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징계

분류없음 2013/05/20 23:51

나는 1990년대 어느 해에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대의원대회에는 단 한 번도 출석하지 못했고 당시 한총련 main stream의 노선과 내용 가운데 몸과 마음바쳐 따르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당시 규칙이 그렇게 생겨먹어서 한총련 대의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동적으로 대의원이 되는 순간에도 그게 뭔지 잘 몰랐고 솔직히 관심도 없었다.

 

대학교 저학년 때부터 나에게 친근한 이른바 노선 내지 사람들이 세상의 중심이겠지, 그러니까 전대협-한총련의 main stream이겠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2학년땐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minority라는 걸 알았을 때 그 충격은, 정말이지 설명하기 어렵다. 뭐, 언젠가 설명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낼 수 있는 그 날이 오겠지.

 

문제는 내가 minority가운데에도 minority라는 것, 한총련이 내게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뭐 그런 데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재수 없게도 그 해에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찍혀 한총련 (이른바) 고급간부는 물론이고 대의원들에게까지 탈퇴시한이 하달되고 각급 학교당국과 관할경찰서는 이들을 잡아들여 탈퇴각서를 받는 일에 혈안했다. 그 시한은 늦봄이었다가, 한여름이었다가, 늦여름이었다가 그렇게 늦춰졌고 결국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나는 외국은커녕 집에도 갈 수 없었고 학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뭐, 그렇게 사는 일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한 것 뿐인데 나를 둘러싼 상황은 매우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학교당국은 같은 해 교육투쟁 때문에 받았던 징계를 철회하고 받지 못한 전액장학금을 주겠다며 탈퇴서를 내밀었다. 졸업 뒤 교직원취업도 보장해주겠다고 했다. 교수들은 갑자기 친한 척을 했다가는 썩은 고기를 보는 얼굴로 나를 대했다. 누군가 엄마에게 전화를 했는지 엄마는 김치를 싸들고 총학생회에 왔다가 총학생회 옆방에 숨은 나를 찾지 못한 채 몇 번 헛걸음을 하셨다. 가을 쯤엔가, 엄마가 밥을 먹자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고 엄마를 찾아 나선 학교 앞에서 저만치 서있는 보안과 형사들의 승용차를 발견하고는 엄마와 연락하는 일도 그 날로 끊었다. 총학생회실로 나의 삼촌이라는 사람들이 전화를 해댔다. 나에게는 그럴만한 삼촌이 없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뭐 그럴 수 있어.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서 시작했다. 열렬 운동권은 아니어도 학생회 사수의 기치를 떠받들던 다른 예비역 한총련대의원들의 표정이 하나둘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학생회 구조로 따지면 그들은 중앙운영위원들이다. 그들의 징계는 이미 풀렸고 받지 못했던 장학금을 받았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술자리 회수가 늘어났다. 가끔 술에 취해 꼬장을 부렸고 나는 결국 그들이 학생처에 내려가 (혹은 끌려가) 한총련 탈퇴각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온화하고 순한 얼굴은 점점 이그러지기 시작했고 하나둘 총학생회 사업에 어깃장을 놓기 시작했다. 당시에 나는 그들의 번민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고뇌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자괴감과 현실의 충돌, 자기행동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그 욕망과 인정욕구를 헤아리지 못했다. 나는 어렸고 그들의 행동은 나에게 그저 옳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이듬해 ‘운동권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자’는 기치로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고 당선됐다. 비운동권이 아닌 반운동권의 출생을 나의 이 두 눈으로 목도한 셈이다.


가을 끝무렵, 엄마도 학교도 경찰도 별로 말이 없었다. 아, 이제 괜찮겠지. 학교 밖을 걸어나갔다. 그리고 어느 한 길에서 세 명의 사내와 한 명의 아가씨를 만났고 그들은 대기하던 승용차에 나를 태워 경찰서로 데려갔다. 두 명의 사내가 양팔을 억세게 잡았을 때 나는 제 발로 걸어가겠습니다, 라는 말 외에는 별반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수갑을 채웠다. 양손이 절로 툭 떨어졌다. 수갑은 상징이기도 하지만 가드를 세울 수 없게 만든다. 정신적, 육체적 ‘진압’이다. 지금은 없어진 보안과 조사실에서 나보다 보름 먼저 잡혀온 다른 대의원을 만났다. 그녀는 이른바 ‘골수 주사파’들이 득실거리던 학교의 단과대 학생회장이었다. 둥그런 반원형의 판옵티콘 유치장 한 가운데 방을 그녀와 같이 썼다. 길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형사는 내 몸을 싹 수색했고 브래지어, 후드티의 끈까지 가져갔다. 이를 닦고 똥을 눠도 그 아가씨와 함께 했다. 치욕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경북대를 졸업한 그녀는 취직이 잘 되는 경찰서를 지원했고 운이 좋아 서울로 발령받았다고 했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하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조사는 지루했다. 일단 재미가 없었다. 나는 당시 엄마아빠의 성화로 김영삼 사인이 들어간 시계를 받는 신한국당 당원이었고 통일은 독일식 흡수통일이 제 맛이라는 병맛적 지론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짜놓은 조서에 내 생각은 맞아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거 또라이 아냐’라며 자주 때렸다. 지루한 조사는 반복됐다. “처음부터 다시!” 그들의 신경질적인 새된 소리. 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다 읽으셨으면 선생님들이 더 잘 아실텐데 왜 자꾸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러니까 너는 저 내용에 동의하는 거 아냐, 책을 읽었어야지 동의하는지 마는지 알지 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런데 너는 왜 집회에 나가고 이런 찌라시를 만들었어, 선생님들도 제 자리에 있어보세요 안하게 되나… 고장난 레코드. 폭언. 인격모독. 다시 수갑 채워. 지역총련의 간부로 활동하던 김철수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공개학생정치조직의 고급간부였던 그를 나는 알지 못했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를 내게서 얻지 못했다. 알지 못하는 바를 어떻게 진술할 수 있단 말인가.


나보다 보름 먼저 잡혀온 다른 대의원, 그녀는 어느 밤 나에게 그냥 탈퇴각서를 쓰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그녀는 매우 차분해 보였고 그 생활에 아주 익숙한 듯했다. 나는 안그래도 뭐라든 써줄 생각이었지만 main stream의 멤버가 이런 말을 하다니. 엄마가 찾아오셨고 한바탕 소란을 피우신 덕에 수갑은 더 이상 하지 않았도 됐다. 백지와 펜이 주어졌고 그녀가 먼저 작성한 탈퇴각서를 보여주며 똑같이 쓰라고 했다. 이미 머리는 진공상태였다. 아 결국 이 날이 왔구나.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베껴쓰느라 그녀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똑같이 써서 두 번이나 혼났다. 너 한 번만 더 장난치면 그냥 구속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썼다. 엄마와 함께 걸어나와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엄마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엄마는 집으로 나는 학교로 갔다.


탈퇴각서, 일종의 반성문이다. 그 뒤로도 검찰에 들러 비슷한 조사와 조서 작성을 몇 차례 더 했다. 사람들은 그 때마다 이거 별 거 아니야. 라고 했지만 왜 그 별 거 아닌 거에 그렇게 안달하나,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별 것 아닌 한 장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무기정학 징계도 풀어준다 하고 주지 않았던 장학금도 준다 하고 취업도 보장해 준다 하고 엄마는 갑자기 대학생처럼 학교를 드나드시고 연락도 없던 삼촌이 전화를 하고 내 일상을 모니터하고 알지도 못하는 김철수가 등장하고 수갑을 채우고 사람을 팬다. 그 한 장짜리 반성문을 받기 위해.


이건 복종을 강요하는 거다. 영혼을 내 놓으라는 거다. 하라는대로 하라는 거다. 그래서 별 거다.


솔직히 말하건대 당시 나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한총련을 사수하고 공안탄압을 분쇄하고 뭐 그런 기치보다는 누가 나에게 뭘 억지로 하라는 거 그게 싫었다. 동의고 나발이고 안해도 될 것 같은 일을 억지로 하라는 거 그게 싫었다. 한총련을 탈퇴하든 시집을 가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인데, 하든 안하든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인데, 때가 되면 알아서 할 일인데 남들이 나서서 설레발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잡혀들어갈 때까지 탈퇴각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그건 나에게 ‘별 거’였다. 아무리 날라리 같이 살아도 똥과 된장은 구별할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성인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나라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좀 웃기지 않나. 이게 이른바 ‘정상적’인 사회인가?


나는 나의 이 이야기를 그동안 글로 정리하지 못했다. 말로도 잘 정리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고생한 선배들이 많았고 그들에 비하면 내 고생은 새발의 피도 아니니까. 그리고 누구든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각자 당대를 산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시절이 있고 맥락이 있다. 그래서 그 개인은 그런 당대 속에서 시절과 맥락 속에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글쓰기와 반추는 그래서 더더욱 존중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징계와 반성문은 요구하는 입장의 사람에게선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을 치러내야 하는 사람에게는 별 거다. 왜냐하면 이 징계라는 게, 반성문이라는 게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는 결단코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등한 권력관계에서는 반성이 오갈 수 있고 대화가 오갈 것이며 그리고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징계같은 요식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잘 못했는가, 왜 그랬는가, 그 내용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그 어줍잖은 권력으로 사람을 누르려 하지 말라. 사람의 양심과 영혼과 굴종을 바라지 말라. 당신은 그 복종의 형식을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영혼과 진심은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끝끝내 당신은 그 공허 속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니네들, 내가 써준 한총련 탈퇴각서, 그거 받아서 좋았니. 좋았으면 얼마나 좋았니. 근데 니네들 이듬해 김대중정부 들어서고 경찰구조조정 때문에 다 짤렸다며. 경북대 나온 그 경찰아가씨는 지금쯤 뭐하려나. 행복…합니까?
 

2013/05/20 23:51 2013/05/20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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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루 2013/05/21 00:43 Modify/Delete Reply

    이 부분, 격하게 동의.
    "나는 나의 이 이야기를 그동안 글로 정리하지 못했다. 말로도 잘 정리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고생한 선배들이 많았고 그들에 비하면 내 고생은 새발의 피도 아니니까. 그리고 누구든 다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각자 당대를 산다. 각자의 인생이 있고 시절이 있고 맥락이 있다. 그래서 그 개인은 그런 당대 속에서 시절과 맥락 속에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글쓰기와 반추는 그래서 더더욱 존중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린비출판사의 노동조합을 지지합니다.

  2. 쇼조게바 2013/05/21 02:26 Modify/Delete Reply

    멋있다........<

  3. m 2013/05/21 09:40 Modify/Delete Reply

    너무너무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폭풍 눈물이....ㅠㅠ

  4. stego 2013/05/21 10:01 Modify/Delete Reply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제 글이 그냥 혼자하는 말이 될까 걱정했는데 꽃개님 글이 참 고맙네요. 제가 미처 못한 말들 다 해주셔서... 힘든 기억일텐데 이렇게 꺼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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