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 좀 못마땅한 면이 있다. 무성의한 기사 구성과 그간 경향신문이 보여준 보도 방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사. 어제 토요일 신문의 경우 40대 싱글에 대한 기사는 최악이었다. 그래도 나는 경향신문을 매일 "읽는다". 그 중에서도 '여적'을 가장 사랑한다.
며칠 전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손학규 씨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고 출판기념회에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취지의 연설을 한 모양이다. 뭐 민주당을 믿었으면 벌써 수십 년 전에 믿었겠지만 믿을 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동안 한나라당에서 대선후보까지 했을까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여적]저녁이 있는 삶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대선 출마 키워드로 내놓은 ‘저녁이 있는 삶’이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나 보다. 반응을 보면 “그저 그런 이미지의 정치인이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애잔하다 못해 적어도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 구글링하게 만들었다” “백수에겐 감흥이 어떨지 몰라도 휴가도 못 가고 매일 야근하다 지친 어떤 사람들에겐 아련한 꿈처럼 유혹이 된다” 등이 있다. “진보정당을 ‘멘붕’시킨 저녁 있는 삶”처럼 특이한 것도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엄숙·도덕주의로 범벅이 되곤 했던 정치구호가 비로소 인간의 숨결을 찾은 듯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것이 우리가 몹시 일그러진 삶을 살고 있음의 방증이란 생각이 고개를 든다. ‘저녁이 있는 삶’이 단박에 와닿은 이유는 그만큼 고달프게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탓 아니던가. 내친김에 더 나가보자. 대한민국은 노동자에게 어떤 나라인가. 비정규직이 절반이고, 노동시간은 OECD 최대를 자랑한다. OECD 연평균이 1700시간인 데 한국은 500시간이나 많다. 가족과의 저녁시간이 여의치 않을 수밖에 없다.
기존의 우리네 ‘저녁이 없는 삶’은 성장·개발주의, 속도전에 길든 가치관의 소산이었다. 말하자면 ‘저녁이 있는 삶’은 이명박류의 가치체계와 철학에서는 죽었다 깨도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 점에서 획기적이긴 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키워드든 화두든 무엇으로 부르든 그것은 결국 공약이다. 그런데 공약을 내거는 것과 실천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점은 대선 유세 때부터 “경제를 살리겠다”고 목청을 높인 이명박 대통령이 본보기다. 경제도 못 살리면서 양극화만 심화시켰다.
‘저녁이 있는 삶’의 풍경은 분명 목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는 세계가 목가적이라고 해서 그 실현방식도 목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노동자들에게 저녁시간을 돌려준다는 것은 엄청난 성취라고 봐야 한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은 좋은 말로 타협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을 통해 전취될 대상이다. 복지 확대, 행복권 추구, 비정규직 해결 등 온갖 문제가 연결돼 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물 위를 유영하는 백조의 우아한 자태는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물갈퀴 덕분이다. 목가적 삶의 해법은 결코 목가적일 수 없다.(김철웅 논설실장)
아주 오래전 알라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블로그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그런데 얼마전 그 글을 찾았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글을 정리해야겠다. 아주 약간 수정을 했다.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가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뭐 이런건데, 한 번의 삶은 사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선물이 다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선물은 곤혹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선물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곤혹스러운 선물은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강요된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을 시점을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서 받을 지도 알 수 없으며, 선물을 주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잘 알다시피, 아직까지 인간 문명의 발달 정도를 고려해봤을 때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 이 선물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제는 서양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서양 철학은 이러한 모티브를 상이한 관점에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관념론의 요체가 유한한 존재를 참된 존재자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참된 존재자는,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나 신이다. 맑스는 이런 점에서 헤겔 철학이 보편자가 개별자를 통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자가 개별자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맑스에 의하면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보편자는 개별자의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맑스 비판의 요지는 헤겔이 실재의 과정을 사유의 과정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의 논리와 동일하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 신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의 전능함을 나타낼 뿐이다. 뭐 이런 정도. 말하자면 유한한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언제나 무한자를 저 편에 설정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종교는 시대를 초월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은 단지 무한성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아마도 유년시절 TV에서 본 시리즈 애니메이션인 <은하철도 999>를 성인이 되어 다시 보았을 때라고 기억한다. 물론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이 TV만화는 단지 재미있는 만화영화였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고 우연히 <은하철도 999>를 다시 보았을 때 불현듯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데츠로(철이)는 어머니를 죽인 기계 백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어머니의 몫까지 살기 위해 신비로운 여인 메텔과 은하철도 999를 타고 기계별로 향한다. 이 만화 영화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데츠로와 메텔은 기계별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기착지를 거치게 되고 이들은 기착지에서 특수한 상황과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과 마주친다. 데츠로는 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의 주요한 모티브는 대립과 화해다. 첫 째는 기계인간과 인간의 대립인데, 기계인간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살해하고 탐욕적인 존재로 제시된다. 두 번째는 기계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얻었지만 오히려 붉은 피를 가진 인간의 신체를 그리워 한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경우건 기계인간은 쓸쓸하게 죽는다. 기계 또한 인간처럼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영원성을 누리는 건 아닌 셈이다. 이렇게 기착지를 거쳐 갈 때마다 데츠로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작가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말대로 우리들이 이미 겪었으며 누구나 겪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이다.
여하튼 이 애니의 모티브는 삶과 죽음, 유한성과 무한성, 즉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이와 같은 모티브는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악당은 기계몸을 가진 기계인간이고 그들은 무자비하고 난폭하며, 잔인하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은 비도덕적이라는 의미와 다른데, 기계인간은 도덕성과 무관하다. 그들은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갈등에서 자유롭다. 한참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X-files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이 문제가 된다면 유한한 존재에게 윤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은하철도 999> 시리즈 이후에 나온 마쓰모토 레이지의 애니메이션 <메텔 레전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기계몸이 된다는 것은 인간 이상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
그 힘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기계몸은 무한한 힘과 영원한 생명
분명히 인간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 두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나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노동, 몸을 움직여 노동을 수행하는 신체노동이든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문서를 작성하는 사무직 노동이든 나는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하게 정해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직업으로서의 노동을 견디지 못한다. 학부 학생이었을 때 방학 동안 동생과 함께 소위 노가다를 하기도 했는데 동생은 일을 잘하는 편이었고 나는 일이 힘들고 괴롭기만 했다. 동생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하면 나는 겨우 3일 정도만 했다. 나는 노동을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았고 노동을 대단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금리 생활자가 아니라면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대학의 비정규교수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렵고 다양한 압박에 시달리기는 해도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얽매어 있지 않다는 그 사실 하나가 다른 모든 압박을 상쇄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방학이 되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하다. 농담처럼 한 말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no job, no money, no drink.
언젠가 사촌이 집에 와서 내 방과 거실 뒤켠 벽에 쌓아둔 책을 보고 놀라며 도대체 몇 권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많은 책을 설마 다 읽었겠나. 물론 다 읽었을리가 없다. 내가 사서 쌓아둔 책이라는 게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산다. 습관처럼. 그래도 이 책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허허 웃기까지 했다. 지식 노동자로서 내가 그렇다고 열심히 지식 노동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요즘은 자괴감이 든다.
내가 신체노동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저 공장에 들어갔다. 87년 공장의 환경은 열악하고 엉망이었다. 내 심정은 그로부터 몇 년후에 읽게 되었던 공장에 불을 질러 법정에 선 15살 어린 소년의 심정과 똑 같았다.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게 된 소년은 일이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하면 공장을 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은 공장에 불을 질렀다. 공장에 불이나면 일을 쉴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라는 책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나는 그 때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동자로서 살지는 않겠다. 신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말이다. 맑스의 말처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노동을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할 것이다. 맑스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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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신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노동이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의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신체적 혹은 기타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외적 노동, 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고행의 노동이다. 결국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적 성격은 노동이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가 노동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의 환상, 인간의 두뇌, 인간의 심장의 자기 활동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되어, 즉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낯선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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