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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하라

풀소리 [사막에 빠지다] 에 관련된 글.

포스팅을 하면서 박상우의 단편소설 '사하라'를 다시 봤다.

1993년쯤 이 소설을 봤을 땐 가슴아린 공감과 슬픔이 있었다.

다시 보니 마치 분장에 가까운 화장과 과장된 헤어스타일의 7-80년대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들 모습처럼,

낮설기도 하다.



사하라 - 박상우


나는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였는지 오직 나의 혼돈만을 알 뿐
나는 망상에 망상을 거듭하며 세월을 보냈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고 세상이 바뀌는 걸 보았다
또 세상엔 아랑곳없는 연인들의 키스 소리를 들었다
또 혁명을 위해 살고 혁명을 위해 죽는 것을
그리고 총알을 맞고 너무나 짧은 길의 마지막에 다다른 자들 곁에서
그들의 두 눈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후안 헬만 '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고 난 뒤부터 은애는 한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저녁 일곱시경, 도심 한복판에서 아주 우연히 나를 만나게 된 뒤부터 시작된 그녀의 줄담배는
밤 아홉시경, 그녀와 내가 앉아 있는 뒷골목의 비좁고 협소한 카페 공간으로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밀려들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됐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뒤부터 갑작스럽게 끽연을 중단해 버렸다.
끽연 대신 낮은 조도의 갓등 밑에 쪼그리고 앉아 가볍게 다리를 떨거나,
긴 머리를 뒤로 넘기고 물끄러미 허공을 올려다보거나, 아주 가끔 나와 눈을 맞추거나,
갑작스럽게 고개를 푹 떨구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문득 생각난 것처럼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리거나 했을 뿐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에돌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일까.

"문민정부 잘한다고 남들 다 박수치는데... 어째서 학생들만 저렇게 난리를 친담."

스탠드 바 안쪽에 서 있던 주인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갖가지 술병이 진열된 그녀 등 뒤쪽의 장식 선반과 바 위의 허공에 매달린 작고 앙증맞은 조명등,
그리고 두꺼운 몸피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주인 여자의 검은 드레스가
얼핏 보기에 전위예술 무대의 의도적인 불균형을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을 터인데, 어째서 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감득되는 것일까.

'틈'이라는 상호가 맘에 든다고, 저곳으로 들어가자고 은애가 말했을 때,
애초부터 의도한 장소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번역 원고를 들고 갈 때마다, '낙원 출판사'의 변사장이 차를 사거나 술을 사곤 하는
'장밋빛 인생'이라는 레스토랑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이어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술만 취하면 졸부 근성을 드러내는 인간, 변 사장과 마주치게 되는 불상사가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바로 오늘 낮, 단성사 앞에서 은애를 만나기 직전에 헤어졌는데 또다시 그와 마주친다?
그래서 나는 나무로 된 출입문을 열고 슬그머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협소하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생게망게하게 시야로 밀려 들었다.
2미터 정도의 스탠드 바와 두 개의 탁자가 놓인 앙증맞은 공간.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은애를 돌아보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엔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별로 없어요.

"술 안 마셔요?"

담배 대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 하나를 끼우고, 그 끝에다 맥주를 찍어
탁자 위에다 무엇인지도 모를 글씨를 끝없이 써대고 있던 은애가 문득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다.
부질없는 열정이 말끔히 씻겨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서른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녀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 그녀는 서른하나가 '되어 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를 구체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 세월의 행간에 옹이처럼 박혔을 애환을 나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가 잘못된 것 같고, 꼬인 것 같고, 겹질려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지천으로 깔리는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으로
시대를 향해 화염병 몇 개 날렸다는 죄, 그것 때문에 한 여자의 인생이 이렇게 황락해져가도 괜찮은 것인가.

"옛날처럼... 그렇게 못 마셔. 왠지 감흥이 없고 마시면 자꾸 비감스러워져.
술에 대한 불감증 같은 게 생겼나 봐."

7년 전, 자신의 언니가 경영하던 '노아의 방주'라는 카페에서
거의 매일 폭음을 일삼던 나를 기억하며 건넨 질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 그 자기 방기의 시간 속에서 사지를 뒤틀며 정신없이 술을 퍼마시던 인물이 누구였던가.
황량했던 시대를 피해 가며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파괴하던 인물- 그는 내 속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또하나의 나였다.
누나네가 있는 화류시로 내려가 하릴없이 기생하던 7년 전 그때,
그리하여 '노아의 방주'는 악마 숭배자들의 지하 소굴처럼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안온함을 느끼게 했었다.
자포자기가 극에 달했던 그때, 악마 숭배자가 아니라 악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
바로 거기서 나는 또하나의 악마 숭배자였던 은애를 만나지 않았던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노래 아직도 좋아해요?"

우스운 질문이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허전한 공동이 느껴지는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다서 헝클어진 머릿결이 조성해 내는 묘한 분위기가,
바라보는 그 순간 이미 과거로 환원되어 있는 것 같았다.
지독스럽게도 조명이 낮고 음습했던 지하 카페,
'노아의 방주'에서 오직 침묵 하나로 자신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 같던 그 시절
- 그때 은애는 스물여섯이었고 나는 스물여덟이었었다.
대학 4학년 때 제적을 당한 운동권 출신의 그녀가, 그때 '노아의 방주'에서 나를 위해 자주 들려준 그 노래가 무엇이었던가.

"말디카오?"

시대를 의식적으로 피해 가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 때문에 나 자신이 병들어 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될 때까지
나는 그 노래를 꽤나 좋아했었다.
지칠 대로 지치고,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에야 비로소 그 오장 육부를 쥐어짜는 듯한 노래의 마성에서
미련 없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인가... 정훈 씨가 '노아의 방주'로 올 때 그 테이프를 사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했던 거 기억나요?
내가 이곳에 와서 술을 마실 때마다 이 노래를 들려주세요.
그럼 매상이 많이 올라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그걸 건네줬어요.
하지만 모르고 있었죠?
정훈 씨가 테이프를 사다 주기 훨씬 전부터... 나도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고 있었다는 거."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검지의 첫번째 마디를 술잔에다 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꺼내 다시 탁자 위에다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나가 버린 시간들, 그 스러져 버린 청춘을 흔적을 소리 없이 되새김질하는 것 같았다.

"그 노래가 악마 숭배자들의 주제가였나?"

표정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탁자 위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올려 단숨에 비워 버렸다.
왠지 모르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년 전 그때, 그 출구 없던 시절의 어둠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를 동일하게 좋아했을는지는 몰라도,
내가 그녀를, 그리고 그녀가 나를 사랑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정서적인 동병상련은 있었을망정, 그것을 사랑의 감정으로까지 몰고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대 나는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운동권 학생으로 시위 주동자가 되고, 남학생들과 어울려 파출소에 화염병을 던지고,
그것으로 제적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시대적인 문제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면서,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시대적인 문제 때문에
병들어 가는 이율배반적인 고등 실업자의 심리를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그리하여 그 견딜 수 없는 자기 모순의 간극으로 나는 끊임없이 술을 퍼부어댔고,
종내에는 악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때마다 진저리를 쳐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와 내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노래를 끝없이 되풀이해 들으며
정서적인 동병상련을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점에서 우리는 닮아 있고 나머지는 닮은 구석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얘기... 기억나요?"

나를 건너다보며 그녀는 자신이 손을 담갔던 맥주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 다 별 볼일 없고... 둘 다 기생하는 인생이라고 말했던 거?"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독하고 역한 싸구려 럼주에 취한 채 나는 그런 말을 입에 담았을 것이다.
언어가 아니라 분위기로 남겨지는 기억이 있지 않은가.
시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이 뚜렷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내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 그런 분위기가 분명하게 뇌리에 각인되었으리라.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도무지 세상살이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시대적인 문제라거나 먹고 사는 일 따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방을 싸들고 누나네가 있는 화류시로 내려와 기생살이를 시작한 나.
그리고 제적을 당한 뒤, 집안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다 언니의 카페 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역시 화류시로 내려가 기생살이를 시작한 은애.
그녀와 나는 그때 이미 별 볼일 없는 인생이 되어 시대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그런데서 오는 정서적인 동병상련이 그녀와 나를 이상한 끈으로 옭아매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시대적인 상처가 있건 없건, 그 시대 속에 동일하게 던져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묵계적인 동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군요.
그때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처음으로 나는 내 자신의 인생이 정말 별 볼일 없어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정훈 씨 앞에서는 부정했었지만...
나를 지탱하고 있던 내면의 힘이 부질없는 오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거예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데... 지난 7년 동안 그 모든 건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보이지 않게 거세당하고 있다는 느낌... 쓸모없어져서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에 끊임없이 시달려 온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걸 느낌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 모든 게 사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에요."

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아주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몽롱한 눈빛 속으로 조명등 위쪽의 어둠이 소리 없이 배어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녀의 눈빛으로 배어들던 어둠이 경직되고, 느슨하던 실내의 분위기에 갑작스럽게 냉기가 감도는 것 같았다.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주인 여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고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몽롱하고 또한 체념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고립무원의 자기 처지를 거의 본능적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
근 세 시간 가까이, 은애와 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출입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없었다.

"우리 위스키 마실래요?"

잠시 경직된 눈빛으로 빈 맥주병을 들여다보고 있던 은애가, 갇힌 곳에서 가까스로 출구를 발견해 낸 사람처럼
다소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위스키?"

당황한 표정으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변 사장에게 번역 원고를 넘기기 위해 지난밤을
꼬박 새운 처지여서가 아니라, 그녀가 상당히 불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저런 눈빛을, 적어도 7년 전의 그녀는 단 한 번도 드러내 보인 적이 없지 않은가.

"답답해요, 그리고... 취하고 싶어요."

엄지와 검지 사이에 성냥개비를 끼우고,
그것으로 탁자 위에다 별 모양을 그려대며 그녀는 힘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다시 한 번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동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어느 지점에서 시위가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들려 오는 것은 오직 다발적으로 최루탄을 쏘아대는 소리뿐이었다.
시위대의 구호 제창이라거나 일진일퇴를 거듭할 때 터져 오르는 함성 따위가 전혀 들려 오질 않았던 것이다.

"축제의 밤에 터져 오르는 폭죽소리 같지 않아?"

날라져 온 위스키를 먼저 권하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소리가 기억을 자극하고, 기억이 상처를 건드리고, 상처가 다시 현실을 잠식해 가는 시간...
나는 그녀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위무하는 마음처럼, 진한 다갈색의 액체가 부드럽게 그녀의 잔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하늘... 형형색색... 화려함... 축제의 절정... 아름다움 연인들... 폭죽은 그런 걸 생각나게 해요.
하지만 그런 화려함은 슬픈 사람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요.
무엇과 대비된다는 게 얼마나 끔찍스런 일인 줄 아세요?
대비되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난 아니에요. 그렇게 될까 봐... 자꾸 숨고 싶으니까요."

잔을 든 채, 모노 드라마를 연기하는 연극 배우처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서 거의 단숨에, 그녀는 위스키잔을 비워 버렸다.

"7년 전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많이 나약해졌군."

혼자말처럼, 그녀의 잔에다 다시 술을 따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녁 일곱시경, 종로 3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되새기며 꺼낸 말이었다.
청바지 위에 헐렁한 남방 하나를 걸친 모습,
그리고 다소 수척해 보이는 얼굴 이외에 그녀는 7년 전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는지 몰라도, 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었다.
하지만 그 황당무계한 우연 앞에서 내가 무엇을 제대로 식별할 수 있었으랴.
그 기막힌 우연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하기는 그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기억이 현실 속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예기치 못한 정황 때문에 그녀와 나는 한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난 아주 오래 전에 바닥으로 내려앉았어요. 그냥 그 상태로 어쩔 수 없으니까 견디는 거예요.
검불처럼, 때로는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내 몸뚱어리가 수백 년 된 고사목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현실이 괴로우면 감정이 과장될 때가 많은 건지...
빵 만들 때 넣는 이스트 알죠? 그것처럼 감정을 제멋대로 부풀린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활짝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지 쿡 하고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을 들어 아주 잠시 이마를 짚은 뒤에, 그녀는 무엇인가가 스러질 때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부질없는 열정이 말끔히 씻겨 나간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측은해 보이는 얼굴.

"언니는 어떻게 됐어?"

대화를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나는 그녀의 언니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7년 전처럼 아직도 '노아의 방주'를 경영하고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언니요?"

화류시에 머물던 4개월 동안, 그렇게 자주 술을 마시러 갔으면서도
떠나올 때는 온다간다 말 한마디하지 않고 떠나간 인사가 느닷없이 언니에 관한 얘기는 왜 꺼내는가,
그런 의미로 그녀는 되묻는 것 같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까...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곳을 떠날 때 인사라도 하고 왔어야 하는 건데..."

작고 앙증맞은 위스키잔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 직후에 나는 아차,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르랴.

"나한테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언니한테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은애한테는 미안한 감정이 아니고...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애.
아주 복잡미묘 하고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그래도 나는 그런 나의 감정을 은애가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게 어찌 이해의 문제일 수 있으랴만, 그때 그곳을 떠나던 당시의 내 감정은 정말 복잡미묘했었다.
은애에 대한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은애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충동적인 울화 같은 것...
그런 걸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었으랴.
때로는 연민의 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살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동반자살 욕구처럼 느껴지기도 하던 그것...
그것이 시대에 대한 거친 욕지기였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도 몇년의 세월이 더 지나고 난 뒤였다.
불어터진 짬뽕 곱배기 같은 시대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바로 그것 때문에 병들어 가던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감정 체계를 당시의 내가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녜요. 투정을 부리는 건 더욱 아니고...
그냥 한번 그래 본 것뿐이에요, 우리 언니... 지난 7년 동안 참 파란만장했어요."

"일억이나 벌었다구?"

"무슨 말이죠?"

"파란 게 만장이면 일억 아냐?"

"그런 농지거리는 여전하시군요. 정훈 씨가 그곳을 떠난 이듬해에 '노아의 방주'는 문을 닫았어요.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해서 그만 둔 건데... 그 직후에 옷 장사를 시작했어요.
브랜드 재고품을 넘겨받아 파격 세일을 하는 장사였는데... 별로였어요.
그 직후에 나도 그곳을 떠나서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고...
어쨌거나 내가 떠난 뒤에 그걸 정리하고 호프집을 시작했어요.
악착같이 돈 될 만한 유행 사업은 다 따라 한 건데... 지금은 뭘 하는지 알아요?"

술잔을 들어올리며, 정말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24시간 편의점?"

"노래방."

짧게 대답하고 나서 그녀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양미간을 찌푸리며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찍했다.

"언제 한번 노래부르러 가야겠군."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술만 취하면 마이크를 손에 잡고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변 사장의 모습을 잠시 생각했다.
돈, 술, 여자... 그리고 장밋빛 인생.

"정훈 씨 누나네는 뭘 해요? 그때 매형이 화류시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고 했었죠?"

내 차례라는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손에 대지 않던 담배를 꺼내 다시
입에 물었다. 마음이 다소 누그러진 것일까.

"7년 전 얘기지. 지금은 부동산 중개인 노릇을 하고 있어. 누나는 제과점을 하는데..."

아, 더이상 그런 얘기를 입에 담아 무엇하겠느냐는 표정으로 나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은애의 언니가 겪었을 변신의 과정과 내용,
그리고 누나네가 치렀을 그것의 본질이 조금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참 재밌군요. 지난 7년 동안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변신을 거듭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걸까요?"

"변신이 아니고... 돈을 좇아가는 풍조겠지.
그리고 그게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니까...
그런 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많이 변했을 거야."

"변한 게 아니고 병든 거겠죠."

물끄러미 탁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힘없는 독백처럼 그렇게 중얼거렸다.

"글쎄... 내가 은애에게 지난 7년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지 않은 것처럼,
은애도 또한 그런 것에 관해 구체적으로 내게 묻지 않았었잖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우리는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7년 전 그때, 그녀가 자신의 운동경력에 대해 언급을 회피하고, 내가 시대의 염증에 대해 언급을 회피했던 것처럼,
그녀와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을 에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몽몽한 상태를 전혀 불편해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웃기는 얘기로군요. 어떻게 그런 말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 위에다 얹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망연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동작을 멈추고 있다가,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난 것처럼 그녀는 재빨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려 할 때의 결의 같은 게 그녀의 양미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악 입을 열려 할 때, 그때 또다시 따닥, 따닥, 따다다닥 하는 소리가 느닷없이 실내로 밀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고,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악, 따다닥하는 소리가 어지럽게 꼬리를 물자
그녀는 기어이 어깨를 움츠리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히 그럴 것처럼 그녀는 그때부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난밤의 불면으로 두 눈이 간잔지런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재떨이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담배 연기를 주시했다.
곧게 솟아오르다 휘청, 다시 한 번 솟아오르다 휘청, 그러면서 그것은 빛살이 스러지는 허공을 향해 빠르게 흩어져 갔다.
그 과정을 주시하는 동안 나의 뇌리에서는 시간의 경계가 흩어지고 있었고,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따닥, 따닥, 딱, 따다다닥, 따닥, 따다다닥, 딱...
따사로운 봄날, 머리에 붉은 끈을 동여매고 파출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던 운동권 여학생.
남편도 없는데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지 별 수 있겠느냐며 손님의 멱살을 쥐어 흔들던 술집 여주인.
'노아의 방주', 그 침침한 어둠 속에 앉아 꽃다운 청춘을 어둠으로 물들이던 대학 제적생.
술이 취할수록 정신이 더욱 명징해진다고 독을 써대던 대졸 실업자.
돈에 침 뱉을 놈 없다고, 돈을 모르는 놈은 인간도 아니라고 때마다 핏대를 올리던 공인중개사.
사지 멀쩡하고 대학까지 졸업한 놈이 어째서 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시고 돌아치느냐고 소리치던 제과점 주인 여자.
돈만 있으면 장밋빛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때마다 침을 튀기던 출판사 사장...

따닥, 따닥, 따다닥, 따다다닥, 딱... 혼재된 시간의 광장으로 기나긴 대열이 지나가고 있었다.
운동권 여학생,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대학 제적생, 대졸 실업자,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이 대동 단결을 한 것처럼 한동아리가 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7년 전에도 7년 후에도, 7년보다 더 오래전에도 7년보다 더 오랜 후에도,
그런 대열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이어지고 있고, 또한 이어져 갈 것 같았다.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였던 것처럼, 그리하여 모든 시대가 새로운 시대가 아닐 수도 있으리라
는 자각 속에서 분열이 눈을 뜨는 시간. 과연 우리는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뜸해진 뒤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재떨이 위에 올려놓았던 담배를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저 홀로 연기를 피워올리던 담배는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잠시 그녀는 그것에다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피워 주는 사람이 없어도, 저 홀로 타올라 재가 되어 버린 그것에서 일종의 상징을 읽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에요.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고...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내 자신을 고통의 한가운데로 자꾸만 떠밀고 있는 것 같애요.
늘 떠밀리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면서도... 이런 순간이 오면 도무지 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겠어요."

왼손을 들어올려 턱을 괴고, 아주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현실 속의 내가 아니라 7년 전의 나를 찾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주 가끔 난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나이에 비해 내가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래서 너무 일찍 늙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야. 길을 걸을 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어떤 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그래서 난 곧잘 혼돈을 일으키곤 해.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와 있거나, 과거에서 미래로 잘못 와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내가 뜬 구름을 밟고 다니는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 거야.
그런 게 안타까워서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씩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떻게든 현실감을 회복하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잘 되지 않는 거야. 현실에 던져져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는 느낌..."

"도태되었다는 데서 오는 괴리감인가요?"

"시대를 통해 제대로 진화된 사람들도 나는 별로 본 적이 없어.
그냥 누적된 시대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소 기형이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나의 얘기를 듣고 나서,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듯한 눈빛으로 은애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리한 표정으로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7년 전과 똑같이... 난 여전히 기생충처럼 살고 있어요. 내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죠?"

"묻지 않았잖아?"

사실이었다.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들던 저녁 일곱시경의 종로통,
그 붐비는 인파 속에서 서로를 발견해 낸 뒤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신상에 관해 구체적으로 물어 본 적이 없었고,
그것은 그녀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종로통으로 몰려드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처럼,
지난 7년 세월을 에돌아 종로통에까지 이르게 된 세세한 내력 따위를 그녀와 나는 전혀 입에 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서른세 살과 서른한 살이 되어 재회한 직후,
서로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주고받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무엇이었던가.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그저 그렇게 지냈다. 결혼은 했느냐?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난 지금... 안양에 있는 동생집에 얹혀살고 있어요.
동생네 부부가 지하상가에서 가방장사를 하고 있는데... 일년 반째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얹혀살고 있는 거예요.
옛날에 언니네 집에 얹혀 살 때부터... 그때부터 시작된 기생살이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숙주를 괴롭히며 숙주보다 더 편안하게 살아가는 기생충 알아요?"

거기까지 얘기하고 나서 그녀는 술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난 뒤에도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또다시 따다다닥, 따닥, 딱, 따다다다다다닥, 딱 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 버렸다.
하지만 얼마 전처럼 고개를 숙이고 귀를 틀어막는 일은 되풀이하지 않았다.
독이 오른 것처럼, 들어올린 술잔을 재빨리 비우고 나서 그녀는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근데 동생네 부부가.."

그때 다시 몇발,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동생네 부부가 다음달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간대요."

따다닥, 딱, 따다다닥!

"숙주가 떠난다니까..."

따닥, 딱, 따다닥, 딱!

"..."

따다다닥, 다닥, 따다닥, 딱!

"기생충이 섭섭한 거 있죠?"

따닥!

"내가 걱정할까 봐 수속을 밟으면서도 얘길 하지 않고 있다가..."

따다닥, 딱!

"...며칠 전에 ...며칠 전에 갑작스럽게 얘길 꺼내는 거예요."

따다다다닥, 따다닥, 따다다다닥, 딱, 따다닥!

"새로운 숙주를 찾아 보라고..."

따다닥, 따다다닥!

"새로운 숙주를... 숙주를 찾아 보라고..."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잠시 뒤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었다.
7년 세월의 인내가 한꺼번에 허물어져 내리는 게 아니라,
소리와 눈물과 몸짓이 한데 어우러지며 기묘한 욕망의 그늘이 조성되는 것 같았다.
빛과 어둠이 기다렸다는 듯 질탕한 교접을 시작하고,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일정한 공간 안에서 해체의 신음소리가 밀려나오고,
오랫동안 경직되어 있던 기류들이 뒤틀리고, 퍼덕이고. 뒤채이고, 움찔거리며,
드디어는 절정을 향해 광적인 일진일퇴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닥, 따다닥, 딱, 따다다다닥... 따닥... 딱... 딱... 따악... 딱...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서 의자의 등받이에다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난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낸 탓인가, 의식이 수천 수만 개의 미립자로 잘게 부서지고
내 몸 전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층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기생충이라는 말... 그리고 기생살이라는 말이 한겨울의 눈꽃송이처럼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눈꽃송이처럼, 눈꽃송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저 여자가 누구인가.
삭풍에 떠밀리며 황량한 겨울 벌판을 가로질러가는 여자의 어깨 위로 끊임없이 눈꽃송이가 내려앉고 있었다.
눈꽃송이가 아니라 기생충이라는 말... 기생살이라는 말이 내려앉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걸 한번 써보란 말야. 이제 문민정부가 시작되고,
초장 분위기가 쇄신 국면이니 '소설 사육신' 같은 걸 쓰면 정말 불티나게 팔릴 거라구.
아직 팔뚝에 힘 있을 때 한탕 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번역이나 하면서 낑낑거릴 거야.
소설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구?
그런 역사물은 차라리 등단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유리해. 자네 같은 사람이 제격이라구.
원하면 몇백 땡겨 줄 테니까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
기분도 그렇잖은데 우리 '장밋빛 인생'에 가서 술 한잔할까?
기똥찬 영계왔다고 오늘 마담이 전화했었어.
가서 재미 좀 보고 들어가라구. 젠장,
언제나 똑같은 말이지만, 돈 있으면 장밋빛 인생이고 돈 없으면 개밥에 도토리 되는 게 세상이야.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잘 생각해 보라구.
밀리언 셀러, '소설 사육신!' 알았지? 한탕 하는 거야, 응?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곱씹으며 유월의 저녁거리를 힘없이 걸어가는 기생충이 보였다.
쓰레기보다 못한 명상 서적을 번역해서 독자들의 어리석음을 파먹는 기생충.
그리고 역사 소설을 써서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생해 보라는 권유를 받는 기생충.
그것을 거부할 만한 마음의 경계를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기생충... 그가 종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자신이 기생충이라는 생각 한 가지에 골몰한 탓에 그는 그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 세 번, 동일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는 넋 나간 듯한 표정으로 잠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과거에서 미래로, 혹은 미래에서 과거로 잘못 떨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한 여자가 나타났다.
눈꽃송이처럼, 눈꽃송이처럼... 하지만 끝내 꽃송이가 되지 못한 여자.
또다른 기생충 한 마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정훈 씨 맞죠?

"이런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모습 보이게 될까 봐 무척 신경을 썼는데... 정말 미안해요."

눈을 감은 채 나는 낮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실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가 멎었다는 것.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어도 뚝,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그 소리가 멎어 버렸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왜 해? 그런 말에 내가 알레르기 증세를 나타낸다는 거 잊었나?"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앉으며 나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을 건너다보며 별뜻 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심이에요."

짧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빈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앞으로 내밀며 한잔 따라 달라는 시늉을 했다.

"술이 많이 늘었군."

잔에다 술을 따르며 나는 그녀의 얼굴,
그 발그레하게 상기되었으면서도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듯한 안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함초롬히 젖은 듯한 그 얼굴이 아주 오래 된 어쩐 기억,
뚜렷하게 떠올릴 수 없는 어떤 분위기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였다.
무슨 그리움인가... 순간적으로 당황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잔에 술이 차기도 전에 술병이 바닥났고,
그것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는 감정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행운인가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반쯤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바라고 있는 게 어떤 종류의 행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르니까 그런 데 대한 기대감이 더욱 간절해질 때가 있어요.
나약해질 때가 아니고 현실에 대해 독기가 생겨날 때...
이상하게도 그럴 때 그런 기대감이 생겨나는 거예요. 참 우습죠?"

반쯤 남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를 정말 모른다는 듯이 처음에는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 다음에는 고개를 들고 나를 건너다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술잔을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그녀와 내가 마주앉은 공간이 조금씩 넓이를 더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다시 말해 지루함이 느껴질 때까지 그녀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행운도 아니고 기대감도 아니고...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소망 한 가지가 있어요.
밥을 먹다가 문득, 길을 걷다가 문득...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문득...
그렇게 문득 문득 가슴을 파고 드는 소망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내가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던 건...
그건 도피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소망이 값싸게 치부당하는 걸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내 소망은 자꾸만 속으로 점점 더 깊이 숨어들어가고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술잔, 그곳에 남겨져 있던 반쯤의 술을 마저 마시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아주 멀어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곳으로 영원히 떠나고 싶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죽음에 대한 열망도 아니고 현실에 대한 도피도 아니에요.
그냥 떠나고 싶다는... 그런 소망일 뿐이에요. 이해할 수 있겠어요?"

말을 중단하고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겠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남극, 북극, 아프리카... 처음엔 그런 곳을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런 공간을 정신적으로 거치고 난 뒤에 난 마지막 목적지를 정했어요.
현실에서 밀려드는 열독이 온몸으로 퍼져나갈 때...
그럴 때마다 난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치도록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려요.
태양이 이글거리고, 한낮 내내 불기둥 같은 복사열이 피어오르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겠어요?"

묵묵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하라..."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곳이 바로 사하라예요."

그녀가 입 밖으로 꺼낸 지명을 듣고 나서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하라를 꿈꾸고 있다는 게 소망과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녀의 심리적인 상태가 사하라에 이르러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막히게 여겨진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서로 다른 상태로 7년을 살아왔는데,
그런데도 그녀와 나의 의식이 동일한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게 어찌 기막히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사하라...

눈을 감은 채,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대한 사막을 나는 되새겨 보았다.
그녀에게 초극의 공간이 되어 버린 사하라와 나의 그것은 물론 다른 성질을 띠고 있었지만,
그것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 그녀와 나는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사하라...

아랍 어로 '황야'라는 뜻을 지닌 세계 최대의 사막. 한 때는 비가 내리고, 강이 흐르고, 초목이 무성했던 땅.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고 접근이 어려우며, 격변하는 극한의 기후로 인해 말라 비틀어져 가는 땅.
높은 모래 언덕과 물 한 방울 없는 광대한 지역, 그리고 점점이 작은 암염의 언덕들이 펼쳐져 있고
북아프리카의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있는 땅.
목마름과 피로에 지쳐 죽은 낙타의 해골이 놓여 있고,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사라져 버리는 땅,
죽어가는 땅, 사하라.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수첩을 꺼내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지만,
그곳에 무수하게 적혀 있는 사막에 관한 자료가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사막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사막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하라에 이르고 난 뒤부터 그녀와 나 사이에는 깊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이상의 출구를 발견하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가끔씩 자세를 고쳐 앉으며
또 다시 시간을 에돌기 시작한 것이다.
최루탄 쏘아대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당연한 결과 처럼 그것을 새로운 출구로 삼으며 기분을 회복하기엔 그녀와 내가 너무 노회해져 있었다.
지난 몇시간 동안, 그 지리멸렬했던 7년 세월을 다시 한 번 살아 버린 게 아닌가.
그리고 높은 모래 언덕들과 물 한 방울없는 광대한 지역,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사하라에 그녀와 나의 의식은 이르러 있는 게 아닌가.

은애와 내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 유월의 깊은 밤, 축제의 폭죽이 자취를 감춘 그 시각에 밖으로 나섰을 때,
그녀와 나는 느닷없이 밀려드는 최루 가스 때문에 피하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이
단박에 눈물과 콧물부터 쥐어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침을 연발하며 무너지듯 내 팔을 잡았고, 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빨리 그녀의 입과 코를 막아 주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대로가 아니라 인적이 끊어진 골목 안쪽으로 총총히 걸어들어갔다.
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그것이 시야를 어지럽혔지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또한 결정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서기 직전까지 은근히 고심하던 문제, 예컨대 이제 더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명쾌하게 내려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응답이라도 하듯 때맞추어 시야로 밀려든 구원의 빛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빛에 인도되어 어둠 속에서도 용케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침대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실내로 들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나의 품에서 벗어났다.
상황을 핑계삼아 내가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난 뒤부터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망사로 된 커튼이 부드럽게 흘러내린 창 쪽으로 나는 앉아 있었고,
그녀는 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등을 보이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고개를 돌리고 몇번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런 행동이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질 것 같아서 이내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사방이 적연한 가운데, 그녀와 내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나와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격리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 그런 곳으로 그녀와 내가 시공을 넘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주변의 사물이 모두 해체되고 오직 그녀와 나의 존재감만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 그때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그녀가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있잖아요..."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말을 꺼내지 못한 채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몹시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샤워하고 올게요."

그녀가 욕실로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텔레비전을 켜고 곧바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사정 한파, 부정, 비리, 뇌물 수수 따위의 말들이 튀어나오며 텔레비전의 화면이 빠르게 바뀌고 있었다.
마감 뉴스인가...
천근 만근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대학생 격렬 시위, 쇠파이프, 전경 무장해제, 진압장비 소각 따위의 말들이 빠르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눈을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시위진압대를 향해 발길질을 해대고 쇠 파이프를 휘둘러대는 학생들이 보이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가는 전경들이 보이고, 무장해제당한 전경들을 에워싼 학생들이 보이고,
소각되는 시위진압 장비들이 보이고...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고 바람 한 점 없는 열사의 한가운데 서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은애와 내가 보였다.
경사진 모래의 능선을 넘어가기 위해 끝없이 걸음을 옮겨 놓지만,
아무리 허우적거려 보아도 여전히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모의 사막.
손을 뻗어 아무리 휘저어보아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녀와 나의 몸은 소리 없이 모래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의 손을 잡으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와 나의 몸은 더욱 빠르게 모래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그런 일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된 것일까.
이윽고 모래 위에 얼굴만 드러낸 그녀와 내가 보이고,
보행에 아무런 장애감도 느끼지 않고 유유히 그곳을 지나쳐 가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 그들이었다.
그들이 대열을 이루며 빠르게 모래의 능선을 넘어간 뒤에,
곧이어 그 능선을 넘어 여러 마리의 전갈들이 떼를 지어 기어내려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을 띤 갈색의 등이 햇빛에 번쩍거리고, 그 두흉부와 복부가 느닷없이 부풀어오르고,
입 가까이에 달라붙은 거대한 집게가 허공에서 제멋대로 춤을 출 때...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녀와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깨우칠 수 있었다.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고 모래에 침식되어 고스란히 사라져 버리는 땅...
사하라에서 그녀와 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잠에서 깨어난 뒤에 나는 정신없이 사방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막, 태양, 모래의 능선, 술집 주인, 옷가게 주인, 호프집 주인, 노래방 주인, 교사, 공인중개사, 제과점 주인,
전갈 따위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눈앞을 어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튼, 텔레비전, 침대, 주전자 따위를 식별하고 난 뒤에 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내 옆자리에서 은애가 단정한 모습으로 잠을 이루고 있었다.
의식이 비로소 현실감을 회복하는 걸 느끼며 나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만난 이후에 단 한 번도 확인할 수 없었던 평안이 그 얼굴 가득 깃들어 있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라는 말을 떠올리며 나는 아주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서 서서 다시 한동안 은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몇시간 전, 그녀의 함초롬히 젖은 것 같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느꼈던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7년 전 그때, 꼭 한 번 그녀와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상처 속에서도 꽃이 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나누며 오래오래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던 밤...
그날밤 나는 그녀의 젖은 얼굴이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것이 그리움이 되어 버린 것일까.

그런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 우리... 우리 있잖아요... 라고 꺼냈다가
이내 거두어 버린 그녀의 말이 무연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일까. 무엇을 말하기 위해 그녀는 그토록 머뭇거렸던 것일까.
희미한 조명등 속에서 흰빛을 발하며 단아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저려 오는 것 같아 아주 잠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어떤 구원의 메시지도 나에게는 감지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주 조용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침이 오면 또다시 혼자가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눈물짓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리고 지난 7년 세월의 기억으로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치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그러다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다시 동물의 자취가 태양에 타버리는 땅, 사하라를 꿈꾸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에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째서 내가 그녀를 불모의 사막에 버려두고 혼자 떠났는지,
어째서 7년 만의 해후를 이런 식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그것을 깨달으며 지금 이 순간의 내 심정을 조용히 되새기게 될는지도 모르리라.

어둠이 빼곡 들어찬 골목을 거의 다 빠져나온 뒤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구원의 빛처럼 그녀와 나를 인도하던 네온사인, 그것이 여전히 허공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그것은 구원의 이미지와 상관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것이 나에게는 외딴 세상 한가운데 세워진 생경스런 이정표처럼 보였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아주 잠시 멈추게 하는 이정표...
그것이 사막의 밤하늘에 떠오른 쓸쓸한 이정표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이정표로부터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기를 빌며 총총히 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다.

새벽이 시작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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