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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7/16
    [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자유로운 영혼
  2. 2024/07/16
    [코뮤니스트 19호]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자유로운 영혼

[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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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양쪽의 끔찍한 이미지는 시청자가 입장을 정하게 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전쟁을 하는 양쪽 진영의 전쟁 선전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ㆍ축제 참석자, 가자지구 로켓포의 희생자, 납치된 사람들이 키부침(kibbutzim)에서 학살당한 사진.

ㆍ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병원, 구급차, 학교, 주택가에 있는 희생자 사진

 

이러한 사진을 보고서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은 공격자나 방어자에 의한 역습으로 대체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반격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 부여는 가족 및 부족 관계로 조직된 농경 사회에서 행해졌던 복수의 도덕성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익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명분으로 이러한 복수의 도덕성에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현재 전쟁에서 양쪽 진영이 모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양쪽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팔레스타인이 침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반복해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약 2,000년 동안 '홀로코스트'. 무법자로 살아왔다." 전쟁의 명분은 민족주의의 독설로 쓰인 한 민족의 역사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 '식민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보다 더 나쁘다고 얘기하는 '집단 학살' 이야기도 등장한다. 학살의 규모를 측정하여 이후의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며 슬픔은 저마다 고유하다. 파편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폭격으로 온 가족이 사망한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두 경우 모두 전쟁 선전으로 복수심에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국민’과 ‘조국’을 내세워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수에 의존하는, 자신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실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도덕의 영역, 즉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민족주의 세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 형태에 기반을 둔 도덕의 영역에 속해 있다. 우리는 100년 넘게 전 지구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진보 없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 관계를 강요해 온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 반대로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주의 블록으로 뭉쳐 직간접적으로(대리인을 통해) 서로 싸우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민족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더욱 압박하고 억압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으로 계급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단이다. 노동계급의 도덕성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다. 현재 중동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석에 대한 글은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참조하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0/26/the-working-class-and-the-war-israel-palestine/)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함정은 본질적으로 양측의 민족주의 복수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 지속할수록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데, 이는 시민의 자유와도 비슷하다.

 

아랍어권 또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때로는 몇 세대 전에) 차별을 통해 민족 정서를 갖게 된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덧붙이자면, 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을 시오니스트가 되게 한 바로 그 기제이다. 그 결과 여러 유럽연합 국가와 미국, 캐나다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일부의 사람들이 침략자로 낙인찍힌 승리한 당사자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부와 관계없이 패배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주요 피해자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뉴욕 중앙역 복도에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된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독특한 구호를 내걸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많은 시위대가 체포되었고, 이는 미국 시민 자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이어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농성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는데, 현지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주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전국적인 기후에 대한 시위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 유럽연합, 미국, 카타르? 등의 국가가 어떻게든 폭력을 멈출 것이라는 희망뿐이다. '평화'는 여전히 너무 먼 곳에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적 휴전', '전투 휴전', '정전' 등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를 향한 전쟁의 단계에 불과한 일련의 계급 질서에 불과하다. 정부 지도자들과 의회 정당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위선적인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공교롭게도 미국이 제국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하나 또는 다른 '단계적 완화'와 '중재'를 찬성한다고 말한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미국과 네타냐후 진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EU 내 충성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TV 대담 테이블의 모든 가짜 토론과 ‘소셜’미디어의 모든 선동은 대중에게 두 전쟁 정당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망치질한다. 이는 미래의 전쟁, 나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의도된 행동도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항만노조의 전쟁 물자 적재 거부는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중인 이스라엘 측을 겨냥한 행동이다. 우크라이나 탈영병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탈영병 등도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기 수송 방해와 탈영병에 대한 지원은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 모두를 대상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항만노조의 활동은 종종 후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동'에 반영되는 '의식'의 의미는 '식민지배자' 이스라엘과 '제국주의'(미국)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이란, 중국, 러시아)에 대한 지지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반전 선전과 행동은 모든 교전 국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초강대국의 제국주의 목표를 폭로하는 데 명백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는 전선 양쪽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향해 연대해야 하며, 세계 자본의 모든 분파의 공격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발전의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국제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이 친팔레스타인과 친이스라엘로 나뉘는 잘못된 분열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혁명적 소수가 주장하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대리인) 전쟁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적 지배, 더 많은 착취를 강요하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전쟁의 한쪽을 지지하는 위의 '전쟁 반대 투쟁'은 전쟁 양측이 모두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봉사하고 있으며, 둘 다 반(反)프롤레타리아적 이며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응은 자본의 모든 분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은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계급 관계를 바탕으로 노동계급 투쟁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와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계급투쟁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 현실에 기초해 보면 다양한 부르주아적 '해결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장 '급진적' 해결책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는 모든 유대인을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두 국가' 해법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해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상호 증오뿐만 아니라 억압과 착취 세력을 보존하는 각 국가의 분할 및 정복 정책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계속 지배하는 한, 지금의 전쟁에 이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주요 쟁점은 계급투쟁이다. 편의상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모든 국가와 전선 양쪽에서 자본과 국가가 의료 및 기타 서비스를 삭감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면서 착취를 강화하는 등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는 가자지구, 헤즈볼라, 이란, 중국과 러시아에서 장악한 지역,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주변 서방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에 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는 기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그럴 수 없다'이다. 노동자들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패배로 이어질지라도, 즉 혁명적 패전주의로 이어질지라도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포기하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지하 공장과 이스라엘의 지상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채 상호 폭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

 

ㆍ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여성, 이스라엘의 예비군, 뉴욕의 유대인(센트럴역 농성)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진압하고, 모든 생산 방해 행위를 처벌하며, 탈영병을 군대로 압송해야 한다.

ㆍ그리고 이란의 철강 노동자들은 '그들' 정권이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1)

ㆍ그리고 전쟁 경제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는 서방 무기 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레도 코르보(FC)

2023년 11월 17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기사를 기반으로 함)

 

<주>

1)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이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야톨라 정권과 러시아는 중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블록 일부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하마스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레바논(헤즈볼라),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란의 좌파 부르주아의 지하 저항 단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정권과 같은...중동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인민'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항상 미국 편에 서는 우파 부르주아 계열의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아야톨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르주아들이 정권 전복의 전주곡으로 여겼던 차도르 시위(중산층이 주도) 당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중산층 시위의 구호를 따르지 않자 이기적이고 비겁하다거나 ‘경제주의자’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이제 이란의 노동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정권이나 우파 또는 좌파 부르주아 저항 세력과 달리, 노동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진행될 수도 있는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전쟁에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없다. 노동자들은 계급 이익을 옹호하고 이란의 모든 부르주아 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란 국가에 대한 공세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1/17/traps-in-understanding-the-war-in-the-middle-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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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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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 중 하나가 무방비 상태의 밀폐된 도시 지역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다.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요구와 분노가 확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좌파는 전쟁을 멈추기보다 하마스 편에 서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이 대의를 위해 행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기를 원한다. 과연 그럴까?

 

하마스 옹호자들은 하마스 군대는 식민지 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토착 자유 투사이며, 식민지 전쟁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분쟁은 필연적으로 양측 모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잔인한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투쟁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 투사'들의 몫이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백인이고 식민지를 보유했던 국가에 살고 있다면 더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 국가의 과거 또는 현재 행동에 대한 수치심은 ‘반(反)식민지’ 투쟁의 전술과 목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저항 세력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른 쪽의 옹호자인 시온주의자들도 똑같은 논리를 사용한다. 과거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나크바(Naqba)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잔인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가하는 잔혹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분 관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나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나는 1976년 좌파 친구들과 함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Pol Pot’s Khmer Rouge)를 비판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유럽에 사는 백인이기 때문에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던 토론이 생각난다. 그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즈는 자유의 투사였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 지지를 의미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에 대해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물론, 크메르루즈는 대부분 자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하마스도 마찬가지다.

 

국제주의자 전망(IP)이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주장했듯이, 하마스는 10월 7일의 행동이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사망과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마스의 권력욕 때문에 수천 명의 동료가 희생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가?

 

하마스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와 같은 '자유의 투사'가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누구로부터의 해방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주민들이 이슬람주의 하마스 국가에 살면 자유로워질까?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할까?

 

목표와 방법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반대파를 투옥하고 고문하고, 민간인을 살해하고, 어린이와 노인을 인질로 잡는 등 하마스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시민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하마스의 목표를 보여준다. 지난여름 가자지구에서는 많은 사회적 시위가 있었다. 물, 전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하마스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전년도(특히, 2019년 3월)에 비해 시위를 덜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0월 7일의 대규모 하마스 공격은 그 더운 여름에 이어 발생했다.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 행동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팔레스타인 전문가 에밀리오 미나시안(Emilio Minassian)은 팔레스타인의 무력함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이중적 분노의 논리를 낳는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보다 더 나쁘거나 더 잔인하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비슷한 논리로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각자의 방법이 다른 만큼 전술과 전략도 다르다. 이는 비대칭적인 분쟁이다. 따라서 그들의 잔인함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한 쪽은 참수를 하고 다른 한 쪽은 융단폭격을 한다. 둘 다 공포를 심는 것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다. 우리 시대에는 공포가 정치적 무기로 점점 더 보편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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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어디에도 ‘인민’ 이 주인인 나라는 없다. 모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주인에게 속해 있다. 인구 대다수를 굶주림과 권력의 부재에서 해방시킨 민족 '해방' 투쟁의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투쟁은 자본주의 주체 사이의 투쟁이었으며 좌파는 항상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

 

가자지구 응징을 집단으로 반대하는 것이 하마스 지지라고 믿는 좌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북베트남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지지라고 믿었다. 그 전쟁에서 200만 명이 사망했다. 베트남은 ‘승리’했다. 이제 베트남은 자신을 ‘해방’ 시킨 국가의 후발 상업 및 군사 파트너가 된 경찰국가가 되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이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에서 중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저귀를 차고 일한다. 이제 베트남 사람들은 하노이에서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펩시를 마실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긴 하다.

 

민족 '해방'의 목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멀리 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체제가 더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민지 멍에에서 해방된 대부분 국가에서 대다수 사람이 매우 불행하게 사는 것은 민족 ‘해방’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방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투쟁이 사실상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르주아 투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특히 현시대에 민족투쟁은 걸림돌이 된다. 인종 차별이 내재한 식민지 체제가 철폐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종식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한계를 봐야 한다. 이 나라는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실업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 파업 참가자들을 기관총으로 쓰러뜨리고,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터너와 베이컨

 

하마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거론하는 또 다른 예는 터너(Turner)봉기다. 냇 터너(Nat Turner)는 1831년 버지니아에서 유혈 봉기를 주도한 노예였다. 그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백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가족 전체가 학살당했다. 이 학살은 10월 7일 하마스 학살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 압제자에게 대항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렇게 되면 터너와 하마스는 자신의 의지도, 주체성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벽이 테니스공을 반사하듯 받은 폭력을 반사하는 자동화 장치에 불과하다. 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인종이나 민족 전쟁으로 전개되지 않는 억압에 맞선 봉기의 사례도 있다. 미국의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76~1677년에 일어난 베이컨 봉기다. 이 영화에서 가난한 백인과 흑인 노예들은 버지니아의 식민 정부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들은 당시 수도였던 제임스타운을 점령했다. 영국에서 원정군이 도착한 후에야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흑인 노예와 백인 프롤레타리아는 이해관계가 같았다. 도덕적 측면을 제쳐두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부분으로 베이컨 봉기를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베이컨과 함께 싸운 노예들은 터너를 따르는 노예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투쟁 방법, 즉 피부색이나 종교보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계급에 기반을 둔 동맹을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식민지 권력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베이컨의 봉기는 식민지 권력에 공황상태를 초래했다. 힘없는 백인과 흑인이 다시 힘을 합쳐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제의 인종적 특성을 강화하고 백인과 흑인 간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인종 분리주의(apartheid) 제도인 버지니아 노예법이 도입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동계급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었고, 오늘날 미국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도 이러한 인종을 넘어서는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지원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터너처럼 최대한 많은 유대인을 살해해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 베이컨 봉기 이후 권력자들이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던 것처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권력을 장악한 시오니스트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프롤레타리아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반(反)식민지 전쟁인가?

 

이스라엘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 대부분이 쫓겨난 땅에 대부분 유럽의 백인들이 정착하면서 탄생한 국가이다. 각기 다른 해의 지도를 나란히 놓고 살펴보면 두 나라의 성장과 ‘원주민’의 영토가 축소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주민 추방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최근의 강경 우파 네타냐후 정부 하의 서안 지구에서 가속화되었으며, 현재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정착민들과 함께 광신적인 군대처럼 과도하게 추진되고 있다. 미국이 인디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 국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호구역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는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이미 영토를 확보한 국가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그들을 분리해서 국가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구역으로 밀어 넣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은 비슷할 수 있지만, 식민지 전쟁은 아니다. 하지만, 미나시안(Minassian)이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유럽 식민주의와 이데올로기적 유사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인종적 기준에 따라 노동자를 '동물화'하여 문명 세계와 문명 이전 세계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유럽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이 논리에 따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즉 이 지역에서 인간 집단을 구분하는 위계를 상기시키기 위해 다른 정치적 목적 없이 폭탄에 의해 매몰되고 있다. 개가 물면 무리를 향해 총을 쏘게 된다." 그는 "문명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유동적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이스라엘-유대인 시민권이 있었고 스스로 활동하고 있다. 아랍계 유대인(미즈라히)이나 에티오피아계(팔라샤)는 오랫동안 울타리의 반대편에 있었으며 다른 원주민을 달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원주민을 보조하는 군대였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은 토착 사회 상류층 관료들이 이끄는 토착민과 국가를 통제하고 국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미나시안은 두 나라 사이의 투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분쟁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도시들은 빈곤한 변두리 지역으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화폐, 이스라엘 제품, 이스라엘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전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서안지구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이스라엘과 식민지에서 일한다. 그들은 종종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미나시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서안지구의 한 난민 캠프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저녁 내내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수도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인종분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건설 발주자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 점령지에서 노동자 모집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감독관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세파르드(Sephardic) 유대인 등 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주 프롤레타리아들도 있다. 태국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미등록 이민자로서 실제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 그룹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각 그룹은 생산 관계에서 고유한 지위와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이스라엘은 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한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고 고도로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1983년 주식 시장 폭락, 1984년 445%의 인플레이션, 기록적인 국제수지 적자 등 급격한 성장세가 주춤했었다. 그 후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 산업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전보다 훨씬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실업률이 치솟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첨단기술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다른 선두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용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나시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제를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가두어 두고 현지 하청업체에 관리권을 넘기는 분리 정책이었다.

 

"이 거대한 울타리, 민족-종교적으로 유용한 프롤레타리아와 잉여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이 작업은 평화 과정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실제로는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외부화되는 과정이었다"라고 미나시안은 말한다. 따라서 식민지 분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토착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의 중심지 특유의 비율로 잉여 프롤레타리아 인구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스라엘에서 노동 계약을 맺은 모든 노동자 외에 팔레스타인이 관할하는 폐쇄된 대규모 교외 지역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거의 5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텔아비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갇혀 매일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가자지구는 서안지구의 도시나 난민 캠프보다 이스라엘 경제의 쓰레기통과도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의 청년 실업률은 70%를 넘어섰다(현재 침공 전). 이러한 남아도는 노동자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돈은 하부 조직인 하마스와 이른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분배되며, 이들은 주로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다른 준군사조직을 제압하는 등 다른 국가 기능도 수행한다. 하부조직들은 환멸을 느낀 팔레스타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실추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항하여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우리는 하마스의 전략에 대한 해석을 찾아야 한다. 하마스는 스스로 "불명예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이것은 해방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역 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내부 역학 관계는 이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미국과 그 도전자들 간의 지정학적 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대부분의 유럽 식민지 체제가 종식되면서 탈식민지화의 물결과 함께 이루어졌다. 둘 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 권력이 이동하면서 발생한 결과이다. 강력한 무기를 갖춘 미국 군대를 보유한 군사화된 백인 식민지는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석유 자원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미국에 이스라엘의 중요성도 커졌다.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틀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는 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사이 분쟁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인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항하는 강력한 친미 동맹을 형성하려는 미국의 정책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란은 미국이 IDF를 지원하듯이 하마스(보다 온건한 정치세력은 카타르가 자금을 지원함)의 군부를 지원하고 있다. 전쟁에 사용된 돈과 무기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조달되었다. 사상자만 지역 사람들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의 부재와 그 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한 바 있다. 구조적 위기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군비 지출과 군사 분쟁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우크라이나, 아프리카, 카라바그, 그리고 현재 가자에서 얼어붙은 전선이 녹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분쟁이 아니라 기존 분쟁이 갑자기 고조되는 상황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더 많은 화약고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 중 쓸모없는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가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서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부분에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중심지역 축적 블록의 일부인 민주적이고 문명화된 국가가 전면전에 상응하는 군사적 수단으로 남아도는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는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죽음은 "다가올 자본주의 위기의 끔찍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전쟁의 역할이 커지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군인과 '자유의 투사'를 존경하고, 대량 학살에 박수치거나 눈감고, 조국을 위한 죽음과 파괴를 정상으로 여기며, 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패자가 되는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법을 배우는 시대이다.

 

해방은 전쟁과 공격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부색이나 신앙과 관계없이 함께하는 노동자의 공동 이익에 대한 연대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실현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진정한 해방을 방해한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 민족-종교적 또는 인종적 이유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팔레스타인은 강에서 바다까지 해방될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은 전쟁을 멈추라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멈추는 것, 지금 가장 먼저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당장 휴전하라! 이제 인질들을 석방하라! 이제 가자 지구 봉쇄를 해제하라! 서안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당장 멈추어라! 반(反)유대주의도, 이슬람 혐오도 반대한다! 고통도, 유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반(反)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연대를 구축하자!

 

샌더(Sanderr)

2023년 11월 15일

국제주의자 전망(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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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warmongers-left-and-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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