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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11시 30분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분회는 부산대학교 본관 앞에서 대학의 '전임대우시간강사' 제도 확대 시행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부산대는 지난해에 43명의 전임대우시간강사를 채용하고 올해 33명을 추가로 채용할 계획이다.

 

'전임대우시간강사', 전임대우 하지만 시간강사?
 
'전임대우시간강사'는 대학이 연봉 30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보장하고 채용하는 2년 계약의 비정규직 교수다. 이들은 3~4인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연구실에서 일한다. 그런데 명칭이 왜 '전임대우시간강사'인가? 대학 측은 전임대우를 하지만 직급은 교원이 아닌 시간강사이기 때문이라고 해명을 했다.
 
그러나 전임대우라는 말도 올바른 용어가 아니다. 이들은 평균 9000만 원인 전임교수의 1/3의 연봉을 받으며 2년 계약직이고 학과 회의에 참석할 수 있으나 발언권과 의결권이 없다. 그리고 전임교수가 대학원 강의를 포함하여 주당 평균 9시간(대체로 6시간)을 강의하는 반면 이들 전임대우시간강사는 주당 기본 12시간에서 최장 15시간을 강의하도록 되어 있다. 강의가 연구와 강의준비가 병행된다는 점에서 일주일에 15시간 강의는 중노동에 해당한다.  
 
'전임대우시간강사'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주당 15시간을 강의할 경우 다른 시간강사의 강의 시수를 잠식하거나 아예 다른 시간강사의 강의를 뺏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한 학과에 시간강사 5명이 주당 30시간을 강의한다고 했을 때 전임대우시간강사를 2명 고용하면 나머지 3명은 강의를 할 수 없다. 시간강사가 강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곧 실업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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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는 이 제도를 운용하는 이유가 학과에서 전임교수 채용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전임교수를 충원할 수 없으니(비용이 많이 소요되니) 대신 2년 계약의 '전임대우'를 해주는 '시간강사'를 채용한다는 말이다. 물론 국립대학이 정부의 고등교육재정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전임교수를 충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대학 교육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교수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에서 시간강사가 전체 강좌의 50% 내외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전임교원을 충원하지 않는 한 시간강사의 존속은 불가피하다. 시간강사가 하나의 직업군으로, 제도로 자리잡고 있는 배경이다.  
 
참고로 한국은 현재 국공립대의 전임교원 충원률이 70% 정도이다. OECD 평균수준에 비하면 한국의 전임교원 충원률은 거의 꼴찌에 가깝다. 2008년 5월 <교수신문>에 따르면 이렇다.
 
"OECD 31개 회원국의 전일제 대학교원을 대상으로 한 교원 1인당 학생수는 평균 15.8명이다. 한국은 교육예산도 GDP 대비 0.6%로, OECD 평균 1.3%보다 절반 수준에 불과해 한국 대학의 국제경쟁력 제고 노력도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만일 대학에서 전임교원을 충원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시간강사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면 시간강사들의 처우와 권리를 제대로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정책이 실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임대우시간강사 제도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더구나 시간강사와 전임교수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고 시간강사들 사이의 적대적 경쟁을 조장하여 시간강사를 대학에 예속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억압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이다. 이런 제도가 대학에서 시행된다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라는 점이다. 
 
부산대학교 측은 전임대우시간강사제도를 추진하는 배경으로 "전임대우강사 확대를 통한 교원확보율 제고로 학부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 여건 마련"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말은 완전히 엉터리고 거짓말이다. 전임대우시간강사는 대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원확보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이 제도의 시행이 "학부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이라는 주장은 한마디로 기만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대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임대우시간강사 76명에게 연봉 3000만 원을 지급한다고 했을 때 드는 비용은 22억8000만 원이다.
 
그렇다면 현재 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시간강사 1200명에게 지급하는 전체 강의료는 어느 정도일까? 2009년 기준 부산대 시간강사의 평균 강의시수는 주당 4.8시간(대체로 매년 4.5~4.8시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이니 이를 계산하면, 4.8시간 x 1200명 x 6만3000원 x 30주, 이러면 108억8000만 원 정도 나온다.
 
76명의 전임대우시간강사의 경우 연봉 총액 22억8000만 원과 3~4인 기준 연구공간과 비품 등을 고려하면 부산대 전체 시간강사 예산의 1/4, 또는 1/3이 이들 전임대우시간강사에게 들어가는 셈이다. 대학이 정확한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정도 비율로 잡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임대우시간강사제도가 강의질을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오히려 전체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금액을 1/10도 되지 않는 소수의 시간강사들에게 투여함으로써 심각한 불균등을 초래하는 것이다. 

 

전임교원과 시간강사의 강의평가 '동일'... 무엇을 의미하나
 
현재 시간강사들의 강의수준이 현저하게 낮기 때문에 강의질을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전임대우시간강사제도를 도입하는 것일까? 매년 대학에서 발표하는 전임교원과 시간강사의 강의평가를 비교하면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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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교원의 경우 높은 수준의 안정적인 급여와 연구실과 각종 연구비를 지원받는 것에 비해 시간강사는 6개월 단위의 불안정한 고용구조와 10배에서 8배까지 차이가 나는 급여수준(대학은 시간강사의 급여를 임금이라고 부르지 않고 강사료라고 부른다)임에도 강의평가가 전임교원과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태를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비교하면 시간강사는 전임교원에 비해 90미터 80미터 뒤에서 달렸는데도 경주에서 비겼다는 말과 같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것은 시간강사 개인의 자기희생이 만든 결과일 뿐이다. 한국의 대학이 시간강사의 희생을 대가로 생존하고 있다는 이 비극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대학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임교원 충원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가 획기적으로 고등교육재정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초중고등학교 교사의 임금을 정부가 지급하는 것처럼 대학의 모든 교원에게 정부가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임교원충원률을 OECD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현재 7만여 명의 시간강사에게 교원지위를 부여하고 전임교원에 걸맞는 처우와 지위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실제적인 문제이다. 지난해 정부가 개정한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아니라 문제를 개별 대학에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하는 개악안이었다. 교원에 상응하는 처우와 지위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 법안을 개정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간강사에게 법적 교원지위를 부여하는 문제도 결국 고등교육재정을 획기적으로 확보하지 않으면 말의 성찬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한국비정규교수노조는 수년 동안 현재의 시간강사에게 '연구강의교수'라는 명칭으로 교원지위를 부여하고 기존의 전임강사 급여의 2/3를 지급하고(연봉 2800만원 정도) 공동연구공간을 확보하면서 대학교육을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자고 주장해 왔다. 이 안은 교수노조와 민교협에서도 공동으로 주장하고 있는 방안이며 국가의 재원 마련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부산대학교가 시행하고자 하는 전임대우시간강사제도는 대학교육을 정상화하는 방안도, 학부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임대우시간강사에게 소요되는 예산을 전체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것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개별 대학이 전임교원을 충원할 수 없다면 시간강사가 하나의 직업군으로 자리잡은 현실에서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 이것은 대학이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현실적인 실효성을 가지는 방향이다.
 
대학의 책임자들은 대학 시간강사 문제의 핵심이 그 지위와 역할 사이의 모순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으로 인해 수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고통받고 있다. 시간강사 문제를 정부의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개별 대학이 시간강사의 처우와 권리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대학 교육 정상화와 실질적인 대학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한 일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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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7 20:43 2012/04/27 20:43

한국비정규교수노조 부산대분회는 지난3월 29일 1차 교섭을 시작으로 2012년 단체교섭을 시작했다. 신임 총장이 인문대 출신이고 총장 후보자 공개연설에서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발언도 했고, 그간 시간강사 문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이었다는 점 등이 고려되면서 2012년 단체교섭은 어느 정도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 사람도 몇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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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학의 전임교수가 시간강사에게 우호적이라는 표현은 다소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같은 대학에서 동일하게 연구하고 강의하는 동료 교수인데 단지 대학의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이라는 차이가 어느 한편이 다른 쪽에 우호적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바람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호적이라든가 적대적이라든가 하는 표현은 동일한 사업장의 노동자에게는 영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시간강사라는 직급으로 강의하는 전임교수와 비정규교수의 관계가 다른 사업장의 노동현장에서처럼 그렇게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어떤 특수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전임교수와 시간강사는 동료교수이자 동시에 전임교수의 제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비정규교수가 유학을 하고 돌아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학부 학생이 바로 대학원으로 올라오거나 유학을 가서 학위를 받은 경우라도 강의를 할 경우 대개 자신의 모교에서 먼저 강의를 시작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전임교수는 시간강사에게 동료 교수이자 선배이고 스승인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관계로 인해 전임교수와 시간강사가 수평적인 연대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전임교수가 시간강사에게 우호적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 큰 함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대학에서 전임교수와 시간강사 사이의 관계가 대부분의 대학에서 수직적인 종속구조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우리는 2차 교섭을 진행하면서 인문대 총장 체제의 교섭위원들이나 이전 총장 체제의 교섭위원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여전히 '마름'일 뿐이다. 노조의 교섭안을 한번도 제대로 검토한 적이 없이 교섭에 들어왔다는 게 빤히 보이니 교섭 자리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고함을 지르는 일도 발생했다. 대학에서 교섭위원으로 나온 사람들은 대학본부 직원인 과장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처장들이고 전임교수들이다. 역시 그들은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 여실이 증명된 상황이었다.

교섭 요구안을 설명하던 중 노조의 교섭안에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대학 측 교섭위원이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었다. 그래서 말 그대로 정리해고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라고 응수를 하니 전임교원을 뽑으면 시간강사가 필요없을 수도 있는데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그런 정리해고는 합리적인 것 아니냐고 다시 되물었다. 그래서 합리적인 정리해고는 없다고 응수했다.

한국 대학의 현실은 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강사가 필요하다. 현재 대학의 전임교수 확보율은 국공립대의 경우 70% 정도이다. 나머지 빈 자리를 시간강사로 '때운다'. 사립대의 전임교수 확보율은 70% 이내이고 심지어 50%가 안 되는 곳도 부지기수다. 유일하게 서울대가 130%의 전임교수 확보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대의 시간강사 수가 전국에서 제일 많다. 이 말은 전임교수 확보율이 300% 정도는 되어야 대학 교육이 정상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2007년 대학교원 현황’에 따르면 한국 대학의 전임교원 1인당 학생수(재학생 기준)는 30.7명이다. 그러나 OECD 31개 회원국의 경우 전임교원 1인당 학생수는 평균 15.8명이다.(* 관련기사 : 교수신문) 상황이 이러니 한국 대학의 전체 강좌에서 시간강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50%에 육박한다. 시간강사가 하나의 제도로, 하나의 직업군으로 자리잡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학이 대학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전임교원을 채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국공립대의 경우 개별 대학이 전임교원을 채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국가의 고등교육재정이 뒷밭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시간강사를 고용해야 한다면 시간강사들의 처우와 권리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별 대학에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한국비정규교수노조의 분회가 있는 대학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학에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시간강사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
/하종강, 경향신문

기업 구조조정이 또다시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유가 급등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금융감독 당국과 채권 은행들은 기업 구조조정 일정을 대폭 앞당긴다 하고, 구조조정의 강도도 한층 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유가 상승이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업종에 대해서는 이미 구체적 자구 상황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마치 데자뷰처럼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막론하고 기업 구조조정이 강조되지 않은 적은 없다.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기업 구조조정의 상시 체제화’를 강조하면 ‘제한된 지식’으로 무장한 관료와 경영자들은 ‘기업 구조조정’을 ‘인력 감축’과 동일한 뜻으로 이해하고 밀어붙였다. 경영자 단체들은 입을 모아 환영의 뜻을 밝혔다. 기업을 구조조정하겠다는데 그 조정을 당해야 하는 기업 경영자들이 환영한다는 것부터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환위기를 겪은 뒤부터 ‘경제염려증’을 앓고 있는 국민들 역시 구조조정으로 인한 정리해고를 어쩔 수 없는 필요악으로 받아들인다.

인력 감축이란 수많은 기업 구조조정 방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현행 노동법상으로는 최후에 선택해야 하는 방식이다. 인력 감축의 노동법상 표현은 ‘정리해고’인데,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 규정이 없었던 시절부터 대법원은 오랜 기간 판결로 정리해고에 관한 기준을 확립해 왔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경영난이 심각해야 하고(경영상 긴박성), 경영난을 타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먼저 모색해야 하고(해고 회피 노력), 선별 기준이 지극히 공정해야 하고(공정한 기준), 노동자들과 성실하게 협의를 거쳐야 하는(성실한 협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만 정당한 정리해고가 될 수 있었으니, 기업이 합법적으로 정리해고를 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기준들이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 관련 조항으로 명시된 것이다.

정리해고의 정당성 요건 중 두 번째가 ‘해고 회피 노력’이다. 글자 그대로 기업 경영을 개선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모두 시도해보고 더 이상의 방안이 없을 때 최후의 선택으로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랜 기간 대법원은 첫 번째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성’에 대한 해석을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으면 기업이 도산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한정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점차 “장래에 올 수도 있는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인원 삭감이 필요한 경우 등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될 때” 등 기업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방향으로 폭넓게 해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콜트악기 사건에서 대법원이 “정년퇴직에 의한 자연스러운 인력 감축을 통해 이 사건 해고 범위를 일정 부분 피할 수 있었던 점 등을 종합해 보면, 긴박한 경영상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부당한 해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 이후 회사는 5년 동안 생존의 벼랑에 몰렸던 이 노동자들에게 또다시 절차를 밟아 정리해고를 하겠다는 뜻을 통보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외치면 평소 진보적이던 학자들조차 “그런 세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국가가 계획에 의거해 노동력을 배분하는 사회주의 체제”라고 충고하고 “기업이 정리해고 할 권한을 가져야만 노동력이 골고루 배분된다”고 훈계한다. ‘정리해고 없는 세상’은 경제를 잘 모르는 주장이라거나 지혜롭지 못한 전술이라는 것이다.

사실 기업이 정리해고 하지 않은 채 노동자들과 함께 기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정리해고 하는 것이 얼마나 더 효율적인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주주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가를 올리는 손쉬운 방법이기에 기업들은 전체적 효율을 생각하기 전에 무조건 정리해고부터 하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자들이 짐짓 중립적인 체 강조하면,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 ‘권한’을 오로지 ‘할 수 있다’로만 받아들이는 기업 경영자들이 함부로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무모함에 용기를 더할 뿐이다. 정리해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충고하는 일보다는 그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사정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더 기울이는 것이 지식인으로서 바른 도리이지 싶다.

콜트악기에서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는 천막농성을 하다가 “나 한 몸 희생되어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며 자신의 몸에 시너를 붓고 분신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화상으로 일그러져 불편해진 손가락으로 “나이든 부모님께 이런 몸으로 얹혀사는 게 죄송하다”고 글을 쓴다. 그 몸으로 4년을 더 싸웠다. 그 노동자에게 “죽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충고해야 하겠는가? 노동자의 유일한 생존수단을 빼앗는 정리해고가 사라지도록 노력해야 최소한 줄어들기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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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5 12:30 2012/04/25 12:30

익숙한 것들에 대한

2012/04/11 16:25

익숙한 것들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너무 익숙해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익숙함이 주는 평온에 늘 안주하기 마련이다. 나는 매번 봄이 오면 꼭 여행을 가야지, 이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가고 싶은 곳이 있다. 면허증과 차가 생긴 후 매년 그런 생각을 했고 4년 정도 그런 생각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또 후회했다. 지난겨울에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다. 홀로 시퍼른 물결 앞에 서서 그 두려운 푸른 바다를 마주보고 싶었다. 언제나 이렇게 나는 나의 뇌가 떠올리는 풍경에 몸서리친다. 나는 마치 붙박힌 바위처럼 고요하게 멈추어버린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기가 두려운 것은 이런 익숙함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나의 세포를 자극하고 심장을 두들긴다. 

언제나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이 오늘과 마찬가지라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불행하다. 나는 그렇게 자신에게 말한다. 행동하라. 일어서라. 손을 뻗어라. 주먹을 쥐고 앞으로 걸어가자. 나는, 너에게로 가고 싶다.

"그가 내게 하루 종일 무얼 하느냐고 물어서 대답을 해주었더니, 그는 내게 말했다, 반은 놀리는 듯 반은 가엾다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헬레나, 당신은 잘못 살고 있군요, 그러고 나서 그는 선언했다,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다른 삶을 살겠노라, 삶의 기쁨들을 좀더 누리겠노라 결심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에 조금도 반대하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을 열렬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요즘 유행하는 그 모든 우울한 것들이나 울적함 같은 것보다 나를 더 짜증나게 하는 것은 없다고, 그러나 그는 나의 그런 신념의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다, 기쁨의 신봉자들이 대개 제일 음울한 사람들이다, 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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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1 16:25 2012/04/11 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