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美 언론 “세월호 참사 1주기, 진상조사 진척 없어”


UPI, ‘유민아빠’ 인터뷰로 진상규명 현주소 심층 타전
나혜윤 기자  |  balnews21@g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3.13  16:17:00
수정 2015.03.13  16:41:3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미국 <UPI> 통신이 45일간 극한 단식에 돌입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진상규명의 현주소를 심층적으로 타전했다.

외신 전문 번역매체 <뉴스프로>에 따르면, <UPI>는 11일(현지시간) 「답변을 얻기 위한 한 아버지의 싸움 :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유가족들이 여전히 세월호의 침몰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UPI>는 세월호 참사 당일 김씨가 사고 소식을 접했던 과정을 전하며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씨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분석한 후, 이준석 선장이 36년의 징역형을 받은 사실도 언급했다. 또한 진상규명에 있어서 화물 과적과 급변침이 침몰 원인이라고 추측만 할 뿐 정부가 확실한 답변을 유가족에게 내놓지 않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 전했다.

매체는 세월호 침몰과 같은 사건들의 원인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성균관대학교 경제학자 다니엘 슈베켄디에크는 <UPI>에 한국 역사상 최악의 공공재난 중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을 언급하며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규모 재난들은 경제적 현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의 간극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박찬운 한양대 법대교수의 “언론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가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대 분위기와 분노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을 전하기도 했다. (☞ ‘UPI’ 보도 보러가기) 

다음은 ‘뉴스프로’의 <UPI> 보도 번역 전문
번역 감수 : 임 옥

A father’s fight for answers: What caused South Korean ferry sinking?
답을 얻기 위한 아버지의 싸움: 세월호 침몰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인가?

By Elizabeth Shim | March 11, 2015 at 6:00 AM

In this undated photograph, Kim Young-oh, center, poses with his daughter Kim Yu-min, left, and Kim Yu-na. Kim lost his older daughter in the Sewol ferry sinking last year. He is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on the cause of the tragedy.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날짜 표시가 없는 이 사진에서 김영오씨는 자신의 딸 김유민(왼쪽)과 김유나와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씨는 지난해 세월호 침몰로 큰 딸을 잃었다. 그는 아직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Kim Young-oh as a younger father with his first daughter, Kim Yu-min, on left and Yu-na on right. Nearly a year later, Kim said he and other families are still seeking answers from the South Korean government regarding the capsized ferry Sewol. Photo courtesy of Kim Young-oh
왼쪽에 첫 딸인 김유민과 오른쪽에 김유나와 함께한 젊은 아빠 김영오씨.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씨는 자신과 다른 가족들이 여전히 전복된 세월호에 대한 한국 정부의 답변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Kim Yu-min, left, was on a high school field trip to Jeju island in South Korea when the ferry Sewol capsized and more than 300 passengers died. Kim Young-oh, her father, has become an activist after her death.
김유민(왼쪽)양은 세월호가 전복되고 300명 이상의 승객이 사망했을 당시 한국 제주도로 고등학교 수학여행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딸의 죽음 이후 활동가가 되었다.

SEOUL, March 11 (UPI) — Kim Young-oh, a divorced father of two, remembers the phone call he received on the morning of April 16 from his former wife.
서울, 3월 11일(UPI) – 이혼한, 두 아이의 아버지 김영오씨는 전 부인으로부터 4월 16일 아침에 받았던 전화 통화를 기억하고 있다.

“Are you watching the news?” she had asked in a worried tone.
“뉴스 보고 있어?” 걱정으로 가득한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Kim had not slept at all. In fact, he had been awake all night, rounding off a long night shift at an auto-parts plant, finishing work at 7:30 a.m. Before returning home for some rest, he had stopped by his neighborhood fitness center where he received the unexpected phone call.
김 씨는 전혀 잠을 자지 못했고,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오전 7시 30분에 끝나는 오랜 야간 근무를 마무리하느라 실제로 밤새 깨 있었다. 휴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집 근처 헬스클럽에 들렀고 그곳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그 전화를 받았다.

“There’s been a ferry accident,” she said. “And our daughter is on that boat.”
“여객선 사고가 있었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 딸이 그 배를 타고 있어.”

Kim turned to the nearest television. The broadcast confirmed the news.
김영오씨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TV를 향했다. 그리고 방송에서 그 소식을 확인했다.

But nearly a year later, Kim still doesn’t know the whole story.
그러나 거의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김 씨는 여전히 이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한다.

The sinking of the South Korean ferry Sewol killed more than 300, including Kim’s 17-year-old daughter, Kim Yu-min. He said the victims’ families have not received a conclusive explanation of what happened from the government. Since the November passage of a special bill that was supposed to pave the way for an investigation, efforts to establish the probe have only encountered obstacles.
한국 세월호 침몰로 김 씨의 딸인 17세의 김유민 양을 포함하여 3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정부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진상조사의 길을 열어주리라 기대됐던 세월호 특별법이 지난 11월에 통과된 이후 조사에 착수하려는 노력은 온갖 장애에 부딪혀왔을 뿐이다.

Overloaded cargo contributed to the capsizing of the boat when the captain made a sharp turn off the coast of Jindo, on the southwestern tip of the Korean peninsula, the South Korean news agency Yonhap reported. But why he made that abrupt–and fatal–change in direction has yet to be determined.
한국의 연합뉴스에 따르면, 과적된 화물이 한반도의 남서쪽 끝에 있는 진도 해안에서 선장이 급변침을 했을 때 배가 전복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선장이 왜 그런 갑작스럽고 치명적인 항로 변경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The ferry’s captain, Lee Joon-seok, was convicted of gross negligence in November, and sentenced to 36 years in prison for abandoning the vessel and leaving confused passengers to fend for themselves.
이준석 세월호 선장은 지난 11월 중대과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배를 버리고 나온 것, 또한 혼란에 빠진 승객들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둔 것에 대해 3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Most recently, an official probe into the accident’s cause has been hobbled by fractious disputes between South Korea’s political parties over the investigation committee’s structure.
가장 최근의 일로, 사고 원인에 대한 공식적 조사는 조사위원회의 구성을 놓고 벌어진 한국 정치 정당들 간의 성난 분쟁 때문에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다.

Kim told UPI that victims’ families have been accused of wasting taxpayers’ money even though they seek the passage of improved safety regulations.
김 씨는 희생자 가족들이 개선된 안전 규제법의 제정을 요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국민들의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고 UPI에 말했다.

For Kim, a deeply personal fight has become a public affair.
김 씨에게 있어 매우 개인적인 투쟁이 공적인 사건이 되어왔다.

Kim became a prominent figure when he staged a 45-day hunger strike in July and August. A daily subsistence of water and salt left him emaciated. After losing nearly 30 pounds, he fell ill and was hospitalized.
김 씨가 작년 7월과 8월에 4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그는 저명인사가 됐다. 하루하루 물과 소금으로 버티며 그는 여위어갔다. 거의 30파운드 가량 체중을 잃고 나서, 그는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됐다.

In response to his activism, Kim said some South Korean conservatives have lashed out at him, labeling him a pro-North Korean agitator, a dangerous accusation that pits Kim against South Korea’s draconian National Security Law responsible for the dissolution of a left-wing political party in December.
그의 활동에 대해서 일부 한국 보수파들은 맹렬히 비난하며 자신을 친북 선동가로 몰았다고 김씨는 말했는데, 이는 그를 작년 12월 좌파 정당을 해산시킨 한국의 혹독한 국가보안법과 맞서게 만드는 위험한 비난이다.

His request for a direct meeting with President Park Geun-hye was routinely denied. But but he briefly made world headlines when he secured a meeting with Pope Francis, whose trip to South Korea was marked by gestures of support for the families of Sewol victims.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는 일상적으로 무시됐다. 하지만 한국 방문 중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지지의 표현을 했던 프란시스코 교황과의 만남이 성사되었을 때, 그는 잠깐 세계뉴스를 장식했다.

Daniel Schwekendiek, an economic historian at South Korea’s Sungkyunkwan University, said the country’s position as one of the world’s poorest countries while facing a communist North Korea made economic growth the most important priority for South Korean leaders. Making haste, though, sometimes came at the cost of public safety, with the collapse of a Seoul bridge in 1994 and a department store in 1995 still remembered as some of the biggest public disasters on record.
한국 성균관 대학교 경제사학자 다니엘 슈베켄디에크는 공산주의 북한과 대치한 상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의 상황 때문에 한국 대통령들이 경제성장을 가장 우선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급속성장은 역사상 최악의 공공재난 중 몇몇으로 여전히 기억되는 사건들인 1994년 서울의 다리와 1995년 백화점의 붕괴 사건에서와 같이 공공 안전을 때때로 희생시켰다.

“Large-scale disasters such as the sinking of the Sewol tragically remind us that the economic versus social modernization gap has not been closed,” Schwekendiek told UPI.
“세월호 침몰과 같은 대규모 재난들은 경제적 현대화와 사회적 근대화의 간극이 해결되지 못했음을 비극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슈베켄디에크 교수는 UPI에 전했다.

Yonhap reported in October that diminishing passenger revenue prompted the ship operator, Chonghaejin Marine Co., to overload cargo against regulations.
10월에 연합뉴스는 여객 운임수익이 줄어드는 것 때문에 세월호 운영사인 청해진 해운이 규정을 위반하면서 화물 과적을 했다고 보도했다.

But Schwekendiek said that past disasters were not followed by critical voices that highlighted the negative effects of aggressive business interests.
그러나 슈베켄디에크는 과거의 재난들이 있은 후 급속히 사업이익을 내는 일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강조하는 비판적 의견들이 없었다고 말했다.

Born into rural poverty
빈곤한 시골에서 태어나

Like many South Koreans in the 1960s, Kim Young-oh, 46, was born into rural poverty, in an area that was so destitute there was “no access to transportation. Nothing to eat.”
1960년대의 대부분 한국인들처럼 46세의 김영오씨는 너무 궁핍해서 “교통편도 없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먹을 것도 없었다.”

Kim, along with his siblings, was sent away from home to a city where he could attend school. He dropped out at age 15 – beginning what he said were decades of trouble with money.
형제자매들과 함께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도시로 나가게 됐다. 그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그로부터 수십 년간 돈 문제로 인한 고난이 시작됐다.

When his first daughter, Yu-min, was born, Kim was beginning to struggle with his clothing store. He had borrowed substantially from banks, but was unable to pay his bills. He declared bankruptcy around the time of the 1997 Asian financial crisis.
첫 딸 유민이가 태어났을 때, 김 씨가 운영하는 옷 가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은행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지만 청구서들을 낼 돈이 없었다. 그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파산했다.

It was money troubles, Kim said, that led to his divorce in 2003. After decades of wandering from one temporary job to another, in 2012 Kim had a breakthrough: a full-time position with benefits.
김 씨는 2003년 이혼을 한 것도 돈 문제였다고 말했다. 임시직으로 이곳 저곳을 떠돌며 십여 년을 보낸 2012년 김씨는 돌파구를 찾았다: 그때서야 혜택이 주어지는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됐다.

“I remember telling my daughter then,” he said, “that I had good news…telling her that she can go to college now. We can afford to send her to university.”
“그때 우리 딸에게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고 그는 말했다. “좋은 소식이 있다고…내 딸에게 이제 너는 대학에 갈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너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된다고.”

Kim said Yu-min was good with numbers, excelling in her math classes. Two months before the ferry sinking, they talked about a career in banking after graduation.
김 씨는 유민이가 숫자에 강해서, 수학 성적이 좋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두 달 전, 유민양과 김 씨는 유민이가 학교를 졸업한 후 은행원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Things were looking up for his family, Kim said.
김 씨는 자기 가족의 상황이 나아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In search of Yu-min
유민이를 찾아서

On the morning of the accident, Kim and his ex-wife rushed to Jindo, where the rescue and recovery efforts were taking place.
세월호 침몰 당일 아침 김 씨와 김 씨의 전 부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진도로 급히 향했다.

“It took us eight days to be reunited with Yu-min,” he said, recalling identifying the body and complying with DNA tests before they could claim her.
“우리가 유민이를 다시 만나는 데에는 8일이 걸렸다”고 김씨는 말했다. 김 씨는 말하면서, 유민이의 시신을 인도받기 전 유민이의 시신을 확인하고 DNA 검사를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Kim said the rescue efforts were hindered by red tape, with rescuers denied entry into the waters to search for survivors and a lack of updates from the South Korean Coast Guard that left families speculating about the causes for the rescue’s delay. Families like Kim’s became frustrated, he said, as efforts were postponed.
김 씨는 구조 작업이 행정 절차에 의해 방해받았고, 구조자들은 생존자 수색을 위해 물속에 들어가는 일을 거절당했으며 해경은 구조 작업에 대해 최신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아서 유족들은 구조 지연의 이유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다른 유족들이 구조 노력 지연으로 좌절감을 느겼다고 김 씨는 말했다.

According to separate reports from Stars and Stripes and Japan’s Yomiuri Shimbun, the South Korean government declined offers of help from the U.S. Navy and Japan’s Coast Guard.
스타즈 앤 스트라이프스(역주: 미국 육군 기관지)와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의 별개의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미국 해군과 일본 해경의 구조 지원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Victims’ families have sought answers about their government’s inaction, but none have been given.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의 무대책에 대한 답을 찾고 있으나, 얻은 것이 없다.

Park Chan-un, a law professor at Hanyang University, told UPI that it will not be easy to move forward with special investigations because South Korea’s governing party has delayed providing answers that satisfy the victims’ families, and a general mood of opposition and resentment has formed toward the activists in the media and among conservative South Koreans.
박찬운 한양대 법대교수는 한국의 집권당이 희생자 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답변을 제공하기를 미루고 있고, 언론과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행동가들에 대한 전체적인 반대 분위기와 분노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에 특별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UPI에 말했다.

Kim, meanwhile, said he will push on for reform and answers from his government about regulatory oversight, a matter that the Korea Herald reported is being addressed in a new anti-corruption bill.
한편 김 씨는 개혁안이 받아들여지도록, 그리고 코리아 헤럴드가 보도한 대로 새 반부패법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규제 소홀에 대한 정부의 답변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According to the Herald, initial findings revealed South Korean maritime officials received kickbacks from the Sewol’s ship operator which may have contributed to the ferry violations.
헤럴드에 따르면, 초기 조사 결과에서 한국 해양 관료들이 세월호 선박 경영자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으며, 이 사실은 세월호의 위법 사항들이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했을 수 있다.

“Before the tragedy, I had no idea how lax Korea’s safety regulations were,” Kim said.
“참사 이전에, 나는 한국의 안전 규제가 얼마나 느슨한지 몰랐다”고 김 씨는 말했다.

“I have lost my daughter, but at the same time, I’m proud. Yu-min died for a movement to make Korea a better and safer society.”
“나는 딸을 잃었고,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랑스럽다. 유민이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그리고 더 안전한 사회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위해 죽었다.”

 

 
 
 

[관련기사]

 
나혜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추모 침묵행진 제안자 용혜인씨

"세월호 이후 공무원시험 준비 포기했어요"

[사람들이 만난 사람들 ①] "가만히 있으라" 세월호 추모 침묵행진 제안자 용혜인씨

15.03.13 21:11l최종 업데이트 15.03.13 21:11l

 

 

<사람들>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우리 사회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고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이야기를 기획해 인터뷰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 기자말

새봄이 왔지만, 갑자기 꽃샘바람이 불어 날이 추워졌다. 여전히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마다의 싸움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 사건과 희생자를 "잊지 말자"고 외치던 한 대학생이 세월호 1주기가 곧 돌아오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잊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다. 

지난 10일, 늦은 오후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청운관 카페에서 이제 스물여섯 살이 되는 용혜인씨를 만났다. 지난해 5월, 그녀는 검은 옷에 하얀 국화꽃과 "가만히 있으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그 침묵행진 때의 모습과 달리 그녀는 동그란 뿔테 안경에 편한 맨투맨 티셔츠와 양털 조끼를 걸쳐 입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4학년이 되고 나서, 먹고 살 길 찾기 위해 공무원시험을..." 
 
기사 관련 사진
▲ "가만히 있으라" 두 번째 침묵 행진 2014년 5월 3일에 있었던 "가만히 있으라" 추모 침묵행진에서 용혜인씨가 국화와 손피켓을 손에 들고 행진하고 있다.
ⓒ <사람들>

관련사진보기


- "가만히 있으라" 추모 침묵행진을 제안한 이후,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 왔나요?
"작년에 참 바쁘게 살았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4월에 침묵행진을 하며 세월호와 뗄 수 없는 시간을 1년 동안 살았어요. 6월 때까지는 '이윤보다 인간이다'라는 말을 하며 사람들과 침묵행진을 했었죠. 

6월에는 저도 학생이어서 기말고사를 보고 농활을 다녀왔습니다. 7월부터는 유가족이 광화문과 국회에서 단식을 시작해 국회 농성장에서 잠도 자고, 광화문 농성장에서 자고 그랬죠. 그러다가 8월 말부터 대학생들이 행진할 때, 같이 했던 기억이 나요. 

9월에는 개강 주에 수업을 반납하고 거리로 나와서 수많은 시민을 만나는 캠페인을 시작했죠. 11월 1일, '세월호 200일'에 버스를 두 대 정도 전세해서 100명이 좀 안 되는 대학생과 청년들과 함께 안산합동분향소에 갔던 기억이 나요. 3월 이후에는 개강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 참 바쁘고, 긴 한 해를 보내셨는데요. 겨울방학 때는 뭐하셨어요?
"1년 동안 살면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2015년에 대학에 입학하는 새내기들과 사회문제에 대해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고민할 수 있는 <안녕, 새내기>라는 행사를 준비해 3월 초에 했고요. 당일 행사에서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 간담회에서 사회를 봤어요. 사회를 보면서 고등학생 때, 세월호 참사를 겪었던 분들에게 그 일은 또 다른 의미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 많은 분들이 "가만히 있으라"의 모습으로 혜인씨를 기억하는데요. 일상에서의 혜인씨는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시간이 날 때는 드라마를 봐요. 최근에는 MBC 드라마 <킬미힐미>를 봤고, (웃음) 종영을 앞두고 있어서 열심히 보고 있어요. 학교에서는 작년에 침묵행진을 같이 했던 후배들과 자주 놀았어요. 매주 목요일에는 학회 동아리에 나가고 있고, 쉬는 날이 생기면 잠을 자는 편입니다."

-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군요. 취미가 있나요?
"이런 질문은 참 난감한데…. 저는 딱히 취미랄 것도 특기랄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드라마 보고 잠자는 걸 좋아합니다. 오랜만에 복학해서 수업을 열심히 듣고 과제하고."

- 사실, 청년들이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쉽지 않잖아요. 앞서 말한 것처럼 혜인씨는 지난 한 해를 세월호 참사 해결을 위해 바쁘게 살아온 것 같아요.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남다른 계기가 있나요?
"고등학교 때는 뉴스가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거든요. 예를 들면 고등학교 3학년 때, 2008년 촛불시위가 있었는데 그땐 한미FTA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만 나라가 잘 살고, 또 내가 잘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대학에 오면서 이런저런 주간지도 읽고 시사 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하는 동아리도 하면서 '내가 봤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좀 충격적이었던 사건이 있었어요.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김진숙이라는 여성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 올라가서 농성했죠. 그 사건을 계기로 노동 문제를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찾아보았죠. 그 이전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그랬던 걸 알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사회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었죠. 2012년에 4학년이 되고 나서,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다 해서 사실 공무원시험을 좀 준비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세월호를 만나면서 다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가장 큰 변화는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된 것"
 
기사 관련 사진
▲ 대학교 카페에서 만난 용혜인 "가만히 있으라" 제안자 용혜인 씨가 경희대학교 청운관 카페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사람들>

관련사진보기


- 청와대 홈페이지에 글도 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한 친구가 저한테 '너 이렇게 하면 부모님도 알게 될 수 있고, 경찰에서 어떻게 할 수도 있고…' 그랬어요. 시작하기 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죠. '설마, 뭐 이런 걸 가지고 언론에 주목을 받겠어'라고 생각하며 별 대수롭지도 않게 넘겼거든요. 해야 하니까 했던 거고, 뭐 어떤 큰 용기를 갖고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용기를 내고 큰마음을 먹고 그랬던 게 아니라."

- 어떻게 보면 세월호 참사라는 사건 이후, 예정에 없는 길을 걷고 계신 거잖아요. 주변의 관계나 삶이 변하기도 했을 것 같아요.
"가장 큰 변화는 할 일이 없었던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된 것이고요. (웃음) 정말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된 것 같은데. 사실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굳이 변화라고 한다면 공무원 시험을 딱히 준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 곧 있으면 세월호 1주기입니다. 세월호 이후 생활이나 생각에 변화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요. 앞으로 혜인씨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사는 일이 큰일이었고, '졸업해서 뭐해서 먹고 살지'  이런 게 고민이었는데 그때보다는 그 고민이 덜해요. 좋은 거 먹고 좋은 옷 입고 넉넉하게 남들처럼 사는 것보다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월호 이전과 이후에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내용이고, 왜 준비하게 됐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사람들>은 침묵행진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세월호 1주기를 그냥 보낼 수 없지 않느냐는 고민을 나누다가 만들어졌어요. 

세월호 1주기가 다가오는데 아직 인양조차 결정하지 못했고, 새해부터 설치된 세월호 진상조사위원회는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상태고, 여론은 관심 자체가 없어진 것 같고. 또, 세월호 이후에 유가족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세월호 참사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고통 받거나 배제된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배제된 사람들, 이 사회에서 같이 살지만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고 이야기가 된 거죠.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해서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세월호 유가족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 모아서 정말로 이 땅에 '싸우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잊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함께 하고 있고, 그럴 수 있다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그런 활동들을 같이 해나가는 게 목적인 프로젝트예요. 그 중 하나로 4월 4일 토크콘서트 <사람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 '잊지 않기로 약속'한 사람들, 여기 모이세요) 

- 좋은 일이네요.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또 우리가 찾아가야 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기억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스로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기억에서 잊히고.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기억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죠. 세월호 기억저장소 활동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의 활동을 하나의 '기억투쟁'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를 바꾸는 데 큰힘이 될 수 있겠다 하는 걸,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많이 느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함께할 때 그런 사람들이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잊지 않는 사람들로서 이 <사람들>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김영길 기자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사람들>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연재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미 해군 기밀문서에 드러난 천안함의 의문

 
[천안함 5주기] 잠수함 전문가 안수명씨, “에클스 조사단장에 침몰날짜 왜 틀렸냐 물었더니 묵묵부답”
 
입력 : 2015-03-12  17:44:28   노출 : 2015.03.13  15:28:58
 

천안함 침몰원인을 밝히기 위해 3년 여 동안 미해군과 정보공개 소송을 벌이고 있는 미 잠수함 전문가 안수명 전 안테크 대표가 천안함 5주기를 맞아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침몰 확률 자체가 모순이라고 밝혔다.

또한 안 전 대표는 2010년 천안함 국제조사단의 미군측 조사단장으로 왔던 토머스 에클스 미 해군 제독이 작성한 보고서에 천안함 사고 날짜가 이틀 앞선 것(2010년 3월 24일로 표기)과 관련해 에클스 제독에게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했다. 

안 전 대표는 12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에클스 제독에게 ‘천안함이 2010년 3월 26일이 아닌 24일 침몰했다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메일을 보냈으나 아직도 답이 없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는 5년 동안 해소되지 않은 대표적인 의문점에 대해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 북한 잠수함이 쏜 어뢰가 움직이는 천안함을 탐지하고 추적하여 버블제트(Bubble Jet)로 천안함을 침몰시킬 확률(이 모순)”이라며 “또한 이승헌 미 버지니아대 교수와 서재정 전 존스홉킨스대 교수(현 일본 국제기독교대 교수)가 주장한 흡착물질 의혹 등”이라고 꼽았다.

천안함 5주기가 됐는데도 여전히 의혹이 해소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안 전 대표는 “합조단 보고서가 비과학적이고 비양심적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안수명 전 안테크 대표.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는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미해군을 상대로 정보공개 소송을 벌인 끝에 에클스 제독 등의 이메일 자료 1500페이지 가량을 제공받는 등 일부 성과를 얻기도 했다. 안 전 대표는 “내가 소송에 약 100만달러(10억 원)이상을 들여 미정보 자유법에 의거하여 얻은 정보를 보면 이러한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안 전 대표가 확보한 미 해군 자료를 보면, 에클스 제독조차 천안함 흡착물질 분석결과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군 조사단장이었던 에클스 제독은 지난 2010년 천안함 최종보고서 초안에 대해 7월 13일 한국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알루미늄 산화물(백색물질) 논의는 천안함이 북한 어뢰에 격침됐다는 것과 관련해 (굳이) 입증할 필요가 없으며, 과학적 타당성에 대한 의심이 훨씬 많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에클스는 “한국에서 실시한 테스트를 믿지 않는 우리쪽의 부식관련 전문가들은 의심을 제거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그들은 ‘비결정성 알루미늄 산화물이 평상시 바닷속 부식이 이뤄지는 환경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한국조사결과에) 반하는 증거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전했다.

에클스는 “나는 이 섹션을 아예 없애거나 부록으로 밀어넣기를 추천한다”며 “이런 증거를 뒷받침하는 모든 케이스가 드러난다면 당신은 신뢰를 잃을 것이며 나는 그런 접근법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토마스 에클스 천안함 미군측 조사단장(해군제독)이 2010년 7월 13일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 안수명 박사가 미 정보자유법 소송을 통해 얻은 미 해군자료.
 

안 전 대표는 천안함 진실규명과 관련해 최근 자신의 경험을 들어 여전히 북한이 아니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전했다.

“한 2주전에 Washington DC 에서 ‘Sony Hacking(소니 해킹), 천안함의 유사점과 틀린점’ 이라는 강연을 했다. 누군가가 ‘그래 북한이 아니면 누가 했소’라 질문하길래 ‘저는 모릅니다’라 했더니 ‘빨갱이 아냐’라고 반문이왔다. 지난해 11월 24일 Sony Hacking 사건에 대해 당시 내가 ‘증거를 대라’, 며칠후, ‘미국이 북한의 IT를 Hacking 해서 안다, Sony Hacking이 미국의 자작극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라’고 했을 때도 답이 없다. Sony Hacking과 천안함의 경우 북한이 안했다고 증거를 댈 필요가 없다. 남한이나 미국이 북한이 했다는 증거를 대야 한다. Sony Hacking, 천안함의 경우 북한은 안했다고 말했다.”

천안함 5주기와 관련해 안 전 대표는 “합조단의 보고서는 비과학성과 비양심성을 나타내고 있으나 이승헌 교수, 서재정 교수, 김소구 지진연구소장 등 양심적 학자들이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가진다”고 전했다.

안 전 대표는 샌디에고에 거주하고 있는 잠수함과 어뢰, 미사일 등의 신호처리-관리 분야 전문가이다.

   
토마스 에클스 천안함 미군측 조사단장(해군제독)이 2010년 7월 13일 국방부에 보낸 이메일. 안수명 박사가 미 정보자유법 소송을 통해 얻은 미 해군자료.
 
 
조현호 기자의 트위터를 팔로우 하세요. @ mediacho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경찰,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 발표

“김기종,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으로 범행 착수”경찰,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 발표
김수정 기자  |  girlspeace@mediau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입력 2015.03.13  11:28:36
싸이월드 공감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네이버 구글 msn

경찰이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경찰은 김기종 씨의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을 범행동기로 파악했다며 김기종 씨를 살인미수, 외국사절 폭행,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 송치하겠다고 밝혔다.

   
▲ 경찰은 13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김기종 씨의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사진=YTN 속보 캡처)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는 지난 5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조찬 강연을 준비 중이던 마크 리퍼트 주미대사에게 접근해 그를 쓰러뜨리고 과도 등 흉기를 사용해 오른쪽 얼굴과 왼쪽 손목에 상처를 입혔다. 경찰은 13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 수사 본부장인 김철준 경무관이 브리핑을 맡았다.

경찰은 김기종 씨의 ‘반미’와 ‘북한 동조’ 성향이 범행동기가 됐다고 보았다. 경찰은 “피의자는 1997년 서울시민문화단체 연석회의를 설립하고 우리마당통일문화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주로 통일, 반미와 관련된 활동을 전개해 왔다”며 “과거 행적과 현장 발언 등을 볼 때 반미 성향이 대사를 공격하는 극단적인 행위로 이어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또한 △1999년부터 2007년까지 7회에 걸쳐 북한을 다녀온 점 △2011년 12월 김정일 분향소 설치를 시도하는 행사에 참가한 점 △2013년 이후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 본부 등이 소속된 전쟁 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을 주최하고 공격적 한·미 연합상륙훈련중단 촉구 기자회견에 참가한 전력이 있는 점 △범행 직후에도 한·미 연합훈련 때문에 통일이 안 된다는 취지 주장을 하는 점 △조사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미국에 예속된 반식민지 사회이고 북한은 자주적인 정권으로 생각한다고 진술한 점 등으로 미루어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이 이번 범행으로 이어졌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찰은 “피의자는 부인하고 있지만 위해를 가하기 위해 칼을 가지고 갔다고 진술하고 있고, 대사를 발견하자마자 실행에 착수한 점, 칼을 머리 위까지 치켜든 후 내리치듯 가격했다는 목격자 진술, 강한 공격이 최소 2회 이상 이어진 점, 위험한 신체부위인 얼굴에 길이 11cm 깊이 3cm 상해를 입힌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살인 고의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범행 직후 및 호송 과정에서 주장한 훈련 중단 등의 발언이 피의자의 과거 활동과 연계돼 있어 공범과 배후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행적수사 과정에서 북한 방문이나 이적단체인 범민련 남측본부 등으로 구성된 단체가 주최한 친북 성향의 집회에 참석했고, 유인물 내용과 같이 미군 철수, 전쟁 훈련 반대 등피의자의 주장이 북한 주장에 동조한 측면이 많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관련 수사도 착수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김기종 씨를 살인미수·외국사절 폭행·업무방해 혐의로 구속 송치할 예정이다. 공범 및 배후 여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향후 수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김기종, 북한 동조 및 반미 성향으로 범행 착수”
 
     · '냄새를 보는 소녀' 신세경, 이미지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
 
     · ‘삼시세끼’의 성공비결, ‘정글의 법칙’에 모두 있었다?
 
     · '사상 최저 수준' 1%대 금리 시대, '독배'일 가능성 크다
 
     · EBS 다큐프라임 제작진, ‘올해의 PD상’ 수상
 
김수정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초, 집값 고꾸라진다

[선대인 칼럼] 지금 빚 내서 집 사는 사람들 특히 위험… 물량폭탄 덮을 부채폭탄 임박
 
입력 : 2015-03-12  13:35:57   노출 : 2015.03.13  09:50:33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 | battiman@hanmail.net   
 

수도권 2차 부동산 폭등이 일어난 2006년부터 분양가상한제 시행 앞둔 2007년까지 건설업체들 앞다퉈 분양물량 쏟아냈죠. 2008년 봄 "뉴타운광풍"이 불었죠. 그 때 아무도 "부동산 불패"를 의심하지 않았을 때 제가 부동산 폭락 가능성을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2008년 하반기 집값이 급락했고, 2006~2007년 분양됐던 아파트들의 물량 폭탄이 쏟아지면서 부동산시장을 더욱 내리눌렀죠.  

2008년 말 수도권 중심으로 집값이 단기 급락했다가 2009년초부터 이명박정부의 대대적 부양책으로 집값이 다시 급반등할 때 많은 이들이 인천 청라 등지의 분양 물량과 강남 재건축에 뛰어들었죠. 그때 저는 "부동산 막차에 올라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2009년 10월이 고점이었고, 수도권 집값은 그 때부터 2012년 말까지 내리막길 걸었습니다. 하우스푸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습니다. 

자, 다시 정부와 언론에서 "집값 바닥"이라고 소리칩니다. 2006년 이후 1,2월 거래량이 사상 최대라고 떠들죠. 여기에는 분양권 전매제한 풀린 물량도 상당량 있고, 2000년대 초반 거래량이 파악되지 않아 비교대상에 들지 않아 사실 사상 최대는 아닙니다. 

   

▲ 부동산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대 후반, 한 아파트 청약 현장에 몰려든 인파. ⓒ 연합뉴스

 

 

그런데 확실한 사상 최대는 두 가지 더 있죠. 이 기간 동안 늘어난 주택담보대출은 사상 최대입니다. 이건 대한민국 역사상 사상 최대입니다. 주택 거래건당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이 사상 최대입니다. 부동산 폭등기였던 2006년 하반기에 비해서도 두 배입니다. 그런데 2006년엔 14% 이상 뛰었던 집값이 지난해엔 겨우 2.5%였습니다. 이 난리를 치고도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상 최대는 2000년대 이후 사상 최대 분양 물량이 올해 쏟아진다는 겁니다. 집 살 수요가 많이 있어서요?  글쎄요. 한 언론 보도에 인용된 건설업계 관계자 말입니다. "이런 장세가 짧게는 6개월, 길어도 1년 이상 가기 힘들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경쟁적으로 서둘러 물량을 쏟아내는 것" 건설업체 관계자가 이렇게 말하면, 잠재 수요자들은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요? 

자 지금 말씀드리는 이런 것들이 모두 뭘 의미하느냐고요? 일부 언론에서 지금부터 2,3년 후에는 "물량 폭탄" 때문에 집값이 다시 가라앉을 거라고 얘기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길게 잡지 않습니다. 집값이 하락할 주원인도 물량폭탄이 아니라 부채 부담 때문일 거고요. 제가 2013년 말 출간한 "미친 부동산을 말하다"에서 2~3년이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1~2년 정도 안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아직까지는 그 전망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올해 말~내년 초 정도까지는 집값이 다시 가라앉는 걸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데자뷰가 있습니다. 1991년 일본에서 부동산 거품이 붕괴했고 이후 3~4년 동안 일본 정부는 대규모 토건 부양책을 펼쳤습니다. 그래도 안 되자 1994~1996년부터는 제로금리와 각종 세제혜택, 가계부채를 동원해 일본 가계들로 하여금 집을 사게 부추겼습니다. 많은 일본 국민들도 집값이 고점에 비해 상당히 빠진 것 같고, 이자 부담도 낮으니 분양대열에 뛰어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지금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 뒤는 일본의 길을 따라갈지 아닐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일본의 결론의 말씀드리면,  1997년 부동산 2차 버블이 붕괴했고, 1994~1996년에 분양대열에 뛰어들었던 많은 일본 국민이들이 하우스푸어로 전락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양상을 똑같이 따라갈지는 미지수입니다. 하지만, 가계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최근에는 그 속도가 훨씬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연내 미국발 금리 인상 가능성은 갈수록 가능성이 높아지는군요. 미국 금리 인상 가능성이 살짝 높아지기만 해도 환율이 급등하는 나라에서 언제까지 금리를 낮은 상태로 묶어둘 수 있는지 의문이군요. 다만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지금 무리하게 빚을 내 집을 사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는 것 말이죠.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꼭 잡는다, 14년 전 여고생 강간살인범”

등록 : 2015.03.12 20:06수정 : 2015.03.13 08:42

툴바메뉴

기사공유하기

보내기
 
영화 ‘살인의 추억’

전·현직 형사들 뭉친 ‘미제사건 포럼’

2001년 2월4일 전남 나주시 드들강 유역에서 여고생 박아무개(당시 17살)양의 주검이 발견됐다. 피해자의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박양과 아는 ㄱ군은 “그날 새벽 광주 남구의 한 식육점 앞에서 박양이 20대 남성 두 명과 얘기하는 걸 봤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주검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액이 발견됐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3년 전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났다. 그는 이미 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다. 다른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아무개(38)씨한테서 채취한 디엔에이(DNA)가 박양 주검에서 나온 것과 일치했다. 그러나 마지막 목격자 ㄱ군이 ‘김씨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진술하고, 김씨 역시 범행을 부인하면서 사건은 다시 미궁에 빠졌다. 검찰은 김씨를 불기소 처분했다. 2016년 2월3일까지, 이제 공소시효는 1년도 남지 않았다.

 

박아무개양 사건 첫 대상으로
나주 드들강서 주검 발견뒤 ‘미궁’

 

3년전 수감자 유전자 검사 도중
DNA 일치 유력 용의자 나왔지만
증거불충분 이유로 불기소처분

 

“오래된 사건이라 해도 주변에
보이지 않는 증거는 남아 있다”
주변조사 등 단서 찾아나서

 

전·현직 베테랑 형사 5명과 범죄학자, 변호사가 팀을 만들어 이 ‘콜드케이스’(미제사건)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장기미제사건을 풀어가는 여형사가 주인공인 미국 드라마 <콜드케이스>의 ‘한국판’인 셈이다.

 

고병천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
지존파 사건 등을 수사했던 고병천(66) 전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반장이 중심이 돼 지난해 12월 꾸린 ‘미제사건포럼’은 박양 사건을 첫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 11일 만난 고씨는 “30년 형사 생활을 하면서 한 건의 미제사건도 남기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범죄학 박사 학위를 받은 것도 예전부터 이런 일을 해봐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씨는 지난달 광운대에서 범죄단체 구성원의 행동 패턴을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후로 수사본부까지 꾸려졌지만 결국 범인을 찾지 못해 장기미제로 분류된 것은 ‘대구 황산테러 사건’(1999년) 등 모두 20건에 이른다.

 

미제사건포럼이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공소시효가 채 1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12월 살인죄 공소시효가 15년에서 25년으로 늘었지만, 2001년에 발생한 이 사건에는 기존 15년 시효가 적용된다.

 

고씨는 “유전자가 일치하면 거의 범인이 맞는데,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씨를 조사한 게 사건이 나고 10년도 더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목격자가 부정적 진술을 했다고 해도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고씨는 특히 유력한 용의자 김씨가 2명을 살해해 복역 중인 사실을 눈여겨보고 있다. 범죄 패턴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살인도 알코올중독과 똑같다고 보면 돼요. 범죄를 저지르면 불안하고,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다른 범죄를 또 저지르죠. 일단 교도소에 들어가면 수사 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되고요.” 고씨가 박사학위 과정 중 쓴 부논문의 제목도 ‘살인중독’이다.

 

미제사건포럼은 박양 가족을 접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4년이 지났지만 가족 얘기를 듣다 보면 당시에는 놓친 중요한 단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고씨는 “용의자와 같은 방에 수감된 사람들 얘기도 들어보면 큰 도움이 된다.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범인이) 안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역이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10년이 지난 사건이라도 ‘보이지 않는 증거’는 남아 있어요. 현장은 물론 피해자 주변이 말해주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습니다.” 미제사건 해결팀엔 과거의 미제사건도 현재진행형이다.

 

서영지 기자 yj@hani.co.kr

 

드들강 여고생 살인사건

 

2001년 2월4일 여고생 박아무개양이 전남 나주시 남평읍 드들강 유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은 익사였지만 목이 졸리고 성폭행을 당한 흔적이 발견됐다. 2012년 살해죄로 복역 중인 김아무개씨의 디엔에이가 박양 주검에서 나온 것과 일치했지만 증거가 부족해 무혐의 처분됐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술번복으로 생성된 ‘정윤회 알리바이’ 그 의혹들

 
 
허위 진술 밝혀낸 증거를 졸지에 알리바이로 둔갑시켜
 
육근성 | 2015-03-12 13:55:57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대통령 7시간 행방’과 관련된 기사를 쓴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검찰이 이 사람을 기소하기 위해서는 정윤회씨로부터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보해야만 했다. 알리바이를 찾아내야 했던 검찰은 우선 정씨를 검찰로 불렀다.  

가토 기소위해 필요했던 ‘정윤회 알리바이’ 

검찰이 ‘4월 16일 행적’을 묻자 정씨는 알리바이를 입증하기위해 자신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제출하며 이런 얘기를 한다.  

“(세월호 참사 당일) 특별한 일이 없어서 집(신사동)에 있다가 저녁 6시경 신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난 게 전부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면 그날 자신의 행적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신사동집-통화내역-가사도우미’를 내세워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려 했던 정씨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그가 평창동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 발신기록(4월 16일 14시20분)이 나왔기 때문이다. 알리바이가 허물어진 것이다. 이렇게 끝날 경우 가토 지국장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이 불가피할뿐더러, ‘박근혜 7시간 행방’에 대한 논란은 더욱 뜨거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  

다급해진 검찰이 움직였다. 하지만 태도가 상식 밖이었다. 허위사실을 알리바이로 만들려 했던 정씨를 소환하지 않고 전화로만 조사를 했다. 1차 전화조사는 정씨가 검찰조사(2014년 8월 15일)를 받은 지 4일 뒤에 이뤄졌다. ‘16일 14시20분 평창동에서 휴대전화 사용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정씨에게 알려주며 사실 여부를 확인한 게 전부다. ‘진술과 다른 증거가 나왔다’는 사실을 통보해준 거나 마찬가지다.

 

정윤회 진술 사실과 달라...다급해진 검찰 

이후 10일쯤 지나서다. 8월 말경 담당검사가 정씨에게 전화를 해 ‘평창동 발신기록’에 대해 묻는다. 이것이 2차 전화조사다. 이때 정씨는 ‘4월 16일 11시부터 2시20분까지 평창동 지인 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돌아왔으며 저녁 6시경 약속돼 있던 친구들을 만났다’고 말한다. 진술 번복 정도가 아니다. ‘평창동 발신내역’에 꿰맞춘 새 진술이 나온 것이다. 

2차 전화조사 2주 뒤인 9월 15일. “정윤회는 평창동 지인의 집에 있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된다. 대부분 언론매체가 검찰 당국자의 말을 인용해 이 같은 보도를 앞다투어 내보냈다. 정씨의 새로운 주장을 알리바이로 굳히기 위해 언론을 활용한 것으로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윤회 알리바이’는 이렇게 만들어졌고 가토 지국장은 10월 초 불구속 기소된다. 정씨의 진술 번복과 새로운 주장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본 검찰에 의해 생성된 알리바이다. 하지만 이 알리바이는 뜯어볼수록 의혹투성이다.

진술번복으로 생성된 알리바이는 의혹투성이 

▲의혹1: 정말 ‘평창동 점심약속’을 기억하지 못했을까?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은 또렷이 기억하면서, 40분 정도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던 고명한 역술가와의 점심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욱이 모든 국민이 기억하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그날 아닌가.  

▲의혹2: 정씨가 만났다는 평창동 지인(이상목씨)의 주소지는 종로구 부암동. 그런데 세월호 참사 당일 정씨를 만났다고 진술한 그 시점에 갑자기 주소지가 평창동으로 옮겨진다. 왜 일까?

<정씨 지인 이상목씨(역술인) 평창동 집>

▲의혹3: 정씨와 이씨의 진술이 엇갈린다. 당일 정씨가 평창동 이씨 집을 방문한 시간과 그 집에서 나온 시각, 두 사람이 서로 알게 된 경위, 연락을 주고받은 빈도수 등에 대한 증언이 일치되지 않는다.  

▲의혹4: 검찰의 전화조사도 미심쩍다. 첫 번째 전화조사와 두 번째 조사는 10일 간격을 두고 진행됐다.첫 전화는 정씨가 제출한 통화내역에 진술 번복이 불가피한 증거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두 번째 전화는 정씨에게 뭔가 준비할 시간을 준 뒤에 형식적으로 이뤄진 조사가 아닐는지. 

▲의혹5: ‘정씨가 당일 청와대로부터 멀리 있었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형제봉 아래(평창동4XX 번지)에 위치한 이씨 집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이동해도 청와대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분 정도.거리로는 15km다. 택시를 탈 경우 7000~8000원 요금이 나온다. 세검정을 거치지 않고 북악스카이웨이를 이용할 경우 10분 이내 청와대에 도착할 수 있다. 물리적·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도 알리바이가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의혹6: ‘평창동 알리바이’의 단서가 된 당일 14시20분 발신 내역에 대한 조사도 부실하다. 누구와 통화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정씨 휴대전화에는 세월호 참사 전날인 15일 14시19분부터 평창동 발신이 확인된 14시20분 이전까지 24시간 동안 발신기록이 전혀 없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의혹7: 애당초 정씨가 주장한 1차 알리바이가 허위라는 걸 밝혀낸 증거(평창동 발신내역)가 외려 2차 알리바이를 형성하는 재료로 활용됐다. 알리바이가 ‘신사동-가사도우미’에서 ‘평창동-지인(역술인)’으로 졸지에 둔갑된 상황이라면 검찰은 ‘합리적 의심’의 눈초리로 정씨를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검찰은 정씨와 이씨의 말을 그대로 믿어 정씨의 번복된 주장을 알리바이로 인정했다. 언론플레이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허위진술 입증한 증거가 알리바이로 둔갑 

의문이 생긴다. 정씨가 ‘당일 집에 있었다’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통화내역에 ‘평창동 발신’이 들어있었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  

관련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 채 통화내역을 검찰에 제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세월호 참사 전후 24시간 동안 정씨의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보면 발신 내역이 하나도 없다. 그러다보니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생각에서 14시20분 발신 사실까지 잊었던 모양이다.  

‘당일 14시20분 평창동 발신’은 정씨의 알리바이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자 동시에 검찰이 인정한 알리바이의 결정적 단서이기도 하다. 이 알리바이가 2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휴대전화 발신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당일 청와대와 부근에 있었던 정씨에 대한 의혹을 모두 해소하는데 충분하다고 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22&table=c_aujourdhui&uid=49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일 인사 이름 딴 광주 '백일로' 사라진다

 

광주 서구청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 사용"

15.03.12 19:48l최종 업데이트 15.03.12 19:48l

 

 

기사 관련 사진
▲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을 딴 도로명 '백일로'가 오는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 사용된다.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념회관 소재지가 친일인사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로'라는 사실이 지난해 11월 뒤늦게 확인됐다. 백일로 외에도 백일초등학교, 백일 어린이공원 등이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일초등학교 , 이름도 조만간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관련사진보기


친일 장교출신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한 광주광역시 서구 '백일로'가 '학생독립로'로 변경된다(관련 기사 : '친일 김백일' 이름 딴 지명, 개명 요구 잇따라).

12일 광주 서구청(구청장 임우진)은 "친일인사 명칭 사용으로 논란이 제기됐던 백일로 도로명 변경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라며 "16일부터 '학생독립로'로 변경해 사용한다"라고 밝혔다.

서구청은 지난해 12월부터 백일로 명칭 변경을 위한 추진계획을 수립, 주민의견 설문조사 등을 실시한 바 있다. 지난 2월 '도로명주소 심의위원회'를 개최해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하기 결정했다. 이후 백일로 외 3구간 주소사용자(화정동) 주민 665명 중 460명(69%)에게 서면동의를 받아 도로명 변경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다. 

서구청은 도로명 변경에 따라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을 교체하고 주민들에게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발송할 예정이다.

백일로 도로명 변경과 함께 김백일의 이름을 딴 백일초등학교도 학교명 변경을 추진 중이다. 지난 1월 광주광역시교육청(교육감 장휘국)은 교명 변경협의회를 열고 '백일'초등학교를 대신할 새이름 후보로 성진, 백범, 독립초등학교 3개를 선정하고 학교 측에 추천했다. 백일초등학교 명칭 변경은 관련 조례 개정 절차를 거쳐야 하며, 3월 말쯤 변경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회관이 위치한 백일로, 백일초등학교, 백일산 등이 1930년대 간도특설대 장교출신 인 김백일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개명 요구가 잇따랐다.(관련기사 : "광주 '백일로' 유래는 친일파 장교 김백일")

김백일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을 뿐만 아니라,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강점 말기 친일반민족행위 관련자' 704명의 명단에도 오른 인물이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김백일은 한국전쟁 영웅으로 숭상받고 있으며, 서울 전쟁기념관·경남 거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전남 장성 육군보병학교 등에 그의 흉상과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전자쓰레기 ‘수도’ 꾸이위…사산율 4배 높고 아이큐 8점 낮아

  • 분류
    아하~
  • 등록일
    2015/03/12 16:34
  • 수정일
    2015/03/12 16:34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이동수 2015. 03. 12
조회수 204 추천수 0
 

전체 가구의 80%가 폐기물 재활용…가공과정서 유해물질 노출, 환경오염도 심해

처리비 싸고 규제 느슨한 개도국으로 이동, 세계 전자폐기물 중국 70%가 중국으로

 
ewaste1.jpg» 외국에서 수입된 다량의 전자폐기물 때문에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광동성 뀌이위의 한 집에 전자폐기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사진=그린피스 

전자폐기물이란 글자 그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텔레비전이나 개인용 컴퓨터, 게임기, 휴대전화기,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과 복사기, 프린터, 팩스기, 전선 등 사무용 전기·전자제품들이 폐기되면서 발생한 쓰레기이다. 
 
마을 전체가 전자폐기물로 덮여있는 것 같은 중국 광동성의 꾸이위는 외국으로부터 다량의 전자폐기물을 수입하여 국제적으로 오명이 높은데, 쓰레기 수출입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재활용 명목으로 수입되어 이 지역까지 오게 된 전자폐기물은 돈이 되는 성분이 회수될 때까지 종종 대규모로 야적 보관이 되기 때문에 토양과 인근 하천, 지하수가 그 쓰레기로부터 침출된 유해물질로 심각하게 오염이 된다.

 

ewaste_greenpeace_guiyu-woman-river.jpg» 꾸이위의 한 주민이 개울가에 전자폐기물이 쌓여있는 하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다. 사진=그린피스
 
또한 돈이 되는 성분은 보호 장비 하나 없는 환경에서 단순작업을 통해서 회수된다. 인구 15만 정도의 이 지역에서 전체 가구의 80% 정도가 전자폐기물 재활용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회로 기판 속의 납 등 다수의 중금속과 환경호르몬인 가소제(프탈레이트)와 방염제(PBDEs), 미세먼지, 작업에 사용되는 화학물질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ewaste-2.jpg» 꾸이위의 작업자들이 휴대전화의 회로기판을 분해하고 있다. 사진=Xia Huo et al.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 VOLUME 115_NUMBER 7, July 2007  

 

또한 이때 배출되는 유해물질들은 당연히 주변 환경을 오염시킨다. 돈 되는 것을 어느 정도 빼낸 이후 더는 쓸모가 없어진 쓰레기들은 종종 노천에 그대로 투기하거나 들판에서 태워서 처리한다. 
 
이렇게 버려지면 장기간에 걸쳐 유해한 화학물질들이 스며 나오게 되고 또한 태우는 과정에서는 유독한 불완전 연소물이 발생하여 주변을 오염시키며 지역 주민들의 건강까지 위협하게 되는데, 플라스틱이나 전선 피복의 소각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이옥신류 화합물이 그러한 대표적 오염물질이다.

 

ewaste3.jpg» 꾸이위의 산을 녹이는 공장에서 노란 증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사진=Xia Huo et al.,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 VOLUME 115, NUMBER 7, July 2007. 
 
실제로 꾸이위 지역에서 한 환경오염조사와 주민건강조사는 심각한 결과를 보여준다. 먼저 납, 카드뮴, 다이옥신, PBDEs, PCBs 등 다양한 유해물질에 의한 대기, 토양, 하천, 우물물의 오염도가 국제적인 기준치나 타 지역의 오염도를 훨씬 초과하는 수준이다.2) 
 
예를 들어, 다이옥신에 의한 대기오염도는 전 세계에서 관측된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65~2,765 pg I-TEQ/m3),3) PBDEs의 경우 그다지 깨끗하다고 할 수도 없는 도시인 홍콩의 약 300배 이상의 대기오염도(최고 16575 pg/m3)가 관측되었다.4) 
 
ewaste4.jpg» 전자폐기물을 인두로 녹여 유용 성분을 분리하고 있는 꾸이위의 여성 작업자. 사진=Xia Huo et a.,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 VOLUME 115, NUMBER 7, July 2007.

 

중금속에 의한 대기 오염도 심해서 이 지역의 도로변 대기 중 분진 중 납 함량수준은 무려 2만㎎/㎏으로서 이는 세계 여러 도시의 도로변 분진 중 평균 납 함량의 대략 50배, 미국 전 지역의 표토 중 납 평균 함량의 약 800배 수준에 해당하는데, 더욱 놀랍게도 전자폐기물 처리작업장 내의 분진 중 함량은 도로변 분진의 5배 이상의 농도에 달했다.5) 
 
강물에서는 그 지역의 음용수 수질 기준의 8 배를 초과하는 납 오염(0.4 mg/L)이,6) 강바닥의 퇴적층에서는 유럽과 북미 국가의 10~1000배 이상 수준인 1만6000 ng/g의 고농도 PBDEs 오염이7) 각각 보고되었다.

 

ewaste_greenpeace_guiyu-child-wires.jpg» 전자폐기물 더미 속에 있는 꾸이위 어린이. 사진=그린피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 계란, 닭고기, 생선, 어패류, 채소 등 먹거리의 오염도 또한 심각하다.8) 이러한 먹거리의 오염 때문에 꾸이위 지역주민의 하루 PBDEs 섭취량은 전자폐기물 재활용산업이 없는 도시의 최소 21배에서 최고 481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평가되었다.9) 
 
또한 사람의 혈액, 머리카락, 태반, 제대혈, 모유 등의 조사결과는 환경과 먹거리의 심한 오염으로 인해 인체오염도도 매우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데,10) 그 때문에 일반 지역에 비해 4배 이상 높은 사산율을 보일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경우 저체중 발생 빈도가 1.5배 이상 잦았으며, 키도 1.4㎝정도 더 작은 것으로 나타났다.11)  
 
ewaste_greenpeace_guiyu-girl-lighter.jpg» 라이터 불로 전자폐기물에서 쓸만한 부품을 녹여내고 있는 꾸이위의 한 여성. 이 과정에서 유해물질 증기가 폐를 통해 혈관으로 흡수될 우려가 크다. 사진=그린피스

 

또한 아이큐 점수로는 5~8점 정도에 해당하는 지능저하 가능성,15 유전자 손상 가능성 등이 추정되고 있어서 건강에 대한 심각한 악영향이 이미 나타나고 있거나 혹은 그 잠재적 가능성이 우려되는 수준에 있다.12) 
 
오늘날 돈과 상품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대규모로 이동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쓰레기도 마치 하나의 상품처럼 이들과 같이 활발하게 국경을 넘나든다. 
 
심각하게 저평가된 것으로 추측되지만 전 세계 60여개 국가들이 유엔에 보고한 폐기물의 수출입량이 2003년 한 해에만 대략 760만t에 이른다고 하며 그 양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이다.13) 
 
ewaste_Zinneke _800px-0ld_keyboards.jpg» 세계화는 쓰레기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 국가 사이를 이동한다. 사진=Zinneke, 위키미디어 코먼스

 

쓰레기의 국가 간 이동이 이렇게 활발한 이유는 결국 돈 때문이다. 즉, 나라마다 쓰레기 관련 규제수준과 경제적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쓰레기 관리비용의 차이가 크다. 
 
보통 잘 사는 나라가 상대적으로 가난한 나라보다 규제수준과 관리비용이 높기 때문에 자체 처리가 만만치 않은 쓰레기를 가난한 나라로 내보내서 처리하려는 강한 경제적 동기가 늘 있다. 
 
그러나 이런 쓰레기의 수출은 사실상 처리가 곤란한 쓰레기를 가난한 나라에 헐값으로 떠넘기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수입국에서는 느슨한 환경규제와 뒤떨어진 기술 탓에 쓰레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환경오염과 피해를 크게 가중시키게 된다. 

ewaste6.jpg» 폐기물이라도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아프리카 가나의 전자폐기물 집하장 사진=marlenenapoli,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러한 문제를 줄이기 위해 특히 유해폐기물을 중심으로 쓰레기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바젤협약이 만들어졌지만 불법이든 합법이든 규제를 피하여 쓰레기는 여전히 국가에서 국가로 떠넘겨져지고 있다. 규제를 피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는 재활용이라는 미명하에 쓰레기가 국경을 넘어 거래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석탄재 등 쓰레기를 재활용 혹은 에너지회수 등의 명목으로 수입하여 시멘트 제조과정에 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금속으로 오염된 시멘트가 주택건설에 사용되어 문제를 일으켰다.14) 
 
꾸이위의 경우처럼 최근 들어 재활용이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의 국가 간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표적 쓰레기는 전자폐기물이다. 이 가운데 특히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동전화기와 노트북 컴퓨터, 탁상용 컴퓨터 등 개인용 전자제품의 쓰레기들이다. 
 
그 사용대수 자체가 대단히 많을 뿐만 아니라(2011년 전 세계에서 사용 중인 휴대전화기만 자그마치 60억대로 추정15)), 판매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내구성이 짧게 생산되기도 했으며, 빠른 신기술 개발속도와 신제품으로의 교체를 부추기는 판매전략 탓에 외국에서도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교체주기가 각각 3년, 2년 정도에 불과하다.16) 
 
이렇게 빠르게 교체된 제품들은 해 마다 엄청난 양(유엔개발계획 추정 연간 약 2000만~5000만t)의 쓰레기로 바뀐다. 그러나 2~3년 정도 사용된 것이라면 교체됐다 하더라도 사실상 거의 그대로 재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며, 이들 가전제품의 내부에는 금, 은, 팔라듐, 코발트, 구리, 인듐 등 회수하면 돈이 되는 재료와 부품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폐기 이후에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납, 수은, 비소, 카드뮴, 크롬, 리튬, 주석, 베릴륨 등 유해한 중금속과 프탈레이트류 가소제, 방염제, 인, 석면 등 유해물질들이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잘 사는 나라일수록 폐기량은 많은 반면 재사용 수요는 거의 없고, 돈이 되는 것을 회수하여 얻는 이익보다는 그에 필요한 비용이 더 크며, 또한 높은 규제수준 때문에 쓰레기의 유해성분을 처리하는데 돈이 많이 들어 처치가 곤란해 폐기물을 수출로 둔갑시켜 처리하려 한다.  
 

반면에 가난한 나라에서는 수입되는 중고품의 재사용 수요도 상대적으로 크다. 또한 싼 임금을 기반으로 단순노동을 통해 돈이 되는 것들을 회수하고 나머지를 그냥 내다 버리듯이 대충 처리할 수 있으니 장사가 된다. 

ewaste_640px-Ewaste-delhi.jpg» 인도 델리의 전자폐기물. 폐기물은 인건비가 싸고 규제가 느슨한 곳에서 상품으로 둔갑한다. 사진=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러한 조건에서는 부자 나라에서 버려진 전자폐기물이 재활용 명목으로 가난한 나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는 한편으로는 지구적 차원에서 자원의 재활용이란 순기능을 담당하는 면이 없진 않지만, 그 과정에서 가난한 나라에서는 작은 경제적 기회를 얻는 대신 부자 나라가 짊어져야할 심각한 건강피해와 환경오염을 떠안게 된다. 
 
아리 그림에서 대략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휴대전화와 개인용 컴퓨터 등 전자폐기물을 외국으로 가장 많이 떠넘기는 나라들은 미국과 유럽 국가이며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도 떠넘기는 나라에 속한다. 
 
ewaste_graph.jpg» 알려져 있거나 추정되는 전자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경로(연녹색: 수출국가, 적색: 수입국가), 그림=UNEP

 

한편, 세계 전자폐기물의 70%, 아시아 전자폐기물의 90%가 흘러 들어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이 압도적인 수입국이며 더불어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와 가나, 인도와 파키스탄, 동남아의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남반구 국가들이 주요 수입국이다. 
 
중국 꾸이위 지역뿐만 아니라 전자폐기물은 이를 떠안은 곳에서는 어디든 예외 없이 큰 문제를 일으킨다(유튜브에서 “e-waste“로 검색하면 여러 수입국의 실상에 대해 생생한 동영상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사실 얼마나 많은 양의 전자폐기물이 어떤 경로로 수출입되고 있는지 자국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나라조차 없다. 
 
우리나라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재활용 명목으로 국내에서 수집된 전자폐기물의 80% 정도가 중국으로 다시 수출되는 것으로 겨우 추정하고 있고, 유럽의 여러 항구에서 불법으로 전자폐기물을 수출하려다 적발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현황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갈 길이 매우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자폐기물의 국제적 이동, 즉 세계화에 따른 문제를 살펴보았으나 이러한 문제가 반드시 전자폐기물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1997년에 북한이 돈을 받고 대만의 핵폐기물을 처리한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17)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방사능으로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는 폐콘크리트, 석탄재, 고철과 슬래그 등이 제대로 검사되지 않은 채 수입되어 왔고 특히 후쿠시마사고 이후에 그 지역에서 배출된 고철을 다량 수입했다. 
 
이렇게 일본을 비롯하여 외국에서 수입된 폐기물이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면 이것들이 결국은 도로나 주택 등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18) 2011년 서울시 노원구의 월계동에서 발견된 아스팔트 도로의 방사능 오염19)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하게 우리의 주변 생활환경을 방사능으로 오염시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사례는 전자폐기물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유해한 쓰레기들이 무책임하게 국제적 이동을 하고 그로 인해 모르는 사이에 우리도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해 준다. 
 
필요에 따라 구매하고 소비하는 내 생활이 나도 모르게 다른 나라 사람들의 건강피해나 환경파괴에 일조할 수 있으며, 거꾸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의 결정이 내게도 피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줄이거나 예방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소비할 때마다 당장 필요한 내 욕구를 누군지 알 수도 없는 타인의 피해를 고려해 억제하는 일이 쉽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 세계가 동의한 ‘제 쓰레기를 남에게 떠맡기지는 않겠다’는 약속(1992년 바젤협약)을 우리가 지키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경계하는 일은 필요하다.

 

이동수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환경과 공해연구회 운영위원


 
  
 

1)  1. Li Y., et al. Sci. Total Environ. 2008a, 403:99-104.

2) 2. Chatterjee R. Environ. Sci. Technol. 2007, 41:5577-5577.  3. Li HR., et al. Environ. Sci. Technol. 2007, 41:5641~5646.  4. Deng WJ., et al. Environ. Int. 2007, 33:1063~1069.  5. Leung AOW., et al. Environ. Sci. Technol. 2008, 42:2674~2680.    6. Wang JP., et al. Biomed. Environ. Sci. 2006, 19:137~142.    7. Luo Q., et al. Sci. Total Environ. 2007, 383:115~127.    8. Li B., et al. Energy Procedia 2011, 5: 2527-2531.  9. Chen DH., et al. Environ. Pollut. 2009a, 157:1051-1057. 

3) 3. Li HR., et al. Environ. Sci. Technol. 2007, 41:5641~5646. 

4) 4. Deng WJ., et al. Environ. Int. 2007, 33:1063~1069. 

5) 5. Leung AOW., et al. Environ. Sci. Technol. 2008, 42:2674~2680. 

6) 6. Wang JP., et al. Biomed. Environ. Sci. 2006, 19:137~142.

7) 7. Luo Q., et al. Sci. Total Environ. 2007, 383:115~127. 

8) 10. Zhao GF., et al. Environ. Geochem. Health 2006, 28:341-351. 

9) 11. Chan JKY., et al. Sci. Total Environ. 2013, 463~464:1138~1146.

10) 1. Li Y., et al. Sci. Total Environ. 2008a, 403:99-104. 12. Chan JKY., et al. Environ. Sci. Technol. 2007, 41:7668-7674.  13. Qu WY., et al. Environ. Int. 2007, 33:1029~34.  14. Huo X., et al. Environ. Health Perspect. 2007, 115:1113~1117.  15. Zhao GF., et al. Sci. Total Environ. 2008, 397:46~57.  16. Li Y., et al. J. Environ. Monitor. 2008b, 10:1233~1238.  17. Zheng LK., et al. Environ. Res. 2008, 108:15~20.  18. Wu K., et al. Environ. Sci, Technol. 2010, 44:813-819. 

11) 14. Huo X., et al. Environ. Health Perspect. 2007, 115:1113~1117. 

12) 1. Li Y., et al. Sci. Total Environ. 2008a, 403:99-104. 16. Li Y., et al. J. Environ. Monitor. 2008b, 10:1233~1238.  17. Zheng LK., et al. Environ. Res. 2008, 108:15~20. 19. Liu Q., et al. Environ. Sci. Pollut. Res. Int. 2009, 16:329~338.  20. Herbstman J. et al. Environ. Health Perspect. 2010, 118: 712~719. 

13)  21. http://www.basel.int/Countries/NationalReporting/StatusCompilations/CompilationPartII(2003)/tabid/1510/Default.aspx.  

14) 22.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697077. 

15) 23.  http://www.basel.int/Implementation/TechnicalAssistance/Partnerships/MPPI/Overview/tabid/3268/Default.aspx.  

16) 24. Brett HR. Sci. Total Environ. 2009, 408:183-191.

17) 25.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70214091100680. 

18) 26.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505604.html.

19) 27.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503855.html.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세월호 인양 주저하는 정부... 정치적 꿍꿍이 있다"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터뷰 210] 정성욱 세월호가족대책위 인양분과장

15.03.12 11:19l최종 업데이트 15.03.12 11:19l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지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갈수록 언론 보도가 적어 여론 주목도가 낮아지고 있다. 아직도 세월호 안에는 9명의 실종자가 남아 있다. 가족들은 실종자의 뼈라도 찾아야겠다고 인양을 촉구하지만,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세월호가족대책위와 국민대책위는 지난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안산에 있는 정부 합동분향소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장장 450km다. 대부분 반별로 나눠 걸었지만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행사 뒷이야기가 궁금해, 지난 5일 도보 행진을 기획한 세월호가족대책위 인양분과장을 맡은 정성욱씨를 안산합동분향소에서 만났다. 정성욱 분과장은 단원고 희생자인 정동수군의 아버지다. 다음은 정 분과장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  세월호 단원고 희생자 고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씨
ⓒ 이영광

관련사진보기


- 지난 1월 26일부터 2월 14일까지,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까지 도보 행진을 마쳤는데 소감이 어땠나요?
"도보 행진하면서 많은 국민이 아직도 세월호를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걸 느꼈어요. 또, 진실 규명과 희생자 수습에도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학생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아, 학생들도 여기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참 고마웠고, 그래도 아직까지는 살 만한 나라라고 느꼈어요."

- 시민들은 어떤 얘기를 하던가요?
"시민들이 하는 얘기는 두 가지예요.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어떻게 하면 빨리 돌아오게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와 세월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등을 궁금해하세요."

- 도보 행진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인양분과 TF는 진도에서 관련한 업무를 도와주는 팀이었죠. 수색이 지난해 11월 11일에 종료돼 인양분과로 바뀌었어요. 인양에 대해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돌아오지 못한 9명이 (마음에) 걸렸어요.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미안함을 덜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도보 행진을 기획하게 되었어요. 또 하나는 세월호에 대해서 언론이나 정치권 그리고 정부가 입을 다물었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어서 고민하게 됐어요."

- 실종자 가족들 반응은 어땠어요?
"실종자 가족들은 많이 좋아하셨어요. 그분들도 아이를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잖아요. 저희는 찾았지만, 그분들은 못 찾았잖아요. 간절하다 보니 많이 호응해 주고 참여도 많이 해 주었어요. 특히, 다윤이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몸이 아프신 데도 같이해 주셨어요."

- 도보 행진은 단원고 유가족만 했나요? 아니면 일반인 유가족도 참여했나요?
"도보 행진은 단원고 유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화물 피해자 그리고 생존자까지 다 같이 참여했어요."

- 반별로 구간을 나눠서 걸은 것 같은데.
"1월 26일에 시작해서 1반부터 하루씩 반별로 돌아가면서 걸었어요. 마지막 2월 14일은 진도에서 전체 가족이 걸어서 팽목항에 들어갔어요."

- 완주자도 있나요?
"완주자는 저를 포함한 단원고 학부모 16명,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1명입니다. 일반 시민도 6명이나 되요."

- 처음부터 완주할 계획이셨나요?
"저는 처음부터 완주할 계획으로 시작했어요. 반별로 나눈 것은 지금 회사에 다니시는 분도 계시고, 가족 대책위 분들도 각자 맡은 일이 있고 해서 나누게 되었어요."

- 완주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처음 3일이 가장 힘들었어요. 평소 회사하고 집만 알던 사람들이 하루에 23~26km를 걷다 보니까 온몸에 무리가 온 거예요. 특히, 어머니들은 더 그렇죠. 운동한다고 해도 10km도 못 걸을 때가 많잖아요. 하루에 그만큼 걷는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은 아니죠. 그러다 보니까, 처음 3~4일은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다리가 붓고, 물집이 생기고... 그 이후에는 오히려 달라졌죠. 포기를 안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죠. 아프면 아픈 대로 걸었어요."

- 중도에 포기하신 분은 안 계세요?
"한 분도 안 계세요. 앞서 말씀드린 분들이 처음부터 완주자로 나섰죠. 거기에 유가족이지만 스태프로 옆에서 지켜보신 분들이 7명인데 그분들 포함해서 전부 완주했어요."

-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개인적으로 생각한 것은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 왜 거리로 나와서 시민들을 상대로 억울한 죽음을 밝혀 달라고 하소연하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나'였어요. 정부에서 해상 사고라고 하는데... 맞아요. 일종의 사고잖아요. 사고가 나면 사고를 처리해 주는 게 정부의 일이잖아요. 

교통사고만 나도 보험사가 와서 처리하죠. "배를 인양하겠다"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데 안 하잖아요. 한편으로는 '이러면 안 되지, 우리 아이들 어떡하나? 어떻게 해서든지 억울한 죽음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또,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가족은 어떻게 하나?' 등 등 여러 생각을 했어요. 한 번 더 사고에 대해 뒤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도보 행진 수확은 국회의원들 입을 열었다는 거예요"
 

기사 관련 사진
▲  세월호참사 실종자 조은화양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월호농성장에서 도보행진 서명결과 발표 및 4.16국민연대제안 기자회견에서 '세월호를 인양하라'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한숨을 내 쉬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 도보 행진 후에 정부에서 무슨 얘기가 있었나요?
"정부는 아직도 아무 얘기가 없어요. 다만 그동안 국회의원들이 입에다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는데, 도보 행진 후에 입을 열었어요. 대부분 인양하는 쪽으로 말을 해요. 새누리당 같은 경우에는 당정청 회의로 논의해 주겠다고 해 논의되는 상황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원내대표께서 한목소리를 내주겠다고 했어요. 이번 도보 행진에서 큰 수확이라면 국회의원들의 입을 열었다는 거예요."

- 도보 행진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뭔가요?
"저희가 행진할 때, 일부 시민들이 '보상 다 받았는데, 왜 저래?' 하는 식의 눈빛을 보냈어요. 하지만 저희는 보상을 받지 못했어요. 시민들의 그런 눈빛과 야유에 (마음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서 많이 울었죠."

- 도보 행진을 할 때,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아요.
"특히, 전라도 쪽에서 큰 감동을 받았어요. 경기도나 충청도에선 그냥 지나갔는데, 전주와 정읍에 들어갔을 때는 에피소드가 참 많았어요. 그리고 광주와 나주, 전주에서는 초중고 학생들이 나와서 '힘내'라는 피켓을 들어 주었죠. 전주 풍남문에서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저금통을 깨서 유가족에게 주었는데, 큰 감명을 받았어요. 정읍에서는 고2 학생들이 3반 어머니들과 함께 걸어서, 그때 어머니들이 많이 웃었죠. 아이들이 저희를 위해서 노래도 부르고 위로해 줄 때, 눈물이 많이 났어요."

- 현재 세월호 인양문제는 어떻게 되어 가나요?
"정부에서 인양 발표만 해주면 되는데, 계속 질질 끌고 있어요. 전 세계적인 인양업체들이 계획까지 세워서 준비하는 상태라고 들었어요.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정부만 인양 여부에 대해 말을 안 해요.

지난 1월 23일에 전남 목포시 삼학부두에서 현대보령호가 해양탐사를 했어요. 저희 생각엔 정부 측에서 시간을 끌기 위해 작업한 거라고 생각해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죠. 이미 9월에 그 작업은 했어요. 그 데이터만 가지고도 충분히 인양 가능성이 나와요. 또, 인양업체가 결정되면 그 업체가 들어와서 다시 조사를 해야 해요. 그러니까 정부는 시간 끌기용 작전을 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어요."

- 그렇게 보는 이유는 뭐예요?
"정치적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지만, 있을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내년 총선을 대비한다고 봅니다. 가족 입장에서는 거기까지 내다봐요."

- 세월호가 커서 인양이 쉽지 않다고 하던데요?
"세월호가 큰 건 저희도 인정하지만, 인양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해요. 현대보령호에 탑승한 영국 조사 전문업체 에이더스(ADUS)사 관계자들도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 인양에 돈이 많이 든다고도 하는데 어떤가요?
"세월호는 돈과 따질 수 없는 문제로 봐야 해요. 세월호 안에는 아직도 9명이 있잖아요.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 전쟁 유해 발굴을 계속하잖아요. 우리 정부도 그들을 국민으로 생각한다면 돈 문제를 떠나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정부와 새누리당이 지난해 여름에 인양하자고 했을 때 가족들이 거부했잖아요. 만약 그때 가족들이 찬성했다면 달라졌을까요?
"그 당시 인양에 대한 보고서가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부는 그 보고서를 다 거부했어요. 7개 업체가 인양하겠다고 보고서를 냈는데, 다 거절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 플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 지난 4일, 김재원 새누리당 의원은 조사특위를 '탐욕의 결정체'라고 막말했는데...
"저는 무시합니다. 막말에 다 대응하고 신경을 쓰다 보면 제가 스트레스 받아서 뭔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개가 짖는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영광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영광의 언론, 그리고 방송 이야기'(http://blog.daum.net/lightsorikwan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단박 인터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

"'나쁜 여인' 박근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단박 인터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직분은 봉사자고, 종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면, 왕처럼 행세합니다. 1인 독재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잘못된 역사의 산물입니다. 대통령도 우리 중의 하나입니다. (국민 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를 찾았다. 지난달 28일 있었던 집회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낸 함 신부는 '정의'에 대해 물었다.  
 
"5세기경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던 성 아우구스티노가 신국(神國)론에서 국가 공동체의 기본적 가치로 '정의'를 설파하며,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집단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선언했다"는 것. 2012년 대선과 관련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9일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법정 구속된 일이 벌어진 가운데, 전임 대통령이었던 이명박도, 그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도 '침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함 신부는 강조했다.  
 
함 신부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아버지와 같이 폭압을 휘두르는 박근혜 대통령을 폭압에서 구원시켜야 하는 게 종교인으로의 신학적 사명"이라고 했다. 이어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의 폭압에서 그 자신을 해방시켜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게 해야 한다"며 그런 점에서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을 되찾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 이행'에 대한 비판이 곧 박 대통령에겐 '폭압자'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  
 
함 신부는 이어 더 긴 안목을 주문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시대가 바뀌는데 10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우리 사회도 지금 '100년 전쟁' 중에 있다"며 "민주주의 실현과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해 더 고민하고, 연대의 틀을 키워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음은 지난 6일 있었던 5번째 '단박인터뷰' 주인공 함 신부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 함세웅 신부. ⓒ프레시안(최형락)

▲ 함세웅 신부. ⓒ프레시안(최형락)  

 
 
"현 정권, 기초가 부실하다" 
 
프레시안 : 지난달 28일 주말 집회에서 박근혜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함세웅 : 어른들이 흔히 '좋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던가, '큰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나라 전체를 말하긴 너무 거창하기 때문에 현 정권에 대해서만 얘기하면, 기초가 제대로 된 정권이 아닙니다. 국가나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며 국민으로부터 그 권력을 위임받은 것인데, 국민의 뜻을 왜곡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사심과 집단적 탐욕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는 종교인으로서 '사건을 근원적으로 접근하자'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9일 국정원법 위반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법정 구속됐습니다. 지난 대선이 불법·관권 선거라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한 것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큰 책임이 있고, 이에 덕을 본 현 정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법원은 판결한 것입니다. 2012년 12월 대선후보 TV 토론회 당시 박근혜 후보는 '국정원 여직원 댓글 사건'에 대해 '인권 침해'라며 자신과 거리를 뒀습니다. 그러나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구속으로 국가기관의 대선 불법 개입이 분명히 입증됐습니다.  
 
선거를 통해 구성한 정부가 정당성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것은 공동선에 위배되는 것이며, 또한 선열에 대한 모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정치민주연합(구(舊) 민주당)도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있으며, 동시대를 살며 침묵하고 있는 우리 모두도 책임져야 할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5세기경 로마 제국의 멸망을 지켜보던 성 아우구스티노가 신국(神國)론에서 국가 공동체의 기본적 가치로 '정의'를 설파하며, '정의가 없는 국가는 강도 집단과 똑같은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런 근원적인 문제를 국민과 정치인들, 특히 법조인들이 깊이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고위공직자 후보자 인사 검증 때 수구·부패 언론은 '도덕적 잣대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도덕이 기초가 안 되는 정치·사회가 어떻게 존립할 수 있습니까? 부패하고 불의한 자를 최고 공직자로 선출하는 것을 정상적인 국정수행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에게 양심·도덕·정의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초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건물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프레시안 : 1987년 민주화 운동 이전에는 관건 선거가 노골적으로 있었지만, 법원의 판결로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이 드러난 것은 처음입니다. 도덕과 정의 차원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함세웅 : 참 부끄럽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정치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가장 아름다운 예술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도둑들이 하는 것'이라는 혐오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이 새로운 것을 창작할 때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합니다. 정치도 예술이니까 잘못된 것을 찢고 과감하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회개'와 '정화'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패로 인한 염증과 고름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프레시안 :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유권자가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지금도 30%대 지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함세웅 : 지지율의 허구성을 먼저 지적하고 싶습니다. 부정·관권 선거였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쨌든 대선 당시 부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결과는 분명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안타깝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종교인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 원론적인 것을 얘기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이 '정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朴 대통령, 폭압에서 해방시켜야…"  
 
프레시안 : 박근혜 정권의 인사 문제 등을 볼 때 우리 사회가 87년 체제 이후 합의한 여러 기준이 그 이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함세웅 :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서는 법이 정한 권한이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합니다. 인사권자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대통령 후보자 시절 국민에게 약속했던 것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자신의 공약을 100% 실천하는 정치인이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공약을 아랑곳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민주공화국에서 대통령의 직분은 봉사자고, 종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면, 왕처럼 행세합니다. 1인 독재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된 잘못된 역사의 산물입니다. 대통령도 우리 중의 하나입니다. (국민 곁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권력자의 오만한 자세는 수덕(修德)이 부족한 자격지심인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연민의 정도 느낍니다. 인격이 부족하고 정직하지 못한, 그리고 그가 스스로 설정한 올가미(함정)에서 해방됐으면 참 좋겠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설정한 올가미'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함세웅 : 가톨릭도 1960년대 이전에는 아주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를 넘어오면서 역사와 시대 앞에서 '교회가 하느님 앞에 정직한가'라며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역사적으로도 부족하고 죄인이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그 교회 공동체가 정화되고 위대해집니다. 이때 비로소 하느님의 백성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에 교회 공동체는 담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아름다운 교회관을 확인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또는 인간 공동체 안에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이 중 악한 사람, 특히 '폭압자를 배척해야 하느냐, 껴안아야 하느냐'를 고민하게 되는데 껴안아야 합니다. 그러나 껴안을 때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압력을 행사한 당사자가 바로 자신의 인간성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뉘우치고 속죄해야 합니다. 
 
현실에서 '박근혜'라는 실체는 폭압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5000만 남한 국민의 폭압자입니다. 40년 전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 시대의 폭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아버지와 싸웠는데, 또 그의 딸과 싸워야 한다니…. 참,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아니, 아버지와 같이 폭압을 휘두르는 그 여인을 폭압에서 구원시켜야 하는 게 종교인으로의 신학적 사명입니다.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의 폭압에서 그 자신을 해방시켜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게 해야 합니다. 그가 대선 후보 시절 국민에게 약속했던 것의 의미를 되찾게 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 모습을 되찾을 때 제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타락한 모습입니다.  
 
프레시안 : 정치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별명 중 하나가 '선거의 여왕'이다. 박 대통령 스스로 (대선 공약을 어겼다는 이유로)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함세웅 : 정치적으로 능한 게 아니라, 일종의 '언어유희'이자 '언어의 오염'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지만, 사실 단어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으로 자연 그대로 있어야 할 강만 오염된 게 아닙니다. 정치인이 말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면서 좋은 언어가 오염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 정권에서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나치 강제수용소 체험 수기를 쓴 책 <죽음의 수용소>(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펴냄)와 <의미요법>(이봉우 번역, 분도출판사 펴냄)을 생각합니다. '의미요법'(로고테라피, Logotherapy)은 '말씀의 치유'라고 하는데, '난 살아야 한다. 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살아야겠다'라고 의지와 희망을 갖고 끝까지 버틴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근거로, 현 정권 5년을 '역사'라는 큰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는 50년, 100년, 또는 1000년 단위로 기록하지 않습니까? "희망이 없다"는 이 시대와 집권자에 대해 역사학자나 문학자가 기록할 때에는 '그때 그 사람 참 나쁜 여인이었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그가 지난해 8월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불러 국장과 과장 이름을 거론하며 "참 나쁜 사람이더라"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등에 비춰보건대) 그런 사람입니다. 
 
거시적 안목으로 100년 이후를 생각하면서 현 정권을 평가하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종북 몰이, 정의와 평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증거"  
 
프레시안 : 지난 5일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요? 정치적 의사 표출이 굉장히 폭력적으로, 돌발적으로 터져 나온 경우입니다.   
 
함세웅 : AP통신과 <뉴욕타임스>가 지적하듯 한미연합훈련이 남북 관계의 걸림돌이 된다거나, 미국 보수 성향 매체 <워싱턴프리비컨>과 일본 <아사히>신문 말대로 미국 국무부 웬디 셔먼 정무차관의 발언(2월 말 워싱턴DC 카네기 국제평화연구소 세미나에서 '한중일 3국의 과거사를 덮고 가자'는 취지의 말을 함)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동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됐습니다. 
 
김기종 씨를 여러 회합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살아온 과정에서 상처가 많이 쌓여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균형 감각을 상실한 분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객관적으로, 의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피습 사건을 김 씨 개인의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시대적 책임이라는 연대 의식 속에서 성찰해야 합니다. 본인도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고 했습니다. 또 이를 새누리당과 집권세력, 수구집단이 말하듯 '종북 몰이'로 가서는 더욱 안 됩니다. 특히 무슨 일만 생기면, 만능 통치 약인 양 '종북이다'라며 손가락질하는데, 객관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습니다. 국제적으로 시선이 집중된 사건인데, 세계인들에게 한국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줘야 합니다. '종북 몰이'는 비인간적·야만적 왕따 놀이, 정신병자와 같은 비정상적 행업입니다. 성숙한 문화인의 기본과 양식을 갖춘 정치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국가 공동체 구성원이자 종교인으로서 어떤 사안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 즉 종북으로 몰아가는 폭언은 오히려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아무리 건강한 주장이라고 해도 폭언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여러 관점에서 공동체 전체가 대처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6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하느님 앞에 김기종 씨와 리퍼트 대사 두 분과 공동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일간베스트(일베)에서 활동하는 고등학생이 '신은미·황선 토크 콘서트'에서 사제 폭탄을 터뜨린 사건, 또 일베 게시판에 여성과 호남 출신을 비하하며,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어묵'에 빗댄 일 등 '종북'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혐오가 늘고 있습니다.   
 
함세웅 : 경찰이 '사제 폭탄 사건' 같은 경우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습니다. 사건만 보면, 참 못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를 보도하는 언론 또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미국의 <크리스턴 사이언스 모니터(Christian Science Monitor)>라는 언론은 '이 뉴스가 청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생각해 그리스도적 관점에서 보도한다고 합니다. 언론인 스스로가 비도덕적 뉴스를 필요 이상으로 경쟁하듯 보도하는 태도를 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일부 구성원의 일탈과 언론의 과열 경쟁은 사회 전반의 문화나 국민 수준이 올라가면 조절될 수 있다고 봅니다. 국민 자체가 그렇게 폭력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의 친일 세력과 박정희-전두환 시절 군부독재 세력 등에서 우리 사회의 폭력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근원을 따져야 하는데, 일련의 사건을 너무 현상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평화와 정의가 그만큼 이뤄지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세월호 참사, 분노를 넘어 연대로…"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 여전히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고 또 치유할 수 있을까요? 
 
함세웅 : 법과 상식에 기초해 정직하게 접근하면 됩니다. 한 번 거짓말하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가장 훌륭한 것은 잘못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4월 16일, 곧 1주년이 다가옵니다. 우리 학생과 시민들이 바다에 가라앉는 것을 전 국민이 몇 시간 동안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 7시간 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문제가 되자,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보도가 일제히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쪽으로 쏠렸습니다. 고도의 언론 공작, 정치 공작입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공안 통치와 비슷합니다. 그렇다 보니, 세월호 유가족 입장에서는 정권의 진상규명 의지를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 조사위원회 활동이 오늘(6일)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조사 시작도 하기 전에, 새누리당 김재원 의원이 세월호 인양 문제와 관련해 "세금 도둑"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집권여당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규명을 위해서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여야 간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억울함을 밝히고 사고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과 대화하면서 "분노만 가지고는 안 된다. 분노를 삭이면서 연대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종교인이라고 해도 자식을 잃은 엄마의 아픔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습니까? 다만, 저는 '종교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과 이를 지켜봤던 성모 마리아의 아픔을 되새겨줬으면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 가를 생각하며, 자식을 잃은 아픔을 연대적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세월호 참사에서 역사적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개인의 모든 사건은 결국 이웃과 연계된 민족사적 사건입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에게 "내 아들딸이 나에게 역사적 교훈을 일깨워줬다. 그 의식으로 정부를 늘 감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사회 모든 문제가 정치적(이념적) 이해관계로 흐르는 데는 친일·독재의 잔재, 분단 세력과 신자유주의를 통해 이익을 보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4개의 가치를 중심으로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이를 중심으로 한 근원적인 종합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통령 임기 5년, 숨 한 번 쉬면…"  
 
프레시안 : 우리 사회가 친일·독재·분단·신자유주의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등장으로 상황이 더 어려워진 것 아닌가요?.   
 
함세웅 :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비교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조금 더 민주주의에 가까운 시절이었지만, 고인이 된 두 대통령이 더 잘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에서 신자유주의가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본의 노예가 됐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신선한 사회적 가치를 지녔지만, FTA와 해군 기지 건설 등 미국에 더욱 예속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과 자원외교를 거치면서 '이 정권도 아니다'라는 의식을 갖게 됐지만, 박근혜 정권 또한 불법 선거로 얼룩졌습니다. 김대중·노무현을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를 꿈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3년은 더욱 단련되는 시기가 될 것입니다. 
 
<레 미제라블>은 빅토르 위고가 벨기에에서 망명 생활 중 쓴 글입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지만, 자유는 100년 뒤에 실행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도 했습니다. 빅토르 위고 역시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시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게 <레 미제라블>입니다. 프랑스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 미래 시대의 좌표였습니다.  
 
시대가 바뀌는데 100년이 걸린 셈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만들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을 기준으로 100년이 지났고, 1945년 일제 식민지 해방을 기준으로 하면 이제 70년 지났습니다.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 벗어난 지는 40년 가까이 됐습니다. 지금 '100년 전쟁' 중에 있습니다. 민주주의 실현과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해 더 고민하고, 연대의 틀을 키워야 합니다. 
 
대통령 임기 5년, 역사적으로 숨 한 번 크게 쉬면 지나갑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해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이후, 세월호 유가족이나 국민 모두에게 큰 치유가 됐습니다. 우리 사회의 종교, 특히 천주교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함세웅 :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화활동가 등 현장에 투신해 있는 종교인도 많습니다. 교황 개인도 훌륭하지만, 국제적 지위와 사목적 신분 때문에 추앙받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교황보다 더 크게 헌신한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희망이고 길잡이입니다. 그런 분들의 헌신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청춘=힘, 개성 있는 인간이 되라"  
 
프레시안 : 5년이란 시간이 금방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젊은이들에게는 힘겨운 일입니다. 2030대 젊은 층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함세웅 : 청년들의 현실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로마에서 유학하던 20대 시절 인류복음화성 차관 피녜돌리(Pignedolli) 대주교가 훈화 시간에 나폴레옹 얘기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로마 교황을 억압한 인물입니다. 그런 폭압자를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개성 있는 인간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의 가치와 신념, 인격을 하늘같이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폴레옹이 천하를 호령하다 유배되면서 이탈리아 엘바 섬에 잠시 머물게 됐는데, 감시인들에게 자유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항구에 가서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었다고 합니다. '어디서 오는 건가, 어디를 가나, 무슨 목적으로 왔나. 당신 인생관은, 신관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죽음의 길로 가면서도 사람에 대한 관심을 끊임없이 나타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해, 우주에 대해, 역사에 대해 관심을 드러낸 것. 그것이 '나폴레옹의 개성'이었습니다.  
 
당시 주교가 한 훈화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역사의 교훈이 다 우리 성서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최근 대학가의 '안녕들하십니까'와 '최경환 F학점' 대자보 등이 어른들에게도 교훈이 됐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고난의 시간이자 모순적인 사회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내가 가져야 할 꿈을 늘 간직하면서 아름다운 미래를 이룩하는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청춘' 자체가 바로 힘입니다. 선배 세대, 스승 세대를 넘어서고 거짓 무리들을 넘어서는 신선한 싹이기를 바라면서 늘 개성을 간직하길 바랍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이 남은 집권 3년 동안 어쨌든 깨달음을 얻어야 할 텐데, 마지막으로 큰 꾸짖음을 한다면? 
 
함세웅 : (한참 있다가) 하긴 해야 하는데, 생물학자 등에 의하면 DNA는 안 바뀐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도 사제니까, 나라와 그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해 정권이 잘 마무리되게 기도할 것입니다. 
 
* '단박 인터뷰'는 2015년 <프레시안>이 새롭게 연재하는 조합원과 독자 참여형 인터뷰입니다. 함세웅 신부님이 추천한 다음 주인공은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입니다. 연구소 측에 인터뷰 요청을 한 상태입니다. 편집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변혁 이끄는 북한 여성들

변혁 이끄는 북한 여성들

2015. 03. 12
조회수 63 추천수 0
 

 북한1.jpg <북한의 젊은 여자들>, 2010 - 에릭 라포르그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평양 여성들이 중국에서 유입된 패션을 따라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평양 거리에서는 단조로운 색상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옷차림 이외에도, 여성들은 정부의 감시가 느슨한 지하시장을 활성화하며 새로운 경제동력으로 자리 잡았다.

2012년 봄, 지도자 김정은 곁에 우아한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이는 북한체제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얼마 후 사람들은 이 여성이 김정은의 처, 이설주란 사실을 알았다. 이 여성의 등장은 배우자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어 온통 미스터리 투성이었던 그의 아버지 김정일(2011년 12월 사망)의 사생활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평양의 신흥특권층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장소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젊은 여성들의 차림새가 그렇듯이, 절제된 이설주의 세련미는 특별한 게 전혀 없다.

젊은 여성들의 거리 옷차림은 다양해지고 보다 화려해졌다. 하이힐과 통굽이 흔하고, 심지어 휴가 나온 젊은 장병들도 구두를 신었다. 중국 패션의 영향은 국영상점의 진열장에서도 엿보인다. 북한의 최대 신발업체인 보통강은 현재 까다로운 고객을 겨냥해 새로운 신발 모델을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군복, 거꾸로 쓴 야구모자, 몸에 꽉 끼는 짧은 스커트 복장을 한 인기 팝그룹 모란봉 가수들의 머리모양을 흉내 낸 단발머리나 살짝 염색한 머리도 무척 유행하고 있다. 보다 온화한 이미지를 선보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RPDC)은 마치 스포츠 행사장에 치어리더들을 파견하듯, 중국, 캄보디아 등 해외에 운영 중인 북한식당에 젊고 예쁜 여성들을 파견한다. TV들이 여성 팝그룹의 공연 모습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국영항공사인 고려항공도 기내에서 같은 공연을 방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방사람들이 가난의 경계선에서 허덕이고 있는 터에 평양의 모습은 환상이 아닐까? 과연 평양 여성의 외모는 변한 걸까? 국경의 폐쇄로 정보도 거의 없고, 방문객과 북한주민 간 접촉이 부재하기 때문에, 북한의 현실을 파악하려면 퍼즐을 맞춰야 한다. 북한 주민들과 일일이 접촉하고 방문하다보면, 덮개로 덮여 있는 채 변한 게 없을 것 같은 사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평양 여성들의 옷차림과 액세서리 그리고 거동에서 어떤 변화가 읽힌다.

 

‘혁명적인 동시에 여성적인’ 여성들

 북한3.jpg    <북한의 젊은 여자들>, 2010 - 에릭 라포르그  


  1989년 김일성 국가주석이 잡지 <조선여성>에서 천명했던 것처럼, 1945년 해방 이후 등장한 북한의 ‘신여성’은 혁명적인 동시에 ‘여성적’이어야 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에서 분석가로 근무한 헬렌 루이즈 헌터는 “북한 여성들이 중국이나 소련 여성들보다 더 매력적인 여성미를 갖추고 있다”(1)고 했다. 북한 여성들의 옷차림은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 여성들, 즉 단발머리에 무스를 발라 머리를 고정시켜 ‘슈퍼맨’의 모습을 한 포스터 속 중국 여성들의 모습보다는 훨씬 다양했다. 북한 여성들은 이따금 활동에 편리한 발목을 드러내는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1960년대 말부터, 북한 정부는 전통의상이 과거와 현재 간 연속성을 상징한다며 주요 행사에 여성들이 전통의상을 입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 농부, 가정주부 등은 서양식으로 옷을 입고, 정갈하게 빗거나 파마머리 또는 스카프를 두르고 다닌다.(2)

  1980년대 평양에서 거주한 적이 있는 서울 소재 국민대학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는 “북한은 옷차림에 있어 단 한번도 ‘은둔의 왕국’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북한은 지나치게 수줍음이 많은 나라다. 20세기 전환기에 중국의 현대 패션이 조금씩 유입되자, 강경대응에 나섰던 북한은 최근 몇 년 사이 유연해졌다. 2002년 이후, 매년 봄마다 평양에서 패션쇼가 열리고 있다. 2014년 9월 패션쇼 때는 단색 전통의상에서부터 컬러풀한 전통의상까지, 그리고 1960년대의 고전적인 ‘샤넬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양장 등을 선보였다.

  옷차림 이외에도, 북한 여성들은 기근기(1995∼1998년)를 거치면서 생존활동의 산물인 시장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사회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여성들은 정권의 핵심에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2013년 12월, 남편 장성택이 숙청된 이후 정치무대에서 모습을 감춤)와 지난 11월 27세의 나이로 북한 노동당 부부장으로 승진한 김정은의 여동생만이 정권의 핵심에 있다. 최신 자료로 알려진 2002년 통계에 따르면, 여성들은 최고인민회의에서 4분의 1도 안 되는 의석과 노동당 중앙위원회 의석의 4.5%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란코프는 2004년에 이미 “북한의 신자본주의는 확실히 여성의 얼굴을 지녔다”고 말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말은 현실이 됐다. 여성들은 기근의 주요 희생자였다. 이들은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며 성폭력과 강제 낙태 그리고 그밖의 학대까지 받았다.(3) 북한 전문가 박경애(4)는 이러한 시련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에서 보다 많은 독립성과 영향력을 확보했고, 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진보적인 의식을 지니게 됐다고 평가한다.

빈사상태에 빠진 북한경제 속에서 종양처럼 번지는 다양한 형태의 지하경제활동은 이러한 압박(여권신장에 따른 압박)의 산물이다. 북한정부는 이같은 돈벌이(지하경제활동) 열풍을 잠재우긴 했지만, 과거로의 회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강경정책과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적절히 혼합하며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5) 그러나 자율경제 활동 부문(상업, 서비스, 생산)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것을 국민총생산(GNP)으로 정량화하기는 어렵다.(6)

  이같은 지하경제가 등장시킨 ‘신흥특권층’(기업인, 중개인, 상인, 소매상)은 전통적인 엘리트(대부분이 노동당 간부들이며, 김일성과 항일투쟁을 같이한 세력의 후손들이다)의 폭을 확장시키며, 예전에 상대적으로 평등하던 사회의 이해관계를 세분화시켰다. 지하경제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자료의 부재로 인해 휴대전화 보급 대수 같은 단편적인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2014년 250만 명이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었고, 주민 10명당 1명은 휴대전화를 구입하기 위해 대략 200~300 달러를 썼다. 이러한 신(新)사회계층의 등장을 증명하는 건 평양의 상점들이다. 국영상점은 예전보다 물건들을 잘 갖춰 놓았는데, 중국, 싱가포르, 한국 등에서 건너온 식료품과 상품을 진열장에 내놓고 있다. 상점들마다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려는 구매자들(능력이 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로 붐빈다. 명품매장에 진열된 술, 화장품, 해외브랜드 옷들을 보노라면 국제사회가 북한을 상대로 취한 이른바 ‘명품’ 수출 제제조치의 실효성에 의구심이 든다. 상품가격은 일반 대중에겐 천문학적이지만, 곧잘 팔려나간다. 이 모든 지하경제 부문에 여성들이 관여하고 있다.

  만약 법적 조항만 고려한다면, 북한은 아시아에서 선구적인 국가이다. 시민의 권리와 정치적 권리 측면에서 보면, 북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무상교육, 배우자의 선택권, 이혼과 상속권 등)를 지녔다. 1946년 3월 토지개혁의 결과로, 가장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모든 농민 가정에 토지가 재분배됨으로써 가부장제의 물질적인 토대가 무너졌다. 당의 이익을 위해, 유교성향이 강한 사회의 전통적인 의무로부터 여성들이 해방된 셈이다. 당이 ‘당원들 간에’ 중매쟁이 역할을 하고 있어, 결혼은 이제 더 이상 가족 간의 대사가 아니다.

북한정부는 원칙적인 측면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지만, 남녀의 역할에 대한 개념에선 보수적이다. 성해방은 사회주의 구축에 일조한다. 또한 혁명적인 성향을 보이는 ‘신여성’은 ‘현모양처’여야 한다. 이러한 여성의 모습이 “혁명적인 시민의 모델”이다.(7)

한국전쟁(1950∼1953년) 이후, 북한 여성들도 국가를 재건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상당수의 남성들이 전쟁 중에 전사해 이들의 일손부족을 여성들이 메꿔야 했다. 1950∼1960년대에 여성들은 생산에 기여하고, 주체사상을 교육 받고, 5호담당제를 책임지고, 가정도 건사하고, 자녀도 낳아야 했다. 이어서 중공업이 중시되고 여성들의 일자리가 희박해지면서, 여성들은 대수롭지 않은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1980년 중반의 경기 침체로, 많은 여성들은 결혼과 함께 일을 그만두고 자녀 교육과 가사에 전념한다. 정부 또한 보다 전통적인 여성상을 열성적으로 선전하고, 출산을 장려하기 시작한다. 선량함과 단순함과 애정을 구현하는 미덕, 즉 어머니상이 노동당의 이미지와 결부되며, 가족은 국가의 은유가 됐다. 어머니들이 북한체제의 주요 영웅들이 된 셈이다. 예를 들면, 김정일의 어머니, 이른바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과,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을 비롯해 익명의 여성 노동자들과 공을 세운 어머니들이 영웅대접을 받았다. 기근이 오면서, 여성들은 북한의 생산활동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다. 기근의 혼란 속에서 여성들은 국가 생존의 톱니바퀴가 됐다. 반면에 남성들은 식량부족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서울에 거주하는 한 탈북여성은 “북한 남성들이 헛짚었다”고 말한다.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으며, 힘없는 일부 가장들은 체면을 구겼다. 가정주부들은 소매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직장여성들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2000년대 상반기 10년 동안에 출간된 소설들은 어머니의 책임감과 직장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잘 묘사했다.(8)

 

기근의 혼란에서 터득한 생존의 기술

     
북한2.jpg <북한의 젊은 여자들>, 2010 - 에릭 라포르그 
  거대 암시장으로 전락한 농민시장은 여성 활동의 주 무대가 됐다. 여성들은 가족이 보유한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시장으로 갖고 나와 팔거나 장비, 그릇, 가구, 옷 등과 교환하기 시작했다. 또, 여성들은 길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즉 주택가 사이나 도로가 바닥에 좌판을 펼쳐 놓고 장작, 약초, 텃밭을 일궈 얻은 야채, 직접 집에서 만든 작은 과자 등을 판매했다. 또 일부는 이발, 구두수선, 삯바느질 등과 같은 서비스업에 뛰어들었다. 새벽부터 여성농부들의 기나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등이 휠 정도로 많은 짐을 지고 도시로 향한다. 일부 여성들은 먼 길을 걸어 다니거나 트럭 짐칸에 끼어 탄 채 돌아다닌다. 요즘도 여전히 여성들은 행상을 하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도시인 신의주 역 플랫폼에 들어서자, 커다란 봇짐을 진 여성들이 눈에 띈다. 신의주는 양국 간 합법이건 불법이건 간에 대부분의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는 ‘관문’이다. 여성들이 소매업(노점상)과 식당업과 서비스업을 관장한다.(9)

  유교적 유산도 삶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다. 2011년 서울로 탈북한 40대의 한 여성은 “북한에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가 남아있다”고 말하며, “남한에서조차도 탈북여성들은 그런 관습에 익숙해져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북한 여성과 남한 남성을 짝 지워주는 결혼 전문업체가 돈을 벌고 있다. 오래된 속담처럼, 완벽한 조합은 “남남북녀” 커플이다. 간혹 일부 남한 남성들은 “남한 여성이 대가 세다”고 생각한 나머지, 탈북여성들과의 결혼을 선호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북한 여성들이 이같은 자신들의 위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그 방법이 최선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주로 가계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어 그 영향력도 커졌다.(10) 탈북여성들은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더 이상 의무로 여기지 않고, 되도록이면 이를 뒤로 미루고 있다고 전한다.

  더군다나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혼란은 남녀 간 관계의 상대적인 자유화를 낳게 된다. 이는 소설들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과거에, 작가들은 커플 간 이데올로기적 교감을 강조했다. 이후, 이들은 로맨스와 감정을 거론하더니 한발 더 나아가 암암리에 욕망을 들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이 반한 남자와 결혼하는 열정적이고 과단성 있는 여성들이 등장했다.(11)

  1970년대까지만 해도 거의 존재하지 않던 이혼이 등장하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합의 이혼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 내세우는 이혼사유는 배우자의 “반동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이혼 여성은 여전히 잠재적인 비난에 노출되어 있다. 파트릭 모뤼스는 자신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한 백남영의 소설 <친구들(Des amis)> (Actes Sud, 2011) 서문에서 “이혼은 사적인 행동이 아닌 사회적 행동”이라고 강조한다. 탈북 여성들 또한 가정 폭력의 증가로 인해 이혼이 생기고 있다고 증언한다.

  또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사소한 잘못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경찰이나 군인들을 상대해야 한다. 남한으로 탈출한 한 여성의 증언에 따르면, 공장이나 군대 내의 성폭행과 성희롱이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 기근으로 인한 인명 손실 이후, 북한정부는 출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홍보를 시작했다. 이 여파로 피임약을 구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 병원들이 (공식적으로 법이 허가한) 낙태를 꺼리며 불법 낙태시술이 증가했고, 덩달아 그에 대한 위험부담도 생겼다. 성병 또한 우연한 기회에 갖는 매춘 행위로 말미암아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여성들은 1990년대의 후반부와 그 이후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만의 자율공간을 관리하는 데 신경을 썼다.(12) 여성들은 북한정부가 시장상인의 연령 제한을 50세 이상으로 못 박자 저항했다. 2007년 10월과 2008년 3월, 여성들은 회령과 청진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제한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집단행동에 주저 없이 참여한 여성들 간 연대를 보여줬다. 전통과 혁명에 사로잡혀 굴종하던 여성들이 해방되고 가족의 수호신으로 거듭나며, 자신들의 멍에(전통과 혁명)를 서서히 벗어 던지고 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3월호에 게재된 입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136 )

 

글·필립 퐁스 Philippe Pons/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해 강의

 

1) Helen-Louise Hunter, ‘Kim Il-sung’s North Korea,’ Praeger Publisher, Santa Barbara (Canada), 1998년. 
(2) Cf. Koen De Ceuster, ‘On representation of women in North Korean propaganda posters’, International Convention of Asia Scholars, Adélaïde(Australie), 2009년. 
(3) Lucia Jang et Suzan McClelland, ‘Stars between the sun and moon. One woman’s life in North Korea and escape to freedom’, Douglas &McIntyre, Madeira Park (Canada), 2014년.
(4) ‘Economic crisis, Women’s changing economic roles, and their implications for women’s status in North Korea‘ Pacific Review, San Diego (Canada), 2011년 5월.
(5) Patrick Maurus, ‘미래의 용을 꿈꾸는 북한(La Corée du Nord se rêve en futur drag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2월. 
(6) 2013년, 기업은행경제연구소(IBK Economic Research Institute)는 북한의 지하경제 규모를 10억에서 30억 달러로 추정했다. 
(7) Suzi Kim, ‘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Cornell University Press, New York, 2013년. 
(8) Cf. Patrick Maurus, ‘북한의 여성 영웅들(Héroïnes de Corée du nord)’, dans Béatrice Didier, Antoinette Fouque et Mireille Calle-Gruber, ‘창의적인 여성들의 사전(Le Dictionnaires des femmes créatrices)’, éd. Des Femmes, vol. 3, 파리, 2013년. 
(9) Cf. Stephan Haggard et Marcus Noland, ‘Gender in transition, The case of North Korea’,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2012년 6월.
(10) Jin Woong Kang, ‘The patriarchal state and women’s status in socialist North Korea’, Graduate Journal of Asia-Pacific Studies, vol. VI, n° 2, 2008년.
(11) Lim Soon-hee, ‘Value changes of the North Korean New generation and prospects’, Korea I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2007년. 
(12) Lee Mikyong et Ku Su-mi, ‘The life and consciousness of North Korean urban women after the economic crisis’, North Korean Studies Review, vol. VIII, n° 2, Detroit (Etats-Unis), 2005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6.15공동행사, 북 대표단 초청 서울서 개최 추진

  • 분류
    알 림
  • 등록일
    2015/03/12 13:20
  • 수정일
    2015/03/12 13:20
  • 글쓴이
    이필립
  • 응답 RSS

<광복 70주년 릴레이 인터뷰 ⑦> 이승환 6.15남측위 공동대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3.11  17:58:49
트위터 페이스북

 

   
▲ 이승환 6.15남측위원회 공동대표와 10일 광화문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상임대표의장 이창복, 이하 6.15남측위원회)는 6.15공동선언 15주년 기념 남북 공동행사를 북측 대표단을 초청한 가운데 서울에서 개최하는 방향으로 추진한다.

 

이승환 6.15남측위원회 공동대표는 10일 오후 3시 서울 광화문 한 카페에서 <통일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 6.15공동선언 15주년 기념일에 남북 간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가 올해 전반적인 남북관계를 규정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승환 공동대표는 “6.15공동선언 15주년 남북 공동행사를 가능하면 남쪽 서울에서 진행하는 것이 이 행사의 성사 가능성과, 남북관계 발전에 실제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볼 때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그런 방향에서 여러 검토와 논의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한미합동 군사연습이 끝나는 시점에 곧바로 6.15남측위원회와 6.15북측위원회 간의 접촉을 추진할 예정”이라며 “거기서 올해 6.15공동행사와 광복 70주년 공동행사와 관련된 전반 개요를 확정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한 남북 간 공동기구 구성 문제도 협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 2008년 금강산에서 열린 6.15공동행사. 이 행사를 마지막으로 6.15공동행사가 열리지 못한 채 15주년을 맞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6.15남측위원회는 이를 위해 먼저 오는 4월 1일 6.15남측위원회를 포함해 보다 폭넓은 ‘광복 70주년 및 6.15공동선언 15주년 기념 민족공동행사 남측 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킨다는 구상이다.

 

이승환 공동대표는 “필요하다면 현재 6.15남측위원회로 틀을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보수나 진보, 여야, 민관 등 다양하게 함께 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도록 검토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환 공동대표는 “6.15남측위원회는 무엇보다도 올해 6.15공동선언 5주년에 남북 공동행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지금까지 중단된 교류와 협력사업의 물꼬를 트는 것은 물론 남북 당국관계의 변화를 촉발해내는 데서도 결정적인 의미와 전기가 될 거라 본다”고 의의를 부여했다.

따라서 “이 행사 속에서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북측 대표단에 이산가족과 문화.예술.체육인 등이 포함되도록 북측에 제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각 분야의 다양한 교류를 구상한다며 “광릉수목원에 크낙새가 사실상 멸종됐는데, 북측 운율지역에 크낙새가 자생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북의 크낙새를 기증받아서 다시 광릉수목원에 크낙새 소리가 나게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남북 간의 식생교류와 관련해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시했다.

그는 “5월 1일 노동절에 양대 노총이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 통일축구대회가 예정돼 있다”며 “6.15~8.15주간에 다양한 민간교류, 협력사업들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7월 4일부터 전남광주에서 진행되는 광주유니버시아드대회는 청년들의 축전이고 북측이 참가할 걸로 예상되고 있기 때문에 남북 청년들의 교류와 공동응원이 성사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 2013년 7월 베이징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 공동위원장단 회의가 열렸다. 남측 대표단은 북한주민접촉 신청이 수리되지 않아 귀국후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광복 70주년 공동행사에 대해서는 사견임을 전제로 “남에서도 북으로 대표단이 가고 북에서도 숫자에 상관없이 일정한 대표단이 남쪽에 와서 서울과 평양에서 광복 70주년 행사가 입체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6.15공동선언 15주년 공동행사가 서울에서 개최되게 된다면 광복 70주년 행사는 북쪽에 조금 더 비중을 두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또한 “광복 70주년 공동행사를 국민들에게 실감있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평화열차를 운영할 계획이고, 정부도 비슷한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경-평양-개성-서울 혹은 서울-개성-평양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평화열차’ 혹은 ‘동아시아 평화열차’를 운영해 열차 안에서 다양한 학술토론회와 적절한 문화행사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인터넷 온라인 상으로 ‘평화통일 모자이크’를 완성해 나가는 이벤트 등을 추진하고, 특히 “8월 15일에는 일본 아베 내각이 이른바 일본 전쟁국가화와 관련된 중요한 선언을 할 것으로 예상돼 일본과 한국의 정당과 시민사회들, 그리고 여러 나라들의 시민사회 인사들이 함께 모여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선언을 조직하는 국제대회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남북 공동행사에 대한 남북 당국의 승인 여부다. 그는 “어쨌든 6.15공동행사를 성사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 과정에서 정부도 가능하면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고 민간 공동행사를 승인할 수 있도록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지난 4일 정부가 국무총리 소속으로 민관합동위원회인 ‘광복7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데 대해서는 “정부는 정부대로, 민간은 민간대로 잘 행사를 진행하면 된다”며 “중복이나 충돌의 문제가 아니라 민과 관이 서로 필요한 만큼 충분히 협의하고 논의를 진행하면서 따로 하든, 함께 하든, 쌍방이 서로 참여하든, 여러 방안을 찾아가면 되는 문제”라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뒀다.

다만, “북의 입장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우리 정부가 쇼케이스처럼 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들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고 “올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나 이런 점들 때문에 가능하면 논란을 최소화하고 민과 정부 사이에 쓸데없는 갈등들이 크게 불거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라는 바람을 전했다.
 

   
▲ 민화협 공동의장을 겸하고 있는 이승환 공동대표는 최근 리퍼트 미국대사 테러사건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사진 - 통일뉴스 이승현 기자]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공동의장을 겸하고 있는 이승환 공동대표는 최근 민화협 주최 토론회에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테러를 당한데 대해 “폭력행위에 의존해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일이고 범죄라고 하는 점에서는 더 이상 변호하기 어렵다”면서도 “이 사건을 ‘종북 숙주’ 운운하는 정치공세 호기로만 생각하고 이 불행한 사건을 산생시킨 배경에 대해 아무 성찰도 없는 것은, 이러한 사건의 재발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일침을 가했다. (아래 상자기사 참조)

 

이승환 공동대표는 “광복 70년, 6.15 15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올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이 구조화 되고 있어서 남북이 자주적으로 통일문제를 풀어나가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기로에 있기 때문에 올해가 중요하다”며 “6.15남측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남.북.해외 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남북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나가고 선도해나가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오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의 접촉을 진행하고 실제로 변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들을 전개해 왔다”고 이해를 구했다.
 

 

“범죄적 행위.. 정부, 실질적 배경에 관심 가져야”
이승환 민화협 공동의장, 리퍼트 미대사 테러사건 입장

김기종씨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다. 김기종씨가 어떤 주장을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였다 하더라도 절대로 용서되기 어려운, 폭력행위에 의존해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일이고 범죄라고 하는 점에서는 더 이상 변호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우리 정부나 여당에서는 이 사건을 종북분자에 의한 한미동맹에 대한 테러로 규정하고 배후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방면에 걸쳐서 김기종씨와 조금만 연관이 있으면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식의 정치공세용으로 이 사건을 활용하고 있는데, 그 점은 적절한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정부는 사건의 배후를 캐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이 불행한 사건이 산생(産生)된 실질적 배경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를 통해서 한반도 평화로 나아가는 데서 이 국가가, 정부가 무엇을 성찰해야하는지를 깨닫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불행한 사건에는 명백하게 몇 가지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남북간 정치군사적 갈등이 점점 구조화되어, 북의 핵과 미사일, 남쪽의 국제법상 공격행위로 규정될 수 있는 킬체인(Kill Chain) 등을 포함하는 확장억지와 포괄적 미사일방어전략 등이 서로 충돌하면서 점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확대되어온 상황이 김기종씨의 이런 불행한 사건이 산생된 배경의 하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웬디 셔먼 미국 국무부 차관의 한.미.일 동맹이 진전이 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초조감과 그로 인해 동북아의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면서 사실상 박근혜 정부를 비난한 것도 한국민의 정서를 크게 자극했고, 이것도 아마 김기종씨의 불행한 사건이 있게 한 배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또 개인적으로는 김기종씨가 28살 젊은 나이에 겪었던, 특수기관으로 의심되는 괴한들에 의해서 여자 후배가 성폭행 당하고 후배들이 집단구타 당한 사건의 외상후 스트레스에 시달린 결과, 본인 멘탈리티의 많은 부분이 파괴된 상황도 이번 행위에 작용하고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국가폭력일 가능성이 높은 사건으로 인해 파괴된 한 인간에 대해 그가 저지른 범죄적 행위에 대한 단죄와는 별개로 과거 국가에 의한 폭력, 군사주의의 폐해에 대한 성찰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 응당한 민주국가의 권력이 지녀야 할 태도다.

그런데 이 사건을 ‘종북 숙주’ 운운하는 정치공세 호기로만 생각하고 이 불행한 사건을 산생시킨 배경에 대해 아무 성찰도 없는 것은, 이러한 사건의 재발 방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한 평화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국가적 성찰이 축적되어야 한다. 

김기종씨의 이번 행위는 아마도 개인적 돌출행동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문제는 그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은 전쟁반대와 평화수호의 주장을 더 하기 어렵게 되었고, 정부여당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를 공론화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어리석은 행위가 결과적으로 그의 주장과 정반대의 결과만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서 북한이 보이는 태도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해서 북한은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북한은 이 사건에 대해 즉각 반응했고, 그 반응도 불행한 폭력사태를 ‘응당한 징벌’이라면서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빗대 설명하고 있다. 이는 남쪽도 마찬가지지만, 북한이 한반도에서의 평화의 정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하고 일방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이같은 태도가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안 될 뿐만 아니라, 북한이 지금까지 일관되게 주장했던 ‘상호체제 인정의 1차 징표로 모든 비방중상을 중단하자’는 주장의 진정성조차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 북측 공식 문건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사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북한 반응은 상호 비방중상을 중지하자고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북한도 이 사건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일방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한반도 전체의 평화정치라는 측면에서 되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민화협 역시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기종씨가 과거에 어쨌든 주일대사를 향해서 돌을 던지거나 했던 전례를 볼 때, 미 대사 경호와 관련해서 좀더 세심하고 더 사려깊은 여러 조처를 취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못한 것은 민화협의 잘못이다.

다만 개인의 돌출행동인 이 사건을 가지고, 이른바 ‘보수-진보’ 이렇게 편갈라서 ‘민화협에 있는 진보들이 이 사건을 키웠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일부 종편이나 언론의 태도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민화협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진보가 사라지게 된다면 민화협의 존립가치 역시 사실상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민화협 운동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서 한반도문제, 민족문제와 관련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지혜와 가치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그 점에서 민화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설사 진보든 보수든 매우 소중한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갈라져서 여러 대립상태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보더라도 민화협이 추구하고 있는 ‘화쟁과 관용’ 정신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 정파적인 공격을 앞세우는 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태도다. 물론 민화협은 외부의 이러저러한 편견을 넘어서서 더 성숙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민화협 운동 본연의 가치를 지키고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 더욱 성찰하고 교훈을 얻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노력을 진행해나가야 한다고 본다.

홍사덕 대표상임의장은 지금까지 민화협을 잘 이끌어왔고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 민화협 뿐만 아니라 다양한 통일세력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전개해왔다. 사의를 표명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고, 적어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지금까지의 노력과 성과들이 무산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86세에 바다를 처음 본 스님

 
청전 스님 2015. 03. 10
조회수 110 추천수 0
 

 

*청전 스님이 라닥의 노스님들과 지난 1월 20여일간 인도를 여행한 기록을 4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


■3편

 

라자스탄 국경을 넘으면서 구자라트 변경 관리 경찰들이 우르르…. "나마스테 구루지!" 하면서 반가히 맞음은 물론 노시님들께 다가와 극진한 인사를 올립니다. 허긴 이런 먼 곳에까지 승복을 입은 시님들 보기는 드물지요, 여행 잘 하라시며 기쁘게 맞습니다.

 

주 경계선을 넘으니 너무 차이가 나는 풍광이란, 라자스탄의 삭막한 변화 없는 모래 먼지땅에서 이젠 파아란 밀밭이며 활기찬 농촌 입니다. 인심도 곳간에서 나드라고 여유와 풍요가 확연 합니다. 간디 어르신이 태어난 주이며 현 모디 수상이 태어난 곳이라는데서 큰 자부심은 물론 전 주 지역이 채식과 불음주 구역입니다. 어떤 육식 요리는 없으며 맥주 조차도 판매하지 않습니다.

 

길 가면서 가끔 야생 사슴들을 봅니다. 이름 모를 짐승들을 보기도 하는데 참 좋아보입니다. 구자라트는 길이며 경제력이 인도 최고입니다. 현 모디 수상이 두번의 주지사를 행하며 미래의 인도를 이와 같이 만들겠다는 선언에 작년 수상 선거에서 근 90 대 10 의 큰 차이의 표를 얻어 수상이 됐고, 실제로 멋진 시행을 해나갑니다. 아마 이분이 한번 더 수상으로 연임한다면 인도 10년은 무지한 변화가 오리라 믿습니다. 우선 그넘의 공무원 청렴도를 내 걸었고, 쓰레기 없는 인도까지를 천명하기도.

 

길 좋아 잘 달려도 큰 나라 답게 바다는 아직도 먼가 봅니다. 길 가다가 이름 모를 조그만 동네 어설픈 여관에서 하루 묵습니다. 다음날 스님들께 오늘은 바닷가를 외치며 출발입니다. 드뎌 다람쌀라를 떠난뒤 6일만에 바닷가 해안에 닿았습니다. 80 인생길에 바다를 처음 본다는 시님들이라니…. 세 왕걀 노시님은 올 86세 입니다. 이 연세에 바다를 첨 보신다니!

 

cj30.jpgcj31.jpgcj32.jpgcj33.jpgcj34.jpg

 

일단 여관을 바닷가에 잡기로 했습니다. 물론 시내 안의 여관보다야 비싸겠지요. 뻬마시님이 알아본다고 하는데 한 얌전한 인도인이 우리에게 접근하며 "붓담 차라남 갸차미! 담마 차라남 갸차미! 샹감 차라남 갸차미!"를 외치며 극진하게 절을 올립니다. 잘 알다시피 "붓다와 법(진리)과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빨리어 게송이지요.

 

얘기를 나누어보니 자기는 힌두교도이지만 부처님도 믿고 얼마전 고엥까 한달 명상쎈타에서 수행하고 왔다는군요. 거기서 조석으로 귀의 게송을 읊었다는 겁니다. 이 도시 포르반다르에 사신다기에 우리 사정과 호텔 얻는데 도움을 바란다니 기다려보라며 보기에 제법 큰 한 호텔로 들어갑니다. 뻬마는 네나 그 호텔에서 돌아와 너무 비싸 못들어가겠다고…. 마후 아저씨가 오더니 이런저런 요금 등등 조건을 말하는데, 알고보니 이 도시에서 최고의 호텔인 삼성급(Three Star) 여관이었습니다. 우리를 특별히 귀빈으로 파격적인 예우를 해 준다며 7명의 손님에게 아침 식사 제공하고, 세금 포함 하룻밤에 8000루삐(우리 돈 약 15 만원)로 해준다니!  야호. 우리 촌넘들에겐 땡 잡은 조건이지요. 역시 별 단 여관답게 크고 깨끗하고 참 아늑한 좋은 방에서 이틀은 쉬어갈 잠자리를 얻은 것입니다. 세방을 얻었고 뻬마에게 따로 엑스트라 침대를 제공해 줍니다. 실 아래 지방으로 내려가니 의외의 더위가 다가와 에어컨을 작동시키는데 방마다에 깔끔한 자동 장치가 잘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스님들은 틈만 나면 바닷가에 내려가 파도 치는 모습이며 모래사장을 걷었습니다. 식사도 어디 못지 않게 맛나는 채식을 제공해 주네요. 근무하는 식당 직원들이 너나 할것 없이 기념 사진 찍기에 모두가 흐믓해 했답니다. 자기 호텔에 이런 좋은 구루지들이 첨이라나요.이튿날 새벽에 바닷가를 거닐고 호텔 뷔페식 아침을 먹는데, 우리 촌탉 노시님들은 처음 이런 고급 호텔에 오셨기에 어떤 어떻게 드셔야 될지를 몰라하셔 경험 삼아 음식부터 한가지씩 설명해 드리며 천천히 챙겨 드시는 방법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드디어 오늘 일정으로 첫 방문지는 간디 어르신이 태어난 생가입니다. 태어나신 방이며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님들. 

 

cj35.jpgcj36.jpgcj37.jpg

 

cj38.jpg

시내에 있는 실물 크기의 간디 할배 동상입니다.

 

인도 극 서부 파키스탄과 맞닿은 드와르카의 나게스와르 힌두 쉬바사원에 갔습니다. 사뭇 경비가 심하며 우리도 한번 차량과 소지품까지 다 점검 받았네요. 신전 돌로 지은 건데 과격분자들로 부터 보호명목으로 일체 카메라나 전화기 까지도 못가져가게 하며 출입에 까다로운 검색입니다. 아래 사진은 다른데서 담아온 것입니다.

 

cj39.jpg

 

cj390.jpg

 

쉬바신에게 봉헌된 사대 사원중의 하나랍니다. 움머나 이걸 하룻밤에 다 조성했다니!  이걸 누가 믿어?

참고로 인도 순례자들이 일생 한번은 가봐야 될 네개의 사대 쉬바 사원이란: 동쪽의 바로 이곳과 남쪽 라메스와람의 사원, 서쪽의 뿌리 사원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바드리나쓰 사원입니다.아니! 크라문 그런 도 모리고 난 그 네개를 다 둘러봐 뿌렀네그랴. 헌데 우리 쉬바신님이 나에게 팍 영검 잠 주시기 않구로잉.  ㅋ ㅋ ㅋ

사원 마당에서는 엄청난 참배객들이 춤을 추며 신나 합디다. 늘 종교가 뭔지?  극단의 신앙이 뭔지?

 

이곳을 왕복하면서 본 호수의 철새들이며, 산처럼 샇아둔 염전의 소금더미는 대단한 장관이었습니다.

cj391.jpgcj392.jpgcj393.jpgcj394.jpg

제 사진기가 영험없는 제품이라 줌이 적어 멋진 철새 조류 도래지를 잘 못담습니다. 아프리카에서난만 본다는 홍학 떼들은 대단한 장관이기도.

 
내일은 또 일정 따라 길을 떠나야 됩니다.  <3편 끝>

 

관련글

청전 스님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1988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이메일 : cheongjeon99@daum.net      
 
  •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329일동안 바닷속에 있는 우리 다윤이 찾게 좀 도와주세요”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난치병 앓으며 혹한에 청와대 1인 시위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씨가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씨가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329일 동안 바닷속에 있는 우리 다윤이를 찾아주세요."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칼바람이 몰아친 10일 오전,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2학년 2반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45) 씨가 청와대 앞 분수대 삼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섰다

신경섬유종 앓고 있는 박은미 씨
"우리 다윤이 찾게 좀 도와주세요"

박 씨는 2월 말부터 청와대 앞에서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러나 박 씨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 조차도 힘겨워보였다. 박 씨는 뇌종양의 일종인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다. 치료가 어려운 희귀병이라고 한다. 뇌에 자란 종양이 신경을 눌러 청력도 약해졌다. 박 씨는 "치료보다 딸을 찾는 게 먼저"라며 "딸 좀 찾게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힘겨워 하는 아내가 걱정된 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51) 씨가 피켓을 넘겨 받았다. 박 씨는 바닥에 잠시 앉았다. 고개를 숙인 박씨는 조용히 흐느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어렵게 명함을 건네고 말을 청했다.

"우리 다윤이 얼굴 있는 저 피켓 들고 서 있는 것 조차 미안해요. 다윤이 얼굴을 볼 수가 없어요. 흑흑흑. 딸 좀 찾게 도와주세요."

다윤 양은 용돈을 달라거나 무엇을 사달라고 조른 적이 없는 착한 딸이었다. 밝교 애교도 많던 귀여운 둘째딸이었다. 그런 딸이 깊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배 안에 갇혀 있다. 다윤이의 가방, 다윤이 아빠가 사준 파란색 푸마 운동화, 다윤이가 언니 서윤씨에게 빌려간 검은색 모자는 바닷속에서 나왔지만, 다윤이는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

무슨 말로 그 심정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다윤이 생각하면 숨 쉬는 것도 미안하고 먹는 것도 미안하고, 다윤이한테 미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매일 잠들면서 눈을 안 떴으면 좋겠다. 잠을 안 깼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요. 저희는 어떤 방법으로 실종자를 찾아낼 수 있는지 몰라요. 50미터 깊은 바닷속에 있으니까. 재수색을 하든 인양을 하든 제 딸을 꺼내달라는 거예요. 9명의 실종자들을 다 찾아달라는 거예요. 살 수가 없어요. 살 수가...흑흑흑. 좀 도와주세요."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가 힘들어하자 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가 부축하고 있다.
세월호 실종자 단원고 허다윤 양의 어머니 박은미 씨가 힘들어하자 다윤 양의 아버지 허흥환 씨가 부축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에 와서 그랬어요.
마지막 실종자 한 명까지 다 찾아주겠다고
대통령으로서 한 그 약속, 꼭 지켰으면 좋겠어요"

박 씨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박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을 찾아 실종자 가족들에게 한 말을 또렷이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내려와서 그랬거든요. 마지막 실종자 한 명 까지 다 찾아주겠다고. 나라의 엄마 잖아요.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그 약속 꼭 지켰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국민이잖아요. 국민 덕분에 대통령이 있는 거 아녜요? 국민을 우습게 아는 대통령이 뭐가 필요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단 한 가지, 내 딸을 무조건 찾아야 한다는 것, 재수색이든 인양이든 그건 정부가 방법을 갖고 나와야죠. 우리는 국민이니까, 정부가 책임지고 찾아줘야죠."

다윤 양 아버지 허흥환 씨는 직장도 잃었다.

"아이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진도에 오래 있었잖아요. 너무 오랫동안 회사에 못 나가서 결국 다른 사람을 쓰고 애 아빠는 회사에서 잘렸어요. 애를 찾으려면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해야 하지만 지금은 생업이 중요한 게 아니고 딸을 찾는 게 중요하니까..."

박은미 씨는 다윤 양이 수학 여행을 가기 전부터 몸이 아팠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프다.

"제가 많이 아파서 다윤이를 잘 챙겨주지 못했어요. 다윤이 엄마인 게 너무 미안해요."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정부에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정부에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정부에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10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실종자 수습을 정부에 촉구하며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민중의소리

"오늘은 다윤이가 나오겠지
내일은 나오겠지 정말 피 말리면서 기다렸는데...
제 딸 찾을 수 있도록 국민들이 힘을 실어주세요"

박 씨는 자신에게 이런 사고가 닥칠 거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딸을 못 찾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은 다윤이가 나오겠지, 내일은 다윤이가 나오겠지 기다렸어요. 정말 피 말리면서 기다렸는데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 조차 버거운 몸 상태인 박 씨는 치료 보다는 딸을 찾는 게 먼저라고 했다. "딸을 찾을 수 있도록, 9명의 실종자를 찾을 수 있도록 국민들이 힘을 실어주세요"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날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장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 중인 박은미 씨를 찾았다. 이 위원장은 "세월호 인양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 손을 잡고 흐느끼기만 하던 박 씨는 딸을 찾아 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