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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일기 : 류미례편 ⑤] 출산과 육아, 함께 걸어야 할 아름다운 길 | ||||||
새벽에 문득 눈을 뜨면 아이들을 먼저 살피게 된다.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자고 있는 내 아기들이 혹시 오줌은 싸지 않았나, 이불을 걷어차서 배앓이를 하지는 않을까 살피는 것이다. 새근새근 강아지처럼 뒹굴거리며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노라면 뿌듯하다. 삶의 한 굽이를 넘어섰다는 느낌. 계획 없이 정신 없이 달려온 길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은 갔고 내 옆에는 사랑스러운 못난이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연재를 시작했을 때, 나는 두려웠다. 선의가 어떻게 오해로 귀착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아기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나의 기쁨, 슬픔, 아쉬움들이 결국 ‘고난을 무릅쓰더라도 아이 낳는 건 좋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질까 봐 겁이 났다. 저출산이 화제가 되고 수많은 보육정책들이 쏟아지지만 출산과 육아는 여전히 가정, 그 중에서도 여성의 책임으로만 남겨져 있다. 애 낳았다고 일 줄이는 아빠는 없지만 애 낳고서 일 그만두는 엄마는 주변에 널려있다. 저출산을 걱정하며 ‘셋째 낳으면 500만 원’ 운운하는 출산장려정책을 보다보면 기가 막힌다.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분명히 애가 없거나, 아기를 맡길 데가 있었거나, 아니면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에 만족하는 아내를 둔 사람일 거다. 어쩌면 저렇게 문제의 본질을 피해갈 수가 있담? 셋째 낳으면 500만원? 기가 막히는 출산정책 출산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권리이다.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운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사회적으로는 출산을 장려하는 듯 하지만 조금만 더 속내를 들여다보라. ‘일 좀 가르쳐놓으면 결혼, 출산, 육아 때문에 일을 그만 둔다’며 고용을 꺼리는 대상이 남성인 경우도 있었나? 아기 엄마에 대한 무시와 냉대는 또 얼마나 대단한지. 아이를 데리고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이 도시의 속도를 못 따라가는 아기엄마는 버스 운전사의 불평 대상이 된다. 비가 오거나 짐이 많아서 택시라도 탈라치면 빈 택시들은 쌩쌩 잘도 지나간다. 모처럼의 외식으로 밥을 먹을 때, 칭얼거리는 내 아기를 보며 옆자리 아주머니가 내뱉던 말, “우리 때엔 다른 사람 피해줄까 봐 외출도 안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단해!” 영화도, 연극도, 아기엄마에겐 다 사치다. 심지어 나는 내 영화가 초청되었던 국제영화제에서도 입장을 차단당했다. 나는 그 때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5세 이하의 아기는 입장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먹이며 입장불가를 외치던 출입구 직원에게 나는 ‘다른 관람객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아기엄마로서의 주장만을 했던 것이 아니라 같잖게도 ID카드를 내보이며 ‘나는 초청받은 게스트다’라는 말까지 했었다. 결국 자원봉사자를 대동하고 어렵게 입장하는 순간, 나는 내 아기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것을 느꼈다. 자원봉사자는 아기를 대신 돌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내 아기가 떠들면(?) 우리들을 내쫓기 위해, 즉 우리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함께 했던 것이다. 곳곳에서 무시받고 냉대받는 수많은 아기 엄마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발걸음을 돌려 극장 밖으로 나왔다. 극장 문을 나섰을 때 햇살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나는 그 빛 가운데 서서 그냥 울었다. 게스트임을 주장했던 내 같잖은 자존심이 초라해서, 그리고… 무시 받고 냉대 받는 이 땅의 수많은 아기 엄마들 생각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신들에게 우리들은 상식도 없는 인간이다. 당신들은 우리들을 뻔뻔스럽고 자기 잇속밖에 차리지 않는 인간들로 규정한다. 내 등에 아기가 업혀있는 순간, 당신들은 내가 다른 관객들을 고려하지 않을 뻔뻔한 아줌마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한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있으라니까 애 데리고 어디를 가냐?”
일을 하다가 출산과 함께 전업주부가 되었고 조카들을 다 키운 후에 다시 일을 시작한 언니들은 말한다. 물론 출산 후의 일은 출산 전에 했던 일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말하자면 커리어가 절대 보장되지 않는 그런 일들이다. “애를 키우는 동안 ‘나는 없다’, ‘나는 없다’라고 생각해야 해!” 경험 속에서 얻은 현명한 결론이겠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내가, 한창 나이에 삶의 이력을 쌓고 싶은 내가, 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며 살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없다고 생각하며 살 수가 있냔 말이다. 좀더 실질적인 문제로 들어가 볼까? 우리 남편의 월 평균 수입은 118만 원 정도 된다. 내가 일하는 푸른영상의 활동비는 월 50만 원이다. 2005년에 50만 원을 다 받은 달은 두 번 뿐이기는 하지만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은 절약하며 사는 일에 익숙하다. 하은과 한별의 한 달 보육료는 54만8000원이다. 매월 1일, 남편의 월급이 통장에 입금되면 나는 얼른 보육료를 낸다. 곧이어 전달 썼던 카드대금이 결제되고 나면 그 달치 쓸 수 있는 돈이 가늠된다. 아끼고 아껴서 한 달을 보내지만 월말에는 거의 돈이 없다. 그러면 또 카드를 쓰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촬영이나 편집, 글쓰기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요즘은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 언니들에게 돈을 빌리기도 한다. 엄마는 한 달치 보육료도 못 버는 일은 당장 때려치우라고, 애 키우는 일이 돈 버는 일이라고 타이르지만 나는, 돈벌이는 안되는 일이지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쁨을 얻을 수 있어서 내 일이 좋다. 보육료 때문에 정말 화가 났던 것은 보육료가 한 달 수입의 절반이 넘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이상한 보육정책 때문이다. 작년부터 여성부는 아동별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인건비 등 보육시설에 지원하는 비용을 축소하였다. 쉽게 말하면 하은, 한별이 다니는 씩씩이 어린이집에 주었던 지원금을 줄이는 대신 우리 집에 지원금을 주는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우리 살림살이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서류를 발급받고, 또 작성하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보육료 감면을 신청했다. 꼬박 두 달을 기다린 끝에 결과를 통보받았는데 2층이 될 거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다르게 우리는 4층이 되었다. 4층은 월 평균 수입이 170만 원~204만 원사이의 가구로 보육료의 30% 정도를 감면받을 수 있다. 공무원 당신들이 우리 집 살림살이를 알아? 어찌된 일인가를 담당 공무원에게 물었더니 내가 수입이 있는데도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모 대학에서의 수입을 예로 들었는데 그 대학에서는 내 영화를 2년 동안 두 번 틀었다. 1년에 한 번 영화상영과 대화를 하고 나서 받았던 5만 원의 수입,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모든 일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야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 하더라도, 작년에 내가 했던 일들을 올해 다시 할 확률이 0%인데도 그렇게 수입을 산출했어야 했다. 졸지에 나는 탈세자가 되고 말았다. 그 모멸감이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우리들의 서류를 심사하는 두 달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내 사정이 어떤지, 우리 집 살림살이가 어떤지 아마 그들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나는 그저 감면 받으려고 수입을 숨긴 엉큼한 욕심쟁이였겠지. 보육료를 감면받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면서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엄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노동의 유연화 전략 속에서 소사장제의 사업주가 되어있는 아빠 때문에, 빚이 산더미인데도 자기 소유의 집이 있기 때문에 등등 실제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그 상황을 수치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감면혜택을 받지 못하는 집들이 수도 없이 널려있었다. 화는 이럴 때 난다. 관료적인 국가기관한테 대들고 싶었다. 당신들이 우리 집 살림살이를 알아? 국·공립 보육시설을 확대하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네들은 당신네들 편한 정책을 만들어내면서 우리들을 쥐고 흔든다. 물론 나는 30%의 감면혜택, 그것마저도 못 받게 될까봐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30%가 어디냐고 고마워하며.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아기 엄마로 산다는 건 말이다, 수도 없는 이런 종류의 모멸감을 감수하게 만든다. 그렇게 세상과 타협한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절대로 나의 동료들에게 아기 낳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절대로 권장하고 싶지 않다.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은 고귀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세상은 절대로 그렇게 대접하지 않는다. 아기를 등에 업는 순간 나의 사회적 지위는 추락했다. 경제적 지위야 원체 없는 살림이라 더 추락할 데도 없었지만 아기와 함께 하는 기쁨 대신 가끔 누리던 휴식의 즐거움을 포기해야했다. 아이와 함께 하는 길, 국가가 먼저 그 길에 서길…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통쾌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아기를 낳지 않고 있는 내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파업은 최후의 선택이다. 출산과 육아에 따르는 책임을 여성에게만 맡겨두었던 당신들에게 나의 동료들은 육아의 기쁨을 포기하면서까지 파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당한 세상에 눈을 감은 채 내 아기들과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나는, 그래서 미안하다. 한편으로는 아기를 낳지 않는 여성들을 이기적이라고 욕하는 누리꾼들의 글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난다. 나는 오히려 내가 이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들 같은 개인을 들먹이며 말을 하겠지. ‘보라고. 저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고. 이 부당한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작동된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해왔다. 그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넓어졌던 과정이었고 만인의 평등을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해왔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유지되는 체제는 언젠가는 종말을 고한다.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만 유지되는 이 재생산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 아이는 희망이며 미래를 위한 인류의 자산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보육은 당연히 국가의 책임이어야 한다. 그 인식이 변하지 않을 때 출산의 권리를 포기하는 여성들은 늘어날 것이고 이 사회의 재생산구조는 위태로워질 것이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일, 참 행복하다. 하지만 그건 임신과 출산을 겪어낸 내게 내 몫으로 주어진 행복일 뿐이다. 거기에만 묻어가려는 국가정책은 실패할 것이다. 여성이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고 키울 수 있는 세상, 자기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한 저출산 문제는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아기와 함께 하는 길, 그 길은 아름답다. 함께 가고 싶다. 내 동료들과 함께 갈 수 있도록 국가가 먼저 그 길에 함께 서기를 바란다. | ||||||
게시일 2006-02-22 13:40:0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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