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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을 위해

 

<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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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이탈리아 동지들의 이전 번역 글에서 우리는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이 아닌가’에 대해 다루었고, 여기서는 ‘무엇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정당인가’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다시 한번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위해, 우리의 웹사이트(www.leftcom.org)에 올려진 문서들을 참조한다.

 

 

맑스주의 분석을 견지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진정한 코뮤니스트 대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행동으로만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당도 계급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경제 체제와 사회의 혁명적 전환을 위해 우리는 혁명정당의 역할이 근본적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최근 모든 사람이 ‘당’이라는 단어를 선거와 부르주아 제도와 연관 짓는다. 이것은 톨리아티(Togliatti)의 구(舊)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공산당)과 그 구성원들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혁명가들이 코뮤니스트당에 부여한 기능은 오늘날 사람들이 (심지어 스스로 코뮤니스트들조차도) 생각하는 것과 꽤 다른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의 기능은 다음과 같다:

 

”...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에게 사회주의 사상과 정치적 의식을 부여하고, 자발적인 노동-계급 운동과 불가분으로 연결된 혁명정당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정치적 조직화와 정치적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레닌, 「우리 운동의 시급한 책무」)

 

”... 투쟁하는 조직 건설과 정치적 선동 행위는 어떤 ‘단조로운, 평화로운’ 환경에서도 필수적이다. 어떤 시기에서든, ‘혁명정신이 쇠퇴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라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러한 종류의 활동이 특히 필연적인 것은 바로 그러한 시기, 그러한 환경에서인데, 폭발과 분출의 시기에 조직을 만드는 것은 너무 늦기 때문이다; 정당은 시기의 도래에 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여야 한다. “(레닌,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사회의 혁명적 변형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주역이 되는 행동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자발적으로 ‘오직’ 계급 본능을 발전시킨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할 현실적인 필요에 대한 인지 없이, 즉각 경제 조건을 방어하도록 자극하는 의식이다. 그것은 장기적이고 단호한 투쟁을 가능케 하지만 전략적 관점에서 더 나아갈 수 없도록 한다. 물론 이것은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보유한 이데올로기적 우월성의 지속적인 영향 때문이다. 특히,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이 경제 체제가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유일한 것이고, 역사적 산물이 아니라 거의 자연적 결과이므로 만약 필요하다면 개선될 수 있는 가치 있는 자산으로서 보호되어야 하지 정면으로 공격받거나,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믿도록 해 왔다.

 

코뮤니스트의 기능은 정확하게 이것이다 : 계급을 위한 혁명적 정치적 기준점이 되어, 혁명적 사상, 의식, 그리고 정치적 의제를 계급에 전달하는 것이다. 코뮤니스트당은 혁명적 전위의 조직, 혁명적 의식(자본주의의 본질과 이 체제를 극복할 필요성에 대한 깨달음)을 발전시켜온 이들의 조직이어야 한다. 따라서 코뮤니스트당은 가장 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혁명적 의식을 발전시킨 (자신의 뿌리가 되는 계급의 이해를 포기한) 비(非)프롤레타리아트를 집결시킨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정당은 대중정당이 아니라 코뮤니스트 핵심 그룹의 전위정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정당은 계급 전체에 호소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로 혁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힘과 독립적으로, 역사적 단계에도 불구하고, 코뮤니스트들은 계급에 개입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에 개입하여 사람들의 경험을 기름지게 하고, 계급의 현실을 경험함으로써 분석 능력과 정치적 강령을 풍부하게 해야 한다. 계급투쟁의 정치적 도구로서 당은 항상 계급투쟁에 함께하는 노력을 해야 하고, 그것은 투쟁이 퇴조기에 있든 회복기에 있든 관계없이 그러하다.

 

”현장에서 혁명적 요구를 제안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노동자 투쟁의 불안정하고 허약한 현재 조건 속에서도, 글만 쓰고, 그리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의도에서도 언제나 논쟁적인 개인적 활동으로서의 이론화만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정치적 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오노라토 데이먼)

 

코뮤니스트들은 혁명적 정치의 기준점으로 행동하며, 계급의 부문들을 자극하여 자신이 처한 착취의 조건에 대해 혁명적 비평을 할 수 있도록 개입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계급투쟁에 개입해야 한다.

 

혁명정당은 이론적 준비, 실질적인 조직과 정치적 지도력의 요체로, 계급투쟁의 산물인 동시에 요소이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 실현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이다.

 

혁명정당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이론과 비판의 지속적인 정교화를 먹고 자란다; 지도부 형성과 일상적인 정치 투쟁에 참여하여 계급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조직을 위해 조직적 성장을 이룬다.

 

혁명정당은 무분별한 그룹의 통일과 강령에의 순응의 결과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투사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원칙과 전술, 자신의 목적을 세우는 혁명가 모임의 중심이다.

 

혁명정당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 조직이다. 그 구성원들은 작업장에서, 이웃들에서, 그리고 모든 다른 프롤레타리아 환경에서 계급의 강령을 방어하고 선전하는 데 적극 개입하거나 그 싸움에서 유용하게 통합하여, 보조적 업무를 담당한다.

 

혁명조직은 조직의 근본적인 문서(강령, 테제 등)에서 표현된, 방법, 원칙, 그리고 목적을 공유하는 조직이라는 사실이 특징이다.

 

부르주아 좌익정당이 자신을 지배체제 또는 심지어 그들의 지도자와 동일시 할 동안, 혁명정당은 투사들 전체를 중시한다. 그 내적 삶은 민주 집중주의 방식으로 지배되고, 강제적인 시행을 통해서는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유기적 통일이 실현된다. 물론 절대적인 보증은 있을 수 없지만, 그것은 공동 원칙에 기초한 토론을 통한 이론적, 실천적 균질화의 일부이며, 모든 투사가 정당의 정치적 전선에서 주역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지도부를 선출하는데, 이것은 집단 집행 체제를 통해 당의 정치적 중앙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낼 힘은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연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을 위해 일하는 것은 미래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2020년 5월 12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5-21/for-the-international-party-of-the-proletar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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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임신중지를 범죄로 낙인찍는 부르주아 정부

임신중지를 범죄로 낙인찍는 부르주아 정부

- 육아, 가사, 출산의 사회화 없이 성·재생산권 보장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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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7일 문재인 정권은 형법상 낙태죄를 남겨 두고 낙태 허용 범위만 일부 확대한 형법과 모자보건법의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신 14주까지 낙태는 조건 없이 허용되지만, 임신 15~24주 이내에는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이때 국가 지정 기관에서 상담을 받은 뒤 24시간의 숙려 기간을 거쳐야 한다. 임신 24주 이후 낙태는 지금처럼 금지된다. 또한 의사는 개인의 신념에 따라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할 권리를 가진다. 결론은 허락받지 않은 임신중지는 계속 낙태죄로 처벌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동안 낙태죄 폐지 운동은 단순히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반대를 넘어선 포괄적인 성과 재생산권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회와 정부 부처들은 성과 재생산권 보장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퇴행적이고 기만적인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통해 낙태 처벌 유지와 규제를 계획하고 있었다.

 

낙태죄 전면 폐지! 임신 주 수·사유 제한 없는 임신중지권 완전히 보장하라!

 

임신 주 수(妊娠週數)에 따른 임신중지 제한은 다양한 사례에서 보듯이 후기 임신중지를 줄이는 데 효과가 없다. 의무 상담과 24시간 숙려기간 또한 유럽의 사례에서처럼 임신중지에 대한 장벽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른 허용 사유의 추가는 사회적 재생산을 책임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여성 개개인에게 떠넘기는 행위이다. 역설적으로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배경과 조건은 완전히 무시한 내용이다. 여성이라도 사회계급은 다르며 계급에 따라 임신중지에 대한 대처도 다르다. 낙태 처벌과 규제는 노동계급 여성, 청소년에게 특히 해악적이다. 부르주아 여성들은 낙태 규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낙태를 선택할 수 있지만, 노동계급 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여성의 안전한 임신권, 출산권, 임신중지권의 보장은 여성 노동권뿐만 아니라 노동력 착취의 종식과도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신 주 수와 사유에 제한 없이 임부의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권이 완전 보장되어야 하며, 모든 여성이 안전한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무상 임신중지 시술이 시행되어야 한다.

 

또한 여성의 결정권을 부정하기 위해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시키는 논리에 장애인의 생명을 동원하는 모든 시도에 반대한다. 모든 장애인이 임신과 출산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하고, 양육에 참여하고 가족 구성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사회적인 지원이 보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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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권을 지지했던 많은 지지자조차 ‘여성의 출산권, 임신중지권을 국가가 법으로 제한하고 처벌하는 것은 여성 몸에 대한 국가폭력’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도 부르주아 정부는 왜 이토록 낙태 규제를 고수하려고 하는가? 그 배경은 무엇인가?

 

계급 분화와 사유재산 발생을 배경으로 탄생한 국가와 가부장적 가족제도, (형식적) 일부일처제는 모계 중심의 사회를 뿌리째 흔들며 여성을 종속적 존재로 전락시켰다. 이는 성차별은 물론 성 억압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처럼 성차별과 성 억압은 지배 질서 유지의 핵심이다. 그리고 성차별, 성 억압의 오래된 증거가 바로 낙태죄이다. 지배계급은 낙태죄에 대한 온갖 이데올로기(혼전 순결, 생명 윤리 등)를 동원하여 피지배 계급을 복종적이고 순종적으로 길들여 왔다. 이렇게 낙태죄는 여성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에 대한 성 억압이다. 그것은 재생산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작동되었다. 따라서 낙태죄 폐지와 성과 재생산권 쟁취는 여성뿐만 아니라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육아, 가사, 출산의 사회화 없이 성·재생산권 보장은 불가능하다!

 

여성 몸에 대한 결정권을 여성 자신이 아닌 국가가 행사하는 것은 여성에게 그 역할을 어머니로 제한하고 부르주아 핵가족을 사회적 모델로 형성시키는 성도덕과도 연결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제도는 온갖 성차별과 성 억압적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통로이기도 하다. 낙태죄 폐지를 넘어서 포괄적인 성과 재생산권 보장은 성차별, 성 억압, 노동력 착취가 일상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자본주의는 사회화의 기본단위로서 가족을 넘어설 수 없다.

 

낙태죄 전면 폐지는 여성의 몸에 대한 모든 차별 및 폭력 폐지와 가부장적이고 여성 억압적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다. 성과 재생산권 보장의 출발은 육아와 가사, 출산의 사회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육아, 가사, 출산의 사회화는 성 억압, 성차별을 넘어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갖게 되는 근거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억압과 착취, 계급 분열을 지양한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실현할 수 있다. 낙태죄 전면 폐지와 육아, 가사, 출산의 사회화를 위해 투쟁하자!

 

육아, 가사, 출산의 사회화! 성·재생산권이 완전히 실현되는 코뮤니스트 사회로!

 

2020년 10월 19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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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전망 창립 8년] 인터내셔널 건설과 세계혁명을 위한 첫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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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창립하면서

 
 

1.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더는 ‘진보정치’, ‘좌파정치’, '노동자당 건설' 운운하면서 고리타분한 대립을 논하지 말자. 가까이에서 보든, 멀리에서 보든, 우리 주변에 펼쳐진 ‘노동자 투쟁’과 미디어에 비친 ‘진보정치’는 그 어느 것도 공통점이 없다. 정확히 말해, 96~7년 노동자 총파업 투쟁 이후,  ‘민주노총 정치방침’으로 형성된 ‘진보정당(정치)’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여전히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말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가 노동자계급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에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렇다고 야권연대 진보정당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지도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공동전선(통일전선)을 통한 ‘노동자 독자정당’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정치노선적으로 실체도 불분명한 민족해방 좌파, 중앙파, 현장파를 포함한 공동전선 당은 무엇보다, 한국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위기를 ‘계급정치의 부활’이 아닌 ‘지도력의 정치’에서 찾는 점에서 노동자계급에 치명적이다. 또한, 통일전선 당은 그간에 진행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당 건설 공동 활동 경험과 노력을 폐기한다. 대선 정국과 맞물려 진행되는 공동전선 당 전략은 기껏해야 ‘계급성과 혁명성도 애매한 진보좌파연합’으로 수렴될 것이다.

 

  계급투쟁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비관주의와 조급성, 여러 차례 패배의 자책감 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활동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위기가 눈앞에 진행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부흥을 보고 있다. 파업과 거리투쟁을 통해서 동지를 찾아내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올라오는 대중의 잠재적 힘을 주목해야 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혁명운동의 정치원칙을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혁명운동의 역사와 한국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의 평가와 원칙을 되새기려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반대하는 존재’가 아니라, 한국에서 ‘노동자국제주의’ 관점에서 코뮤니스트 운동을 생성해나가려는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려고 한다.

 

  첫째, 80~90년대, 아니 아직도, 여전히 한국 운동사회의 이론적 전통으로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이른바 ‘맑스-레닌주의’ (혁명적 맑스주의와 구분되는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공식 전통)에 근거한 혁명이론과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전제로 한다.

 

한국의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해방 해결을 주요 실천투쟁으로 전개한 다수파인 NL운동(스탈린주의 변종)은 한국 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편성되거나 개혁적 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 형성으로 귀결됐다. 또한, NL노선과 대립했던 이른바 80~90년대의 ND, PD운동의 이론적 뿌리가 사실은 소부르주아 민족경제론, 국민경제에 근거한, 소련 관변학자들의 반독점민주변혁론 -> (관제고지 선점으로서) 재벌 국유화-> 권력장악 -> (일국)사회주의 노선이었다고 성격을 규정짓는다.

 

  둘째, 1917년에서 192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봉기 상황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혁명은 세계혁명의 그 첫 단추로, 러시아혁명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노동자 봉기시도가 어떻게 좌절됐는가가 혁명적 맑스주의 실천운동의 복원과 연관되어 있다. 이 점은 ‘사회주의 조국 소련을 방어하자’는 일국사회주의 노선의 실천적 결과로서 소련의 대외협력기구로 전락한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세계 프롤레타리아 투쟁과 더는 연결되지 않은 코민테른은 코뮤니스트 좌파, 혁명운동 세력을 배제하고, 국제주의를 포기한다. 독일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의 등장과 함께 반혁명의 시기가 열리고,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는 결국 패배했다.

 

한국사회의 이론적 실천적 풍토에서,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서 일방적으로 혹평된 좌익공산주의(코뮤니스트 좌파) 운동은, 역사적으로 혁명적, 비타협적 맑스주의 이론과 실천운동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더욱, 발본적으로, 러시아혁명에서 ①‘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가자본주의 도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의 모순 (레닌) ② 혁명의 타락으로서 만들어진 사회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이른바 모종의 사회주의,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규정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한다. 또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관료주의를 어떻게 낳았는가? 노동자평의회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그 과정에 볼셰비키당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가 이론적으로 검토, 직시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전히 맑스주의·사회주의 활동가를 짓누르고 압박하는 이른바 보편적 ‘혁명 모델’로서 러시아 혁명 상황의 일반화는 분명히 지양되어야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실천과 사상 이론에 대한 논쟁을 시도하고 모색해야 한다.

 

  셋째, 현재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 자본주의 쇠퇴의 경제위기 정세와 점증하는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투쟁, 국제주의에 입각한 세계혁명을 향한 혁명적 실천과 이론적 과제를 한국사회에서 (혁명적) 코뮤니스트 운동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노동자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라는 혁명적 맑스주의 정치 실천과 이론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코뮤니스트 혁명 조직

 

  첫째, 자본주의 쇠퇴의 새로운 국면(대공황)은, 68혁명 이후 부활하기 시작한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파고를 2008년 이후 혁명의 현실성으로 바꾸어 놓고 있다. 전쟁과 야만이냐, 혁명과 코뮤니즘이냐가 여전히 유효한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둘째, 한국에서의 1950년~1990년대의 반공, 반혁명 이데올로기의 길이와 깊이는 냉전체제 해체와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얕아지고 있다. 대신 민족주의, 애국주의 등 파시즘의 요소는 언제든 창궐할 수 있다. 이렇듯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반공과 극단적 스탈린주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내의 젊은 저항세력과 코뮤니스트 노동자의 소생은 혁명운동의 새로운 조건이다.

 

한편, 1987년 이후 성장한 대공장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조운동과 1990년 후반 등장한 사민주의(진보정당)운동은 퇴보의 길을 걷다가, 현재는 총체적 파산 상태를 맞이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러한 양 운동의 흐름을 거부하는 노동자들의 전반적 불신 현상, 새로운 운동에 대한 요구, 그리고 기성운동에서 소외된 비정규노동자, 실업자, 빈민, 장애인, 소수자들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운동 출현의 기반이다.

 

  셋째, 자본주의 경제위기로 인한 불안정노동의 증대와 한국에서의 1998년 이후 노동자운동 패배의 연속은, 노동자 조직화의 기나긴 정체현상과 계급운동의 자신감 결여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것은 계급투쟁의 퇴조 현상이 아니라, 낡은 운동의 자연스러운 몰락이자 새로운 계급투쟁의 주체가생성되는 과정이다. 또한, 계급투쟁의 최종목표를 분명히 하면서 오랜 기간 계급 안에서 튼튼히 뿌리내린 혁명 조직과 아래로부터의 투쟁의지가 직접 실현되는 평의회적 계급조직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상황은 조합주의, 사민주의 등 제도권 운동과 지역(국내) 운동에 갇혀있는 노동자 정치운동에 새로운 조건의 창출과 전망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코뮤니스트 혁명 조직이 쇠락하는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아래로부터의 계급운동을 촉진하고 국제주의적 전망을 제시하며, 혁명의 현실성과 실현가능한 코뮤니스트의 정치적 목표를 분명히 하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 정세는 이러한 코뮤니스트 노동자 조직의 출현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공세적으로 펼쳐나갈 것을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다.

 

 

 

3. 사회주의 정치 운동 평가와 전망

 

  1992년부터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이거나 공개영역으로 나온 사회주의 서클들은 선거주의와 의회주의로 경도되면서 합법·개량주의로 나아갔다. 특히 1997년은 양날개론으로 표현되는 민주노총의 건설과 그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건설로 혁명적 사회주의의 비공개영역과 적대적으로 분리되었다. 2002년의 대선은 이러한 관계설정을 마무리하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 「노동자의힘」과 「사회당」은 선거전술에 집착하여 혁명정당 건설을 통한 혁명주의의 복원으로부터 이탈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서클과 함께 혁명당을 건설하려는 노력은 무산되었다.

 

  2003년 「사회주의정치연합」은 중도주의와 선을 긋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연대와 단결을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2005년 7월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의 제안이 있었다. 그 제안은 다음의 몇 가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자본주의의 표면적 사멸이라는 역사유물론에 입각하여 비맑스주의의 역사적 오류를 비판·극복해야 한다는 점,

 

둘째, 자본주의의 객관적 구조와 혁명적 주체의 변증법적 결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계급혁명을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인식했다는 점,

 

셋째, 과잉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자본의 전략으로 모면할 수 없고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야만에의 회귀로 나아가, 결국 인류의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는 점,

 

넷째, 1920년대 초반의 세계 혁명의 실패, 스탈린주의의 등장은 반혁명의 역사적 반동으로 나아갔고, 이러한 역사적 퇴행에 도움을 주었던 사회민주주의, 무정부주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의 유지·강화를 보완하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고, 혁명세력의 복원을 가로막았다는 점,

 

다섯째, 지금까지의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진정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목표로 한 각각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 건설의 과제가 우리에게 놓여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권력기관인 노동자평의회와 변증법적 결합으로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 모임의 제안은 세계혁명을 향한 세계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진영의 국제주의 실현을 위한, 세계 코뮤니스트 연대를 위한 것이며, 그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들도 함께 하면서, 우리의 혁명적 운동을 복원해내고 고립·분산되어 각개약진하고 고군분투해왔던 세력들이 새로운 각오로 힘차게 연대 전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을 하자는 취지였다. 2년간에 걸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기반으로 이 모임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을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동의한 주체들을 중심으로 2008년 2월 출범하게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당 건설을 공개적으로,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 흐름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국가보안법상의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재판 투쟁을 통한 사상 투쟁과 줄기찬 혁명주의 선전·선동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서클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인자들이 다시 한 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 결성제안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와 분화된 세력이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과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잔존그룹은 「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로 각각 실천하게 된 것은 혁명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전술 문제로,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에서 코뮤니스트 좌파 세력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활동의 전망에 있었다.

 

  우리는 혁명주의 세력의 노선 투쟁을 통한 경쟁과 연대·단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동안 혁명세력이 반혁명적 스탈린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각종 기회주의 세력과 대적 전선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해 온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노선으로 논쟁하고 계급으로부터 검증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선투쟁의 역사가 이미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세계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현하려는 현 단계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맑스주의 사상과 실천의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 원칙·강령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원칙과 투쟁을 계승· 복원하고, 다른 혁명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하며 다시 연대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가 로두스다.

 

 

 

4.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의 역할에 대해

 

  첫째, 여전히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여러 분열적이고 반혁명적 경향의 민족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자운동이 근본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지난한 계급투쟁 속에서 주체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단련되며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에 혁명 조직이 필요하며, 그 조직은 코뮤니스트 좌파의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에 구체적이면서도 전략적으로 함께하는 정치조직이어야 한다. 여기서 현실의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정치를 직접 만나게 하는 활동이 코뮤니스트 조직의 기본적 역할이다.

 

  둘째, 정세측면에서 현 자본주의 쇠퇴기, 경제위기 상황에서 발생한 세계적인 계급투쟁의 물결에 세계혁명운동의 일부로써 조응해야 한다. 또한, 와일드 캣(비공인파업) 투쟁과 점령운동으로 표현되는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에 혁명 조직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과업과 자기해방’이라는 명확한 코뮤니스트 전망으로 개입해야 한다.

 

  셋째, 과거 당 건설 운동 과정을 철저히 평가하고, 그간의 성과이자 한계였던 '철저한 강령 원칙과 실천 검증'에 따른 혁명적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의 재구성을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당 건설 운동의 오래되고 치명적인 오류인 당면주의와 노동자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는 현실 계급투쟁의 개입에 있어 ‘강령적 실천’이라는 기본 역할과 혁명적 주체의 자기조직화라는 전략적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지만, 당면주의는 기본과 원칙 모두를 조급한 정세/전술 대응으로 놓쳐버린다. 따라서 낡은 조직 유지와 양적 확산만을 위해 강령원칙을 폐기하거나 당면한 경제투쟁에만 몰입하는 노동자주의와 조합주의를 극복한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혁명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가장 올바르다’라거나 ‘세계에서 유일하다’라는 종파주의는 자기 입장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증거이다. 코뮤니스트는 결코 ‘진리의 담지자’가 아니기 때문에 토론과 사상투쟁에 있어 모든 것을 열어놓아야 한다. 이것은 조직 안과 밖으로부터 모든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공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코뮤니스트 노동자들의 집단적이고 집합적인 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2012년 10월 13일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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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건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제도권 정당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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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올가을 본격적으로 진행될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진영(이른바 '좌파' 또는 '사회주의 자임 세력'과 분명히 구분되는)의 '당 건설' 논의를 앞두고, 당(분파)에 대한 기본 개념과 당 건설 원칙을 정립하기 위해 ICP를 포함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과 자료를 공유합니다.

 

 

앞으로의 연재에는 과거 '사회주의당 건설 운동' 실패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과 성찰 없는 조직보존 도구로서의 (사이비) 당건설 논의 흐름, 혁명적 주체와 전망이 부재한 후퇴한 당 건설 경로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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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은 자신을 미래 국제 노동계급 정당의 핵심 중 하나로 여긴다. 그러나 ‘당’이라는 단어는 종종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심지어 우리 정치에 대해 동의하는 이들 가운데에서도 그러하다. 어쨌든, 선거를 통해서든 군사적인 수단을 통해서든, 자본주의 국가를 지배하고자 하는 당은 좌우를 떠나 전혀 부족하지 않다. 우리가 종종 반복해서 이야기하듯이, 우리 비전은 이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기다리고 있는 정부가 아니라 미래 세계를 위한 투쟁의 안내서이다. 코뮤니스트 투사(Battaglia Comunista)의 우리 동지들로부터의 이 짧은 번역문은 바로 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반복하는데, 우리 웹사이트(www.leftcom.org)에 게시한 ‘노동계급은 정치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그리고 ‘미래의 인터내셔널에 대하여’와 같은 글과 함께 읽어야 한다.

 

 

국가, 정부, 의회, 지역 정부... 이 모든 제도는 부르주아 계급이 창조하고 관리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가들의 억압적인 정치 도구를 대표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투사하는 정치-관료적 상부구조와 다름없다. 국가는 부르주아 계급의 조직된 정치-경제-문화 영역이며, 다른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도 그것은 진실이다.

 

"근대 국가의 행정부는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통된 문제를 관리하는 위원회와 다름없다.” (맑스 & 엥겔스, 「코뮤니스트 선언」)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 수준에 따라 국가는 ‘민주적’이거나 노골적인 ‘독재’ 형태를 취한다.

 

"국가의 지배 양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권이나 다른 이러저러한 권리가 있든 없든, 또는 공화국이 민주적이든 그렇지 않든, 근본적으로 권력은 자본의 손에 있다."(레닌, 「국가: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의 강연 일부」)

 

‘민주주의’는 사실 부르주아 독재와 다름없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프롤레타리아이며, 따라서 - 그들이 우리가 믿기를 바라는 것처럼 - 이러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 다수가 제도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면, 어떻게 통과된 모든 법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에 반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가능한 최고의 정치적인 외피이다. ... 자본은 ... 그 권력을 매우 공고하게 확립하는데,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어떤 사람이나 제도, 또는 어떤 정당의 변화도 이를 흔들 수 없다."(레닌, 「국가와 혁명」)

 

이 ‘민주주의’ 선거는 부르주아지 손에 있는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정치 무대이다. 실제로 부르주아지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매스미디어부터 시작하여 학교, 종교 제도로 모양 짓는 도구들을 통제한다. 이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제도적 결정은 자본가들의 경제적 필요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국가의 관리자들은 지배계급의 대표들이다.

 

이러한 제도들을 프롤레타리아계급이 자본가들의 착취에서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환상이며, 이 제도들이 진실로 부르주아지가 경제적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보유한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수단인 한 그러하다. 파리 코뮨(1871년) 이후, 맑스는 「코뮤니스트 선언」 독일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코뮨으로 특히 한 가지는 증명되었다. 즉,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 기관들을 단순히 손에 쥐고 있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맑스 & 엥겔스, 「1872년 서문」)

 

다양한 제도권 정당들은 지배하는 자와 그 반대에 있는 자들 사이에서 기만적인 게임을 수행한다. ‘당’끼리 대립 뒤에는 종종 부르주아지의 서로 다른 분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을 뿐이거나, 더 단순하게는 더 안락한 제도권 의석에 앉으려는 서로 다른 정치인들 간의 무의미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 체제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최선의 경우에도 정당은 관리에 있어서 환상에 불과한 차이를 제안할 뿐이다: 보다 인간적인, 공정한, 더욱 ‘민주적인’ 얼굴의 자본주의 등. 의회에 의석을 차지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 하는 자칭 코뮤니스트 정당들 또한 진정한 혁명적 강령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들은 노동자 투쟁을 위한 제도적인 경로라는 환상만을 확산시킬 뿐이며, 대부분 언제나 (이른바 ‘급진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라도) 지역 기관들에서 다른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한다.

 

따라서 우리의 약속은 선거에서 대중 투표를 목표로, 제도권 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정당의 건설이 아니다.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당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정치적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정당이다.

 

2020년 5월 13일

국제코뮤니스트경향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0-05-18/we-are-against-all-institutional-par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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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1호] 4년에 한번 5년에 한번 「빵과 서커스」

4년에 한번 5년에 한번 「빵과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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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로마는 빵과 서커스로 유지된다.”라는 말로 로마 사회를 비판했다. 빵과 서커스(Bread and circuses)는 유베날리스가 고대 로마 사회의 세태를 시편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빵과 게임 (Bread and games) 이라고도 한다.

 

축제를 변형시킨 형식이 로마의 ‘키르쿠스 (Circus 서커스)’ 다. 서커스는 로마 황제가 정치적인 불만 세력이 될 농후한 프롤레타리아트(하층 로마시민)에 눈요깃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대형 원형 경기장의 이름이다. 아울러 로마의 시민은 매일 빵도 배급받았다.

 

로마제정의 우민정책을 “빵과 서커스”라고 비꼰 사람이 바로 당대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다. 당시 원형 경기장에서 이루어진 구경거리는 ‘벤허’의 전차경주, ‘쿼바디스’의 사자 (기독교도를 잡아먹는) 검투사의 검투 시합 등이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44년 동안 재위하면서 총 44번의 대규모 서커스를 열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릴 때 나는 붉은 악마의 함성 뒤로 끌려가는 노동자를 보았고, 생존을 철거당하는 노점상도 보았다.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2~3년에 한 번씩 번갈아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저들만의 축제를 보았다. 붉은 악마의 생동감을 느끼기 전에 씁쓸함을 먼저 느낀 것은 그만은 아닐 것이다.

 

조카와 축구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나는 그 원형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을 보면서 검투사가 생각이 났다. 신분적으로는 자유롭게 보이나 여전히 자본주의 검투사처럼 느껴졌다. 그냥 축구를 축구로 보면 될 것인데 자꾸 답답하고, 허하다. 며칠 후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난투극을 벌인다. 용감무쌍하다. 검투사 같다.

 

‘그래 노래를 만들자. 곰곰이 생각해보고 하고 싶은 말을 노래로 만드는 거야...’

내 1집 타이틀곡인 「빵과 서커스」는 이렇게 만들었다. 아랫글은 나보다 더 이 노래를 잘 설명한 어느 기자의 글이기에 인용해본다. 좀 쑥스럽지만...

 

 

“「빵과 서커스」는 시대 상황에 대한 촌철살인의 풍자곡이면서 권력과 관료화된 운동에 대한 신랄한 비틀기이다. 이 곡에서 우창수는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과 운동의 회절과 변절, 대의주의와 직접민주주의, 노동조합의 관료화와 권력화를 비판하며 혁명과 동학을 연결한다. 그리고 그들의 축제가 아니라 우리의 축제를 벌이자고 말한다. 이 곡의 테마가 된 글을 잠시 빌리면, 그는 월드컵과 수많은 관 주도 축제, 그리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을 로마의 풍자 시인이 말했던 그들만의 축제로 보고 21세기 한국사회의 오늘과 실업자, 철거민, 조합에서 해고된 노동자 등을 통해 민중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눈에 대의제 국회는 정략적 이익을 위해 주먹질도 마다하지 않는 21세기의 검투장이며 민중은 대의제 아래 민중 의지와 상관없이 거수기로 전락하고 있음을 경고하며 풍자한다.

 

이러한 정치적 대안으로 동학의 ‘포’와 ‘접’이 가졌던 소통에 주목하고 사라진 광장정치와 높아만 가는 대중정치판의 단상을 허물어 우리들의 또 다른 축제를 벌이자고 노래한다. 그가 왜 2007년 말미 정치 계절에 음반의 제명을 「빵과 서커스」로 택했는지 알만하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속에 한국에서는 4년 만에 총선이 치러졌고, 도쿄 올림픽은 연기되었다. 지난 국회에서 난투극을 벌인 몇몇 검투사 의원들은 낙선했고, 직접민주주의는 더욱 멀어졌다.

 

2020년 4월

우창수

 

 

 

빵과 서커스

 

 

 

작사, 작곡, 노래 : 우창수

 

 

 

 

 

1.

 

화려한 불꽃과 미끈한 다리

 

웃으며 행진하는 높은 양반들

 

쳐다보고 오르려 하지마라 축제를 즐겨라

 

달콤한 초콜릿 발렌타인 데이

 

코코아를 따러가는 어린 노동자

 

거대한 써커스 공을 굴려라 지문 없은 작은 손 헤 -

 

 

 

2.

 

지상의 방한칸 포크레인 삽날

 

아스팔트 노점상의 불안한 하루

 

빚더미 실업자는 멀리 떠나고 술병은 외롭다

 

조합에서 쫓겨난 황당한 해고자

 

추방당한 블랑카는 소식이 없고

 

생존의 벼랑 끝은 농성중이다 날 벼린 방패와 함께 헤 -

 

 

 

3.

 

오월의 핏빛 하늘은 맑게 개이고

 

87년 7,8,9는 다큐가 되고

 

광화문 네거리 촛불 밝혀라 팔려갈 진보를 위해

 

우리의 대표를 굳게 믿어라

 

의사당 검투사의 빛나는 용맹

 

민주의 시대를 굳게 믿어라 우린 모두 거수기 헤 -

 

 

 

4.

 

저아래 접들이 기포를 한다

 

은밀히 돌고 도는 사발통문이

 

혁명의 빨강색 비타민 C 우린모두 메신져

 

오늘은 우리들의 축제를 벌이자

 

저들의 빵과 총도 꺽어 버리자

 

공장의 담장은 헐어버려라 두려워 마라 헤 -

 

 

 

(후렴)

 

사년에 한번 이년에 한번 헤이 헤 빵과 써커스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아 헤이 헤 빵과 써커스

 

 

 

나랏 말싸미 민중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헤

 

어깨를 걸고 어깨를 걸고 헤이 헤 밥과 자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헤이 헤 평등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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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1)

역사의 경로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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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나를 포함한 한국의 코뮤니스트 좌파는 세계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주요 논쟁을 역사적으로 점검하고 분석하면서 앞으로의 코뮤니스트운동의 올바른 전망을 제시하는 노력을 지속해왔다.(주1) 이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우리는 150여 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 들고 다시 한번 ‘야만인가 문명인가’, ‘코뮤니즘의 물질적 필요성’을 말하는 역사적, 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자본주의 쇠퇴의 객관적 법칙과 조건이 생산, 권력, 역사의 주체인 노동계급과 만나 서로 침투하는 계급투쟁을 전개하는데 코뮤니스트의 역사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코뮤니스트는 맑스주의 원칙 중에서도 국제주의의 원칙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자본주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 복간 2호, 66쪽)

 

그런데 최근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의 대표적 국제조직인 「국제코뮤니스트흐름」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이하 ICC)의 23차 대회(2019년 5월 개최)에서 발표한 결정문이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정리하고 이후 계속되는 논쟁을 「논쟁」(2)에서 계속 다루려고 한다.(주2)

 

대회 결의문 중에서 특히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2019) : 제국주의 갈등 ; 부르주아지의 삶, 경제 위기」에서 ICC는 22차 대회의 내용을 반복하면서도 역사의 경로인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패러다임이 변화되었음을 명시적으로 제출하여 패러다임 논쟁의 불씨를 던졌다. 이 논쟁에 뛰어든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들은 설립된 지 몇 년이 안 된 새로운 소그룹들이다. 아직 이들 논쟁에 ICC와 「국제코뮤니스트경향」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이하 ICT) (주3)의 본격적 논쟁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1)에서는 ICC와 코뮤니스트 좌파의 소그룹 사이의 논쟁을 간략히 정리하기로 한다.

 

2. 논쟁의 발단 : ICC의 23차 대회(2019년 5월)의 패러다임 변화

 

2019년 5월 23차 대회에서 발표한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2019) : 제국주의 갈등 ; 부르주아지의 삶, 경제 위기」에서 ICC는 자본주의 해체 국면의 역사적 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주4)

 

“1) 30년 전 ICC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국면인 해체기에 들어섰다고 밝혔다. 이 분석은 수많은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틀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의 두 가지 결정적이고 적대적인 계급이 스스로의 결정적인 반응을 부여하지 않고 부딪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역사는 그냥 멈추지 않는다. 아직 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형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삶의 ”동결“ 또는 ”정체”를 가능하게 한다. 위기를 안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 더욱 깊어질수록 총체로서의 사회를 위한 가장 가벼운 전망을 제공할 부르주아지의 무능력,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무능력은 오직 보편화된 해체의 상황으로 이끌 뿐이다. 자본주의는 발끝에서 썩어가고 있다.”

 

이어서 ICC는 1989년 소련 동유럽의 몰락이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역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그 이전에는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이 그 역학의 결정적 요소로서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가 세계전쟁으로 나가던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전복을 전망으로 하는 계급투쟁의 발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두 제국주의 블록이 재구성될 때까지 현재 상황을 규정하는 패러다임 안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가 너무 깊어 결정적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사회의 보편적 진화를 위한 결정적 결과 없이도 깊은 패배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왜 “역사적 경로”의 의미가 더 이상 현 세계의 상황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힘의 균형을 규정할 수 없는지의 이유라는 결론이다.(주5) 그리고 이어서 최근의 제국주의 사이의 긴장을 상세하게 설명한다.(주6)

 

3. ICC의 「역사적 경로 패러다임」 포기에 대한 코뮤니스트 좌파 소그룹들의 비판

 

2019년 5월 ICC의 23차 대회의 결의문이 발표된 이후 특히 ‘전쟁인가 혁명인가’라는 ‘역사적 경로’에 대한 ICC의 입장 변화를 둘러싸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신생 소그룹들이 정면 비판과 방어에 나섰다. 그중에서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 (International Group of the Communist Left) (이하 IGCL)(주7), 그리고 「국제주의자 목소리」 (Internationalist Voice) (이하 IV)가 논쟁의 주역이다.

 

특히 IV는 지속적인 논쟁을 ICC뿐만 아니라 ICT 등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과 벌이고 있다. 보기를 들면, 「ICC와의 논쟁 : 노동자계급인가 대중인가?」 (2019년 3월), 「GCCF(Gulf Coast Communist Fraction)와의 논쟁 :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에 있어서 약점」 (2019년 5월), 「국제코뮤니스트당(Proletarian)과의 논쟁 : 노동자 코뮤니즘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좌파에 속한다」 (2019년 5월 24일), 「ICT와의 논쟁 : 국제주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모호함」 (2019년 4월 27일), 「통일의 새로운 관점에 대한 GCCF에의 편지」 (2019년 7월 20일), 「ICC와의 논쟁 : 혁명조직인가 혁명적 출판인가」 (2019년 여름), 「ICC와의 논쟁 : 혁명적 출판의 변명」 (2019년 8월 23일), 등이 있으며 앞으로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이 두 그룹 이외에 미국의 「GCCF」(주8)와 「WORKERS' OFFENSIVE」 그룹, 스페인의 「해방」 (Emancipation)(주9)이 있다.

 

ICC와 가장 많이 논쟁을 벌이는 IV는 ICC와 친화적이다. ‘역사적 경로’ 문제에 대해서 IGCL을 빗대어 ICC에 대한 비난을 상쇄하려 한다. 「불명예의 교향곡」 (2019년 8월 22일)에서 이 그룹은 “ICC와 23차 대회에서 최근의 스탈린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화하지 않고 세계 사회주의에 대한 이전의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라고 하는 IGCL의 맹비난을 전하면서 자신들은 코뮤니스트 가치와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방어하고 있다.(주10)

 

이제 ICC의 내부분파였던 IGCL의 ICC에 대한 본격적 비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그룹은 2019년 7월 「ICC의 23차 대회의 대차대조표와 전망 : 새로운 혁명 세력 중에서 기생주의(parasitism)의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 이론의 독을 소개하기」 (2019년 7월) 라는 글에서 ICC의 23차 대회가 ‘역사적 경로’를 포기하고 계급투쟁까지도 청산했다고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2001~2002년 ICC의 조직 위기가 2003년 15차 대회로 이어져 ‘혁명이냐 전쟁이냐’의 역사적 대안을 제3의 방식인 기회주의의 영원한 제안, 다시 말하면 묵시적 전쟁이 아닌 해체의 점진적 진전을 통한 인류의 파괴라는 제3의 대안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주11)

그리고 소련, 동구가 몰락한 1989년 이후 세계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해 더 이상 결정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서 힘의 균형이 어떠하더라도 세계전쟁이 더 이상 의제에 올라와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몰락의 길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말한다.

 

맑스주의의 중심적 정치원칙의 하나인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라는 코뮤니스트 강령은 더 이상 배반할 수 없다고 보는 IGCL은 오직 유효한 척도는 계급 사이의 힘의 균형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ICT의 입장에 동조한다.

 

ICC의 최근의 활동이 최근에 새로운 혁명 세력으로 형성되어 등장하고 있는 그룹과 써클, 미국, 호주, 영국, 남미 등의 그룹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보다 특정 기생그룹을 향한 공격적 외교로 보이며, ICT의 진정한 몰입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주12)

 

23차 대회를 둘러싼 토론과 문제 제기는 「ICC Forums」에서도 이어졌다. 여전히 해체의 조건에서 계급투쟁은 역사의 동력이 아닌가? 코뮤니즘도 역사적 의제에서 떠난 것인가? 해체는 야만을 의미하는가? 부르주아지는 70, 80년대에 노동계급을 통제할 수 있었는데 왜 90년대 이후에는 점차 통제력을 잃게 되었는가? 역사적 경로에 대한 ICC의 패러다임 변화는 완전히 새로운 출발인가?(주13)

 

그러나 진정한 논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논쟁은 두 국제조직인 ICC와 ICT 간의 대립과 치열한 논쟁으로 촉발되고 지속되었기 때문이다.(주14) 새로운 논쟁의 시작은 다시 제국주의 전쟁에서 시작되고 있다.

 

4. ICT의 문제제기 – 중국-러시아 블록의 창조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1989년 이후 두 진영 사이의 균형이 깨어지고 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ICC의 주장에 대해 새로운 제국주의 블록이 반(反)미국 블록에 대항하여 「모스크바-베이징」으로 재구성되고 있으며, 지역의 중요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이란의 부상을 주목하는 해석을 ICT는 제안하고 있다.(주15)

 

세계전쟁은 더 이상 쟁점이 아니라는 ICC의 주장이 ICC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코뮤니스트 좌파」의 방법과도 어긋나는 관념론적 역사관이라고 비판한다. 1946년 「프랑스 코뮤니스트 좌파」는 국가 사이의 이해갈등과 강대국이 약소국의 지배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으며, 제국주의 사이의 이해갈등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의 경우 러시아와의 (그리고 중국) 동맹, 또는 미국과의 동맹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본다.

 

세계전쟁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것은 ‘전쟁과 평화’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저항할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위기와 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삶의 조건의 피폐화에 맞서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요구할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의 국제회의에서의 공개토론, 다시 말하여 새로운 찜머발트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앞으로 전개될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의 논쟁은 「코뮤니스트」 11호에 정리하여 싣기로 한다.

 

2019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ㅣ오세철

 

 

 

<주>

 

1. 최근의 정리 글은 “자본주의 쇠퇴기의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실천」 복간 2호, 2019.3.15., 42~73쪽, <사회실천연구소>

 

2. ICC의 22차 대회(2017년 5월 개최)의 결의문은 “22차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대회 :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코뮤니스트」 7호, 2018.4.30.,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참조할 것, 이른바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로서 ICC가 설정한 「해체」 (Decomposition)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3. ICC와 함께 대표적인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조직이며, 그 전의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와 CWO(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이 통합한 새로운 조직의 명칭이다.

 

4. 이 결의문은 2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항의 내용이다.

 

5. 위 결의문 6항

 

6. 위 결의문 7항~15항

 

7. 이 그룹은 원래 ICC의 내부분파였는데, 조직 내부 사건으로 분리된 그룹으로 오래전부터 ICC와 대립해 왔다. 특히 ICC의 “해체”를 놓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논쟁을 한 바 있다. 이 그룹의 입장은 ‘사회적 해체 국면의 ICC 이론의 역사적, 이론적 절벽’ (ICC의 내부분파, 2005)에 잘 드러나 있다.

 

8. IV와 공동성명 「자본주의는 전쟁을 의미한다!」를 낸 미국의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

 

9. 2019년 7월 24일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10. ICC와 IV, 그리고 IGCL과의 논쟁은 더 지켜볼 일이다.

 

11. 윗글, 2쪽

 

12. 윗글, 4~5쪽

 

13. 「국제 상황에 대한 2019 결의 : 몇 가지 관찰과 질문」, ICC Forums

https://en.internationalism.org/forum/16708/2019-resolution-international-situation-some-observations-and-questions

 

14. (주1)에 소개한 긴 글은 두 조직의 논쟁이 자본주의 위기, 세계전쟁의 원인, 맑스주의 원칙과 방법론, 등으로 이어졌고, ICC가 2017년 22차 대회에서 ICC가 자본주의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를 규정하면서 ICC는 세계에서 동떨어진 코뮤니스트 좌파처럼 보이고 있다.

 

15. 「중국-러시아 블록의 창조에 대하여」, 2019.9.28, <An internationalist Articles Selection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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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새로운 혁명 세력에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이론이라는 독물을 갖고 오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 23차 대회의 평가서와 관점 :

새로운 혁명 세력에 기회주의적이고 파괴적인 기생충 이론이라는 독물을 갖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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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문서는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이하 IGCL)에서 발행한 「혁명이냐 전쟁이냐」 12호(특별호)에 실린 '국제코뮤니스트흐름(이하 ICC) 23차 대회 보고서'에 대한 비판의 글이다.

IGCL은 원래 ICC의 내부분파였는데, 조직 내부 사건으로 분리된 그룹으로 오래전부터 ICC와 대립해 왔다. 특히 ICC의 자본주의 쇠퇴기 '해체'를 놓고 2005년부터 본격적인 논쟁을 한 바 있다. 

 

최근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의 대표적 국제조직인 ICC의 보고서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고, 이를 두고 ICC와 IGCL 사이에 논쟁이 먼저 벌어졌다. 이 논쟁은 「코뮤니스트」10호, 11호에 실린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 (오세철)'에 다른 논쟁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위에 소개한 모든 논쟁(토론)은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전체의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이기에, 국제코뮤니스트전망도 작년부터 내부 토론과 국제조직과의 토론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국제코뮤니스트흐름(ICC)은 그들의 23차 대회에 대한 몇몇 문서를 발간했다(주1). 2017년, 그들의 전 22차 대회에 대한 보고서가 몹시 신중했던 데에 비교하면 우리는 유쾌하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이 조직의 「국제평론」에 국제적 상황에 대한 보고서만이 발간되었을 뿐이었다. 22차 대회에 대한 어떤 발표도, 어떤 평가서도 없었고, 이는 아마도 대회가 너무 분열되어 제안된 활동에 대한 보고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언급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반면, 23차 대회는 매우 중요하다 : ICC는 처음부터 갖고 왔던 근본적인 이론적, 정치적 관점인 ‘역사적 경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대회의 진정한 정치적 문제들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23차 대회는 ‘역사적 경로’를 폐기하고 계급투쟁을 포기했다.

 

국제적 상황에 대한 보고서(주2)와 결의안을 읽은 사람들은, 보기를 들어 계급 정체성의 상실(계급투쟁에 대한 보고서)이나, 혹은 그 반대와 같은, 다양한 가지각색의 추상적인 고려사항들 속에서 길을 잃기 쉽다. 수십 페이지에 걸친 이러한 잡동사니 가운데, 독자는 이 문서의 유일한 진짜 관심, 또는 정치적인 입장을 놓칠 수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역사적 경로’에 대한 개념은 현 세계의 상황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힘의 균형을 정의할 수 없으며 [왜냐하면 경로는] 역사적 흐름의 결과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세계 전쟁 또는 계급 대결”(국제적 상황에 대한 결의안). 역사적 경로는 ICC에서 언제나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왔고, 그런 만큼 그들의 전망과 분석에 기반을 둔 이론적, 정치적 유산의 근본적인 요소였다. 오늘날 이러한 그들의 공식적인 폐기는 별로 놀랍지 않은데, 역사적 경로라는 개념은 “세계 전쟁의 유령이 더는 지구를 위협하지 못한다.”(주3)라는 21세기 ICC 자신의 입장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만약 더 이상 역사적으로 대안적인 혁명이나 전쟁이 없다면, 필연적으로 오늘날 기회주의자 ICC는 생존을 위해, 조만간 공식적으로 역사적 경로를 없앨 수밖에 없었다.

 

2001~2002년의 조직 위기는 관념적인 자본주의 쇠퇴 이론의 결정적 승리와 그만큼의 결정적인 통제로 귀결되었고, 내부의 반대가 이른바... 종파주의 또는 기생주의(parasitism)로 비난을 받고 폭력적으로 배제되었다. 정치적인, 원칙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2003년 초, 15차 대회는 역사적 대안, 혁명 또는 전쟁, 그러니까 제3의 길, 언제나 기회주의의 (것이었던) 제안, “제3의 대안: 종말적 전쟁이 아니라 해체의 점진적인 진행에 의한 인류의 파괴”(15차 대회 결의안)으로 대체되었다. 이후의 대회는 보편화된 제국주의 전쟁(주4)의 어떤 가능성도 거부하면서 코뮤니스트 좌파(Communist Left)로부터 ICC가 계승한 입장을 계속해서 체계적으로 개정했을 뿐이었다. 해체의 효과에 저항하는 투쟁의 실질적인 정치적 결과는 반복되었고, 부르주아지와 같은 편에서 언급이 증가했다 : 2004년 10월, 독일 보훔의 오펠 공장에서의 비공인 파업 비난, 2004년 12월 아시아 쓰나미 피해자들과의 부르주아지 연대 운동 지지, 2006년 CPE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 동안 시위에서 부상당한 CRS(프랑스 진압 경찰)과의 연대 - 더 이상의 목록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 - 에서 폭력적이고 대규모로 행해진 국가의 억압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란 조끼의 반응에 대한 비난까지(주5) : 그리고 이것은 논쟁 중이지만, “폭력은 오직 폭력을 부를 뿐이다”라는, 미래의 계급 대결에서의 폭력의 불가피함에 대한 소부르주아지 공포를 표현하는 놀라울 정도의 진부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ICC가 결국 코뮤니스트 좌파, 주요하게 국제코뮤니스트경향(International Communist Tendency)과 같은 다른 구성요소들의 주장에 설득되었고, 역사적 경로에 대한 개념과 방법을 거부하고 싸우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전혀 아니다. 그 거부는 다른 계급 본질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급 투쟁에 대한 원칙과 실제에 대한 의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주로 (...) 해체가 사회 진화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경향이며, 그러므로 이 결의안의 주요한 취지를 구성하는 세계 상황의 모든 구성요소 (...) 라는 사실이다. [1989년 이후] 이러한 역동성은 더는 계급 간의 힘의 균형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힘의 균형이 어떻든, 세계 전쟁은 더는 문제가 아니며, 자본주의는 계속해서 부패로 빠져들 것이다.(주6)” (같은 책, 우리의 강조)

 

맑스주의의 중요한 정치적 원칙 중 하나,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이 역사적 원동력이라는 코뮤니스트 강령을 이보다 더 명확하게 배신할 수 없다. 계급투쟁은 다른 역사적 역동 가운에 하나의 현상일 뿐인 것이 아니며, “(...) 오직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힘의 균형의 결과로서 (...) 세계는 전쟁 또는 혁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 유일하게 유효한 척도는 계급 간의 힘의 균형점을 평가하는 것이다”(주7) (ICT)(주8). 해체가 사회의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이러한 관점이 계급 간 투쟁, 그러니까 유물론적이고 역사적인 세력 간의 투쟁을 관념이나 개념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대체하지 못할 리가 없다. 계급 협력을 받아들이는 단계는 매우 작은 것이고, 가장 가벼운 사회적 혼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리가 없다. 이미 오펠 파업에서, 2004년 아시아 쓰나미 사태에서, 부상당한 경찰관과의 연대 등에서 이미 그러지 않았던가?(주9)

 

건설 중인 당을 방해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고립을 깨고 나오다.

 

그러나 이것은 이 대회의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ICC가 스스로 - 무의식적으로? - 오늘날 ICC의 모순과 심각한 약화를 노출한 문서로 되돌아가야 한다. 비록 그런 식으로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6월(영어판으로만) 출간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상황의 힘든 진화(The Difficult Evolution of the Proletarian Political Millieu) 파트2(주10)는 사실 23차 대회를 위한 활동에 대한 진짜 보고서와 평가서이다. 이 문서는 다양한 소위 파벌(clans)이 야기한 위기를 되돌아본다. 파벌들은 언제나 파괴되지만 지속적으로 재에서부터 되살아나, 전체 역사를 통해 ICC를 공격해왔다. 이런 방식으로 정치적 기생주의라는 혁명 그룹과 투사들에게 파괴적인 이론을 다시 소개하려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해체의 충격은 코뮤니스트 좌파의 일반 구성원들 내부에서 기생주의의 성장을 설명할 수 있다. ICC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ICT가 된 IBRP를 포함한 좌파의 다른 구성요소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기생적 그룹에 대한] 중립성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용인에 이르고, 그 후에는 그런 요인들과 협력하는 데까지” 가 버렸다. “코뮤니스트 동지들이 (...) 그런 [그룹들]을 프롤레타리아 진영에서 배제하는 반응을 보이는 동안” ICC는, 자신의 문서에 따르면, 자신들이 고립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기생충들]의 주요한 목적은 ICC 주변에 벽을 쌓아 ICC를 다른 코뮤니스트 그룹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동지들을 우리와 함께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ICC가 자신 외부의 기생주의와 투쟁한 결과는 완전한 대실패였다.

 

그리고 기사는 계속된다. 따라서 이론적인, 정치적인 궤멸을 인정한다는 것은, ICC의 반응이 종파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반응의 종파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다시,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측면이기도 하다”(주11). 저자는 우리가 ICC의 기회주의적 표류를 정치적인 특징으로 묘사했던 것(주12)을 감히 받아들일 정도로 기생주의와 종파주의에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계속 가 보자. 이 문서에 따르면 기회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에 충격을 주었는가?

 

“새로운 동지들[새로운 세력과 신세대 투사들]에게 우리는 종파주의가 아니라는 것을[본문에서는 밑줄] 설득하기 위해서, 2012년에는 ICT에 새로운 제안을 했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ICT와 함께 시작한 토론은 기생주의에 대한 문제 - 어떤 그룹이나 구성요소가 코뮤니스트 좌파의 타당한 구성인가에 관한 문제 - 에 관해 지금까지 채워질 수 없는 간극으로 인해 곧 실패했다. 그리고 이것은 ICC가 이 중요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유일한 보기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세계에서 결정적으로 악평이 높았기 때문이다.”(우리의 강조). 그리고 글은 터키 분파의 통합이 실패였음을 지적하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그들이 “기생주의의 문제에 대해 우리와 동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문단을 읽으면서 우리는, 모두 ICC의 정치적인 기회주의와 관련된 그들의 최근 활동이 보여주려고 하는, 그리고 그 당장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모순을 보다 잘 이해한다 : 정치적 고립을 부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왜 지금인가? 왜냐하면 “이 새로운 세대에서 작지만 유의미한 소수들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정치화되는 새로워지는 과정을 관찰하고 있고, 이는 종종 코뮤니스트 좌파와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형태이다. 설명을 요구하는 새로운 그룹과 써클뿐만 아니라 개인들이 특히 미국에서, 뿐만 아니라 호주, 영국, 남아메리카(...)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10여 년 전 등장한 새로운 이들처럼,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들 또한 많은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 그 위험은 특정 기생충 그룹이 그들에 대해 외교적으로 공격적이라는 데서 뿐만 아니라, ICT와 같은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그런 기생충 그룹에게 보여주는 관용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외교적으로 공격적이라는 것은, ICT와 우리의 일부에 대해, 스페인 블로그 「새로운 경로(Nuevo Curso)」의 추동 아래 있는 미국의 새로운 동지들의 등장을 환영하며, 당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이러한 세력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코뮤니스트 좌파의 입장과 강령에 대한 공개적인 정치적 토론과 명확화의 과정(「혁명인가 전쟁인가」, 9, 10, 그리고 11호를 보라)을 시작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1년 반 후, ICC는 자신의 위성으로 가깝게 공생하는 사이인 기생주의적 「국제주의자 목소리(Internationalist Voices)」와 함께, 자기 자신의 언어로, 특히 「걸프만 코뮤니스트 분파(GCCF)」에 대해, 먼저 기생주의에 대해 토론하자고 설득하는 참신한 기생충스러운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 GCCF가 그 입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ICC에게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과 강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한 정치적인 쟁점 대신 이 주제에 관한 모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는 그 사실이 그 자체로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력을 함정에 빠뜨린 것이다. 왜냐하면 ICC와 기생주의의 타당성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영역, 토론과 정치적인 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고, 이는 역겹고 파괴적인, 동지들은 어떻게든 입증할 수 없고, 같은 바닥에 추락함으로써만 대응할 수밖에 없는 ‘피의자’가 되는, 개인 심리학이나 이른바 개인행동에 유리한 쪽으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생주의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 함정은 필연적으로 닫히고, 이 토론은 혼란과 경악의 씨앗을 뿌릴 수밖에 없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정치적 명확화라는 본질적인 작업으로부터 벗어나 젊은 동지들, 써클, 그리고 그룹들의 열정적이고 정치적인 신념을 파괴하는 일을 착수하게 할 것이다.

 

이것이 23차 대회의 진정한 정치적 중요성이다. 그렇다면 ICC가 그들의 자산을 역사적 원칙들과 입장들, 역사적 경로를 청산하는 데 이용했다는 것은 일시적인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23차 대회의 주요한 결과는 ICC의 남아있는 마지막 세력과 에너지를 동원하여 새로운 동지들의 정치적인 숙고와 신념을 약화시키고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 코뮤니스트 좌파와 그 입장에 대한 정치적 명확화에 대한 체계적인 재평가 작업을 방해하고 파괴하며, 혼란, 방향의 상실, 젊은 혁명가들뿐만 아니라 코뮤니스트 좌파 다른 세력들 사이 불신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기생주의에 대한 개념이 혹여 어떤 정치적인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21세기, 특히 오늘날 ICC야말로 그 가장 위험한 표현이자 화신이 될 것이다.

 

2019년 7월

코뮤니스트 좌파 국제그룹(IGCL)

 

 

<주>

 

[1]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702/reports-and-resolutions-23rd-congress-icc

 

[2] 국제 상황에 대한 결의, 계급 간 힘의 균형에 관한 결의, 그리고 계급투쟁에 대한 보고서

 

[3] 「국제 평론」, 130호, 2007년 17차 대회의 국제적 상황에 대한 결의

 

[4] 이러한 정치적 기회주의의 천국에 도달하기까지의 역사를 알고 싶은 독자는 ICC의 내부 분파가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만 작성된 작성한 이 글을 참고할 수 있음. http://fractioncommuniste.org/ficci_fra/b49/b49_5.php. 비록 모든 글이 영어로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보다 광범위한 요약은 http://fractioncommuniste.org/index_eng.php?SEC=b00 참고.

 

[5] “강력한 최루탄 폭격에 반격하기 위한 페탕크 공과 다른 투척물은 전혀 효과적이지 않으며, 폭력의 심화, 사회적 혼란, 그리고 경찰국가의 강화에 기여할 뿐이다”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621/police-violence-riots-urban-guerrillas-looting-real-cause-chaos-and-violence).

 

[6] 프랑스판에서는 해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 부패라는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다. ICC 이론에서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다른 단계이다. 변화는 ‘우연’일 수 없다. 특정 영어 ‘기회주의자’ 양보는 해체가 “다른 코뮤니스트 좌파 그룹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인가?

 

[7] ICT가 역사적 과정 개념을 거부한 금융 위기 이후 10년 문서와 우리의 응답인 역사적 경로에 대한 물음 두 문서는 혁명인가 전쟁인가 11호에 게재되었고, 계급투쟁의 역동성에 대한 분석 방법을 다룬 문제에 대한 유일한 토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독자들이 그것을 참고하길 바란다.

 

[8] 어떤 동지들은 왜 우리가 ICT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각 ICT와 ICC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지에 대해 자주 묻는다. 비록 우리가 그들이 기회주의로의 문을 열었을 때(보기를 들어 아나키즘에 대한 특정 입장을 보라)를 포함하여 그들의 몇몇 성명에 대해 비판을 했었을지라도, 이들 가운데 ICT는 언제나 코뮤니스트 강령의 근본적인 원칙들에 충실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9] 여기서 우린 각각의 지점들을 발전시킬 수 없다. 우리는 IFICC의 「국제 코뮤니스트 회보(International Communist Bulletin)」를 참고한다.

 

[10]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6688/fifty-years-ago-may-68-difficult-evolution-proletarian-political-milieu-part-2#_ftn1

 

[11] 오늘날의 ICT인, IBRP의 파괴를 요구하는 지점까지 : << 만약 우리가 프롤레타리아 정치 지형(Proletarian Policial Milieu) 그룹들이 파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 중요한 것은 IBRP 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 그것은 정치적 수준에서 사라진다. 만약 이 정책이 물리적인 소멸과 함께 끝난다면, 그것은 훨씬 나은 것이다.“(‘비밀’이어야 했던, 2005년 ICC의 16차 대회 결의안에서 발췌.: http://fractioncommuniste.org/eng/bci07/bci07_8.php)

 

[12] 2000년대 ICC의 국제 분파의 성명과, 지속적이고 다양한 경고뿐만 아니라 「혁명인가 전쟁인가」 1호, 5호를 보라(See Revolution or War #1 et 5).

 

<출처> Revolution or War 12호(특별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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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자본주의의 신경제(New Economy): 자본주의에서 서비스의 가치

자본주의의 신경제(New Economy): 자본주의에서 서비스의 가치

 

이 시리즈의 두 번째 글은 '서비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상품생산에서 멀어지는 것이 경제 발전에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서비스’가 외형적으로 보이는 핵심 역할을 조사한다. 실제로, 2007~2008년 금융 붕괴에 따른 후퇴에도 불구하고, 세계은행 통계는 '서비스'가 세계경제의 GDP에서 더 높은 비율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국의 경우 2018년에 GDP의 77.4%를 '서비스'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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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자본주의에서 서비스의 가치

 

서론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영국의 5개 직업 중 4개가 이제 공식적으로 '서비스'로 분류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은 가장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선두로 '서비스'가 GDP의 점점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 때문에 자본주의의 경제 전문가들, 특히 앵글로 색슨계, 사이에서는 서비스 부문이 제조업 부문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분명히 이러한 주장은 이전에는 선진국의 제조업 부문에서의 높은 생산성이 덜 생산적인 서비스 부문에서의 부담을 지속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던 과거의 주장과는 매우 다른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비스가 경제에 있어서 '잉여가치'의 주요 원천이라는 생각이 허튼소리이지만,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돈과 가격으로 모든 것의 가치를 판단하는 자본가들에게 있어서는 '서비스'가 명백히 경제성장을 유발한다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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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노동은 새로운 가치의 진정한 원천이다.

 

마르크스는 '서비스'를 노동에 대해서 지불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사용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무엇'이 만들어지는가, 또는 수행되는 특정한 종류의 일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기초한다. 서비스 노동자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가사도우미 또는 보모일 수도 있고, 일정한 비용으로 음악을 가르치는 강사, 청소부, 변호사, 목회자, 매춘부 등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든 유사한 사례에서 '서비스 제공자'의 노동은 구매자에게 유용한 무언가를 생산하고, 구매자는 그들의 수입이나 수익에서 직접 그 대가를 지불한다. 하지만 그 서비스가 구매자에게는 '가치'가 될 수 있다 할지라도, 서비스는 사회의 전체적인 부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비스의 구매자가 서비스의 가치를 만드는 데 소비된 노동력의 전액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서비스의 개인적 구매가 일반적이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서비스 노동자의 노동이 서비스 구매자의 수익이나 소득으로 지불된다는 그의 기본적인 통찰은 복지시스템과 국가 관료체제의 후기 선진 자본주의경제에서도 유효하다. 마르크스는 세금을 강제저축으로 보았으며, (공공서비스 종사자의 임금까지 포함한) 공공서비스가 세금(노동자의 임금에서 많이 차감되지만, 기업 이윤에서도 차감되는)에서 지출된다는 점에서 ’서비스’의 정의에 부합된다고 보았다. 즉, 공공서비스는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유용한 무언가를 재공하기 위하여 사회의 총수입으로부터 지불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 서비스는 그 일이 불필요해서, 육체적 작업이 아닌 두뇌 작업이라서 또는 어떤 다른 주관적인 기준 때문에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서비스를 창출하는 데 소모된 노동력 이상으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이다. 즉, 임금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고용될 때만이 생산적이다.

 

이 경우 노동력 판매에 대한 용어는 변화해 왔고 일을 하는 사람과 고용하는 사람 사이의 전체적인 관계는 다르다. 이제 고용주는 일정 기간 동안 임금 노동자의 노동력을 샀고, 그 기간 동안 임금노동자의 노동력은 고용주에게는 직접적인 사용가치가 없는 상품(교환가치)생산에 소비될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 생산의 유일한 이유는 상품이 이윤 창출을 위하여 팔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서비스에 대해 지불하는 개별적 지출과는 달리, 기업이 상품생산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은 일단 판매된 상품에 대해 이익이 실현되면 임금 그 자체의 비용보다도 훨씬 더 많이 늘어 날 자본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임금에 상응하는 상품을 단순히 재생산하는 것보다 더 오래 일하고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식품 가공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그들의 임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상품을 생산하는데 반나절이 걸릴 수 있지만, 주당 근무일은 5일이다. 나머지 4일하고도 반나절 동안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의 가치는 자본의 당연한 권리로 주장되며, 노동자는 자본증식의 원천이 바로 이 미지급된 잉여가치라는 것을 인식하기가 어렵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생산적인 노동'은 단순히 사용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품(교환가치)을 생산하기 위해 고용되는 노동이며, 그렇게 임금의 가치 이상으로 잉여가치가 만들어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시대보다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에 대해 더 완강히 부정하고 있다. 자본가들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수 없음에도,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은 자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비스에 대한 그들의 정의가 마르크스의 정의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곧 보게 되듯이, 자본가는 비생산적인 노동력과 가치 있는 노동력을 서비스에 함께 포함시키며, 특히 자본 순환과 상품 순환에 관련된 비생산적인 노동력인 소매 노동자와 은행 노동자의 노동도 서비스 범주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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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통계청(ONS)에서 공식적으로 작성된 위의 <표>를 영국 노동력에 대한 최신 묘사라고 본다면, 우리는 <표>에서의 직업에 대한 분류가 마르크스의 서비스에 대한 정의나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의 구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계청의 경우, 9개의 일자리 범주 중 5개를 '서비스'로 정의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기준을 사용하면, 앞의 4개의 일자리는 주로 생산적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1), 통계청이 서비스로 분류한 일자리 가운데서도 수 백만 명 이상 남짓의 서비스 노동자가 생산적 노동자로 다시 분류되어야 한다. 교통(transport)을 예로 들면, 마르크스는 상품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운송되는 결과로 상품들의 교환 가치가 증가할 때, 운송노동자의 노동은 생산적인 노동이라고 분명히 주장한다.

 

“이 경우에 실제 노동력은 사용가치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질적 생산물의 교환 가치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이 산업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의 사용가치에 볼 수 있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물질 생산의 경우처럼 노동력이 상품에 포함된다.”2)

 

그렇지 않고 '사람 수송의 경우'는 '서비스‘의 형태를 취한다'고 하였다.3)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요점은 자본가가 ’서비스‘로 분류된 범주에서의 서비스 노동자의 상당수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 이론에 의해 정의된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비스 영역'으로 공식적으로 분류된 다른 그룹들도 비슷하다. 우리는 '서비스'라는 단어가 비생산적인 노동력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보기를 들어, '유통, 호텔 및 식당'에 속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개인 서비스로서 사용가치의 단순한 제공보다는 상품 생산(새로운 가치 창출) 또는 그 가치를 증가시키는 것에 관여한다. 영국에는 250만 명의 호텔과 식당 노동자가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자본주의 기업에 의해 고용된 임금 노동자로 단순히 개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대가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텔 요리사는 그녀의 노동력을 산 사람인 자본가(호텔 소유주)를 위해 상품을 생산한다. 양고기를 먹는 소비자는 그녀의 노동에 대해서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노동은 소비자가 그녀의 노동에 대하여 지불하는 돈을 호텔 소유주를 위한 자본으로 바꾼다.”

 

이는 다음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나는 요리사의 노동을 일반적으로 노동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나를 위해서 고기를 요리하는 것과 같이 그 노동을 즐기려고 사는데, 그 노동은 비생산적인 것이다... 큰 차이점(개념적 차이점)은 내가 요리사에게 지불하는 돈이 나를 위한 자본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노동력을 가치를 창조하는 요소로 사지 않았고 단지 순수하게 그 사용가치를 위해 샀기 때문이다."4)

 

게다가 통계청의 <표>는 미디어 산업과 창조산업 등 상대적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분야의 노동자 수는 구분하지 않고 있다. 작년에 <파이낸셜타임즈>의 기사는 창조산업과 관련한 최신 정보를 제공했다.

 

 

“영국의 창조적 부문은 라디오, 텔레비전 광고, 소프트웨어 산업의 급속한 성장에 힘입어 10년 만에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최근의 수치에 따르면 창조산업은 영국 경제의 거의 9%를 차지했는데 이는 제조업, 농업과 같은 오래된 산업 부문들을 대체하면서 점유율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 통계청에 따르면 2002년 창조산업은 영국경제에서 총 809억 파운드의 가치를 증가시켰다. 이 부문의 10년 동안의 93%의 상승은 같은 기간에 영국경제 전체가 단지 70% 증가한 것과 비교된다.”5)

 

창조산업이 자본가의 이윤창출 기업으로 얼마나 많이 운영되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마르크스가 '생산의 전체와 비교하여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배우, 예술가, 극작가 등의 일이 요즘에는 상품 생산에 종사하는 어떤 공장 노동자의 노동처럼 경제에 '진정한 가치‘를 더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극장, 공연장 등의 엔터테인먼트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 배우는 대중과의 관계에서는 예술가이지만 그의 고용주와 관련해서는 생산적인 노동자이다."6)

 

심지어 BBC도 라이센스 수입에 많이 의존했었고, '공영방송 서비스‘는 경쟁적인 방송환경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이는 공식적인 '서비스 부문'에서의 노동이 상품(따라서 새로운 가치)을 생산하고 자본(또는 이익)에서 임금이 지급되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공식적인 노동력 통계를 조사해 보면 자본가계급에 의해 서비스로 분류된 수백만 개의 직업들이 실제로 생산적인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노동력을 생산하는 가치의 크기는 자본가가 수치로 제시하는 것보다 두 배 이상 더 클 수 있다. 우리는 630만 개의 가치를 창출하는 일자리 대신에 적어도 1,200만 개의 가치를 창출하는 일자리가 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여전히 영국의 신경제에서 약 3,000만 개 정도의 일자리 가운데 60%가 가치창출이라는 관점에서 비생산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된 노동자들의 수를 추정하면, 2,800만 남짓의 고용된 노동자 중 1,700만 명의 노동자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전체 인구(거의 5,800만 명)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수치는 가치를 생산하는 각각의 노동자에게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5명이 붙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영국의 경제적 부가 실제로 국내 경제에 의해 전적으로 만들어 졌다면, 이는 전통적인 제조, 채굴, 건설 산업 분야 이외의 산업부문으로부터 실제로 높은 수준의 잉여가치율과 절대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는 공식적 통계에서 ‘서비스’로 분류된 직업들로부터 상품 생산, 가치 창출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재정 연구소’의 사람들이 "국가에 더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일은 이러한 일이 아니다.7)

 

반대로, 자본가 계급의 잘못된 정의에 의해서 분류된 '서비스'는 비생산적인 부문(가치 생산 노동자를 포함하는 '서비스지원' 부문과 공식적 통계가 구체적으로 분류하지 않는 '미디어' 부문은 예외이지만)이지만, 자본가 계급은 이 서비스 부문을 "영국의 가장 큰 가치 창조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명목적 화폐가치가 아닌 잉여가치를 말하고 있다).

 

늘어난 가치의 미스터리

 

올해 초 파이낸셜 타임즈는 "부의 창출의 수수께끼를 풀자"라는 목표를 정했지만, 이 목표가 해결한 것은 명목상의 화폐 가치를 넘어서 어떻게 진정한 부가 창출되는 지에 대하여 그 원천을 보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게는 영원히 미스터리라는 것을 밝혀냈을 뿐이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역산업부(DTI, Department of Trade and Industry)의 목록을 발표했는데, 이 목록은 영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내는 산업과 기업들을 최고의 '부의 창조자'로 지정한 목록이다.

 

파이낸셜 타임즈는 DTI의 가장 수익성이 높은 업종 10개 가운데 5~6개가 실제로 영국의 공식 통계에서 서비스 업종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8) 한 번 더 살펴보면 목록에서 금융업이 주된 업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금융업종에 속하는 기업이 상위 12개 기업 가운데 5개이며, 목록의 맨 앞에 있다). 수익성이 높은 '서비스지원'(해충방제 서비스회사인 렌토킬(Rentokil)부터 자비스(Jarvis)까지) 부문과 '통신서비스' 부문은 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노동을 모두 포함하겠지만, 소매업 부문(8위)은 가치창출 측면에서는 전혀 비생산적이다.

 

영국에는 약 280만 명의 소매업 노동자들이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들의 노동은 상품 형태로 순환하는 자본의 비용에서 일부분이다. 소매 부문은 마르크스가 묘사한 '상업자본' 즉, 싸게 사고 비싸게 파는 것이 핵심적 역할이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자본이다.

"따라서 상업자본은 잉여가치의 생산에는 참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잉여가치의 평균이윤으로의 균등화에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일반적 이윤율은 잉여가치 중 상업자본에 귀속할 부분의 공제, 즉 산업자본의 이윤으로부터의 공제분을 계상하고 있다."9)

 

소매업 노동자에 대해서는,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그런 상업노동자는 기타의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임금노동자이다. 첫째로, 그의 노동력은 상인의 가변자본으로 사며, 수입으로서 지출되는 화폐에 의해 구매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상업노동자의 노동력이 개인적 서비스를 위해 구매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매에 투하되는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구매되는 한, 상업노동자는 임금노동자이다. 둘째, 그의 노동력의 가치, 따라서 그의 임금이 기타의 모든 임금노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노동의 생산물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노동력의 생산비와 재생산비에 의해 결정되는 한, 상업노동자는 임금노동자이다. 그러나 ... 상인은 단순한 유통대리인으로서 가치도 잉여가치도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 상인에 의해 동일한 기능에 고용된 상업노동자도 상인을 위해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10)

그리고 소매업 부문이 사실상 사회의 진정한 부를 고갈시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 거의 6백만 명의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는 영국의 가장 기대되는 '금융 서비스' 부문도 그러하다. 은행들이 DTI의 수익성 리스트에서 수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은 “이미 실현된 가치를 취급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잉여가치에서 차감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11)

 

이 글의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어떻게 금융부문 -노동 가치 이론에서 볼 때는 잉여가치의 거대한 낭비- 이 자본가의 부의 창출에 있어서 선두가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볼고자 한다.

 

자본을 위한 상품으로 전환된 공공 서비스

 

우리가 보았듯이, 서비스에 대한 일관된 자본가의 정의는 없다. 마르크스의 정의에 따르면 서비스는 상품이 아니며 서비스 생산에 관련된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들지만 교환가치는 생산하지 않기 때문에 비생산적이다. 반면에 자본가는 모든 종류의 노동력 – 상품생산 노동력만이 아니라 자본순환 비용에 엄격히 속하는 비생산적 노동력까지 –을 서비스에 포함한다. 통계청의 <표>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740만 노동자가 있는 가장 큰 범주인 '건강, 교육 및 공공 행정(health, education and public administration)'이 마르크스의 서비스 정의에 가장 가까운 것이 분명하다. 대체로 이 직종의 노동자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사용가치에 대해 개인적인 수수료를 받지 않지만, 그들에 대한 임금은 대부분이 세금으로 지불된다. 그 세금은 사회의 수익에서 나온 것이며, 비록 그들이 사회에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들의 노동력에 대한 비용은 사회 전체의 잉여가치로부터 나온 것이다. 고든 브라운 정권은 유망한 금융 부문과는 달리 교육, 병원, 복지 지출 전반을 잉여가치의 배수구로 재빨리 인식한다. 따라서 예산을 삭감하거나 민간 자본의 손에 넘겨줘 운영하게 함으로써 공공 서비스를 상품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이 경우, 과거에는 세금으로부터 지불된 서비스는 상품으로 변하고, '서비스 제공자'는 가치를 창출하는 임금노동자로 변한다.

 

실제로 자본이 공공 서비스를 완전히 '상품화'하기는 어렵지만 공공 서비스 제공에 민간 자본이 점점 더 많이 관여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외주화(작년에는 300억 파운드 가치의 서비스를 민간자본에 외주화 했다)로부터 이른바 민간투자개발사업(PFI. private finance initiative)이 현재 런던의 교통체증운영계획부터 자비스(Jarvis)사의 철도유지와 학교건축에 이르기 까지 약 660개 이상의 프로젝트에서 운영되고 있다. 민간자본은 공공서비스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세금으로부터 수익을 올릴 수 있고, 수익은 이윤율을 높이거나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자본이 된다. 수익을 자본으로 전환하고 상품을 서비스로 전환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영국 금융분야가 얻는 금융이익에 의해 주춤해졌지만, WTO의 도하 라운드(Doha round)에서 협의되고 있는 국제적인 '서비스의 시장 자유화' 논의에서 진행 중이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잉여가치의 원천을 필사적으로 찾으려는 자본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증상이다.

 

2019. 07. 10.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옮긴이 ㅣ 우연이

 

<주>

 

1) 마르크스는 생산적 노동은 '원재료 가공'이라는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들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동일한 상품의 생산에 함께 일하는 특정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발전함에 따라, 그들의 노동이 생산되는 물체에 가지는 직접적인 관계는 자연스럽게 크게 달라진다. 예를 들어, 이전에 언급했던 공장에서의 미숙련 노동자들은 원재료에 대한 작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원자재를 직접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독 역할을 하는 노동자들은 한 걸음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엔지니어의 작업은 또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고 주된 작업에서는 오직 그 엔지니어의 두뇌만이 관련이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노동력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러한 노동자의 총체성은 그 결과를 생산하는데, 이 결과는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 과정의 결과로 간주되며, 상품이나 물질적 생산물로 나타나며, 모두 이러한 제품의 살아있는 생산 기계다. 이러한 생산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노동력을 자본으로 교환하고 자본가의 화폐를 자본으로,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가치로서, 자기증식적 가치로 재생산한다. 이것은 실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특징으로, 다양한 종류의 노동력을 구분한다. 즉, 정신 노동력과 육체 노동력을 또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노동력을 구분하여 사람들에게 분배한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 생산물이 이러한 사람들의 공통적 생산물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또한 물질적 부에 내재된 노동자들의 공통 생산물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임금 노동자들 각각이 가지는 자본과의 관계를 방해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변경시킨다. 이 모든 사람들은 물질적 부의 생산에 직접 관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동력을 임금과 교환하고, 결과적으로는 그들은 임금에 더하여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를 직접 재생산한다. 그들의 노동은 지급되는 노동과 미지급 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TSV part 1, Lawrence and Wishart ed. p. 411-412).

 

2) 위의 책, p. 413.

 

3) “그러나 이 서비스에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관계는 털실을 사고 파는 구매자와 생산자의 관계보다도 더 생산적인 노동자와 자본과의 관계와 관련이 없다.” (위의 책. p. 412)

 

4) 위의 책, p. 165.

 

5) 파이낸셜 타임즈, 2018년 10월 4일.

 

6) 위의 책. p. 411.

 

7) 파이낸셜 타임즈, 2013년 5월 5일. 전체 인용문을 보려면, 이전 호의 첫 부분 참조.

 

8) 미디어 부문이 공식적으로 '서비스' 부문에 속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통계청은 이에 대해서 명시하지 않았다.

 

9) 마르크스, 자본론 3권, p. 286.

 

10) 마크크스, 자본론 3권, p. 292-293.

 

11)  마르크스, 자본론 3권 19장 화폐거래자본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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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백만 촛불 마이너

백만 촛불 마이너 

- 2017년, 노동악법 철폐, 노동3권 쟁취, 광화문 고공삭발단식농성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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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이 결정적인 봄이다, 라고 안간힘으로 외쳐보지만 사람 추린다는 소리에 휴무도 없이 출근한 공장 담벼락 안엔 어떤 꽃소식도 없었다 툭하면 ‘영구퇴출’ 입에 달고 사는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 아가리를 박살내지도 못했다

 

하청업체 안전팀장 새끼도 촛불을 들었고 박근혜 탄핵을 고대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게 명령을 하고 나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봉기로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것도 계획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내게 촛불은 혁명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하청의 재하청인 내 삶은 하루하루가 폭력적이었다 자본주의가 요약되어 있었다

; 나는 외친다

차별은 폭력이다 

위계는 폭력이다 

억압은 폭력이다 

명령은 폭력이다 

조합주의는 폭력이다 

가부장제는 폭력이다 

민족주의는 폭력이다 

개량주의는 폭력이다 

관료주의는 폭력이다 

군대는 폭력이다 

의회제는 폭력이다 

 

촛불은 흐르고 흘러서 흐름 자체가 되는 것, 머물러 무대만을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난 촛불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하는 것이 위험해 보였다 촛불이 멈춘 곳, 화려한 조명의 대형스크린과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 대형스피커로 꾸며진 무대가 내 눈엔 마치 명박산성 같았다 무대 앞에서 내 관심사였던 그대 표정을 결정적으로 잃어 버렸고 유독 주목하고 싶었던 그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난 목소리를 잃고 그대를 데울 국도 밥도 나오지 않는 무대를 오래도록 바라봐야 했다 고착 당했다

 

물론 촛불은 하나의 구호가 아니고 여럿의 삶이었다 노빠도, 문빠도, 어용도, 노사협조주의자도, 조합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김일성주의자도, 가부장주의자도, 개량주의자도, 관료주의자도, 중도주의자도, 여성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자율주의자도, 코뮤니스트도 함께 참여하고 함께 행진했다 촛불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 계급투쟁의 소용돌이었다  이질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정치적 경향들이 함께 지배질서를 잠시 정지시키는 압도적인 다수의 힘을 이뤄냈지만 국가 앞에서 갑자기 온순해졌다 국가에 대한 분노가 이토록 순종적 일 수도 있다니, 내겐 참 기형적으로 보였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는 어떤 계획도, 어떤 결정도 할 수 없는 하청의 재하청인 사내로 죽도록 일만 하다 죽어갈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노사협조주의자는 죽어라고 자본가계급에게 협력만을 할 것이고 조합주의자는 지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계급을 배반할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성폭력 가해자들은 반성하지 않을 것이고 개량주의자들은 오늘도 투쟁 현장에 나타나서 선거가 다가오니 투쟁을 접자고 압력을 넣고 민주노총 깰 거냐고 협박하면서 계급화해의 정책들을 생산해낼 것이다 촛불의 흐름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민족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파괴하며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사냥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관료주의자들은 모든 비판을 진압하며 자신의 명령을 완성할 것이다 또한 촛불이 무대 앞에서 멈춰 섰을 때 나와 그대는 표정을 잃고 목소리도 잃게 될 것이며 나를 대신 해 내 운명을 결정하는 자들의 목소리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내쫒긴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촛불이 됐고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투쟁을 외쳤지만 백만 촛불 내내 발언권조차 얻지 못했다 촛불, 그 한 뼘의 빛조차 서러웠지만 죽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조직했던 투명한 맨몸들은 자립적이었다 촛불은 민주주의를 위해 한사코 계급투쟁을 배제하려 했지만 자립적인 몸짓들은 “선거를 넘어 (계급) 투쟁으로” 나아갔다 투명한 맨몸의 사람들은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무대를 우선적으로 폐지했다 밀착되어 서로를 느끼고 그 몸의 언어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비우면서 그 곳에 배제하지 않는 힘, 평평하고 너른 마당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직접행동으로 비상했다 의회 없이도 운영되는 노동자민주주의였다 부재함으로 증명되는 삶은 끝났다 나와 그대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지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정치였다 모든 폭력에 맞선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다  

 

 

詩 ㅣ 조성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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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조성웅

 

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시집 『절망하기에도 지친 시간 속에 길이 있다』, 『물으면서 전진한다』, 『식물성 투쟁의지』가 있다.

박영근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 모임, ‘해방글터’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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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0호] 파시즘과 반파시즘(자유민주주의)

파시즘과 반파시즘(자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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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시즘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나타난 부르주아의 대응책 중 하나다. 반대로 계급 투쟁이 체제의 안전성을 위협하지 않는다면, 파시즘은 발생하지도 않고 발생하더라도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파시즘은 급진화된 쁘띠부르주아의 전투적인 행동과 공격적인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혼합물인 기이한 선전으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얻었다. 대중의 모순은 세계가 변혁되기를 바라지만, 그 변혁이 착취와 억압처럼 갑자기 위에서 부여되기를 원했다는 데 있다. 파시즘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분명치 않은 자유를 분명히 나타내는 민족적 자유의 환상으로 대체시키고 대중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중의 비합리성은 자유를 열망하면서도 자유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치즘은 모든 것이 위로부터 나오고 자신들이 체제를 변혁시키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파시즘의 목적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를 분쇄하고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을 미리 방지함으로써, 반대하려는 모든 시도를 분쇄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의 모든 부분을 국가 지배하에 종속시킴으로써, 파시즘은 자본 독재의 권위주의적인 형태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리고 파시스트는 인종주의를 최극단으로 악화시켰다. 하지만 인종주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탄생과 더불어 노동계급의 연대를 분쇄시키는 역할을 해온 자본주의의 본질적 요소이다. 파시스트는 자본주의 관계의 바깥에 있지도 않고, 그것에 반대하지도 않고, 오히려 자본의 질서를 강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코뮤니스트는 부르주아 지배의 다른 모든 형태와 같이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

 

  역사적으로 노동계급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방어를 위한 다양한 반(反)파시스트 동맹 및 캠페인은 대재앙이었다. 반파시즘의 핵심은 부르주아의 독재를 그럴듯하게 포장한 자유민주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정치이념이 자본주의 사회의 특정 발전단계에서 결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자유주의는 반봉건 부르주아 해방이데올로기로서 부르주아들이 쟁취한 사회‧경제적 권리를 천부의 인권으로 선포하고, 국가권력 질서를 부르주아 권리 보장에 적합하도록 개편한 것이다. 이때 부르주아 권리의 핵심은 사유재산권과 시장경제 질서 속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의 영리 추구 자유다. 그리고 법치국가란 부르주아적 권리를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호하는 국가체제로서, 오직 이러한 부르주아적 개인의 대표기구가 합법적으로 위임하는 바에 따라 국가 행위가 이루어지는 국가이다. 반봉건투쟁 속에서 부르주아가 수립하려한 정치질서란 모든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 사회 전체의 해방이 아니라 유산자들의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결국 반파시즘은 민주주의적 환상을 통해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적인 국가로 데려가기 위한 반동적인 선전일 뿐이다. 반파시즘의 논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포장된 자본주의 국가를 방어함으로써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방어라는 개념은 계급 중립적 기구로서 국가라는 신화의 승인, 옹호, 그리고 결국 굴복에 이른다. 그것은 국가의 강화, 국가 권력에 대한 종속과 자발적 활동에 대한 모든 가능성의 박탈을 의미한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를 사슬로 국가에 붙들어 매고 부르주아 억압에 백기 투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반(反)파시즘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서 계급투쟁은 실패를 거듭했다.

 

  반파시즘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완벽한 착취제도로써 노동계급의 귀와 눈을 멀게 하고 환청과 환상만 가져다 준다. 노동자에게 반파시즘 캠페인에서 말하는 민주주의가 대단히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공산주의, 독재, 야만, 혼란, 폭력, 무질서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주장하는 캠페인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파괴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노동자에게 대안이 될 수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권력, 코뮤니스트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반(反)파시스트의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이 단념된다면, 국가를 혁명적 목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재앙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 국가를 미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그리고 혁명 포기의 실질적인 길로서, 반파시즘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반대하는 만큼 파시즘일 수밖에 없다. 파시즘의 청산을 바라는 사람들은 반파시즘과 싸워야 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노동계급에게 파시스트의 출현과 그것의 공격에 대한 저항은 전적으로 불가피하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한 투쟁이 분명한 계급기반에 기초한다면 그 투쟁은 성공에 대한 전망이 될 수 있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를 격파하기 위한 포괄적인 자본주의 모순 투쟁의 일부이어야 한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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