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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시가 그리운 날이다] 에 관련된 글.
우연히 이 글을 만났다.
1981년판 반시, 대학 시절에 샀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이정호의 언론비평>
노동자 시인 박영근을 추모하면서
노동자 문화를 얘기할까 한다.
나는 지난 19일 한겨레신문(28면)의 부음기사를 보고 울었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헌책방 주인 이겸로 선생이 돌아가셨다. 눈 앞에서 박물관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 5년이 넘은 나의 서울생활을 지탱해 온 기둥이 쓰러져 버렸다.
지난 5년 동안 난독에 가까운 책 욕심을 헌책방 순례로 달랬다. 헌책방이 많은 신촌에 방을 구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선생이 지금의 통문관을 차린 게 1934년이니 72년째다. 4년 전 통문관에서 전평의 <9월 총파업 평가서(조선경성일보판)>를 발견했을 때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조심스럽게 가격을 묻는 내게 선생은 “10만원”이라고 일갈했다. “속이지 않고, 값을 두번 말하지 않는다”던 선생의 철학을 알기에 나는 주머니를 털어 두말 없이 값을 치뤘다. 아직 두번밖에 통독하지 못했지만, 선생이 내게 속이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은 많다. 책 한줄 안 보고 10년을 버티는 이들도 많다. 간혹 읽더라도 <레닌>이나 <디미트로프>지, 우리 노동운동사는 읽지 않는다. <촘스키>는 읽어도 <이재유>는 읽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세계노동운동을 꿈꾼다는 어떤 정파에선 “문화적 국수주의”라고 비꼴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된다. 이재유나 이강국, 이현상을 모르고 노동운동의 미래로 달리는 이들의 종착역은 어딜까. 우리는 이강국과 이현상을 모르지만, 조합원은 이들을 잘 안다. 얼마전부터 KBS에서 이들이 등장하는 해방정국을 다룬 역사드라마 <서울 1945>을 방송했다. '만년 서생' 오건호 동지도 극중의 배우 한은정이 예뻐 죽겠다고 할 정도니 꽤나 흥미있는 모양이다. 활동가들은 시간이 없다며 TV도 안 본다. 당연히 <서울 1945>도 모른다. 이렇게 조합원과 괴리된 채 따로 노는데 도대체 뭘로 그들을 설득하지?
지난 5월 오십도 못채우고 죽은 박영근 시인의 추모행사가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국민일보 10월2일자 22면). 그러나 우리 사무실에 10명 중 1명도 <노동자 시인> 박영근을 모른다. 박영근은 안치환이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원작은 ‘백제’)를 지었다. 최초로 <노동문학>을 노래했던 박영근은 제 노래로 명성을 얻어 유행가 가수가 된 안치환이나 그를 따라 배운 박노해와 달리 죽는 날까지 노동자 시인이었다.
박영근은 전교생 절반이 서울대로 진학하는 명문 전주고를 다니다 문학병에 걸려 학교를 때려 치우고 전국을 떠돌다 1977년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영등포 뚝방촌에 방 한칸을 구했다. 뚝방촌에서 그는 교과서 속 노동자가 아닌, 살아 있는 노동자를 만났다. 고교 중퇴에 노동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지만 그가 토하는 열변 앞에 기라성 같은 문학가들도 숨죽여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시에서 “아버지는 빨치산에서 전향해 살아남기 위해 공화당 선거모리배에게 전 재산을 털어 막걸리와 만월표 고무신짝을 돌려야 했다”고 고백했다. 스스로 먹물이기를 포기했던 노동자 시인 박영근이 남긴 마지막 시는 역설적이게도 ‘이사’라는 서정시다.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뜨릴 것이다.”
박영근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마지막 노래에서 가장 서정적인 게, 가장 민중적이라는 진리를 새삼 확인시켰다. 박노해처럼 한없이 거칠다가 이내 꺾여 자본의 품에 안기고 마는 사이비 <노동문학>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감방을 나온 박노해가 남아공에 가서, 기행문이랍시고 중앙일보에 정기적으로 한 면씩 털어 돈벌이를 할때 박영근은 먹고 살 길이 없어 논술학원 강사로 취직하려다가 고졸도 안되는 학력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학원장이 신동엽 창작기금까지 받은 이 중견시인에게 “김소월에 대해 논하라”고 했단다.
나는 박영근이 등단한 1981년판 <반시(反詩)>를 찾기 위해 3년을 헤맸다. 조직활동이랍시고 술추렴으로 세월만 보내는 대신, 서점에 가서 돈 만원만 주면 <창비> 가을호에 실린 추모특집에서 노동자를 노래했던 노동자 박영근을 만날 수 있다.
-이정호 공공연맹 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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