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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인 비극

 

역사는 훗날 이 시절을 어떻게 평가할까? 지난 20년 넘게 '비판적 지지'라 불렸던 부르조아에게 투항하는 노선이 수없이 많은 변종을 만들어냈음에도 역사는 이를 평가하지 않았다. 30년 세월도 평가하기엔 불가능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마땅한 평가가 좌절된 이 시절 동안 좌파들은 그들의 이념을 실험할 능력을 키우지 못했다. 더 정확히는 그들의 이념을 실험할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다. 이 또한 역사는 평가하지 않았다.

 

2011년 진보신당이 겪는 사건은 2008년 민주노동당과의 분당보다 더 큰 갈등과 상처를 낳고 있다. 이 지각 변동은 단층 몇 개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커다란 덩어리의 땅을 지하로 묻어버릴 것만 같다. 온갖 폐기물로 뒤덮인 오염된 땅덩이라면 몇 개라도 마그마 속으로 녹아버리면 좋으련만, 주저 앉을 땅은 푸른 새싹들이 가득한 산과 들일지도 모르겠다.

 

이 모든 사건은 왜 시작되었을까?

 

소수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하는 것이 정당한 체제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부르조아의 편이다. 지금은 왕과 귀족의 시대가 아니니 당연히 부르조아의 편일 수밖에 없다. 주사파는 이념적으로 부르조아의 편이다. 그들의 조직은 부와 권력을 소수만이 제어한다. 거대 자본의 세련된(!) 수법은 아니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이 노조에서 노동권을 외치고 빈민촌에서 평등을 외칠 때도 그들은 그렇게 했다. 주체사상은 부와 권력의 독식을 합리화하는 이념이니 그들이 이 이념에 따른다면 당연히 현실에서도 저열한 부르조아의 수법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그들의 이념에서만 나온 것일까?

 

한국에서는 어떤 실체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던 좌익소아병자들이 진보신당에 만연하다. 그들도 과연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독점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 중 일부는 확실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좌익소아병자들은 그런 이념을 책과 문서로 배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권력 독식에 온 정열을 바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념과는 다른 층위의 실천 지침이 있는 것 같다. 사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파악이 안 된다. 아마도 인간 본연의 권력을 향한 의지인지 모르겠다.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달콤하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환희인지 알 수 없다. 부르조아는 이 환희를 언제나 환영한다. 권력은 수백년 전부터 그들의 것이니까. 하지만 좌파의 사고는 이와 긴장감을 지녀야 한다. 잡았던 권력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익소아병자들은 그들의 머릿속 지향과 권력욕 사이에서 정체성을 상실해 무능한 천덕꾸러기들이 되었는지 모른다.

 

주사파는 상처에 강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념적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있는 일이 다르지 않다. 좌익소아병자들은 상처에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심리적 상처로 정신분열에 어울리는 이념분열을 앓고 있다.

 

현실을 장악한 이데올로기와 지향하는 이념이 갈등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언제나 성찰해야 하는 좌파들에게는 힘든 시절이다. 그들에게 과연 행복한 날이 올까도 의심스럽다. 이들이 불행한 건 역사가 불행해서이다. 이들이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길 바란다. 당장이야 이런 노선에 서 있고, 저런 노선에 서 있어도 그들의 머릿속에 뿌연 밑그림으로 남아 있는 실험 설계도는 가치 있는 것이다. 상처가 더 깊어지면 아직은 어설픈 그 그림도 지워버릴 것이다.

 

슬픈 좌파 옆에는 이상한 종교 집단도 아니고 정신나간 사람들도 아닌, 이 사회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권력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강력한 패거리가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또 다시 결집하고 있다. 저 건너편이 아닌 바로 옆자리에서.

 

 

권력의 법칙 앞에서 평등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이념이었을지 모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든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