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의 수화한화]IAEA와 도덕적 감수성

/경향신문, 2012. 6. 14.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소속 전문가들에 의한 고리원전 1호기 안전점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발전소의 ‘안전문화’에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설비상태는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쿠시마 이후 안전성 강화 대책이 착실히 이행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런 발표에 반발할 지역주민이나 탈핵활동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한국 원전당국의 ‘들러리’가 아니라 ‘독립적인 전문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환영해야 할 뉴스이다. 고리원전 상태에 대한 심각한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한국의 원전당국은 평판이 매우 나쁜 고리원전 문제를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척결하려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기관도 아니고, IAEA 점검단을 초빙해서 조사를 맡겼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처리할 의사가 없었음을 스스로 폭로했다고 할 수 있다.

원전당국의 설명에 의하면, IAEA는 “국제연합 산하의 중립적 비영리 독립기구로서 모든 나라가 공인하는 원자력 안전 관련 최고, 최후의 기관”이다.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의 이 말은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원자력 문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수준 낮은 농담에 불과하다. 보통 IAEA는 핵확산 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국제기구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원자력 일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기관으로 오인할 수 있다.

하기는 핵무기를 반대하면, 핵무기와 쌍둥이인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의 핵심적인 비극의 하나는 핵 주도세력이 핵을 군사용과 민수용으로 구분한 다음에, 한편으로는 핵무기 확산을 막는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원자력 시설을 세계 전역으로 확대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위선과 거짓 언어로 치장하여 되풀이해왔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 위선과 거짓을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조직이 IAEA라고 할 수 있다. 1957년에 미국 정부의 주도로 국제연합 산하 기구로 창설된 IAEA는 그 헌장에서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평화와 건강과 번영을 위해서 원자력의 공헌을 가속화·확대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천명했다. 이 창설 목적을 보더라도, IAEA는 자신이 군부와 원자력 산업계를 위한 명백한 ‘로비단체’, 그것도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유엔 산하 조직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로비단체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IAEA가 원자력이나 방사능에 관련된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서 늘 눈을 돌리고, 무관심한 자세를 취해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IAEA가 방사능 문제에 대해 취해온 행동의 역사는 완전히 범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에 세계보건기구(WHO)와 맺은 협정이다. 이 협정은 상대편 기관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호합의에 따라” 계획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원자력에 관한 WHO의 권한, 즉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조사하거나 경고해야 할 WHO의 고유한 역할을 저지하기 위한 ‘협정’이었다. 원래 1956년까지 WHO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의 증대에 의해서 미래 세대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의 협정 이후 WHO는 방사능의 영향 문제에 관해서 사실상 침묵을 지키거나 극히 소극적인 관심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이 비겁한 행동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방사능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국제적 권위기관이라고 하는 WHO가 IAEA와 다름없는 원자력 홍보기구로 전락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평가이다. 2005년 WHO와 IAEA 합동회의에서 발표된 체르노빌 피해상황에 대한 최종 결론에 의하면 사망자 56명, 갑상샘암 사망 아동 9명, 그리고 사망에 이어질 암에 걸린 사람 4000명뿐이었다. 적잖은 독립적 과학자와 의료인들이 지적해왔듯이, 이것은 많은 독립적 자료와 조사를 철저히 외면하고, 계속해서 고농도 방사능 지역에 거주하면서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 오염 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900만명 이상의 인간을 완전히 무시한 결론이었다(르몽드디플로마틱 2009년 5월).

생각해보면,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체르노빌로 인한 재앙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잠복기간이 있고, 오염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인한 방사능 섭취에 따라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발생할 유전자 손상을 고려하면 IAEA와 WHO의 합동 결론은 과학이라기보다 저열한 수준의 은폐 공작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방사능의 위험을 이처럼 비상식적으로 은폐하고, 과소평가하는 행위가 버젓이 과학과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공식적인 자료나 문헌에 의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장 피에르 뒤퓌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인 2006년에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해본 결과, 그동안 접했던 자료와 현지 사정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돌아와서 그는 <체르노빌로부터의 귀환-분노한 한 남자의 수기>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관련 과학자와 기술관료들이 원자력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찍이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막스 베버가 지적한 문제, 즉 현대적 학문의 운명인 과잉 전문화로 인한 과학의 왜소화, 그리고 시야가 협소해진 과학자의 ‘근본적인 무교양’에 연유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결여를 무엇보다 주목하고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장 피에르 뒤퓌는 현재 ‘프랑스 방사선 방호 및 원자력안전연구소’라는 준(準)국가기관의 윤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원자력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지식인이 원자력 관련 중책을 맡게 하는 것. 이게 진정으로 원자력의 안전관리를 생각하는 사회의 상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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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9:48 2012/06/15 19:48

녹색당 의제 토론

 

맑스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가치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상품은 단지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판매를 위해 생산된 노동생산물이라는 겁니다. 특정한 재료(원료)에 일정한 노동력이 투여되어 하나의 형태를 가진 물건인 셈이지요. 상품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상품생산 체제가 야기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유해서 말하자면, 어떤 물건을 잠시 째려 본다거나 잠시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으로 그 물건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면 과학은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는 아무로 레이와 같은 뉴타입이 아닙니다. 과학은 그 대상에 따라 논리를 수단으로 삼거나 실험을 그 수단으로 삼아 대상을 분석하여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거지요.

맑스가 상품을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은 상품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분석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앞서 사용가치는 충분하게 설명했습니다만,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사용가치는 타인에게 유용한 사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사용가치가 실현된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내가 머릿 속에 모짜르트도 울게 만들 그런 엄청난 곡을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악보위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머릿 속에 아직 관념으로 존재하고 있는 황홀한 음악은 악보 위에 하나의 기호로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상품의 사용가치가 그 상품을 만든 개인의 구체적인 노동의 결과인 반면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맑스는 한 상품의 가치가 제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교환을 위해 다른 상품과 마주서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가치는 단지 그 상품을 만든 노동자가 남자건 여자건 백인이건 흑인이건 '일반적인 인간노동'의 지출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를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머릿 속에 이미지를 떠 올릴 수도 없습니다. 가치는 감적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노동 엑기스"인 거지요.

맑스는 가치가 "상품과 상품이 마주서는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감지될 수 있는 초감각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한가마의 쌀 = 10개의 호미

한가마의 쌀과 10개의 호미가 교환된다면 분명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준이 있을 겁니다. 두 상이한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을 교환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 상품의 가치입니다. 사용가치는 질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가치는 단지 양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가치는 크기로 나타나며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의 지수로 나타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상품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추상적 노동이며 오직 양적인 의미만을 가집니다. 이것은 가치가 서로 다른 노동형태의 서로 다른 특성을 모두 사상한 단순한 인간노동의 "엑기스"라는 측면에서, 개별 생산자들의 구체적인 노동의 특수한 내용이 지워진, 오직 대상화된 노동시간의 크기로만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자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이 사용가치로서의 상의나 아마포의 형성요소인 것은 바로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이 서로 다른 질(質)인 까닭이다. 재봉노동이나 직포노동이 상의의 가치나 아마포의 가치의 실체인 것은 오로지 재봉노동이나 직포노동의 특수한 질이 사상(捨象)되어 양자가 동등한 질, 곧 인간노동이라는 질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이다."

맑스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가치를 규정합니다. 가치는 상품 그 자체와 구별되며, 상품의 일반적인 교환능력이자 상품이 가지고 있는 교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을 나탄낸다는 점에서 인간노동을 양으로 환산한 단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은 추상적 노동의 양입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장소와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수행된다 하더라도 모든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시간을 통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품이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이중성 가진다는 것은 상품을 만드는 노동의 상이한 두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상품의 사용가치 = 구체적 노동 = 상품의 유용성 가치 = 추상적 노동 =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의 지수(指數)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물신주의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상품의 이중성에서, 그리고 상품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이중성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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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6:07 2012/06/13 16:07

녹색당 의제 토론

 

상품물신성에 대한 단적인 정의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을 전도(Verkehrung, reversion)라고 합니다. 맑스에 의하면 이러한 전도된 관계는 자본주의 상품생산 체제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상품생산 체제가 사라지면 이와 같은 전도된 관계도 사라지겠지요. 앞서 시몬느 베이유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바로 악의 근원인 셈이지요.

맑스는 [자본]의 서문에서 이 책을 쓴 궁극적 목표가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본]을 "상품" 분석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상품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세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이 어렵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건 좀 과도한 겸손의 표현이거나 저작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맑스의 이 책은 주어지는 논리 그대로만 읽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당원 동지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먼저 [자본]의 서술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상품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사회적)부의 기본형태"라는 거지요. 맑스는 상품의 분석에서 화폐 분석으로 나아가는데 결론을 미리 약간 언급하자면 상품이 곧 화폐라는 겁니다. 그래서 상품분석은 곧 화폐의 비밀을 파헤치는 전제가 되는 셈이지요. 화폐가 무슨 그런 비밀스러운 거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잠시 맑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인용하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시를 살펴보면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라네, 신들이여!
실없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이것은 사제를 제단으로부터 ...... 꾀어낸다네
다 나아가는 병자의 머리 밑에서 베개를 빼내가 버린다네
그렇다네, 이 황색의 노예는
....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와 권세를 부여한다네, 또 이 노예는
늙어 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던 그 과부가
메스꺼운 모습을 떨쳐버리고 오월의 청춘으로 되어서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에이. 빌어먹을 금속아,
너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인간 공동의 창녀로다

-세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중에서

이어 맑스는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神)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화폐가 이런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게 맑스가 상품 분석을 통해 밝혀 내려는 화폐의 비밀입니다. 모든 도둑이 최고의, 궁극의 한탕으로 열망하는 곳이 바로 은행 아닙니까? 수천장의 수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이죠.

3. 상품의 이중성

모든 상품이 인간의 필요와 욕구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욕구와 필요의 산물이라고 해 서 모두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의 유용성이 그 사물의 사용가치입니다. 분필의 사용가치는 칠판에 자신의 흔적을 부드럽게 남기는 거지요. 만약 분필이 삑삑 소리만 나고 칠판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런 분필을 누가 사겠습니까? 그러나 사용가치를 가지는 모든 물건이 상품은 아닙니다. 맑스는 하나의 사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해 있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상품이 되며 이 상품은 특수한 인간 욕망에 맞추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 활동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물건은 상품이 아니지요. 상품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생산한 물건입니다.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해 있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이란 말의 의미가 이겁니다. 노동생산물인 상품은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물건인 만큼 상호 교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맑스는 상품을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단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먼저 상품과 상품들 간의 교환관계에서 시작하는 거지요.

맑스에 의하면 "상품은 자연형태와 가치형태라는 이중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이 됩니다. 자연형태란 분필이나 의자와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가치형태란 그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면 한 상품의 사용가치는 서로 교환을 통해 상품이 되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겠지요. 본인은 정작 다른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유용한 물건'일 뿐 상품은 아닌 거지요. 말하자면 상품은 상호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상품은 이렇게 교환됨으로서 그 가치를 실현합니다.

그래서 맑스는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이라고 규정합니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분리불가능합니다. 사용가치가 없다면, 즉 상품이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한 상품이 어떻게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을까요? 단지 그저 누군가가, 서로가 상대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한다고 다 교환될 수 있을까요? 호미 한자루를 가지고 나온 사람이 쌀 한가마니를 지고 온 사람에게 서로 교환하자고 하면 그냥 교환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쌀 한가마니를 가진 사람이 호미가 필요하다해도 덥석 교환하지는 않을 겁니다. 각자의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용가치로서 상품의 형태와 용도가 다양한 것처럼 각각의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또한 상이 한 활동으로 나타납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노동인 동시에 개별적인 사적 노동입니다. 우리는 의자를 만드는 목수가 나무를 다듬고 못질 하는 것을 머릿 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목수의 이러한 구체적 노동이 사용가치를 형성합니다. 이와 반대로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은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인간노동입니다. 맑스는 추상적 노동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노동형태를 사상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수의 노동과 미싱공의 노동은 대상도 서로 다르고 결과물도 다릅니다. 하지만 목수나 미싱공이나 일정한 시간동안 "노동을 수행"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 때 두 사람이 수행한 노동은 맑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입니다.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이 바로 이 생리학적인 의미에서 인간 노동입니다. 두 사람은 그저 노동력을 지출했다는 점에서 노동을 수행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좀 우스운 이야깁니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엑기스"라는 말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 엑기스가 뭡니까? 홍삼 엑기스. 제가 있는 대학에서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엑기스가 뭔지 물었더니 어떤 학생이 "원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홍삼 엑기스는 홍삼 원액인 셈이지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엑기스는 영어 "extract" '익스트랙트'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추상적 노동은 각 개인의 구체적 노동에서 인간의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노동일반, 즉 "노동 엑기스"인 셈이지요. 헐헐.

그래서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참 중요한데 길군요. 또 추후에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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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6:03 2012/06/13 1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