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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성별 직무 분리 2

성별 노동 분업에 관한 인류학적 관점

 

 

어떤 인류학자들은 바로 인간 사회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Sherry Ortner는 사실 “자연이 문화에 속하듯 여자는 남자에게 속한다” 고 말한다. Ortner에 따르면, 자연은 문화보다 가치가 낮다. 여성은 자연과 관련 있으며, 모든 문화 속에 있는 자연과 더 가깝게 생각되며, 그래서 가치가 낮다. 그녀의 관점은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분리를 강조하는 Rosaldo의 관점과 양립될 수 있으며, 또한 사회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여성이 종속된다는 점을 가정하는 Lévi-Strauss의 관점과도 양립된다.

 

Lévi-Strauss에 따르면, 문화는 가족들 간의 유대를 끈끈하게 하기 위해 남성이 여성을 교환하는 것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거기서부터 사회가 만들어진다). 사실, Lévi-Strauss는 가족(즉 여성이 자연에 가깝게 거주하는 가사 영역)과 가족들이 상호 교환을 위해 자신의 자율성을 깨뜨리기를 요구하는 사회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 상태를 본다. 여성의 교환은 가족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제하며 사회를 발생시키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이로부터 유추하여, Lévi-Strauss는 성별 노동 분업이 “여성과 남성 사이의 상호 의존 상태를” 강제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분업이 (210) 이성 간의 결혼을 보증한다. “하나의 성이 어떤 일들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될 때, 이것은 다른 성이 그 일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에 대한 성별 분업의 엄밀성이 엄청나게 변화하더라도, 성별 노동 분업의 존재는 인간 역사에서 보편적인 것이 된다. 게다가 Lévi-Strauss에 따르면, 여성을 교환하는 것이 남성이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기 위해 교환되는 것이 여성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적 관계로부터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며, 또한 성별 노동 분업은 위계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인류학적 생각을 가진 첫 번째 학파인 “보편주의”가 근본적으로 Lévi-Strauss와 여성 교환에 기초하고 있는 반면에, Chodorow는, Rosaldo와 Ortner에 따르면, 여성이 가사 영역에 제한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Chodorow는 이러한 여성의 제한을 엄마의 역할로 위치시킨다. 그녀는 여성이 어머니라는 보편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가부장제의 보편성을 구성한다. 여자의(female) 엄마되기는 젠더라는 특성 구조들의 형성을 통해서 자신을 재생산한다.

 

성별 노동 분업의 기원에 기초하여 생각하는 두 가지 주요한 다른 학파들도 살펴볼 만한다. 이 두 학파는, 실제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론상, 성별로 질서 잡힌 노동 분업의 보편성을 부정한다. (둘 중-옮긴이) 한 학파는 노동 분업이 남자(male) 지상주의임을 우리가 결코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수정주의”(feminist-revisionist)이다. 노동 분업이 남자 지상주의라는 점이 (Lévi-Strauss가 종종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분리 평등 정책적인 것일 수 있지만,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관찰자들의 성향 때문에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학파는 문화적으로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나타내지만, 노동 분업을 통해 여성들이 맡고 있는 분야에서 그녀들의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그녀들의 일과 사회적 지위에 관해 우리들에게 전혀 알려 주는 바가 없다.

 

세 번째 학파 역시 성별로 질서 잡힌 노동 분업의 보편성을 거부하지만 상대주의와는 다르게, 다소간 여성의 자율성과 일치하는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는 사회들을 비교하고자 한다. “변이주의(?)”(variationist)인 이 학파는 구성원들이 강조하는 특성에 따라 다시 나눠진다 : 생존에 대한 여성의 기여와 그 기여를 여성 스스로 통제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특성, 종족 사회 조직 대 국가 사회 조직에 초점을 두는 특성, 생산양식 요건에 초점을 두는 특성, 부와 사적 소유 출현에 초점을 두는 특성,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경계에 초점을 두는 특성. 이러한 특성들은 점증하는 성별 계급화가 사회적 계급화의 일반적 과정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이런 사회적 계급화는 적어도 어떤 측면에서는 위계 질서 내에서 상위 그룹을 부양하기 위하여 사회적 잉여를 증가시키는 것에 달려 있으며 이 증가를 촉진시킨다).

 

이러한 인류학파의 활동은 가부장제가 항상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이 변화했을 때에 나타났다는 점을 암시한다. 더구나 남성들은 이러한 변형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변형이 여성과 관련하여 볼 때 남성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남성들은 가부장제를 재생산하고자 하는 이해관계에 있게 된다. 가부장제 기원에 관해 인류학자들 사이에 많은 반대 의견이 있고, 또한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는 데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런 해석을 지지하는 증거의 중요성을 믿는다. 여하튼 대부분의 인류학자들은 비록 가부장제의 기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에 오랫동안 나타났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영국에서 국가의 형성은 앵글로-색슨 종족 사회가 끝났고 봉건 사회가 시작됐음을 나타내 준다. 봉건사회 내내 가족의 삶이 사적인 것으로 나아가려는 경향과 가족 내에서의 남성 권력의 증가하는 경향은 국가와 교회의 지원을 받을 정도로 강화되어 나타난다. 15세기 자본주의 출현 시기 즈음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핵가족 형태를 띠는 가부장적 소농민 가족은 사회의 기본적인 생산 단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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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성별 직무 분리 1

 

#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

(Zillah R. Eisenstein 편집, 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206) @ 10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성별 직무 분리 @

 

 

- Heidi Hartmann -

 

 

성별 노동 분업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사회에서 성별 노동 분업은 남성이 위에 있고 여성이 아래에 있는 위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류학과 역사는 이러한 분업이 항상 위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성적으로 질서 잡힌 노동 분업의 발전과 중요성은 이 논문의 주제이다. 현재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뿌리가 이렇게 성적으로 질서 잡힌 노동 분업 속에 있다는 것이 바로 나의 주장이다. 성별 노동 분업의 위계적 본성이 사라져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자신의 인간 잠재력을 완전히 펼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바로 성별 노동 분

업 그 자체가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탐구해야 할 근본적인 몇 가지 물음들은 첫째, 좀 더 평등한 성별 분업이 어떻게 덜 평등한 성별 분업이 되었는지, 그리고 둘째 이러한 위계적인 노동 분업이 현대 시기에 어떻게 임금 노동으로 확대되었는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인류학적 연구들은 첫 번째 과정, (207) 즉 성적 계급화(sexual stratification)가 생산력 증대, 전문화 그리고 사회의 복잡성과 더불어 발생하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정착된 농업, 사적 소유, 또는 국가 형성 등을 통하여 발생됐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처음에 나타나서 “문명화”가 시작되었을 때 성적 계급화가 발생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출현한 것인 반면, 남성이 지배하고 여성이 종속 당하는 여남 사이의 위계적 질서인 가부장제는 일찍 출현한 것이었다.

 

나는 자본주의 이전에 남성이 가족 내에서 여성과 아이들의 노동을 통제하는 가부장 체계가 성립되었고, 또한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남성이 위계적인 조직 방식과 통제 기술을 습득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좀 더 폭넓은 교환과 좀 더 커진 생산 단위들에 기초한 국가 기구와 경제 체계의 출현에 따라 생겨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분리 같은 것이 시작되면서, 남성의 문제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를 유지시키는 것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직접적으로 개인을 통제하는 체계가 폭넓은 사회 제도에 의해 매개된 체계, 즉 직접적으로 개인을 통제하지 않는 체계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남성에게 유리한 메커니즘은 (1) 전통적인 성별 노동 분업이었고, 또한 (2) 위계적인 조직 방식과 통제의 여러 기술이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기에, 이러한 메커니즘들은 성적으로 질서 잡힌 노동 분업을 임금 노동 체계로 확장시키는 두 번째 과정에서 중대한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많은 낡은 제도들을 해체하고 “자유로운” 노동 시장과 같은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 내었을 때, 15세기와 16세기의 자본주의 출현은 제도적 권위에 기초하였던 가부장적 통제를 위협하였다. 자본주의는 여성과 아이들을 위협적으로 노동력 부문에 편입시킴으로써 가족과 여성에 대한 남성 권력(예를 들어 가족 안에서 여성의 노동력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의 기초를 해체시켰다. 순수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적 경향이 노동자들 사이의 모든 임의적인 지위 차이들을 없애버리고, 모든 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동등한 존재로 만들었다면, 왜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여전히 남성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인가? 가능한 대답은 여러 가지이다. 그 대답들은 두 번째 (208) 과정이 불완전하다거나 또는 불완전한 시장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는 신고전주의 관점으로부터 시장이 명목상 “평등”을 요구하는 것처럼 생산이 위계질서를 요구한다는 급진적 관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설명들 모두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낮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남성(보통 남성, 남성으로서의 남성, 노동자로서의 남성)의 역할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급진적인 관점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생산 과정에서 위계질서를 만들어 내는 자본가로서의 남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시장을 (인종, 성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민족 경향에 따라) 분할하며 노동자들을 서로 서로 경쟁시켜 이득을 본다. 이 논문에서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노동 과정에서의 성별 분업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 왔고 계속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성별 직무 분리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를 유지시키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라고 말할 것인데, 왜냐하면 성별 직무 분리가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저임금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저임금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는데, 왜냐하면 남성들이 여성들을 결혼하도록 조장하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들은 그들의 남편을 위하여 잡다한 가사 일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남성들은 좀 더 높은 임금과 가사 노동 분업을 통해 이득을 본다. 다음으로, 이런 가사 노동 분업은 노동 시장에 의해 영속되며 노동 시장은 가사 노동 분업에 의해 영속된다. 이러한 과정은 서로 맞물려 있는 체계들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에 따른 오늘날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좀 더 극복되고 발전된 가부장제는 여전히 번식력이 강하다. 가부장제는 마치 자본주의 발전이 가부장적 제도들을 변형시켰던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가 취하고 있는 형태로 변한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상호 조화는 결과적으로 여성에게는 악순환이 되었다.

 

나의 주장은 신고전주의와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둘 다의 전통적 관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이 둘은 물질적 토대를 가진 사회 체계인 가부장제를 무시한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직무 분리의 원인을 물질적 토대 외부에 있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로 봄으로써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입증하고자 한다. 맑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부분과 (209) 수세기에 걸친 가부장적 사회 관계들의 효과를 무시함으로써 직무 분리의 원인을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이 논문에서 나는 균형을 잡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윤곽을 잡아 왔고 아래에서 좀 더 발전시키고자 하는 논의의 방향은 아마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논문이 논증할 여지가 없는 명백함보다는 오히려 그럴 듯한 타당성을 지닌 논문이 되었으면 한다.

 

이 논문의 첫 번째 부분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들이 만들어진 것에 대하여 인류학 문헌에서 나타난 증거와 설명들을 간략하게 재검토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자본주의의 출현 시기와 영국과 미국에서의 산업혁명 시기의 성별 노동 분업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재검토하고 있다. 이 부분은 남성-여성 지배-종속 관계들이 임금-노동 시장으로 확대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성별 직무 분리와 그에 따른 남성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남성이 행했던 주요 역할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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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0.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전두환이 잡혀 가는 꿈을 꾸었다.

머리가 전두화처럼 훌러덩 까진 별 넷 장성이 직접 전두환을 호송해 가는 꿈...

그 호송하는 차량 맨 뒷좌석에 나도 타고 있었다는...

근데 난 잡혀 가는 게 아니라 기자처럼 관찰자 정도인 것처럼 보였다는... 

 

근데 이 이야기는 왜 쓰고 있을까...

시어머니도 몰라, 며느리도 몰라...

 

0.

요즘 학교에서 운동을 하는데,

갑자기 왜 운동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무래도 운동하는 게 무슨 수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옛날 소림사의 스님들이 무예를 닦으면서 수련을 하듯이...

그 스님들이 수련을 하는 것은 아마도 잡 상념들을 모두 비워버리고

그 비워둔 곳에 열반의 도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능...

(이거 완전히 조지콩 님의 글쓰기 스타일로 되어가고 있다능...)

 

그것처럼 잡생각이 많은 나로서는 잡생각이 들면

일단 증오와 적개심이 타오르는지라...

그러한 증오과 적개심을 사그라트리려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운동을 해서 숨을 고르는 데만 신경 쓰도록 하는 것처럼 생각이 들었다는...

그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찬 잡생각을 비우고,

거기에 충만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 넣을 수만 있다면...

 

이제 스님들처럼 아예 머리를 밀어볼까...

근데 두상이 안 예뻐서 머리 미는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폐를 끼칠 것 같은...

그로 울 여친께서 가만 안 둘 것이고...

울 엄니도 가만 안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찰 것이고...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별로 머리를 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능^^...ㅋㅋ...

 

0.

요즘도 계속 졸린다.

잠을 7시간 이상 못 자는 날엔 짤 없다.

그렇다고 7시간 이상을 자면 졸음이 안 오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조는 정도가 좀 야갈 뿐이다.

난 보통 1시 반에서 2시에 잔다.

늦으면 4시에 잘 때도 있다.

일어나는 것은 보통 8시인데,

아침 1교시 수업이 있는 날은 짤 없이 6시 반에 일나야 한다.

왜냐하면 하도 곰탱이처럼 행동이 느릿느릿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

 

7시간 이상 못 자면,

학교 오자마자 10분도 안 돼서 30분 이상 졸아주셔야

점심 먹기 전까지 쫌 가준다.

그러다가 점심 먹고 와서 또 10분도 안 돼서 40분 이상 졸아주셔야

운동 가기(4시 반)전후까지 쫌 가준다.

운동 끝나고 저녁을 먹고 와서 또 10분도 안 돼 20분 정도 졸아주셔야

집에 갈 때까지 쫌 살아주신다.

 

문제는 테레비다!

테레비를 안 봐 주셔야 덜 졸 텐데...

집에만 갔다 하면 테레비부터 켜 놓는다.

테레비 안 켜 놓으면 쫌 뭐랄까 적막강산이다.

적막강산, 이거 이거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른다.

얼마나 거시기한지...

 

어쨌거나 저쨌거나...

날이 좀 더 쌀쌀해지면 덜 졸래나...

테레비를 확 끊어버릴까...

그러면 위약금 물어야 한다...

3년 약정으로 할인 요금 내는데,

아직 2년도 채 안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막강산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ㅋㅋ...

 

몰라! 배째!

 

이상 주저리 주저리 뉴스였심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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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7

4. 전략에 관해 몇 가지 주목할 것

 

 

앞서 논의했던 모든 것들은 혁명 전략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첫째,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관련하여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개념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목적을 위한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둘째, 고전 맑스주의에 의해 규정된 잠재적인 것이 과연 앞으로 미국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몇 가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그리고 이론과 전략의 발전이 상호 연관되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어느 정도 분리된 행위들로 본다. 이론을 통해 당신은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전략은 그 가능성들로부터 나타난다.

 

이런 논의는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지만 그 이론의 전략에 관한 몇 가지 논의들을 발전시키기가 다소 망설여진다. 전략은 앞으로 이론을 사용하려는 시도들로부터 완전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이론 논의들로부터 추상적으로 전략을 규정하려고 할 때, 현재 존재하고 있는 혁명적 전략들을 현실에 강제로 적용하고자 하는 경향은 너무나 크다. 현재 존재하는 혁명 정식들은 혁명적 변화를 구성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전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 전략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은 그 전략이 생산, 재생산, 소비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일상적인 투쟁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점이다. 혁명적 의식의 잠재성은 여성들이 집과 일터 양쪽에서 착취 당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타난다. 여성들은 현재 노동력 부문에서 저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고 무보수로 가족 체계를 유지시키고 있다. 이것은 의식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이다. 여성들은 정치적 행위를 조직할 필요가 있으며 여성 억압이 자본주의 노동 분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 이해하는 것을 토대로 자신들의 억압에 대한 정치적 의식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Nancy Hartsock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의 힘은 일상의 삶과 부닥치는 데서 나온다. 현대 페미니즘의 의미는 일상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석 방식을 다시금 만들어 내는 것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 누군가의 일상적 삶(whose everyday life; 여성의-옮긴이)에 대해 물어야 한다. 여성들의 일상적인 삶들 사이에는 현실적인 차이들이 있지만, 또한 계급과 교차하는 구성 방식의 토대(a basis for cross-class organizing)를 제공하는 접촉 지점이 있다. 그 현실적인 차이들이 인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리고 정치적 우선권이 주어지지만), 페미니즘의 투쟁은 가부장제에서 여성들이 공유하는 특별한 역할로부터 나타나는 공통성에서 출발한다.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는 처음에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다. 그들의 여성으로서 그들의 억압을 느꼈고, 그런 후에 그들이 이런 억압 체계에서 자본주의의 역할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또한 그들은 사회주의에 전념하게 되었다. 비슷하게, 점점 더 많은 가사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이 아주 거대한 체계의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해 나가고 있다. 집(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그들이 전문직이건 비전문직이건 간에, 경쟁력 있는 어머니와 가정 보호자가 되라는 압력과 근심을 견디며 살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이중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 좌파들(Male leftists)과 여성 사회주의자들은 종종 여성이 집안에 격리되어 있고 그녀 남편의 계급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 결코 조직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성 사이의 계급 갈등 때문에 계급과 교차하는 구성하는 방식이 모든 점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유산, 건강관리, 강간, 아이 돌봄과 같은 문제와 관련해서는 가능하다. 우리가 우리의 계급 차이들을 의식적으로 다루고 그 차이들을 무시하는 대신에 그 차이들에 우선성을 부여할 때, 계급과 교차하는 구성 방식은 진지하게 노력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동시에 여성들의 삶은 기존의 가부장제적 통제와 매우 비슷하다. 바로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잘 작동하는지 좀 더 잘 알 필요가 있고 그럼으로써 이것과 관련하여 우리의 정치적 행동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모든 여성을 움직일 수 있는 전략은 결코 시도된 적이 없다. 이런 전략의 실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여성이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게 될 때 (전략 실행의-옮긴이) 시작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 끝 -

 

** 다음에는 같은 논문 모음집에 있는 하이디 하르트만(Heidi Hartmann)의 논문 [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성별 직무 분리](Capitalism, Patriarchy, and Job Segregation by Sex)을 해석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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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6

3. 자본주의 가부장제에서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 :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을 향하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상호 연관성을 분석하려는 과정에서 생시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언어가 가족과 경제를 분리된 체계로서 다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계적인 노동의 성별 분업은 이 두 가지가 만들어 내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에 따르는 인간의 행동, 목적, 목표, 욕망 그리고 꿈을 규정해 주는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룬다. 이 성별 분업은 여성과 남성을 그들을 대표하는 위계적인 성 역할로 분리하고 그 역할과 관계되는 의무들을 가족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구조화시킨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상호 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진술은 가부장제가 자본의 필요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 가부장제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본주의는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하여 가부장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성적 위계 체계로서 남성의 우월성이 (28) 자본주의에 필요한 질서나 통제를 자본주의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진정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제 통제 체계는 사회와 경제적 체계를 부드럽게 기능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며, 그리하여 결코 그 토대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남성 우월 체계로부터 나타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겉보기에, 이익과의 관계와 사회적 통제와의 관계가 가부장제와 뒤엉켜 있으며(그렇지만 결코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완전한 과정이 된다. 각 체계의 특수한 요소들은 다른 체계에 의해 필요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의 필요에 따라 규정된다. 이러한 진술은 앞의 주장, 즉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를 사용하는 동시에 다른 체계의 특성을 지키기 위하여 다른 체계의 필요 주변에서 다른 체계를 조직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유지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체계는 자신의 특성을 잃어 버릴 것이며 이와 더불어 자신의 독특한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단순하게 이것을 말한다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부장제(남성 우월성)는 정치적 통제를 위해 사회에 성적인 위계 질서를 제공할 것이지만, 하나의 정치적 체계로서 경제적 구조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반면에 이익 추구를 원동력으로 삼는 경제적 계급 체계로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질서를 이용한다. 이 둘(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은 둘 중의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라 둘의 특수한 혼합물인 사회의 정치 경제를 함께 형성한다. 이렇게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진술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진술은 이 두 영역 모두에 존재하는 관계들을 끊어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는 사회의 경제적 계급 관계들과 그 관계들을 작업장 내에서 조직화하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일련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진술은 모든 점에서 두 체계 사이의 조화를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발전된 자본주의로 나아가 보면, 이러한 관계 맺음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볼 수 있다. 노동력 부문(경제적 계급 영역-옮긴이)에 여성의 편입이 점점 더 늘어나면, 가부장적 가족 관계들과 관련된 몇몇 통제는 허물어지게 된다(이중 노동은 보다 분명해진다(the double day becomes more obvious)). 그러나 여성을 노동력 부문에 게토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사회의 성적인 위계 체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여성의 위계적인 통제 체계를 성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적 (29) 위계와 통제에 대한 복종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값싼 노동을 구한다는 것이 여성을 노동력 부문의 모든 부분들로 완전히 통합시킨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비록 여성의 노동이 값 싸다고 하지만, 사회의 필수적인 질서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여성 노동의 싼 가격 모두를 유지시켜 주는 통제 체계는 여성이 (가사노동으로부터-옮긴이) 노동력 부문으로 분리돼 들어감으로써 보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의 이중 노동(woman`s double day)과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는 오늘날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여성 삶의 현실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모든 여성이 어머니(그리고 비노동자)로서 규정된다고 할지라도, 미국 여성의 약 45%(3천 8백 6십 만 명)가 임금을 지불 받는 노동력 부문에서 일을 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노동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전체 노동하는 여성의 4분의 1 가까이가 독신이다. 19%는 과부이거나 이혼했거나 별거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 26%는 년 소득 1만 달러 이하의 남성과 결혼한 여성이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 내에서 여성은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 여성을 어머니로서 성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녀를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집안 노동에 머물게 하거나 그녀에게 부과된 성적인 열등성 때문에 그녀를 낮은 임금에 고용할 수 있도록 한다. 실업률이 문제라면, 여성은 전혀 일을 구할 수 없거나 더 낮은 비율로 일을 구하게 된다. 노동과 사회의 성적 분업은 여성이 임금을 받는 경제 영역에 있다고 하더라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일하는 어머니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 순응한다. 그리고 두 개의 일은 한 개 일에 해당하는 임금 가격보다 더 적은 가격으로 수행된다.

 

가사노동에 포함된 모든 과정은 현존하는 사회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준다. (1) 여성은 가부장적 구조들(가족, 주부, 어머니 등)을 이런 역할 수행을 통해 안정화시킨다. (2) 동시에, 여성은 임금을 받는 노동력과 그렇지 못한 노동력 모두로 새로운 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여성은 사회의 남성들과 아이들을 돌본다. (3) 여성은 또한 저임금으로 노동력 부문에서 일한다. (4) 여성은 소비자로의 역할을 함으로써 경제를 안정화시킨다. 생산의 또 다른 측면이 소비라고 한다면, 자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가부장제이다.

 

사회와 노동의 이런 성적 분업이 (30) 자본주의에 선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업은 발전된 자본주의의 필요 때문에 점점 더 제도화되었고 특히 핵가족의 측면에서 규정되었다. 이제 그 분업은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었던 것보다 더 많은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前)자본주의사회에서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은 집, 농장 또는 경작지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같이 일하였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이었지만, 일을 구성하는 방식은 이러한 성적 역할 구분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남성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임금 노동 경제로 편입되었다. 여성은 집안에 갇히기 시작했고 많은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의해 점점 더 비생산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여성들은 성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배타적으로 여성의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성이 산업 자본주의 이전에도 어머니였지만, 이것은 배타적인 역할이 아니었다. 반면에 산업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가정주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 보면, 가정주부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중적 특성을 지닌 노동자로 나타난다.” 여성이 집안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노동으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생산적 노동이 임금 노동, 즉 잉여가치(자본)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사회의 생산 조건들은 가족 내에서의 생산, 재생산 그리고 소비를 규정하고 또한 그런 형태를 구체화시킨다. 그렇게, 또한 가족의 생산, 재생산 그리고 소비 양식은 상품 생산에 영향을 준다. 이것들은 모두 정치 경제를 규정한다. 정치적 질서와 통제 체계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이윤이 통치 계급에게 기본적으로 우선되는 영역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경제 영역에서 사회와 노동의 성적 분업은 특별한 목적에 기여한다. 이 분업은 가족을 통해 사회를 안정화시킨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노동,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을 조직하는데, 이 가사노동에는 무임금이거나(가정주부), (집안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얼마 안 되는 임금(limited pay)이거나 또는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력 부문에서의) 불평등한 임금의 경우가 있다. 이 마지막 범주는 계급 구조 내에서의 노동의 성별 분업에 따라 여성에게 궁극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 임금을 지불 받는 노동자로서 여성의 지위는 이윤 계기를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의 위계적인 성적 분업의 직접적 반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규정된다.

 

(31) 모든 개별적인 남성이 그들을 위해 수행되는 노동(labor)과 연관하여 이익을 얻는 반면에, 한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여성 노동(women`s work)의 기본적인 배치로부터 이윤을 얻는다. 계급과 상관없이, 남성들은 (이익을 얻는 정도가 다를지라도) 그들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얻는 여러 특권의 체계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이데올로기와 남성 위계 구조가 사회의 기초가 아니었다면, 여러 특권으로 이루어진 체계는 그 자체 결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계급 체계를 통해 만들어진 인위적 욕구들과 함께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을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위계이다.

 

가족을 유지하고자 지배계급의 욕망은 최대 이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위계적인 질서를 사회에 부여하는 노동 분업에 가족을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연루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단 노동의 성별 분업이 변화한다면, 특히 자본주의 질서와 관련하여 도전을 받게 된다면, (특히 가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전체 사회에 폭넓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의 여러 구성 형태 중 하나도 도전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는 자유로운 노동 풀(pool), 그리고 값싼 노동 풀(pool)뿐만 아니라 성적 위계 그 자체인 기본적인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구성을 위태롭게 만든다. 사회의 성적 위계를 함축하고 있는 권력 배치로부터 도출되는 그러한 질서와 통제는 해체될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변경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계급이 여성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계급 범주에 꼭 들어맞는 방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범주 자체를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여성의 복잡한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여성의 의식과 관련하여 계급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계급 범주는 현재 기본적으로 남성의 측면에서 규정되고 있고, 여성은 그녀의 남편이 맺는 생산수단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계급에 귀속된다. 여성은 자율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중간 계급(middle-class)으로 불리는 것은 어떤 척도에 따른 것인가? 중간 계급 여성의 지위가 중간 계급 남성의 지위와 상당히 차이가 날 때 그녀의 삶이 노동 계급 여성의 (32) 삶보다 훨씬 “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가사노동자(houseworker)로서) 전혀 소득이 없는 여성은 누구이며 그녀의 남편이 중간 계급이기 때문에 중간계급이라고 불리는 여성은 누구인가? 그녀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돈을 버는 그녀 남편과 똑같은, 그녀의 삶을 넘어서는 자유, 자율성,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녀의 지위는 남은 임금의 직업을 가진 독신 여성의 지위와 어떻게 비교되는가?

 

 

명확하게 상위 계급 또는 중간 계급(자세하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건 간에)이라는 딱지를 붙인 남성은 자신의 상대방인 여성보다 더 많은 돈, 권력, 안전,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남성의 부양에 의존하고 있는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그리고 주인(남성-옮긴이)은 무엇을 베풀지만 거두어 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서 계급 표식이 의미가 없다거나, 또는 계급 특권이 여성들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가정주부들(가사노동자들)이 하나의 고유한 계급이라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현실적인 유사성이 무엇인지를 다루기 전까지 우리의 현실적인 계급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담고 있다. 나는 우리가 여성과 남성들 사이의 관계와 계급 구조, 생산과 재생산,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그리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등의 측면에서 여성들 사이의 권력 차이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 단어와 개념적 도구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후라야 우리는 여성을 조직하기 위한 우리의 이해에 대해 이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유사성은 이러한 갈등들을 재규정하는 그 무엇이 된다. 페미니즘 계급 분석은 전체로서의 경제 영역 안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과 관련하여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구별, 즉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 사이(전문직 여성 대 비전문직 여성 사이), 가사노동자들(가정 밖에서 일하지 않는 가사노동자 그리고 가사노동자이면서 또한 밖에서 일하는 여성 사이), 생활 보조금을 받는 여성들, 실업 여성들 그리고 전혀 일을 하지 않는 부유한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구별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 구별들은 더 나아가 인종과 결혼 상황과 연관하여 규정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33) 이러한 각각의 범주에 속하는 여성들이 다른 범주에 있는 여성들의 경험들을 재생산, 아이 양육, 섹슈얼리티, 소비, 가정 유지라는 행위 속에서 어떻게 공유하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이러한 계급 탐구 분석에서 우리가 앞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잡하고 다양한 패턴인데, 다양한 눈금을 가진 이러한 페미니즘의 개념화는 여성의 현실적인 삶과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성과 계급 차이들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이 모델은 사회의 성적 위계와 자본주의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 맺음이라는 문맥 안에서 계급 차이에 주목하도록 만들 것이다. 희망적이게도,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체계가 아닌 이러한 체계들 사이의 관계 맺음을 계속 탐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러한 페미니즘 계급 분석은 앞으로 여성의 서로 다른 경제적 현실을 다루게 될 것이지만, 이 분석을 통해서 크게는 (34)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필요라는 문맥 속에서 규정되는 여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지만, 현실적인 경제적 계급 차이들을 경험하는 가족 구조를 통해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고립된 가정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소외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 아닌 창조적 일을 하기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잘못된 의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개념들로부터 나타나는 무제한의 섹슈얼리티를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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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5

종합 : 사회적 페미니즘

 

 

1. 착취와 억압

 

 

맑스주의 분석은 현존하는 권력 관계를 경제적 계급 관계의 관점으로 역사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을 생물학적 현실로 다룬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의 기원과 가부장제적 뿌리라는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한다. 바로 이러한 분석 안에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서로 독립적인 체계가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동일한 체계가 되지도 않는다. 이 둘은 그 현실적인 형태를 놓고 본다면, 서로 의존적이다. 권력과 억압과 관련하여 자율적인 측면으로서 인종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 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억압에 관해 아래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인종이 권력 규정에 있어 핵심적 요소로 나타나지만, 나는 인종에 관한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을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성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여성 또는 소수 인종의 경우에서 억압과 착취를 동등한 개념으로 보았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동등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착취는 남성과 여성의 경우에 적용되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의 경제적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억압은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관계들 안에서 규정되는 여성과 소수자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착취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 남성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임금 노동자로서 그녀의 착취로부터 비롯되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성 위계질서 안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존재를 어머니, 가사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로서 규정하는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인종 억압은 여성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사회의 인종 분리 속에 그녀를 위치시킨다. 억압은 착취를 포함하지만 (23) 보다 복잡한 현실을 반영한다. 권력(또는 그 반대 극인 억압)은 성, 인종 그리고 계급으로부터 도출되며,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 인종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 둘 다를 통해서 나타난다. 억압은 노동과 사회의 성적이고 인종적 분업이라는 위계적 관계를 반영한다.

 

나는 내가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 의존성을 파악하는 데 한정해서 논의를 진행해 갈 것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발전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부터 그리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둘 다 모두 가부장제와 새로운 산업 자본주의 사이의 발전된 관계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규정해 보자면, 그것은 성과 계급, 사적인 것과 공적인 영역,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가족과 경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조건이라는 이분법을 깨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억압을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라는 착취 당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보았다. 그들은 여성의 억압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가사 노예를 임금 노예와 동일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둘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여성이 노동력을 가지고 노동을 하였을 때 그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서 착취 당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녀가 가사 노예와 관련되었을 경우 그녀를 비임금 노예로 보았다. 자본주의가 여성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여졌지만, 거기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모두 어떻게 여성 억압을 규정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 오늘날, 특히 급진 페미니즘의 통찰 덕분에 우리는 착취와 억압의 동등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임금 노동으로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맑스 고유의 범주를 사용할 경우, 가사 노예가 임금 노예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임금이 지급돼야 할 것이다.

 

맑스주의 분석에서 억압을 착취로 환원시키는 것은 경제적 계급 구조를 사회 권력 구조와 동등한 것으로 놓는 기초에 바탕을 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게 있어서, 여성 억압은 그녀의 계급 지위 (24) (그녀의 착취)보다 더 큰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지위는 구조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가부장제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계급 구조 안에서 맺어지는 위계적인 성적 사회 질서와의 특별한 관계이자 그 질서 안에서의 기능이거나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인간 활동에 초점을 두는 성적 사회 질서 내에서 계급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들(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사회 질서)은 함께 존재하며 잘못하여 분리시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문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룰 때, (경제적 또는 성적인) 물질적 현재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리를 깨트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가부장제의 기초가 되고 있는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은 물질적 형태(성 역할 자체)와 이데올로기적 실재(이러한 성 역할을 규정하는 고정 관념, 신화 그리고 이념들) 모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떤 내부적 망으로 짜여져 존재한다.

 

여성의 현실적 존재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할 때, 자본주의만을 파악하는 일은(또는 가부장제만을 파악하는 일은) 여성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Juliet Mitchell이 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폐지와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도전은 그 자체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폐지가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제도들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폐지가-옮긴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르게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성별 노동 분업은 소련, 쿠바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들의 역사는 서로 다르고, 또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한계는 그 나라 문화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된다. 특히 쿠바와 중국에서 여성 삶의 실질적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이 이런 나라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최근에 쿠바에서만 성별 노동 분업이 혁명의 특수한 문제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그리하여 정의상, 가부장제는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르게 성별 위계를 제도화함으로써 다르게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교차문화적(crosscultural)이다. 성 역할의 윤곽이 사회적으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권력은 남성을 통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모두 다 가부장제가 (25)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반면에 맑스주의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생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가부장제, 즉 자본주의에서의 성 역할을 통한 남성의 권력은 핵가족 내에서 제도화된다. Mitchell은 이러한 것을 “선사시대에 살해된 아버지의 법칙(law of the prehistoric murdered father)”과 연관시키고 있다. 우리 삶의 여명기에 남성들 사이의 이러한 신비적 범죄 속에서 하나의 사회 집단으로서 가부장제의 확실한 뿌리를 찾으려는 와중에, Mitchell은 가부장제를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 속에 있는 유물론적 정식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제가 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관점에 좀 더 치우쳐 가부장제를 논의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그녀는 보편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뿌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문화는 오늘날 본래 이데올로기 형태 속에 존재하는 교환 체계를 통해 규정된다. Mitchell의 경우, 가부장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보편적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에 선행한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적 차이에 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으로부터 도출된, 현존하는 사회의 성적 질서를 통해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남성들은 여성이 인류를 재생산한다는 사실로 해석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재생산과 이 재생산을 남성이 정치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로부터 재생산 관계들은 여성 억압의 특수한 형태로 떠올랐다. 가부장제 문화는 사회의 성적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역사적 시기로부터 다른 역사적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날 사회의 성 분업은 몇 년 간의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의해 생겨난 현실적 차이들에 기초한다. 물질적 조건들은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며, 그 다음에 이데올로기는 현실과 이전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거기엔 두 가지 방식의 흐름이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사의 생산물들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관계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로부터 나타난 관계, 즉 재생산관계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생산관계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 열쇠이다. 페미니즘 유물론을 통해 우리는 바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특수한 현실적 상황을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 (26) 계급적 관점의 맑스주의와 성적 관점의 급진 페미니즘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접근법들은 여성의 삶 속에 있는 관력 관계의 현실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2. 페미니즘 유물론의 선구자들 : de Beauvoir와 Mitchell

 

 

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The Second Sex)에서 역사와 성 사이의 상호관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성 분업을 인간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존재론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학적 문맥 속에서 생물학 사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 규정되었고 그 자체 “타자”의 역할 속으로 던져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프로이트의 성 일원론과 엥겔스의 경제 일원론 모두 여성 억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고 있다. De Beauvoir의 초기 통찰들은 Juliet Mitchell에 의해 한층 더 발전하였다. Juliet Mitchell은 『여성의 토지』(Woman`s Estate)에서 계급적 사회주의 이론이 여성의 억압을 너무 협소하게 가족 안에 한정시키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일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즉 사적 소유와 계급착취의 제도의 측면에서 여성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네 가지 기본적인 구조, 즉 생산, 재생산, 섹슈얼리티 그리고 아이들의 사회화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은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목적을 규정한다. 모성은 역사적 필요로서 가족을 내놓았고, 가족은 여성의 세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성적 불평등을 낳는 생산과 공적 삶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자본주의 가족은 여성의 억압적 조건을 강화한다. 가족은 자본주의의 대부분이 분열하는 가운데서도 조용히 유지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떠받친다. 가족은 생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대한 소비 시장을 공급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버팀목이 된다. 또한 가족은 사회의 신념 구조의 기초가 되는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다. 비록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이 사회 경제적 현실과 거리가 멀지라도 말이다.

 

(27) Mitchell은 가족만의 해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의 상황이 필연적으로 사실상 qua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Mitchell은 “사회주의가 가족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사회적으로 승인된 관계들, 즉 가족 속에 강력하고도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는 관계들의 다양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Mitchell 분석의 중요성은 그녀가 여성이 재생산의 존재이며, 성적 존재이고, 개별적으로 노동하는 개인이며 또한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성 자신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경험하는 권력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부분에 여성 억압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권력은 복잡한 실재(현실)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과 정치 경제학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를 느끼는 좌파이다. Mitchell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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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4

2. Shulamith Firestone : 성 변증법

 

 

1970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성 변증법』에서, Shulamith Firestone은 급진 페미니즘을 모범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특별한 억압은 여성들의 유일한 생물학적 생태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여성의 재생산 기능은 본래 여성의 억압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 가족도 그러하다. Firestone에 따르면,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적인 기초이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그룹에 의한 한 그룹의 지배는 이러한 남자/여자의 생물학적 구별로부터 나타난다. (Robin Morgan의 새 책 Going Too Far에서 볼 수 있다시피, 1970년 이래로 급진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변화하고 발전하였지만, 급진 페미니즘을 단일화시켜 주는 끈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우선해야 할 것으로서 성 계급 개념이다.)

 

Firestone이 성 계급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를 둘러싼 관계를 의미하는 경제적 범주로서의 고전 맑스주의의 계급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성으로서 여성은 하나의 계급이며, 남성은 이 계급에 대립하는 다른 계급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은 성 권력이라는 역학을 정교화하기 위해 길고도 중요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경제적 이론에 답하면서도 그 이론을 거부하려는 과정에서,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억압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대체하면서 인위적으로 성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킨다. 그녀는 풍부하고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서 좀 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억압을 좀 더 복잡한 현실로 바라보기보다는 현대 시대의 주요 억압으로서 성을 다루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Firestone이 경제적 억압을 여성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만, 그 경제적 억압을 억압의 주요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9쪽)여성의 상황에 관한 이러한 양자택일 식의 정식화가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녀는 여성 현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분석이 여성 억압의 특수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처럼, Firestone의 급진 페미니즘 관점도 우리의 경제적 현실의 실재 또는 역사적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부장제는 보편적인 초역사적 권력 구조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페미니즘 혁명은 성별 분업 자체의 제거와 생물학적 가족의 해체를 통한 남성의 특권의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 여성은 그녀의 억압적 생물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이룩할 수 있으며, 여전히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성적 자유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의 몸이 그녀의 현실 척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문제는 그녀의 몸이 그녀의 재생산 생물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관점에 중심을 둔다. 이것은 자유가,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인류 발전의 긍정적 모델이 되는 곳의 자유가,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을 통합시켜 갈 수 있는 자유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단계의(변증법의 단계에서 볼 때의 부정적 단계의-옮긴이) 함의이다. 섹슈얼리티(성성)가 명백히 여성의 유일한 억압이지만, 이것이 다음과 같은 점, 즉 섹슈얼리티가 여성의 총체적인 상황을 포괄하고 있다거나 또는 섹슈얼리티가 모든 차원의 인간 잠재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여성이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를 말해 주지만, 여성을 권력의 일반적 구조와 연결시켜 주지 못한다. 섹슈얼리티는 우리 사회 권력 관계 구조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문제들이 있다. Firestone은 맑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맑스의 사회적 역사적 구조를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생물학을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인 상태로 취급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Firestone이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평등은 사회적 문맥에서만 불평등이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만, 이것을 불평등으로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에다 강제로 사회적인 (불평등-옮긴이)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결코 불평등한 성 계급 체계를 그 기원을 통해 정당하게 밝힐 수 없지만, 그렇다고 둘(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불평등-옮긴이) 중 하나로 그 체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Firestone은 (20쪽)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 고유한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봉건 사회에서 성 역할이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경제적이고 성적인 물질적 삶이 다르기 때문에 봉건제에서의 성 역할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성 역할과 상당히 다르게 경험된다. 핵 가족이 전자본주의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현실화된다. 여성 억압에 보편적인 요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존재의 특수성이 그 보편성에 속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모든 역사가 가부장적일 수 있지만, 이것이 각 역사적 시대들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부장제 존재의 일반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 이러한 특수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부장제는 단순히 생물학적 체계로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를 지닌 정치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Firestone의 비사회적이고 비역사적 틀은 특히 그녀가 기술을 논의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피임과 자궁 외 재생산(extrauterine reproduction)을 통해, 기술이 여성을 그녀의 몸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이 Firestone의 관점이다. 따라서 기술은 여성 해방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피임이 여성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지만, 출산 통제, 낙태 권리 등등이 재생산로서 여성의 역할을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만들 정도로 발전돼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기술이 사회 권력 구조의 고유한 차원이라고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Firestone의 분석의 타당해 보이는 측면은 사라지게 된다. 남성 지배 계급의 욕구들은 기술적 발전을 규정한다. 권력에서의 남성 지배 계급의 변화 없이 (그리고 기술의 목적을 규정하는 그 계급의 변화 없이), 기술은 해방의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

 

Firestone이 경제적 고통이 적어도 여성의 다른 질병들만큼이나 여성 억압에 기여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분석 요점은 성 억압을 경제적 계급 사회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잘 교육 받았을 때조차도 남성만큼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은 (21) 자녀들을 돌보려고 결심할 때 이러한 돈의 부족에 시달린다. 이러한 점은 그 자체 가족 내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기반이 되는 생물학적 주장 전반을 쓸모없게 만든다. Firestone은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와 성 계급 체계 내에서의 그 기원을 연결시키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경제적 억압이 역사적으로 성적 억압을 기본적으로 대변해 왔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이 두 체계는 서로가 서로를 떠받친다. 이 둘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러한 관계맺음은 누군가가 이 관계맺음을 인과적이고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려고 할 때만 왜곡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효과는 성적 억압이 근본적인 억압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실업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일반적인 문맥 속에서 여성이 초과 착취 당하는 사회의 이러한 여성 지위를 통해 정치적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성적 억압이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현실적 관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맑스가 근본 모순으로서 계급 착취에 초점을 두었던 것과 다른 것인가? 사회적 실재는(현실은) 이러한 이론적 추상들을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근본 모순” 신드롬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똑같은 불충분함으로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Shulamith Firestone과 가장 최근의 Robin Morgan 이 두 사람은 정치적 현실(실재)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도한 단순화를 거부해 왔다. 우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일면성을 그러한 단순화로 대체시킬 필요가 없다. 성과 계급 현실을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둘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성 계급 체계와 경제적 계급 체계 사이의 관계와 연결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저작 속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권력은 이분법의 한 쪽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권력은 성적인 것에 기초해 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규정하는 이론적 분석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권력 체계로서의 가부장제와 여성의 생물학 사이의 상호작용들은 분리된 채로 있다. 여성의 억압을 역사적으로 정식화시키는 대신에, 우리에게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분법의 마지막 산출물은 이러한 모순들과 그 모순들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관계맺음을 분리시킨다. (22) 결론적으로, 맑스주의나 급진적 페미니즘 둘 다 관념과 현실 조건 사이의 상호 관계맺음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현실이 단편적인 것이 된다면, 그러한 현실의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이 현실로부터 분리된다는 것 또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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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졸릴까...

봄도 아닌데,

무척 졸린다.

특히 이젠 낮에(어떤 때는 아침, 저녁으로도) 조금씩 책상에 엎드려 있지 않으면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는다...

(네가 운동 선수냐! 컨디션 어쩌구 저쩌구 하게! ㅋㅋ)

 

지난 학기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번 학기 들어와서는 정말 심해졌다...

운동을 새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할 일은 많은 것 같은데,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지는데,

자꾸 졸음이 쏟아지니 짜증이 살살 난다.

 

마음을 조급하게 먹어서 그런가?^^

고삐를 조금 죄는 것도 마음을 조급하게 먹는다고 자기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날 좋은 가을날에 건물 안에 처박혀 있으려니,

살짝 부아가 난다...

이 좋은 날 훌훌 털고서 떠나지 못하고 건물 안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가까운 산에라도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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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3

안티 테제 : 성(Sex)으로서의 여성

 

 

1. 가부장제와 급진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의 시작이 보통 최근 여성해방 운동(대략 1969~1970년경)과 일치한다고 보더라도, 급진 페미니즘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Kate Millett 이전에 성 정치학을 이야기하였던 여성들인 Mary Wollstonecraft, Elizabeth Cady Stanton, 그리고 Harriet Kate Mill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그들이 가진 일면적인 방식으로 “성적 영역들”로 조직된 사회에서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지위(caste)와 연관해 권력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노동 분업과 사회를 통해 단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개혁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적 억압, 성별 노동 분업과 경제적 계급 구조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 권력에 관해 이전의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투표나 법적 개혁 투쟁을 가부장제를 해체시킬 수 있는 혁명적 요구로 대체시킬 수 있었다. 생물학적 가족, 사회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 그리고 성 역할 자체는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어야 한다.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은 우리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역할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위계적 분업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가부장제 문화를 위한 근본적인 통제 기구이다. 그것은 역할들, 목적들, 활동, 어느 누구의 노동이 성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것은 남자/여자(male/female)라는 생물학적 구분이 사회적 기능들과 개인 권력을 구별해 주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급진 페미니즘은 Wollstonecraft, Stanton, 그리고 Taylor의 분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오늘날 좌파의 정치 이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급진적 사회 분석 역시도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를 성적 계급 체계 안에 내재해 있는 그 구조의 기원과 관련시키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인 것이 아닌 성적인 분석은 어떤 좀 더 넓고 의미 있는 혁명적 분석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났다. 이러한 여성들은 권력에 관한 맑스주의의 정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거나, 또는 여성의 억압과 착취의 동등함을 만족스럽게 밝히지 못했다. 경제적 계급은 그녀들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가부장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가부장제적인 것에 대한 투쟁은 성 사이의 투쟁이 되었다. 그 투쟁 전선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그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그어지고, 그 결정 관계들은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관계들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남자들이 경제적 특권과 상위의 권력을 가지는 성적 권력 체계로 규정한다. 가부장제는 사회를 남성 위계 체계로 만든다. 가부장제의 법적-제도적 기초가 좀 더 뚜렷하였지만, 그 기초적 권력 관계들은 오늘날 변하지 않고 있다. 가부장제는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을 통해서 보존되고 있다. 가부장제는 경제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보다는 생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의 힘과 통제를 통해 나타났던 가부장제의 뿌리들은 여성들의 자기 재생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 위계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경제적 계급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 조직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급진 페미니즘은 사적인 것과 공공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에 다리를 놓는다. 사적인 것으로의 성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 되며, 바로 사회의 성 정치학으로 인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억압 지위를 공유한다. 성 분업을 통한 사회 구조화는 여성들의 행동, 일, 욕망과 열망을 제한한다. “성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적 지위 범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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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2

(12쪽) 2. 역사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착취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초기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을 가족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성별 활동을 통한 가족 내에서의 “자연스러운” 노동 분업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활동이 노동 분업의 시작이다. 바로 이러한 활동이 가족 내에서의 소유를 처음 나타나게 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이것은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의 노예가 될 때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잠재적 상태의 노예 상태는 여전히 거의 세련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첫 번째 소유 상태이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에서조차 그 상태는 타인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르는 근대 경제학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 된다. ……

 

 

여기에는 성별 노동 분업 자체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의 세련되지 못했지만 성별 노동 분업에 대한 초기 통찰의 싹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통찰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그 통찰을 제한하는 것은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타난 이러한 노동 분업이 사적 소유와 일치하고 동일시된다는 점이며,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가 동일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노동 분업은 그 자체 어떤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출산 행위로 인한 노동 분업을 통해 나타난 소유는 자본 관계로부터 나타난 노동 분업과 구별되지 않는다. 재생산과 생산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둘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 관계 속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불평등이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생산이 노동 분업의 첫 번째 근원지라고 알려지더라도, 결코 어떤 특별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그것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과 같은 여성의 조건에 관한 개략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 분업은 이 단계에서 여전히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자연발생적인 노동 분업이 좀더 확장된 것에 머무른다. 따라서 사회 구조는 가족의 확장에 머무른다. 가부장제 종족 우두머리들이 있고 그 아래에 그 종족 구성원들이 있으며 마지막엔 노예들이 있다. 가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노예제만이 점차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13쪽)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노동 분업은 여기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또한 이것이 “필연적” 또는 “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분업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용되었던 분업이다. 여기서, 따라서 가족 내에서의 노동 분업은 가족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것은 이후 『공산당 선언』에서 나타난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초창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사회와 그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맑스와 엥겔스의 가족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성별 활동 내에서 노동 분업이 발전돼 나오지만, 그 다음에 이 노동 분업은 자연적인 소질(예를 들면 체력), 욕구, 우연 등에 의하여 저절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전해 나온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자녀 양육을 위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노동 분업이다.” 따라서 첫 번째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에서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적대가 어디에 기초하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의 주장은 첫 번째 계급 적대가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여남 사이의 적대가 계급 적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도 여남 사이의 갈등에 관해서 계급 갈등으로 말하였다. 가족 내에서 남성은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부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생산수단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힘(권력)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재생산이라는 성별 활동과 관련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범주화함으로써, 재생산관계는 생산관계 아래로 포섭된다.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의 여-남(male-female) 관계들을 사회의 노동 분업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들을 재생산과 관련된 분석 범주 아래로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딜레마가 그의 분석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 분업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 퍼져 나간다는 점을 엥겔스가 인정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도 가족 내에서 여성이 노예화되는 것을 설명하는 분석 범주들이 전적으로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가족은 (14쪽) 역사적인 경제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은 그 자체 경제를 규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은 경제적 관계와 일치하는 노동 분업의 근원으로서 더 이상 이야기되지 못한다. 경제적인 생존 양식이 가족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첫 번째 노동 분업”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분석 형태를 잊어버리고서는, 가족이 그 자체 어떻게 경제 양식을 떠받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대신에 가족이 자본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해체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사회적 생산에 대립하며 그 바깥에 있는) 사적인 가사 영역에서 여성의 생존 문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이 문제를 사적 소유에 기초해 있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생산 활동을 제한하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가족은 정치 경제의 축소판이 되었다. “가족은 이후에 사회와 국가로 확산될 모든 모순을 축소판으로 가지고 있다.” 남성은 부르주아지이고,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엥겔스가 남자(male)의 범주를 가족 바깥에 있는 부르주아지로, 그리고 여자(female)의 범주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 아니라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계급 위치를 정한다. 엥겔스는 계급 안에서의 구성원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하여 가족 안과 바깥에서 서로 다른 규준(criteria)을 사용한다. 이런 범주가 권력과 같은 것에 기초해 있었다면, 동일한 분석 단위가 가족 안팎 둘 다에서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애초부터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부르주아지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거기에는 여전히 명백하게 고려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는 (1) 가족에서의 계급 구별을 부르주아니-남자/프롤레타리아트-여자로 할 수 없으며, 또한 (2) 사회에서의 계급 구별을 생산수단의 유무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터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가족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해서 애초부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은 재생산 관계 내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들로부터 벗어난 권력 개념과 관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15쪽) 그 시기에 대부분 엥겔스는 억압과 착취를 동등하게 보는 단순한 방정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한다. 엥겔스가 가족이 가사 노예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사 노예제나 남편의 임금-노예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점을 믿고 있었다. 이 두 노예제는 자본주의로부터 도출되었다. “여성해방은 오로지 여성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하찮은 일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적인 평등은 자본의 착취가 소멸되고 사적인 가사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바뀜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성별 노동 분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엥겔스에게는 공적인 가사노동조차 아마도 거의 여성의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이러한 분석은 가족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며 이러한 노동 분업이 성별 활동에서의 노동 분업을 반영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개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요소는 최종 심급에서 직접적인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생존수단의 생산, 즉 식량, 옷,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재 자체의 생산, 즉 인간 종의 번식. 특정한 역사적 시대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회 조직은 이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한편으로 노동 발전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에 관해 논의할 때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계급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가족이 여기서는 단지 상부구조의 다른 한 부분으로 나타나며, 또한 재생산 관계가 생산 관계 아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요점은 가족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가부장제적 (16쪽)구조와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둘 다를 통해서 가족과 재생산의 욕구가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사회,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이러한 상호 관계는 여성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이해하기보다 억압을 이해하려고 할 때, 여성 억압에 관한 연구는 성적이고 경제적인 물질적 조건 둘 다를 다루어야만 한다. 역사 유물론 방법은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성별 노동 분업과 사회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통합,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여성 생존의 복합성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적 삶을 여성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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