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제가요] 트로트 양식의 시작점과 시대적 양상
-가요사,,,이애리수와 고복수 그리고 이난영과 남인수까지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예인들의 눈부시고도 고달픈 삶은 그들이 부른 노래와 세월만큼이나 천차만별로 회자되며 빛과 어둠 사이를 오갑니다. 하여 트로트 양식이 시작된 지점과 변화의 양상을 짚으며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남긴 가수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은 그들의 영광스러운 여정만큼이나 신산한 흔적과 고달프고도 오래된 기억과도 마주치는 일일 것입니다.
화향백리, 주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리를 간다 하는데 어째서 인간의 향기만은 유독 만 리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는 여타의 종(種)들과는 달리 스스로 업적을 쌓고 그 치적으로 말미암아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우리의 대중가요도 작은 물방울이 냇물을 거치고 강을 이루다가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부침과 우여곡절을 거듭한 후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민 풍의 노래 장르로서의 위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윤심덕의 ‘사의 찬미’도 굴곡진 가요사의 한 단면이겠네요. 어떤 이들은 ‘사의 찬미’를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라 하는데요. 윤심덕이 관비 유학생으로서 동경음악학교에서 서양음악을 전공한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인 것은 맞습니다만. 그녀는 음악 활동과 신극 운동에 참여하다가 ‘메기의 추억’과 ‘어여쁜 새악시’ 등 외국의 번안곡을 취입하러 일본행 배에 오르게 됩니다. 녹음은 오사카에 있는 닛토 레코드사에서 했다고 하고요. 직접 가사를 지었다고 하는 ‘사의 찬미’는 막판에 윤심덕의 주장으로 수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더라도 이 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느린 선율로 변환하여 가사만 입힌 번안곡에 불과했습니다.
‘사의 찬미’는 제목 그대로 죽음을 찬미하고 삶에 회의적인 지극히 암울하고도 퇴폐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주인공은 노래 제목과 부합하는 행동을 결행하고 맙니다. 귀국 도중 현해탄 선상에서 목포 갑부의 아들이자 유부남인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으니까요. 이일은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초특급 스캔들로서 구구한 억측과 화제성을 증폭시키며 인구 약 2천만인 가난한 나라 식민 조선에서 10만 장이라는 당시로는 경이적인 레코드 판매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아무튼 대중가요의 시작점은 1932년 이애리수가 내놓은 ‘황성 옛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어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이르러 트로트 풍의 노래 양식이 완성되고 정돈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대체적인 정설입니다.
이후 뛰어난 미성의 소유자인 남인수가 등장하여 ‘애수의 소야곡’과 ‘낙화유수’를 내놓으며 20년 이상 최정상의 자리를 지킬 불세출의 가수가 출현했음을 알립니다. 뒤를 이어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등이 출시되며 트로트는 더한층 대중들의 곁으로 다가섰던 것, 한편 일제 막바지에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 나와 큰 호응을 얻었고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과 현인의 ‘신라의 달밤’이 서민들의 취향과 사회적인 관심을 저격하며 40년대를 일단락 짓습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노래의 시대적 양상과 변화입니다. 30년대 노래에는 나라를 잃은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는가 하면, 일제 말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는 강요된 친일노래가 판을 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땅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지고 이에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은 왠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거라 삼팔선’을 통하여 강대국들이 우리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3.8선에 구애받지 말고 남북이 자유롭게 오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으니까요. 트로트가 친서민적이요 대중들의 삶에 기반한 노래 장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50년대에 들어서자 백설희는 그 유명한 ‘봄날은 간다’로 옥구슬처럼 탱글탱글하고 멋진 목소리를 뽐냅니다. 이 곡은 화려하지만 덧없고 변덕스러운 봄날의 속성에 빗대어 대중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설의 미학을 발휘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와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 발표되는데, 이때는 또 6.25가 끝나 환도(還都)와 귀향(歸鄕)으로 바쁜 데다 공산주의를 피해 3.8선 이남으로 남하한 실향민들까지 뒤엉키는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피난살이를 마치고 떠나는 청춘 남녀의 엇갈린 운명을 표현하고 있지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50년대는 혼란과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는 해야겠는데 너 나 없이 가난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그렇더라도 남인수의 음반은 요즘으로 치면 초 대박급인 수만 장이나 팔렸다고 합니다. 대중예술의 힘일까요. 팬심의 발로일까요. 그의 목소리는 고음에서조차 흐트러짐 없이 한결같이 맑고 시원한 넘사벽 그 자체였다고 하고요. 예술가의 매력과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알게 해주는 예라 할 것입니다. 문화예술이란 결국 자연의 모방이자 인간의 상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박한 창법과 단순한 음악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인기를 얻은 시점은 만주로 연해주로 타향살이 타국살이를 위해 조선 땅을 떠나는 사람들의 많았던 30년대 초였고, 같은 고복수의 노래 중 첫 소절이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흥미를 유발하는 의문형 기법이 재밌고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부르는 요소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부인 황금심의 ‘뽕따러 가세’는 요즘 모 방송 프로그램의 타이틀로 차용되면서 시대적 트렌드와 맞물리며 재소환의 예를 보여주고 있고요.
다시 이난영과 남인수의 예를 들어봅니다. 네이버의 한 기사에 의하면 ‘목포의 눈물’은 대중가요의 전성시대를 연 공전의 히트곡이며 목포를 애틋한 추억의 명소로 되살리는 마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데서 보듯 시대성, 화제성, 예술성, 대리만족 등 여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에 남인수와의 로맨스는 다른 예술인들이 갖지 못한 엄청난 차별점이 됩니다. 아마 이일은 그들의 음악적 궤적을 논할 때마다 인간적인 매력의 근거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음악인들이 추구하는 진선미의 결정체는 무엇일까요. 가수든 연주가든 작곡가든 자신들의 음악행위 앞에 명곡과 명음반, 명가수 명연주와 같은 말이 헌정되는 일이 아닐까요? 각각 44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1천여 곡을 부른 남인수와 4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5백여 곡을 부른 이난영입니다. 하더라도 그들이 함께 써 내려간 러브스토리야말로 둘의 음악 인생에 있어 최고의 화룡정점이라 생각합니다.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