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목 베어도 고사 지내는데, 5000년 된 바위를...."

평화가 무엇이냐 2011/09/28 15:38

2011년 9월 26일 오마이뉴스 기사입니다.

 

[[오마이뉴스 육성철 기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최고 조사관으로 손꼽히던 강모 직원의 '계약해지'에 항의해, 인권위 직원 80여 명이 1인 시위, 언론 기고, 자유게시판 게시, 탄원서 제출 등을 진행했다. 인권위는 이 중 11명에 대해 9월 2일 자로 정직 및 감봉 1~3개월 등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앞장서 보호해야 할 인권위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징계자들은 공무원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 는 '정직' 처분을 받은 직원의 '정직한 일기'를 싣는다. < 편집자말 >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제주도와 바다.
 
ⓒ 육성철
 
 

제주 성산 일출봉에서 광치기 해변은 지척이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일출에 환호하는 사이 어둠이 사라져 가는 광치기 모래밭을 보았다. 제주의 어느 마을에서나 접할 수 있는 1948년 4·3항쟁의 상처를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상대적으로 희생자 수가 적었다는 성산읍이지만 위령비에 새겨진 이름만 11개리 435명에 달했다. 무려 3만여 명이 몰살된 비극 속에서 400여 명의 죽음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채 잊히고 있다.

육지에서 몰려온 미군정과 군경들이 제주도민을 찌르고 쏘았다. 난데없는 살육의 지옥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을 잃은 강중훈 시인은 광치기 해변에 < 섬의 우수 > 란 시구로 고통스런 기억을 묻었다.

머 릿수건을 두르고 당근 밭으로 향하는 일군의 노인들에게 60여 년 전의 참상을 물었다. "육지에서 왔수까?"라고 한마디 던졌을 뿐, 모두들 고개를 저은 채 답을 주지 않았다. 섬사람들의 육지에 대한 불신은 역사적 비극이 잉태한 후유증인 듯했다.

제주 올레 3코스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숨을 고른다.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는 것으로 모자라 제주의 영혼을 찾고자 했던 사진작가 김영갑은 지난 2005년 향년 49세로 이곳에서 별세했다. 그는 원시적 풍경 속에 이어도의 꿈이 있을 것으로 믿으며 중산간의 오름과 해녀들의 삶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가 떠난 지금 제주인들의 꿈은 이미 바다를 건너 다시 돌아오기 힘든 땅에 이르렀다. 방목장으로 쓰이던 초원은 골프장으로 변했고, 짐승들이 뛰놀던 들판에 펜션과 별장이 가득하다.

두모악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용눈이 오름, 바람에 실려 보낸 이야기들'을 감상했다. 김영갑은 살아 숨 쉬는 초원을 찍기 위해 몇날 며칠을 굶고서라도 오름 앞을 지켰다. 그런 치열한 노력이 있었기에 당장 눈앞에서 노루 새끼기 튀어나올 것 같은 살아있는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김영갑이 떠나기 직전 촬영한 영상자료를 보며 목숨을 걸고 작업하는 예술가의 투혼을 느꼈다. 영상실에서 그의 유언이나 다름없는 문구를 읽고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되니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철조망에 갇힌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 육성철
 
 

사흘 을 걸어 강정마을로 왔다. 태풍으로 유실된 해변을 에둘러 강정에 이르자 가장 먼저 넝쿨 철조망이 보였다. 철조망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마지막 지점까지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치고 올라오는 파도는 철조망 안팎을 가리지 않고 계속 때렸다. 두 명의 군인이 경계근무를 서는 곳에서 제주지방법원이 고시한 공사방해금지가처분 결정문을 읽었다. 무미건조한 문장의 결론은 '해군기지 공사를 진행할 테니 근처에 접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공 사장 입구에서 문정현 신부가 미사를 진행했다. 미사 참석자는 20여 명, 그 곁을 지키는 경찰버스는 두 대였다. 문 신부는 공권력과 토착민이 맞붙는 현장에서 줄곧 평화를 외치며 살아왔다. 그가 평택 대추리, 용산 남일당, 제주 강정마을을 찾아다니며 날마다 미사를 연 이유다. 문 신부는 미사 말미에 신자들과 함께 "강정의 평화"를 세 차례 외쳤다. 그의 흰 수염은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에 한 번 날리고, 공사장을 드나드는 덤프트럭 먼지바람에 또 다시 날렸다.

미사가 끝난 뒤 한 여성이 공사장 앞에 피켓을 들고 앉았다. 얼핏 보기에 1인 시위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곧이어 경찰이 다가와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길 건너에서 지켜보던 문정현 신부가 "헌법이 보장하는 1인 시위를 왜 막느냐?"며 호통을 치자 경찰은 뒷걸음쳤다. 그 여성은 서울에서 트위터를 보고 아침 비행기로 내려왔다고 했다. 강정마을의 참상을 눈 뜨고 볼 수 없어 나흘간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강정마을에서는 매일 밤 8시 촛불문화제가 열린다. 서울 홍대 앞 두리반 식당을 지키기 위해 장기농성을 벌였던 가수 조약골씨가 강정마을의 평화를 노래했다. 조약골씨처럼 사회적 약자들의 농성 현장만 줄기차게 찾아다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평화'를 소망한다는 점에서 문정현 신부와 통한다. 그는 문 신부가 대추리 싸움 때 했던 연설에 곡을 붙여 < 평화가 무엇이냐 > 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문정현 신부가 강정마을에서 평화를 위한 미사를 하고 있다.
 
ⓒ 육성철
 
 

'배고픔이 없는 세상, 서러움이 없는 세상, 쫓겨나지 않는 세상, 군림하지 않는 세상, 빼앗긴 자 힘없는 자 마주보고 손을 잡자. 새 세상이 다가 온다. 노래하며 춤을 추자.'

촛 불이 춤추는 강정 네거리에서 문정현 신부는 평화를 기원했다. 그는 "고목나무 한 그루 베어내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고사를 지내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했다. "하물며 5000년 세월을 버텨온 구럼비 바위를 송두리째 걷어내는 마당에 어찌 재앙이 없겠느냐?"고 경고했다. 그는 노래를 청하는 강정마을 주민들 앞에서 < 방랑시인 김삿갓 > 을 부르고, 앵콜곡으로 민중가요 < 1노2김가 > 개사곡을 불렀다.

일출봉에서 솟은 해가 강정마을 해변을 비추었다. 새벽부터 굴착기는 구럼비 바위의 모난 돌들을 사정없이 쪼고 있었다. 공사장에서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됐다는 보도까지 나왔지만 중장비 엔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농성자들은 늦잠을 자고 이따금씩 올레길 관광객들만 오가는 골목에서 경찰은 앞뒤 출입구를 막고 2~3인씩 교대로 밤새 보초를 섰다. 멀리 한라산 백록담 위로 흰 구름이 맴돌다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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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8 15:38 2011/09/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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