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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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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5강>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Ⅱ“


강사 ㅣ 윤태상

일시 ㅣ 2024년 8월 1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 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쇠퇴기 자본주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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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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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 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 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 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 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 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 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 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1천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 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 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 예외는 미국이었는데, 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 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 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 결국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 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 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월, 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 미국은 (뉴 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 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 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 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 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 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 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 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 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 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 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 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 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 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 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 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 전체 세계는, 특히 미국, 소련, 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 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 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 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 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 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 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 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 주요한 목표는, 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 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 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 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 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 진실로, 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GNP 대비 국방비 비율(%)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UK

USA

UK

USA

1913

3.0

/

13.5

10.5

1923

4.7

/

27.5

11.0

1933

3.8

/

30.0

16.5

1938

4.9

1.5

31.2

19.5

1948

7.4

8.0

37.0

24.0

1953

8.9

13.2

35.0

27.5

1958

6.4

10.1

31.5

29.0

1960

6.2

9.0

32.5

28.0

1965

5.8

7.5

34.0

28.5

1969

5.3

9.0

39.0

32.0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쪽.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역(逆)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 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 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 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 투자, 시장의 원천으로써, 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 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 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 무역 전쟁, 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 교육, 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 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 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제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 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 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 식민주의 -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정확하게도, 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反)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 반(反)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 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 이었던 반면, 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신-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 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제3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년, 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 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년, 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 인도는 110달러, 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년, 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 인도 2,256.6달러, 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 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은, 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은 자본이므로, 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즉, (원조는) 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 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천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 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 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 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 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 더욱이, 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 형성, 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 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월, 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 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 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 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 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 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 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 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년)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 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이것이 부패, 낮은 노동 생산성, 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 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 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 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 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중국 코뮤니스트당, 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 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 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 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 금융화, 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 이에 더해,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쪽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쪽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쪽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쪽.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쪽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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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3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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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혁명적 전망」(Revolutionary Perspectives) 정기 독자들은 소소한 사항을 추가하여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적 토대’를 재발간해 오고 있음을 알 것이다. 1974년 처음 발간된 이 글은 1975년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의 일부가 된 혁명적 전망 그룹의 기반이 되는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반세기 전 작성된 이 글의 핵심 전제는 세월의 시험을 견뎠고, 처음 두 부분에 대해 우리는 원본에 가벼운 수정만 가했다.

 

그러나, 3부에서 우리는 온갖 혼란과 변화의 지난 반세기에 진입했고,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는 원래 글에서 제기된 것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다. 사실, 이미 1976년 당시에도 도래하는 위기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적 노동계급 저항의 부활이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이 의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즉각적인 의미에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의미였음을 우리는 이미 결정했었다. 1970년대의 경제적 투쟁(우리들 사이에서는 ‘재정적 전투성’으로 칭한다)은 체제를 없애야 할 필요를 인식하는 계급의식을 자동으로 출현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 체제가 더한 모순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해도 그랬다. 우리는 위기의 원인에 관해 설명했고, 여전히 남아있지만,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서, 만약 그 이후의 사건들을 포함하지 않거나 우리가 다룬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지 않는다면, 그 설명은 의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3부와 이 연작의 이후 부분은 처음 두 부분에 비해 더 많은 편집이 가해질 것이다. 이 3부는 원본이 작성된 시기, 전후 호황(붐)의 마지막에 끝난다. 이 시기는 노동계급이, 엄청난 규모의 인플레이션으로 시작된 자신의 생활 수준에 대한 공격에 직면하여, 전 세계적 파업과 폭동으로 반응한 시점이다. 이는 CWO와 같은 코뮤니스트좌파 조직의 탄생과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와 같은 기존 조직의 재활성화로 이어졌다. 우리의 새로운 세대는, 우리를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적 현실(유물론적 실재)을 설명하는 맑스의 분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가 1970년대 초반에 볼 수 없었던 것은, 축적 순환의 마지막, 그리고 그 위기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대한 체제의 반응이었다. 이 연작의 다음,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작성한 모든 글을 요약할 것이고, 그 글은 이 축적 순환 -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이 축적 순환의 핵심 문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의 필요성 등 - 의 끝에 대한, 이어지는 자본주의자들의 뒤틀림과 전환에 대한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해야만 했던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쇠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 것인데, 이 쇠퇴가 자본주의의 빠르게 붕괴할 것이라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생산양식의 등장과 몰락에는 수 세기가 걸린다. 생산양식의 모순은 그것이 마침내 붕괴하기 전까지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때때로 명백하게 확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경제적 모순은 그 자체로 계급 규칙을 끝내지 않는다. 우리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Internationalist Communist) 23권에 썼듯이:

 

“우리는 자본주의 쇠퇴기 동안 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특정한 현상을 밝힐 수 있지만,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끝나는 시점이 언제인지는 결코 내다보지 못한다. 대안의 부재 속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 광기의 과정을 수행해 갈 수 있다. 자본주의가 쇠퇴한다고 기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종말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 없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방법론적 오류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쇠퇴의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국제주의적, 그리고 국제주의자 당의 지도를 받은 프롤레타리아트 승리의 투쟁 과실이다.”1)

 

따라서 쇠퇴는 자본주의가 독점, 제국주의, 그리고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경향의 시대, 그러나 이윤율 하락 경향의 법칙이, 비록 모습은 다를 라도 기본적인 채찍으로 남아 축적 순환의 물질적인 추동력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모든 특성을 묘사하는 유용한 약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쇠퇴는 전에 없는 거대한 위협을 제기한다. 지배계급의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복합위기’(polycrisis), 경제적 스태그네이션, 팬데믹, 제국주의 전쟁, 환경 오염과 세계적 온난화 등의 모든 위협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가 아닌 인류 자체의 잠재적 미래를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어떤 보장된 미래도 없다. 우리는 맑스가 「코뮤니스트 선언」에서 묘사한, ‘투쟁’(contending)의 승리, 다시 말해 노동계급의 승리 또는 우리 모두의 몰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직면하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다. 혁명적 소수도, 광범위한 노동계급도 무엇이 벌어질지 팔짱을 끼고 기다릴 수 없다. 집단적, 정치적 양쪽으로 모두 조직화를 시작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이 연작은 그 노력에 공헌하고자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 자본주의의 시대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은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생산양식임을 결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윤율 하락이, 그것이 자본주의 상승기든 쇠퇴기든 그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기본적인 추동력임을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단정적으로 세계 자본주의가, 심지어 축적을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었고, 생산력이 ‘확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쇠퇴하는 사회적 체제이고 그것은 1914년쯤부터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먼저, 우리가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작 시기를 ‘1914년쯤’이라고 했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겠다. 생산양식은 어느 날 하룻밤 만에 갑자기 쇠퇴기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를 만들어 내고, 코뮤니즘의 물질적 토대를 건설하는 그 역사적 책무를 모두 수행한 것이 1914년 이전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점 자본과 세계 경제의 발전과 함께, 축적 순환상의 경제적 위기만으로는 축적 과정을 다시 활성화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자본의 중앙집중화는 이미 선행되었고, 이제는 몰락할 것이라고는 주변부의, 너무 소규모, 생산성이 낮은 자본밖에 남지 않았다. 전 세계적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한 파괴의 결과로써 자본의 평가절하만이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 연구의 이전 부분에서, 일단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생산양식으로 확립되어 버리면, 이윤율 하락의 역(逆) 경향이 헛된 것이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 종국에는 세계전쟁으로 나아갈 뿐인지를 보았다. 세계 자본의 등장은 자유방임주의 또는 고전학파 자유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본 축적은 오직 각 지역 경제(national economy)에서의 지속적이고 증가하는 자본의 개입과 국가의 시민 사회의 점진적 흡수 – 전 세계적인 국가 자본주의로의 경향의 존재 - 라는 기반 위에서만 가능했다. 국가 소유(자산)의 증가와 생산수단 통제의 증가, 경제를 통제하려는 재정 정책을 제외하고서도, 이는 불모 생산(waste production. 즉, 세계 자본의 관점에서 자본 축적에 기여할 수 없는 생산)의 자극을 포함하는데, 무기 생산이 불모 생산의 가장 명시적인 표현이다. 고전적인 경쟁이 이제 제국주의 강국 사이의 영속적인 경쟁 상황에 포함되면서, 경기의 호황과 불황은 그 자신이 세계 경제 위기를 표현하는 것이 되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종종 무기 생산의 증가와 새로운 자본 축적의 순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를 동반했는데, 이 위기는 오직 전쟁으로만 해소될 수 있는데, 전쟁은 그 자체로 새로운 재건(reconstrucion)기의 전주가 된다. 20세기의 시작에서부터 자본주의의 역사는 위기-전쟁-재건 순환의 역사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은 자본의 평가절하의 수단으로 작동했고, 제국주의 강대국들2)의 재편성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후 선진국가의 제국주의 사이 경쟁의 책략 속에서 단순히 졸병 역할을 했던 중진국(less advanced states)의 상대적인 지위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른바 ‘개발도상’은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독립적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에서 국제적,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존재는 세계혁명과 더 높은 수준의 생산양식으로서의 코뮤니스트 제도의 물질적 가능성의 존재를 의미했다. 1917-21년 세계혁명의 물결은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즘이 더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아니라 실질적 가능성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제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가 생산력 발전의 ‘족쇄’임을, 그리고 사회가 야만으로 침몰하지 않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코뮤니스트 제도가 필연적임을 증명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도중, 그리고 이후의 국가 주도 경제화

 

우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쟁 가운데, 1870년쯤부터 계속, 선진국에서 총 국민 소득에 비례하여 국가 지출이 증가한 것을 보았다. 우리가 위에서 언급한 국가 지출의 가장 거대한 단일 항목은 국방비지만, 교육 및 공공사업(높은 기술적 구성이 요구되는 가스, 상수도 등의 서비스) 또한 중요한 항목이었다. 1909년, 영국 정부는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유지되기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을 결성하고, 정부의 통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구의 이전 부분3)에서 지적한 ‘도금의 시대’(Gilded Age) 독점 경향이 독점 가격을 통해 새로운 자본의 발전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과정을 왜곡할 것이라 위협하는 일은 미국에서 발생했다. 조직된 노동의 저항에 대한 반응으로, ‘농민 운동’(Granger Movement)의 농민들은 반(反)-독점당을 설립하고, 1890년 첫 번째 독과점 금지법, 셔먼 조례(Sherman Act)를 통과시켰다. 맥킨레이(McKinlay) 대통령 정권의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그리고 사회적 다윈주의) 아래, 그 법은 대개 이용되지 않았다. 그가 암살된 이후, 후임자인 아메리카 제국(American Empire)의 열정적인 지지자, 테오도르 루스벨트 시기가 되어서야 JP 모건과 록펠러가 의지할 만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그 법을 적용했다. ‘경쟁을 보호하기 위해’ 정보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 자본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경쟁은 시스템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시장마저도 규제되고 나아가 국가에 의해 시장이 ‘만들어지는’4) 과정의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루스벨트는 실제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부 계약이 국가 계획과 자본의 주요 원천이 되는 지점에서 산업들과 관계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산복합체’(military – industrial – Congressional – complex)의 씨앗은 뿌려졌고, 그 무렵, 전후 붐 시기, 산업의 지도자들은 정부 서비스에 막힘없이 드나들었다.5)

 

1914년, 전쟁의 발발은 전쟁 목적 생산에 대한 다소간의 직접적 통제권을 중앙 정부가 갖고 있던 선두 자본주의 강국들 모두의 내부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의 진행이 가속했다. 1916년 이후, 독일 제국에서는 라테나우(Rathenau)의 경제 통제가 너무 강력하여, “국가 사회주의”로 회자하였으며, 그를 도와 군수품 부서(Ministry of Munitions)를 운영하던 로이드 조지(Lloyd George)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모든 생산, 분배, 그리고 교환의 모든 수단’이 총체적으로 그들의 마음대로였다”6)

 

이 국가 개입의 특정 측면들은 다수 전후에 폐지되었으나 나머지는 유지되었고, 국가 자본주의는 모든 자본의 경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경제의 국가 주도화 경향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군사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조정한, 민족 국가 내부에서의 생산 필요성의 결과 – 비록 그 필요가 경향을 가속하고 강화했지만, - 가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기형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초래한 만성적 잉여가치의 부족으로 추적할 수 있다. 산업의 침체기(불변자본을 더 증가시키기에는 너무 낮은 잉여가치)를 맞아, 경제 붕괴를 피하고자 국가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기능이었던 정책을 채택해야만 했는데, 그것은 전체 경제에서 잉여가치를 재분배함으로써 평균 이윤율 형성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집중 과정에서 더 큰 잉여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대기업들 사이에서 나눠지고, 이는 시장이 그 자신의 몇몇 기능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시장 메커니즘이 자본의 확장 과정에서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를 멈춰버리면, 이윤율의 평균을 형성하는 문제는 복잡해진다. 개별 산업의 개별적 이윤율에도 불구하고, 모든 필수적인 산업의 동시적인 이윤율의 존재를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윤율의 평균은, ... 잉여가치를 ‘통합(pooling)’함으로써, 스스로 사회적 수요의 수단이라 주장하는 사회적 생산의 물리적 필요를 만족시키려는 것을 암시한다. 자본의 지체(stagnation)는 그것이 문제가 있는 수요로 표현되는데, 잉여가치의 사회적 ‘통합’에 참여하는 자본 주체(entities)를 증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된다. 잉여가치의 통제는 자본주의의 안전에 필수적인 것이 되고, 이윤의 분배는 정부의 관심사가 된다.”7)

 

이런 이유로, 은행, 금융 등에 대한 국가 통제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29년 위기의 시작과 더불어, 정보 보조금, 많은 기간 산업의 노골적인 국유화가 이뤄졌다. 따라서, 보기를 들면,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거의 모든 해운 회사, 민간 항공 회사, 부채를 지불할 수 없는 은행과 국유화된 철도회사에 자금을 빌려주었다. 영국 정부는:

 

“... 철도의 통합을 달성(1921), 전력 공급의 부분적 국유화(1926), 정부가 지원하는 철강(1932) 독점, 그리고 국가적 석탄 카르텔(1936)을 만들어 집중화를 이루었다...”8)

 

나치의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볼셰비즘에 반대해 불평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경제 통제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자본주의자들은 “통산·산업의 영지”(Estate of Trade and Industry)로, 노동자들은 노동 전선(Labour Front)으로 조직화하였는데, 그러는 동안 1938년 2월, 괴링(Goering)은 ‘4년 계획’(Four Year Plan)을 실현하기 위해 경제적 독재를 실시했다.

 

“이 소개된 방법들은 ... 경제에 대한 특정 나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일종의, 마지못해 채택된 계획이며, 1930년대 현재 많은 국가에서 ‘케인즈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도입된 ‘전쟁 사회주의’에 일부 기반을 두고 있다.”9)

 

이탈리아에서는 1933년, 파시스트 정부가 산업재건기관(the Institute for Industrial Reconstruction, IRI)을 세웠다:

 

“... 정부의 경제 자립 정책과 재무장 정책을 돕기 위한 영속적인 산업 지주 회사로서, 민간 기업이 충분한 자금을 투자할 의지가 있는 산업과 서비스에서만 활동하도록 계속해서 그 활동에 한계를 두었다.”10)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모두, 경제적 회복은 무기 생산과 노동계급에 대한 야만적인 착취에 기반을 두었다. 그런데도 1929년에서 1938년 사이, 두 나라의 총 사회적 생산은 감소했다.11) 우리는 아래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아래 이 메커니즘에 어떻게 축적을 ‘돕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국가 주도 경제화(산업의 국가 소유라는 의미에서)는, 한 편에서 잉여가치의 재분배를 지원하고, 경제 지원을 돕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적 영역의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킨다. 왜냐하면, 주로 사적 영역의 잉여가치를 지휘함으로써, 국가가 이 기업들의 자금을 댈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국가자본주의화 된 경제(이른바 ‘코뮤니스트’ 국가)에서 작동하는, 높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2 영역에 속하게 될 것)과 낮은 잉여가치율의 산업(제1영역에 속하게 될 것) 사이에서 이윤율을 국가가 평등화하려는 시도에서, 똑같은 과정이 발생하는데, 한 산업에서 다른 산업으로 자금을 이전시키는 것이 여기서는 더 쉽다. 왜냐하면, 국가가 하나의 거대 기업가로 행동하면서, 총 국가 자본을 직접 통제하기 때문이다. 모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수익이 나지 않는 부문을 국가가 관리하는데, 이는 전체 경제의 관점에서 생산 비용의 증가에 해당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하락을 심화시킨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과학적 관리법’, ‘노동절약’ 기구, 성과급 시스템의 도입 등의 수단을 통해 생산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에 속도가 붙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여전히 이윤을 내는 산업에서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떨어지는 이윤율을 상쇄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하락은 실질임금이 세기 초 수준 아래로 떨어졌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명백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국가 경제에서 임금의 비율이 1932년 64%(이것마저도 1928년 수준에서 심각하게 떨어진 것)에서 1938년 57%로 떨어졌다.’12)

 

그런데도, 상대적,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확대되던 실업 증가에 기여했고, 중앙 정부는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개입하여 국유화, 사회 보장 제도, 그리고 공공사업을 심화했다. 미국 F.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이러한 정부 개입 가운데 가장 거창한 것이었다. 뉴딜 정책의 수단들은 그 정치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축적의 실제 ‘마중물’이 된 적이 없고, 그저 대공황을 거치는 동안 사회적으로 체제를 단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1937년쯤에 이르러서는 국가 지출 단독으로는 이를 끝내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이미 명백했다. 그 대신, 경제위기 시기 고조된 제국주의 긴장이 관세 장벽 강화에 따라 근린궁핍화정책(“beggar my neighbour”)과 ‘경제자립 정책’을 불러오거나, 또는 ‘특혜 관세’(imperial preference)가 국가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러한 긴장 아래의 재무장은 군수 산업의 이윤율은 높였을는지도 모르나, 1939년과 1941년 제국주의 전쟁의 전면전에 추동을 더했을 뿐이었다. (이 제국주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엄청난 양의 자본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축적의 새로운 출발, 그리고 1945년 이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기의 신호가 될 것이었다.

 

소련에서는 단일 국가에서 고립되어 발생한 1917년 혁명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 자본주의의 다른 종을 낳았다. 세계혁명의 전망이 미래로 멀어지자, 1921년 신경제정책(NEP)이 채택되었다. 레닌은 너무도 솔직하게 이것이 ‘국가 자본주의로’의 후퇴라 했으나, 그는 항상 국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가는 중간 단계의 무언가를 제공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다. 심지어 러시아의 좌익 코뮤니스트들은 러시아에서의 서유럽 방식 국가자본주의(이후 ‘혼합경제’로 불림)를 구축하려는 어떤 시도들도 맹비난해 왔는데, 이들조차 생산력의 완전한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와 같은 것이 아님(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을 알 수 없었다. 1920년대 계속된 소련 내 논쟁은 자본 축적을 받아들이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NEP를 지속하는 옹호자로서 부하린이 등장하는 동안(그리고 농민에 대한 양보로 농업을 성장시키면서), 그의 이전 좌익 코뮤니스트 동료였던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zhensky)는 산업화를 더욱 가속할 것을 요구했다(트로츠키가 이 정책을 지지했다). 좌익 반대파 가운데 이 ‘초-산업화 지지자들’(super-industrialisers)은 스탈린이 당 조직을 장악하면서 패배했는데, 1928년 스탈린이 그들의 정책을 훔치는 것도 막지 않았다. 스탈린주의자들이나 대부분의 트로츠키주의자는 그 이후 이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추동의 시작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사실은 이는 그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 자본주의 모델의 시작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주의의 굴레 아래 있으면서, 그들의 이전 제국주의 주인들의 자본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 축적할 방법을 찾던 국가에 이 초-산업화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Five Year Plan)의 동기는 러시아 노동자의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착취하는 것이 이 계획에 잉여가치를 제공할 것이었다), 서유럽 열강들의 공격 – 스탈린은, 1928년에도 그들이 소련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 에 저항할 수 있는 군수 기계를 만드는 데 있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나치가 조금 이후에 말할 것처럼, 그것은 ‘버터가 아니라 총’(guns not butter)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동안, 월가의 충격 이후 대규모 실업이 서유럽 경제를 황폐화했을 때, 5개년 계획은 완전히 계획된 명령 경제(소련에서는 ‘사회주의’로, 그리고 서유럽에서는 ‘코뮤니즘’으로 잘못 불렸다)가 전통적인 자본주의 경제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에 이르는 기간 두 주요한 열강 사이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경쟁이 고조됨에 따라, 이것은 전쟁 직후의 파업 물결, 주택 점유와 나란히 이른바 ‘자유 세계’에서 복지와 사회 보장 제도의 도입에 일정 역할을 했다.

 

전후 호황(The Post-War Boom)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전시 통제가 완화되는 일은 없었다. 사실 국가 자본주의 경향은 갈수록 확실해졌다. GNP 대비 국가 지출 비율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아래의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표를 보라). 소련에서는 1946년 제4차 5개년 계획 개시가 선언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모네’(Monnet) 계획을 채택하고, 르노, 석탄, 가스, 전기, 프랑스 은행, 대규모 시중 은행, 에어 프랑스, 그리고 최대 규모의 보험 회사들을 국유화했다. 영국이 국유화한 대상들도 그에 못지않았다. 우리가 이전에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국가 자본주의가 정부의 국방 관련 계약의 형태를 취하는 동안, 전후 재건기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회복은 미국의 마샬 원조(Marshall Aid)에 의해 시작되었고, 전쟁 이전 국가 통제를 이용해 유지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IRI(위의 내용을 보라)가 거대한 규모로 성장, 국가 철강의 60%를 생산했으며, 알파 로메오(Alfa Romeo)사를 소유, 20만 명의 공학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사업을 통제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이 시기 부르주아지는 자본 축적을 강제하도록 국가 기관과 통화, 재정 체계를 다른 어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보다 더 많이 이용했다.”13)

 

이러한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은 아마도 서유럽의 민간 산업에서조차, 공공 영역이 이제 보편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고용주로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래의 공공 영역 종업원 표를 보라). 정부의 직접 통제는 주로 기간 산업들에서 이뤄졌는데, 이 산업은 자본의 갱신과 축적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이윤이 필요하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국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이윤율의 동등화 경향이 무너지는, 역사적 위기의 지표이다. 이것은 1970년대 초, 전후 호황이 끝났을 때 국유화를 향하는 경향들이 처음에 더욱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국가가 통제하는 UCS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그리고 국민 기업 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형태의 국가 주도 경제화의 심화, 그리고 브리티시 레일랜드(British Leyland), 당장의 선박제조 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 영국은 이러한 방식의 보편적 발전을 이끌었다.

 

               공공 영역 종업원의 숫자 – 노동력 대비 비율(%)

국가

총 일반

정부 부문

공기업

총 공공 영역

영국

11.9

10.1

22.0

캐나다

9.9

2.0

12.0

미국

16.7

0.04

16.7

베네수엘라

12.4

1.2

13.6

칠레

10.1

N.A.

10.2

아르헨티나

11.5

3.5

14.9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인 인플레이션

 

경제 부문에서 국가 주도 경제화를 동반하는 국가 지출의 많은 부분은 사실 비(非)생산적 부문이다 – 그것은, 자본 축적을 심화시키지 않는 지출이라는 것이다. 무기 생산뿐만 아니라 전체 제3의 영역(사회적 서비스 등)은 비생산적 지출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도, 비생산적 지출의 증가는 그 자체로 인플레이션(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전체 경제 수준에서 보았을 때 총가격은 총가치에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총 사회적 자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러한 비용이 잉여가치의 ‘못’(pool)에 있는 배수관을 상징하고, 따라서 이윤율 하락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임은 명확하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연관된 가치 생산의 양적 증가 없는 화폐 공급 확장의 결과이다.

 

다른 말로, 가격의 상승은, 대량의 통화는 반드시 특정한 어떤 상품으로 교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화폐 공급의 확장으로 인한 자신의 실제 가치를 재정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통화의 가치 하락을 반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관된 가치 생산의 증가 없는 화폐 공급 증가의 결과는 부르주아 고전 경제학 이론의 용어로, MV = PT로 표현할 수 있다. 이때 M은 화폐의 양, V는 순환 속도, P는 가격, T는 산출물이다. 명백히, M의 증가는 그에 동등한 T의 증가 없이는 P(다시 말해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비생산적 지출은 그렇게 방정식에 삽입된다.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중요한 요인은, 새로운 가치(또는 고전 경제학 용어로 ‘산출물’)의 생산 증가보다 빠른 화폐 공급의 확장이다. 따라서, 비생산적 자본이 어떻든 관계없이, 화폐 공급의 확장 없이는 인플레이션도 없다. 그러나, 실업이라는 매우 큰 위기가 있을 것이다.

 

전후 시기 국가는 화폐 공급의 확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더욱 몰리고 있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금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회피하고, 실질 구매력을 약화하는 간접적인 공격을 하기 위해서였다. 직접적인 공격이,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지만, 정부 수입의 중요한 원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가 책임 증가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 전체를 공급할 수는 없다. 적자 재정(다시 말해 국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하는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1930년대 초 금본위제가 폐기된 이후 모든 ‘혼합’ 경제 국가들의 공통 특징이었다.

 

국가가 화폐 공급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각 국가 경제가 금속(주화) 교환 기준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국가 경제에서의 화폐 공급은 국가 경계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실제 금(괘) 또는 은(괘)의 양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발행된 지폐는 법적으로 주화로 교환될 수 있었고, 지폐 발행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주화로, 일정 법적 고정 비율로 교환해 줘야 하는 의무에 의해 제한되었다. 따라서 화폐의 공급은 각 국가 내의 은행이 보유한 금은괴 보유량에 의해 제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적대국이 화폐를 찍어냄으로써 엄청난 재정 비용을 감당하면서 국제 금본위제의 포기를 맞이했다. 따라서 1918년에 이르렀을 때, 독일의 지폐 발행 증가는 1914년 수치의 5배였고, 영국은 전 이전 수치의 4.5배, 프랑스는 1914년 합계의 거의 4배였다. 이러한 화폐의 증가는 전쟁으로 인한 폐기물 생산에 돈을 대는 것이었고, 이는 새로운 자본의 생산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은 독일에서 245%, 영국에서 230%,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353% 급증했다.14) 여러 국가에서의 금본위제 폐지를 동반한 화폐의 평가절하는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는 평가절하된 국가의 상품들의 단기적 경쟁력을 향상했으나, 다른 국가들로부터의 상품과 비교했을 때 가격은 낮아졌다. 그러한 효과는 오직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었는데, 경쟁하는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그들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1936년쯤에는 이전에는 금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든 이 ‘황금 연합’(gold bloc)의 국가들은 이제 금본위제를 폐기하고 자신의 화폐를 평가절하했다.

 

1930년대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과 꼭 마찬가지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중앙 정부는 금본위제를 포기함으로써 화폐 공급을 증가시키고, 경제에 대한 그들의 개입을 확대할 수 있었다. 아래에서 볼 것처럼, 정부 지출의 최대규모 증가는 무기 생산의 대규모 증가 때문이었는데, 대규모 실업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에 대한 공포는 국가가 기존의 복지 서비스를 확대하고 공공사업의 건설에 개입하도록 했다.

 

                         국가별 총 국가 지출 및 공공 부채

국가

총 국가 지출

(각 국가 통화 기준. 현재가치 000,000은 생략)

공공 부채

(국가 수입에 대한 비율)

1928 or 1929

1937 or 1938

1929

1937 or 1938

프랑스

44,248

68,971

114

171

이탈리아

20,519

34,100

N.A.

N.A.

영국

782

1,134

174

163

독일

8,187

N.A.

12

25*

벨기에

12,299

13,546

77

85

* 미공개 기명 어음의 양에 대한 정보 원천: 클라우 & 콜(Clough and Cole), “유럽의 경제 역사”(Economic History of Europe), 819쪽

대개 적자 재정으로 자금을 확보했던 폐기물 생산의 큰 증가는 오직 인플레이션을 확대하고 공공 부채를 증가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고, 이는 위의 표로 증명된다.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엄청난 비용은 다시 국채나 재무부 단기 채권을 담보로 한 은행으로부터의 중앙 정부 대출로 충당되었고, 결국 화폐 공급을 확대했다. 아래의 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폐 순환의 증가를 명백히 보여준다. 전쟁 자금을 위한 화폐 공급의 엄청난 증가는 가격을 고정하는 수단들이 무용해지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과 그 직후, 모든 적대국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자 도입된 정책들은 다시 한번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폐 순환의 증가

                     (1939년 7월 ~ 1944년 12월)

국가

시기

증가 비율(%)

독일

1944년 12월

435

벨기에

1944년 8월

339

프랑스

1944년 12월

369

이탈리아

1944년 12월

1,034

미국

1944년 12월

259

영국

1944년 12월

160

캐나다

1944년 12월

318

 

출처: 클라우 & 콜 “유럽의 경제 역사”, 847쪽

 

서유럽에서의 케인즈주의 조치의 도입은 다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들이 강제적으로 도입한 정책들의 다소 의식적인 확장으로 보였다. 케인즈는 자본주의의 주기적 위기를 투자를 촉진하는 이윤율을 조작함으로써, 그리고 불황기 고용을 유지하기 위한 적자 재정과 공공사업으로 피할 수 있고, 결과적인 국가 부채의 증가는 ‘호황’기에 상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실제 일어난 일은 모든 선진국가에서의 국가 부채의 영속적인 증가였고, 인플레이션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속적 특징임이 증명되었다. 보기를 들어,

 

“서유럽의 물가는 1947년에서 1957년 사이 66% 증가했다. 이것은 매년 5% 증가한 결과인데, 이 비율은 국채 수익(세전)과 거의 같은 정도이다.”15)

 

케인즈주의 이론에 따르면, 점진적인 인플레이션은 국가 경제의 건전하지 못한 특징보다 오히려 건전한 것이며, 왜냐하면 이것은 사업가들이 투자하도록 하고, 세계 시장에서 수출물의 경쟁력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애초에 인플레이션의 존재 이유를 기억한다면(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증가보다 화폐 공급의 확대가 빠른 것), 인플레이션은, 만약 화폐 공급의 팽창 비율이 계속 가치 생산의 비율을 계속해서 앞지른다면, ‘점진적’ 과정을 넘어선 무언가임이 명백하다.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이것은 프랑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칭한 “30년간의 영광스러운 세월”이라는 장기 호황의 끝을 가져온 세계적 규모의 “경기 후퇴”의 진행과 함께 1970년대 일어났던 일이다. (계속)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2023년 9월 8일

 

 

<주>

 

1) 쇠퇴의 개념 구체화 참고

 

 

 

2) 보기를 들어, 미국 경제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에 대한 표는 다음과 같다.

 

photo_2019-01-09_13-27-57.jpg

 

3)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참조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4) 이러한 미국 정부의 조치 변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팀 우(Tim Wu)의 '거대함의 저주 - 새로운 황금시대의 반독점'을 참조

 

5) 가장 유명한 인물은 1953년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입성한 제너럴 모터스의 사장 찰스 윌슨이다. 그는 상원 청문회에서 제너럴 모터스의 막대한 지분과 미국 제국주의의 이익 사이에 이해 상충이 없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인들은 이를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라는 유명한 문구로 축약했다. 결국, 윌슨은 자신의 주식을 팔아 이를 확인받았다.

 

6) 로이드 조지(Lloyd George)의 전쟁 기억 1권, 147쪽

 

7) 폴 매틱(Mattick), 맑스와 케인즈, 115-6쪽

 

8) E. 홉스봄(Hobsbawm), 산업과 제국, 242쪽

 

9) D. 차일즈(Childs), 1918년 이후 독일, 59쪽

 

10) E. 탄넨바움(Tannenbaum), 이탈리아의 파시즘, 112쪽

 

11)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유럽 경제사, 764쪽

 

12) ‘제국주의 본국의 분석에 관하여: 서독의 사례’, 사회주의 경제학자 회의 회보, 1974년 봄, 6쪽. 동유럽과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독일의 '경제 기적'에 대한 유용한 설명이다.

 

13) 위의 책, 19쪽

 

14)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op.cit. 734쪽에서 발췌한 수치이다.

 

15) 매틱 op.cit. 147쪽에서 인용. J. O. 코포크(Coppock), 유럽의 필요와 자원에서 인용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

 

<이전 글>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1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3645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 (2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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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열정적인 활동가 로렌 골드너(Loren Goldner)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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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가 지난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많은 활동가와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는 2006년 한국에서 개최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에 참여했고, 코뮤니스트좌파를 한국에 처음 소개하는 공개강연회(자본주의, 좌익공산주의와 계급투쟁)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미국 뉴욕의 한국 영사관 앞에서 “한국 노동투사 (사노련) 탄압 중단과 국가보안법 철폐” 피켓 시위를 벌이는 등 국제연대에도 적극적이었다. 2012년 이후에는 한국의 코뮤니스트좌파와 의미 있는 교류를 하지는 못했지만(그의 관심사와 소통 범위는 너무 넓어서 이른바 ‘자본의 좌파’나 맑스주의에서 이탈한 이들과도 자주 교류했다), 우리는 그의 활동과 저술을 계속 주시하고 참고해 왔다.

 

우리는 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국제주의자 전망」의 추모글과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가 작성한 글을 다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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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골드너를 추모하며

 

로렌 골드너 동지가 4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투쟁가의 상실이며 그의 죽음은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렌의 정치 인생은 60년대 버클리 대학 재학 중 연좌 농성과 반전 폭동으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렌은 급진주의에 빠져 마오주의, 스탈린주의, 신좌파에 대한 비판을 찾아 맑스주의를 받아들였다. 한동안 그는 독립 사회주의자 클럽에 가입했는데, 이 클럽은 나중에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IS)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로렌은 버클리와 ISC를 떠나 초좌파의 전통에 매료되어 정기적으로 유럽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그는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Socialisme o Barbarie), 「상황주의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international), 「불변성」(Invariance) , 장 바로(Jean Barrot), 「프롤레타리아」(Le Prolétaire) 및 망명 중인 이탈리아 좌파의 다른 요소들과 친숙해졌다. 로렌의 정치적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과 결정적으로 단절하고, 그가 받아들여야 할 국제주의적 지향과 역사적 연결고리를 제공한 앙리 시몽(Henri Simon)과 만남이었다.

 

1970년대에 로렌은 뉴욕에 정착했다. 뉴욕에서 그는 아르바이트하며 좌파 서점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맑스를 읽으며, 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선언하며 살았다. 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 중요한 저서인 「미국 노동계급의 재구성」을 출간했다.

 

80년대에 로렌은 케임브리지로 이주하여 하버드에서 사서로 일하게 된다. 그는 코뮤니스트좌파에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과 계속 교류하며 많은 이들에게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로렌은 많은 정치 서클에서 활동했지만, 어떤 조직과도 연계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시류에 반하는 글쓰기"를 선호했다. 그는 종파를 초월한 토론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직접 만나거나 나중에 온라인에서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했다. 건강이 악화할 때까지 수년간 운영한 '멜트다운(Meltdown)' 목록과 같은 여러 온라인 토론 목록을 만들었다.

 

로렌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주기를 추적하는 것이었다. 90년대에는 아시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장 투쟁을 따라 인도, 중국, 일본, 한국을 여행하며 경제 위기와 의제 자본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살았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노동계급에 관한 중요한 저술을 집필하기도 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로렌은 반란자 노트(Insurgent Notes) 창립에 참여했고, 노동계급 운동을 추적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키며 맑스 읽기 그룹을 이끌고 중국어를 배웠다. 2017년 로렌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로렌은 많은 자질을 갖고 있었다. 뛰어난 언어학자였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성과 겸손함을 겸비했으며, 모든 것에 대해 열정이 있었고 호기심이 많았으며, 누구에게나 항상 질문이 많았다.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과 노동계급 투쟁에 대한 헌신으로 그는 전투적으로 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터키로 여행했고,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이집트에서 살았으며, 스페인 남부에서 로마 공동체와 함께 살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보르디가를 영어권 세계에 소개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로렌은 가는 곳마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친절한 친구이자 다정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며,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계혁명, 코뮤니즘을 위한 투쟁, 오만한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열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국제주의자 전망」의 친구이자 동지였다. 그가 그리울 것이다.

 

국제주의자 전망(IP)

2024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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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중동 전쟁 이해하기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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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양쪽의 끔찍한 이미지는 시청자가 입장을 정하게 해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전쟁을 하는 양쪽 진영의 전쟁 선전은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ㆍ축제 참석자, 가자지구 로켓포의 희생자, 납치된 사람들이 키부침(kibbutzim)에서 학살당한 사진.

ㆍ가자지구 폭격으로 인한 병원, 구급차, 학교, 주택가에 있는 희생자 사진

 

이러한 사진을 보고서 인간이 느끼는 첫 번째 반응은 피해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반응은 공격자나 방어자에 의한 역습으로 대체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반격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 부여는 가족 및 부족 관계로 조직된 농경 사회에서 행해졌던 복수의 도덕성에서 시작되었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익 공동체로서의 '국민'이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명분으로 이러한 복수의 도덕성에 성공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현재 전쟁에서 양쪽 진영이 모두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과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누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침략자와 피해자를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가 전쟁을 시작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양쪽 모두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팔레스타인이 침략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반복해서 추방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추방되어 약 2,000년 동안 '홀로코스트'. 무법자로 살아왔다." 전쟁의 명분은 민족주의의 독설로 쓰인 한 민족의 역사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 '식민주의'와 '민족 해방 투쟁', 한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들에 대한 학살보다 더 나쁘다고 얘기하는 '집단 학살' 이야기도 등장한다. 학살의 규모를 측정하여 이후의 학살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아니며 슬픔은 저마다 고유하다. 파편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폭격으로 온 가족이 사망한 사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두 경우 모두 전쟁 선전으로 복수심에 호소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이는 ‘국민’과 ‘조국’을 내세워 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해 복수에 의존하는, 자신이 더 높은 도덕적 지위에 있다고 믿는 사람의 실체가 아니라 전쟁의 실제 모습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분명히 도덕의 영역, 즉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민족주의 세뇌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 형태에 기반을 둔 도덕의 영역에 속해 있다. 우리는 100년 넘게 전 지구를 지배하며 인류에게 진보 없이 노동과 자본의 생산 관계를 강요해 온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다. 반대로 식민주의 정책에 의해 세계 시장이 형성되면서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과 크고 작은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주의 블록으로 뭉쳐 직간접적으로(대리인을 통해) 서로 싸우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쟁에서 민족주의는 국가를 중심으로 전체 국민을 단결시키고, 전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더욱 압박하고 억압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으로 계급 이익을 방어하는 것을 방해하는 수단이다. 노동계급의 도덕성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간 전쟁이라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다. 현재 중동 전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분석에 대한 글은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참조하라.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0/26/the-working-class-and-the-war-israel-palestine/)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함정은 본질적으로 양측의 민족주의 복수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제국주의 사이 전쟁이 지속할수록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열망은 사람들의 일부에서 더 많이 일어나게 된다. 전쟁을 끝내고자 하는 이러한 열망은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쉽게 나타나는데, 이는 시민의 자유와도 비슷하다.

 

아랍어권 또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왔다는 이유로(때로는 몇 세대 전에) 차별을 통해 민족 정서를 갖게 된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민족과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덧붙이자면, 이는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노동자들을 시오니스트가 되게 한 바로 그 기제이다. 그 결과 여러 유럽연합 국가와 미국, 캐나다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일부의 사람들이 침략자로 낙인찍힌 승리한 당사자 이스라엘에 대한 비난 여부와 관계없이 패배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을 주요 피해자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뉴욕 중앙역 복도에서 유대인과 다른 사람들에게 강제된 전쟁은 "나의 전쟁이 아니다"라는 독특한 구호를 내걸고 연좌 농성을 벌였다. 많은 시위대가 체포되었고, 이는 미국 시민 자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이어 서구의 여러 도시에서 농성이 이어졌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는데, 현지 언론은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주말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전국적인 기후에 대한 시위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남은 것은 프랑스, 유럽연합, 미국, 카타르? 등의 국가가 어떻게든 폭력을 멈출 것이라는 희망뿐이다. '평화'는 여전히 너무 먼 곳에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인도주의적 휴전', '전투 휴전', '정전' 등 누군가의 승리와 누군가의 패배를 향한 전쟁의 단계에 불과한 일련의 계급 질서에 불과하다. 정부 지도자들과 의회 정당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을 군사적, 경제적, 이념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위선적인 그들은 '피해자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공교롭게도 미국이 제국주의 이익을 확보하는 하나 또는 다른 '단계적 완화'와 '중재'를 찬성한다고 말한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미국과 네타냐후 진영이 부분적으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EU 내 충성도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TV 대담 테이블의 모든 가짜 토론과 ‘소셜’미디어의 모든 선동은 대중에게 두 전쟁 정당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고 망치질한다. 이는 미래의 전쟁, 나아가 중국과 미국 사이의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의도된 행동도 어느 한쪽의 선택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된다. 항만노조의 전쟁 물자 적재 거부는 서방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이 아닌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쟁 중인 이스라엘 측을 겨냥한 행동이다. 우크라이나 탈영병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탈영병 등도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무기 수송 방해와 탈영병에 대한 지원은 이스라엘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사자 모두를 대상으로 명확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항만노조의 활동은 종종 후자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동'에 반영되는 '의식'의 의미는 '식민지배자' 이스라엘과 '제국주의'(미국)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이란, 중국, 러시아)에 대한 지지라는 게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의 반전 선전과 행동은 모든 교전 국가와 그들을 지원하는 초강대국의 제국주의 목표를 폭로하는 데 명백히 기반을 두어야 한다. 따라서 혁명적 소수는 전선 양쪽의 프롤레타리아트로 향해 연대해야 하며, 세계 자본의 모든 분파의 공격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혁명적 투쟁 발전의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국제주의 입장은 노동계급이 친팔레스타인과 친이스라엘로 나뉘는 잘못된 분열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혁명적 소수가 주장하는 혁명적 패전주의는 전쟁 지역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롤레타리아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대리인) 전쟁을 지원하고 이를 위해 노동자에 대한 억압, 이데올로기적 지배, 더 많은 착취를 강요하는 국가의 프롤레타리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 전쟁의 한쪽을 지지하는 위의 '전쟁 반대 투쟁'은 전쟁 양측이 모두 부르주아와 제국주의적 목표에 봉사하고 있으며, 둘 다 반(反)프롤레타리아적 이며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응은 자본의 모든 분파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라는 프롤레타리아의 원칙을 침해하는 행동이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은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계급 관계를 바탕으로 노동계급 투쟁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몇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와 불가능한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계급투쟁에서 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 있지만, 현실에 기초해 보면 다양한 부르주아적 '해결책'도 마찬가지다. 물론 가장 '급진적' 해결책은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들 또는 모든 유대인을 멸망시키는 것이지만, 이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다. '두 국가' 해법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중 하나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의 국가'라는 해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지속된 상호 증오뿐만 아니라 억압과 착취 세력을 보존하는 각 국가의 분할 및 정복 정책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세계를 계속 지배하는 한, 지금의 전쟁에 이어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우크라이나, 중동 등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주요 쟁점은 계급투쟁이다. 편의상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모든 국가와 전선 양쪽에서 자본과 국가가 의료 및 기타 서비스를 삭감하고 사람들을 억압하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면서 착취를 강화하는 등 노동계급을 상대로 계급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는 가자지구, 헤즈볼라, 이란, 중국과 러시아에서 장악한 지역, 다른 한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주변 서방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에 투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라는 기사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 그럴 수 없다'이다. 노동자들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부르주아지와 국가의 패배로 이어질지라도, 즉 혁명적 패전주의로 이어질지라도 투쟁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을 포기하면 사형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지하 공장과 이스라엘의 지상 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채 상호 폭격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가리 찢기게 될 것이다.

 

ㆍ그렇게 되면 가자지구의 여성, 이스라엘의 예비군, 뉴욕의 유대인(센트럴역 농성)의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시위를 진압하고, 모든 생산 방해 행위를 처벌하며, 탈영병을 군대로 압송해야 한다.

ㆍ그리고 이란의 철강 노동자들은 '그들' 정권이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하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1)

ㆍ그리고 전쟁 경제에 점점 더 많이 관여하는 서방 무기 산업과 제조업 부문의 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레도 코르보(FC)

2023년 11월 17일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성된 기사를 기반으로 함)

 

<주>

1)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이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야톨라 정권과 러시아는 중국 주변에서 형성되고 있는 블록 일부다. 이란은 러시아에 드론을 공급하고, 하마스에 미사일 부품을 공급하고 있으며, 레바논(헤즈볼라),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다양한 민병대를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란의 좌파 부르주아의 지하 저항 단체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그들이 싸우고 있는 정권과 같은...중동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인민'을 지지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항상 미국 편에 서는 우파 부르주아 계열의 지지자들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아야톨라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르주아들이 정권 전복의 전주곡으로 여겼던 차도르 시위(중산층이 주도) 당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중산층 시위의 구호를 따르지 않자 이기적이고 비겁하다거나 ‘경제주의자’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다.

이제 이란의 노동자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들'의 정권이나 우파 또는 좌파 부르주아 저항 세력과 달리, 노동자들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진행될 수도 있는 3차 세계대전을 준비하는 전쟁에서 선택할 수 있는 편이 없다. 노동자들은 계급 이익을 옹호하고 이란의 모든 부르주아 분파에 대항하는 투쟁을 이란 국가에 대한 공세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을 종식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출처>

https://leftdis.wordpress.com/2023/11/17/traps-in-understanding-the-war-in-the-middle-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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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좌익과 우익의 전쟁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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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선진화된 군대 중 하나가 무방비 상태의 밀폐된 도시 지역을 마구잡이로 파괴하는 모습을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지켜보고 있다. 이 광기를 멈춰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요구와 분노가 확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좌파는 전쟁을 멈추기보다 하마스 편에 서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무고한 사람에 대한 폭력이 대의를 위해 행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시하기를 원한다. 과연 그럴까?

 

하마스 옹호자들은 하마스 군대는 식민지 권력에 대항해 일어선 토착 자유 투사이며, 식민지 전쟁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분쟁은 필연적으로 양측 모두 무고한 희생자를 낳는 잔인한 일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투쟁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자유 투사'들의 몫이며,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백인이고 식민지를 보유했던 국가에 살고 있다면 더 그렇게 주장한다. ‘그들’ 국가의 과거 또는 현재 행동에 대한 수치심은 ‘반(反)식민지’ 투쟁의 전술과 목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저항 세력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다른 쪽의 옹호자인 시온주의자들도 똑같은 논리를 사용한다. 과거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 홀로코스트가 있었고 나크바(Naqba)가 있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자신들에게 가해졌던 잔인함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가하는 잔혹성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러분 관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피부색이나 태어난 나라가 아니다.

 

나는 1976년 좌파 친구들과 함께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Pol Pot’s Khmer Rouge)를 비판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유럽에 사는 백인이기 때문에 비판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던 토론이 생각난다. 그들에 따르면 크메르루즈는 자유의 투사였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미 제국주의 지지를 의미했다. 물론 오늘날에는 아무도 폴 포트의 킬링필드에 대해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물론, 크메르루즈는 대부분 자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맞다. 하지만 하마스도 마찬가지다.

 

국제주의자 전망(IP)이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주장했듯이, 하마스는 10월 7일의 행동이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사망과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다고 냉정하게 판단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마스의 권력욕 때문에 수천 명의 동료가 희생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여전히 인간적인가?

 

하마스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와 같은 '자유의 투사'가 해방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누구로부터의 해방이고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주민들이 이슬람주의 하마스 국가에 살면 자유로워질까?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무엇을 의미할까?

 

목표와 방법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파업을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반대파를 투옥하고 고문하고, 민간인을 살해하고, 어린이와 노인을 인질로 잡는 등 하마스가 하는 모든 행위는, 시민의 자유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강력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하마스의 목표를 보여준다. 지난여름 가자지구에서는 많은 사회적 시위가 있었다. 물, 전기,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하마스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전년도(특히, 2019년 3월)에 비해 시위를 덜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10월 7일의 대규모 하마스 공격은 그 더운 여름에 이어 발생했다. 두 사건 사이의 연관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마스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 행동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팔레스타인 전문가 에밀리오 미나시안(Emilio Minassian)은 팔레스타인의 무력함으로 인해 "한편으로는 인정받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하고 싶은 이중적 분노의 논리를 낳는다"고 말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 국가보다 더 나쁘거나 더 잔인하지는 않다. 그들은 모두 무고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비슷한 논리로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각자의 방법이 다른 만큼 전술과 전략도 다르다. 이는 비대칭적인 분쟁이다. 따라서 그들의 잔인함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한 쪽은 참수를 하고 다른 한 쪽은 융단폭격을 한다. 둘 다 공포를 심는 것이 주요 목표이기 때문에 테러리스트다. 우리 시대에는 공포가 정치적 무기로 점점 더 보편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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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어디에도 ‘인민’ 이 주인인 나라는 없다. 모든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주인에게 속해 있다. 인구 대다수를 굶주림과 권력의 부재에서 해방시킨 민족 '해방' 투쟁의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모든 투쟁은 자본주의 주체 사이의 투쟁이었으며 좌파는 항상 어느 한쪽을 지지했다.

 

가자지구 응징을 집단으로 반대하는 것이 하마스 지지라고 믿는 좌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북베트남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지지라고 믿었다. 그 전쟁에서 200만 명이 사망했다. 베트남은 ‘승리’했다. 이제 베트남은 자신을 ‘해방’ 시킨 국가의 후발 상업 및 군사 파트너가 된 경찰국가가 되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이제 미국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장에서 중국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저귀를 차고 일한다. 이제 베트남 사람들은 하노이에서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펩시를 마실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긴 하다.

 

민족 '해방'의 목록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너무 멀리 갈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체제가 더 좋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민지 멍에에서 해방된 대부분 국가에서 대다수 사람이 매우 불행하게 사는 것은 민족 ‘해방’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해방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투쟁이 사실상 진정한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 부르주아 투쟁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반대로, 특히 현시대에 민족투쟁은 걸림돌이 된다. 인종 차별이 내재한 식민지 체제가 철폐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종식과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진전이 있었음에도 그 한계를 봐야 한다. 이 나라는 빈부 격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실업률이 그 어느 때보다 높으며, 파업 참가자들을 기관총으로 쓰러뜨리고,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감옥에 가두는 등 진정한 자유를 위한 투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터너와 베이컨

 

하마스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거론하는 또 다른 예는 터너(Turner)봉기다. 냇 터너(Nat Turner)는 1831년 버지니아에서 유혈 봉기를 주도한 노예였다. 그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은 백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가족 전체가 학살당했다. 이 학살은 10월 7일 하마스 학살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란츠 파농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 압제자에게 대항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폭력"이다.

 

그렇게 되면 터너와 하마스는 자신의 의지도, 주체성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벽이 테니스공을 반사하듯 받은 폭력을 반사하는 자동화 장치에 불과하다. 마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인종이나 민족 전쟁으로 전개되지 않는 억압에 맞선 봉기의 사례도 있다. 미국의 첫 번째 주요 봉기는 1676~1677년에 일어난 베이컨 봉기다. 이 영화에서 가난한 백인과 흑인 노예들은 버지니아의 식민 정부에 맞서 함께 싸웠다. 그들은 당시 수도였던 제임스타운을 점령했다. 영국에서 원정군이 도착한 후에야 봉기를 진압할 수 있었다.

 

흑인 노예와 백인 프롤레타리아는 이해관계가 같았다. 도덕적 측면을 제쳐두더라도 (그리고 그러한 부분으로 베이컨 봉기를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베이컨과 함께 싸운 노예들은 터너를 따르는 노예들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지능적인 투쟁 방법, 즉 피부색이나 종교보다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계급에 기반을 둔 동맹을 선택했음이 분명하다. 식민지 권력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베이컨의 봉기는 식민지 권력에 공황상태를 초래했다. 힘없는 백인과 흑인이 다시 힘을 합쳐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예제의 인종적 특성을 강화하고 백인과 흑인 간의 접촉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인종 분리주의(apartheid) 제도인 버지니아 노예법이 도입되었다.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동계급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었고, 오늘날 미국의 흑인 프롤레타리아트도 이러한 인종을 넘어서는 연대가 절실히 필요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지원 없이는 스스로 해방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터너처럼 최대한 많은 유대인을 살해해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 베이컨 봉기 이후 권력자들이 백인과 흑인을 갈라놓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던 것처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권력을 장악한 시오니스트와 이슬람주의자들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서로 대립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프롤레타리아가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

 

반(反)식민지 전쟁인가?

 

이스라엘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원래 살고 있던 거주민 대부분이 쫓겨난 땅에 대부분 유럽의 백인들이 정착하면서 탄생한 국가이다. 각기 다른 해의 지도를 나란히 놓고 살펴보면 두 나라의 성장과 ‘원주민’의 영토가 축소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원주민 추방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최근의 강경 우파 네타냐후 정부 하의 서안 지구에서 가속화되었으며, 현재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정착민들과 함께 광신적인 군대처럼 과도하게 추진되고 있다. 미국이 인디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시오니스트 국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호구역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는 식민지 권력이 아니라 이미 영토를 확보한 국가이다. 국가가 하는 일은 그들을 분리해서 국가의 지배를 보장할 수 있는 다른 구역으로 밀어 넣어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은 비슷할 수 있지만, 식민지 전쟁은 아니다. 하지만, 미나시안(Minassian)이 지적했듯이 다음과 같은 유럽 식민주의와 이데올로기적 유사성도 있다.

 

"이스라엘은 인종적 기준에 따라 노동자를 '동물화'하여 문명 세계와 문명 이전 세계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유럽의 논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이 논리에 따라 가자 지구의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있다. 가자 지구의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즉 이 지역에서 인간 집단을 구분하는 위계를 상기시키기 위해 다른 정치적 목적 없이 폭탄에 의해 매몰되고 있다. 개가 물면 무리를 향해 총을 쏘게 된다." 그는 "문명과 동물 사이의 경계는 유동적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이스라엘-유대인 시민권이 있었고 스스로 활동하고 있다. 아랍계 유대인(미즈라히)이나 에티오피아계(팔라샤)는 오랫동안 울타리의 반대편에 있었으며 다른 원주민을 달래는 데 사용되는 일종의 원주민을 보조하는 군대였다.“

 

그러나 식민지 전쟁은 토착 사회 상류층 관료들이 이끄는 토착민과 국가를 통제하고 국내 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국 세력 사이의 전쟁이다. 미나시안은 두 나라 사이의 투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분쟁은 식민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도시들은 빈곤한 변두리 지역으로, 하나의 국가, 하나의 경제를 구성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 역시 이스라엘 화폐, 이스라엘 제품, 이스라엘 신분증을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프롤레타리아는 똑같이 전체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서안지구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이스라엘과 식민지에서 일한다. 그들은 종종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미나시안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나는 서안지구의 한 난민 캠프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저녁 내내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수도의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인종분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즉 건설 발주자는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 점령지에서 노동자 모집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인, 감독관은 아랍어를 구사하는 세파르드(Sephardic) 유대인 등 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양한 이주 프롤레타리아들도 있다. 태국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미등록 이민자로서 실제로 가장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다. 이 그룹은 서로 섞일 수 없으며, 각 그룹은 생산 관계에서 고유한 지위와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이스라엘은 주로 미국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를 대규모로 고용한 덕분에 경제가 성장하고 고도로 발전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1983년 주식 시장 폭락, 1984년 445%의 인플레이션, 기록적인 국제수지 적자 등 급격한 성장세가 주춤했었다. 그 후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 산업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전보다 훨씬 덜 필요로 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실업률이 치솟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첨단기술 산업의 선두주자가 되었지만, 다른 선두주자들과 마찬가지로 고용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나시안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경제를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가두어 두고 현지 하청업체에 관리권을 넘기는 분리 정책이었다.

 

"이 거대한 울타리, 민족-종교적으로 유용한 프롤레타리아와 잉여 프롤레타리아를 분리하는 이 작업은 평화 과정과 동시에 시작되었으며, 실제로는 불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외부화되는 과정이었다"라고 미나시안은 말한다. 따라서 식민지 분쟁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토착민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축적의 중심지 특유의 비율로 잉여 프롤레타리아 인구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스라엘에서 노동 계약을 맺은 모든 노동자 외에 팔레스타인이 관할하는 폐쇄된 대규모 교외 지역인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거의 5백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텔아비브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곳에 갇혀 매일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고 있으며, 우리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가자지구는 서안지구의 도시나 난민 캠프보다 이스라엘 경제의 쓰레기통과도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의 청년 실업률은 70%를 넘어섰다(현재 침공 전). 이러한 남아도는 노동자들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다양한 곳에서 재정적 도움을 받아 극빈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 돈은 하부 조직인 하마스와 이른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분배되며, 이들은 주로 '질서'를 유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대에 입대시키고 다른 준군사조직을 제압하는 등 다른 국가 기능도 수행한다. 하부조직들은 환멸을 느낀 팔레스타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으며 실추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항하여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우리는 하마스의 전략에 대한 해석을 찾아야 한다. 하마스는 스스로 "불명예스러운 존재"가 되려고 한다. 이것은 해방 투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역 분쟁이 아니다

 

그러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내부 역학 관계는 이 이야기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미국과 그 도전자들 간의 지정학적 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압력으로 대부분의 유럽 식민지 체제가 종식되면서 탈식민지화의 물결과 함께 이루어졌다. 둘 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전 세계 권력이 이동하면서 발생한 결과이다. 강력한 무기를 갖춘 미국 군대를 보유한 군사화된 백인 식민지는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지정학적 계획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석유 자원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미국에 이스라엘의 중요성도 커졌다.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 틀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는 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식민지 전쟁이 아니라 제국주의 사이 분쟁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인 "자본주의 죽음의 세계"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이란에 대항하는 강력한 친미 동맹을 형성하려는 미국의 정책도 중요한 요소였다. 이란은 미국이 IDF를 지원하듯이 하마스(보다 온건한 정치세력은 카타르가 자금을 지원함)의 군부를 지원하고 있다. 전쟁에 사용된 돈과 무기는 대부분 다른 나라에서 조달되었다. 사상자만 지역 사람들이다.

 

그 글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 대한 관점의 부재와 그 위기가 심화할 것이라는 확신을 강조한 바 있다. 구조적 위기는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 군비 지출과 군사 분쟁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다. 우크라이나, 아프리카, 카라바그, 그리고 현재 가자에서 얼어붙은 전선이 녹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분쟁이 아니라 기존 분쟁이 갑자기 고조되는 상황이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더 많은 화약고가 폭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력 중 쓸모없는 부분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할 것인가가 자본주의 세계 질서에서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이 그러한 부분에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미나시안에 따르면 현재 가자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쟁이 아니라 중심지역 축적 블록의 일부인 민주적이고 문명화된 국가가 전면전에 상응하는 군사적 수단으로 남아도는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는 가자지구에서 발생한 수천 명의 죽음은 "다가올 자본주의 위기의 끔찍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전쟁의 역할이 커지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것 같다. 군인과 '자유의 투사'를 존경하고, 대량 학살에 박수치거나 눈감고, 조국을 위한 죽음과 파괴를 정상으로 여기며, 평범한 사람들이 항상 패자가 되는 분쟁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드는 법을 배우는 시대이다.

 

해방은 전쟁과 공격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부색이나 신앙과 관계없이 함께하는 노동자의 공동 이익에 대한 연대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실현하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진정한 해방을 방해한다. 무엇보다도 민족주의, 민족-종교적 또는 인종적 이유로 사람들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들고 "팔레스타인은 강에서 바다까지 해방될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는 것은 전쟁을 멈추라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을 부추기는 것이다. 전쟁에서 싸우는 대신 전쟁을 멈추는 것, 지금 가장 먼저 요구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당장 휴전하라! 이제 인질들을 석방하라! 이제 가자 지구 봉쇄를 해제하라! 서안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을 당장 멈추어라! 반(反)유대주의도, 이슬람 혐오도 반대한다! 고통도, 유혈도 이제 그만하면 됐다, 반(反)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연대를 구축하자!

 

샌더(Sanderr)

2023년 11월 15일

국제주의자 전망(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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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warmongers-left-and-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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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4강>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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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4강> 

"제국주의 전쟁과 국제주의"

강사 ㅣ 이형로

일시 ㅣ 2024년 7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신청ㅣ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줌 병행) 


(이메일 문의 및 신청 : communistlef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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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침머발트 선언문(1915년)

침머발트 선언문(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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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노동자여!

 

1년 이상 전쟁이 계속 이어졌다. 전장에는 수백만 구의 시체가 널려 있고, 수백만 명이 장애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유럽은 거대한 도살장과 같다. 여러 세대에 걸친 노동으로 이룩한 문명 전체가 파멸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 인류의 자부심이었던 모든 것에 대하여 야만이 승리하여 이를 자축하고 있다.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한 진실과 관계없이 이러한 혼란을 초래한 전쟁이 각국의 자본가계급이 전 세계의 노동력과 천연자원을 착취하여 이윤에 대한 탐욕을 채우려는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경제적으로 후진국이나 정치적으로 약한 국가는 강대국에 예속하고, 강대국은 전쟁을 이용해 자신들의 착취적 이익에 따라 유혈과 철권으로 세계 지도를 다시 만들려고 한다. 벨기에, 폴란드, 발칸 반도 국가, 아르메니아와 같은 민족과 국가 전체가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분할되어 병합될 위험에 처해 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전쟁의 원동력이 완전히 악용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 세계 재앙의 본질을 대중의 인식에서 감춰왔던 장막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민중이 흘린 피에서 전쟁 수익이라는 붉은 금을 만들어 내는 모든 국가의 자본가들은, 이 전쟁이 조국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나라의 독립과 함께 자국민의 자유를 파괴의 현장에 묻어버리고 있다. 승자와 패자 모두, 모든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짓누를 새로운 족쇄, 새로운 사슬, 새로운 짐이 생겨나고 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생활 수준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빈곤과 궁핍, 실업과 인플레이션, 영양실조와 전염병이 발생했다. 전쟁 비용을 지불하는데 사회 개혁의 성과를 훼손하고 모든 진전을 방해하며 수십 년 동안 사람들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소진하게 할 것이다.

 

지적, 도덕적 황폐화, 경제적 재앙, 정치적 반작용 등 국가 사이의 끔찍한 분쟁이 불러온 폐해다.

 

따라서 전쟁은 노동 대중의 이익, 역사적 발전의 환경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동의 존재라는 인간의 첫 번째 조건과도 화해 할 수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세력, 손에 운명을 쥐고 있는 국가, 군주제 및 공화당 정부, 비밀 외교, 방대한 사용자 조직, 중산층 정당, 자본주의 언론, 교회, 이 모든 세력은 그들을 키우고 보호하는 사회 질서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들의 이익을 위해 계속되고 있는 전쟁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

 

착취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하고, 멸시받던 여러분은 전쟁 발발 당시 형제이자 동지로서 인정받다가 혼란스러운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제 군국주의가 여러분을 손상하고, 상처입히고, 타락시키고, 파괴했을 때, 지배자들은 여러분에게 이익, 목표, 이상을 포기할 것을, 한마디로 "국가 휴전"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을 요구하고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견해, 감정, 고통을 표현할 수 없으며,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투쟁할 수 없다. 언론은 재갈을 물리고, 정치적 권리와 자유는 짓밟히고 있다. 이처럼 철권통치를 하는 군부 독재 정권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유럽과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상황을 더는 방관할 수 없으며, 감히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노동계급은 군국주의에 맞서 투쟁을 계속해 왔다. 불안감이 커지면서 국내 및 국제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제국주의 결과로 점점 더 위협적으로 변해가는 전쟁의 위협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슈투트가르트, 코펜하겐, 바젤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에서 노동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길을 결정하는 데 참여했던 우리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계급 조직은 전쟁 발발 이후 그에 따른 의무를 무시했다. 그들의 대표들은 노동자에게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유일하고 효과적인 수단에 해당하는 노동계급 투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전쟁을 계속한 지배계급의 공로를 인정하는 투표를 했다. 그들은 매우 다양한 서비스를 위해 그들의 정부에 의지했다. 그들은 언론과 특사를 통해 각국 정부 정책에 대한 중립국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국가의 휴전 준수를 위해 사회주의 장관들을 정부에 인질로 바쳤으며, 따라서 이 전쟁과 그 목표, 방법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당들이 개별적으로 실패한 것처럼, 모든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을 대표했던 「국제사회주의서기국」(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도 실패했다.

 

이러한 사실은 국제 노동계급 운동이, 비록 그 일부가 제1차 세계대전의 국가적 공황에 희생되지 않았거나 공황을 극복하고 일어선 곳에서도, 국가 학살의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지금도 모든 나라에서 평화를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동시에 벌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만났다, 우리는 사회주의당, 노동조합 또는 그 소수파,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그리고 스위스 사람들을 대표한다. 착취계급과의 국가적 연대가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계급 투쟁의 국제적 연대를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서 있다. 우리는 국제 관계의 끊어진 유대를 새롭게 연결하고 노동계급을 재조직하고 평화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기 위해 모였다.

 

이 투쟁은 또한 자유, 형제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우리의 임무는 합병이나 전쟁 배상금이 없는 즉,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한 평화는 국가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사상이 척결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점령당한 국가에 대한 강제 편입이 없어야 한다. 공개적이든 비공개적이든 합병은 안 되며, 정치적 권리에 대한 억압으로 인해 더욱 견딜 수 없는 강제적 경제 결합도 용납될 수 없다.

 

조직 노동자들이여!

 

전쟁이 발발한 이래로 당신은 지배계급에 봉사하기 위해 에너지, 용기, 용감함을 발휘했다. 이제 자신의 대의를 위해, 사회주의의 신성한 목표를 위해, 피억압 국가와 노예 계급의 구원을 위해, 화해할 수 없는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다.

 

모든 힘을 다해 이러한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 교전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자 의무이다. 피비린내 나는 야만과의 싸움에서 모든 효과적인 수단으로 형제들을 지원하는 것이 중립국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이자 의무다.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이보다 더 시급하고, 이보다 더 귀중하며, 이보다 더 숭고한 임무는 없었으며, 공동으로 이를 완수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국가 사이 평화 구축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너무 크지 않으며 너무 무거운 짐이 아니다.

 

일하는 남자와 여자! 어머니와 아버지! 홀어미와 고아! 다친 사람과 장애인!

 

전쟁으로 인해 또는 전쟁의 결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외친다. 국경 너머, 연기가 자욱한 전장 너머, 황폐해진 도시와 마을에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의 이름으로

 

■독일 대표단: 조지 르데부르(George Ledebour), 아돌프 호프만(Adolph Hoffman)

■프랑스 대표단 : A. 부르데론(A. Bourderon), A. 메르하임(A. Merrheim)

■이탈리아 대표단 : G.E. 모딜리아니(G.E. Modigliani), 콘사니노 라자리(Consanino Lazzari)

■러시아 대표단: N. 레닌(N. Lenin), 폴 액셀로드(Paul Axelrod), M. 보브로프(M. Bobrov)

■폴란드 대표단: 세인트 라핀스키(St. Lapinski), A. 바르샤바키(A. Warski), Cz. (야곱) 하네키(Cz. (Jacob) Hanecki)

■사회주의 연맹: (루마니아 대표단) G. 라코프스키(G. Rakovsky) (불가리아 대표단) 바실 콜라로프(Vasil Kolarov)

■스웨덴 및 노르웨이 대표단: Z. 호글룬드(Z. Hoglund), 투레 네르만(Ture Nerman)

■네덜란드 대표단: H. 롤랜드 홀스트(H. Roland Holst)

■스위스 대표단: 로버트 그림(Robert Grimm)

 

1915년 9월

 

 

1915년 9월 스위스에서 침머발트(전쟁 반대) 회의가 열렸다. 비록 42명의 대표만이 참석했지만(트로츠키에 따르면 4명의 지도자가 모두 참석했다고 한다), 이 회의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인, 제3 인터내셔널의 토대를 마련했다.

 

 

좌파의 선언

 

서명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번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문은 우리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선언문에는 공개적인 기회주의나 급진적 문구 속에 숨어 있는 기회주의, 즉 인터내셔널 붕괴의 주요 원인뿐만 아니라 그 붕괴를 지속하려는 기회주의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선언문에는 전쟁에 맞서 싸우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사회주의 언론과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제국주의 시대가 프롤레타리아트에 직면하게 한 과제에 관해 분명한 맑스주의적 입장을 계속 옹호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선언문을 투쟁에 관한 요구로 생각하기 때문에 찬성한다. 그리고 투쟁에서 우리는 인터내셔널의 다른 부문과 함께 나란히 행진하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이번 선언문을 공식 절차에 포함할 것을 요청한다.

 

■서명: N. 레닌(N. Lenin), G. 지노비예프(G. Zinoviev), 라덱(,Radek) 네르만(Nerman) 호글룬드(Hoglund), 윈터(Winter)

 

 

 

<관련 글> 침머발트 좌파에서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창설까지

 

https://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39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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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1)

헤르만 호르터 (Herman Gorter)

 

 

나는 이 편지를 러시아의 바르샤바로의 승리의 진격 동안에 썼다는 것을 레닌 동지와 여러분, 그리고 독자에게 밝힌다. 또한, 나는 여러분과 독자들에게 많은 반복에 대하여 사과하고 싶다. 대부분 국가에서 ‘좌파’의 전술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반복은 피할 수 없다.

 

 

목 차

 

1. 소개

2. 노동조합의 문제

3. 의회주의

4. 제3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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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소개

 

사랑하는 레닌 동지!

 

나는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급진주의에 대한 동지의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동지의 다른 많은 저작에서처럼 소책자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나는 확실히 많은 다른 동지들처럼,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역시 확실하게 서식하던 이러한 「유아적 무질서」의 많은 흔적과 많은 싹이 고쳐졌고, 확실하게 더 고쳐질 것입니다. 그리고 동지가 혁명으로 인하여 많은 머릿속에 야기된 혼동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완전히 옳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혁명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매우 다르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동지의 문서는 나에게, 즉 과거보다 더 많이, 전술의 모든 문제에서 그리고 혁명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출현하는 것 같은 현실, 실제적인 계급관계에 의존한다는 나의 판단에 새로운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내가 동지의 소책자를 읽었을 때,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동지가 비판한 ‘좌익’을 더는 지지하지 않아야 하는지, 그리고 「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KAPD)이나 영국의 야당을 위하여 더는 기사를 쓰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했을 때, 이를 거절해야 했습니다.

 

잘못된 근거

 

이러한 내 입장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레닌 동지, 모순은 소책자의 출발점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지가 믿는 것처럼, 러시아와 서유럽 혁명의 일치성에 대하여, 서유럽 혁명의 조건들, 말하자면 계급관계에 대하여 올바르지 않게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동지는 좌파, 반대파가 성장하는 토대를 잘못 평가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지의 출발점을 수용한다면 소책자는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출발점을 거부하면, 모든 소책자는 오류입니다. 모든 동지의 옳지 않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고, 부분적으로 확실히 완전히 오류인, 판단은 특히 독일과 영국의 좌파운동에 대한 비난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위의 좌파운동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알고 있듯이, 모든 점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확실하게 방어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나는 동지의 저술에 대해 좌파 방어를 위해 대답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좌파에 대한 방어는 좌파가 생성된 토대를 보여주고, 여기 서유럽에서, 그리고 현 단계에서 그들의 정당함과 우수성을 증명할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특히 러시아에서 서유럽의 혁명에 대하여 지배적인 왜곡된 생각을 극복하는 기회를 줄 것입니다. 서유럽에서의 전술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의 전술도 서유럽 혁명에 의존하고 있어서 위에서 말한 양자 모두 중요합니다. 이러한 내 생각을 모스크바 회의에 참여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그곳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가지 주장에 대한 반박

 

우선 동지들과 독자의 판단을 기만할 수도 있는 동지의 두 가지 소견을 반박하고자 합니다. 동지는 독일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대해 '지도자 독재', '대중 독재', '위로부터 또는 아래로부터' 등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소리를 하며 비웃고 조롱합니다. 위의 서술에 대하여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동지의 조롱에 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서유럽에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많습니다. 서유럽에는 여전히 많은 나라에 제2 인터내셔널 유형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전히 올바른 지도자, 대중을 지배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 지도자를 찾고 있으며, 이러한 지도자를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이 아래로부터, 즉 대중 자신의 독재를 통해 집행되기를 원합니다. 만약 나에게 등산 안내자가 있는데, 나를 절벽으로 안내한다면, 오히려 등산 안내자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올바른 지도자를 찾게 되면 우리는 지도자를 더는 찾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대중 위에서 지배하지 않고, 대중을 배반하지 않는 지도자는 대중과 진정으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독일과 영국의 좌파는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계급과 대중을 아우르는 하나로 통합된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두 번째 설명도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우리는 동지의 이러한 의견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과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지도자를 찾고 육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중, 정당, 노동조합이 내부적으로 가장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습니다. 강철 같은 규율과 강력한 중앙 집중화도 마찬가지로 유효합니다. 하지만 올바른 지도자가 있을 때까지는 우리는 그들이 옳다고 믿습니다. 코뮤니즘 실현에 가장 근접한 두 나라 독일과 영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이러한 투쟁은 동지의 비웃음으로 인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동지는 우리를 조롱함으로써 제3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적 요소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동맹」과 영국사회주의당, 그리고 다른 많은 나라의 코뮤니스트당 내 요소들이 대중과 지도자에 대한 모든 질문이 터무니없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무의미하고 유치하다’라고 강요하는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구를 통해 그들은 지도자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을 피하고 또 피하고 싶어 합니다. 강철같은 규율과 중앙집중이라는 문구를 통해 그들은 반대파를 짓밟습니다. 그리고 동지는 이러한 기회주의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동지는 이러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동지. 서유럽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 단계에서는 지배자보다 투사를 격려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기서는 이 문제를 아주 간략하게만 다루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 문제를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동지의 소책자에 동의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시아와 서유럽의 다른 점

 

거의 모든 글이 우리가 감탄과 찬사를 하게 한 동지의 팸플릿, 소책자 그리고 서적을 읽으면서 우리 서유럽의 맑스주의자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더 자세한 설명을 찾으려고 애썼으며, 이런 설명을 찾지 못하면 마지못해, 그러나 의구심을 갖고 그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에 대한 동지의 설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주, 아주 흔하게 발생합니다. 그리고 동지는 항상 이 두 범주를 전 세계의 혁명적 요소로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읽은 그 어디에서도 러시아(및 동유럽의 다른 몇몇 국가)와 서유럽(즉,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국가, 심지어 이탈리아까지)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차이에 대한 명확하고 솔직한 인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주의와 의회주의 전술에 대한 동지의 개념과 서유럽의 이른바 좌파 전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주로 이 부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동지도 나만큼이나 이러한 차이를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내가 동지의 글을 읽고 판단하건대 서유럽 전술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서유럽 전술에 대한 귀하의 판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서유럽 여기저기에서 이러한 동지의 문구가 모든 코뮤니스트당, 맑스주의자들조차도 아무 생각 없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기에 더욱 위험합니다. 모든 코뮤니스트 신문, 잡지 및 소책자와 모든 대중 집회를 통해 판단하게 되면 서유럽의 가난한 농민들의 봉기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습니다! 러시아와 서유럽의 커다란 차이점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판단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빈농의 많은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승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유럽의 우리도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서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지는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며, 전체 전술은 이러한 표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빈농이 결정적인 요소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사실이 아닙니다. 러시아와 서유럽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혁명적 요소로서 빈농의 중요성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작아지게 됩니다. 아시아, 중국, 인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혁명이 일어나면 이 계급이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고, 러시아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실제로 주요 요소 중 하나가 될 것이며, 폴란드와 남동부 및 중부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여전히 혁명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이 계급의 태도는 혁명에 대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러시아에는 약 700만에서 800만 명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빈농의 수는 약 2,500만 명에 달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수치 오류를 용서 바랍니다. 이 편지는 모든 속도로 발송되어야 하므로 기억에서 인용해야 합니다) 케렌스키가 빈농에게 토지를 주는 데 실패했을 때,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머지않아, 동지를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유럽에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언급한 서유럽 국가에서는 그런 종류의 조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유럽의 빈농은 러시아와는 전혀 다른 조건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종종 끔찍하지만, 러시아만큼 비참하지는 않습니다. 빈농은 농부나 소유자로서 얼마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교통수단 덕분에 종종 상품을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 자신을 부양할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이들의 생활은 다소 향상되었습니다. 이제, 전쟁 중에는 물론 전쟁 이후에도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식료품 수입은 매우 제한적인 필수품입니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지원을 받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한, 자본주의는 이들을 유지할 것입니다. 동지의 나라에서 빈농의 상황은 매우 비참합니다. 그러므로 동지와 함께 빈농은 정치적, 혁명적 강령을 갖고 있었고, 사회 혁명가들과 함께 정치적, 혁명적 정당을 조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빈농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다가, 러시아에는 분할해야 할 엄청난 양의 토지, 대규모 영지, 왕실 토지, 국유지, 수도원이 소유한 영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유럽의 코뮤니스트는 빈농에게 무엇을 제공하여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농민에게 제공할 것이 없다

 

독일은 전쟁 전 400만에서 500만 명의 빈농(최대 2헥타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대규모 산업(100헥타르 이상)에 고용된 인원은 800~900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만약 코뮤니스트가 이 모든 것을 분배한다면 빈농은 여전히 빈농으로 남게 될 것이고 700만 또는 800만 명의 현장 노동자 역시 자신의 몫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규모 산업2)으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분배할 수도 없습니다.

 

이 수치는 서유럽에는 빈농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보조 세력이 있다고 해도 그 수는 매우 적을 것입니다.

 

따라서 독일의 코뮤니스트는, 몇몇 상대적인 작은 토지를 제외하면, 빈농을 유인하기 위한 수단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소농민의 토지는 확실하게 소유권을 몰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400~500만 명의 빈농도 매우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두 스칸디나비아 국가3)도 유사합니다. 서유럽 대부분 지역은 중소농민이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조차 확실하지 않습니다. 10~20만 명 정도의 빈농이 있는 영국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빈농이 코뮤니즘 아래에서 소작료나 저당 이자를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는 약속 역시 그들을 견인할 수 없습니다. 빈농은 코뮤니즘에서 내전, 시장의 소멸과 황폐화를 보고 있습니다. 서유럽에서의 빈농은, 지금 독일의 위기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위기, 즉 지금까지 존재하였던 모든 끔찍함을 넘어서는 위기가 오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 자본주의 편에 설 것입니다.4)

 

산업노동자는 홀로 서 있다

 

서유럽 노동자는 모두 홀로 서 있습니다. 중하위 계급의 극히 일부만이 그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와 비교할 때 큰 차이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레닌 동지는 러시아도 역시 같은 경우라고 말할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도 역시 프롤레타리아가 스스로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혁명 후에야 비로소 빈농이 결합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레닌 동지는 농민이 확실하게 그리고 빠르게 동지 편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지는 케렌스키가 농민에게 토지를 제공할 의사도 제공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지는 농민이 케렌스키를 더 오랫동안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지는 바로 몇 달 후에 농민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 수 있는 ‘토지를 농민에게’라는 마법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서유럽 전역의 빈농이 당분간 자본주의의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독일에서는 지원받을 수 있는 빈농이 많지 않지만, 동지는 아직 부르주아지 편에 서 있는 수백 만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독일에서 러시아 빈농의 위치를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하게 될 것이고, 지원하러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도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엄청난 차이가 남아 있습니다.

 

러시아 농민은 자본주의가 패배한 후에 프롤레타리아트에 합류했지만, 아직 자본주의 편에 서 있는 독일 노동자들이 코뮤니스트 대열에 합류하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러시아의 혁명은 오랜 세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에 참담했으며 승리 후에도 지금도 참담합니다. 그러나 실제 혁명 당시에는 쉬웠고 이것은 농민들 덕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혁명의 발전 과정에서 혁명은 쉬웠고, 이후에도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혁명의 도래는 끔찍할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어떤 혁명보다 더 끔찍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지의 나라에서는 봉건주의, 중세, 심지어 야만과 마찬가지로 약하고 겨우 뿌리를 내린 자본주의였지만, 여기 서구에서는 강하고 널리 조직되어 뿌리를 깊이 내렸고, 얕고 경제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계층을 제외하고는 항상 가장 강한 편에 서는 농민뿐만 아니라 중하층 역시 마지막까지 자본주의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의 혁명은 빈농의 도움 덕분에 승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기, 서유럽, 그리고 세계의 곳곳에서는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 노동자가 홀로 서 있다는 것도 러시아에서는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는 홀로 서 있다

 

바로 이것이 완전히 진실이며, 우리의 전술은 이러한 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진실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전술은 오류이며 프롤레타리아트를 끔찍한 패배로 이끌 것입니다.

 

서유럽의 빈농은 아무런 강령도 없고 땅을 차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코뮤니즘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사실임이 현실로 증명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문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서유럽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대규모 토지 소유가 지배적이며, 따라서 농민이 코뮤니즘을 지지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빈농이 코뮤니즘을 얻을 수 있는 지역적 여건이 조성된 다른 지역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혁명의 시기에 우리 편에 서는 빈농이 없을 것이라고 암시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빈농에게 지속적인 선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술은 혁명의 시작과 진행 과정에서 채택되어야 합니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 추세, 즉 일반적 경향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술은 바로 이것을 기반으로 해야 합니다.5)

 

이로부터 우선 서유럽에서 진정한 혁명, 즉 자본주의의 전복과 코뮤니즘 수립 및 영구적 제도는 당분간 프롤레타리아트 스스로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항하여 충분히 강한 나라, 즉 빈농의 도움이 불가능한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밝혀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 선전, 조직화, 투쟁을 통해서만 혁명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독일, 영국 등 큰 나라에서는 혁명을 통해 경제 상황이 크게 흔들리고 부르주아지가 충분히 약해졌을 때만 혁명 자체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사건(러시아 군대의 도움, 인도의 봉기, 끔찍한 위기 등)에 우리 전술을 기반으로 할 수 없다는 데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동지, 빈농의 중요성에 관한 이러한 진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귀하의 첫 번째 큰 실수이며, 모스크바 집행부와 인터내셔널 집행부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전술과 관련하여서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서 있다는 사실, 즉 다른 계급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선 대중에 대한 요구가 러시아보다 이곳에서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혁명에서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지도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더 작다는 것입니다.

 

러시아 대중, 프롤레타리아는 전쟁 중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눈앞에서 농민이 곧 자기편이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먼저 독일 전체 자본주의 및 모든 계급이 반대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전쟁 전에 이미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실제 노동자 수는 7,000만 인구 중 1,900만~ 2,000만 명에 달했지만, 그들은 다른 모든 계급에 맞서 홀로 서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6) 그들은 러시아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본주의에 맞서고 있으며, 그들은 비무장 상태입니다. 러시아는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독일 프롤레타리아, 모든 개인에게 혁명은 러시아에서 필요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희생정신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독일의 경제적 계급관계의 결과이지 혁명적 낭만주의자나 지식인의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전체 계급 또는 적어도 대다수가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항하여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혁명에 투신하지 않으면 혁명은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술을 결정할 때 외부의 힘, 보기를 들어 러시아의 도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에 당신은 다시 한번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거의 무장하지 않은 채 홀로, 도움 없이, 밀접하게 결합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독일의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의식적인 투사, 영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모든 서유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대다수가 의식 있고 확고한 투사로, 진정한 코뮤니스트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러시아보다 이곳에서 절대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상대적 의미에서도 훨씬 더 위대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는 어떤 지식인이나 시인의 꿈이나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현실의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계급의 의미가 커질수록, 상대적으로, 지도자의 의미는 작아집니다. 이는 최고의 지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최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중에 비해 지도자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인구 1억 6천만 명의 나라에서 700~800만 명의 도움으로 승리해야 했던 동지의 경우에 지도자의 중요성은 실로 엄청나게 컸을 겁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이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술의 문제입니다. 동지, 동지가 했던 것처럼, 그토록 방대한 땅에서 적은 병력으로, 그러나 외부의 도움을 받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선 지도자의 전술이 필수적입니다. 동지가 소수의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투쟁을 시작했을 때, 결정적인 순간에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빈농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동지의 전술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어떤가요? 아무리 영리한 전술을 구사하고 명석하고 천재적 지도자라 할지라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독일에서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항하는 냉혹한 계급 적대감이 존재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힘과 수적 우위를 통해 스스로 판도를 뒤집어야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힘, 수, 규모를 통하여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적이 매우 폭력적이고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훨씬 더 잘 조직되었기 때문에,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은 특별히 자신들의 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동지는 다윗이 골리앗을 반대했던 것처럼 러시아 소유 계급에 반대했습니다. 다윗은 작았지만, 아주 확실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일, 영국,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는 한 거인이 다른 거인을 상대하듯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힘이 문제입니다. 육체의 힘, 그리고 특별히 정신력의 문제입니다.

 

레닌 동지, 독일에는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아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이 혁명이 애초에 지도자가 아니라 대중의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하고 웅장한 일이며, 코뮤니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독일 상황은 서유럽 어느 곳에도 프롤레타리아트는 홀로 서 있으므로 전체 서유럽과 비슷합니다.

 

대중 및 노동자 혁명, 세계 최초로 노동자 대중만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동대중만의 혁명은 그것이 좋거나 아름답거나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및 계급관계가 그렇게 되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7)

 

 

요컨대, 문제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읽기 위해 서유럽과 러시아혁명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비교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영국령 인도와 같은 아시아 국가에서 전체 인구의 0.5%만이 산업 프롤레타리아이며 80%가 소농이라고 가정할 때, 지역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으로 연합한 정치적, 사회적으로 더 잘 훈련된 프롤레타리아의 주도 아래 혁명이 일어나야 하고 성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합니다. 중국이나 인도 노동자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역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을 통해 승리했으니 이제 동지들도 혁명을 위해 똑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러시아 노동자들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여러분의 나라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가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인구의 절반은 아니지만 3%가 산업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여러분의 자본주의보다 더 강력해서 우리는 동지들보다 더 강력하고 더 나은 조직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러시아와 서유럽의 차이로부터 이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1. 만약 동지와 모스크바 집행부 또는 당신을 추종하는 서유럽, 스파르타쿠스동맹의 기회주의적 코뮤니스트 또는 영국 코뮤니스트당이 지도자냐 대중이냐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지도자를 찾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동지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오류입니다.

 

 

2. 동지가 우리에게 말할 때 "지도자 와 대중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이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일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이 우리와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잘못된 말입니다.

 

3. 코뮤니스트당에 강철같이 강한 규율과 절대적으로 군사화된 중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강철 같은 규율과 강력한 중앙집중을 추구하고 있어서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문제가 동지와 우리에게는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잘못된 말입니다.

 

4. 동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보기를 들면, 코르닐로프 공격이나 다른 사건 이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했다거나, 이러저러한 시기에 의회에 진출했다거나, 노동조합에 남았다거나, 그러므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도 똑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필요도 없고, 적용될 수도 없습니다. 투쟁과 혁명에서 서유럽 계급관계는 러시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5. 러시아에서 훌륭했던 전술, 보기를 들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기서 빈농이 곧 프롤레타리아트에 합류할 것이라는 확신,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홀로 서 있지 않다는 확신에 기초한 전술을 우리에게 강요하려 할 때, 동지가 규정하고 그것에 따르는 전술은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를 파멸과 아주 끔찍한 패배로 이끌게 될 것입니다.

 

6. 동지와 모스크바 집행부, 또는 스파르타쿠스동맹 중앙위원회나 BSP와 같은 서유럽 기회주의 세력이 우리에게 기회주의 전술(기회주의는 항상 프롤레타리아트를 배반하는 외부 요소의 지원을 구한다)을 따르도록 강요하려 한다면, 동지의 잘못입니다.

 

서유럽에서 전술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기반은 다음과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홀로 서 있고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인식, 대중의 중요성이 더 크고 지도자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작다는 인식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독일에 있을 때 라덱(Radek), 모스크바 집행부도, 동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동지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 위에 독일 코뮤니스트당,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8)의 코뮤니스트당, 모스크바가 임명한 암스테르담 위원회의 대다수 전술이 수립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초 위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대중 전체와 개인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혁명적 투사가 될 수 있도록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교육하고, (이론만이 아니라 특히 실천을 통해)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렸으며, 외국의 도움이나 지도자에게 거의 기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도록 노력합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프하임(Wolffheim)과 라우펜베르크(Laufenberg)와 같이 운동의 첫 단계에서 불가피한 사적인 발언, 사소한 문제 및 변명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정당과 동지들이 취한 견해는 매우 올바르며 동지의 반대는 전적으로 오류입니다.9)

 

만약 동유럽에서부터 서부로 이동하면,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 경제적인 경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경제적 경계는 발트해 연안에서 지중해까지, 단치히(Danzig)에서 베니스(Venice)까지 이어집니다. 이 선은 두 세계를 서로 분리합니다. 이 선의 서쪽은 산업, 상업 및 금융자본이 거의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최고로 발달한 은행자본으로 결합하여 있습니다.

 

농업 자본조차도 이러한 자본의 지배를 받거나 결합하도록 강요받습니다. 이 자본은 매우 잘 조직화하여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국가 정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경제적 경계선의 동쪽은 집적화된 산업- 상업- 운송 그리고 은행자본의 엄청난 발전도 이들의 패권도, 이것의 결과인 견고한 근대국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쪽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이 동쪽의 전술과 같다면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주>

 

1) 보기를 들어, 『국가와 혁명』에서 동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67쪽) "농민이 존재하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대다수 농민은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있으며, 따라서 '값싼' 정부 전복을 갈망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것을 실행에 옮길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문제는 농민이 코뮤니즘을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모스크바 농업 테제도 이를 인정한다.

3) 나는 스웨덴과 스페인에 대한 통계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다.

4) 나는 「세계혁명」이라는 소책자에서 러시아와 서유럽의 이러한 차이점을 강조했다. 독일혁명의 전개는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매우 낙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빈농이 프롤레타리아트 편에 설 가능성이 있다.

5) 동지는 소인배들처럼 상대의 주장을 너무 단정적으로 받아들여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한 나의 발언은 후자를 위한 것입니다.

6) 물론 전쟁 전 수치를 사용해야 했고, 마지막 인구 조사(1,909년) 이후 프롤레타리아의 증가를 그 이전 수치에 비례하도록 했다.

7) 나는 이 다른 숫자 관계(독일은 2천 만에서 7천 만!)를 통해 대중과 지도자의 중요성, 대중과 당, 지도자 사이의 관계, 그리고 혁명의 과정과 마무리 단계에서도 러시아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8) 적어도 지금까지는.

9) 이 논쟁에서 대부분 반대파의 공적인 목소리가 아닌 사적인 목소리를 이용한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출처>

https://www.marxists.org/archive/gorter/1920/open-lett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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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9호]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선거를 넘어 코뮤니스트 정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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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0일은 부르주아 총선일이었다. 이날 한국에서 처음으로 부르주아 선거를 거부하는 이들이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를 열었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심 있는 다양한 부문과 연령대의 동지들이 참여하여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서는 진정한 노동계급 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류가 심각하게 경험한 감염병 대유행, 기후위기, 생태파괴, 일반화된 세계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은 자본주의의 막다른 골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계 부르주아지의 온갖 처방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더욱 심화하였고, 그 부담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대유행에 이어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은 자본주의 모순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장기간 지속해 온 위기 속에서 격렬해지는 제국주의 대립과 이윤추구 경쟁은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길을 열었고,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쟁과 빈곤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러한 전쟁으로의 질주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작동 결과이며. 이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 없이는 그 어떤 전망도 열어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세계 노동계급은 다시 한번 ‘코뮤니스트혁명이냐, 제국주의 전쟁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위기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에 짓눌리고 제국주의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이에 맞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산과 분배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지배는 전체 사회정치적 관계에 대한 총체적 지배를 더욱 넓혀가고 있습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뿐 아니라 그들과 자본주의 국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기구를 통해서도 노동계급 내부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상태입니다. 그들은 자본의 좌파로서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지만, 부르주아지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는 데 실제로 도움을 주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 선거 서커스에 ‘노동자’ 이름을 팔아 참여해 선거 환상을 퍼트려 왔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냐 혁명이냐’라는 시대에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그 어떤 혁명적 의도와 관계없이 단지 죽어가는 자본주의 껍데기인 의회에 한 줄기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코뮤니스트혁명의 직접적 목표를 내걸어야 하는 지금 노동계급의 유일한 과제는 바로 낡은 사회질서인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코뮤니스트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분들과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코뮤니스트 정치'를 소개하고, 자본주의 쇠퇴와 전쟁의 시대! 코뮤니스트 혁명의 전망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 제안)

 

코뮤니스트 정치 강좌는 위와 같은 취지로 개최했고, 이날은 특별히 선거 당일이었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강좌를 시작했다.

 

“노동자 출신 국회의원-노동자 정당 집권인가, 노동계급이 직접 통제하는 노동자평의회-자기 권력인가.

 

노동자 투쟁을 약화하고 부르주아 정치에 의탁하는 진보좌파 정치인가, 자본주의에 맞선 계급투쟁과 부르주아 정치를 타파하는 코뮤니스트 정치인가,

 

체제 안에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개혁하는 체제 전환인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착취 없는 사회를 건설하는 코뮤니스트혁명인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모순과 역사적 쇠퇴’에서부터 계급투쟁의 최종목표인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혁명’을 이해해야 한다. 첫 강좌에서는 근본적 질문으로 “코뮤니즘 :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가능한가”와 구체적 실천으로 “코뮤니즘을 향한 투쟁,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해 연속으로 강좌를 진행했다. 강좌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코뮤니즘: 자유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가능한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왜 그런가?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연설할 때마다 자유, 평화, 번영을 외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미래는 거꾸로 착취, 전쟁, 쇠퇴와 종말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의 사상,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먼저 자기 입장과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고 말을 시작해야 한다. 알기 쉬운 정치이념으로 보수주의, 자유주의, 발본주의(맑스주의)로 구분한다면 나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 구도를 거부하는 발본주의자다. 이 설명은 인류 역사를 설명하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자유를 외치는 윤석열은 어떤 자유인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 따져야 한다.

 

제목을 뒤집어 보면 ‘평등해야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계급사회의 역사였기 때문에 계급 사이의 불평등과 투쟁은 필연적이었다. ‘인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한 맑스의 사상이론과 혁명적 실천을 아는 길이 배움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세철)

 

“여전히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反)혁명적 세력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 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계급 자기해방의 과제, 계급투쟁(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지난한 계급투쟁 속에서 주체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과정 일 수밖에 없다.

 

투쟁하는 노동자와 자본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하려면 코뮤니즘과 코뮤니스트혁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코뮤니즘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노동계급 자기 권력에 관해 이해해야 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구분하고, 혁명을 주도할 계급조직인 혁명당과 노동자평의회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면 운동의 최종목표를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반(反)코뮤니즘에 맞서 사상투쟁을 하면서 계급의식과 투쟁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코뮤니스트 정치는 위와 같이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밝히고, 노동자 운동의 당면문제를 해결하면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과 코뮤니즘으로 향하는 투쟁의 정치이다.” (이형로)

 

많이 늦었지만, 세계혁명, 국제주의, 코뮤니즘, 맑스주의에 관한 근본적인 이야기를 나눌 강좌와 토론이 시작되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자본의 좌파에 맞선 사상투쟁,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혁명적 실천이 절실한 시기에 [코뮤니스트 강좌]가 계급투쟁의 새로운 주체들에 기준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다음 강좌는 5월 15일에 “자본주의 위기와 대안 사회”라는 주제로 열린다.

 

 

 

▶강좌 신청 및 문의 : https://forms.gle/Yk1fp4297LCd1z7U8 +  communistleft@gmail.com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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