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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
그가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몰아가면서 칼리그람(동어반복)은 가장 완벽한 덮을 설치한다.
이중의 통로에 의해서 그것은 말만이나 그림만으로 불가능한 포획을 확실하게 성공할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공간속에서 서체가 부릴 수 있는 꾀들을 통해 말들에 그들이 지시하는
대상의 모습을 또렷하게 부여함으로써 본래 말들이 결코 이길 수가 없는 그 완간항 부재를 쫓아낸다.
종이위에 교묘하게 배치됨으로써, 기호들은 그것들이 그리는 테두리를 통해서, 지면의 빈공간을
자르며 들어선 그것들의 덩어리를 통해서, 밖으로부터, 그들이 말하는 사물 자체를 부른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여 시각적 형태가 글쓰기를 통해 움푹하게 새겨지는바, 그 안으로부터
그것을 파며 만드는 단어들은 모호하고 이름없는 부동의 현존을 내쫓으면서 그것에 세례명을 주고 그덜을 담론들의 우주안에 가두는 의미화의 망을 솟아나게 한다.
이중의 덫, 빠져나달 수 없는 함정이다.
그러니 이제 새들의 비상, 꽃들의 변화하는 모양, 흘러내리는 빗물 같은 것들이 어디로
날아갈 수 있단 말인가?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풀린 칼리그람의 조각들로 이뤄진 것같다.
이전의 배치로 돌아가는 듯이 보임으로써, 그것은 칼리그람의 세 기능을 복구시키는데
그러나 그것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래서 언어와 그림의 모든 전통적 관계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옛날의 표의문자를 복원하기 위해 형상을 ㅣㅁ범했던 텍스트가 여기서는 제자리를
되찾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자연스러운 자리 밑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림의 지주 노릇을 하는 자리, 그림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을 분해하여,
일련의 텍스트들과 책의 페이지들 안에 그것을 끼워넣는 자리로.
그것은 다시 <그림설명>이 된다.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문자와 공간의 공모가 잠시 그것을 거기로부터 내려오게 한 곳으로 모든 담론적 구속에서
벗어나 그것은 다시 생래의 침묵속에서 부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페이지로, 그리고 그것의 낡은 배치원칙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그럴 뿐이다.
내가 여기 그림 및에서 읽을 수 있는 단어들은 그 자체가 그려진 단어들이다.
화가가 그림밖에 놓은, 그러나 그의 그림의 일반적인(게다가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구역안에 놓은 단어 이미지들이다.
내가 그것들에 대해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칼리그람적 과거로부터 단어들은 자기 그림들이
그림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들의 그림적 성격을 보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그 자신 위에 포개진 것으로서 읽을 수 밖에 없다.
이것들은 말들을 그린 말들이다.
이 말들은 그림의 표면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말하는 어떤 문자의 반영을 이루고 있다.
그림으로 된 텍스트, 그러나 거꾸로 재현된 파이프는 텍스트의 문자를 그린것과 같은 손과
붓으로 그린 것이다.
그것은 글씨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글씨의 결핍을 메울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글씨를 연장하고
있다. 파이프는 조그만 망가진 문자들, 조각조각나 그림의 전 표면위의 흩어진 그래픽 기호들로
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문자표기의 형태로 그려진 그림인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이전의 칼리그람적 조작은 글씨와 그림을 교차시텨 놓았던 것이고, 그리고
마그리트가 사물들을 제자리에 다시 놓았을 때, 그는 형상이 그 속에 글씨의 흔적을 끈기있게
유지하고 텍스트는 여전히 그림으로 그려진 재현이 되도록 배려를 했던 것이다.
미셸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중에서....
* 이 글은 레이님의 [택시기사 아저씨의 친절. ^^]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새벽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다섯병과 들레꽃의 마중을 뒤로하며 손까지 흔들어주고는
“아저씨 한남동이요~”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서 약간 술냄새도 풍기며…그리고는 무심하게 창밖만 바라본다.
그런데 왼쪽 다리가 찝찝하다.
아저씨가 힐끔힐끔 치마입은 다리를 이상한 눈으로 계속 쳐다본다.
이상하다기보다는 아주 끈적끈적한 그런 눈빛 말이다.
새벽에 과년한 여성이 술마시고 택시를 탄것부터가 그에게는 이상한걸까?
아님 내가 지 타입인가? (으으..)
으음..기분 더럽지만 할 수 없다. 내 생명을 맡기고 가는 차안에서 그것도 3시가 넘은 새벽에 내가 그에게 따지고 들어봤자 득 될 것이 없다. 아니…난 불만이 있어도 눈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치거나 무서운 인상 쓸 인간이 못된다..겁나니까..ㅋㅋ
예전 프랭크라는 친구의 글이 생각난다.
“밤에는 여성의 인권이 없다!”
늦은 밤 과년한 여성이 혼자 다니는 건 어떤 피해를 입어도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에 1차 책임은 여성에게 있다는 식의 논리를 들이미는 황당한 경우가 있다.
여하간 순간적으로 약간의 공포와 울컥함을 동시에 느끼며 가시방석으로 앉아있었다.
빨리 집에 도착하기만을….기다리며…무슨일이야 있겠냐….기분 나쁜건 둘째치고 말이다.
택시를 타고 집입구까지 도착하려면 택시운전자에게 약간의 지리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아저씨…이렇게 저렇게..네 거기서 좌회전..또 좌회전…네 여기서 세워주시고 좌회전해서 나가서시면 바로 도로입니다…”
그런데 대뜸 “ 이런곳에서 살아? 흐흠…”
대뜸 반말..그리고 약간의 빈정…이해되지 않은 반응이었지만 10000원을 건네주며 “감사합니다..” 난 항상 택시를 내리면서 수고하세요 보다도 안전하게 운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의미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별로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내리고 싶은데…이 아저씨 돈을 받으려 내미는 손이 약간 수상쩍다. 손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다분하고…잔돈을 건네는 손이 건내주려는 듯 말려는 듯…’모야? 이 시간에 나랑 장난하자는 심산이야? 오마이 갓….' 최대한 스킨쉽을 하지 않으려고 4등분이 접혀진? 5000원짜리 지폐의 끝부분을 낚아채듯이 잽싸게 뺏고는 뒤도돌아보지 않고 뛰었다…집까지 거리가 조금 되는곳에 내렸으므로…푸후….
어찌나 간이 떨리는지…오바일꺼라고 생각하는 남성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새벽늦게 돌아다니는 여성이 되어 보지 못한 남성은 모르는 감정이리라..
서대문 사건, 유영철 살인사건…등등의 흉흉한 사건들은 집안에서도 문을 꼭꼭 닫아놓게 만드는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하다.
남친을 만들라구? 이게 이것과 무슨 상관인가? 남친을 옆에 꽁꽁 묶고 사회생활 하란 말가?ㅋㅋㅋ
여튼 택시를 자주 애용하는 나지만 택시를 타고 10번의 1번은 좋은 경험이 없었던듯….
레이님~ 운좋으셨네요^^ 나두 그런 행운이 자주자주 있기를 기대하겠슴돠~
* 이 글은 너부리님의 [아우~~ 깜찍하던 그 시절..]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넘넘 이뿌죠?
싸이월드 "처절한 기타맨씨"의 블로그에서 다운받은 고양이예요*^^*
투니버스의 햄토리 주인공을 닮은거 같기도 하고...저 조그마한 발톱들을
보세요^^ 미치겠따....
Untitled #86/1981
Untitled #92/1981
Untitled #96/1981
Untitled #102/1981
Untitled #123/1983
Untitled #153/1985
Untitled #175/1987
Untitled/2004
Naver.com "신디 셔먼" 지식검색
1954년 미국 뉴저지주 글렌리지에서 출생하였다. 흑백사진이 개념미술에 차용되던 1970년대에 팝문화를 기반으로 대중문화와 매체에 관심을 갖고, 1977년 《무제 사진 스틸》 시리즈 작업을 시작하였다. 1950~1960년대 미국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을 패러디한 이 시리즈는, 미국적 아이콘인 금발머리의 여배우로 변장한 신디 셔먼(Cindy Sherman)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녀의 작품에서는 카메라의 뒷면이라는 관음자적 모더니즘 주체가 아닌, 카메라 앞에 나와서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를 볼 수 있다. 즉, 사진가(관람자)의 시각에 모델(객체)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작품의 모델이 되어 시선의 주체와 객체를 모두 담당했다. 이와 같은 독특한 역할은 1970년대 비평을 선도했던 《옥토버 October》지의 주요한 비평의 대상이었다.
그의 작품은 주제별로 대략 5단계로 나누어진다. 1975~1980년대 초기는 '흑백스틸' 작업 시기로서, 금발의 여배우로 분장한 신디 셔먼이 등장하는 《무제 사진 스틸》 시리즈가 제작되었다. 두 번째 시기(1983~1984)는 패션모델을 패러디한 《패션사진》시리즈 제작시기로, 여기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 아닌 추하고 피곤한, 역전된 여성의 모습을 포착한다.
1985~1991년의 작품은 비평가들의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시기이다. 애브젝트 아트(Abject Art)라고 하는, 신체와 관계된 액체 분비물·정액·혈흔·토사물 등의 불쾌한 것들로 작품을 만들었다. R.크라우스는 이 작품들을 '재난들과 동화들' '역겨운 사진들' '시민전쟁'이라고 불렀다. 특히 주목되는 작품은 《무제 #153》(1985)인데, 텔레비전 드라마 《트윈 픽스》의 한 장면인 강가 모래밭에 길게 누운 젊은 여성의 시체와 똑같이 연출한 장면이다.
네 번째 시기(1988~1990)는 '역사 초상화'를 패러디한 시기이다. 고급 모더니즘으로 상징되는 15~19세기 후반 유럽 귀족의 초상화를 가슴을 드러내거나 평범한 여성 등으로 대중화시켜 패러디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마지막 시기인 1992년은 절단된 마네킹의 사지가 등장하는 마네킹과 섹스 사진이 특징이다. 유명한 《무제 #250》(1992)에는 노인의 마네킹이 성기를 노출한 채 임신한 몸을 흉측하게 드러내며 누워 있다.
1997년에는 영화 《오피스 킬러 Office Killer》를 제작하여 할리우드를 선망하는 여성의 허무한 모습, 불혹에 이른 아역배우, 40대 후반의 중산계급과 중년여성 등을 묘사하였다.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머리, 성형수술의 후유증을 상징하는 듯한 플라스틱 인조 가슴, 추한 화장과 의상 등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외적 이미지를 보여주어 삶에 찌든 할리우드의 이면을 드러내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여성'과 '몸'이다. 신체라는 외부 이미지를 넘어서 여성 신체를 구성하는 내부 이미지를 묘사한 오브젝트 아트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신체는 셔먼 작품의 근원이다. 여기에는 모더니즘과 가부장적 남성 사회가 단지 아름다움으로 규정했던 여성의 신체를 불쾌감을 주는 신체 내부적 요소로 보여줌으로써, 변장 뒤에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성의 진정한 자아확립과 주체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이 담겨 있다.
>>잡지 발췌
2000년대에 와서 셔먼은 평범한 중년 여성의 초상화를 연출한다. 하지만 과장된 화장과 꾸며진 미소는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녀들은 왜 저런 꼴이 되어버린 걸까? 바로 사회가 바라는 미적기준에 맞추려는 중년여성의 안간힘.
남성의 잣대에 스스로의 외모를 맞춰가는 그녀들에게 고정된 자아가 있기나 한 것일까?
사진 속 인물들이 모두 불편하고 답답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시선의 강박 때문일 것이다.
현재 신디셔먼이 발견해낸 최종적인 캐릭터는 '광대'다. 한 프레임에 여러명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모두 그녀 자신이고 컴퓨터로 합성한 결과이다.
'광대'에 압축된 의미는 남성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며 울고 웃는 나약한 존재이자, 지금껏 수많은 인물들로 스스로를 변장시켜 왔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정체성의 상실
셔먼은 궁극적으로 분장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를 이해하고자 했고, 또 현대를 표현하고자 했다. 사진으로 표현된 '나' 속에서 정신분석학적인「에고(ego)」의 적나라한 해부를 시도하였다.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닌 것, 즉 자기 상실의 모습을 기괴하거나 퇴폐적인 영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 '나'를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가.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타인으로 분장된 자신의 모습으로 자기를 표현하고자 한 셔먼의 사진들은 그래서 충격적이다.
셔먼의 사진이 암시하듯이 현대 사진은 더 이상 회화주의의 모방이 아니다. 또한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사진의 기록성, 즉 현실의 묘사도 더 이상 사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없다. 더우기 사진 장르의 파괴와 함께 메세지의 난해성도 더해지고 있다.
위의 글은 모두 퍼온 것들이다.
그녀의 그림들을 모으면서 글로서 표현해보려 했지만 생각이 풀리지 않아 그냥 날라왔다.
매체에 의해 관념화된 여성을 여성의 시각에서 사진으로 재조명, 연출했던 과거작과는 달리
최근작업들은 개인의 문제로 돌아온 듯하다.
9월1일부터 11월21일까지 천안의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최신작인 그녀의 사진을 만날 수있다.
허거걱...천안까지...고민중이다...
* 이 글은 헤헤님의 [주말의 3가지 공연] 에 대한 트랙백 입니다.
<엘리펀트>
제목이 걸작이다.
우리는 코끼리 한마리를 거실에 둔 채로 살아간다.
밖으로 내보낼 방도가 없으니 그냥 참고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샌가 코끼리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거실의 코끼리'
내부의 커다란 문제를 의미하는 서양우화란다.
“폭력은 이해될 수 없다. 거부될 수 있을 뿐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전찬일씨와 <엘리펀트>를 두고 논쟁을 벌이면서 한말이다.
<엘리펀트>를 보고 난 후 계속 되내이는 질문이 왜 그 애들은 살인이라는 것을
택했을까였다.
왜?
마이클무어는 정치적, 사회적 접근방법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총기구매시스템때문이라고
하고, 불안을 조장하는 미국정치인들 때문이라고 한다.
언론에서는 문화라고 한바탕 난리를 치면서 하드롹밴드의 hard한 표현방식이
문제라고 했다. 그건 아니라는 것이 마이클무어의 생각이었고 일정정도는
한 분야에만 문제의 원인이 있을꺼라고 생각하는데 동의한다.
왕따문제. 이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모든 왕따학생들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기는 하지만 살인을 직접 실행에 옮길 만큼 잔인하거나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또 아니다.
그러면 폭력게임? 대리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윤리의 무감각,
폭력의 일상화 또는 습관화가 되면 것도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하겠지만
게임인구가 어디 한두명인가? 것도 아닌듯…
미국의 범죄심리학자인가가 미국범죄자들을 상대로 유전자검사를 해보았더니
정상인들과는 남다른 인자가 하나 더 있다고 했었는데…태어날 때부터
폭력적인 인간은 타고 나는 건가?
모르지모르지..몰겠따….
폭력을 거부하고자 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살상이 무감각해질 수 있는
심리상태가 된다는 건 한순간도 아니고 치밀하게 계획하에 진행된 것이었다.
가상의 게임처럼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쓰러지기만 하는 가상인형이 아니라
붉디붉은 선혈을 뚝뚝흘리면서 공포스러운 표정의 절규하는 듯한 소리들이
보이고, 들리고, 맛볼 수 있었을 터인데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고 냉정하게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면…?
감독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읽히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폭력이 감행되어지고 폭력에 노출이 된 이들의 반응은 공포와 소란이 아니었다.
조용히 받아들이는 듯했고, 그 무언가의 경지에 도달한 듯한 반응이었다.
그건 구스반 산트가 콜롬바인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인 듯하기도 했다.
차갑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라는…
하늘은 처절하게 푸르렀고 베토벤교향곡14번<월광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은
절제된 전율이었다.
끊임없이 폭력에 대해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도록 국가이데올로기는
기제해야될테지..하지만 국가는 끊임없이 무기를 만들어내고 군인을 양성하고
전쟁을 조장하지 않는가?
왜?
자신의 소신을 위해 폭력적 집단(군대)을 거부할 권리가 한국남성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됴로 다시 함 봐야겠다는 생각에 젖어서...
Nokia에서 2003년도 야심차게 내 놓았던 툼레이더 게임이 탑재된 모바일폰 N-Gage이다.
제품디자인은 소프트웨어의 컨셉에 맞게 게임스틱의 Shape을 가져왔다.
2003년 독일하노버 CeBIT에서 첫선을 보였던 이 폰은 노키아에서 부스에 상당한
마케팅비용을 써가며 홍보에 열을 올렸던 컨셉폰이었으나 시장에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소리없이 묻히는 듯하다.
최근 소프트웨어는 3D엔진 탑재가능한 기술까지 와있고 여러개의 3D게임을 다운받아
폰에서 게임가능하다.
모바일폰은 멀티미디어뿐 아니라 게임시장에까지 영역확장과 더불어 진화 중이다.
사실 난 이폰을 2003년 독일에서 직접 접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었고
제품디자인을 마주하면서 느꼈던 그때의 소감은 바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가로로 폰을 사용한다는 것.
요즘 삼성에서 적극적으로 TVCF를 구가하는 가로LCD(SCH-V500)폰은
그닥 새롭게 와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로폰의 사용성이 얼마나 사용자에게 유용한지 편리한지는 시장반응이
반증하는지도 몰겠지만...
2003년 유럽에서의 노키아 시장 장악력은 독일하노버CeBIT전시장 규모와
전시관람자들의 인기로 절감할 수 있었지만 삼성의 기술력은 2004년 독일하노버CeBIT
전시장에서만큼은 노키아를 앞선 승리였다는 것이 관람자들의 대체적인 평이었다.
현재 삼성은 벤츠폰(SCH-E470)으로 유럽을 거의 삼켜버린 듯하다.
국내사용자들의 반응이 어땠을까가 약간 궁금한 폰이다.
하나의 코드로 고정된 듯한 매니아 그룹들은 제품개발에 영향을 미칠만큼 전문가적이고
열성적이다.
생산자들은 매니아 그룹을 적극적Tester로서의 활용과 제품출시이후 시장반응이전
그들의 반응에 더 신경쓴다고 한다.
그들로 인해 리콜을 당한 제품이 한두개가 아니라고 하니 매출실적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그들을 어찌 소홀히 응대하겠는가 말다.
여튼 이런 저런이유로 CDMA방식을 사용하는 국내사용자들이 직접 폰을 접하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는다...
http://www.uidesign.co.kr/에서 퍼왔어요~
이 공간은 앞으로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 GUI(Graphic user Interface)를
공부하는 곳으로 꾸며볼까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공부하고있는 분야의 전문성을 쌓는 의미에서,
이 공간을 들르는 분들에게는 HCI와 GUI라는 개념정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만들어보았답니다^^
열심히 해봐얄텐데....워낙에 다양한 분야에 관심은 가져도 깊이있게 한 우물을 판 경우가
별로 없어서 한계극복을 위한 다짐의 공간이 될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여하간 잼나게 공부해보자~
사전적 의미로 살펴보면 User Interface(사용자 인터페이스)란 사람과 시스템간의 접점,
또는 사용자와 각각의 시스템사이의 정보채널이라고 정의된다.
그러므로 User Interface Design은 보다 사용하기 편한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사용자와
시스템 사이의 상호 정보 교환의 문제점을 지각적, 인지적 측면에서 밝혀내고
이를 체계화하여 설계, 디자인하고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컴퓨터가 개발되고 상용화되면서 인간과 컴퓨터라는 독립된 두 객체 사이에 효과적이고
원할한 커뮤니케이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두 객체를 통합한 하나의 단일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중간 매개체로써
Interface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User Interface(사용자 인터페이스)란
용어가 파생되었다.
흔히 Interface는 서로의 관계에 있어서의 공유영역 혹은 커뮤니케이션 통로로써
우주와 우주인과의 관계에서의 우주복, 인간과 문의 관계에서의 손잡이,
또한 운전자와 자동차사이의 인터페이스는 차의 계기판과 변속기 등으
로 비유될 수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의 원활한 의사 소통을 위해 수많은 관계와의 좋은 인터페이스를
여러 각도로 요구하며 살고 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컴퓨터가 직.간접적으로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환경에서 컴퓨터와 인간사이의 인터페이스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 관계에 대한 개선은 필수적인
과제가 되어 여러 산업 분야에서도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한 연구의 한 영역으로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현재 HCI는 컴퓨터공학, 통신공학, 인간공학,
신호처리 패턴인식, 인공지능, 음향공학, 영상, 가상현실, 잡음처리, 감성공학 등
다양한 학문을 기반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간-컴퓨터 상호작용(Interaction)이 디자인 분야로 그 영역을 확대한 것은 모글리지
(Bill Morgridge)가 “인터랙션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사용성에 대한 연구’라는 새로운 디자인 영역을 낳으면서 부터이다.
이는 시간과 조작의 흐름을 고려한 사용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알기 쉽고, 보기 쉽고,
생각하기 쉬운 소프트웨어 개발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이후부터 사용성에 대한 연구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Client/Server 시스템이 등장하면서 개발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메시지의 전달 방법이
단순한 Text Base의 방식에서 상징적인 Graphic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예전에는 개발자가 시스템 개발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였으나, 현대의 개발자는
날마다 쏟아지는 신기술의 출현으로 더 이상 UI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에 따라 UI의 접근방식 또한 개발자인 시각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
평가하게 될 사용자의 입장에 대한 논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Web의 확장에 의해 시스템이 오픈 되면서 고객 수준이 향상되어 각 시스템별
차별화 방안이 필수적인 사항으로 대두 되었으며, 사용자가 쉽게 배우고 빨리 인식 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전문 영역이 필요하게 되었다.
PC의 가격대비 성능의 향상으로 컴퓨터의 보급율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개발 툴(4GL)의
Graphic Interface 기능지원이 확대되었다.
또한 인터넷 확산에 의해 기업의 그룹웨어가 고객의 요구사항에 따라 인트라넷, 익스트라넷
으로 변화해가는 실정이며, 더 높은 품질 향상을 요구하고 있다. 시스템의 거의 대부분이
더 이상 폐쇄적인 애플리케이션이 아니라 웹의 특성에 따라 정보가 오픈 되고 공유되면서
고객의 요구사항은 더욱 복잡 다양해지고 있다.
개발 방법론이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향상은 그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하다. 또한 개발 방법론이분업화 및 전문화 되어 화면 표준화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End-user인 현업과 개발팀간의 업무 협의에서의 논리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 분야가 사용자 요구사항과 개발 효율성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또한 개발 일정 단축과 System Interface의 일관성을 유지 시키고 타 System과의 제품차별화
및 고부가가치 창출의 필요가 절실한 실정이다.
시스템 개발에 있어서 전체 개발 비용 중에 유지보수에 관계된 비용은 80%가 UI와 관련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제이콥 닐슨은 만약 더 나은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고 더 엄격한 내부 디자인 표준이 강요되지 않는다면 전세계적으로 나쁜 인트라넷
사용성으로 인한 비용이 2010년까지 약 1000억불로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오늘날과 같이 웹이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게 되면서는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Zona Research는 이 커머스 회사들이 웹 페이지 때문에 좌절한 고객들로부터 한달에
5천 8백만불 이상을 잃고 있다고 산정했다.
시스템 개발의 처음부터 UI프로세스가 적용되어야 하며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사용자의
요구사항과 사용성을 높이는 시스템이 더 큰 기업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생각이 확산되었다.
시스템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HCI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 되었고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의
주요 요소를 이용하여 이를 표현하고 사용자를 직접 참여 시켜 여러 번의 사용성 테스트를
거쳐 사용성 향상의 문제 해결과 그에 따른 인간 공학 및 심리학에 바탕을 둔 감성공학적
연구와 시스템과의 상호관계를 해결하는 유저 인터페이스 디자인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되었다.
Yahoo.co.kr "프리다칼로" 지식검색 결과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화가. 코요아칸 출생. 1925년 버스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고 상처가 회복되는 동안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9년 벽화가인 D. 리베라와 결혼했다. 그와 함께 멕시코의 전통을 이어 강렬하고 화려한 색조의 그림을 그렸다. 43년 교육부 부설 미술학교인 라 에스메랄다에 회화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A. 브르통의 찬사를 받는 등 종종 초현실주의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코요아칸에 있는 그녀의 집은 현재 프리다 칼로 미술관이 되었다.
어찌나 간단명료에 건조한 설명인지...^^지식검색 이래도 되나요?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 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 중에서-
멕시코의 민중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로 더 유명했던 그녀.
디에고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상처 또한 컸을 꺼라는 짐작을 그림속 그녀의눈이
말한다....
대학시절 접했던 그녀의 그림은 끔찍했다.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손가락만으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해내는 작가의 그림은 그래서 더더욱 보는 이를
전율케한다.
최근 셀마 헤이엑 주연의 <프리다>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작가로 더 유명하다.
대학때 과커플이 있었지만 나중에 작가로 남는 이는
남성들이었다. 그 뒤에는 말없는 그녀들이...
로뎅과 카미유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남성들이 여성보다 작가적 능력이 특출나거나 뛰어나기
때문에...?
그녀들의 작품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그녀의 작품이 많이 실린 갤러리로 가세요~http://windshoes.new21.org/hall-frida.htm
그녀의 작품들이 오래볼수록 더 좋다....흐흠...
그의 붓놀림은 에너지 그 자체이다.
꿈틀거리는 저 밑바닥 심연을 지나 분출하듯 뿜어내는
저 붓놀림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희열이 보인다....
그 붓놀림의 질감을 맛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어찌 눈을 감을 것인가?
싸이월드에 2004년4월 올린 글이다.
ㅎㅎ....트랙백을 아직 잘 몰겠따...퍼날라올수밖에...
<매트릭스3 : 레볼루션>매트릭스단상
예술가는 자신의 창작물이 세상에 던져졌을 때 보다는 그것들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훨씬 더 많은 성취감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을 <매트릭스>를 보면서 느낀다.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 “아!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감탄을 연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21세기 SF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될 만한 여러 가지 형식적 새로움과
스토리의 철학적 깊이는 산업이라는 이름아래 예술이라는 감투 또한 씌울 수 있겠다는
가능성에 놀라고 놀랐던 것이다.
<매트릭스>가 신화가 되어가고, 드디어 2편의 영화가 뚜껑을 모두 열었지만
여전히 비판적이든, 찬사의 연발이든 사회적 논란의 핵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국내 철학자들은 <매트릭스>를 철학적 시각으로 풀이하고, 영화잡지에서는
감독, 비평가, 사회학자 등을 이용해 새로운 해석을 풀어내느라
지면이 모자랄 정도처럼 보인다.
워쇼스키 형제가 부럽다!
사회적 논란의 핵심이 될만한 작품을 쏟아내는 작가나 예술가는 별로 많지 않고,
세상은 공평하게도 그런 능력을 많은 이에게 부여하지는 않는 듯하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이 <매트릭스>이 주던 감동을 주리라고 기대했던
자신이 순진했다라는 생각을 영화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단지, 시각적 표현은 <매트릭스>나 <매트릭스, 리로디드> 이상의 발전,
또는 차별화가 있었다.
특히 시온에서 APU군단과 센트럴의 전쟁은 컴퓨터그래픽의 예술적 발전을
한단계 올려놓은 사례라고 본다.
영화관의 커다란 Screen은 컴퓨터그래픽의 실수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눈을 똥그랗게 뜨고 찾아보았지만 어느 한군데 어설픈 구석이 없는
환상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기갑로봇에 타고 전투하는 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감정이입의 오버였는지
아니면 너무나 실감나는 시각적 표현력 때문이었는지 나 스스로 전투에 지쳐
떨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 많은 센트럴을 어떻게 다 죽일란지... 난 이제 죽었다!”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참고로 AB형은 환상과 현실을 가끔 구분하지 못한다는 혈액형별 성격분석은
얼추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라 할 수 있지^^;;
가상과 현실을 뛰어넘는 제3세계를 권터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고 하고,
실재가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 (simulation)”이라고 했다.
“진실, 도덕, 권력, 신, 역사, 상상, 이데올로기, 삶과 죽음등에 의해 형상화되던
실재는 그의 기호, 이미지, 모형인 시뮬라크르에 의해 대체되어 파생실제로 변환한다.
이처럼 실재가 실재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이 시뮬라시옹이고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이 바로 시뮬라크르이다.”
무쟈게 어려워서 책을 그래도 옮겼다. 휴~
이 책 읽다가 머리에 쥐났었다. 물론 반은 이해도 못하고
그냥 넘기다 끝내는 다 읽지도 못했다.ㅎㅎ
여튼 각설하고, 현실과 꿈을 가끔 혼동하기도 하고,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해
환상 속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나약한 인간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실재하는 자신은 누추하나 환상 속의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어느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난 가끔 공간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꾸미는 버릇이 있다.
물론 결국엔 내가 그리는 환상을 현실화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취감의 짜릿함이란 꿈꾸는 자만이 알 것이다.
행복하다고 믿으면 그곳이 유토피아 이듯이, 가상세계를 지배하는 A.I(인공지능컴퓨터)는
인간이 혁명을 일으킬 것도, The one인 인간의 유일한 희망 “Neo”의 출현도 미리 예견하고
인간의 역사를 통제해 나간다.
가상과 현실이 구분되어지지 않는 상태를 씨네21에서 진중권은 미리 예견될것을
알고 있다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대립이라고 설명하더군.
내가 살아가는 주변환경도 그다지 나의 자유의지로 형성되지 않는 다는 것은
성인이 되고, 사회과학서적을 몇 권 읽고, 구조적 사고를 하면 누구나 알게 되는 사실이다.
"자유의지는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다"라고...
스미스는 어디에도 존재한다.
국가일수도 있고, 선생님의 모습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사회적 관습으로 변용되기도 하며,
학구적이고 부드러우나 바람둥이의 남친얼굴이기도...인심좋은 상사의 얼굴을 하기도 한다.
옘병할…..
대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세상살기 참 힘들다!
마지막으로, <애니매트릭스>가 주는 신선한 충격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매체가
주는 차별화가 감동의 변화 또한 가능하구나 였다.
인간의 상상력을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데 기술의 한계가 있거나,
매체의 특성이 작용한다.
애니메이션처럼 수동적 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건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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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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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T 저 정말 운 좋았던거 맞아요. 비슷한 경험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뒷자리를 사수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더라구요. -_-;; 새벽녘의 끔찍한 드라이브라니. 쩝. 미갱님도 행운이 자주 생기시기를 기대할께요.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