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대체인력, 시민, 촛불...
지하철 9호선이 파업을 예고했는데, 어제로 합의 종료되었단다. 뭐 상호 합의하여 문제가 해결되면 좋은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합의라는 게 기본적으로 근대 시민사회에서 강조되었던 형식상의 "계약자유의 원칙"을 재현하는 복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근대 시민혁명기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 신흥 부르주아지가 중심이 된 공장생산체계가 활성화되는 가운데, 도시로 몰려든 산업예비군들은 넘쳐나고, 이 과정에서 형편없이 불공정한 조건으로 노동계약이 성립되는데도 불구하고 제도적 개입이 불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저 "계약자유의 원칙" 때문이었다.
소위 '근대 민법의 3대 원칙'이라는 건 결국 시민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부르주아계급이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자신들임을 선언한 제도적 원리였던 거다. 사적 소유 절대의 원칙, 계약자유의 원칙, 자기 책임의 원칙이라는 거. 이 원칙이 노동자들의 등골을 뽀개는 악마의 논리라는 건 금방 확인되었고.
오늘날 지하철 파업이 이렇게 보기 좋게 합의될 수 있었던 배경엔 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힘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이 파업하는 일이 요즘에 흔하지 않은데, 과거 노사분규가 잦았을 때 파업할 조짐만 보이면 바로 대체인력들이 투입되었다. 이 대체인력에는 퇴직한 전직 지하철 노동자도 포함되었는데, 이들만이 아니라 이제 수습밟고 있는 학생들이 포함되기도 했다. 깨는 건 이 대체인력들 중에는 다수의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공수부대 현역들.
지하철 파업시 대체인력으로 투입되는 공수부대 현역들은 주기적으로 '연수'를 받았다. 그렇게 연수받은 걸 바탕으로 대체투입되어 지하철을 운행한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지만, 이들이 그 많은 승객들을 태우고 돌아다니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하지만 그동안 지하철이든 서울시든 간에 이 대체인력이 도대체 누구며 얼마나 투입되는지, 어느 정도 안정적인지를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과거 "계약자유의 원칙" 즉 사적자치의 원칙이 그 강고한 틀을 어쩔 수 없이 깨게 된 건 이러한 원칙이 보편타당하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계약자유의 원칙은 계약 당사자가 상호 평등한 지위와 배경에서 공정한 권리의무를 나누는 것이 본질이다. 이른바 '무기평등의 원칙'이 관철되는 전제에서야 계약자유의 원칙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로 밀려나온 산업예비군들은 당장 가진 건 몸뚱아리밖에 없는데 목구멍은 포도청인 신세다. 이 상황에서 죽지 않을 만큼 빵을 준다는 임금계약만으로도 얼마든지 자본가는 노동인력을 구매할 수 있었다. 상호 간 힘의 균형이 맞지 않은 거다. 무기평등의 원칙이 깨진 상황에서 열세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파업의 무기는 시민의 불편함이다. 파업이 벌어짐으로써 시민들이 불편함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하여 지하철공사든 서울시든 정치적 압박에 몰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노조의 요구에 성심껏 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상호 균형이 맞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합의가 진정한 합의다. 하지만 지금처럼 언제든 대체인력이 투입되는 상황에서 시민은 불편할 것이 없고 사측은 아쉬울 것이 없다. 노조는? 그냥 털리는 거지 뭐...
하긴 지하철이 파업했는데 대체인력도 없으면 시민들의 불편은 폭증할 것이고, 그러면 시민들은 아니 왜 노조가 파업을 하고 X랄이야! 이러면서 생난리를 침으로써 오히려 노조가 불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시민들이 다 닭대가리들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불편함이 누구로부터 유래했는가를 따지게 될 것이고, 그 계산 속에서 사측과 노측의 책임비율을 감지하게 될 것이며 이로써 시민들은 비난의 대상이 누가 될 것인지를 확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경험칙 상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파업한 노조에게 비난의 화살이 꽂힐 가능성이 더 많긴 하다. 그런 차원에서 시민의식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의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 저 서초동에 몰려가 "내가 조국이다"라고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절대로 "내가 노조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긴 뭐 서초동 촛불에게 노동자와의 연대를 요구하는 게 무리긴 하다. 속만 썩지...
암튼 이렇게 또 파업이 끝났다. 아무런 요동도 없이. 지하철은 또 굴러갈 것이고, 시민들은 불편함 없이 지하철을 이용하게 될 거다. 뭐 어쩌다가 미숙한 대체인력으로 인하여, 또는 노숙하지만 여러 한계로 인하여 안전에 위협이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예 기계로 다 해버리고 사람은 치우자는 논리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