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라...
큰 선거만 끝났다 하면 어김없이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는 등의 말이 떠돈다. 이번에도 또 예외가 없네...
예전에 강의할 때 가끔 이 격언? 명언?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나올 때, 제일 먼저 하는 말은 이거였다.
여러분들, 혹시 이런 말을 듣게 되면 그 말을 누가 하는지 먼저 보세요.
물론 국민이 똘똘하면 수준 높은 정부를 가질 수 있겠지. 논리적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인다. 그런데 기왕에 대의제 시스템에서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정부라는 건 도대체 어떤 수준이어야 할까? 그 수준의 객관적 지표는 무엇인가?
순실이가 섭정을 하든 간에 광화문 태극기들에게 박근혜 정권은 꽤나 수준 있는 정권일 것이고, 조국이 조로남불을 하더라도 마음의 빚만 서글픈 문재인 정권이 서초동 조국기들에겐 수준 높은 정권일 거다. 수준 높은 정부를 '국민'의 수준이 맞춰준다는 거, 이거 진위를 확인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반면, 보통 국민은 제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당금 선거에서 주로 진쪽이 이런 말을 한다.
먼저 당사자 또는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 대부분은 자신의 패배를 남의 탓-여기선 국민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이 못나서 패배한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이 말을 갖다 쓴다.
그 지지자들, 또는 주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 스스로를 깨시민/애국시민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상대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이다.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도 하고. "니들 수준이 그렇지..."
앞뒤가 매우 잘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말은 그래서 그 논리적 정합성보다도 그 말을 누가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진영논리를 대의명분으로 포장해서 전면에 내세운 채 뒤로는 대중들의 정치적 냉소만 부추기다가 선거 끝나고 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다시 대중들의 책임으로 떠 넘기기 위해 동원되는 이런 언사는 그래서 매우 조심해서 들여다 봐야 한다.
수준 높은 정부를 가지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당연하다. 거기 더해 더 높은 수준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대중이 가지고 있으면 더 좋겠지. 그런데 대중에게 이걸 요구하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
수준 높은 대중을 원한다면, 정치를 하고자 하는 자들이 대중의 정치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부터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노력은 등한히 하다가 지들에게 불리한 결과만 나오면 뜬금 없이 주절거리는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은 국민에게 "니 수준이 그거 밖에 안 돼서 이런 뭣같은 정부가 들어선 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들한테 표주면 수준 높은 국민, 표 안 주면 수준 낮은 국민...
그냥 국민을 개돼지로 본다는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