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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5회 – 봄날의 상념들

 

 

 

1

 

감귤 수확을 마치고 이곳저곳에 감귤을 선물했습니다.

수확한 것을 이렇게 나누노라면 사람에 대한 정을 느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감귤나무 전정을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나무에 매달려 일을 하고 있으면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에 왔다 갔다 합니다.

 

“감귤을 나눠줄 때만 1년에 한 번 연락하는 것도 관계를 유지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해마다 감귤을 받으면서도 고맙다고 인사 한마디 없는 분도 있는데...”

“뭔가를 보내줄 때만 관심을 보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연락 한 번 없는데...”

 

이 문제는 이 맘 때면 반복해서 저를 괴롭히는 고질적인 고민거리입니다.

그분들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가 보내드리고 싶어서 보낸 건데도

뒤돌아서면 제 마음 속에는 이렇게 서운함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흐뭇함이 서운함으로 바뀐 마음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성민이 : 올 해도 또 그러네...

 

내 안의 성민이 : 사람들이 올 해도 역시나 그러니까.

 

성민이 : 내가 절박할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보다 내가 나눌 것이 있을 때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 더 비참하다고 그랬었잖아?

 

내 안의 성민이 : 나한테 뭔가 가져갈 것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만, 내가 도와달라고 소리를 지를 때는 찬바람만 불었던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성민이 : 나도 그렇게 변하는 것이 무서워서 이렇게 노력하는 거잖아.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살아가려고 노력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내 안의 성민이 : 몇 년째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데 뭐가 달라졌지?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있어? 오히려 선물 보내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잖아. 솔직히 너도 그만 하고 싶은 거 아니야?

 

성민이 : 그래도 뭔가를 나눌 때는 기분이 좋아. 그것이 찰나의 즐거움이고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라고 해도 계속 노력하고 싶어.

 

내 안의 성민이 : 뭐를 위해서 그렇게 계속 노력하겠다는 거야? 그들과의 관계가 끊겨버리는 것이 두려운 거야? 아니면 노력하고 노력하면 끈끈한 관계가 복원될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그냥 관성으로 하는 거야? 설마, 나중에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성민이 : ‘뭔가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노력하고 싶어. 음... ‘내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이유가 될까?

 

내 안의 성민이 : 결국 반복이잖아. 그렇게 노력하고 나서 서운해 하고, 노력이 무색하게도 사람들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그럴수록 너는 노력하려고만 하고. ‘노~오력’증후군이야?

 

성민이 : 에이씨, 그럼 나 보고 어쩌라고! 이런 노력이라도 해야...

 

내 안의 성민이 : 야, 너 자신한테 솔직해봐. 뭔가를 바라는 게 있으니까 남들한테 뭔가를 주는 거 아니야? 그 바라는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까 서운한 거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느니 하는 거창한 말로 자기최면 걸지 말고 너의 욕망에 솔직해보라고.

 

 

언제나처럼 ‘내 안의 성민이’가 너무 정확히 급소를 찔러버려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2

 

감귤 수확 후의 전정 작업은 가장 품이 많이 가고 오래 걸리는 작업입니다.

처음 전정을 할 때는 고민 고민하면서 조심스럽게 가지를 정리하느라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몸도 꽤 고달팠습니다.

그런 과정을 8년째 거치다보니 이제는 가위질도 과감해지고 일에도 여유가 생겨서 중간 중간 쉬면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처음에 한 달이 걸리던 일이 이제는 보름 만에 마칠 정도가 됐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시간 정도 작업을 하다가 의자에 앉아 잠시 쉬면서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시원한 모습에 제 마음도 시원해집니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몸 곳곳에 생체기를 내는 것이라서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새순과 열매들이 뒤엉키지 않고 활짝 펼쳐지려면 잠시 참아야하는 과정입니다.

나무에게 미안하다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동시에

제 자신에게도 수고한다고 토닥거려주고 싶어집니다.

 

감귤 농사 8년차에 접어들면서 일머리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감도 붙어가고 점점 여유도 생기고 있습니다.

수입이 해마다 들쑥날쑥하기는 하지만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충분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큰 걱정 없이 여유를 즐기다보면

불안과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 슬금슬금 욕망과 욕심이 자리를 잡는 걸 보게 됩니다.

욕망과 욕심이라고 해야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의 사소한 것들입니다.

조금씩 감각적인 것들을 찾는 일이 늘어난다거나

사람이나 세상을 향해 뭔가 영향을 끼치고 싶어진다거나

미래를 대비해서 뭔가를 쌓아두려고 한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살아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것들일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의자에 앉아 시원하게 전정된 나무들을 바라보며

“내 머릿속 상념들도 저렇게 시원하게 잘라내 버렸으면 좋겠네”하는 생각을 하다가

“욕망과 욕심과 상념들이 좀 있으면 어때. 그게 살아가는 이치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면서

오락가락 생각의 널뛰기를 하다가

다시 일어나 전정가위를 잡고 나무에 다가섭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우스에서 감귤 전정 작업에 집중하는 사이

주변 텃밭 채소들이 왕성하게 자랐습니다.

이것을 혼자서 다 먹을 수는 없으니 주위에 나눠줘야겠네요.

막상 주위에 나눠주려고 해도 나눌 사람들이 많지도 않고

이걸 나눠주고 나면 또 다시 어지러운 상념들이 머릿속을 휘젓겠지만

혼자서 먹다가 버리는 것보다는 그편이 훨씬 이득인 것 같습니다.

 

텃밭에는 채소들만 왕성한 것이 아니라 잡초들도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전정 작업이 끝나면 잡초와의 전쟁도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쪼그리고 앉아서 무수한 잡초들을 가만히 뽑고 있노라면
머릿속 상념들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니

이 보다 좋은 일거리도 없습니다.

 

상념들과 함께 이 봄을 열심히 보내봐야겠습니다.

 

 

 

(같은장르의 ‘새벽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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