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1
분류없음 2014/11/06 02:09
아일랜드 모 사이트에서 힛트를 치며 (going viral) 아일랜드인들을 맨붕에 빠뜨렸다는 기사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케이티 씨,
케이티 씨의 입사 지원이 반려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지원하신 곳(학원)에서는 (케이티 씨가 아일랜드 출신이고 아일랜드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마시는 알콜중독으로 유명하므로) 케이티 씨와 같은 분을 고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일랜드는 영국 땅인 북쪽은 빼고 더블린을 수도로 쓰는 남쪽이 되겠다. 술 많이 마시는 것으로 치면 서유럽에서는 러시아 정도 유명세를 치른다고는 하지만 언제나 케바케라는 진리가 있듯이 꼭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닐 것이다.
한국의 한 사설학원에서 인력공급 용역회사에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노동자 공급을 의뢰했고 그 용역회사는 크레이그리스트를 통해 리쿠르팅을 했을 것이다. 우리의 아이리쉬, 케이티는 이력서를 넣었으나 위와 같은 이유로 반려 통보를 받았다. 뚜껑이 열린 케이티, 친구들과 이 이야길 나누었겠지.
그러나 링크 기사를 가만히 읽어보면 왜 한국의 사설 학원이 저 말도 안되는 거절 이유를 내세웠는지 추측할 수 있다. 바로 '아이리쉬 악센트'. 그리고 기사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케이티라는 아이리쉬 여성의 인종이나 외모 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라고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겠다.
한국에서 대학 시절에 만난 외국인 교수(들)와 사설학원에서 만난 몇몇 인스트럭터(들), 그리고 밴쿠버 ESL에서 영어공부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내 영어실력이 아주 형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특히 '듣기'가 그랬다. 거의 모두 CBC 뉴스에서 앵커들이 말하는 것처럼 발음했기 때문에 듣는 데엔 큰 지장이 없었다. 듣기에 지장이 없으니 말하는 것, 쓰는 것에도 별 무리가 없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커피를 사고 그런 과정에서 겪는 혼란함 따위야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이겠지, 라고 여겼다. 그러나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사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우선 같은 과 친구들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십대 후반부터 오십대 초반까지,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유러피안부터 오대양 육대주에서 이민 온 다양한 인종과 국적, 내이티브 (원주민: 이 나라에서 내이티브라는 말은 북미대륙에서 아주 옛날부터 살던 원주민들에게 주로 쓴다. 백인들에게 내이티브라고 하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도 있었다. 당연히 쓰는 어휘, 악센트, 언어습관, 태도가 제각각이었다. 특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이 하는 말은 그냥 소음으로 들렸다. 한국식으로 해석하면 "지미 존나 드러운 섀꺄랑 썸타는데 밀당 이거 존나 개야" ... 그냥 뭐 이런 식이다. 그 나이 또래들만 알 수 있는 은어와 각종 줄임말. 지옥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가장 적응하기 힘든 억양은 남아시안 영어 억양이었다. 우리말로 치면 약간 혀짧은 소리와 독특한 인토네이션. 도무지 컨텐츠에 집중하기 어려워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곤 했으니 상대는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동아프리칸들과 라티노들이 섞어 쓰는 "에" "에" "에" -- 이것은 심지어 일본인들의 "아노 (あの)", 한국인들의 "어" "응" 과 비슷한데도 -- 이 중간 휴지음이 지독히도 거슬렸다. 듣다보면 신경질이 날 때도 있지만 신경질을 내면 안된다. 절대 안된다. 차라리 집에 와서 문 닫고 화장실에서 소리를 지르면 질렀지 면전에서 감정을 드러내면 "못배워먹은 인종차별주의자" 인증하는 꼴이 된다. 무엇보다 그 상대방에게 대단히 큰 실례다.
지금은, 음...
적응이 됐다. 완벽하게 적응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길을 걷다가 뒤에서 누가 얘기를 하면 백인인지 흑인인지 황인인지 아니면 어느 대륙에서 온 사람인지 정도는 대충 짐작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발음이나 억양보다는 그 사람이 말하는 컨텐츠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훈련의 성과.
미국만 쳐도 발음이나 억양이 수백 개에 이르고 캐나다만 해도 이렇게 다양한데 만약 한국의 영어교육 공급자와 소비자가 미국/캐나다 방송국 영어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본토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들이 모두 손석희 같은 아나운서처럼 말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 오기 전 나의 삶을 반추해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구나 싶다. 모든 일은 늘 그렇지만, 겪어보기 전엔 --- 모른다.
하지만 기분이 참 엿같을 것 같다. 레쥬메를 냈는데 아래와 같은 답장을 받으면.
안녕하세요 꽃개 씨,
꽃개 씨의 입사 지원이 반려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지원하신 곳에서 (꽃개 씨가 남한 출신이고 남한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알콜중독으로 유명하므로) 꽃개 씨와 같은 분을 고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