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교회.

얼마전 박사과정을 함께 하고 있는 친구에게 내가 과거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고 말하니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매우 흥미로와 했다. 아마도 내가 보여준 얽매이지 않는 사고 방식, 술을 즐겨하는 생활, 또는 종종 보여주는 비타협적인 토론방식이 기독교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터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북의 한 시골이었는데, 면 단위의 한 리에 속한 그 마을에는 당시 그 면 전체에 하나 밖에 없던 교회가 있었다(물론 훗날 개척교회가 많이 늘어났다). 일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개신교 교회인데,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 계단과 주변을 놀이터 삼아 놀았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도 교회와 인연이 많다. 아마 3대가 같은 국민학교를 다닌 집성촌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터이다. 그러다 종교에 대한 초보적인 회의로 한동안 교회를 나가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대략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오는 몇 년간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중3부터 다시 교회를 나갔고, 대략 고2 정도까지 나가다가 다시 멈췄던 것 같다. 답을 찾을 수 없어서였다. 중3 때 읽었던 <사람의 아들>도 당시 어렸던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그 시절 나의 기본적인 성정이 형성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마주해야 하는 어떤 원점으로서 교회는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는 지금도 찬송가나 복음성가를 듣거나 부르면 참 기분이 좋다. 그것의 내용을 떠나 마치 <박하사탕>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이 돌아가고자 했던 그 맨 마지막 장면과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다. 영화처럼 나의 그곳에도 어떤 원초적인 첫 사랑이 있다. 

여름이 되면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온 지 7년을 채우게 되고, 학위는 마치지 못하지만 한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떠남과 돌아옴이 단순한 하나의 순환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돌아갈 곳이 원래 그곳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롭게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그 둘을 역사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문득 어떤 원점으로서 '나의 기독교'를 떠올리게 되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10대 후반부터 서른 초반까지는 기본적으로 '반 기독교'였던 것 같고, 그 후 지금까지는 다시 그에 대한 반성의 작업을 한 것 같다. 그 반성에는 당연히 '역사'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윤리'를 사고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좀더 충실해지면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

아마 거기에 과거의 단절된 새로움과는 달리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역사 안에서 다시 사유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삶을 시도해볼 수 있는 자원도 있을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