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기 첫 번째경계를 넘어 2004/12/06 03:10 2004년 11월 19일 일본으로 출발하는 날이다.
앞으로 6일 동안의 여행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여러 일들을 미리 끝내놓아야 했다.
일들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여행을 떠날 경우 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맘 편히 여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난 그래서 이번 여행 출발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큰 심적 부담감을 느껴야 했다.
처리해야 할 커다란 일들은 4가지였다.
먼저 생계를 위한 번역일을 마무리지어야 했다.
이것이야 매달 하는 것이므로 특별히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미리 끝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얼른 마무리짓지 못하고 계속 미뤄두고 있던 참이었다.
이것을 처리하지 못하니 다른 일들까지 모두 늦어지는 것 같았다.
출발 전날 아침 가까스로 번역을 마무리하고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해버렸다.
그 다음으로 3집 앨범 작업을 완전히 끝내야 했다.
3집 앨범 발매는 사실 2004년이 시작되면서부터 하려던 일이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
사실 노래를 계속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만들어진 노래들도 3집 앨범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3집 발매가 늦어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갈 때 3집 앨범 10장 정도를 들고 가기로 했다.
누가 가져오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가는 김에 일본 아나키스트들에게 내 노래도 소개할 겸, 또 여행경비를 3집 앨범을 팔아 충당할 겸 갖고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앨범 작업을 더이상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녹음을 마친 노래들을 골라서 선곡을 하고, 최종 선곡을 마무리짓고, 앨범에 수록될 곡의 순서를 정하고, 앨범 표지 디자인을 하고, 그것을 복사해 씨디 케이스에 넣고, 앨범 속지를 만들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마스터링을 해서 씨디를 구워내는 작업을 해야 했다.
11월 18일은 거의 이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리고 오랜만에 부모님도 만나뵈어야 했다.
특히 며칠 동안 한국을 비울 예정이었기에 그동안 걱정을 하지 않도록 안심시켜드려야 했다.
이것은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찾아뵈느라 11월 18일 그러니까 출국 전날 시간을 많이 빼앗겨버렸다.
마지막으로 '평화가 무엇이냐' 녹음도 마무리지어서 mp3 파일로 만들어야했다.
내가 객원단원으로 참여한 평화유랑단 평화바람이 유랑 1주년을 맞이해 잔치를 열고 기념 음반을 내놓는데, 문정현 신부의 말에 곡을 붙인 평화가 무엇이냐가 반드시 수록되어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는데, 결국 나는 이 곡의 녹음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떠나는 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3시간에 걸쳐 이 곡의 작업을 했다.
물론 그 전부터 몇 달동안 만들어놓은 것들이 있긴 했지만 하나의 완성된 곡으로 매끈하게 합칠 수가 없었다.
결국 한 30% 정도만 완성된 채로 공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쿠스틱 버전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전기기타가 없어도 괜찮다고 최면을 걸었다.
다만 통기타에 와와 페달을 밟은 이펙트를 걸어서 분위기가 조금은 몽롱하게 나온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일본행 비행기는 오후 2시 출발 예정이어서 나는 정오까지 인천공항에 도착해 사람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오전 6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커피를 끓여 마시고, 컴퓨터를 켜서 각종 광고글들을 지운 다음 음악 작업을 하다가 후다닥 짐을 챙겨서 공항버스를 탔더니 약속시간보다 약 15분 정도 늦게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권과 비행기표가 있으니 이젠 집에 놓고 온 것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11월 초에 며칠간 그야말로 인터넷을 이잡듯이 뒤지다시피 해서 인천과 나리타 공항 왕복 25만원짜리 초저가 비행기표를 구했고, 일본에 나와 동행한 사람들도 이 표를 함께 구입했다.
보통 할인항공권보다 거의 10만원 가깝게 싼 티켓이였는데, 그만큼 제약도 많았다.
특히 출발일과 돌아오는 날짜가 고정되어 있어서 행여 일본에서 마음이 바뀌어서 더 머물고 싶은 사태가 생겨도 표를 취소하고 날짜를 변경할 수가 없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출국세니 관광진흥기금이니 공항사용료니 보험료니 하면서 세금으로 무려 6만원을 더 내고(비행기표 살 때 이미 함께 냈음) 우리들은 동경행 비행기에 올랐다.
난 기타를 들고 있었는데, 날 위해 항공사측에서는 특별히 자리를 2개 주었다. 기타를 사람 한 명으로 취급한 것이다.
고급 악기를 들고 해외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2장의 표를 산다고 한다.
그래야 자기 옆자리에 두고 극진하게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내 옆자리에 기타를 두고 안전벨트를 단단하게 매니 아무리 비행기가 흔들려도 기타에 충격이 가지 않았다.
다만 2자리를 얻다보니 빈 자리가 비행기의 제일 뒷부분밖에 없어서 나는 비행기의 제일 뒷부분에 앉게 되었다.
그런데 약간 멀미를 하는 경향이 있는 나에게 제일 뒷자리는 쥐약과도 같았다.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제일 뒷자리에서는 거의 비행기가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채식 식사로 나온 과일과 야채 샐러드 그리고 빵과 오렌지 쥬스를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대충 먹느니 마느니 하고서는 나는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속은 울렁거리고 있었는데, 처음 일본에 간다는 흥분에 다행히 멀미를 하는 일은 없었다.
출발할 때 한국의 날씨는 쾌청한 가을날씨였는데, 도착한 일본에서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나와 버스로 출입국 심사대로 이동할 때 비로소 타국에 왔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낯선 풍경과 낯선 글자와 낯선 냄새와 낯선 분위기.
나의 감각기관과 대뇌는 이 새로운 정보들을 파악하고 받아들이고 배치하고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입국 심사대.
동경에서 어디에 머무를 지 나는 정확한 주소를 알지 못했다.
아나키스트 친구가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는 것밖에는.
이것 때문에 일본 관리는 나를 쉽게 입국시켜주지 않았다.
이라크 인 살람과 하이셈이 한국에 입국할 때 비슷한 이유로 2시간 동안 묶여 있었다고 했는데,
나도 그랬다.
이들 입국 심사 관리들은 괜히 이것저것 질문들을 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친구의 이름을 대라
친구의 전화번호를 대라
친구의 집전화 말고 핸드폰 번호를 대라
이런 식이었다.
다행히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는데, 이번에는 수하물 검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가난한 아나키 채식주의자의 짐 검사 따위는 할 필요가 있을까?
가방이라고 해봤자 각종 옷가지에 서적에 씨디에 깃발에 채식주의 라면 같은 것들밖에 들어있지 않은데 말이다.
골프채와 비싼 양주와 금딱지 시계와 명품 핸드백 같은 것들을 한가득 들고가는 사람들은 그냥 보내주고 나같은 거지를 잡아서 짐을 하나하나 열어보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겠다.
너무 지친 나는 그냥 순응하고 가방을 열어보였다.
이렇게 1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공항 검색대를 완전히 빠져나와 동경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우리들은 천엔짜리 지하철을 타고 우에노 역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아나키스트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가운 친구.
어질어질 정신은 멍하고 나는 당장에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익숙한 것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어서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이탈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었다.
전체로부터 떨어져나온 한 조각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리는 영상들이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전자상가 같은 곳,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들을 멀리 하고 나는 아나키스트 친구의 꽁무니만을 졸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숙소에 도착한 것이다.
내일 일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아무런 계획 없이 그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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