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잡기장
내일이 기한이라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기특한 출근을 했는데
술이 안 깬다 -_-
포스팅이나 하자 -_-

요즘 본 것 중 인상적인것 하나 소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동물농장", "1984"를 쓴 조지 오웰의 자전 소설이다. 제목 그대로 그가 파리와 런던에서 접시닦이, 부랑자 생활을 하던 경험을 사실적이면서 재밌게 쓴 글이다.

다른 거 말고, 내가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처음에 파리에서 조지 오웰이 서서히 돈이 떨어져 가는 시점. 아~ 이런 얘기하는거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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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가난에 들러붙는 비밀주의를 발견한다. 어쩌다 갑자기 하루에 6프랑의 수입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감히 그렇다는 인정은 못하니까 예전과 똑같이 생활한다는 시늉만은 해야 한다. 애초부터 거짓말의 그물에 얽혀드는 꼴이지만 그렇게 해서도 감당이 되지가 않는다. 빨랫감을 맡기던 세탁소에 발을 끊는데 그러면 세탁소 여자가 지나가는 당신을 보고 왜냐고 묻는다. 뭐라고 얼버무리면, 그 여자는 다른 데에 맡긴다고 여기고 평생토록 당신과 원수가 진다. 담뱃가게 주인도 볼 때마다 담배를 왜 줄였냐고 묻는다.
...

빵집에 빵 1파운드를 사러 가서 여점원이 다른 손님에게 1파운드를 잘라주는 동안 기다린다. 그녀가 서툴러서 1파운드보다 많이 자른다. 그녀는 "손님, 죄송하지만 2수를 더 내시겠어요?" 하고 말한다. 빵이 1파운드에 1프랑이고 당신이 가진 돈도 정확히 1프랑이다. 당신에게도 2수를 더 내라면 내지 못한다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되자 질겁하여 내빼게 된다. 용기를 내어 빵집을 다시 찾을 때는 몇 시간이 흐른 뒤이다.
...

1프랑에 감자 1킬로그램을 사러 청과물 가게에 간다. 그런데 그 1프랑에는 벨기에 동전이 한 개 포함되어 있어 가게 주인이 받지를 않는다. 슬그머니 가게를 나오고 두 번 다시 거기에는 걸음을 못하게 된다.
길을 잃고 번듯한 구역으로 들어섰다가 부유한 친구가 눈에 띈다. 그를 피한다고 가장 가까운 카페로 몸을 숨긴다. 일단 카페에 들어오면 무엇이든 마셔야 하니까 마지막 남은 50상팀을 내고 블랙커피 한잔을 마시는데, 거기에는 죽은 파리 한 마리가 들었다. 이런 재난이라면 몇 백가지로 늘어날 수도 있다. 이것이 돈에 쪼들려가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한다. 빵과 마가린만을 먹고 밖에 나와 가게 유리창을 들여다본다. ...거대하게 쌓인 음식이 당신을 모욕한다. 그런 많은 음식을 보면 울먹거리는 자기연민이 몰아닥친다. 빵 한 덩이를 잡아채고 내달아 붙잡히기 전에 먹어치우자는 생각도 들지만 순전히 배짱이 없어서 자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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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역시 요런 얘기가 좋다. 사회를 바꾸자는 훌륭한 얘기도 좋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물론 개인차가 있다) 어떤 순간에 느끼는 감정들, 친한 사람들끼리는 얘기할 수 있지만 여럿이 있는 공간에서 공공연히는 잘 말해지지 않는 얘기들. 아니, 심지어 자기 스스로도 좀처럼 떠올리지 않게 되는 얘기.

사람들이 움츠려들고, 찌질해지고, 그것이 계속되며 굳어지고 결국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그런 부끄러운 얘기 없는 사회 변혁은 불가능할 것 같아!

아침 굶었더니 배가 쥐어짜는 듯하다. 밥먹으러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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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9 11:25 2008/12/0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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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2008/12/09 21:48 URL EDIT REPLY
아~ 이 책 재밌겠네. 오가며 읽을 책으로 추천했다 생각할래요.ㅋ
지각 2008/12/10 19:45 URL EDIT REPLY
안 그래도 쓰고 보니 re가 글을 썼더구만요 ㅎㅎ 재밌으니 함보삼
공룡 2008/12/11 17:20 URL EDIT REPLY
응 이 책, 맨날 소파 위에서 누워있는거 봤는데 지각생이 읽고 있었구나. 나두 읽어봐야지. 설레인다.
지각 2008/12/12 19:44 URL EDIT REPLY
ㅋ 남산도서관에서 빌린 거라오. 한번 더 빌려볼까 생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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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영화보기 모임 시작합니다

SF
  [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 에 관련된 글.

앞 포스팅에 썼듯이, 지난 금요일 망원동에서 SF영화보기 모임 첫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많이 올 거라는 기대는 안하고, 그냥 장소 제공하는 단체 사람들이랑 본다 생각하고 시간을 잡았는데, 아 글쎄 막상 당일 되니 외근에, 출장에.. 낮 시간이라 다른 분들이 오기는 힘들고.. 홍보도 안하고 한지라 4명이 조촐하게 영화를 같이 봤습니다. 그나마 두 분은 끊임없는 전화와 일의 압박때문에 끝을 못 보셨다는.. -_-

그래서 두번째, 아니 지난번은 "시범"이라 하고 이제 다시 계획 잡아서 처음으로 갖는 모임에서 또다시 "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을 보려 합니다. 날짜는 격주 수요일 저녁 7시, 장소는 당분간 망원동의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실이에요. 좋은 장소가 있다면 그곳으로 갈 수도 있지만, 한 지역에서 꾸준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한 가지 구상이라 한번씩 번갈아 하더라도 망원동에서 많이 하게 될 것 같네요.

대개 영화가 두시간 정도 되니, 7시부터 영화를 보고, 끝나고 나서 영화를 본 소감 등을 얘기하고요, 시간이 되면 한 가지 테마를 정해 자유롭게 얘기해보는 흐름으로 갈까 합니다. 예를 들면 "블레이드 러너"를 보고 우리 일상 속의 경계와 차별에 대해서 얘기한다던지, 아니면 미지의 타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미친 영향 뭐 그런 얘기. 그렇다고 꼭 어렵게 철학적인 얘기만 하는 건 아니고 재미나게 다양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진보불로그의 SF마스터 "네오스크럼"의 조언을 받아 좋은 SF영화등을 꽤 뽑을 수 있었고요, 이걸 어떻게 프로그램을 짤지는 계속 같이 얘기해보면 되겠습니다. 일단 처음은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보는 거고요. 회비, 준비할 것, 참가 조건? 당연히 없죠 아놔 지금 무슨 생각을, 대체...

ㅋㅋ 12월 17일 수요일 저녁 7시, 망원동의 "함께하는 시민행동"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 모여주시고요, 못 오시는 분들도 같이 볼 영화에 대한 제안 등 아낌없이 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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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시민행동 찾아가는길

http://action.or.kr/home/bbs/board.php?bo_table=action_about&wr_id=21

(윗 지도는 넓은 면적을, 아래 지도는 건물 주변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지도를 클릭하시면 큰 그림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시민공간 <나루> 5층에 새 둥지를 틀었습니다.

■ 주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1동 249-10 시민공간 <나루> 5층 (우:121-847)
■ 전화 : 02-921-4709
■ 팩스 : 02-6280-7473

지하철로 오시는 방법 :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쭉 걸어오시면 '망원우체국 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계속 직진한 후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오세요. Bread One 커피숍, 그레이스 아파트, 아시안룩스 사옥 등을 지나서 해피존 아파트 옆에 시민공간 <나루>가 있습니다.

마을버스로 오시는 방법 :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수협' 앞에서 마을버스 15번 버스를 타고, 성서초등학교 3거리 정류장에서 내리세요. 성서초등학교 방면으로 20미터 정도 가서 길을 건넌 후 왼쪽으로 꺽으면 동네부엌, 두레생협 등을 거쳐서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까페 작은나무 사이 골목으로 들어오세요. 30미터쯤 들어오시다가 아파트 <이음>이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꺽어 들어오세요. 20미터 쯤 오시면 해피존 아파트 옆에 시민공간 <나루>가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차로 오실 때는 :
시민공간 <나루> 앞 도로는 일방통행이므로 오실 때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망원우체국 사거리에서 경성고 사거리 방면(마포구청역 방면에서 오시는 경우 좌회전, 망원역 방면에서 오시는 경우 우회전)으로 들어오신 후 까페 <작은나무>와 편의점 <세븐일레븐> 사이의 골목으로 좌회전하신 후 아파트 <이음>이 나오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좌회전하시면 됩니다. 단 주차 공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세요..^^





(시민공간 <나루> 이렇게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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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20:30 2008/12/0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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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쟁이 2008/12/10 11:40 URL EDIT REPLY
아 영화 보고싶은데 하필 수요일이네요TT 블레이드 러너TT
지각 2008/12/10 19:47 URL EDIT REPLY
반응만 좋다면야 재탕 삼탕도 할 수 있지요 :)
망원동에선 수요일에 하고, 다른데서 금요일날 또 하고 뭐 이렇게도 할 마음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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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

SF
만일 지금 인간의 모습을 꼭 닮은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심지어 모습만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도 인간과 닮아있다면,
당신은 복제인간이 아님을 어떻게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필립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고전 명작 SF "블레이드 러너"의 2007년 감독판을 봤다. 요 근래 활동가 워크샵이다 뭐다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내가 신나서 떠드는 두 가지 주제가 하나는 "빈집"이요, 다른 하나는 SF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관점이긴 하지만 SF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여차저차 하다보니 "SF영화보기 모임"을 일단 시작하게 됐다. 지난 금요일 망원동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그 전에 뭘 볼까요 물었더니 이것저것 나오는데 역시 SF영화 얘기하면 거의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게 블레이드 러너. 일단 그것을 어둠의 경로로 다운받아 오겠노라 약속하고 빈집에 돌아와 SF마스터 네오스크럼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더니 좋은 정보를 알려준다. 글쎄 몰랐는데 2007년에 감독판이 다시 나왔다는게 아닌가.


(사진은 감독판에만 있는 "유니콘" 백일몽 - 결말 부분의 반전과 연결된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에 나왔는데, 그때는 제작사에서 감독이 원치 않는 요소들을 넣게끔 했다고 한다. 나레이션을 넣었고, 주인공은 복제인간이어서는 안되고, 결말은 해피엔딩. 이에 불만에 차 있던 감독, 93년에 감독판을 낸 것으로 모자라 2007년, 무려 25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한번 디지털 복원과 재편집과정을 거쳐 감독판을 냈다. 어둠의 경로를 탐색해 봤더니 마침 영화부분(DVD의 다른 다큐 등은 뺀)이 딱 올라와 있다. 땡큐~ 받아서 혼자 미리 본 다음, 82년 오리지널과 뭐가 다른지 확인하고, 다시(이번엔 영화보기모임에서 여럿이랑) 보니, 우와... 영화가 정말 풍성했다. 그냥 무심히 지나친 장면들이 의미 심장했고, 어떤 결말을 따르냐에 따라 장면의 세부적인 해석이 달라진다.


혹 영화를 안본 분들을 위해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5년 된 고전의 스포일러가 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으려나?)

2019년, 핵전쟁을 거쳐 황폐해진 지구, 인간들은 인간과 꼭 닮은 복제인간을 만들어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시킨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그걸 진압한 후 외계에 나가있는 복제인간이 지구로 돌아오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그리고 잠입한 복제인간은 잡아내서 "폐기"하는데, 그런 일을 전담하는 사람은 "블레이드 러너"라 불린다. 그들은 "보이스-캄프 테스트"라는 방법으로 복제인간을 식별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선 썩소를 여러번 보여주는,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 어느날 이전에 일을 주던 브라이언 반장에게서 친절한 호출을 받는다. 밥먹을 때 건드리다니.. 그리고 최근 지구에 들어와, 그들을 만든 "타이렐"사에 잠입했다가 도망친 4명의 레플리컨트(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일을 맡긴다. 됐거든? 하지만 소용없다. 결국 다시 일을 맡게 된 데커드는 수상한 형사?와 함께 동료 블레이드 러너를 해치고 달아난 "레플리컨트" 레온의 은신처부터 수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타이렐 사에서 "최신형" 레플리컨트 레이첼(숀 영)을 만나게 된다. 레이첼은 평소보다 몇 배의 노력을 들여야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과 꼭 닮은 레플리컨트이다. 심지어 레이첼은 스스로 복제인간임을 모르는데, 그에겐 다른 이가 살아온 기억이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검색하면 다 나올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과 쏙 닮은 인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복제인간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아니 구별하는 주체인 당신은 복제인간이 아니라는 걸 뭘로 보장할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공지능(AI) 이란 말이 이제 전혀 낯설지 않는 만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인간을 규정지을 순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다음은? "인간적이다" 말할때 흔히 생각되는 "감정"은 어떨까?


어익후, 레플리컨트도 느낀다는군. 그리고 인간과 다를뿐 모든 동식물이 "감정"이란걸 느끼잖아. 감정도 탈락.

간신히 레플리컨트라는걸 밝혀낸 최신형 "레이첼"은 자신이 복제인간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위해 찾아와 어릴 적 사진을 내민다. 그리고 "살아온 기억"을 얘기하려 한다. 그러나... 데커드는 이미 레이첼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기억"을 어디서 듣고 와서 먼저 얘기해 준다. 그 기억은 이식된 거야.


"기억 이식"은 흥미로운 얘기꺼리다. 당신은 얼마나 당신의 기억을 "내 것"이라고 믿을 수 있나요? 필립 딕의 다른 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또 한편의 명작 "토탈 리콜"의 원작 소설)에는 주인공이 실제 화성에 여행을 갈 형편이 안되고, 일상에 갇혀 있어 "화성 여행의 기억"을 이식받아 만족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기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그는 이미 기억을 한번 이식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기억이란 세상에...

다른 소설-영화 "임포스터"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온다. 갑자기 동료와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며 너는 외계에서 파견된 암살 로봇이라고 몰아세운다. 이게 뭥미? 난 지금껏 여기 지구별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이잖아. 너 나 몰라?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고 주인공이 "기억이 이식된 로봇"이라고 말한다. 그는 결국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 쫓겨다니게 된다. 그 결말은...? 이 작품은 안 보신 분이 많으실테니 여기서 꿀꺽~

이 밖에도 많은 작품에서 필립K.딕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모호함, 어떤 "절대적 인간성"에 대한 부정?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막판 반전이 묘미다. 그의 작품 중 많은 것이 영화화됐고, 지금도 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영화는 원작의 주제의식과 감흥을 잘 못 살리고, 제작하는 곳의 가치관이 덕지덕지 발라진 이상한 영화가 됐다는 것이 많은 이의 평인 듯 하다. 심지어 "마이너리티 리포트"조차, 잘된 면이 많고 재밌긴 하지만, 하여간 그 지겨운 "어메리칸 가족주의"때문에 짜증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대체, 인간과 복제인간이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왜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개인은 다른 개인, 다른 집단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할까? 과연 "그들"은 "우리"와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일까?


영화에서 레플리컨트는 용도에 따라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짧은 수명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인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우리"와 떨어진 곳에 있으며 "우리"의 이익을 위해 "원래 맡은 역할을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그들은 철저히 탄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지배 수단은 "공포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잠깐 그런데 내가 지금 현실 사회를 얘기하는거야 영화얘길 하는거야?

나와 다른 너, 달라야 하는 너. 이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사회 구조.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구호를 내건 타이렐사는 성공했다. 실제로 그들의 최신형 모델은 인간과 다를게 없다. 살려고 하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욕망, 어차피 곧 죽을 그들을 인간은 어떻게든 죽이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레플리컨트는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는 인간을 구원한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눈물의 (거의) 마지막 장면. 엉엉 못 보신분들은 꼭 보시기 바래요.
(사실 이런 영화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중후반에 많이 지루해하신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끝까지 안보면 후회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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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참 많은 얘기꺼리를 뽑아낼 수 있다. 82년 오리지널 스토리만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감독판의 스토리를 받아들이면 이게 몇배는 뛰어오르는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는, 인간인가 레플리컨트인가?"이다. 이 논쟁이 계속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감독판이 나오면서 리들리 스콧은 "레플리컨트"라고 분명히 얘기했다고 한다. 어차피 보는 사람의 해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니 그걸 받아들이던, 인간이라고 믿던 그것은 자기 자유지만, 레플리컨트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 초반부부터 갑자기 무언가가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일을 다시 맡기는 브라이언, 하지만 데커드가 기억이 이식된 복제인간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경찰서에서 그들은 옛 동료를 만나는 것처럼 대하지만, 사실은 그게 서로의 첫만남이라는게 된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처음 보는 데커드에게 연기를 한게 되고. 그리고 그 후 몇번의 만남과 정보 교환이 사실은 모두 어떤 의도에 의한 계획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약간 수상하지만 그냥 넘길 수 있었던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냥 브라이언과 함께 일하는, 데커드를 처음에 데려가고, 처음 수사를 도와주는 형사,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연락책이 아니라 계속 데커드 주변을 맴돌면서 그를 감시하고, 몰아가는 사람이 된다.

또, 영화 초반에서 6명의 레플리컨트가 타이렐 사에 잠입하고 1명은 죽고 4명은 달아나고 1명이 사라졌다는 것도, 수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 한명이 혹시 데커드는 아니었을까? 다른 4명이 그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아서 아닌 것도 같지만, 왠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배할 대상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그들의 손을 빌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행위는 사실 언제나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실행하는 바가 아닌가.

체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퀸으로 비숍 잡고 (너 미쳤니 소리 듣고는) 나이트로 퀸을 잡자, 다른 비숍으로 체크메이트! 타이렐 사장의 관심을 끌어 세바스찬(레플리컨트 몸 제조자)을 내세운 베티(전투용 레플리컨트, 리더)를 들이는 장면에서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이건 좀 지나친 생각인지는 모르나...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실용적인 상상물. 머리 말리는 기계의 모습을 보며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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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9:24 2008/12/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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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8/12/08 20:30 | DEL
[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 에 관련된 글. 앞 포스팅에 썼듯이, 지난 금요일 망원동에서 SF영화보기 모임 첫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많이 올 거라는 기대는 안하고, 그냥 장소 제공하는 단체 사람들이랑 본다 생각하고 시간을 잡았는데, 아 글쎄 막상 당일 되니 외근에, 출장에.. 낮 시간이라 다른 분들이 오기는 힘들고.. 홍보도 안하고 한지라 4명이 조촐하게 영화를 같이 봤습니다. 그나마 두 분은 끊임없는 전화와 일의 압박때문에 끝을 못
Tracked from | 2010/05/27 17:13 | DEL
얼마전 개봉한 영화 [로빈 후드]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리들리 스콧의 감독판 DVD나 블루레이를 기다린다는 답글이 달렸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인데, 왜 굳이 감독판이라고 하는 별도의 판본을 기대하게 되는 것일까? 실제로 DVD나 블루레이 등 부가판권시장에 출시된 영화들을 보면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이라 불리는 감독판 영화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영화의 편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눠진다. 처음 작업이 스크립트에 나와있는..
momo 2013/09/06 20:28 URL EDIT REPLY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 검색하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SF영화보기 모임 글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어봤더니 꽤 오래전 이야기군요...^^
아쉽네요.글 잘 읽고 갑니다.
지각생 | 2013/10/17 17:35 URL EDIT
SF영화보기 모임은 언제든 다시 하고 싶습니다. 혹시 모임을 만드시게 되면 제게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호 2015/09/09 17:41 URL EDIT REPLY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깊은 감상평에 감탄을 느끼게 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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