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지역성에 대하여...
모 지방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는데, 서울의 대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이었다. 강의에 대한 집중도라든가 태도라든가 하는 건 그닥 다를 바가 없었다. 고학년이고 저학년이고 간에 그들에게 느낀 것은 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희망'이라는 것에 대한 감도가 낮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학생들 중에는 학점관리와 외국어 공부를 잘 해서 유학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머리회전도 비상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계획도 풍성하다. 그런데 그런 학생이 당시 1학년과 4학년 합쳐 약 80명 가까이 되는 중에 단 한 명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당장 취업에 대한 고민도 그다지 많지 않고, 자신이 전공하는 이 분야에서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도 거의 없었다. 몇 명만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학생들의 절반은 서울에서 통학을 하고 있었다. 그 대학이 소재한 지역에서, 또는 그와 유사한 환경을 가진 지역에서 태어나고 생활하고, 그러면서 그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과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또 달랐다. 서울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은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데...라고 하는 생각이 역력하다. 의도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하겠지만 그런 티가 묻어난다.
반면 그 지역을 출생과 삶의 배경으로 하는 학생들은 학교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불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게 어쩌면 생활 자체에 대한 뾰족한 전망이라는 게 없다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들과 이야기하다보면 그저 이 동네는 이게 없고 저게 없고 뭐가 안 되고 뭘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대신, 여기서 뭘 해보겠다, 뭘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업이 시작되는 초기에는 서울의 대학생들보다도 낯가림이 좀 더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데, 막상 시간이 지나면 친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 훨씬 이 쪽에서 빨리 도드라진다. 말도 많이 하고, 질문도 많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 대학의 학생들과 다른 지역 다른 대학의 학생들 간에 어떤 질적 양적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판에 박힌 듯한 서울의 학생들보다도 더 깜찍한 발상들도 많이 하고.
이들이 자신의 전망에 대하여 그다지 희망을 가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깊이 있게 조사해보지 않은 이상 섣부르게 이러저러한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뇌피셜이 작동하는 바에 따라 나름 어떤 원인을 진단해내고 그에 대한 논의를 할 수는 있겠지만, 책임도 못 질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나으므로 일단 패스.
한 번은 강의를 마치고 기차 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마침 (서울의)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과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학기를 마치고 입대를 하게 되어 있던 학생이었다. 하필 겨울 군번이 되는 터라 그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미끼로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이야기를 했다. 하다보니 신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고 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들었던 느낌은 이들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슷하게, 이번엔 고학년의 학생들과 수업이 끝난 후 간단하게 술을 하게 되었는데, 살짝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고학년이다보니 연배도 다양하고 학교를 다닌 횟수도 다양했고, 특히 그 동네 사는 학생들이 다수였다. 이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느끼게 된 것이, 역시 이들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많이 진행될 수록, 이들에게서라고 해서 '희망'이 없는 건 아님을 알게 된다. 아니 오히려 이들이 더욱 더 뭔가에 대한 희망과 바람이 절실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더 많은 경제적 지원과 더 훌륭한 학습환경을 가졌더라면 나도 SKY에 들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걸 이들이라고 해서 모르는 게 아니다. 이미 지났기에 이젠 포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렇게 밀리고 밀려 동 세대의 구성원들의 뒷자리에 서게 되기를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어떤 계기를 통하게 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걸 그만 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같이 나눌 사람, 들어줄 사람, 그러면서 뭔가 조언을 주거나 같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그곳에서는 찾기가 어려운 거다.
그렇게 '희망'이라는 것은, 혹은 '희망'이 생기도록 만드는 어떤 조건들은, 다른 모든 물적 기반과 마찬가지로, 서울에 집중된다. SKY에 집중되고, 모든 '희망'은 그곳에서만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 외의 지역에 있는, 그 일군의 학교집단 외의 학교를 다니는 자들은 '희망'이 사치가 되고 함부로 꺼내놓기조차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페불을 기웃거리다가 아는 형님이 링크한 글을 보았고, 그 글에서 링크한 칼럼을 보았다. 조금 지난 기사지만, 그 칼럼에 따르면 청년의 희망은 경제수준에 따라 그 부피가 달라진다고 한다.
한겨레: [한겨레프리즘] 20대의 잘못이 아니다/한귀영
경제수준에 따른 희망의 크기 차이는 지역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물론 지역의 차이가 바로 경제적 차이에서 도출되거나 혹은 그 배경이 된다. 고로 한국사회는 서울 제외한 모든 지역이 서울의 식민지이며, 식민지의 주민들은 그 희망마저도 서울에 종속된다. 질과 크기 모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