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가 청와대 시다발이가?
87년 개헌 당시 국가인권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인권위를 만들 당시 이 기구의 위상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혹한의 눈보라를 기꺼이 감내하면서 명동성당 들머리에 비니루 몇 장을 뒤집어 쓰고 몇날 며칠을 농성하던 인권활동가들 덕분에 완전한 독립기구로 인권위가 출발하게 되었다. 독립성은 인권위의 생명이자 상징이었다.
그런데 이 독립성을 개차반으로 만들어버린 게 이명박이었다. 인권관계 활동이라고는 아예 전적이 없던 현병철을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앉히더니 나중에는 현병철이 "인권위는 행정부 소속"이라는 뚝배기 터지는 소리까지 하게 만들었다. 이명박이 꼴통이었다거나 현병철의 뚝배기가 빈 그릇이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 사례로 꼽히던 인권위가 국제인권기구로부터 일 좀 제대로 하라는 핀잔을 받게 될 정도의 수치를 당하게 만든 게 집권세력이었다는 게 중요한 문제다.
이명박근혜 정권 내내 인권활동가들은 인권위 정상화를 부르짖으며 투쟁했다. 인권위의 용역사업을 거부하기도 했고, 인권위원 선임에 대하여 직접행동을 하기도 했고, 인권위법 개정 등을 전면에 걸고 투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촛불이 적폐정권을 밀어냈고, 자칭 촛불정부가 들어서서 인권위를 정상화하겠다고 했다. 어느 정도 물갈이가 되는 듯 했고, 그래서 작년에는 인권위 정상화를 위해 활동했던 인권단체연대체가 해산을 하기도 했다.
그랬는데, 이번 정권이 인권위의 독립성을 정면에서 훼손하기에 이르렀다. 조국사태와 관련하여 조국가족의 인권침해를 국가인권위가 조사하도록 해달라는 국민청원을 명분으로 청와대가 인권위에 '협조공문'을 보냈던 거다. 인권활동가들은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해 분연히 항의했다. 그랬더니 청와대는 "우리에겐 우리 입장이 있다"라고 강변했다. 이게 도대체 말이여 됫박이여...
공직자에 대한 수사는 민간인에 대한 그것보다 더 엄격할 수밖에 없다. 아닌 말로 지금보다 더 엄격하게 수사하겠다고 공수처를 만든 게 지금 정권이다. 그런데 이 정권의 실세 중의 실세였던 자가 위법혐의에 휘말려 수사를 받게 되었다. 그것도 저 혼자 사고를 친 게 아니라 집안 가족이 죄다 연루된 가족적 사건이었다. 검찰 수사가 개떡같은 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만, 아닌 말로 공직자의 비리혐의에 대하여 탈탈 털지 않는 검찰이라면 그게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이걸 인권위 진정해달라고 청원한 닭대가리도 문제지만, 20만 넘었다고 냉큼 인권위에 '협조공문' 보내는 청와대는 제정신인가? 이후 사실관계 확인도 엉망진창인데, '협조공문'이 아니라 '이첩공문'이었고, 그것도 뭐 굳이 보낼라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혹시나 해서 만들어놓았던 건데 '실수'로 발송이 되었단다. 아니 이걸 지금 변명이라고... 청와대는 국가기관 중에서도 최고위 국가기관인데 이런 기관의 행정처리가 이따위면 이런 기관이 어떻게 헌정질서를 수호할 것이라 믿고 국민이 발 뻗고 자겠나?
행정처리는 둘째 치고라도 인권위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이 과연 이명박근혜 정권과 얼마나 달라진 것인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뭐가 촛불정부란 말인가? 현병철을 앉혀놓지 않았을 뿐이지 아예 대놓고 업무지시하는 건 이명박근혜정권보다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집권 3년차 청와대의 기강이 이렇게 헤이해진 원인이 무언지 궁금하다. 어쩌면 훨씬 이전부터 상태가 심상치 않았는데 재수 좋게도 그동안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에 불과한 것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