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거의 다 했어요
꼬뮨 현장에서 2009/10/17 00:14며칠 전에 남일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넝쿨과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투쟁을 이어가는 것도 사람이고, 농성을 하는 것도 사람인데 사람이 살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고, 그렇다면 투쟁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역시 먹는 일이 된다.
그런데 먹는 일이라는 것이 차려진 밥을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재료를 구하고, 요리를 하고, 먹고, 설거지를 하고 다음 먹을 준비를 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 음식 준비를 하고, 함께 먹고, 함께 정리하는 것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밥을 먹은 다음의 행동인 설거지는 단순히 그릇을 씻고 헹구는 차원을 넘어선다.
설거지란 부엌이라는 공간을 예쁘게 다듬어 다음번 끼니 준비할 때까지 잘 정리가 된 상태로 만드는 일을 아우르는 말이다.
난 이것을 스무살 무렵까지 몰랐다.
설거지란 그저 밥을 먹고 남은 그릇을 세제를 묻혀 닦은 다음 물로 헹궈놓으면 되는 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지러진 부엌을 뒷정리까지 말끔히 해야 비로소 설거지가 모두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부엌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알기 힘들었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친구에게, 자신 있게, 그릇들을 깨끗하게 닦은 다음 내 설거지가 몇 점이냐고 으스대며 물었던 기억이 있다.
내심 95점 정도는 받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어이 없게도 나는 80점을 받았다.
그것도 후하게 처준 점수라는 것이다.
그릇을 빠닥빠닥하게 잘 닦아놓았는데, 왜 80점밖에 주지 않았냐면서 항의하는 내게, 그 친구는 그릇을 닦기만 하고 뒷정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서 핀잔을 주었다.
살면서 그런 경험은 두고두고 남는 큰 지침이 되기도 한다.
난 아직도 그 친구에게 감사하고 있다.
부엌일이라는 것이 겉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전체적인 것부터 세부적인 것까지 전부 신경을 써야 하는 종합적인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투쟁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다보면 설거지는 정말 끝이 없다.
사람들이 자기가 먹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각자 씻는다고 해도 여전히 남는 그릇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먹은 그릇을 씻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설거지를 해준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삶을 몇 십년 살아왔었다.
남일당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설거지를 하고 마무리까지 하다보면 1시간 정도가 걸린다.
밥을 보통 5시 10분-20분 정도에 먹는다고 하면 6시 10분까지는 계속 그릇을 닦고, 설거지가 끝난 그릇들을 들여놓고, 싱크대도 좀 씻고 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누구나 일이 없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니만큼 나는 바쁘더라도 꼭 시간을 내서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
내가 설거지를 하다 보면 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나보고 그만 하고 들어가라고 재촉하거나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나는 '거의 다 끝났어요' 라고 대답을 한다.
그렇게 대답을 하는 이유는 정말로 설거지가 거의 다 끝났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허리가 아프도록 아직도 백 몇 개의 그릇을 더 씻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거의 다 했어요 라고 말하는 이유는 상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다.
남일당에서 설거지를 몇 번 이상 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설거지거리가 아직도 엄청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 했다니 무슨 소리,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하면서 나보고 자꾸 가라고 하면서 자신이 대신 나서서 하겠다고 말한다.
철거민들이 이런 경우다.
이에 반해 '아, 네. 알았습니다. 그럼 부탁할께요. 잘 먹었습니다' 같은 류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단언컨데 그들 대부분은 선의를 갖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텐데, 대부분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정말 설거지가 거의 끝난 줄 아는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시간이 부족해서 나에게 맡기고 가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따라서 보이는 반응들은 매우 다르다.
그것이 재미 있다.
이런 이야기를 넝쿨과 하면서 설거지를 했다.
넝쿨은 나보고 오지랖이 넓다고 했다.
난 한 번도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운동에 내 일상을 던져넣은 것일뿐, 그 결과로 다양한 사람들을 알게 됐다거나, 여러 소식들을 듣게 된다거나 해서 오지랖이 넓어 보일 뿐 난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일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난 내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중을 한다.
주변 사람들과 어색하거나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은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루두루 별 문제 없게 사람들과 지내기 위해서 행동하다보니 오지랖이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넝쿨은 또 나보고 일중독이라고 했다.
일중독이란, 괴로운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요즘 나의 유일한 탈출구처럼 되어버린 것 같다.
암울한데...
연애를 하게 된다면 어쩌면 일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용산과 연애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오늘은 레아에 좀 일찍 나왔다.
오후에 화성 외국인보호소에 미누의 석방을 위해 노래를 부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레아 앞에서 용산4상공 철대위 위원장님을 만났는데, 심각한 얼굴로, 오늘 현장에 사람이 별로 없는데, 저들이 칠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 레아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거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화성에 가서 노래하고 있는 동안 용산 현장에 다시 침탈이 들어오면 큰일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레아에 남기로 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그대신 스티커를 붙이던 유가족에게 경찰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강제로 스티커를 떼어내고, 붙이지 않은 스티커를 빼앗아가고, 피켓도 하나 빼앗아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또다시 유가족들, 철거민, 신부님들, 활동가들과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
카메라로 이 모습을 기록해두면서 나도 방패를 든 경찰에 밀려서 장안약국 안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중심을 잡아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경찰의 폭력은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
저녁에는 재판 다녀온 사람들과 모여서 맛있는 떡볶이와 튀김을 먹었다.
넝쿨과 노래도 부르고, 발칙한도 놀러오고 해서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레아에는 전진과 윤엽씨의 작품들도 새로 들어와서 분위기가 한결 산뜻해졌다.
용산 현장에는 다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비가 그친 뒤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려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비가 다시 내리니 어서 집에 가야겠다.
용산에서는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참 다사다난한 일이다.
작년까지는 한 해를 넘기면서 다사다난했다고 느꼈는데, 올해 1월 20일 이후에는 하루하루가 참말이지 다사다난하다.
휴~ 오늘 하루도 이렇게 넘기는구나.
다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