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生生현장 5.18 광주 그 뜨거운 도시
[생생현장 르포] 알싸한 현장의 언어로 5.18 광주를 말하다
들어가며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광주에 다녀왔다. 16일 아침 9:25분 서울발 고속버스로 길을 재촉했다. 3일 동안 서울을 떠나있게 되는지라 글 한편을 올리고 간다는 것이 너무 늦은 밤에 글을 쓰기 시작한 탓인지 이튿날 새벽에야 끝났다. 이래저래 새벽녘에야 잠을 청하게 됐다. 모닝콜을 들으며 7시에 눈을 떴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고 보니 7시에 일어난 것도 “휴 다행이다.”싶었다. 그런데 꼼지락거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8시가 훨씬 지나서 집을 나서게 됐으니 말이다.
터미널은 붐볐다. 눈으로는 매표소를 찾으면서 발걸음을 최대한으로 바쁘게 놀렸다. 이곳에 올 때마다 왜 나는 이리도 어리버리 두리번거리는 일이 많은지, 하지만 뭐 이내 광주행 매표창구를 찾아 줄을 섰다. 어느 지역인지는 모르지만 매진됐다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내가 갈 광주는 아니겠지. 배차 간격이 5분에서 15분 간격으로 충분히 많은 차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니 얼마큼 빠른 차표를 손에 쥐는가가 문제다. 표를 사고 보니 우등버스표에 10시 20분 차표였다. 좌석은 9번, 광주까지 4시간을 잡으면 2시 20분에 도착하겠지. 당초에 도착을 원하는 시간은 11시 전후였다, 헌데 참으로 애매한 시간에 도착하네 그려.
지인한테 단단히 약속을 했었다. “시간 자투리나지 않게 오전 중에 도착하는 차를 꼭 타겠노라.”고. 야튼 3번 승차 홈으로 갔다. 그런데 ‘빨리 가고 싶은 사람 기다리는 곳’이라는 글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뭐, 버스가 시동 걸고 있는 곳으로 가 보는 거지!” 행운을 빌면서 승차장으로 들어섰다. 버스표를 체크하는 아가씨가 서있기에 “좌석 남는 거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몇 분이세요?” “혼자인데요.” “한 자리 있습니다. 중간쯤에 자리 하나 비었으니까 앉으세요!”한다. “야호! 신난다. 9시 45분차다. 40분은 단축이다.”
“9시 45분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3시간 40분 쯤 걸린다 합니다.”
“네 시간 맞춰서 고속버스 터미널로 나갈게요.”
“감사합니다.”는 문자를 지인과 주고받았다. 그게 10시 6분이다.
12시 22쯤 문자가 왔다. “점심시간이 애매하군요! 광주 도착하고 식사 함께 하실까요?”하는 내용이다. 먼저 식사를 하라고 말을 하려니 이미 휴게소에서 밥 먹을 기회를 놓쳤다. 화장실 볼일을 보고나서 뭘 좀 사먹을까 말까 망설이면서 지체하는 사이에 시간이 다 지났던 것이다. 답 문자를 어떻게 보낼까 잠시 생각했다. “저 때문에 점심 너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아닙니다. 박 기자님을 만나는 게 반갑습니다.”하고 답이 왔다. 버스에 앉아서 가만히 보니 전광판에 실시간으로 도착 예정시간이 나오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곧바로 “1시 13분에는 도착할 예정이랍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 아침 형 인간들은 우리 같은 늦잠꾸러기들에 비해서 점심밥을 일찍 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에그 그 양반 나 때문에 점심 한 번 늦게 먹겠구나 생각하니 미안한 맘이 들었다.
만나 볼 사람은 성직자였다. 광주고속터미널 하차장에서 우린 반갑게 만났다. 그리고 오후 2시,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장소를 옮겨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어렵고도 철학적이고도 미묘한 이야기가 다수 포함돼 있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포교활동도 있지만 조상들을 위한 천도식 등 지극히 영적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우린 17일 아침 9시 40분까지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같이 가기로 하고 했다. 서론이 길었다. 광주에서의 첫날은 이렇게 끝났다.
1 망월동 묘역과 ‘5.18 유족회 기념식’
해마다 5.18 유족회에서는 하루 전날에 공식행사를 치른다. 5.18 단체들은 ‘5.18 구속 부상자회’와 ‘5.18 부상자회’ 그리고 ‘5.18 유족회’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구속 부상자회는 구속 수감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구타와 고문까지 당한 사람들이고, ‘부상자회’는 구속은 당하지 않았지만 구타를 당하고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다. 또 ‘5.18 유족회’는 5.18 대 가족 중에서 죽음을 당한 유가족들로 구성돼 있다. 물론 정부 인사나 여야의 고위 당직자들은 정부의 공식기념일인 5월 18일 날에 기념행사를 치른다. 지난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도 작년에 박근혜 대통령도 이날 다녀갔다. 그런데 ‘5.18 유족회’에서만은 해마다 그 하루 전인 5.17일 날에 기념식을 치르고 있다. 본 기자는 ‘유족회’에서 여는 5.17일 날에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찾았다.
온통 노란 물결이었다. 망월동 국립묘역의 초입 길을 장식하고 있는 리본 색깔이었다. 광주는 자신들의 슬픔 보다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희생된 그 청춘들의 죽음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애도를 양보하고 있었다. 굽이굽이 노란 물결을 그렇게 지나서 ‘민주의 문’ 앞에 섰다. 우측에는 초록 잠바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부스를 차려놓고 봉사에 한창이다. 책상위엔 방명록이 있었고, 안내문과 유인물 그리고 한겨레신문이 가득 놓여있었다.
어디 보자. ‘민주의 문’ 바로 앞에서는 청소년들 여러 명이 지켜 서 있다가 하얀 국화 꽃 한 송이씩을 건네준다. 언제 어디서 누가 키웠는지 새하얀 국화송이가 탐스럽고 싱싱하다. 카메라가 무거워서 사진을 찍을 때는 줄을 목에 걸고 두 손으로는 카메라 몸체를 받쳐 든다. 허니 꽃을 받아들기가 쉽지 않았다. 해서 헌화할 기회가 있을지 어떨지 몰랐지만 일단 꽃 한 송이를 받으며 물었다. “학생들 어디서 나왔어?” “유족회에서요.” “아~ 유족들이구나!” 기념탑 쪽으로 다가가는데 어라,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저 아저씨는 뭐지?
다가가서 말을 붙여봤다. “아저씨 수고하시네요.” 아저씨는 국가 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등판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 보다 더 어울리는 5.18 기념 곡은 없다! 사랑도 명에도 이름도 남길 없이.......산자여 따르라’ 그리고 (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라고 명조체로 쓰여 있었다. 아저씨는 광주민주항쟁 때 부상을 입은 사람인가 보았다. 이름은 박명환(54세), 박명환 씨는 “지금 민주화가 됐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회서 ’님을 위한 행진곡‘이 5.18 기념곡으로 지정되도록 결의안까지 채택됐지만 정부와 보훈처에서는 이를 계속 묵살하고 있어요. 노래 한 곡 못 부르는 나라,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셈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라고 일갈을 하고 있었다.
*박정례/ 기자, 언론인, 르포작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