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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

 

1. 집안일 하는데 계획표까지 짜?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다. 해야할 일을 대충이라도 정리해서 일정을 만들어 놓고 매일매일 계획대로 처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짓 말이다.

 

3월 5일이면 홍아가 태어난다. 홍아가 태어나서 편안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준비해 둘 것이 많다. 홍아의 복은 태어나기 전부터 터져서 홍아는 이미 부자다. 작은 방 하나를 가득채울 옷가지와 물건들이 홍아를 기다리고 있다.

 

홍아는 복이 터졌고 말걸기는 일복이 터졌다. 방 하나를 싹 비워서 홍아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그 방에 있던 물건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결국 집 전체를 정리하지 않으면 홍아가 살아가기 불편한 집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말걸기도 불편해지겠지.

 

2주도 남지 않은 날동안 할 일을 정리해서 계획표도 간단하게 만들었는데, 일이 일을 부르는지라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는데도 일이 밀린다. 피곤하다. 만삭 파란꼬리는 더 피곤하다.

 

 

2. 심각한 불황 속 최대 호황?

 

말걸기네는 지금 이 시절 세계 불황 가운데에서도 집안 역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 호황은 알뜰하신 파란꼬리, 파란꼬리와 말걸기의 어머니들, 두 사람의 지인들 덕이다. 말걸기의 역할은 이 호황을 잘 타는 것이다. 여기서 호황이란 돈 잘 번다는 뜻이 아니고 호황 때 못지 않게 물질적인 풍족을 누린다는 뜻이다.

 

홍아가 입을 수 있는 옷을 하루님이 이마안큼 보내주셨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해서 입이 딱 벌어졌더랬다.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전에 파란꼬리의 주변에서 한 벌 두 벌 선물을 해 주었는데 그게 또 이마안큼 쌓였다. 게다가 홍아의 아빠의 엄마께서, 홍아의 아빠의 누나의 딸과 홍아의 아빠의 형의 딸이 쓰던 옷가지와 물건이라며 이마아아아안큼 가져다 주셨다. 오호~!

 

옷과 함께 이런저런 출산용품과 육아 물품으로 방 하나가 가득한데, 바리네, 슈아네에서 책과 장남감 등으로 채워주었다. 파란꼬리 동료들도 적지않게 보태주었다. 파란꼬리와 말걸기가 육아박람회에서 사가지고 온 물건도 꽤 많지만 선물 사이에 묻힌다. 히요~!

 

어제는 아가 옷 삶는 세탁기가 배달되었다. 홍아의 아빠의 엄마가 보내주셨다. 그 보다 꽤 오래 전에는 홍아의 아빠의 누나가 홍아만 타고 다닐 수 있는, 바퀴가 8개나 달린 잉글레시나 유모차를 사 주었다. 히익~!

 

파란꼬리와 말걸기는, 아기가 생기면 자동차가 있어야 편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귀가 얇아져서 모닝 한 대 뽑을까 작당을 하다가, 돈도 없는데 관두자고 포기를 했더랬었다. 그러던 어느날 홍아의 엄마의 엄마께서 돈을 부쳐 주셨다. 그래서 오늘 새빠 아반떼 뽑았다. 허억~!

 

일단 호황은 누릴 만큼 누려 보자. 아직도 파란꼬리와 말걸기, 그리고 홍아의 호황에 기여하지 못한 분들은 서둘러 동참하길 바란다. 아반떼 두 대 필요 없고 잉글레시나 두 대 필요 없다. 행인의 짝꿍께서는 양주에서 고양까지 손수 쑤신 호박죽을 들고 오셨더랬다. 맛있다.

 

홍아는 복도 많다. 이게 파란꼬리 복이냐, 말걸기 복이냐. 파란꼬리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셋의 복!"

 

 

3. 바쁘니까 입을 다물고 산다?

 

세상에 대한 온갖 불만을 떠들고 사는 까칠한 말걸기가 바쁘니까 입을 다물고 살게 된다. 역시 시끄러운 놈은 하는 일이 별로 없는 놈인가 보다(꼭 누구 들으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 ^^;).

 

김수환 추기경이 세상과 빠이빠이 하였는데 슬프다. 한때는 오랜 시간을 진지한 카톨릭 신자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말걸기 감정은 그렇다치고,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슬픈 사건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개인적인 사건으로 보자면 호상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권력자에게 불편한 사람이 사라졌다는 느낌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민주화 시대 이후'에는 '각 설 일'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에게 '개긴 몇 인'이었기 때문에 '민주화 시대 이후'에도 양심적 종교인으로서, 강자에겐 부담스럽고 약자에겐 존경받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고, 이 보다는 20세기 후반 한국 카톨릭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조명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20세기 후반 한국 카톨릭은 수백만 명의 신도를 거들이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도 더 높으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때 한국 카톨릭의 계급적 기반이 쁘띠부르조아에게 서서히 이전되어 카톨릭 내부에서도 권력의 중심이 대단히 보수적인 인사들로 이동되었다. 이것이 한국의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는 한국 카톨릭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보수 성향은 '민주화 시대'에는 '권력에게 불편한 양심적 인사'로서의 면모는 줄어들게 했을 것이다. 또한 그의 고령화와 함께 그도 카톨릭 내 권력에서 점점 멀어졌을 것이다.

 

한국에서 앞으로는 김수환 추기경과 같은 종교인은 없을 것 같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정치가든 뭐가 되었든 말이다. 암울한 지난 시대는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을 만들어냈지만 암울한 이 시대는 대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을 만들지 못할 것 같은 게,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더욱 슬프게 하는 이유인 듯하다(행여 이 말을 두고 '사람 중심의 사고'라며 '칫'한다면 그대는 바보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얘기 말고도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은 많다. 교육과학기술부 뻘짓 사건과 진보신당 조직개편 논의는 정말 한국 사회 정치 수준을 보이는 표본처럼 보인다. <워낭소리>의 '이면'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생긴다. 좌파 일각에서 띄엄띄엄, 그러나 진지하게 혁명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 두고도 하고픈 말들이 있다. 쟁점에 끼어들어서 누구 편을 들거나 하고픈게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 따져보는 것들이다.

 

할 일이 많으니 피곤하기도 하지만 맘도 바빠서 정리를 못하겠다. 다만 최근에 누군가의 블로그에 덧글 달았다가 '지적'받은 적이 있었는데(다 알겠지만 굳이 필명도 거론하지 않고 링크로 걸지 않은 이유는 논쟁을 만들기 싫어서이니 이해 바람), 이건 짧게 씨부리고 싶다. 약간 짜증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신파조로.

 

과학, 사회과학 좋아하는 사람 많다. 그런데 현실적인 구속력을 가진 법적용을 무시하면 그게 사회과학일 수 있을까? 부르조아의 법체계가 오직 자본의 운동으로만 만들어졌나? 만약 착취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만 벌어진다는 게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의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이라면 마르크스와 사회주의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아니면 착취라는 개념이, 그렇게밖에 쓸 수 없는 '고상한 개념'이라면 갈취라는 개념을 새로 만들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