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노동자
분류없음 2014/08/28 09:22제목: 어떤 이주 노동자
아침에 출근해서 일을 막 시작하려는데 클라이언트 가운데 한 명이 한국어로 인사를 한다. 발음이 아주 좋다. 오잉? 이 친구가 영어선생님을 했다는 건 이 사람의 케이스노트를 읽어서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영어선생님을 했을 거라곤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이 사람은 한국어로) 너도 한국 사람이지요?"
"(나는 영어로, 짐짓 모르는 체하며) 여기에 한국인이 누가 더 있는데?"
"(역시 한국어로) 어떤 아줌마, 어제 있었어."
"(영어로) 너 한국어 참 잘한다. 한국어 배웠어?"
"(이제는 영어로) 나 한국에서 2년 동안 영어선생님 했어. 소주도 좋아해."
어느 지역에서 일했냐, 어땠냐...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을 했다는 클라이언트들이 올 때마다 나누는 이야기꺼리로 한참동안 대화했다.
이 친구는 한국 T시에 위치한 사설 학원에 이력서를 넣고 1년짜리 워크퍼밋을 받아 선생님으로 취업했다. 12개월짜리 계약(contract)이었는데 11개월을 마치자 해고당했다. 나중에 계약서를 자세히 보니 계약 기간 안에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단다.
"한국 사장님들 너무 똑똑해.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많은 캐나다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어서 같이 소주 마셨어. 같이 캐나다 대사관에 가서 따졌는데 대사관 사람들이 한국에서 그런 일은 일도 아니래 (that's not a problem in Korea, pretty common, not a big deal at all)."
캐나다 대사관 직원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데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편, 이 친구는 캐나다 대사관에 가면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사설학원 원장들의 이름, 사-공립 학교 명단이 담긴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것도 알려줬다.
"정말 길어. 그 리스트를 보여줬는데 너무 길어."
할 말을 잃고 턱을 주욱-- 떨어뜨린 채 망연자실 서 있었다. 이 친구, 눈치를 챘는지, "한국만 그런 거 아니야. 어느 나라나 똑같아." 라고 나를 위로 (?)한다. 그래 한국만 그런 건 아니지. 여기도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왜 한국 사장님들하고 동료들은 첫 날에만 왕자님 ['왕자님'은 한국어로 말했다] 처럼 대해줘?"
"잉? 그게 뭔 소리야?"
"처음 일한 날, 소주 마셔야 한다고 해서 먹었어. 나보고 왕자님이라고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는 왕자님이라고 안했어." 그냥 웃었다. 답을 아는 눈치여서.
"김치찌개, 소주, 나 아주 사랑해. 요즘에도 가끔 차이나타운에 가서 김치찌개 먹는데 한국에서 먹었던 맛이랑 달라. 전혀 달라." 네가 맛을 알긴 아는구나.
"한국에 다시 가고 싶은데 마리화나 테스트가 새로 생겨서 당분간 가기 힘들 것 같아."
"마리화나 끊고 6개월 지나면 피검사해도 안 나올텐데. 가고 싶으면 일단 마리화나를 끊어 봐. 벌이도 좋고 일하기에도 좋다면서. 무엇보다 네가 가고 싶어하는 거 같은데."
"캐나다에선 마리화나 피워도 별 일 아니잖아. (이 눔아 별일이야. 법대로는 불법이라고) 그런데 한국 사람들 소주 마시는 건 괜찮은데 마리화나는 금지하잖아. (그건 얼추 맞는 말이네) 나는 워크퍼밋 신청안하고 그냥 비지터로 갈래. 내 친구들 그냥 비지터로 여행한다고 한국에 가서 영어선생님 하는 애들 많아."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마리화나 테스트가 건강검진 리스트에 추가됐다는 이야기는 처음 알았다. 그나저나 한국 정부의 보수적인 트렌트로 보아 범죄경력이나 정신질환력까지 리스트에 추가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면 합법적인 워크퍼밋을 받고 영어선생님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드럭딜러가 등장하면 온 마을이 들썩이는 인구 백 명 미만의 오지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제 갓 스물이 된 자들 말고는 없지 않을까. 글쎄, 수요가 지속되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공급은 이어지겠지.
이 친구의 마지막 말에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한국에 비지터로 들어가 그냥 허가받지 않고 선생님으로 일하겠다고. 착취는 더 교묘하고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나겠지. 암 그럼.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