남편에 대해 여성이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 및 사회적으로 확산된 이데올로기와 국가에 의해 재생산된다.(질라 아이젠슈타인)
③ 남녀의 성별화라는 심리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과정의 결과.
가족 및 보다 넓은 사회의 성 역할의 생산과 강화의 동학을 강조한다. 여성의 억압을 존속시키는 중요한 동인은 사회적으로 남성적, 여성적인 인성 유형을 주조하는 것에 있다는 점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낸시 초도로우)
5. 여성주의 정치경제학-여성노동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위하여
- 여성 노동에 대한 재개념화
- 여성 노동권
- 지구적 차원에서의 분석
- 이주의 여성화와 관련된 논의
- 섹슈얼리티/젠더와 여성 노동
-->(소결론)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 체제 아래에서 여성 노동의 의미가 무엇이고, 여성 노동이 차별 받게 되는 근본적인 생리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자본의 생산구조와 가부장제 구조의 관계를 파헤쳐야 한다고 본다. 즉, 결국 자본은 어떻게 각기 서로 다른 자본주의 생산구조와 가부장제를 결합시키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의 생성과 관련된 두 구조가 서로가 서로에게 귀결되지 않지만, 출발점이 되는 질적으로 서로 다른 구조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에게 환원되지는 않지만, 서로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알튀세는 이미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으로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층결정론’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중층 결정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최종 심급이 경제에 있다’는 모호한 말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리보위츠의 ‘자본의 총체성’ 개념이다. 총체로서의 자본은 자본의 생산구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생산구조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다. 자본의 생산구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제는 바로 ‘노동자의 생산구조’이다. 자본의 생산구조는 ‘무한한 적대적 경쟁 관계’를 기초로 한다. 반면에 노동자의 생산구조는 ‘단결과 협력, 연대 관계’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단결과 협력, 연대’의 관계가 ‘성별 분업화’와 관련하여, ‘남성’들만의 ‘단결과 협력, 연대’라는 여성주의의 주장은 타당하다. 노동자의 생산은 그 노동자를 생산할 수 있는 누군가의 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 누군가는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체로 ‘여성’이라고 인식돼 있다. 그러므로 ‘남성’의 단결과 협력, 연대의 관계는 ‘여성’의 노동을 전제로 한다. 이 ‘여성’의 노동이 없으면 ‘남성’의 단결과 협력, 연대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노동은 자신에 의해 생산된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남성’ 노동자의 임금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물론 여성 노동이 자본으로부터 직접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임금의 기준, 즉 그 가치의 기준은 항상 남성 노동자의 임금에 준해서이다). 그런데 이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그 남성 노동자가 간신히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력의 비용을 자본은 계산하지 않는다. 남성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노동 과정에서 들어가는 노동력의 비용은 무상이며, 스스로 알아서 충당해야 한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남성 노동자는 다음날 자본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충분히 소비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자본의 걸림돌이 된다.
남성 노동자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생산관계가 필요하게 된다. 이 생산관계는 자본-노동 생산관계의 전제이며 토대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노동 생산관계가 드러나면 날수록 은폐되며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이 기존 맑스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지적하는 여성주의의 주장은 온당한 것이다.
이 생산관계는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부르주아적인 결혼, 가족 제도로 나타나는데, 자본-노동의 관계와 같은 착취, 억압의 남녀 관계로 나타난다. 이런 착취의 관계가 아니면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력 재생산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가부장제는 총체로서의 자본의 한 축 또는 한 과정인 노동력 재생산, 즉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시스템 또는 구조이다. 가부장제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직접적인 착취 시스템 또는 구조는 서로에게 환원·귀결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출발점 또는 전제가 된다. 노동해방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의 착취 시스템인 가부장제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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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연애담인가 했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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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들어 보니까 장면 생각 나네요... 멋진 영화죠.ㅎ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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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연애담은요^^. 못 생겨서...ㅋㅋㅋ... 근데 전 낚시질한 적 없는데...^^산오리> 언제 재미 있는 영화 같이 보러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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