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강의하면서 맑스의 [자본]에서 상품물신성을 3주 강의했다. 마지막 강의를 어떻게 정리하나 고민하다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글을 떠 올렸다. 아무래도 맑스의 화폐물신성에 대한 비판을 반동일성의 관점에서 긴 글을 작성할 계획을 했는데 그만 시간만 흘려 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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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는 1970년 <레닌과 철학> 서문에서 자신의 시대를 "맑스와 무조건 싸우든지 아니면 부르주아적 해석들(경제주의, 기술관료주의, 휴머니즘)로 맑스를 왜곡하면서 그를 학문적 영예로 들씌워버리는 이 시대"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도 그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철학과 대학원에서조차 맑스의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에서 맑스의 철학이 추방당한지 오래되었다. 20대 맑스를 읽고 맑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맑스를 언급하기를 꺼리고 맑스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비웃는다. 이제 맑스는 비웃음과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초에는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한다는 비판과 분노가 조직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맑스와 맑스주의는 죽은 개보다 더한 치욕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여전히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 한 문장으로, '맑스주의는 배제와 폭력이라는 동일성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피억압자들의 차이를 노동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 아닌 비난은 들뢰즈를 전공하는 분들의 논문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사실 나는 그 분들이 맑스의 저서를 읽기나 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물론 이 분들은 헤겔도 비판 아닌 비난을 한다. 그런데 그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어이없게도 헤겔의 글뿐 아니라 헤겔에 관한 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이 아주 많다. 끔찍한 현실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상품 물신성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있는 그대로 즉 그들의 노동에서 맺는 사람들끼리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das sachliche Verhältniss der Personen) 및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헤겔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은 맑스의 상품 물신성비판이 곧 헤겔의 관념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헤겔 비판은 헤겔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 1장 "상품"의 가치이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상품으로부터 화폐를 연역하는 과정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맑스의 경우 보편자인 가치와 개별자인 상품의 관계는 헤겔의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말하자면, 헤겔에게 개별자는 무한자로 이행하고 무한자는 개별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경우 화폐는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로의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보편자로서 화폐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정신" 또는 "개념"이 자신의 외부에 대립해있는 개별자로 자신을 외화시키는 것과 정반대의 과정이다. 이러한 보편자의 외화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가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결국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동일성의 논리로 환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되도 심하게 전도된 것이다.
지난달 10년만에 썬글라스를 했다. 썬글라스를 '샀다'가 아니라 '했다'는 표현이 그렇지만 그냥 안경에 도수가 있는 렌즈를 검은 색에 가깝게 색을 입힌 것이니 일반적인 썬글라스라고 말하기는 어색하다. 그런데 이 색안경이 사실 더 어색한데 왜냐하면 안경 렌즈를 크게 하면 두께가 너무 두껍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렌즈 두께를 줄이기 위해 렌즈 크기를 줄였더니 썬글라스 효과가 나지 않고 그냥 색안경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Matrix의 스미스처럼 보인다. 주위 동료들은 남파간첩 같다고 한다.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부러우면서.
그래도 나처럼 눈이 나쁜 사람은 강한 햇살을 그대로 받아내기는 힘들다. 매번 눈이 부셔 눈을 반쯤 감고 반쯤 찡그리는 표정이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 여름에는 하늘을 보기가 힘들다. 푸른 하늘은 푸른대로 뿌연하늘은 뿌연대로 눈이 부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월요일이었나 보다. 저녁을 먹기 위해 내려왔는데 하늘에서 춤추듯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하얀 구름이 아름다웠다.
어제 오전 평소처럼(그렇군. 나는 언제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늦게 일어나 혼자 늦은 아침을 먹으면서 매번 그렇듯이 TV를 켜고 채널을 24로 돌렸다. 방송3사 파업 이후 YTN의 뉴스는 무성의하고 재미 없고 시답잖은 것들을 내보내고 있다. 진행자조차 자신들의 무성의와 무의지를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40에서 다큐멘터리 환경스페셜을 방송하고 있기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지하 깊은 굴속에서 일꾼들이 긴 파이프를 동굴의 벽 속에 밀어넣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이윽고 미국 에너지자원부의 관리가 고준위방사성 폐기물을 저장하기 위한 시설을 검토중이라는 발언과 함께 방사성 폐기물을 1만년 동안 격리시킬 저장소 어쩌구 저쩌구 하는 발언 도중 방사성 폐기물은 1만년이 지나야 99.9%의 방사능이 소멸되기 때문에 인간과 환경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나는 잠시 한국의 관리들이라면 어떤 발언을 했을까 궁금했다. 그랬더니 바로 2003년 부안 방폐장과 관련된 자료화면이 나온다. 방사성 폐기장을 부안에 설치하겠다는 부안 군수의 기자회견에 이어 방폐장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과 대치중인 전경들, 그리고 바로 정부가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며 부안 군수에게 전화 통화를 하며 웃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화면에 나온다.
* 부안 방폐장 그 후의 이야기는 이렇다.
“부안 방폐장 사태 군민 아직도 고통…국가 대책 세워야”(경향신문)
「盧武鉉 386」등이 불러들인 迷信과 狂風이 부안의 꿈을 빼앗아갔다(월간조선)
그렇다.시나브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들이 잊혀진다. 물론 노무현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어도 저렇게 했을 것이다. 단지 노무현이 꿈구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밥 맛이 없었다. 서둘러 밥상을 물리고 냉장고에 반찬통을 집어 넣으면서 나는 이제 분노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했다. 분노란 몸과 영혼을 갉아 먹을 뿐이다.
[우리마을 이야기]의 작가 오제 아키라는 한국어판에 부치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내가 이 작품에 착수한 때는 1991년 가을이었다. 반대운동이 시작되고 어언 25년, 공황의 개항으로부터 1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산리즈카에서 '나리타공항문제 심포지엄'이 개최되기 직전이었다. 이 심포지엄은 운수성, 공항공단, 공항반대동맹의 삼자가 참가하여 약 1년에 걸쳐 월 1회 대화를 진행함으로써, 왜 반대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근원적인 검토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 심포지엄에 참가하여 취재하면서 무엇보다도 강하게 느낀 것은 "때린 사람은 자기가 때렸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사실이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개별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보편자로서 화폐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직 맑스나 헤겔 철학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저의 텅 빈 배경지식으로는 저 문장을 제 머리속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네요.
혹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 부분과 '모든 피억압자들의 차이를 노동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한다는 것' 이 문장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1. '개별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보편자로서 화폐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것이다.'
2. '모든 피억압자들의 차이를 노동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한다는 것'
이 두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1은 제가 문장을 좀 어렵게 꾸민것 같습니다. 여기서 개별자는 개개의 상품을 가리킵니다.
맑스는 화폐를 '화폐상품'이라고 부릅니다. <자본론>에서 화폐란 개별적인 상품에 들어있는 가치가 화폐라는 형식으로 전환된 겁니다. <자본론>에서 상품은 가치와 사용가치의 통일이라고 하는데, 가치는 모든 상품의 보편적 속성, 즉 교환 가능성을 의미하지요. 사용가치는 모든 상품에 따라 다르지만 가치는 동일합니다. 가치는 일종의 '보편자'에 해당하지요. 이게 상품 바깥으로 튀어나와 화폐라는 형태로 정립된 겁니다.
2의 경우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보여집니다. 개인 노동자는 다른 수많은 노동자들과 다른 단독자(singularity)인데, 이 모든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이라는 일반성으로 환원하는 게 곧 노동자 개개인을 노동계급이라는 동일성으로 환원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