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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

월간 네트워커 12월호에 기고함


 이젠 아주 옛날 얘기지만, 내가 약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아스피린 탓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골에서 자란 탓일까,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은 병에 대한 저항력과 치유력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었다. 약이 꼭 필요하면 천연물에서 유래한 약을 먹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아스피린과 같은 합성의약품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요것이 사람의 몸에 들어와서 열을 떨어뜨리고, 염증을 낫게 하고, 통증을 가시게 하다니, 영 불쾌했다. 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이놈들을 몰아내려면, 그래, 약을 좀 공부해야겠구나.


아스피린은 물론 완전한 인간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반합성의약품이다. 수천년 전부터 버드나무 껍질에 함유된 살리실산이 해열, 소염, 진통효과가 있다고 알려졌고, 19세기 말에 이 살리실산을 아세트산으로 처리해서 만든 것이 아스피린이다. 아스피린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해열진통제일 뿐만 아니라 요즘은 심혈관계 질환의 예방약으로 쓰임새가 확대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아스피린을 만병통치약으로 신봉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아도 약은 곧 독이다. 약은 모두 약효 못지않은 다양한 부작용을 갖고 있다. 부작용이 약효로 인정받기도 하고(아스피린의 혈전용해작용), 부작용 때문에 시중에서 각광받기도 하고(기침약 덱스트로메트로판의 환각작용), 부작용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약을 쓰기도 한다(항암제로 인한 탈모 등 독성작용). 약의 종류를 불문하고 쇼크와 알러지와 같은 과민반응이나 특이체질반응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상당하다.


인터넷은 현대인들에게 주어지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요 처방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갈수록 인터넷의 부작용이 약효를 압도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황우석 스캔들을 둘러싸고 인터넷 공간을 진지삼아 벌어지는 온갖 논란과 상당수 누리꾼들의 독선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누리꾼들의 책임만은 아니다. 올바른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가들과 각 직능 집단들, 언론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거나 도리어 조장하는 정부의 책임이 더욱 크다. 심지어, 누리꾼들 덕분에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는 난자 확보가 아주 쉬워졌다며 반색을 하는 어떤 과학자를 만나고는 아연했다.


워낙 오래되어 약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펜토바르비탈류에 속하는 어떤 수면제의 부작용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잘못된 판단에 대한 믿음은 높여준다! 가히 환상적이다. 적절한 정보가 자유롭고 충분히 공유되지 못한 채, 왜곡된 여론이 기승을 부리는 인터넷 공간이 만들어내는 부작용이 바로 그것 아닌가. 인터넷이 아스피린보다 더 유효한 처방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늘 당장 해야 할 투쟁이 무엇인지 다함께 찾자. 황우석에게 가리고 우리들의 불감증에 덮여서, 외롭고 비참하게 숨져 간 고 전용철 동지의 명복을 빈다. (2005.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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